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2021년)
1. 개요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2021년)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과 동맹국이 알카에다를 지원하는 탈레반 정권을 응징하고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시작된 군사 작전이다. 1978년 공산 정권 수립 이후 무자헤딘 봉기, 소련의 개입과 철수, 탈레반의 등장과 알카에다 보호 등의 배경을 거쳐, 2001년 미국의 침공으로 이어졌다. 전쟁 초기에는 탈레반 축출과 과도 정부 수립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후 탈레반의 저항과 ISAF의 개입이 장기화되었다. 2020년 미국과 탈레반 간 평화 협정 체결 이후 미군이 철수하면서 2021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재장악,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전쟁으로 막대한 인명 피해와 난민 발생, 전쟁 범죄, 마약 문제 심화 등 다양한 영향이 발생했다.
-
2000년대 -
다르푸르 분쟁
-
2000년대 -
너드
너드는 1950년대 미국에서 책벌레 기질과 사회 부적응을 의미하는 속어로 시작되어, 지적 능력과 사회 기여 측면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며, 최근에는 자긍심을 나타내는 문화도 형성되었다. -
2002년 분쟁 -
예멘 알카에다 반란
예멘 알카에다 반란은 알카에다 아랍반도 지부(AQAP)의 테러 활동과 예멘 정부 및 국제 사회의 대응을 의미하며, AQAP은 2000년대 초부터 외국인 공격을 포함한 여러 테러를 감행하고 이슬람 토후국 선포를 시도하며 예멘 정부와 충돌했다. -
2002년 분쟁 -
마그레브 반란 (2002년~현재)
마그레브 반란은 알제리 내전 이후 2002년부터 현재까지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에서 이슬람 반군과 정부 간에 벌어지는 분쟁으로, 알제리에서 시작하여 주변 국가로 확산되었고 알카에다 이슬람 마그레브(AQIM)의 활동으로 더욱 복잡해져 사헬 지역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미국-아프가니스탄 관계 -
칸다하르 학살
2012년 3월 11일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주에서 미군 로버트 베일스 상사가 민간인 16명을 살해한 칸다하르 학살은 아프간 국민들의 반미 감정을 격화시키고 탈레반의 복수를 불러 평화 회담을 중단시켰으며, 베일스 상사는 군사 재판에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미국-아프가니스탄 관계 -
도하 협정 (2020년)
2020년 도하 협정은 미국과 탈레반 간에 체결되어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철수, 탈레반의 테러 방지 약속, 아프가니스탄 정부와의 대화 조건을 포함했으나, 아프가니스탄 정부 배제와 탈레반의 공세, 미국의 철수로 인해 실패했으며, 이는 국제 사회와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문제, 탈레반의 위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대한민국의 안보, 경제, 외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2. 전쟁 배경
1978년 공산 정권 수립과 함께 전국적으로 무자헤딘이라 불리는 무장 세력이 봉기했다. 1979년 소비에트 연방은 군사 개입을 했지만, 동구권 이외의 지원을 받은 무자헤딘을 몰아내지 못했고, 1989년 소련군은 철수했다.
소련군 철수 이후 무자헤딘끼리 내전을 일으켜 군벌을 형성하고 전투가 계속되었다. 1994년경 파키스탄군의 지원을 받은 파슈툰족 무장 세력인 탈레반이 세력을 확장하여 국토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러나 탈레반 정권은 이슬람 근본주의적이었으며,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를 국내에 보호하고 테러리스트의 훈련 캠프를 설치했다.
이 때문에 탈레반 정권을 승인한 국가는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세 나라에 불과했고, 아프가니스탄의 유엔 대표권은 부르하누딘 라바니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국가가 유지했다. 라바니를 비롯한 구 무자헤딘 세력은 북부동맹으로 북부에서 저항을 계속했지만, 탈레반에 밀리고 있었다.
1998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가 발생하자 미국은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 내 훈련 캠프를 토마호크로 공격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1214호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1267호를 통해 알카에다와 빈 라덴 등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탈레반 정권은 따르지 않았다.
알카에다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2000년 콜호 해군함 공격 사건이 발생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1333호가 채택되어 다시 알카에다 인도가 요구되었지만, 탈레반 정권은 아프가니스탄의 손님 접대 전통 등을 이유로 거부했다.
2001년 탈레반 정권은 바미얀 석불을 파괴했다. 이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고, 탈레반 정권은 더욱 고립되었다.
2001년 9·11 테러 발생 후,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탈레반에 오사마 빈 라덴의 인도를 요구했다. 탈레반 정권은 9·11 테러가 오사마 빈 라덴에 의한 것이라는 증거를 요구하며, 사실이라면 제3국으로 출국시키겠다고 답했다. 부시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자유의 불멸 작전 개시를 지시했다.
2001년 말, 본 협정을 통해 하미드 카르자이를 수반으로 하는 아프가니스탄 과도 정부가 구성되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국제 안보 지원군(ISAF)을 창설하여 카불 확보를 지원했다.
정권에서 쫓겨난 탈레반은 무하마드 오마르에 의해 재편되었고, 2003년부터 다국적군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대한 반란을 시작했다. 탈레반은 게릴라전, 자살폭탄 테러 등 비대칭전을 벌였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남부와 동부 농촌 지역에서 영향력을 회복했고, ISAF는 대반란 작전에 병력을 증강하여 대응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폭력 행위는 확대되었다. 2009년에는 병력이 급증하여 2011년까지 증가를 계속했고, ISAF와 미국의 지휘하에 약 14만 명의 외국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했다.
2012년 NATO 정상은 군대 철수 전략을 시작했고, 미국은 2014년 12월에 주요 전투 활동을 종료하고 잔류 병력을 남기겠다고 발표했다. 2014년 12월 28일, NATO는 아프가니스탄에서 ISAF의 전투 활동을 공식적으로 종료하고 안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이양했다. 같은 날, ISAF의 후속 조직으로 NATO 주도의 확고한 지원 임무가 시작되었다.
2020년 도하에서 미국과 탈레반 간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배제되었다. 2021년 조 바이든 대통령은 9월 11일까지 주둔 미군을 완전히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2021년 5월부터 탈레반은 대공세를 시작했고, 2021년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장악했다고 선언했다. 2021년 8월 30일 미군은 철수를 완료했고, 2021년 8월 31일 바이든은 전쟁 종식을 선언했다.
2.1.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78년 공산 정권이 수립되자, 전국적으로 무자헤딘이라 불리는 무장 세력이 봉기했다. 이에 1979년 소비에트 연방이 군사 개입을 했지만, 무자헤딘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하고 1989년 소련군은 철수했다. 이 전쟁을 통해 알카에다와 탈레반이 등장했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탈레반에게 무기와 전술 등을 지원했고, 훗날 그 화살이 미국에게 돌아오게 된다.
오사마 빈 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자극받아 아프가니스탄으로 건너가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소련군 철수 이후, 무자헤딘들은 서로 내전을 일으켜 군벌을 형성하고 전투를 계속했다. 1994년경 파키스탄군의 지원을 받은 파슈툰족 무장 세력인 탈레반이 세력을 확장하여 국토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러나 탈레반 정권은 이슬람 근본주의적이었으며, 알카에다를 국내에 보호하고 테러리스트의 훈련 캠프를 설치했다.
탈레반 정권을 승인한 국가는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세 나라에 불과했고, 아프가니스탄의 유엔 대표권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국가가 유지했다. 북부동맹은 북부에서 탈레반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지만, 탈레반에 밀리고 있었다.
1998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가 발생하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내 훈련 캠프를 토마호크로 공격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1214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1267호를 통해 알카에다와 빈 라덴 등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탈레반 정권은 따르지 않았다.
알카에다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2000년 콜호 해군함 공격 사건이 발생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1333호가 채택되어 다시 알카에다 인도가 요구되었지만, 탈레반 정권은 파슈툰족의 환대 전통 등을 이유로 거부했다.
2001년 탈레반 정권은 바미얀 석불을 파괴했다. 이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고, 탈레반 정권은 더욱 고립되었다.
2.1.1.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무자헤딘은 무자헤드(Mujahid)의 복수형이다. 무자헤드는 이슬람을 위협하는 이들과 싸우는 성전(지하드)에 임하는 전사라는 의미이다. 1979년부터 소련군의 침공에 맞선 아프가니스탄 전사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1980년대에 무자헤딘이 소련 공산주의 침략자들과 싸우는 용감한 투사라는 의미가 미국에 전달되었고, ‘무자헤딘에게 원조를’이라는 플래카드 아래 미국 시민들이 모금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1.2. 오사마 빈 라덴의 등장
오사마 빈 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부호 가문 출신으로, 무신론 공산주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크게 자극받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정보국을 파키스탄에 파견할 때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는 파키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으로 입국했고, 무자헤딘의 열악한 환경을 보고 10에 이르는 성금을 모금했으며, 무자헤딘 투쟁을 아랍세계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2.1.3. 소련군 철수
1980년대 후반, 여러 방면의 후원 등으로 성장한 무자헤딘은 점차 소련을 상대로 승리하기 시작했고, 결국 소련은 철군을 결심한다. 1978년 공산 정권 수립과 함께 전국적으로 무자헤딘이라 불리는 무장 세력이 봉기했다. 이에 따라 1979년 소비에트 연방이 군사 개입을 했지만, 동구권 이외의 지원을 받은 무자헤딘을 몰아내지는 못했고, 1989년 소련군은 철수했다.
2.2.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과 빈 라덴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최대 민족인 파슈툰족의 이슬람 신앙과 파키스탄의 지원이라는 복합적인 요인으로 만들어졌다. 이들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무자헤딘 투쟁에 참여하면서 강력한 군사 세력으로 성장했다. 소련 붕괴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무정부 상태에 빠졌고, 이는 무역 상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탈레반은 25만 달러의 자금을 바탕으로 재등장하여 파슈툰족 왕조 복원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평화를 회복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파키스탄 역시 아프가니스탄 분쟁으로 교역에 타격을 입자, 탈레반을 지원하여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알카에다를 중심으로 미국과 자신을 축출한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테러를 벌이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도피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빈 라덴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이는 탈레반의 대미 적대감을 심화시켰다. 빈 라덴은 아마드 샤 마수드를 암살하는 등 탈레반과의 관계를 강화했고, 탈레반은 미국에 대항하여 빈 라덴을 보호했다.
2.3. 아프가니스탄 내전
이 전쟁은 미국과 동맹국들이 지원하는 연합군(결국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정부를 지지함)과 탈레반 및 그 동맹 세력, 그리고 민병대 간의 싸움이었다. 알카에다와 이슬람 국가와 같은 탈레반의 분파 및 급진적인 종교 집단들은 때로는 탈레반을 위해, 때로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때로는 탈레반과 정부 양측에 맞서 싸우며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인구의 약 80%가 시골에 거주하는 농촌 국가이며, 이는 전쟁이 농촌 지역에 집중되고 게릴라 전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혹독한 겨울은 전투를 소강상태로 만들고 봄이나 여름에 군사 공세를 유리하게 만들었다.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99.7%는 무슬림으로, 이는 탈레반과 아프간 정부 양측의 이념에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은 역사적으로 아프간 지도자들이 부족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특히 외국인과 비무슬림에 맞서 단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외부 침략은 외부 저항과 아프간 정체성의 종교적 성격을 강화시켰다. 지역 종교 지도자(물라)들은 정부만큼 국민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고, 이들은 전통적으로 성전(지하드)을 통해 외부 저항을 규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부족 사회이며, 이는 사회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다. 부족주의는 이슬람과 달리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파슈툰족은 가장 큰 민족 집단으로 인구의 38%에서 50%를 차지한다. 파슈툰족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인 파슈툰왈리는 대부분의 부족 의사결정을 이끌었지만, 불화 해결 방식으로 인해 부족의 단결은 약했다. 전통적으로 아프간 지도자들은 농촌 지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부족에 의존해왔다. 아프간인들은 국가보다 자신의 공동체와 부족에 더 충성했고, 이는 부족들이 탈레반이나 정부 중 자신에게 유리한 쪽과 연합하게 만들었다.
첨단 기술을 갖춘 연합군과 게릴라 탈레반 간의 큰 역량 차이는 비대칭 전쟁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 소련군에 맞서 싸운 무자헤딘에서 기원한 탈레반은 게릴라 전술을 계속 사용했다. 무자헤딘은 소규모 부대에서 구식 무기와 현대 무기를 혼합하여 사용했으며, 탈레반은 자살폭탄, 차량 폭탄, 도로변 폭탄(IED), 표적 암살과 같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다. 2009년까지 IED는 탈레반의 주요 무기가 되었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탈레반은 아프간군과 경찰에 인원을 심어 내부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2.4. 9.11 테러
2001년 9월 11일, 사우디아라비아인 15명을 포함한 19명의 아랍인들이 미국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를 일으켰다. 이들은 알카에다의 함부르크 조직 소속으로, 민항기 4대를 납치했다. 아메리칸 항공 11편과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은 세계 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에 충돌하여, 탑승객 전원과 건물 내 2,000여 명이 사망했다. 이 충돌로 쌍둥이 빌딩은 붕괴되었고, 주변 건물도 파손되거나 피해를 입었다. 아메리칸 항공 77편은 워싱턴 D.C 근처 펜타곤에 충돌했고,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은 워싱턴 D.C.로 향하던 중 펜실베이니아주 섐크스빌 근처에 추락하여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
2009년 6월, 뉴욕주 보건부는 소방관과 경찰관을 포함한 사망자 수가 총 836명이라고 발표했다. 19명의 납치범을 포함한 전체 사망자 수는 2,996명이었다.
이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탈레반에게 오사마 빈 라덴 인도와 알 카에다 축출을 요구했다. 당시 오사마 빈 라덴은 1998년부터 미국의 수배를 받고 있었다. 탈레반은 빈 라덴이 9.11 테러에 개입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도를 거부했고, 다른 관련자 인도 요구도 묵살했다. 미국은 증거 요구를 지연 전략으로 간주하여 거부했고, 2001년 10월 7일 영국과 함께 항구적 자유 작전을 개시했다.
2.4.1.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대응
--
2001년 9월 11일, 미국 동시다발 테러가 발생했다. 9월 12일,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 선포에서 탈레반 정권의 연루가 시사되었고,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오사마 빈 라덴이 용의자이며, 단독 범행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같은 날, 제56차 유엔총회에서는 미국 정부와 시민들에게 애도와 연대를 표명하고, 뉴욕 등에 대한 테러 공격에 대해 신속한 국제 협력을 해야 한다는 결의 56/1이 당시 모든 회원국 189개국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368이 채택되었다.
결의 1368은 9월 11일 테러 공격을 "국제 평화 및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테러리즘에 대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싸울 것"을 명시했다. 또한 서두에는 "개별적 또는 집단적 자위의 고유한 권리를 인정한다"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같은 날 NATO가 창설 이래 최초로 북대서양조약 제5조의 집단방위 조항에 따른 집단적 자위권 발동을 결정한 근거가 되었다.
이후 미국은 탈레반 정권에 빈 라덴 등의 인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탈레반 정권은 빈 라덴과 알카에다가 범인이라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며 인도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9월 14일, 오스트레일리아도 태평양 안보 조약 제4조에 해당한다며 집단적 자위권 발동을 표명했다. 9월 15일, 미국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파키스탄이 아프가니스탄 공격에 협력할 것이라고 성명했다. 9월 16일, 걸프 협력 회의를 구성하는 아랍 국가들은 테러 공격을 비난하고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탈레반을 승인해 온 아랍에미리트,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도 국교를 단절했다. 그러나 같은 날 탈레반 정보장관은 주요 거점을 요새화했다고 성명하며 완전 저항 의지를 보였다. 9월 17일, 이란의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은 테러를 비난했지만, 아랍연맹이나 이슬람 협력 기구와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 공격 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요청했다.
9월 18일, 미국 의회에서 대통령이 테러를 계획, 승인, 실행, 지원했다고 판단한 국가, 조직, 개인에 대해 필요하고 적절한 모든 힘을 행사할 권한을 부여하는 공동 결의안이 상원에서 98대 0, 하원에서 420대 1로 통과되었다. 9월 21일,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북부동맹과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유럽 연합 외무장관 회의도 만장일치로 공격을 지지했다.
9월 28일, 국제기구법 최초의 "입법 행위"로 여겨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373이 채택되어 "모든 국가"에 유엔 헌장 제7장에 따른 강제 조치로 엄벌화, 정보 교환 및 자금 지원 금지 등의 테러 대책과 그 보고가 의무화되었고, 11월 1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377에서는 테러가 "모든 국가와 전 인류에 대한 도전"이라고까지 비난받았다.
미국은 이 기간 동안 협력 국가들과 연합을 구성하여 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이러한 국가들은 참전 연합 국가로 불리며,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연합"이라고 칭했다. 참전 연합 국가들은 자유의 불멸 작전이라는 통일된 작전 명칭으로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테러 조직 세력 지역에 대한 작전을 실행했다.
3. 전쟁 전개
2001년 11월, 독일 본 근교 케니히스빈터에서 유엔은 북부동맹을 포함한 아프가니스탄 4개 그룹 대표를 소집하여 회의를 개최했다. 본 회담은 탈레반과의 전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북부동맹군이 카불을 점령함에 따라 긴급히 과도 정부 수립과 국제적인 부대에 의한 치안 유지를 결정할 필요에 의해 소집되었다. 회의 결과, 과도 정부 수립, 로야 지르가 소집, 국제 안전 보장 지원군(ISAF) 창설과 유엔 아프가니스탄 지원단(UNAMA) 설립이 합의되었고, 다음 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승인되었다(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1383). 이는 본 합의로 불리며, 이후 아프가니스탄 재건 계획의 시작점이 되었다.
초기 군사 작전 성공 이후, 미국은 탈레반과 알카에다 지도부 수색 이상의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지 못했다. 국가 건설은 초기 부시 행정부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주둔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주둔 명분으로 자리 잡았다. 2002년 4월, 부시는 아프가니스탄 재건에 대한 열망을 표명하는 연설을 했고, 미국은 민주주의와 여성 권리 확립을 도덕적 문제로 내세웠다. 국제 사회는 아프가니스탄 개발 노력에 기여했으며, 이는 국가 운영 기관 설립과 원조에 초점을 맞추었다. 미국의 재건 노력은 교육, 의료, 지역 사회 개발 개선에도 집중되었다.
2001년 12월 22일, 하미드 카르자이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어 정식 정부 수립 전까지 행정을 담당했다. 같은 달, 일본의 해상 자위대는 테러 대책 특별 조치법에 따라 해상 차단 작전에 참가, 2010년까지 인도양에서 연료 공급 활동을 수행했다(자위대 인도양 파견)。
2002년 4월, 아프가니스탄 남부에서 탈레반 그룹의 대규모 조직화 시도가 처음 발생했다. 헬만드 국경 근처 난민 수용소인 가르디 장갈에서 전직 중간급 탈레반 관리들이 슈라를 설립, 칸다하르, 헬만드, 자불, 우르즈간 등 주요 남부 주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약 50명으로 구성된 23개 그룹, 총 1,200명 규모였다. 파키스탄 북와지리스탄에서는 잘랄루딘 하카니가 2001년 망명 후 하카니 네트워크를 조직, 2002년 초 1,400명 규모로 파크티아 주와 호스트 주에서 제한적으로 활동했으며, 알카에다 대원들도 합류했다. 작전 자카나, 작전 콘도르 등 탈레반 소탕 작전이 시도되었으나, 결과는 엇갈렸다.
2002년부터 2004년 사이, 일부 탈레반 대원들이 카르자이에게 협상을 제안했지만, 미국은 모든 탈레반 지도자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리며 강경하게 반대,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협상 가능성을 차단했다. 역사학자 말카시안은 이 시기 탈레반과의 협상이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라 주장하며, 미국의 과도한 자신감과 오만함이 이를 가로막았다고 지적한다. 탈레반 재기 가능성에 대한 정보가 있었음에도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탈레반은 재조직과 부활을 계획했다. 연합군의 테러리스트 색출 압박은 과잉 대응으로 이어져 오히려 탈레반에 대한 일부 대중의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연합군은 부정확한 정보로 임무를 수행하거나 표적 정적의 허위 정보에 속기도 했다. 고위급 탈레반이나 알카에다 지도자는 거의 체포되지 않았고, 체포된 이들은 대부분 알카에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하급 탈레반 대원들이었다. 탈레반 집회로 오인된 결혼식을 포함, 많은 민간인이 작전 중 사망했고, 이는 탈레반 모집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탈레반은 2005년까지 비교적 소규모 활동을 유지했다. 2003년 초, 탈레반과 다른 단체들이 배포한 팜플렛이 마을과 시골에 흩뿌려졌는데, 이는 신성전쟁에서 미군과 외국 군대에 맞서 봉기할 것을 이슬람 신자들에게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 발발로 미국의 관심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로 옮겨갔다. 2003년 5월, 탈레반 대법원장 압둘 살람은 탈레반이 재결집, 재무장하여 미군 축출을 위한 게릴라전을 준비한다고 선언했다.
2003년 여름, 탈레반의 공격 빈도가 증가했다. 아프간 정부 군인, NGO 인도적 지원 단체 직원, 미군 병사들이 습격, 매복, 로켓 공격으로 사망했다. 탈레반 전투원들은 자불 주 데이 초판 지역에 병력을 증강, 최대 1,000명의 게릴라가 집결했다. 2003년 8월, 아프간 경찰 수십 명을 포함, 220명 이상이 사망했다. 같은 해 8월 11일, NATO가 ISAF의 지휘권을 인수했다.
탈레반 지도자 뮬라 오마르는 조직을 재편하고 2003년 정부와 ISAF에 대한 반란을 개시했다. 2003년 하반기부터 2004년까지 작전이 강화되면서 밤 편지가 이어졌고, 2005년에는 정부 협력 마을 원로들이 납치, 암살되었으며, 정부 학교와 진료소도 불태워졌다.
탈레반은 연합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비밀리에 준비했다. 이는 수년에 걸친 계획이었으며, 뮬라 다둘라가 공격을 지휘했다. 그의 전술은 효과적이었는데, 2004년경 자살 폭탄 테러를 광범위하게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전까지 탈레반은 자살이나 민간인 희생을 꺼렸으나, 이는 알카에다의 전술이었다. 아프간 난민을 위한 파키스탄의 마드라사 네트워크는 극단주의자들을 꾸준히 공급했다.
작전 애슈버리 파크는 2004년 여름 데이 초판 지역의 탈레반 병력을 소탕했다. 같은 해 말, 은둔 중이던 탈레반 지도자 뮬라 오마르는 미국과 아프간 과도 정부군에 대한 반란을 선포하며 "우리나라의 주권을 되찾겠다"고 말했다. 2004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선거는 탈레반의 주요 표적이었으나, 20개 지역과 200개 마을에서만 투표가 저지되었다. 카르자이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미국은 2004년 파키스탄 드론 공격을 시작, 연방 부족 지역을 따라 탈레반과 알카에다 대원들을 공격했다.
2005년 6월과 7월, 미국 네이비 실은 쿠나르 주에서 레드 윙 작전을 수행했다. 이 작전은 아마드 샤가 이끄는 현지 탈레반을 와해시켜 안정을 확보하고 2005년 9월 아프간 의회 선거를 촉진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연합군에게 불운한 승리였다. 생존자는 한 명뿐이었고(2013년 영화 론 서바이버에서 극화됨) 19명이 사망했다. 웨일러스 작전은 몇 주 후 임무를 완수, 탈레반 활동을 크게 감소시켰고 샤는 중상을 입었다. 샤는 쿠나르나 인접 주에서 웨일러스 작전 이후 중요한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2005년 말, 탈레반은 남부 여러 마을을 다시 장악했다. 이는 정부 지원 부족에 실망한 주민들이 탈레반 통치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수년간의 계획이 탈레반에게 결실을 맺고 있었던 반면, 정부는 매우 취약했다. 경찰은 심각한 자금 부족에 시달렸고, 평균 지역당 경찰관은 50명에 불과했으며, 일부 지역에는 정부가 부재했다. 부족 간 분쟁 증가와 함께, 탈레반 귀환을 위한 완벽한 조건이 갖춰졌다.
3.1. 초기 군사 작전 (2001년)
CIA는 이전부터 오사마 빈 라덴 제거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제5특전단장 존 멀홀랜드 대령이 군사작전을 제안했다. 제5특전단은 미국 육군 특전부대 중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을 담당하는 특전단으로, 이들은 탈레반에 적대적인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 군벌세력을 포섭하여 주 전투력을 확보하고, 부족한 전투능력은 특전단에 소속된 공정통제사가 강력한 미국 공군 전력을 유도하는 방법으로 보충하는 작전을 제안했다. CIA는 이를 받아들였다.
미국은 2001년 10월 7일 자유의 불멸 작전을 개시하며 공식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지만, 그보다 몇 주 전부터 비밀 작전이 시작되었다. 9.11 테러 15일 후, 미국은 CIA 특수활동국 요원들을 아프가니스탄에 비밀리에 투입하여 북부 아프가니스탄 연락팀을 구성했다. 그들은 카불 북쪽 판지시르 계곡에서 북부동맹과 연합했다. 10월에는 12명으로 구성된 특수부대 팀들이 CIA와 북부동맹과 함께 일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단독으로 침공하지 않고, 영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기 시작했고, 결국 10개국 이상의 국가들이 참전했다.
미국 동시다발 테러는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기에,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급히 작전이 수립되었고,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세력에게 알카에다와 탈레반을 공격하게 하고, 레이저 표적 지시 장치를 장착한 특수부대를 파견하여 공습을 지원하는 등의 방안이 결정되었다. 미국 정부는 이 작전을 테러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규정하고, 국제적인 테러 위기를 막기 위한 방어전이라고 주장하며, 작전명을 자유의 불멸 작전으로 명명했다. 영국에서는 "헤릭 작전"이라고 부른다.
NATO는 2001년 10월 2일 집단적 자위권을 발동했고,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연합국들은 10월 7일부터 공습을 개시했다. 미군은 미국 본토, 쿠웨이트, 인도양의 디에고가르시아 섬, 항공모함에서 이착륙하는 항공기와 미사일 순양함을 동원하여 아프가니스탄에 1만 2000발의 폭탄을 투하했다. 미국은 군사 목표만 공격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투하된 폭탄의 40%가 비유도 폭탄이었고 민간인에게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전쟁 초기에 탈레반 지도자 무하마드 오마르는 칸다하르 자택에 있었기에, 공습으로 사살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민간인 피해를 우려하여 오마르의 탈출을 허용했다. 오마르는 하미드 카르자이를 통해 항복에 동의했지만, 미국은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3.2. 토라보라 전투와 빈 라덴의 탈출 (2001년 12월)
11월 말, 오사마 빈 라덴은 토라보라의 요새화된 훈련소에 있었다. 11월 30일 토라보라 전투가 시작되었다. 부족 민병대와 함께 일하는 CIA 팀은 빈 라덴을 추적하여 산악 캠프를 제거하기 위해 공습을 요청했고, 곧 특수부대가 지원을 위해 도착했다.
카불 함락 후, 알카에다의 아랍인과 체첸인, 우즈베크인 및 아프리카인 등 외국인 병사들은 도시 지역을 버리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건설된 파키스탄 국경의 지하 요새 토라보라로 이동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군은 폭격으로 지하 요새를 파괴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미군도 마찬가지로 폭격을 가했지만 지하 요새를 파괴하지 못했다. 토라보라 주변 국경 지대는 넓었지만, 2000~3000명의 미군이 포위하면 빈 라덴을 체포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미군은 가용 부대가 있었음에도 위험을 우려하여 토라보라 주변에 부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대신 파견된 아프가니스탄 세력은 전투 의지가 낮았고, 파키스탄군은 헬리콥터가 부족하여 충분한 병력을 배치할 수 없었다.
부족 민병대는 1,000명이었지만 라마단 기간 동안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CIA는 미국 육군 레인저 파병을 요청했고 해병대도 배치 준비가 되었지만 거절당했다. 빈 라덴은 결국 12월 어느 시점에 파키스탄으로 탈출했다. 그는 죽음을 각오했지만,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말카시안에 따르면 빈 라덴을 체포하거나 탈레반과 협상하거나 새로운 정부에 어떤 식으로든 탈레반을 포함시키지 못한 것은 빈 라덴이 미국을 끌어들이고자 했던 장기전의 방향을 설정했다.
3.3. 아나콘다 작전 (2002년 3월)
2001년 12월, 국제 안전 보장 지원군(ISAF)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1386에 의해 공식 승인되었고, 이후 카불 주변의 치안 유지 활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 합의에 타지크인이 많았기 때문에 파슈툰족의 불만이 높아져 탈레반이 부활하는 원인이 되었다.
2002년 3월, 아프가니스탄 임시 정부 수립 이후, 알카에다와 탈레반 잔당 소탕을 위해 아나콘다 작전이 전개되었다. 이 작전에는 ISAF가 참여하여 다국적군 작전으로 진행되었으나, 여러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3.4. 넵튠 스피어 작전 (2011년 5월)
Operation Neptune Spear영어는 2011년 5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수행된 오사마 빈 라덴 제거 작전이다. 이 작전은 미국 해군 특수전 개발단(DEVGRU, 일명 네이비 실 6팀) 대원들이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 있는 빈 라덴의 은신처를 급습하여 사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3.5. 빈 라덴 사살 이후
미국은 2011년 넵튠 스피어 작전을 통해 오사마 빈 라덴 사살에 성공한다. 그러나 전쟁 장기화로 인한 피로감과 경제 위기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전쟁 지속에 부담을 느끼게 되었고, 2011년 NATO 회의에서 점진적인 철군을 결정한다. 얼마 후 미군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치안권을 이양하고 철수를 완료했다. 그러자 탈레반은 다시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2012년 5월, NATO 지도자들은 NATO 시카고 회담에서 군대 철수를 지지했다. 유엔 지원 평화 회담이 정부와 탈레반 사이에 시작되었다. 2014년 5월, 미국은 주요 작전이 2014년 12월에 종료될 것이며, 잔여 병력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2014년 10월, 영국군은 헬만드주의 마지막 기지를 아프가니스탄 군에 인계하며 영국군 전투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음을 알렸다. 2014년 12월 28일, NATO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국제안보지원군(ISAF) 전투 작전권을 공식적으로 종료하고,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모든 책임권을 이양했다. NATO는 ISAF의 후속 단체로 RS 임무를 시작했다. 2017년 5월, 철수에 관한 공식적인 계획 없이 13,000명의 아프가니스탄 주둔 외국군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2021년 5월부터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기 시작하면서 전쟁의 판세는 탈레반 쪽으로 기울었다. 미군 철수 직후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8월 12일, 아프가니스탄 제2, 제3의 도시인 헤라트와 칸다하르가 탈레반에게 함락되었고, 8월 13일에는 수도 카불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결국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탈레반에게 항복하면서 탈레반은 카불에 무혈 입성했다.
이 전쟁으로 총 23만 명이 사망하고, 5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1100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4. 전쟁의 영향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국제 안보 지원군(ISAF)과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자살폭탄 테러와 무차별 폭격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탈레반은 카불에서 자살폭탄 테러를 시작했으며, 보병전도 계속되었다. 국제 안보 지원군은 헬만드 주에서 크립토나이트 작전Operation Kryptonite, 칸다하르 주에서 후버 작전Operation Hoover 등을 실시했고, 우르즈간 주에서는 탈레반과 네덜란드군 간의 초라 전투가 벌어졌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는 독일군 등이 하레카테 요로 작전Operation Harekate Yolo을 수행했다. 연합군은 탈레반 최고 지도 위원 중 한 명인 뮬라 오바이둘라 아쿤드를 체포하고 뮬라 다두라Mullah Dadullah를 사살했지만, 탈레반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가즈니 주에서는 탈레반 세력이 주도 근처 간선도로까지 미쳐 주 내 3분의 2의 군에서 직장 이탈이 발생하고 군 법원 등이 업무를 중단했다.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은 탈레반에 평화를 제안했지만, 탈레반은 외국군 주둔을 이유로 거부했다. 탈레반은 외국인을 적대시하여 2007년에는 한국인들이 납치되는 사건(2007년 탈레반 한국인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파키스탄에서는 라알 마스지드 점거 사건이 발생하고 와지리스탄 평화 협정이 깨지면서 전투가 재개되었다. 미국은 부토 전 총리를 재등판시키려 했지만, 그녀는 선거 중 암살당했다.
2008년,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는 가뭄으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고 난민이 증가했다. 남부에서는 가르미르 전투(칸다하르 주), 이글스 서밋 작전(헬만드 주) 등이 벌어졌고, 우르즈간 주에서는 탈레반이 네덜란드군에 IED 공격, 자살 폭탄 테러, 매복 공격을 감행했다(카즈 우르즈간 전투). 와나트 전투 등의 결과, 미군 사망자는 155명(30% 증가)에 달했으며, 나토군 사망자도 증가했다. 탈레반은 IED(Improvised Explosive Device, 즉석 폭발 장치) 공격을 늘리고, 알카에다와 파키스탄군의 훈련을 통해 전투 능력을 향상시켰다.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지배력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해 탈레반이 주민 서비스를 제공하며 지지를 얻었다. 마이클 매코널(Michael McConnell) 국가정보국장은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약 10~11%를 장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키스탄에서는 파키스탄 탈레반이 수도에서 240km 떨어진 스와트 지역(Swat District)을 점령했다. 군 통합 정보국(ISI)이 지원하는 카슈미르 과격파는 인도와 전투를 계속했고(뭄바이 연쇄 테러), 알카에다는 연방 직할 부족 지역에서 파키스탄 탈레반과 연계하여 양국 탈레반과 공동 활동을 했다. 미군은 무인 공격기와 특수 부대로 연방 직할 부족 지역의 알카에다를 공격했지만, 알카에다는 이슬라마바드 메리어트 호텔 폭파 테러 등으로 반격했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증강했지만, 2011년 7월부터 철군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철군 직전, 미군 특수부대는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카이베르푸크툰크와 주)의 저택을 기습하여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다. 그러나 "소탕·수호·건설·전환" 전략은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탈레반은 미군과 대등하게 싸웠고, 카르자이 정권의 부패는 개선되지 않았으며, 아프가니스탄군 규모 확장도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2019년 12월, 워싱턴 포스트는 아프가니스탄 페이퍼스라는 2,000페이지 분량의 정부 문서를 공개했다. 이 문서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연루된 400명 이상의 주요 인물들과의 인터뷰 내용을 담고 있었다. 워싱턴 포스트와 가디언에 따르면, 이 문서들은 미국 관리들이 전쟁의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중을 지속적이고 의도적으로 속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탈레반 장악 이후, 서방 국가들은 인도적 지원을 중단했고,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지급을 중단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중앙은행의 자산 약 9를 동결하여 탈레반이 미국 은행 계좌에 보관된 수십억 달러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2021년 10월, 유엔은 아프가니스탄 인구 3,900만 명 중 절반 이상이 심각한 식량 부족에 직면해 있다고 밝혔다.
4.1. 인명 피해
2001년부터 2021년까지 이어진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초래했다. 브라운 대학교의 전쟁의 비용 프로젝트에 따르면, 전쟁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에서만 46,319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그러나 질병, 식량 및 물 부족, 기반 시설 부족 등 전쟁의 간접적인 영향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집계되지 않아, 실제 사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책임을 위한 의사회, 세계 생존을 위한 의사회, 핵전쟁 예방을 위한 국제 의사회(IPPNW)가 공동 작성한 보고서("사망자 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해 모든 참전 세력에 의해 10만 6천 명에서 17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민간인 사상자의 대다수는 탈레반을 비롯한 반정부 세력에 의해 발생했으며, 그 비율은 61%에서 80% 사이로, 평균 약 75%를 차지했다. 아프가니스탄 유엔 지원단(UNAMA)은 2008년부터 민간인 사상자 통계를 발표했는데, 2008년에는 민간인 사상자의 약 41%가 정부군에 의해 발생했으나, 2015년에는 이 비율이 약 18%로 감소했다.
BMJ 오픈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대인 지뢰 및 급조 폭발물(IED)은 지뢰보다 훨씬 심각한 부상을 초래하며, 다발성 사지 절단 및 하체 절단을 유발한다. BMJ는 불필요한 부상과 고통을 야기하는 무기의 사용은 전쟁 범죄에 해당한다고 강조했다.
대부분의 외국군이 철수하고 연합군이 공습 위주로 전환하면서, 전쟁 후반기에는 외국군에 의한 민간인 사망이 감소했다. 2015년, 친정부군은 민간인 사망 및 부상의 17%를 차지했는데, 이 중 미국과 나토군은 2%에 불과했다. 2016년에도 비슷한 수치가 나타났다. UN에 따르면 2015년과 2016년 모두 연간 민간인 사망자 수 기록을 경신했다. 탈레반 측 역시 8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2019년 1월 25일,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2014년 취임 이후 아프가니스탄 보안군 4만 5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같은 기간 동안 국제군 사망자는 72명 미만이었다.
4.2. 난민 문제
1979년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수십 년간 분쟁을 겪으면서 수백만 명의 난민과 국내 실향민이 발생했다. 2002년부터 2012년 사이에는 570만 명이 넘는 난민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와 국가 인구가 25%나 증가하기도 했다.
2021년 탈레반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260만 명의 아프간인들이 난민으로 남았고, 400만 명은 국내 실향민이 되었다. 탈레반 집권 이후 아프가니스탄 철수가 진행되면서 카불 공항을 통해 12만 2천 명이 넘는 아프간인, 미국 시민,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비행기로 해외로 빠져나갔다.
4.3. 전쟁 범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양측 모두 민간인 학살, 민간 시설 폭격, 테러, 고문 사용, 포로 살해 등의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절도, 방화,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는 재산 파괴 등의 다른 범죄도 흔했다.
탈레반은 학살, 자살 폭탄 테러, 대인 지뢰 사용, 테러, 민간인 공격(예: 인간 방패 사용) 등 전쟁 중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2011년, 뉴욕 타임스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발생한 모든 민간인 사망자의 3/4이 탈레반에 의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유엔 보고서는 일관되게 탈레반과 다른 반정부 세력을 갈등에서 발생한 대다수의 민간인 사망의 원인으로 지목해 왔다. 집단 강간과 항복한 병사의 처형과 같은 다른 범죄들도 있었다.
연합군, 아프가니스탄 보안군, 북부동맹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는 학살, 포로 학대, 민간인 살해가 포함된다. 국제앰네스티는 펜타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전쟁 범죄, 고문 및 불법 살인과 관련된 증거를 은폐했다고 비난했다.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는 다슈트-이-레이리 학살, 바그람 고문 및 포로 학대, 칸다하르 학살 등이 있다.
2020년, 아프가니스탄 국제형사재판소 조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어 2013년 5월 1일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모든 당사자들이 저지른 전쟁 범죄와 반인도 범죄를 조사했다. 2023년 3월 22일, 영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UKSF 인원에 의한 불법 살인 혐의 보고서를 조사하기 위해 공개 조사를 시작했다. 찰스 해던-케이브 판사가 공개 조사를 주재한다.
4.4. 마약 문제
2000년 아프가니스탄은 전 세계 아편 공급량의 약 75%를 차지했으며, 이는 탈레반이 아편 수출에 세금을 매겨 얻는 주요 수입원이었다. 2001년 무함마드 오마르는 국제사회의 인정을 얻고, 아편 가격을 높여 기존에 쌓아둔 대량의 아편을 팔아 이익을 늘리려는 목적으로 아편 재배를 금지했다. 그러나 2001년 10월 미국의 침공 이후 아편 생산은 다시 증가하여, 2005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이 전 세계 아편의 90%를 생산하게 되었다.
2018년 아프가니스탄 재건 특별감찰관(SIGAR)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2002년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마약 거래를 막기 위해 8.6를 지출했다. 2021년 5월 SIGAR 보고서는 탈레반 수입의 60%가 마약 거래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으며, UN 관계자들은 2018년부터 2019년까지 탈레반이 400 이상을 벌었다고 추정했다. 다만, 다른 전문가들은 탈레반이 연간 최대 40를 벌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양귀비 제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세계 최대의 불법 아편 생산국으로 남았다. 탈레반은 2018년 기준으로 아편과 헤로인으로 매년 최소 수천만 달러의 이익을 얻고 있었다.
4.5. 기타 영향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한국인 인질 사건은 탈레반이 외국인을 적대시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탈레반은 기독교 선교 활동을 하던 한국인들을 납치하여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2019년 12월, 워싱턴 포스트는 아프가니스탄 페이퍼스라는 2,000페이지 분량의 정부 문서를 공개했다. 이 문서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연루된 400명 이상의 주요 인물들과의 인터뷰 내용을 담고 있었다. 워싱턴 포스트와 가디언에 따르면, 이 문서들은 미국 관리들이 전쟁의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중을 지속적이고 의도적으로 속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펜타곤 페이퍼스 공개 사건과 비교하기도 했다.
탈레반 장악 이후, 서방 국가들은 인도적 지원을 중단했고,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지급을 중단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중앙은행의 자산 약 90억 달러를 동결하여 탈레반이 미국 은행 계좌에 보관된 수십억 달러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2021년 10월, 유엔은 아프가니스탄 인구 3,900만 명 중 절반 이상이 심각한 식량 부족에 직면해 있다고 밝혔다. 2021년 11월, 휴먼라이츠워치는 아프가니스탄이 경제 붕괴와 파탄난 은행 시스템으로 인해 광범위한 기아에 직면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세계 지도자들은 아프가니스탄에 1200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약속했다. 2021년 12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아프가니스탄 국민에게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동시에 자금이 탈레반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미국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022년 8월, 마틴 그리피스 유엔 인도주의 업무 책임자는 600만 명이 기아 위험에 처한 아프가니스탄의 심화되는 빈곤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분쟁, 빈곤, 기후 충격, 식량 안보는 "오랫동안 아프가니스탄의 슬픈 현실"이었지만, 탈레반 장악 1년 만에 대규모 개발 원조 중단으로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고 말했다.
파키스탄에서는 라알 마스지드 점거 사건이 발생하고, 와지리스탄 평화 협정이 깨지면서 전투가 재개되었다. 미국은 부토 전 총리를 재등판시키려 했지만, 그녀는 선거 중 암살당했다. 2011년에는 NATO군과 파키스탄군 간의 교전 및 오폭으로 파키스탄이 토르함을 일시적으로 봉쇄하고 NATO의 보급로를 방해하기도 했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병력 증강과 함께 2011년 7월부터 철군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철군 시작 직전, 미군 특수부대는 우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다. 그러나 "소탕·수호·건설·전환" 전략은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탈레반은 미군과 대등하게 싸웠고, 카르자이 정권의 부패는 개선되지 않았으며, 아프가니스탄군 규모 확장도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