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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 위기의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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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7년 외환 위기는 1997년 대한민국 경제가 겪은 심각한 금융 위기로, 기업들의 연쇄 부도와 외국 자본의 급격한 이탈로 인해 발생했다. 태국 바트화 폭락 등 동아시아 금융 위기의 영향과 한보철강 부도를 시작으로 한보, 삼미, 기아 등 대기업들의 잇따른 부실, 외환 시장 불안으로 이어졌다. 결국 대한민국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IMF 관리 체제 하에서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었다. 2001년 8월, 대한민국은 IMF 구제금융을 조기 상환하고 관리 체제에서 벗어났다.

2. 1997년 외환 위기 발생 배경

2. 1. 1997년 외환 위기 직전 한국 경제 상황

2. 2. 동아시아 금융 위기 발발과 한국에 미친 영향

3. 1997년 외환 위기 전개 과정

3. 1. 기업들의 연쇄 부도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현 현대제철)의 부도 처리 확정을 시작으로, 같은 해 3월 20일에는 삼미그룹이 부도를 맞았다. 4월 18일에는 진로그룹이 부도유예협약을 맺었으나, 4일 뒤인 4월 22일 최종 부도 처리되었다. 7월 15일에는 기아그룹이 협조융자를 신청하며 사실상 부도 상태에 들어갔고,, 청와대는 확대경제장관 회의를 소집했다. 10월 22일, 기아자동차는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후에도 기업들의 연쇄 부도는 계속되어, 10월 15일에는 쌍방울그룹이, 11월 1일에는 해태그룹이 부도를 맞았으며, 11월 4일에는 뉴코아그룹이 부도를 냈다. 12월 6일에는 한라그룹마저 부도를 면치 못했다. 이러한 기업들의 연쇄 부도는 금융 시장에 큰 충격을 주었고, 외환 위기를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97년 12월 7일, 대우자동차(현 한국GM, 자일대우버스, 타타대우)는 쌍용자동차 인수를 최종 확정지었다.

3. 2. 금융 시장 불안 심화

1997년, 대한민국은 한보철강 부도를 시작으로 여러 기업들이 연쇄 부도를 맞으며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3월에는 삼미그룹이 부도 처리되었고, 4월에는 진로그룹이 부도를 맞았다. 7월에는 기아그룹이 협조융자를 신청하며 사실상 부도 상태에 놓였다.

이러한 기업들의 연쇄 부도는 금융 시장에 큰 충격을 주었다. 주가는 폭락하고 환율은 급등했으며, 금리는 치솟았다. 9월 29일에는 외환시장이 개장 40분 만에 대미달러 환율이 일일 변동폭 상한선까지 상승하여 사실상 거래가 중단되기도 했다. 10월에는 쌍방울그룹이 부도 처리되었고, 홍콩 증시가 폭락하면서 한국 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10월 24일, 미국 S&P사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장기 AA-에서 A+로, 단기 A1+에서 A1으로 하향 조정했다. 10월 27일에는 미국 무디스사 역시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장기 A1에서 A2로, 단기 P1에서 P2로 하향 조정했다. 10월 28일, 미국 다우존스 지수가 하루 만에 7.2% 하락하고, 주가지수가 500선 아래로 붕괴되자,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는 한국은행에 외환시장 개입 중단을 지시했다.

11월에도 위기는 계속되었다. 해태그룹뉴코아가 부도를 맞았고, 11월 10일에는 원/달러 환율이 사상 처음으로 1,000원을 돌파했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금융 시장 안정을 위해 여러 대책을 발표했다. 8월 25일에는 '금융시장 안정 및 대외신인도 제고 대책'을 발표했고, 8월 30일에는 증시 안정 대책을 발표했다. 10월 29일에는 연기금 3조 원 규모의 주식 매입, 채권시장 개방 확대, 기업 구조조정 등의 내용을 담은 금융시장 안정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금융 시장의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11월 21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했다.

3. 3. IMF 구제금융 요청

1997년 11월, 김영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했다. 이는 한보, 삼미, 진로, 기아, 쌍방울, 해태, 뉴코아 등 대기업들의 연쇄 부도와 태국화 폭락, 인도네시아루피아화 폭락, 홍콩 증시 폭락, 일본 야마이치증권 파산 등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이 심화되면서 외환보유고가 급감한 데 따른 조치였다.

11월 9일 정부는 종금사 달러 지원을 검토했고, 11월 10일 원/달러 환율은 사상 처음으로 1,000원을 돌파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11월 14일 IMF행을 결심했고, 강경식 당시 부총리는 미국 등 우방으로부터 자금을 빌리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IMF행을 보고했다. 11월 16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극비 방한했고, 11월 17일 프랑스 경제 전문지 레 제코는 IMF가 한국에 400-600억 달러 긴급지원을 검토한다고 보도했지만 재정경제원은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했다.

11월 18일 한국은행은 정부에 IMF 구제금융 요청을 촉구했고, 연합뉴스는 김수석 경제수석이 현 단계에서 IMF 자금지원 요청 계획이 없다고 발표했다. 11월 19일 강경식 부총리와 김인호 수석이 경질되고 임창렬 재경부 장관이 신임 부총리로 임명되어 금융시장 안정 및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11월 21일, 김영삼 대통령은 박태준 자유민주연합 총재,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조순 총재와 회담을 가졌고,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했다. 11월 22일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 발표했다.

11월 23일 재정경제원은 IMF 협의단을 편성하고, IMF의 실무협의단 1진이 김포국제공항으로 입국했다. 11월 25일 IMF 실사단이 공식활동을 개시하고, 국무회의에서 예금자 보호법 등 4개 법안 새행령 개정안을 채결했다. 11월 26일 IMF 휴버트 나이스 대표단이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했다. 11월 28일 임창렬 부총리는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일본을 방문하여 미쓰즈카 대장상과 원조회담을 가졌으나 "IMF로 가지 않으면 지원은 없다"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11월 29일 IMF는 캉드쉬 총재에게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5가의 힐튼호텔에서 IMF 구제금융을 발표하고 기자회견 간담회를 가졌다.

12월 3일, 임창렬 재경부장관과 캉드쉬 IMF 총재는 정부중앙청사에서 공식적인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하고 대기성 차관 제공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12월 4일, IMF 이사회는 총 210억 달러의 대기성차관협약을 승인했다. 이후 12월 6일 한라그룹이 부도났고, IMF 1차 지원금 56억 달러가 제공되었다. 12월 24일, 정부는 IMF 구제금융 협상에 대한 신청을 발표했다.[1] 12월 25일, IMF 및 주요 선진국은 100억 달러 조기지원을 약속했다. 12월 30일, IMF는 20억 달러를 조기 지원했다.

4. IMF 구제금융 체제 (1997년 12월 ~ 2001년 8월)

1997년 12월 3일, 대한민국 정부와 IMF 간의 구제금융 협상이 타결되면서 IMF 구제금융 체제가 시작되었다. 이 체제는 2001년 8월 23일, 대한민국이 IMF로부터 지원받은 구제금융 195억 달러를 전액 상환하면서 종료되었다.

IMF 구제금융 체제하에서 대한민국 경제는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어야 했다. 1998년 1월 8일, IMF는 한국 정부의 3차 의향서를 승인하고 20억 달러 인출을 승인했다. 같은 해 1월 11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재계 4대 그룹 총수와 만나 재벌개혁 5개항에 합의했다. 1월 12일에는 미쉘 캉드쉬 IMF 총재가 극비리에 방한하여 청와대에서 접견 내용을 발표했다.

1998년 1월 30일, 재정경제원은 한화, 쌍용 등을 포함한 10개 종금사를 1차 폐쇄 대상 명단으로 발표했고, 감사원은 외환위기 특별감사에 착수했다. 2월 17일에는 10개 종금사의 인가가 취소되어 첫 금융기관 퇴출이 이루어졌고, 미국 S&P는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B+에서 BB+로 3단계 상향 조정했다. IMF도 한국 정부의 4차 의향서를 승인하고 20억 달러 인출을 승인했다.

1998년 3월 12일, 단기 외채 218억 달러의 만기가 연장되었고, 3월 23일에는 IMF 서울사무소가 설치되었다. 4월 1일에는 금융감독위원회가 공식 출범했으며, 4월 9일에는 40억 달러 규모의 외평채 발행에 성공했다.

1998년 5월 2일, IMF는 6차 의향서에 합의하며 금리 정책에 대한 신축성을 확보했다. 6월 18일에는 금감위가 퇴출 대상 55개 기업을 발표했고, 6월 29일에는 동화, 동남, 대동, 경기, 충청 등 5개 시중은행의 폐쇄를 발표했다.

1998년 7월 24일, IMF는 7차 의향서에 합의하며 재정적자를 GDP의 4%로 확대했다. 12월 7일에는 정부와 재계가 5대 재벌 구조조정안에 합의했고, 12월 18일에는 IMF 자금 18억 달러를 처음으로 상환했다.

1999년 1월 19일, 영국 피치는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 조정했고, 1월 25일에는 S&P도 한국 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 조정했다. 2월 12일에는 미국 무디스도 한국 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 조정했다.

1999년 7월 1일, 정부는 긴급자원지급 40억 달러를 조기 상환하기로 IMF와 합의했다. 9월 18일에는 보완준비금융 135억 달러를 9개월 앞당겨 조기 상환 완료했다.

2000년 12월 3일, 대기성차관협약 및 프로그램이 종료되었고, 2000년 12월 4일,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의 모든 차관을 상환하였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발표했다.[3] 2001년 8월 23일, 대한민국 정부는 IMF 구제금융 195억 달러를 전액 상환하며 IMF 관리 체제를 공식적으로 종료했다.

4. 1. IMF 구제금융 협상과 합의

4. 2. IMF 프로그램 이행과 경제 구조조정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대한민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 프로그램을 이행하면서 금융, 기업, 노동, 공공 부문 등 경제 전반에 걸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1998년 1월 3일, 정부는 기업구조조정 5대 원칙을 천명했고, 1월 5일에는 노사정위원회가 발족되었다. 1월 8일 IMF는 한국 정부의 3차 의향서를 승인하고 20억 달러 인출을 승인했으며, 1월 11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재계 4대 그룹 총수와 만나 재벌개혁 5개 항에 합의했다.

1998년 2월 6일 노사정 공동협약이 체결되었고, 2월 17일에는 10개 종금사 인가 취소를 통해 첫 금융기관 퇴출이 이루어졌다. 2월 19일에는 BIS 8% 미달 12개 은행에 대한 경영 개선 조치가 이루어졌다.

1998년 3월 23일 IMF 서울사무소가 설치되었고, 4월 1일에는 금융감독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1998년 6월 18일, 금감위는 퇴출 대상 55개 기업을 발표했고, 6월 29일에는 동화, 동남, 대동, 경기, 충청 등 5개 시중은행의 폐쇄가 발표되었다.

1998년 7월 1일, 공기업 1차 민영화 방안이 발표되었고, 7월 24일 IMF 7차 의향서 합의에서는 재정적자를 GDP의 4%로 확대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8월 12일 금감위는 20개 보험회사에 대해 경영 개선 조치를 내렸고, 8월 17일에는 공기업 2차 민영화 방안이 발표되었다.

1998년 9월 7일 재계는 사업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했고, 9월 10일 하나은행보람은행의 합병이 발표되었다. 9월 11일에는 국민은행과 장기신용은행, 강원은행조흥은행, 현대종합금융의 합병이 각각 발표되었다.

1998년 10월 7일 기아자동차는 현대에 낙찰되었고, 10월 19일에는 5대 재벌 계열 사업 구조조정 방안이 발표되었다. 10월 28일에는 은행권에서 117개 기업을 워크아웃 대상으로 선정했다.

1998년 12월 7일, 정부와 재계는 5대 재벌 구조조정안에 합의했고, 12월 18일 IMF 자금 18억 달러를 처음으로 상환했다. 1999년 1월 1일 제일은행은 뉴브리지 캐피탈에 지분 51%를 매각하기로 합의했다.

1999년 3월 21일, 금융감독원은 퇴출 및 여신 중단 대상 80개 기업 중 25개 사를 정리했다. 4월 14일, 김대중 대통령은 "구조조정 약속 안 지키면 5대 그룹도 워크아웃"이라고 경고했다. 4월 19일 대우그룹대우중공업 조선 부문(현 대우조선해양) 매각 등을 포함한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1999년 6월 30일 삼성자동차 (현 르노삼성자동차)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삼성자동차·대우전자 (현 동부대우전자) 빅딜이 무산되었다. 7월 1일 정부는 긴급자원지급 40억 달러를 조기 상환하기로 IMF와 합의했고, 7월 19일 대우그룹의 12개 계열사에 대한 워크아웃이 공식 신청되었다.

1999년 8월 26일, 대우그룹의 유동성 문제 해결과 구조조정 추진을 위해 (주)대우 등 12개 계열사가 워크아웃(기업개선 작업)에 돌입했다. 9월 18일에는 보완준비금융 135억 달러를 9개월 앞당겨 조기 상환 완료했다.

2000년 2월 12일, 기아자동차의 법정관리 및 화의 신청이 종결되었다. 4월 23일에는 투자신탁 회사 구조조정을 위해 공적자금이 투입되었다.

2000년 9월 12일, 정부는 공적자금 40조 원 추가 조성 결정을 내렸다. 11월 3일에는 2차로 29개 퇴출 대상 기업이 발표되었고, 11월 8일 대우자동차가 최종 부도 처리되었다. 12월 3일 대기성차관협약 및 프로그램이 종료되었으며, 12월 4일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의 모든 차관을 상환하였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발표했다.[3]

4. 3. 사회적 영향과 위기 극복 노력

4. 4. IMF 관리 체제 조기 졸업

2001년 1월 8일, 대한민국 정부는 대기성 차관의 조기 상환을 시작했다. 8월 10일에는 국제 통화 기금(IMF)에 대한 조기 상환을 진행했다. 8월 22일, 김대중 대통령은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을 방문했다.

2001년 8월 23일, 대한민국은 IMF 구제금융 195억 달러를 전액 상환함으로써 IMF 관리 체제에서 조기에 벗어났다. 이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대한민국 경제의 회복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5. IMF 외환 위기의 영향과 교훈

5. 1. 경제적 영향

5. 2. 사회적 영향

5. 3. 정치적 영향

5. 4. 교훈과 과제

6. 관련 인물

6. 1. 국내 인물

6. 2. 국외 인물

참조

[1] 웹인용 에어 뉴질랜드 한국(韓國) 취항 중단 https://news.v.daum.[...] 1997-12-24
[2] 웹인용 호주(濠洲) 콴타스항공, 서울취항 중단 https://news.v.daum.[...] 1998-01-03
[3] 뉴스 IMF에 우리도 기금 지원한다 http://n.ccdailynews[...] 충청일보 2012-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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