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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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지전은 제한적인 무력을 사용하여 일부 지역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의미하며, 분쟁의 단계 또는 무력 충돌의 강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 국지전은 전면전 이전의 기습 공격, 제한적인 목표 달성을 위한 전쟁 등 다양한 목적으로 수행될 수 있으며, 참전 국가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국지전은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포클랜드 전쟁 등 다양한 사례가 있으며, 사이버 공간에서도 발생한다. 한국은 과거 제승방략 체제를 통해 국지전에 대비했으며, 현재는 육군을 중심으로 5분 전투 대기 부대 운용, 경계 근무 등을 통해 북한의 국지 도발 억제에 주력하고 있다. 미래의 국지전은 로봇 기술 도입, 전장의 복합화 등으로 인해 기동전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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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지전 | |
|---|---|
| 국지전 | |
| 개요 | |
| 유형 | 전면전과 제한전쟁 사이 |
| 규모 | 특정 지역 또는 제한된 목표 |
| 특징 | 제한된 목표 제한된 자원 동원 특정 지역에 국한 |
| 배경 | |
| 원인 | 정치적 갈등 경제적 이익 다툼 민족/종교 분쟁 |
| 목표 | 특정 지역 장악 자원 확보 정치적 영향력 확대 |
| 전략 및 전술 | |
| 특징 | 제한된 군사력 사용 특정 목표에 집중 외교적 해결 노력 병행 |
| 예시 | 게릴라전 특수전 정규전 (규모 축소) |
| 영향 | |
| 정치적 영향 | 지역 불안정 야기 국제 관계 긴장 고조 정권 교체 또는 약화 |
| 경제적 영향 | 경제 기반 시설 파괴 자원 고갈 투자 감소 및 경제 침체 |
| 사회적 영향 | 난민 발생 사회 기반 시설 파괴 인권 침해 |
| 관련 개념 | |
| 관련 용어 | 전면전 제한전쟁 대리전 내전 |
| 참고 | |
| 관련 정보 | 국지전 (시사상식사전) |
2. 국지전의 정의
'''국지전'''은 분쟁의 단계, 무력 충돌의 강도, 그리고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다.
- '''분쟁 단계'''로서 국지전은 소규모 게릴라전과 테러에서 나아가 실질적으로 군 조직을 동원하여 제한적인 무력을 사용하는 단계이다.
- '''무력 충돌 강도'''로서 국지전은 일부 지역에서 제한적인 무력을 동원하는 분쟁을 의미한다.
- '''목적'''에 따라 국지전은 전면전의 전 단계에서 기습 공격의 특징을 보이며, 상대 국가를 도발하려는 목적으로 실시되거나, 특정 목적을 위해 수행된다.
6.25 전쟁은 남북한 입장에서는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면전이지만, 미국과 소련의 입장에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 간의 대리전 성격을 띤 국지전으로 해석될 수 있다.[2] 이처럼 국지전은 어떤 국가의 입장에서 해석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규정될 수 있다.
2. 1. 분쟁 단계로서의 국지전
분쟁은 잠재, 대립, 위기, '''국지전''', 전면전, 휴전 대립, 해결 단계를 거친다.[6] 국지전은 소규모 게릴라전과 테러에서 나아가 실질적으로 군 조직을 동원하여 제한적인 무력을 사용하는 단계이다.2. 2. 무력 충돌 강도로서의 국지전
무력 충돌은 전면전, 국지전, 게릴라전, 폭동/테러 등으로 구분된다.[6] 국지전은 이 중 한 단계로, 일부 지역에서 제한적인 무력을 동원하는 분쟁을 의미한다.| 국지전 (B급) |
|---|
2. 3. 목적에 따른 국지전
국지전은 다양한 목적을 갖는다. 우선, 전면전의 전 단계에서 기습 공격의 특징을 보이며, 상대 국가를 도발하려는 목적으로 실시된다. 이는 나아가 전면전을 유도하려는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다. 다른 경우에는 특정 목적을 위해 국지전을 벌이기도 한다. 전면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원치 않으면서 상대 국가와 전쟁을 해야 할 때 제한전, 즉 국지전을 벌인다. 전쟁 당사국들이 전면전으로 인한 공멸 가능성을 인지하고, 전 세계로 전장을 확대하지 않는 단순한 국가 간의 전쟁으로 끝내기를 원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국지전은 적의 전력을 탐색하고, 아군의 사기를 높이며, 전면전 발생 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는 목적을 갖는다.[7]제한 전쟁은 적을 완전히 섬멸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인 목표 달성을 승리로 간주하는 전쟁이다. 제한 전쟁에서는 목적을 제한함으로써 군사적 수단을 제한하고, 가능한 적은 비용으로 평화를 달성하고자 한다. 리델 하트는 전쟁의 목적이 적은 인적, 경제적 손실로 적의 저항 의지를 꺾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적에 대한 작전을 구상할 때 적의 의지를 꺾는 것과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며, 적의 군사력 파괴를 위해 희생을 늘려서는 안 된다.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상대국의 군사력을 철저히 파괴하는 전략이 유행했지만, 현대적인 제한 전쟁 이론은 이러한 섬멸 전략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이는 사용 가능한 군사력을 굳이 사용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전략 이론이다.
키신저는 제한 전쟁이 가능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다음을 제시했다.
- 제한 전쟁의 군사력은 적대자가 기정사실을 만드는 것을 막기에 충분해야 한다.
- 적대자에게 전면전의 전조가 아님을 확신시키는 성격을 가져야 한다.
- 적대자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지 않는 해결책에 대해 외교 교섭할 의지가 있음을 전달하는 외교 정책과 결합해야 한다.
적의 군사력에 대응 가능한 군사력을 투입하면서도 전면적인 충돌은 피하고, 상대가 군사 행동을 완수하지 못하도록 외교 교섭을 통해 타협을 이끌어내는 것이 제한 전쟁의 기본 조건이다. 따라서 제한 전쟁에서 군사력을 운용하는 형태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전투 없이 군사력 증강이나 이동을 통해 상대국에 자국의 의지를 보여주고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형태.
- 제한적인 군사력으로 전투를 수행하여 전쟁 확대를 막고 일정 수준에서 제어하면서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형태.
상대국과의 접촉을 유지하면서 정치적 판단에 따라 군사력을 사용하고, 외교 교섭 달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 제한 전쟁에서 중요하며, 적의 전력을 격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대국이 어떤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2. 4. 입장에 따른 국지전
6.25 전쟁은 남북한 입장에서는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면전이지만, 미국과 소련의 입장에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 간의 대리전 성격을 띤 국지전으로 해석될 수 있다.[2] 이처럼 국지전은 어떤 국가의 입장에서 해석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규정될 수 있다.6.25 전쟁 발발 이전부터 38선 부근에서는 이미 수십 차례의 국지적 무력 충돌이 있었으며, 이것이 확대되어 전쟁이 발발했다는 '내란 확장설'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이전에도 이미 수많은 국지전이 존재했고, 당시 사람들은 이를 기존 국지전의 연장으로 인식하여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3. 국지전의 역사적 사례

국지전은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생해 왔다. 제한 전쟁은 적을 완전히 섬멸하기보다는 제한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적은 비용으로 평화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리델 하트는 전쟁의 목적이 적은 인적, 경제적 손실로 적의 저항 의지를 꺾는 것이라고 보았다.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적의 군사력을 철저히 파괴하는 전략이 사용되었지만, 현대 제한 전쟁 이론은 이에 대한 반성으로 발전했다. 특히 핵 시대에 들어서면서 핵무기 사용으로 인한 핵전쟁 위험 때문에 제한 전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1950년 한국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이념 대립으로 발생한 정규전이었지만, 미국군은 핵 공격 가능성을 두고 논의했다. 로버트 오스굿, 버나드 브로디, 헨리 키신저 등 미국의 전략가들은 핵무기를 고려한 안보 환경에서 핵전쟁 위험을 피하면서 군사력을 활용하는 전략 이론을 발전시켰다.
다음은 국지전의 주요 사례들이다.
| 발생 시기 | 사건 | 내용 요약 |
|---|---|---|
| 1949년 5월 4일 | 개성 송악산 고지 전투 | 개성 송악산 고지에서 벌어진 국지적 전투. |
| 1941년 12월 7일 | 진주만 공격 | 일본 해군이 미국 하와이주 오아후섬의 진주만 기지를 기습 공격.[1] |
| 1950년 6월 25일 이전 | 38선 부근 국지전 | 6.25전쟁 이전,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2] |
| 시기 불명 |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쟁 |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제한적인 전쟁이나 유사한 행위를 했다.[3] |
| 크림 전쟁 시기 | 영국의 제한전 | 영국 총리 로버트 펄은 러시아에 맞서 제한전을 벌임.[2] |
| 한국 전쟁 시기 | 해리 S. 트루먼과 더글러스 맥아더의 대립 | 해리 S. 트루먼은 38선 이북 봉쇄를, 더글러스 맥아더는 북한 격퇴를 주장.[2] |
| 베트남 전쟁 시기 | 미국의 제한전 |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을 피하면서 공산주의 확산을 억제하기 위해 제한전략을 사용.[3] |
| 1967년 ~ 1970년 | 소모전 |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벌어진 포격, 공중전, 소규모 기습 등.[8] |
| 1967년 중인 전쟁 시기 | 나투 라와 초 라 충돌 | 인도와 중국 간의 국경 분쟁. |
| 1982년 4월 2일 ~ 6월 14일 | 포클랜드 전쟁 | 아르헨티나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
| 1999년 3월 24일 ~ 6월 10일 |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NATO 폭격 | NATO가 코소보 전쟁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에 대해 벌인 군사 작전.[5] |
| 1989년 12월 20일 | 미국의 파나마 침공 | 미국이 마약 밀수에 관여했다는 명분으로 파나마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체포하기 위해 공격.[8] ![]() |
| 1990년 8월 2일 ~ 1991년 1월 17일 | 걸프 전쟁 | 이라크 군의 쿠웨이트 점령과 병합에 대한 반대로 일어난 미국 주도의 34개국 연합군 병력에 의해 발발한 국지전.[8] |
| 1984년 11월 23일 | 판문점 총격전 | 소련 관광 가이드가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면서 북한 측과 총격전 발생. |
| 1999년 6월 15일 | 제1 연평해전 |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침범하여 발생한 전투.[1] |
| 2002년 6월 29일 | 제2 연평해전 |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 발생한 남북한 함정 사이의 해전.[2] |
| 2009년 11월 10일 | 대청해전 | 북한 경비정이 서해 대청도 인근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와 발생한 해전.[3] |
3. 1. 한국 전쟁 이전
개성 송악산 고지에서 1949년 5월 4일 벌어진 국지적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은 1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조선 인민군은 13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은 개성 송악산 전투 중 박격포탄을 안고 적진에서 산화한 육탄 10용사 부조상이다.1941년 12월 7일 미합중국 하와이주 오아후섬의 미합중국 해군의 진주만 기지를 일본 해군이 기습한 공격이다.[1] 2척의 미 해군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으며, 2,335명의 군인과 68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1]
6.25전쟁과 관련된 여러 시각 중, 1950년 이전부터 이미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이 수십 차례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확대되어 6.25 전쟁이 되었다는 '내란 확장설'에 의하면,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수많은 국지전과 무력 충돌이 있었다.[2]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전쟁 기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2]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제한적인 전쟁이나 유사한 행위를 했다.[3] 유럽인들과 접촉할 당시 동부의 부족들은 종종 모든 적을 죽이지 않고, 자신들의 인구를 보충하기 위해 포로로 잡아들여 입양했다.[3] 이는 애도 전쟁과 관련이 있다.[3] 아즈텍은 종속 국가들을 상징적으로 굴복시키고 희생 제물로 바칠 포로를 잡기 위해 꽃 전쟁을 벌였으며, 이들은 상징적으로 입양되었다.[3] 이 전쟁들은 비전투원과 물질을 물리적인 피해의 위험 없이 남겨두었다.[3]
3. 2. 냉전 시기
크림 전쟁 당시 영국 총리 로버트 펄은 전면전을 수행하려면 대규모 군대 개혁이 필요했기 때문에 러시아에 맞서 제한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2]한국 전쟁 발발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38선 이북의 북한 봉쇄를 주장한 반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북한 격퇴를 주장하며 대립했다. 트루먼의 제한전 정책에 대한 맥아더의 불만은 결국 그의 해임으로 이어졌다. 트루먼은 소련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제한전 정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2]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을 피하면서 공산주의 확산을 억제하기 위해 제한전 전략을 사용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점증적 확전 정책에 반대하며 1963년 국무부를 떠난 리처드 바넷은 1968년 "대통령은 의도적인 정책으로서 주요한 군사적 개입을 거부했지만, 그것을 확실하게 만들 관료적 운동력을 발휘했다."라고 자신의 우려를 표명했다.[3]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벌어진 소모전은 포격, 공중전, 소규모 기습 등으로 이루어졌다.[8]
1967년 중인 전쟁은 인도와 중국 간의 국경 분쟁으로, 나투 라와 초 라 충돌이라고도 불린다.
3. 3. 냉전 이후
1982년 4월 2일부터 6월 14일까지 아르헨티나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은 10주 동안의 전쟁 끝에 양측 모두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끝났다.1999년 3월 24일부터 6월 10일까지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에 대해 NATO가 코소보 전쟁 기간 동안 벌인 군사 작전인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NATO 폭격은 주로 대규모 공중전을 사용하여 고고도에서 유고슬라비아 군사 기반 시설을 파괴했다. 공습 기간 동안 489명에서 528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군사 시설 및 거점을 비롯해 회사 또는 기업의 건물과 교량, 공공시설, 산업단지가 파괴되었다.[5]
1989년 12월 20일, 미국은 마약 밀수에 관여했다는 명분으로 파나마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체포하기 위해 병력 2만 4천 명을 파나마로 파병하여 공격했다. 사실상 미국이 파나마 운하 운영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리에가를 제거한 사건이다.[8]
걸프 전쟁은 1990년 8월 2일 이라크 군의 쿠웨이트 점령과 병합에 대한 반대로 일어난 미국 주도의 34개국 연합군 병력에 의해 발발한 국지전이다. 1991년 1월 17일에 시작되어 5주 간 지속된 공중 및 해상 폭격으로 이라크 군대를 쿠웨이트에서 몰아냈다. 미국은 중동지역에서의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암암리에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을 부추겼고, 그 후 걸프 전쟁을 통해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게 된다.[8]
3. 4. 한국의 국지전 사례
1984년 11월 23일 11시 30분경 소련의 관광 가이드였던 바실리 야코블레비치 마투조크가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면서 도움을 요청하자, 이를 저지하고자 북한 측에서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실패하였고, 북한군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 150m까지 침범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군 1명이 전사하고 미군 1명이 부상당했다.1999년 6월 15일 오전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한국 영해를 침범했다. 이에 한국 해군의 고속정이 선체를 충돌시키는 방법으로 밀어내는 과정에서 전투가 발생했다.[1]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 25분경,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쪽 3마일,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제1 연평해전이 벌어진 지 3년 만에 같은 지역에서 남북한 함정 사이에 해전이 발생했다.[2]
2009년 11월 10일 북한 경비정이 서해 대청도 인근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와 우리 해군 고속정에 조준 사격했다. 이에 우리 해군이 2분 만에 4,900여 발의 집중 포화를 퍼부었고, 북한 경비정은 침몰 직전 퇴각했다.[3]
4. 사이버 공간에서의 국지전
사이버전은 현실의 물리적 충돌뿐만 아니라 사이버 공간에서도 벌어지는 국지전의 한 형태이다. 적국의 정보를 빼내거나 네트워크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등의 공격이 이루어진다.[9]
사이버전은 약한 형태의 위협을 가할 기회를 제공한다. 관심사를 알리고 가까운 장래에 공격이 점차 강화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2007년 에스토니아, 2008년 조지아(국가)를 사이버 공격한 러시아의 형태를 해석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두 사례 모두 서비스 거부 공격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지만, 조만간 벌어질 수 있는 일에 대한 경고 역할을 했다. 이런 식으로 국가들은 "작은 만행과 정도, 방해, 파괴, 나아가 사이버 괴롭힘까지 범죄를 저지르며 점점 더 개인 해커"처럼 행동했다. 사이버전은 지나친 도발을 피하면서도 탐색을 지속하는 명확한 한계가 없는 자유로운 형태의 분쟁이지만, 신뢰할 수 있는 국가의 행태에는 어울리지 않는 수준에서 여전히 수행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이버 공격은 전략 폭격보다는 비정규전에 더 비슷해지고 있다.[9]
이처럼 사이버전은 대체로 국지전에서 볼 수 있는 성격을 지닌다. 적국의 사이버 망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며 대규모로 벌이는 것이 아닌, 개인의 행동처럼 국가가 소규모로 괴롭히는 형태이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사이버전이 현대 전면전으로 벌어지게 되었고, 기존의 국지전으로서의 사이버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5. 한국의 국지전 대비
현대 한국군은 북한의 국지 도발에 대비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60년대부터 국방 운영 지침을 명확히 설정하고,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며 군 장비를 현대화하여 북한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11]
1.21 무장공비사건, 푸에블로호 사건, 닉슨 독트린 등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1960년대 말부터 자주 국방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12] 이에 따라 한미 연합 억제 전력에서 독자적인 억제 전력으로 전환하고, 전쟁 억제를 통해 확보된 시간을 활용하여 공수 양면의 신축성 있는 군사력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전략이 변화했다.[13]
1981년에는 국방 목표를 개정하여 적의 무력 침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 평화 통일을 뒷받침하며 지역 안정과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 설정했다.[14] 1990년대에는 대북 관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고자 실질적인 자주 국방 기반을 조성하고 군사력 건설을 통해 대북 군사 열세를 보완하고자 했다.[15] 평시 작전 통제권 한국군 환수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5. 1. 역사 속 국지전 대비
조선 시대의 제승방략 체제는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국지전 전술이었다. 조선 전기 국방 체제는 1457년(세조 3) 만들어진 진관 체제였다. 이는 행정 단위에 따라 소속 지역을 지키는 전략이었기 때문에 많은 군사와 군비를 발생시켰다. 또한 군사를 분산시키게 되므로 상습적으로 침입을 당하는 지역이나 군사 요충지를 선별하여 병력을 집중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골칫거리였던 북방 여진족과 남해안 왜구와 벌이는 소규모 국지전에 대처하기에는 비효율적이었다.조선 정부는 1510년(중종 5) 일어난 삼포왜란을 계기로, 전투가 벌어지는 거점 지역에 각 진관의 수령이 휘하 군사들을 이동시키고, 중앙 정부에서 보낸 군사 전문 지휘관의 지휘를 받는 제승방략의 방어 체제를 구축하였다. 조선 정부는 비전문가가 지휘하는 분산적 방어 시스템을 전문가가 지휘하는 집중적 방어 시스템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변방의 국지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10] 그러나 제승방략은 전술적 차원의 대응 개념이지 전면전에 대비한 전략적 차원의 대응 개념으로 적합하지 않았다.[8] 따라서 제승방략 체제는 임진왜란이라는 대규모 전면전에서 한계가 드러나 폐지된다.
5. 2. 현대 한국군의 국지전 대비
1960년대부터 한국 정부는 국방 분야의 운영 지침을 명확히 설정하여 전략을 개념적으로 제시하기 시작했다. 1964년, 정부는 '북한의 무력 도발에 대비한 군사 대비 태세 완비'를 국방 기본 시책으로 설정하고, 미국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며 군 장비를 현대화하여 북한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11] 수도권 방어를 위해 북한의 예상 침투로를 따라 지상 부대를 밀집 배치하여 현 진지를 사수하는 전략을 채택했고, 이를 위해 병력 집약적 군사 자원이 요구되어 보병 위주의 군사력 건설에 집중했다.1960년대 말 이후, 1.21 무장공비사건, 푸에블로호 사건, 닉슨 독트린, 월남 패망 등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한국 정부는 국방의 자주화를 강조하기 시작했다.[12] 이 시기 전략은 한미 연합 억제 전력에서 독자적인 억제 전력으로 전환하고, 전쟁 억제를 통해 확보된 시간을 활용하여 공수 양면의 신축성 있는 군사력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억제 실패 시에는 공세적 전방 방어 전략을 적용하고, 평시 국지 도발에 대해서는 응징 보복을 가하는 것이었다.[13]
1981년, 한국 정부는 국방 목표를 개정하여 적의 무력 침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 평화 통일을 뒷받침하며 지역 안정과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 설정했다.[14] 전략은 한미 연합 방위 태세와 자주 국방을 기반으로 전쟁 도발을 억제하고, 전쟁 발발 시에는 적의 전쟁 의지를 조기에 분쇄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독자성과 공세성이 더욱 강조되어, 수동적 방어보다는 선제적 대응과 강경한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었다.
1990년대, 한국 정부는 대북 관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고자 실질적인 자주 국방 기반을 조성하고 군사력 건설을 통해 대북 군사 열세를 보완하고자 했다.[15] 평시 작전 통제권 한국군 환수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 시기 전략은 공세성이 감소하고 독자성이 증대되는 특징을 보였다. 억제력 강화를 위해 한국군 자체적으로 군사력 요소를 보유할 필요성이 커졌고, 지상군 보병 중심에서 해·공군력 및 지상군 기동 전력 중심으로 군사력 건설 방향을 전환했다.[16]
현재 한국군은 상당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다. 지상군은 대규모 상비군을 보유하고, 국산 무기는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을 정도이다. 공군은 F-35 스텔스 전투기를 운영하며, 해군은 성능이 우수한 한국형 전투함을 지속적으로 건조하여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국군의 질적 향상과 독자성 증강을 통해 북한의 국지 도발 억제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육군은 초동 조치를 강조하여 당직 및 경계 근무를 시행하고 5분전투대기부대를 운용하며, 최전방에서 수색대대 운용, GOP 철책 근무 등으로 북한에 대한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6. 미래의 국지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에는 전면전보다 '''국지전'''이 더 자주 발생한다. 전면전은 국가의 모든 자원을 전쟁에 투입해야 하고, 경제적, 정치적 위험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핵무기의 등장으로 제2차 세계 대전과 같은 전면전은 비효율적이고 무의미해졌다.[17] 핵무기는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 놓았는데, 전쟁의 목적, 수단, 지리적 공간에 제한을 가져왔다. 제한ㆍ국지전쟁이 등장한 것이다. 핵무기가 제한ㆍ국지전쟁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현대에 들어 그 특징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18] 즉, 전면전의 위험성과 핵무기로 인한 전면전 수행의 어려움 때문에 현대에는 '''국지전'''이 중요해졌다.
6. 1. 로봇 기술의 도입

최근 아프가니스탄 전과 이라크 전에서 새로운 전쟁 양상을 볼 수 있다. 미군은 약 4000대 이상의 로봇 병사들을 실전에 투입하여 각종 폭발물 제거, 감시 및 정찰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또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에서는 드론이 다방면으로 활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19] 미 육군의 미래전투체계(FCS : Future Combat System)계획과 맞물려 전투 로봇까지 투입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여러 국방 분야에서 발전된 과학기술이 응용되는 가운데 특히 경계, 감시, 정찰 분야에서 로봇의 소요가 증가하고 있다. 미래전의 개념이 구체화 되면서 전장에서 로봇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대한민국 육군은 군사용 로봇 개발 계획에서 2015년 이전 정찰용 휴대 로봇을 보병 부대 및 대 테러 부대에 배치 운용하고 2015년부터 2020년까지 다목적 ‘견마로봇’을 개발하여 소·중대급에서 지뢰 탐색, 제거, 정찰, 경계 및 순찰 용도로 배치할 예정이다.[20] 이러한 양상에 따라서 로봇과 드론 등의 기계가 인간 대신 경계 작전을 수행하며, 침입 대응, 침투 임무 등의 '''국지전'''을 수행하리라 예측되고 있다.

이러한 기술 적용에 있어서 기술적인 고려 사항으로는 크게 5가지 분류가 존재한다.[20]
# 통신
# 플랫폼
# 센서노드
# 자율화
# 전원 체계 및 피아식별
6. 2. 전쟁 형태 결정 요인
미래의 국지전은 전장이 복합화(지상, 해상, 공중, 우주, 사이버)되고, 민간인과 군인이 혼재되는 등의 특징 때문에 기동전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군인과 무기 측면에서는 국가별, 상황별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21]| 전쟁의 구성 요소 | 기동전을 추구하는 결정 요인 | 소모전을 추구하는 결정 요인 |
|---|---|---|
| 군인 | ||
| 무기 | ||
| 전장 |
최근 발생한 국지전 및 여러 분쟁, 전투를 살펴보면, 특히 전장 측면에서는 전장의 복합화가 이루어졌고, 도심지에서 민간인과 군인이 섞여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므로 기동전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군인, 무기 측면에서는 국가별, 각종 조건별로 참고할 부분이 더 많이 존재하기에 어느 하나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비전통적 안보 위협 등 기존과 다른 부분이 많아진 점 역시 그 원인 중 하나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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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용 드론 시험장이 된 우크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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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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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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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전쟁양상 변화 예측과 한국군 발전 방향: 전쟁 구성요소와 전쟁 형태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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