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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이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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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곤도 이사미는 1834년 무사시노쿠니(현재 도쿄도)에서 태어난 인물로, 천연이심류 검술을 익혀 1861년 4대 당주가 되었다. 그는 히지카타 도시조, 오키타 소지 등을 길러 신선조 간부들을 배출했으며, 1863년 낭인 무사 모집에 참여하여 교토로 상경, 신선조를 결성하고 유신 박해에 앞장섰다.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갑양진무대를 결성했으나 관군에 패하여 항복 후 참수되었고, 그의 머리는 교토에 효수되었다. 곤도 이사미는 신선조 국장으로서 유신지사들을 탄압한 혐의로 처형되었으며, 여러 묘소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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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이사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Kondō Isami (1834–1868)
곤도 이사미 (1834–1868)
이름
본명미야가와 가쓰고로
어릴 적 이름가쓰고로, 가쓰타
개명시마자키 가쓰타 → 시마자키 이사미 → 곤도 이사미
이명오쿠보 쓰요시, 오쿠보 야마토
생애
출생1834년 11월 9일
출생지가미이시하라 마을, 무사시 국, 일본
사망1868년 5월 17일 (33세)
사망 장소이타바시 처형장, 이타바시, 에도, 일본
사망 원인참수
안장 장소몸: 류겐지, 오사와, 미타카시, 도쿄, 일본
머리호조지, 오카자키시, 아이치현, 일본
묘소아래 참조
신상 정보
국적일본인
배우자마쓰이 쓰네 (1860년 결혼, 1868년 사망)
파트너미유키, 오코
자녀곤도 다마 (딸), 오유 (오코와의 딸)
가족곤도 슈스케 (양아버지), 곤도 후데 (양어머니), 미야가와 리에 (여동생), 미야가와 오토고로 (남동생), 미야가와 소베이 (남동생), 곤도 유고로 (조카), 곤도 히사타로 (손자)
부모미야가와 히사지로 (아버지), 미야가와 미요 (어머니)
경력
소속로시구미 (이전), 미부 로시구미 (이전), 신센구미
복무 기간1863년–1868년
계급와카도시요리
지휘미부 로시구미 (이전), 신센구미
주요 참가 전투
정치 활동
소속도쿠가와 막부
주군마쓰다이라 가타모리 → 도쿠가와 요시노부
직책신센구미 국장, 갑양진무대 대장
임기1863년 ~ 1868년
기타 정보
별칭시마자키 가쓰타, 시마자키 이사미 후지와라노 요시타케
종교간텐인덴 준추 세이기 다이코지 (계명)
관련 인물마쓰다이라 가타모리

2. 생애

곤도 이사미(1834–1868)


도쿄 조후시에 있는 곤도 이사미의 생가


1834년 11월 9일, 무사시노쿠니 다마 군 가미이시하라 마을(현 도쿄도 조후시)에서 농부 미야카와 규지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 아명은 가쓰고로(勝五郎일본어)였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즐겼으며, 1848년 천연이심류 검술 도장 시위관에 입문하여 검술을 연마했다.[5]

1849년, 시위관의 3대 종가 곤도 슈스케의 눈에 띄어 그의 양자가 되었고, 처음에는 시마자키 가쓰타(島崎勝太일본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8] 후에 곤도 이사미(近藤 勇일본어)가 되었다.[9] 1861년 8월, 26세의 나이로 천연이심류 4대 종가를 계승하여 시위관의 주인이 되었다.[14] 시위관에서는 히지카타 도시조, 오키타 소지, 이노우에 겐자부로 등 훗날 신센구미의 핵심이 되는 인물들을 지도했으며, 나가쿠라 신파치, 도도 헤이스케, 하라다 사노스케, 산난 게이스케 등도 이곳을 거쳐 갔다.

1863년 2월, 에도 막부도쿠가와 이에모치 쇼군의 교토 상경을 경호하기 위해 낭인들을 모집하자, 곤도는 시위관 동료들과 함께 뢰시구미에 참여하여 교토로 향했다.[18][19] 그러나 뢰시구미 결성을 주도한 기요카와 하치로가 막부 지원이 아닌 존왕양이를 내세우자, 곤도는 이에 반발하여 세리자와 가모 등과 함께 교토에 남아 아이즈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휘하로 들어갔다.[20][21][22] 이들은 미부 낭사대를 결성했고, 8월 18일의 정변 이후 공을 인정받아 신센구미(新選組)라는 부대 명칭을 받았다.[23]

신센구미 결성 후, 곤도는 내부 권력 다툼 끝에 초대 국장이었던 세리자와 가모 등을 암살하고 조직의 실권을 장악했다. 국장으로서 그는 히지카타 도시조 등과 함께 존왕양이파 및 반막부 세력에 대한 강경한 탄압을 주도했으며, 특히 1864년 이케다야 사건을 통해 신센구미의 악명을 떨쳤다.[24] 이로 인해 막부 측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유신 지사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조직 내 반대파를 가차없이 숙청했으며, 사이토 하지메 등을 밀정으로 활용하여 내부 통제를 강화했다. 1867년에는 신센구미 대원들과 함께 하타모토 신분을 부여받아 막부의 공식적인 가신이 되었다.[25][26]

1868년 1월, 도바·후시미 전투 직전 존왕파의 습격을 받아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전투 패배 후 에도로 돌아와 와카도시요리급으로 승진했으나,[27] 막부의 몰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신센구미 잔여 병력으로 갑양진무대(甲陽鎮撫隊|고요 친부타이일본어)를 결성하여 고후 성 점령을 시도했으나 고슈 가쓰누마 전투에서 신정부군에게 패배했다. 이후 지바현 나가레야마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중 신정부군에게 항복했으나, 신원이 발각되어 1868년 5월 17일(음력 4월 25일) 이타바시에서 참수되었다.[28] 그의 목은 교토 산조가와라에 효수되어 공개되었다.

2. 1. 출생과 성장



천보 5년(1834년) 11월 9일, 무사시노쿠니 다마 군 가미이시하라 마을(현 도쿄도 조후시 노미즈)에서 농부 미야카와 규지로(宮川久次郎, 소스에서는 히사지로로도 표기)와 어머니 미요(ミヨ 또는 エ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 아명은 가쓰고로(勝五郎일본어)였으며, 후에 가쓰타(勝太)로 개명하기도 했다. 위로는 오토지로(音次郎, 후에 오토고로 音五郎)와 구메조(粂蔵, 후에 소베이 惣兵衛)라는 두 형이 있었고, 여동생 리에(リエ)는 그가 태어나기 2년 전인 천보 3년(1832년)에 사망했다.[4] 당시 기록에 따르면 미야카와 가문은 7석 남짓의 농지를 가진 6인 가구로, 중상류층 이상의 비교적 유복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 그는 독서를 즐겨 47인의 로닌 이야기나 삼국지를 특히 좋아했다고 전해진다.[6] 학문적 소양과 더불어 집에 침입한 도둑을 격퇴한 일화 등으로 용맹함이 알려지면서[7] 천연이심류(天然理心流) 3대 종가인 곤도 슈스케(近藤周助)의 눈에 들게 되었다.[7]

가에이 원년(1848년) 11월, 15세의 나이로 에도 우시고메(현 신주쿠구)에 있는 천연이심류 도장 시위관(試衛館, 정확히는 시위장 試衛場)에 입문하여 검술을 수련하기 시작했다.[5] 이듬해인 가에이 2년(1849년) 6월에 목록(目録,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인정하는 증서)을 받았고, 같은 해 10월 19일, 곤도 슈스케는 그의 재능을 높이 사 미야카와 가문에 "천연이심류를 이사미가 계승하게 하고 싶다"고 강하게 요청하여, 슈스케의 본가인 시마자키(島崎) 가문에 양자로 들이게 된다. 이때 시마자키 가쓰타(島崎勝太일본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8] 이후 정식으로 곤도 가문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시마자키 이사미(島崎 勇일본어), 최종적으로는 곤도 이사미(近藤 勇일본어)로 바꾸었다. 안세이 5년(1858년) 히노(日野)의 야사카 신사(八坂神社, 당시 牛頭天王社)에 봉납된 액자에는 '시마자키 이사미 후지와라노 요시타케'(島崎勇藤原義武일본어)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이 시기부터 '이사미'(勇)라는 이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9]

만엔 원년(1860년) 3월 29일, 고산쿄 중 하나인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 마쓰이 야소고로(松井八十五郎)의 딸 마쓰이 쓰네(松井つね)와 결혼했다.[11] 이는 곤도에게 사회적으로 유리한 혼인이었다.[12] 분큐 원년(1861년) 8월 27일, 26세의 나이로 후추(府中)의 오쿠니다마 신사(大國魂神社)에서 천연이심류 4대 종가 계승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행사를 열고 시위관의 주인이 되었다.[14] 이듬해인 분큐 2년(1862년)에는 딸 곤도 타마(近藤たま, 1862–1886)가 태어났다.[15] 곤도 사후, 메이지 9년(1876년)에 그의 형 오토고로의 차남 곤도 유고로(近藤勇五郎)가 곤도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타마와 결혼하여 가문을 이었다.

곤도 이사미가 사용했던 쇠사슬 갑옷(쿠사리카타비라)과 이마 보호대(하지가네)


시위관 관장으로서 곤도는 히지카타 도시조, 오키타 소지, 이노우에 겐자부로 등 천연이심류 문하생들을 지도했으며, 식객으로 머물던 나가쿠라 신파치, 도도 헤이스케, 하라다 사노스케, 산난 게이스케 등 훗날 신센구미의 주요 간부가 되는 인물들을 배출했다. 그는 다마 지역의 유력 문인들과도 깊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특히 히노슈쿠(日野宿)의 명주이자 천연이심류 문인이었던 사토 히코고로(佐藤彦五郎), 오노지무라(小野路村)의 명주 집안 출신 고지마 카노스케(小島鹿之助)와는 삼국지연의를 본떠 의형제를 맺었다고 전해진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고지마는 곤도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사토와 고지마는 자체적으로 농병대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훗날 곤도가 이끄는 고요친부대(甲陽鎮撫隊)에 합류하기도 했다. 곤도는 교토 상경 이후에도 이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유지하고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곤도는 17세기 유명 도공 나가소네 고테쓰(長曽祢虎徹)가 만든 카타나인 '고테쓰'(虎徹)를 소유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일각에서는 그의 검이 실제로는 동시대의 유명 도공 미나모토노 기요마로(源清麿)의 작품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10]

신센구미 결성 이전, 분큐 2년(1862년)에 막부의 군사 훈련 기관인 고부쇼(講武所)의 사범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으나 정식으로 임용되지는 않았다.[16] 고부쇼는 1855년 매슈 페리의 흑선 내항 이후 군제 개혁의 일환으로 설립된 막부 직속의 무관 양성 기관이었다.[17]

2. 2. 신센구미 결성과 활동

1863년 문구 3년, 에도 막부교토에 머무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보호하기 위해 기요카와 하치로의 제안에 따라 낭사 조직인 뢰시구미를 모집했다.[18] 곤도 이사미는 히지카타 도시조, 오키타 소지, 이노우에 겐자부로, 나가쿠라 신파치, 도도 헤이스케, 하라다 사노스케, 야마나미 케이스케 등 시위관 동료 및 식객들과 함께 뢰시구미에 참여하여 교토로 향했다.[19]

교토 도착 후, 뢰시구미의 실질적인 리더였던 기요카와 하치로는 막부 지원이 아닌 조정을 지지하고 존왕양이를 실행하는 것이 진정한 목적임을 밝혔다. 이에 반발한 곤도, 히지카타, 미토 번 출신 세리자와 가모 등은 기요카와와 결별하고 교토 잔류를 결정했다.[20] 곤도는 기요카와와 같은 존왕양이파였으나, 막부보다 조정을 우선시하는 기요카와와 달리 조정과 막부의 공무합체를 통해 정국 안정을 추구하는 입장이었다.

교토에 남은 곤도와 세리자와 등 24명은 교토 수호직을 맡고 있던 아이즈번의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고, 1863년 3월 12일 아이즈 번의 감독 하에 쇼군 경호 및 교토 시내 경비를 담당하는 미부 낭사대를 결성했다.[21][22] 초기 미부 낭사대는 곤도파와 세리자와파로 나뉘어 내부 갈등이 있었으며, 곤도는 덴나이 요시오 등 반대파를 암살하며 조직 내 주도권을 강화했다.

1863년 8월 18일, 아이즈번과 사쓰마 번이 주도하여 조슈 번 세력을 교토에서 축출한 8월 18일의 정변이 발생했다. 미부 낭사대는 오하나바타케몬 경비 등을 맡으며 정변에 참여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무가전주로부터 신센구미(新選組)라는 부대 명칭을 하사받았다.[23]

신센구미 결성 후, 곤도는 내부 권력 장악에 나섰다. 부장 신미 니시키를 할복으로 위장하여 제거하고[34], 9월 16일에는 초대 국장이었던 세리자와 가모와 그의 측근들을 암살했다.[37] 이로써 곤도 이사미를 정점으로 하는 시위관 출신들이 신센구미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곤도는 조직 내 정보를 관리하고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 사이토 하지메 등을 밀정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1864년 7월, 신센구미는 교토의 여관 이케다야에 잠복해 있던 조슈 번 등 존왕양이파 지사들을 습격하여 다수를 살해하거나 체포하는 이케다야 사건을 일으켰다.[24] 이 사건으로 신센구미는 막부 측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존왕양이파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곤도는 '귀신 잡는 곤도', '사람 잡는 곤도' 등으로 불리며 유신 지사 탄압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1867년 7월 10일, 곤도는 신센구미 대원들과 함께 막부의 직속 가신인 하타모토 신분을 부여받았다.[25][26]

2. 3. 막부 말기의 정치 활동

1863년 2월, 28세의 나이로 낭사대 모집에 응하여 교토로 상경했다. 당시 존왕양이파로 변절한 기요카와 하치로와 결별하고, 아이즈번마쓰다이라 가타모리 휘하로 들어가 미부 낭사대 결성에 참여했다. 초기 조직 내에서는 세리자와 가모 등 다른 파벌과의 주도권 다툼이 있었으며, 곤도는 덴나이 요시오 암살(분큐 3년 3월 25일) 등을 통해 점차 영향력을 확대했다.

1863년 8월 18일의 정변 이후, 미부 낭사대는 조슈번 세력 축출 과정에서의 활동을 인정받아 신센구미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곤도는 부장 신미 니시키를 숙청(할복 강요)하고[34], 분큐 3년 9월 16일에는 초대 국장 세리자와 가모와 그의 일파를 히지카타 도시조, 오키타 소지 등과 함께 암살하여[37] 조직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 신센구미 국장으로서 '귀신 잡는 곤도', '사람 잡는 곤도' 등으로 불리며 존왕양이 세력 및 유신 지사들에 대한 강경한 탄압을 주도하여 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조직 내 반대파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했으며, 사이토 하지메를 밀정으로 활용하여 내부 정보를 통제하고 불순분자를 색출하기도 했다.

겐지 원년 6월 5일(1864년 7월 8일), 이케다야 사건에서 조슈번존왕양이파 지사들을 습격하여 다수를 사살하거나 체포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신센구미는 조정과 막부로부터 감장(感状)과 포상금을 받았다. 이후 금문의 변에도 출동했으며, 대원 모집을 위해 잠시 귀향하여 이토 가시타로 등을 영입했다.

게이오 원년(1865년)에는 제2차 조슈 정벌을 위한 막부의 움직임에 동참하여, 나가이 나오유키가 이끄는 막부 사절단에 합류해 히로시마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조슈 측과의 직접적인 교섭 시도는 번번이 거부당했고, 별다른 성과 없이 교토로 귀환했다. 게이오 2년(1866년)에도 막부의 조슈 정벌 재개 움직임에 따라 다시 히로시마로 파견되었으나, 도쿠가와 이에모치 쇼군의 급사로 정벌이 중지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

게이오 3년(1867년) 6월 10일, 신센구미 대원 전원이 막신 신분을 얻게 되면서 곤도는 어용(御目見得) 이상의 격(300석)을 받아 막부의 공식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막부 대표의 일원으로 고토 쇼지로 등 여러 번의 요인들과 회담하며 조슈 정벌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등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토 가시타로 등과의 정치적 견해 차이는 심화되었다. 게이오 3년(1867년) 3월 13일, 이토 일파는 고료에지를 결성하며 신센구미에서 분리되었다. 같은 해 게이오 3년 10월 14일 대정봉환이 이루어지자 곤도는 이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게이오 3년 11월 18일, 곤도는 이토 가시타로를 유인하여 암살하고, 후지도 헤이스케 등 고료에지 대원들을 습격하여 살해했다(아부라노코지 사건).

게이오 3년 12월 9일 왕정복고 쿠데타가 발발하자, 구 막부 세력은 교토에서 철수 명령을 받았다. 게이오 3년 12월 18일, 곤도는 후시미에서 존왕파 제거를 위해 이동하던 중 고료에지 잔당의 습격을 받아 어깨에 총상을 입고 오사카성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 부상으로 인해 게이오 4년(1868년) 1월 3일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는 직접 지휘하지 못했다.

고슈 가쓰누마 전투에서의 곤도 이사미(近藤勇)


참수된 곤도 이사미의 머리가 공개적으로 전시된 모습. 1868년 신문


전투 패배 후 에도로 돌아온 곤도는 가쓰 가이슈를 만나 와카도시요리 격으로 승진했다.[27] 그는 신센구미 잔여 병력을 모아 갑양진무대(甲陽鎮撫隊|고요 친부타이일본어)를 결성하고, 오쿠보 쓰요시(大久保剛|오쿠보 고일본어)라는 가명을 사용하다 후에 오쿠보 야마토(大久保大和|오쿠보 야마토일본어)로 바꾸며 부대를 지휘했다. 고후 성 점령을 목표로 에도를 출발했으나, 게이오 4년(1868년) 3월 29일 고슈 가쓰누마 전투에서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이끄는 신정부군에게 패배했다.

이후 지바현 나가레야마에서 재기를 도모하려 했으나, 1868년 4월 신정부군에게 항복 형식으로 접근했다가 포박되었다. 결국 신원이 밝혀져 게이오 4년(1868년) 4월 25일 이타바시에서 적장으로서의 예우 없이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목은 교토 산조가와라에 효수(梟首)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2. 4. 도바·후시미 전투와 최후

1868년 1월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총상을 입은 곤도는 에도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가쓰 가이슈를 만났고, 급격히 붕괴하던 도쿠가와 막부에서 와카도시요리급(若年寄格|와카도시요리 가쿠일본어)으로 승진했다.[27] 곤도는 신센구미의 잔여 병력을 모아 고요 친부타이(甲陽鎮撫隊|고오요오 친부타이일본어, 갑양진무대)를 창설하고, 오쿠보 쓰요시(大久保剛|오오쿠보 쓰요시일본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3월 24일 막부로부터 고후 성(야마나시현 고후시)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에도를 출발했다. 그러나 3월 28일,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이끄는 신정부군(진충대)이 이미 고후 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후 동쪽의 가쓰누마(고슈시 가쓰누마 정) 마을에 주둔했다.

1868년 3월 29일, 곤도의 부대는 고슈 가쓰누마 전투(가시와오 전투)에서 신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약 2시간 동안 저항했지만 패배하고 흩어졌다. 곤도 일행은 에도로 후퇴하여 3월 8일에는 하치오지 숙(도쿄도 하치오지시)에 도착했다. 이 무렵, 나가쿠라 신파치, 하라다 사노스케 등은 아이즈에서 재기를 도모하려 했으나, 곤도와의 의견 차이로 결별하고 이탈했다. 곤도와 히지카타 도시조는 아이즈행을 준비하며 부대를 재편성하고, 옛 막부 보병들을 모집하여 병력을 200여 명으로 늘렸다. 이때 곤도는 가명을 오쿠보 야마토(大久保大和|오오쿠보 야마토일본어)로 다시 바꾸었다.

1868년 4월, 곤도와 부대는 시모사 국 나가레야마(지바현 나가레야마시)에 집결하여 재기를 도모했다. 그러나 신정부군은 이미 3월 13일에 이타바시 숙(도쿄도 이타바시구)에 진주해 있었고, 나가레야마의 신센구미가 배후를 습격할 것을 우려하여 4월 3일(양력 4월 25일) 나가레야마의 신센구미를 기습했다. 사쓰마 번 참모였던 아리마 도타는 '오쿠보 야마토'가 곤도 이사미 본인이라고 의심하여, 그를 고시가야시의 신정부군 진영으로 압송하도록 명령했다. 곤도는 4월 27일 이타바시로 연행되어 심문을 받았다. 같은 날 히지카타 도시조는 에도로 가서 가쓰 가이슈에게 곤도의 구명을 요청했다. 다음 날인 4월 28일, 가쓰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구명 편지가 이타바시에 도착했지만, 전달자는 체포되고 요청은 거절되었다.

곤도는 자신이 오쿠보 야마토라고 주장했지만, 과거 신센구미 대원이었으나 이토 가시타로를 따라 고료에지가 되었던 가노 와시오, 기요하라 기요 등에 의해 곤도 이사미임이 밝혀졌다. 도사 번의 다니 다테키 등은 사카모토 료마 암살의 배후로 곤도를 지목하며 처형을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사쓰마 번과의 논쟁 끝에 도사 번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1868년 4월 30일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곤도는, 게이오 4년 4월 25일(1868년 5월 17일) 이타바시 형장 근처에서 참수되었다. 향년 35세(만 33세)였다.[28] 당시 형 집행인은 요코쿠라 기소지(横倉喜三次|요코쿠라 기소지일본어)였으며, 조카 미야가와 유고로(宮川雄五郎일본어)도 현장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목은 교토로 보내져 산조오하시 근처의 강변 모래밭에 효수(梟示)되었다. 이타바시의 처형 장소는 상설 형장이 아닌, 곤도를 처형하기 위해 임시로 마련된 곳으로 추정된다.

사흘 후인 5월 20일, 곤도의 시신은 조카에 의해 거두어져 에도 오사와(小沢)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교토에 효수되었던 머리는 나중에 사이토 하지메가 수습하여, 알고 지내던 승려 손쿠 기텐(尊久義天일본어)에게 장례를 부탁했다고 한다. 이 머리는 승려가 아이치현 오카자키시로 이주할 때 함께 옮겨져 호조지(宝蔵寺) 뒤편 언덕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29]

도사 번의 다니 다테키는 곤도가 사카모토 료마 암살 혐의로 처형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1870년 미마와리구미의 전 대원 이마이 노부오가 자신이 암살을 실행했다고 자백한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곤도가 죽기 전에 남긴 사세구(辞世の句, 사망시)는 한시(칠언율시) 형태로 전해진다.

> 孤軍援絶作囚俘 / 고군원절작수포

> 顧念君恩涙更流 / 고념군은루갱류

> 一片丹衷能殉節 / 일편단충능순절

> 睢陽千古是吾儔 / 수양천고시오주

>

> (풀이)

> 외로운 군사 도움 끊겨 포로가 되니

> 돌이켜 임금의 은혜 생각하니 눈물 더욱 흐르네

> 한 조각 붉은 마음 능히 절개를 위해 죽으니

> 수양산의 백이와 숙제는 천고에 나의 친구로다

>

> 靡他今日復何言 / 미타금일복하언

> 取義捨生吾所尊 / 취의사생오소존

> 快受電光三尺劔 / 쾌수전광삼척검

> 只將一死報君恩 / 지장일사보군은

>

> (풀이)

> 달리 할 말이 오늘 무엇이 있으랴

> 의를 취하고 삶을 버림은 내가 존중하는 바

> 기꺼이 받으리라 번개 같은 서슬 퍼런 칼을

> 다만 이 한목숨 죽음으로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리라

3. 평가

일본 역사에서는 포로가 된 적장에게 예우를 갖춰 할복할 기회를 주는 경우가 많았으나, 곤도 이사미에게는 이러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는 그가 이끌었던 신선조가 유신지사들을 탄압했던 것에 대한 보복과 단죄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신선조는 당시 유신지사들에게 '정치 깡패'로 여겨지기도 했다.

곤도 이사미는 애검 '나가소테 고테쓰(長曽祢虎徹)'를 소지했으며, "오늘밤 고테쓰는 피에 굶주려 있다(今宵の虎徹は血に飢えている)"는 유명한 대사가 있지만, 이는 후세의 창작이다.

다양한 인물들이 곤도 이사미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 가와가미 다로자에몬(江川太郎左衛門): "무용과 호담은 부하 9만 명 중 으뜸이었다. 젊은 나이에 신선조의 두령으로서 교토 진호의 명을 받고, 한때 포악한 유랑 무리를 진압하여 막부 진호의 간성(干城)이 되었다. 용모는 웅장하고 목소리는 홍종(洪鐘) 같았으며, 붉은 얼굴은 대추 같고 기세는 주위를 압도했다. 그러나 과묵하고 사양할 줄 알았으며, 화기가 넘쳐 무인의 일반적인 약점인 엄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때문에 젊은 나이에도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당당히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다."[43]
  •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 "만나보니 생각보다 온화하고 사리에 밝은 인물이었다. 조금도 무모한 기미는 없었다. 그러나 곤도는 끝까지 사쓰마를 싫어하여 그들과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기에, 사쓰마 사람에게만은 과격하게 대하는 등, 일견 무모한 무사처럼 세간의 오해를 받게 되었다."[44]
  • 나카니시 킨비(中西君尾): "곤도는 정말로 강단 있는 남자다운 남자였다."[45]
  • 니시무라 스테쓰(西村捨三): "키가 크고 피부가 검으며 보통 체격에 천연두 자국이 있었다. 아주 차분하고 훌륭한 무사였다."[46]
  • 지바 야이치로(千葉彌一郎): "곤도의 검술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47]

4. 유산

2022년 4월 15일 일본 도야마현 다카오카시 오타의 선종 사찰 고쿠타이지(国泰寺)에서 곤도 이사미의 갑주가 발견되었다. 이는 막부 신료였던 야마오카 뎃슈(山岡鉄舟)가 공양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역적으로 몰려 참수된 곤도를 공개적으로 공양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도쿠가와 쇼군가와 연고가 있는 지방 사찰에 갑옷을 기증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48]

곤도 이사미의 묘소는 확인된 것만 최소 6곳 이상 존재한다. 주요 묘소는 다음과 같다.

장소위치설명비고
아이즈 텐네이지(天寧寺)에 있는 곤도 이사미의 묘소
텐네이지(天寧寺)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쓰시히지카타 토시조가 우쓰노미야 전투 부상 회복 중 곤도의 머리카락을 가져와 세웠다고 전해진다.[30] 마쓰다이라 가타모리가 내린 계명 관천원전순충성의대거사(貫天院殿純忠誠義大居士)가 있다.[30]매년 4월 25일 추선공양 묘전제가 열리며,[38] 2020년 히지카타 토시조 위령비가 옆에 건립되었다.[38]
-- 류겐지(龍源寺)도쿄도 미타카시 오사와조카 미야가와 유고로가 시신을 옮겨 가족과 함께 묻었다. 생가 터(현 조후시 노미즈) 근처이다.사세구 비석이 있다.
호조지(法蔵寺)아이치현 오카자키시곤도의 머리가 묻힌 두총(頭塚)이 있다.
이타바시역 부근 묘소에 있는 곤도 이사미 기념비
이타바시역 부근 묘소
도쿄도 기타구 이타바시역 동쪽 출구 근처 주토쿠지(寿徳寺) 밖옛 이타바시 형장 터 부근. 1875년 나가쿠라 신파치가 마쓰모토 료준, 사이토 하지메 등 생존 대원들과 함께 건립했다.곤도 이사미와 히지카타 토시조를 함께 기리고 있다.
고코쿠지(高国寺)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사촌 콘도 킨타로(近藤金太郎)가 머리를 몰래 가져와 묻었다고 전해진다.



곤도의 사형 후인 1876년, 그의 딸 콘도 타마(近藤タマ, 당시 14세)는 양자로 들어온 조카 미야가와 유고로(宮川雄五郎)와 결혼했다. 유고로는 콘도 유고로(近藤雄五郎)로 개명하고 천연리심류(天然理心流) 5대 종가를 계승했으며, 도쿄 조후시 가미이시하라(현 조후시 노미즈)에 도장 하츠운칸(撥雲館)을 열었다. 타마와 유고로 사이에는 1883년 아들 콘도 히사타로(近藤寿太郎)가 태어났으나, 타마는 3년 뒤인 1886년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콘도 히사타로는 1905년 러일 전쟁에서 22세의 나이로 전사하여 곤도 이사미의 직계 혈통은 단절되었다.[31]

그러나 곤도에게는 첩 고마노(駒野)와의 사이에 아들(후에 승려가 됨), 첩 오코(お孝)와의 사이에 딸 오유(お勇, 조선인 무역상과 결혼하여 아들 셋을 둠), 첩 오요시(およし)와의 사이에 아들이 더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곤도의 본가인 미야가와 가문은 대대로 농업에 종사했으며, 현재 후손들도 도쿄에서 농가를 경영하고 있다. 일족인 미야가와 세이조(宮川清蔵)는 천연리심류 9대 종가이다.

매년 나가레야마시와 아이즈와카마쓰 등지에서는 민간 단체 주도로 곤도 이사미를 추모하는 '곤도 이사미 기일(近藤勇忌)' 행사가 열린다. 곤도의 계명은 관천원전순충성의대거사(貫天院殿純忠誠義大居士)이다.

사망 직전 남긴 사세구(辞世の句)는 한시(칠언율시) 형식이며, 이 시가 새겨진 비석이 류겐지(龍源寺) 묘소에 있다.

:孤軍援絶作囚俘 / 顧念君恩涙更流

:一片丹衷能殉節 / 睢陽千古是吾儔

:(풀이)

::고립된 군대 도움 끊겨 포로가 되었네 / 돌이켜 임금의 은혜 생각하니 눈물 다시 흐르네

::한 조각 붉은 충심 능히 절개에 죽으니 / 수양성은 천고에 나의 벗이로다

:靡他今日復何言 / 取義捨生吾所尊

:快受電光三尺剣 / 只將一死報君恩

:(풀이)

::다른 마음 없으니 오늘 다시 무엇을 말하랴 / 의를 취하고 생을 버림은 내가 존중하는 바

::쾌히 받으리라 번갯불 같은 서슬 퍼런 칼을 /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리라

5. 기타


  • 2022년 4월 15일 일본 도야마현 다카오카시 오타의 선종 사찰 고쿠타이지(国泰寺)에서 곤도 이사미의 갑주가 발견되었다. 이는 막부의 신료였던 야마오카 뎃슈(山岡鉄舟, 1836~1888)가 공양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역적으로 몰려 참수된 곤도를 공개적으로 공양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도쿠가와 쇼군가와 연고가 있는 지방 사찰에 갑옷을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48]

  • 곤도 이사미는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소설, 애니메이션, 만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자주 다루어진다.
  • * NHK 대하드라마 신선조!는 곤도의 일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 * 은혼의 등장인물 곤도 이사오는 곤도를 모델로 한 캐릭터이다.
  • * 비디오 게임 원작 애니메이션 하쿠오키 신선조 기담에도 등장한다.
  • * 바람의 빛이나 피스 메이커 쿠로가네 같은 다른 작품에도 등장한다.
  • * 애니메이션 날아라! 이사미에서는 주인공의 조상이자 신선조 대원이었던 인물로 잠시 언급되며, 주인공 하나오카 이사미의 이름은 곤도 이사미에게서 따왔다.
  • * 애니메이션 골든 카무이에서도 잠시 등장한다.
  • * 비디오 게임 용과 같이 유신!에서는 배우 후나코시 에이이치로를 모델로 한 모습으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리메이크작 용과 같이 유신! 극에서는 성우 오오츠카 아키오가 목소리를 맡았고, 용과 같이 7의 등장인물 아다치 코이치의 외형을 하고 있다.
  • * 2021년 영화 바람의 검심 최종장: 더 비기닝에서는 배우 후지모토 타카히로가 곤도 이사미를 연기했다.
  • * 웹코믹 원작 애니메이션 종말의 발키리 시즌 2에 등장하여 인류를 대표하는 투사 중 한 명으로 신들과 싸운다.

  • '''애도(愛刀)''': 나가소네 고테쓰 오키사토(長曽祢虎徹興里, 나가소네 고테쓰라고도 불림)로 알려져 있다.
  • * 곤도가 실제로 고테쓰를 소유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진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명확하지 않다. 시모자와 칸의 『신센구미 시말기』(新選組始末記)에서는 "에도에서 구입했다", "고노이케 젠에몬에게 받았다", "사이토 하지메가 발견했다"는 세 가지 설을 소개하고 있다.
  • * 검술가 이누즈카 도쿠타로(犬塚徳太郎)는 이 칼이 미나모토 기요마로(源清麿)의 작품이며, 간토 대지진 때 소실되었다고 주장했다.
  • * 2020년 6월, 곤도의 애도였을 가능성이 높은 칼(이하 '본 작품')이 현존한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39] 이 칼은 가네코 겐타로가 소장했던 것으로 추정되며[39], "나가소네 고테쓰 오키사다"(長曽祢虎徹興貞)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39] 칼집에는 가네코의 필체로 보이는 글씨로 "곤도로부터 가나가와 숙의 나카무라 가문에 전해졌고, 그 집으로부터 가네코가 입수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39]

  •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이 등장하는 군담(軍談)을 들으며 자랐으며, 특히 삼국지연의관우를 동경했다고 전해진다.
  • 가토 기요마사를 존경하여, 입 안에 주먹을 넣을 수 있었던 가토 기요마사를 본받아 "기요마사 공처럼 출세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 곤도의 생가 터(현재 노가와 공원 입구 부근)는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남아 있었으나, 태평양 전쟁 중 조후 비행장 확장 공사로 철거되었다. 현재는 우물과 곤도 이사미를 모시는 작은 신사가 남아 있다.
  • 시즈오카현 후쿠로이시의 향토 요리인 '타마고후와후와'(玉子ふわふわ)를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대하드라마 신선조!의 설정일 뿐 실제 곤도의 일화는 아니다.[40]
  • 2011년 10월, 라이 산요 풍의 한시가 적힌 족자가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只應晦迹寓牆東、喋喋何隨世俗同。果識英雄心上事、不英雄處是英雄" ([https://www.jiji.com/news/photos/photo_news/images/450/view1492290.jpg 이미지]).
  • * 해석하면 "마땅히 자취를 감추고 동쪽 담벼락에 머물며 세속을 따라 떠들지 않으리. 진정 영웅의 마음을 안다면, 영웅답지 않은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다."라는 의미이다.[41]
  • 사쓰마번 무사들이 사용하는 지겐류 검술에 대해 "사쓰마의 첫 칼을 막아내라"며 최대한 경계했다고 한다.[42]
  • 사이토 하지메에게 '하쿠조슈(舶来種)의 네츠케'를 선물했다.
  • 가요곡 「近藤勇」(작사: 호시노 데쓰로, 작곡: 하마구치 구라노스케, 노래: 미카도 다이사쿠, 1988년)가 있다.

참조

[1] 서적 A Guide on Shinsengumi: the background and management. amazon.com 2021
[2] 서적 新選組: 最後の武士の実像 (Shinsengumi: saigo no bushi no jitsuzō) Chuōkōron-shinsha 2004
[3] 서적 新選組余話 (Shinsengumi yowa) Kojima-Shiryōkan 1991
[4] 서적 新選組: 最後の武士の実像 (Shinsengumi: saigo no bushi no jitsuzō)
[5] 서적 新選組大全史 (Shinsengumi dai zenshi) Shin Jinbutsu Oraisha 2003
[6] 서적 新選組余話 (Shinsengumi yowa)
[7] 서적 新選組大全史 (Shinsengumi dai zenshi) Shin Jinbutsu Oraisha
[8] 서적 新選組余話 (Shinsengumi yowa)
[9] 서적 新選組: 最後の武士の実像 (Shinsengumi: saigo no bushi no jitsuzō)
[10] 서적 Swordsmith Nagasone Kotetsu Okisato W.M. Hawley Publications 1990
[11] 서적 新選組大全史 (Shinsengumi dai zenshi) Shin Jinbutsu Oraisha
[12] 서적 新選組: 最後の武士の実像 (Shinsengumi: saigo no bushi no jitsuz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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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적 新選組大全史 (Shinsengumi dai zenshi) Shin Jinbutsu Oraisha
[16] 간행물 近藤・土方・沖田の新選組 (Kondō Hijikata to Okita no Shinsengumi) レキシ読本 (Rekishi Dokuhon) 2004-12
[17] 서적 Armed martial arts of Japan Yale University Press 1998
[18] 서적 新選組大全史 (Shinsengumi dai zenshi) Shin Jinbutsu Oraisha
[19] 서적 A Guide on Shinsengumi: the background and management. amazon.com 2021
[20] 서적 新選組余話 (Shinsengumi yowa)
[21] 서적 京都守護職始末 (Kyōto Shugoshoku Shimatsu) Heibonsha 1966
[22] 서적 新選組大全史 (Shinsengumi dai zenshi) Shin Jinbutsu Oraisha
[23] 서적 新選組大全史 (Shinsengumi dai zenshi) Shin Jinbutsu Oraisha
[24] 서적 新選組大全史 (Shinsengumi dai zenshi) Shin Jinbutsu Oraisha
[25] 문서 6-month, 10-day, 1867 by the lunar calendar 1867-00-00
[26] 서적 新選組: 最後の武士の実像 (Shinsengumi: saigo no bushi no jitsuzō)
[27] 웹사이트 近藤勇 KONDO http://www.tamahito.[...] 2019-04-30
[28] 서적 新選組余話 (Shinsengumi yowa)
[29] 웹사이트 日本吉 - NIPPON-KICHI https://nippon-kichi[...] 2019-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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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웹사이트 近藤勇 | 近代日本人の肖像 https://www.ndl.go.j[...]
[33] 문서 在・東京都調布市野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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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뉴스 壬生浪士幹部?の借用証発見 同一人物説の新家粂太郎連署 京都新聞 2015-02-19
[36] 서적 新撰組始末記 維新史料野史台30
[37] 서적 風説都の錦 八 早稲田大学図書館
[38] 웹사이트 新選組局長・近藤勇を慰霊 若松・天寧寺、幕末に思いはせ焼香 https://www.minyu-ne[...] 福島民友新聞 2022-05-04
[39] 뉴스 『近藤勇の虎徹』ネットオークション 95万円で落札 https://special.sank[...] 産経新聞 2020-06-08
[40] 서적 考証要集 2 蔵出し NHK時代考証資料 文藝春秋 2018-12-04
[41] 웹사이트 新発見!初公開の近藤勇詩書 http://www.rekishiji[...]
[42] 웹사이트 http://www.shinchosh[...]
[43] 간행물 活文字 1926-01
[44] 서적 処世の大道
[45] 서적 勤王芸者 維新情史
[46] 서적 維新雑史考
[47] 서적 江戸の実話
[48] 뉴스 新選組・近藤勇の甲冑か 富山・国泰寺で発見 山岡鉄舟「寄進」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22-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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