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오를레앙 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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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톨릭 오를레앙 교구는 프랑스에 위치한 로마 가톨릭 교구이다. 현재 교구는 오를레앙 지역을 관할하며, 과거에는 상스 대교구, 오세르 교구, 부르주 대교구에 속했던 지역을 포함한다. 오를레앙은 344년경 디클로피투스가 초대 주교가 된 이후, 성인들을 배출하며 프랑스 가톨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을 구원한 사건은 지역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매년 기념 행사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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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오를레앙 교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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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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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명칭 | Dioecesis Aurelianensis |
지역 명칭 | Diocèse d'Orléans |
국가 | 프랑스 |
관할 구역 | 루아레 |
관구 | 투르 |
관할 대교구 | 투르 대교구 |
면적 | 6,811 km2 |
인구 (2021년) | 678,845명 |
가톨릭 신자 수 | 447,840명 |
가톨릭 신자 비율 | 66% |
본당 수 | 278개 |
설립 | 1세기 |
주교좌 성당 | 오를레앙 성 십자가 대성당 |
주보 성인 | 성 아니아노 |
교구장 | 자크 블라카르 |
관구 대주교 | 뱅상 조르디 |
은퇴 주교 | 앙드레 루이 포르 명예 주교 (2003-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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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웹사이트 | catholique-orleans.cef.fr |
사목 | |
사제 수 | 76명 (교구 사제) 28명 (수도회 사제) 30명 (종신 부제) |
2. 교구 관할 구역
(내용 없음)
2. 1. 역사적 관할 구역 변화
현재 오를레앙 교구의 관할 구역은 과거 구체제 시기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과거 오를레앙 교구에 속했던 로모랑탱 구역은 블루아 교구로 이관되었고, 잔빌 주는 샤르트르 교구로 편입되었다. 반면, 현재 오를레앙 교구는 과거 상스 대교구 소속이었던 몽타르지 구역, 한때 부르고뉴 지방 오세르 교구에 속했던 지앵 구역, 그리고 과거 부르주 대교구 관할이었던 샤티용쉬르루아르 주를 포함하고 있다.3. 역사
오를레앙 교구의 역사는 초기 기독교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승에 따르면 성 알티누스가 초대 주교로 여겨지나,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첫 주교는 4세기 중반의 디클로피투스이다. 아니아누스 주교는 5세기 훈족의 침입으로부터 도시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는 6세기 초 미시 수도원 설립을 지원했으며, 이 수도원은 오를레앙 지역의 개간과 문명화에 크게 기여하고 많은 성인을 배출하며 교구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구의 상세한 초기 역사, 주요 성인들, 중세 이후의 발전 과정, 잔 다르크와의 관련성 등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3. 1. 초대 교회와 성인들
센스의 생 피에르 르 비프 수도원 수도원장 게르베르(1046–79)에 따르면, 성 사비니아누스와 성 포텐티아누스는 성 알티누스와 함께 성 베드로에 의해 센스로 파견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중 성 알티누스는 오를레앙의 초대 주교로 여겨진다. 그러나 9세기 이전 센스 교구나 15세기 말 이전 오를레앙 교구에서는 성 알티누스의 활동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찾기 어렵다. 기록상 확인되는 최초의 주교는 디클로피투스로, 그는 약 344년 성 아타나시우스의 무죄 판결을 지지한 갈리아 주교 중 한 명이었다. 초기 시대의 다른 주요 주교들은 다음과 같다.- 생 에우베르티우스: 공동 기도서 달력에 이름이 오르며, M. 퀴사르에 따르면 약 355년부터 385년까지 주교직을 수행했다.
- 아니아누스 (385-453): 훈족의 아틸라가 침략했을 때 "귀족" 아에티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훈족이 오를레앙 포위를 풀도록 했다 (참고: 투르의 그레고리우스, ''프랑크족의 역사'' II.6-7).
- 성 프로스페르 (453-63)
- 성 모니터 (약 472)
- 성 플루 (플로스쿨루스): 490년 사망.
- 성 유케리우스 (717-43): 오를레앙 출신으로 주미에주의 수도사였다. 샤를 마르텔의 동료인 와이프레의 약탈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샤를 마르텔에 의해 쾰른, 이후 리에주로 추방되었고, 성 트론드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는 알레만니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베르됭을 약탈하려 했으나, 그곳 대사제의 간청으로 시민들을 살려주었다. 클로비스 1세는 또한 성 에우스피키우스와 그의 조카 성 메스민 (막시미누스)에게 오를레앙 근처 루아르강과 로레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미시 영지를 하사하여 508년 수도원을 세우도록 했다. 에우스피키우스가 사망한 후 성 막시미누스가 수도원장이 되었고, 그의 지도 아래 수도원은 크게 번성했다. 미시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오를레앙 지역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는데, 토지를 개간하고 배수 시설을 정비했으며, 지역 주민들에게 농업 기술을 전파했다. 8세기 초, 테오둘푸스는 미시 수도원을 복원했고, 그의 요청으로 아니안의 성 베네딕토는 14명의 수도사를 파견하고 직접 수도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미시 수도원의 마지막 수도원장인 샤프 드 라스티냐크는 1792년 파리 라바예 감옥에서 일어난 "9월 학살"의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많은 성인을 배출한 미시 수도원을 중심으로 수도원 생활은 교구 안팎으로 퍼져나갔다.
- 성 리파르두스와 성 우르비키우스는 뫙 쉬르 루아르에 수도원을 세웠다.
- 성 리에 (레투스)는 오를레앙 숲에서 은둔자로 생을 마감했다.
- 성 비아트르는 솔로뉴에서, 성 둘라르는 부르주 근처 앙블리 숲에서 활동했다.
- 성 레오나르는 리모주 지역에 수도원 생활을 전파했다.
- 성 알미르, 성 울파키우스, 성 보메르는 몽미라이 근처에서 활동했다.
- 성 아비투스 (약 527년 사망)는 샤르트르 지역에서, 성 칼레 (536년 이전 사망)와 방드뵈르의 성 레오나르 (약 570년 사망)는 사르트 계곡에서 활동했다.
- 성 프레임보와 성 콘스탄틴은 자브론 숲에서 활동했다.
- 앞서 언급된 성 보메르 (약 560년 사망)는 라발 근처 파세에서 활동했다.
- 듀누아의 성 레오나르, 성 알바, 성 에르니에는 페르슈에서 활동했다.
- 성 라우메르 (약 590년 사망)는 코르비옹의 수도원장이 되었다.
- 성 루뱅 (레오비누스)은 미시의 수도사 출신으로 544년에서 556년 사이에 샤르트르 주교가 되었다.
- 성 아 (아길루스)는 오를레앙의 자작으로, 587년 이후 사망했으며 미시 수도원의 후원자였다.
교구의 다른 주목할 만한 성인들은 다음과 같다.
- 성 바딜루스: 님(Nîmes)의 순교자 (3세기 또는 4세기)
- 성 루카누스: 부제이자 순교자, 로이니의 수호성인 (5세기)
- 성 도나투스: 은수자 (5세기)
- 성 메이: 발 베누아 수도원장 (5세기)
- 성 메스메: 동정녀이자 (아마도) 순교자, 성 메스민의 누이 (6세기)
- 성 펠리큘: 지앵의 수호성인 (6세기)
- 성 지기스문트: 부르군트의 왕. 메로빙거 왕조 클로도미르의 명령으로 아내, 자녀들과 함께 우물에 던져져 순교 (524). 성 아비투스가 만류했으나 소용없었다.
- 성 곤트란: 오를레앙과 부르군트의 왕 (561-93), 고해자.
- 성 루: 오를레앙 근처 출신의 상스 대주교, 그리고 그의 어머니 성 아기아 (7세기 전반)
- 성 그레고리: 불가리아 니코폴리스 주교를 지냈으며, 피티비에에서 은둔자로 사망 (1004년 또는 1007년)
- 성 로즈: 에르보빌 수녀원장 (1130년 사망)
- 복자 오도 오브 오를레앙: 캄브레 주교 (1105–13)
- 성 알파익스: 나병 환자. 1211년 쿠도에서 사망했으며,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미망인인 샹파뉴의 아델 여왕의 방문을 받았다.
- 성 기욤 (1209년 사망): 퐁텐장 수도원장, 이후 부르주 대주교
- 복자 레지날드: 도미니코회 소속, 오를레앙 생아냥(Saint-Aignan) 대학교회 학장 (1220년 사망)
- 성 리차드: 영국인. 1236년 오를레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244년 치체스터 주교가 되었으며, 캔터베리의 성 에드먼드의 친구였다.
성 마우루스는 르망 주교 성 인노첸시오의 부름을 받아 프랑스로 왔으며, 성 베네딕토의 지시에 따라 542년 오를레앙에 도착하여 네 명의 동료와 함께 머물렀다. 성 라데곤드는 544년 노용에서 푸아티에로 가는 길에 오를레앙을 방문했고, 성 콜롬바누스는 6세기 말 룩세유에서 추방된 후 오를레앙을 방문했다. 샤를마뉴는 생아냥 교회를 재건하고 생피에르 르 퓌엘리에 수도원을 개축했다. 987년 12월 31일, 위그 카페는 오를레앙 대성당에서 자신의 아들 로베르 2세(오를레앙 출생)를 공동 왕으로 즉위시켰다. 교황 인노첸시오 2세와 성 베르나르는 1130년에 플뢰리와 오를레앙을 방문했다.
3. 2. 주요 순례지
교구의 주요 순례지로는 페리에르의 베들레헴의 성모, 오를레앙 시의 기적의 성모, 클레리의 노트르담 등이 있다.- 페리에르의 베들레헴의 성모: 페리에르 수도원에 위치한 순례지이다.
- 오를레앙의 기적의 성모: 7세기에 시작된 순례지로, 1429년 5월 8일 잔 다르크가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클레리의 노트르담: 13세기에 시작된 순례지로, 프랑스의 국왕 필리프 4세, 필리프 6세, 루이 11세 등이 방문했다. 특히 루이 11세는 '클레리의 노트르담'의 납으로 만든 이미지를 자신의 모자에 넣고 다녔으며, 백년 전쟁의 영웅 중 한 명인 장 드 뒤누아가 묻힌 이 성소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를 원했다.
3. 3. 근세와 종교 개혁
1113년 오를레앙 사람들은 복자 로베르 아르브리셀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초대하여 라 마들렌을 설립하게 했다. 그는 1117년 성 베르나르 드 티롱과 함께 다시 방문했다.[1] 생 루이 왕은 퓌조, 샤토뇌프쉬르루아르, 오를레앙 등지에서 자선 활동을 펼쳤으며, 1259년 10월 26일 성 아냐노 유해 이송식에 참석했고, 오텔 디외의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 자주 방문했다.[1]술리의 대집사이자 오를레앙 참사회원이었던 피에르 드 보포르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1371-1378)로 선출되어, 프랑스 출신의 마지막 교황이 되었다. 그는 생 베누아 쉬르 루아르의 수도원장 투르도베르뉴의 장 추기경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다.[1] 오를레앙 공작 부인이었던 복자 잔 드 발루아는 루이 12세와 1498년 이혼한 후, 16세기 초 샤토뇌프쉬르루아르에 라농시아드 수도원을 설립했다.[1]
프랑스는 잔 다르크가 이끈 오를레앙 해방(1429년 5월 8일)을 통해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1455년 7월 21일, 그녀의 명예 회복(복권)이 오를레앙에서 장엄한 행렬과 함께 공개적으로 선포되었다. 잔 다르크의 어머니인 이사벨 로메는 1458년 사망하기 전, 오를레앙 다리 근처 투르넬에 딸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1567년 위그노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1569년 가톨릭 세력이 도시를 다시 장악하면서 재건되었다. 잔 다르크를 기리는 오를레앙의 대규모 종교 축제는 1792년까지 열렸고, 중단되었다가 1802년부터 1830년까지, 그리고 1842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5월 8일에 개최되어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1]
르네상스 시기, 파리에서 처형된 인쇄업자이자 언어학자, 팜플렛 작가였던 에티엔 돌레 (1509–1546)는 오를레앙 출신으로, 일부에서는 그를 "르네상스의 순교자"로 여기기도 한다.[1] 종교 개혁에 참여했던 오데 드 콜리니 추기경은 1560년경 생 뵈르티우스, 퐁텐장, 페리에르, 생 베누아의 수도원장을 지냈다.[1]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과 관련된 인물인 콜리니 제독 (1519–1572)은 현재 교구에 속한 샤티용쉬르루앵에서 태어났다.[1] 종교 전쟁이 시작될 무렵, 오를레앙은 기즈 가문과 프로테스탄트 콩데 가문 추종자들 사이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 오를레앙 근처에서 가톨릭 측의 수장이었던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1562년 2월 3일 암살당했다.[1]
칼뱅주의자였던 자크 봉가르는 앙리 4세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그의 저서 "Gesta Dei per Francos"에서 십자군 연대기를 수집하고 편집했다. 그는 1554년 오를레앙에서 태어났다.[1] 유명한 예수회 학자이자 신학자인 드니 페토 (페타비우스)는 1583년 오를레앙에서 태어났다.[1]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1618년과 1619년에 오를레앙을 방문했다.[1] 성 빈센트 드 폴의 제자였으며 노트르담 자선 아우구스티누스 수녀회를 설립한 존경받는 어머니 프랑수아즈 드 라 크루아 (1591–1657)는 교구 내 페타이 출신이다.[1] 자선 활동으로 유명한 마담 드 미라미옹 (1629–1696) 역시 오를레앙 출신이다.[1] 생 잔 드 샹탈은 1627년 오를레앙의 비지테이션 수도원 원장이었다.[1] 퀘이에티즘과 관련된 인물인 마담 기용은 1648년 몽타르지에서 태어났다.[1]
오를레앙 교회는 프랑스에서 마지막으로 로마 전례를 다시 채택한 교회 중 하나였다 (1874).[1] 생트 크루아 대성당은 4세기에 성 뵈르티우스에 의해 건설되고 봉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999년 화재로 소실된 후 1278년부터 1329년까지 재건되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1562년부터 1567년까지 이 성당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나, 부르봉 왕가는 17세기에 이를 복원하기 시작했다.[1]
3. 4. 잔 다르크와 오를레앙
프랑스는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을 구원함으로써 영국 지배에서 벗어났다 (1429년 5월 8일). 1455년 7월 21일, 잔 다르크의 복권이 오를레앙에서 성대한 행렬과 함께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잔 다르크의 어머니 이사벨 로메는 1458년 11월 사망하기 전, 오를레앙 다리 근처 투르넬에 딸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1567년 위그노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1569년 가톨릭 세력이 도시를 다시 장악하면서 재건되었다. 매년 5월 8일 오를레앙에서는 잔 다르크를 기리는 대규모 종교 축제가 열리는데, 이는 1792년까지, 그리고 1802년부터 1830년까지, 마지막으로 1842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며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3. 5. 근대
오를레앙 출신의 에티엔 돌레 (1509–1546)는 인쇄업자이자 언어학자, 팜플렛 작가로 파리에서 처형되었다. 일부는 그를 "르네상스의 순교자"로 여기기도 했다. 종교 개혁에 참여한 오데 드 콜리니 추기경은 1560년경 생 뵈르티우스, 퐁텐장, 페리에르, 생 베누아의 수도원장이었다. 콜리니 제독 (1519–1572)은 현재 교구에 속한 샤티용쉬르루앵에서 태어났으며,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과 관련된 인물이다.종교 전쟁이 시작될 무렵, 오를레앙은 기즈 가문과 프로테스탄트 콩데 가문 추종자들 사이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 오를레앙 근처에서 기즈 공작 프랑수아는 1562년 2월 3일 암살당했다. 칼뱅주의자 자크 봉가르는 프랑스의 앙리 4세의 고문으로, 1554년 오를레앙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저서 "Gesta Dei per Francos"에서 십자군 연대기를 수집하고 편집했다. 예수회 소속의 드니 페토 (페타비우스)는 유명한 학자이자 신학자로, 1583년 오를레앙에서 태어났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1618년과 1619년에 오를레앙을 방문했다. 성 빈센트 드 폴의 제자였고 노트르담 자선 아우구스티누스 수녀회를 설립한 존경받는 어머니 프랑수아즈 드 라 크루아 (1591–1657)는 교구의 페타이에서 태어났다. 자선 활동으로 알려진 마담 드 미라미옹 (마리 보노, 1629–96) 역시 오를레앙 출신이었다. 생 잔 드 샹탈은 1627년 오를레앙의 비지테이션 수도원 원장이었다. 정적주의(Quietism)와 관련된 마담 기용은 1648년 몽타르지에서 태어났다.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을 해방(1429년 5월 8일)시킨 것은 프랑스가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455년 7월 21일, 그녀의 복권이 오를레앙에서 장엄한 행렬과 함께 공개적으로 선포되었으며, 그녀의 어머니 이사벨 로메는 딸을 기리는 기념비를 투르넬에 세웠다. 이 기념비는 1567년 위그노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1569년 가톨릭교도들이 도시를 다시 장악하면서 재건되었다. 매년 5월 8일에 열리는 잔 다르크 기념 대규모 종교 축제는 1792년까지 열렸고, 1802년부터 1830년까지, 그리고 1842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며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오를레앙 교회는 프랑스에서 마지막으로 로마 전례를 다시 채택한 곳이다 (1874년). 생트 크루아 대성당은 4세기에 성 뵈르티우스에 의해 건설되고 봉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999년 화재로 소실된 후 1278년부터 1329년까지 재건되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1562년부터 1567년까지 이 성당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부르봉 왕가는 17세기에 이를 복원했다.
1901년 결사법 이전, 오를레앙 교구에는 프란치스코회, 베네딕토회, 마리아 수도회 선교 사제, 라자로회, 예수 성심 선교회와 여러 교육 수도회가 있었다. 이 교구에서 시작된 여자 수도회로는 1617년 앙투아네트 도를레앙-롱그빌 공주와 카푸친 르클레르 뒤 트랑블레 신부(조셉 신부)가 설립한 교육 및 간호 수도회인 갈바리아 베네딕토회, 그리고 1853년 뒤판루 주교가 설립하고 오를레앙에 본부를 둔 교육 수도회인 생티냥 수녀회가 있다.
20세기 오를레앙 주교에는 핵무기 반대 입장으로 조르주 퐁피두 정부 관료와 논쟁을 벌였던 기 리오베와, 그의 후임으로 1979년에 임명되었으나 곧 파리로 전출된 장마리 뤼스티제가 있다.
4. 역대 주교
8세기 주교 중에서는 테오둘푸스가 주목할 만하다. 그가 언제부터 교구를 다스리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798년에 이미 주교였음은 확실하며, 이때 샤를마뉴가 그를 나르본과 프로방스로 왕의 사절(Missus dominicus)로 보냈다. 경건왕 루이 치하에서 그는 이탈리아의 반란을 돕는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폐위되고 앙제의 수도원에 4년 동안 투옥되었지만, 821년 루이가 앙제에 왔을 때 테오둘푸스가 찬양과 영광(Gloria, laus et honor)을 부르는 것을 듣고 풀려났다고 전해진다. 테오둘푸스가 오를레앙의 성직자들에게 보낸 "규칙서"(Capitulare ad presbyteros parochiaela)는 사제와 신자들의 의무에 관한 가톨릭 전통의 가장 중요한 기념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의 예식서(Rituale), 그의 참회록(Poenitentiale), 세례, 견진성사, 성찬례에 관한 그의 논문, 퓌 대성당에 보존된 훌륭한 필체로 된 그의 성경 판본은 그를 당대 최고의 인물 중 한 명으로 드러낸다.[1] 그의 명성은 주로 학문 전파에 대한 그의 헌신에 있다. 당시 페리에르 수도원은 알쿠인 아래에서 학문의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테오둘푸스는 샤를마뉴가 보낸 젊은 귀족들을 위해 플뢰리 수도원을 개방했고, 성직자들에게 시골 지역에 자유 학교를 설립하도록 권유했으며, 그들에게 "지혜로운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의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영원토록 별과 같이 빛나리라"(다니엘서 12:3)고 인용했다. 그의 시대의 기념물 중 하나가 여전히 교구에 남아 있는데, 이는 황실 예배당을 본떠 만든 제르미니 데 프레 교회의 앱스(apse)이며, 독특한 모자이크 장식을 유지하고 있다.
- 오를레앙의 아냐노 또는 아냐(Anianusla, 358년 출생 – 453년 사망): 451년 로마 장군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가 훈족의 아틸라에 맞서 도시를 방어하는 것을 도왔다.
- 나마티우스: 브르타뉴로 파견된 군트람 왕의 대사.
- 오를레앙의 에우케리우스
- 요나스 (821년 – 843년): 성상 파괴주의에 반대하는 논문을 썼으며, 기독교 생활에 관한 논문(De Institutione laicalila)과 왕의 의무에 관한 책(De Institutione regiala)도 저술했다.[2]
- 성 티에리 2세 (1016년 – 1021년)
- 장: 1098년 3월 1일 축성
- 복자 필리프 베루이에 (1234년 – 1236년)
- 피에르 드 모르네 (1288년–1296년 오세르 주교로 임명)
- 복자 로제 르 포르 (1321년 – 1328년)
- 존 카마이클 오브 더글라스데일 (장 드 생 미셸)
- 레노 드 샤르트르 † (1439년 1월 9일 임명 – 1444년 4월 4일 사망)
- 피에르 뷰로 † (1447년 11월 20일 임명 – 1451년 12월 10일 베지에 주교로 임명)
- 프랑수아 드 브리약 † (1473년 11월 3일 임명 – 1504년 12월 22일 엑스 대주교로 임명)
- 크리스토프 드 브리약 † (1504년 1월 19일 임명 – 1514년 2월 4일 투르 대주교로 임명)
- 장 도를레앙-롱그빌 † (1521년 6월 26일 임명 – 1533년 9월 24일 사망)
- 앙투안 상갱 드 뫼동 † (1533년 11월 6일 임명 – 1550년 10월 20일 사임)
- 프랑수아 드 포콩 † (1550년 10월 20일 임명 – 1551년 10월 12일 마콩 주교로 임명)
- 피에르 뒤 샤스텔 † (1551년 10월 12일 임명 – 1552년 2월 3일 사망)
- 장 드 모르빌리에 † (1552년 4월 27일 임명 – 1564년 사임)
- 마튀랭 드 라 소세 † (1564년 9월 6일 임명 – 1584년 2월 9일 사망)
- 데니 허롤트 † (1584년 2월 9일 계승 – 1586년 사임)
- 제르맹 발랑 드 귈랭 † (1586년 10월 27일 임명 – 1587년 9월 15일 사망)
- 장 드 로베스핀 † (1588년 3월 16일 임명 – 1596년 2월 23일 사망)
- 가브리엘 드 로베스핀 † (1604년 3월 15일 임명 – 1630년 8월 15일 사망)
- 니콜라 드 네츠 † (1631년 1월 27일 임명 – 1646년 1월 20일 사망)
- 알퐁스 달벤 † (1647년 1월 21일 임명 – 1665년 5월 20일 사망)
- 피에르-아르망 뒤 캉부 드 쿠아슬랭 † (1666년 3월 29일 확정 – 1706년 2월 5일 사망)
- 루이-가스통 플뢰리오 다르모농빌 † (1706년 11월 15일 확정 – 1733년 6월 9일 사망)
- 니콜라-조제프 드 파리 † (1733년 6월 9일 승계 – 1754년 1월 10일 사임)
- 루이-조제프 드 몽모렌시-라발 † (1754년 1월 14일 확정 – 1758년 2월 28일 사임)
- 루이-섹스티우스 드 자렌트 드 라 브뤼이에르 † (1758년 3월 13일 확정 – 1788년 5월 28일 사망)
- 루이-프랑수아-알렉상드르 드 자렌트 드 세나스 도르주발 † (1788년 5월 28일 승계 – 1793년 11월 22일 사임)
- 에티엔-알렉상드르-장-바티스트-마리 베르니에 † (1802년 4월 9일 임명 – 1806년 10월 1일 사망)
- 클로드-루이 루소 † (1807년 3월 22일 임명 – 1810년 10월 7일 사망)
- 피에르-마랭 루프 드 바리쿠르 † (1817년 8월 8일 임명 – 1822년 12월 9일 사망)
- 장 브뤼모 드 보르가르 † (1823년 1월 13일 임명 – 1839년 1월 은퇴)
- 프랑수아-니콜라-마들렌 몰로 † (1839년 3월 10일 임명 – 1842년 6월 28일 투르 대주교로 임명)
- 장-자크 파예 † (1842년 10월 10일 임명 – 1849년 4월 4일 사망)
- 펠릭스-앙투안-필리베르 뒤팡루 † (1849년 4월 16일 임명 – 1878년 10월 11일 사망)
- 피에르-엑토르 쿨리에 (Couillié) † (1878년 10월 12일 승계 – 1893년 6월 14일 리옹 대주교로 임명)
- 스타니슬라스-아르튀르-자비에 투셰 † (1894년 1월 29일 임명 – 1926년 9월 23일 사망)
- 쥘-마리-빅토르 쿠르쿠 † (1926년 12월 20일 임명 – 1951년 3월 28일 사망)
- 로베르 피카르 드 라 바케리 † (1951년 8월 27일 임명 – 1963년 5월 23일 사임)
- 기-마리-조제프 리오베 † (1963년 5월 23일 승계 – 1978년 7월 18일 사망)
- 장-마리 뤼스티제 † (1979년 11월 10일 임명 – 1981년 1월 31일 파리 대주교로 임명)[3]
- 르네 루시앙 피캉데 † (1981년 6월 13일 임명 – 1997년 10월 20일 사망)
- 제라르 앙투안 도쿠르 (1998년 7월 2일 임명 – 2002년 6월 18일 낭테르 주교로 임명)
- 앙드레 루이 포르 (2002년 11월 28일 임명 – 2010년 7월 27일 은퇴)
- 자크 앙드레 블라카르 (2010년 7월 27일 임명 – )
참조
[1]
서적
Patrologia Latina
[2]
서적
Patrologia Latina
[2]
간행물
Sources Chrétiennes
[3]
웹사이트
Member
http://www.acade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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