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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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시족은 중국 쓰촨성, 윈난성 일대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으로, 고대 강족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진나라 때부터 기록이 나타나며, 티베트 왕조, 남조 등의 지배를 거쳐 원, 명대에는 중국 왕조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 나시족은 모계 사회의 특징을 가지며, 톤파교라는 독특한 종교와 톤파 문자를 사용한다. 14세기부터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리장 지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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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시족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민족 이름 | 나시족 |
| 다른 이름 | 나시 나키 |
| 인구 | 326,000명 |
| 거주 지역 | 중국 쓰촨성 윈난성 |
| 언어 | 나시어 |
| 종교 | 동바교 티베트 불교 도교 |
| 관련 민족 | 모쒀족 |
| 로마자 표기 | Nàxī zú |
| 민족어 표기 | Naqx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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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 |
| 기타 | 동파 문자를 사용 동파교라는 독자적인 종교를 가지고 있음 |
2. 역사
나시족의 기원은 진나라 시대의 마사이(摩沙夷)와 당나라 시대의 마사만(麽些 또는 磨些蛮)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고대 강족의 후손으로 여겨진다.[4][5] 이들은 본래 쓰촨 지역에서 남하하여 진사강 유역에 정착하고 번영하였다.
당나라 시대에는 티베트 왕조(토번)나 남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원나라와 명나라 시대에는 나시족 수령(목씨 가문)이 토사로 임명되어 중국 왕조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 리장을 중심으로 농업과 수공업이 발달하며 번영을 누렸다.
청나라 시대인 1723년 개토귀류 정책이 시행되면서 토사 제도가 폐지되고 중앙 정부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고대 나시족 마을인 리장은 현재 주요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인근의 모소족은 현재 중국에서 나시족의 일부로 분류되기도 한다.
2. 1. 고대

나시족의 기원은 진나라 시대의 마사이(摩沙夷), 당나라 시대의 마사만(麽些蠻 또는 磨些蠻)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유목민족인 고대 강족의 후손으로 여겨지며[4][5], 본래 쓰촨 지역에 거주하다 남쪽으로 이동하여 진사강 유역에서 번성했다.
초기 나시족은 이웃 부족의 압박으로 남쪽으로 계속 이동하여 누강(怒江)과 진사강 유역, 그리고 현재 쓰촨성 서부의 알롱강(雅礱江) 유역까지 이르렀다. 결국 기원후 3년경 비옥한 운남의 백사(白沙)와 리장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나시족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백사에 정착한 조상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백사에 남은 이들이 나시족, 대리 지역으로 간 이들이 백족, 루구호(瀘沽湖) 주변에 정착한 이들이 모소족이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오늘날 이러한 기원 설명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당나라 시대에는 티베트 왕조(토번)나 남조의 지배를 받았다. 10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는 리장 지역의 주요 산업이 목축에서 농업으로 전환되었고, 농산물, 수공예품, 광물, 가축 제품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이 시기 닝랑(寧蒗), 리장, 웨이시(維西) 등지에서는 노예 소유 집단이 지주 계급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14세기에는 카르마파의 방문 이후 티베트 불교가 리장 지역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1278년, 원나라는 운남 지역 통치를 위해 리장부(麗江府)를 설치하고, 나시족 족장인 무데(Mude)를 세습 토사로 임명하여 간접 지배를 시작했다. 명나라 시대에도 목씨(木氏, 무데의 후손) 가문이 리장부의 토관(土官)으로 세습되며 나시족과 주변 민족들(특히 캄(Kham) 지역의 동티베트인)을 다스렸다. 이들은 명나라 조정에 세금과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자치권을 인정받았으며, 명나라는 목씨 가문을 통해 운남성 북서부 지역을 통제했다.
그러나 청나라 시대인 1723년, 개토귀류 정책이 시행되면서 세습 토사 제도가 폐지되고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기존의 목씨 족장들은 지방 관리로 편입되어 지배 체제에 흡수되었다.
2. 2. 중세
진나라 시대의 마사이(摩沙夷), 당나라 시대의 마사만(麽些 또는 磨些蛮)을 기원으로 하는 나시족은 원래 쓰촨 지역에 거주하다 남쪽으로 이동하여 진사강(금사강) 유역에 자리 잡고 번영하기 시작했다. 당나라 시기에는 티베트 왕조(토번)나 남조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4][5]10세기에서 13세기 사이, 리장 지역에서는 농업 생산이 발달하여 기존의 주요 산업이었던 가축 사육을 대체하게 되었다. 농산물, 수공예품, 광물, 가축 제품 등의 생산 증가는 상당한 번영을 가져왔고, 이 시기 닝랑(寧蒗), 리장, 웨이시(維西) 등지의 여러 노예 소유 집단은 점차 지주 계급으로 발전했다.
1278년, 원나라는 운남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리장부(麗江府)를 설치했다. 이때 나시족의 족장인 무데(Mude, 木得)가 리장부의 세습 토사로 임명되어 원나라의 간접 지배가 시작되었다.
명나라 시대에도 나시족 수령 목씨(木氏, 무씨 가문)는 리장 지역의 토사(토관) 지위를 세습하며 나시족과 주변 다른 민족들, 특히 캄(Kham) 지역의 동티베트인들을 다스렸다. 목씨 가문은 명나라 조정에 세금과 공물을 은과 곡물 형태로 바쳤으며, 명나라 조정은 목씨 가문을 통해 운남성 북서부 지역의 여러 민족을 통제하는 주요 수단으로 활용했다. 14세기부터는 카르마파의 방문 이후 티베트 불교가 리장 지역에 전파되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토사를 통한 간접 지배는 청나라 시대까지 이어지다가, 1723년 개토귀류 정책이 시행되면서 변화를 맞았다. 세습되던 토사 자리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로 대체되었고, 리장 지역은 청나라의 직접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다만 기존의 목씨 족장들은 지방 관리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며 새로운 체제에 편입되었다.
2. 3. 근현대
명나라 시대까지 토사 제도를 통해 간접 지배를 받던 나시족 지역은 청나라 시대에 개토귀류 정책이 실시되면서 중국 왕조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 1723년, 리장 지역의 세습 토사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로 대체되었고, 기존의 나시족 수령이었던 목씨(木氏) 가문은 지방 관리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며 새로운 체제에 편입되었다.
고대 나시족 마을인 리장은 현재 주요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옛 마을에서는 나시족 주민들이 한족 상인들에게 건물을 임대하고, 이들 상인들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상점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2005년에는 중국의 유명 영화 각본가 광젠런(Kuang Jianren)이 운남성 나시족 소수 민족의 삶을 배경으로 한 영화 "눈꽃 팔찌(Snow Bracelet)"를 제작하기도 했다.
한편, 나시족 인근의 모소족은 현재 중국의 소수 민족 분류에서 나시족의 일부로 취급되고 있다. 모소족은 나시족보다 강한 모계 사회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남성에게는 상속권이 없는 특징을 보인다.
3. 사회
나시족은 주로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는 중국 운남성 북서부에서 사천성 남서부에 걸쳐 거주한다. 이들이 사는 지역은 해발 고도 1000m에서 2000m 사이의 산간 구릉지대와 '바처'(壩子)라고 불리는 산간 저지대이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지급시인 리장시에 속하는 위룡나시족자치현이 대표적인 민족 자치구이며, 리장시 중심부인 고성구에도 많은 나시족이 살고 있다. 2000년 중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중국 내 나시족 인구는 308,389명이었다.
나시족 사회, 특히 용닝(永宁) 지역과 모소족(Mosuo)은 모계제와 모계거주제 전통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여성 중심의 사회 구조와 독특한 통혼 관습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나시족은 기본적으로 자연숭배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티베트 불교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나시족 마을에서는 티베트 불교 관련 건축물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려강(麗江) 지역에는 시냇물이 많이 흐르는데, 중류 지역에는 삶과 죽음 등을 기리는 다채로운 제단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3. 1. 사회 구조
용닝(永宁) 지역의 나시족은 모계제이자 모계거주제 사회로 알려져 있다. 즉, 혈통은 어머니를 통해 이어지며, 남녀 모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어머니의 집에서 생활한다. 서구 사회에서 일반적인 결혼 제도는 존재하지 않으며, 혈연관계가 아닌 성인 간의 성관계는 자유롭다. 밤이 되면 남성이 원하는 여성을 찾아가고, 여성은 이를 받아들일지 거절할지 자유롭게 선택한다. 남녀 모두 여러 명의 파트너를 가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아이들은 어머니 집안의 식구들에 의해 양육된다. 특히 외삼촌이 서구 사회의 '아버지'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사회 구조는 남성을 풀을 자라게 하는 비와 같이 여기는 나시족의 믿음과 관련이 있다. 즉, 남성의 역할은 이미 여성 안에 존재하는 태아를 '적시는' 것으로 여겨진다. 나시족은 유전 형질이 뼈에 담겨 있으며 여성을 통해 전달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최근 관광객 유입과 일부 주민의 이주 등으로 인해 이러한 전통적인 관습은 변화하고 있으며, 일부 나시족은 일부일처제 형태의 부부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2]나시족 중 특히 모소족(Mosuo)의 사회는 여성이 중심이 되는 모계제이며, 처방혼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집안의 가장은 여성이며, 모든 중요한 결정 역시 여성이 내린다.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로 '할머니 방'이 있다. 이 방은 집안의 최고령 여성이자 가장이 머무는 곳으로, 조상 제단 등이 있으며 과거에는 집안의 미성년자들이 모두 이곳에서 생활했다. 오래된 집에는 여전히 이 방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나시족은 기본적으로 자연숭배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티베트 불교의 영향도 강하게 받았다. 나시족 마을에서는 티베트 불교 관련 건물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려강(麗江) 지역에는 많은 시냇물이 흐르며, 그 중류에는 삶과 죽음 등을 기리는 다채로운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3. 2. 혼인 제도
용닝(永宁) 지역의 나시족(Nakhi|나키nxq)은 모계제이자 모계거주제 사회로 알려져 있다.[2] 이는 어머니 계통의 혈통을 따르며, 남녀 모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어머니의 집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서구 사회에서 일반적인 결혼 제도, 즉 제도적으로 개인 간의 결합을 인정하는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혈연 관계의 성인 간 성생활은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밤이 되면 남성은 원하는 여성에게 찾아갈 수 있고, 여성은 이를 받아들일지 거절할지 자유롭게 선택한다. 남녀 모두 여러 명의 파트너를 가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항상 알지는 못한다. 아이들은 어머니 집안의 구성원들에 의해 함께 양육되며, 어머니의 남자 형제, 즉 외삼촌이 서구 사회의 '아버지'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2] 이러한 특징은 남성을 '풀 위의 비'와 같이 여기는 나시족의 믿음과도 관련이 있다. 비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자라게 하는 역할을 하듯, 남성의 역할은 여성 안에 이미 존재하는 태아를 '적시는' 것이라고 여긴다. 나시족은 유전 형질이 뼈에 담겨 있으며, 이는 여성을 통해 전달된다고 믿는다.[2]그러나 최근 관광객 유입이 늘어나고 일부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전통적인 관습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일부 나시족 사이에서는 일부일처제 형태의 부부 관계를 따르는 경향도 보인다.[2]
특히 나시족 중 모소족(Mosuo) 사회는 여성 중심의 모계제를 더욱 뚜렷하게 보여주며, 통혼(通婚)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집안의 가장은 여성이며, 모든 중요한 결정을 여성이 내린다.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로 '할머니 방'이 있다. 이 방은 집안의 최고령 여성이자 여가장이 머무는 곳으로, 조상 제단 등이 있으며 과거에는 집안의 미성년자들이 모두 이 방에서 생활했다. 오래된 집들 중에는 여전히 이 '할머니 방'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2]
3. 3. 현대 사회의 변화
용닝(永宁) 지역의 나시족(Nakhi)은 모계제이자 모계거주제 사회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모계 혈통을 따르며, 남녀 모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어머니의 집에서 생활한다. 서구 사회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결혼 제도는 존재하지 않으며, 혈연관계가 아닌 성인 간의 성생활은 비교적 자유롭다. 남자는 밤에 원하는 여자를 찾아갈 수 있고, 여자는 이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자유가 있다. 남녀 모두 여러 명의 파트너를 가질 수 있어, 아이들이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모르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은 어머니 집안의 구성원들에 의해 양육되며, 외삼촌이 서구 사회의 '아버지'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관습은 남자를 풀을 자라게 하는 '비'와 같이 여기는 전통적 믿음과 관련이 있는데, 남성의 역할은 이미 여성 안에 존재하는 태아를 '적시는' 것으로 이해된다. 유전 형질은 뼈에 담겨 여성 혈통을 통해 이어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최근 관광객 유입 증가와 일부 주민들의 이주 등으로 인해 전통적인 생활 방식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으며, 일부 나시족 사이에서는 일부일처제 형태의 관계를 맺는 경향이 관찰된다.[2]4. 문화
나시족의 고유 문화 중 하나로 톤파 문화를 들 수 있다. 이는 나시족 고유의 종교인 톤파교(약 7세기 성립 추정)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톤파교는 2000여 신을 섬기는 자연숭배를 기반으로 한 민간 신앙이며, 티베트 불교의 영향도 받았으나 조직화된 신자 집단이나 사찰은 없다.
톤파교의 경전은 샤먼 역할을 하는 '톤파'에 의해 '톤파 문자'로 쓰였다. 톤파 문자는 약 1400개의 그림과 같은 상형 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안타깝게도 경전의 상당수는 문화 대혁명 시기에 소실되었으나, 약 5000권 정도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4. 1. 건축
나시족은 원래 모성 사회였으며, 이는 '할머니방(祖母部屋)'이라는 전통 가옥 구조에서도 나타난다. 할머니방은 집안의 최연장 여성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선조 제단이 있고 미성년 자녀들이 함께 생활하는 중심 공간이었다. 오래된 집에는 여전히 이 방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나시족 가옥은 한족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아, 안마당을 중심으로 한 채에서 네 채의 건물이 배치되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때로는 인접한 안마당끼리 연결되기도 한다. 겉보기에는 진흙 벽돌과 목재 구조로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창틀과 문에 정교하고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기둥과 기둥 받침대 역시 우아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편안하고 통풍이 잘되는 주거 환경을 제공한다. 나시족 가옥을 특징짓는 많은 목각 장식들은 오늘날 백족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나시족의 마을에서 티베트 불교 사원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찰 내부는 기둥, 아치 등에 새겨진 조각과 벽화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이는 토착 신앙인 동바 신앙과 불교 양식이 독특하게 결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벽화에는 동바 신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표현 방식은 티베트 불교 주제를 한족의 관점에서 해석한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장식에는 서사시의 장면, 춤추는 사람, 전사, 동물과 새, 꽃 등 다양한 소재가 등장한다. 델와다 사찰(Delwada Temple)이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리장에는 작은 시내가 많이 흐르며, 마을 중심부에는 생명이나 죽은 이를 기리는 여러 색깔의 제단이 설치되기도 한다.
4. 2. 의복
나시족 여성들은 넓은 소매의 느슨한 가운에 재킷과 긴 바지를 입고, 허리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벨트를 착용한다. 어깨에는 양가죽을 걸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닝랑 현(寧蒗縣|닝랑현중국어) 지역의 여성들은 짧은 재킷과 여러 겹으로 된, 땅에 닿을 정도로 긴 치마를 입는다. 머리에는 큰 검은색 목화 터번을 두르고 큰 은색 귀고리를 착용하기도 한다.
남성들의 복장은 한족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 현대에 들어서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 전통 의상을 평상시에 입는 경우가 드물어졌으며, 주로 문화 행사나 특별한 날에만 착용하는 경향이 있다.
4. 3. 음악

나시족은 바이샤 시위에와 중국풍의 동징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고유한 음악 형태를 가지고 있다.
4. 4. 전통
나시족은 전통적으로 모계 사회의 특징을 보여 여성의 가정 내 지위가 높았다. 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예가 '할머니방(祖母部屋)'이다. 할머니방은 집안의 최고 어른인 최연장 여성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선조 제단 등이 이곳에 마련되었으며 집안의 미성년자들은 모두 이 방에서 생활했다. 현재도 오래된 나시족 가옥에서는 이 할머니방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나시족의 전통 신앙은 기본적으로 자연 숭배에 기반하며, 티베트 불교의 영향도 깊게 받았다. 나시족 마을에서 티베트 불교 관련 건축물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리장 시내에는 작은 개울이 많이 흐르는데, 그 중심부에는 생명이나 죽은 이를 기리는 다채로운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나시족 고유의 예술로는 독특한 수공예 자수, 동바 회화, 동바 목각 등이 전해진다. 오늘날 나시족 가옥에서 볼 수 있는 정교한 목각 장식 중 상당수는 백족(白族) 장인들의 솜씨이기도 하다. 건축 양식에서는 한족의 영향을 받아, 안마당을 중심으로 한 채에서 네 채의 건물이 배치되는 전형적인 한족 스타일로 집을 짓는다. 때로는 인접한 안마당끼리 연결되기도 한다. 겉보기에는 진흙 벽돌과 목재 구조가 소박해 보일 수 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창틀과 문에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고, 기둥과 기둥 받침대 역시 우아하게 장식되어 있어 편안하고 통풍이 잘되는 주거 환경을 제공한다.
나시족 사찰 내부는 기둥, 아치, 벽화 등에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동바 전통과 불교 양식이 독특하게 결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장식의 주제는 서사시의 장면, 춤추는 사람들, 전사, 동물과 새, 꽃 등 다양하다. 벽화에는 주로 동바 신들이 묘사되는데, 그 표현 양식은 티베트 불교 주제를 한족의 방식으로 해석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델와다 사찰(Delwada Temple)이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나시족의 전통적인 주요 의례 활동은 음력 2월 첫째 날(주로 용이나 뱀의 날)에 행해졌던 슈(Shu) 자연 영혼 숭배였다. 이것이 본래 나시족의 설날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오래된 전통이 잘 보존된 바이디(Baidi) 지역에서는 이 축제가 여전히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 축제일이 되면 모든 주민이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바이슈이타이(Baishuitai) 계단 주변에 모여 축제 분위기 속에서 슈 자연 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바이디의 슈 숭배 시기와 비슷하게, 바이샤(Baisha)와 리장에서는 산두오(Sanduo) 신을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 슈 숭배 며칠 전에는 하늘 숭배 의식이 거행되는데, 이는 나시족의 조상이 하늘에서 왔으며 자신들 또한 천상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믿음을 기리는 의례적인 축제이다. 현대 리장의 나시족에게는 설날이 가장 중요한 축제로 자리 잡았다. 설날은 사람과 집, 그리고 경작지를 위한 쇄신의 시간으로 여겨지며, 지난 한 해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깨끗하게 다시 태어나는 재생의 의미를 지닌다 (Ceinos 2012).
| 축제/의례 | 시기 | 내용 |
|---|---|---|
| 전통 설날 (슈 자연 영혼 숭배) | 음력 2월 첫째 날 | 바이디 등지에서 슈 자연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가장 중요한 전통 축제. |
| 현재 설날 | 설날 | 리장 등지에서 가장 중요한 축제. 인간, 집, 밭의 쇄신과 정신적, 육체적 재생을 의미. |
| 하늘 숭배 의식 | 슈 숭배 며칠 전 | 나시족 조상이 하늘에서 왔음을 기리는 의례. |
| 횃불 축제 | 음력 6월 24-25일 (약 7월 8-9일) | 연례 축제. |
| 산두오 축제 | 음력 2월 8일 | 전쟁의 신 산두오를 기리는 축제. 염소를 제물로 바침. |
산두오 축제는 전설 속 전쟁의 신이자 지역 수호신인 산두오를 기리는 날이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한 사냥꾼이 옥룡설산에서 기이한 돌을 발견하여 집으로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돌이 너무 무거워 잠시 내려놓았는데, 다시 들려고 하니 도저히 들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 돌이 신의 화신이라 여겼고, 나중에 이 자리에 산두오를 모시는 사찰을 세웠다. 산두오는 흰 옷과 흰 투구를 쓰고 흰 창을 들고 흰 말을 탄 신선의 모습으로 묘사되며, 지역 주민과 땅을 보호하는 신으로 믿어진다. 산두오가 염소의 해에 태어났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축제에서는 염소를 제물로 바친다.
장례 풍습으로는 고대부터 화장이 전해져 내려왔으나, 청나라 말기에 대부분의 나시족 지역에 매장이 도입되어 오늘날까지 주된 장례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장례식에서는 죽은 이의 죄를 씻기 위해 종교 경전을 낭송한다.
운남성 용녕현과 사천성 연원현의 나시족 일부에게는 여전히 모소족(摩梭族)과 유사한 모계 가족 구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과거 중국 공산당 정부가 강력하게 근절하려 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유지된 것이다. 이 구조에서는 가족의 가장인 여성이 어머니 또는 자매와 그 자손을 통해 재산과 지위를 물려준다.
나시족 사회에서 여성은 대부분의 가사 노동과 농사일을 책임진다. 손님이 방문했을 때는 부엌에 머무르는 것이 관례지만, 가정 운영에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가족 내 중요한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소수의 나시족 남성들은 매사냥이라는 고대 중국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매를 이용한 사냥은 오늘날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문화 유산이다.[3]
5. 언어
나시족이 사용하는 나시어는 티베트-버마어족에 속하며, 민족적으로는 이족이나 리수족과 가깝다. 오랜 한족과의 교류로 인해 대부분 중국어도 구사할 수 있다. 나시어는 고유한 문자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동파문자가 대표적이다.
5. 1. 문자
나시족은 동파문자(흔히 톤파 문자라고도 불림)라는 상형문자를 가지고 있다. 이 문자는 주로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현재까지 사용되는 상형문자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동파궁(자료관)에는 춤(아리리)의 악보 등이 전시되어 있어 현재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동파문자 외에도 게바 문자라는 표음문자도 있었으나,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1957년에는 라틴 문자를 이용한 표기법이 제정되어 사용되고 있다.
5. 2. 언어 사용
나시어는 티베트-버마어족의 이어 그룹에 속하며, 민족적으로는 이족이나 리수족과 가깝다. 하지만 한족과의 교류가 많아 대부분 중국어도 구사할 수 있다. 이 언어는 게바 문자와 톤파 문자(동파 문자)로 표기된다.나시족은 톤파 문자(동파 문자)라고 하는 상형 문자를 가지고 있지만, 이는 주로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된다. 별도의 표음 문자도 있었으나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1957년에 제정된 라틴 문자 표기법도 사용되고 있다. 톤파 문자는 현재도 종교적으로 사용되며, 원시 불교와 가장 가깝다고 여겨진다. 또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상형 문자로서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동바궁(자료관)에는 아리리(춤)의 악보 등이 전시되어 현재도 볼 수 있다. 톤파 문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톤파 문자 항목을 참조하라.
6. 종교
나시족은 전통적으로 토착 신앙인 동바교(Dongba)의 지도를 받으며, 티베트 불교와 도교(특히 풍수 사상)의 영향도 받았다.[1][2] 기본적으로 자연을 숭배하는 경향이 강하며, 티베트 불교는 특히 모소족 사이에서 널리 존중받고 마을 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1][2] 동바교는 샤먼인 '동바'(톤파)가 상형 문자인 '동바 문자'로 쓰인 경전을 바탕으로 의례를 주관하는 나시족 고유의 민간 신앙이다.[3]
과거 나시족은 모계 사회의 전통이 있어 가정 내 여성의 지위가 높았는데, 집안 어른인 최연장 여성이 거주하며 선조 제단 등을 둔 '할머니방'은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1] 지금도 오래된 집에는 이 방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1] 리장 지역에는 작은 시내가 많으며, 생명이나 죽은 이를 기리는 여러 색의 제단들이 있다.[1]
6. 1. 동바 종교

나시족은 전통적으로 토착 신앙인 동바(Dongba) 종교의 지도를 받는다. 한족 문화와 다른 문화의 영향으로 티베트 불교가 널리 퍼졌으며, 특히 모소족 사이에서 존중받는다. 도교, 특히 풍수 사상은 10세기부터 널리 행해져 왔다.
동바 종교는 티베트의 본교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동바'는 나시어로 '현자'를 의미한다. 나시족 전설에 따르면 동바의 기원은 12세기 바이슈이타이 근처 동굴에 살았던 티베트 동부 출신 본교 샤먼 톤파 쉔랍(སྟོན་པ་གཤེན་རབ|톤파 쉔랍bo, 丁巴什罗|딩바스뤄중국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학자들은 많은 동바 의례가 본교의 강한 영향을 보여주며, 원래 나시족 고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본교 라마승들이 나시족 사이에 농부로 정착하여 부업으로 굿을 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Llü-bu' 또는 'Ssan-nyi'로 알려진 지역의 토착 의례 전문가들과 경쟁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본교가 티베트 불교와 매우 혼합되어 순수하고 진정한 수행자를 비교 기준으로 삼기 어렵기 때문에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종교 경전에 따르면 Llü-bu는 예언, 굿, 그리고 다른 의식들을 무아지경 상태에서 행했던 여성 샤먼들이었다. 19세기 초 동바 사제들은 방대한 종교 용어와 다양한 의례를 만들어냈고, Llü-bu를 대체했다.
동바교는 약 7세기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2000여 신을 섬기는 자연숭배 기반의 민간 신앙이다. 티베트 불교의 영향도 보이지만, 조직화된 신자 집단이나 사찰은 없다. 동바 신자들은 별도의 예배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이 이 지역에 도착한 후 공식적으로 종교로 인정받지 못했다. 동바 샤먼은 단순히 시간제 사제로서 대부분의 나시족이 읽을 수 없는 동바 종교 경전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다. 나시족은 보통 자신의 언어(문자)를 읽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경전은 샤먼인 동바(톤파)에 의해 "동바 문자"(톤파 문자)로 쓰여지는데, 이는 그림과 같은 약 1400개의 상형 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경전 대부분은 문화 대혁명 시기에 소실되었으나 약 5000권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동바 종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동바 신화에서 "자연"과 "인간"은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이다. 슈밍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자연은 "Shv"라고 불리는 영혼들에 의해 통제된다. 이 신들은 인간과 뱀의 키메라로 묘사된다. 동바 사제들은 이 영혼들을 달래고 지진과 가뭄과 같은 자연 재해로 이어지는 분노를 막기 위해 "Shv Gu"와 같은 의식을 행한다. 중국 공산당 통치 이전에는 슈와 같은 자연 신에게 헌정된 사당이나 예배 장소가 많은 마을에 여전히 존재했다. 리장 나시족 자치현에 위치한 타청의 나시족 주민들은 여전히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들의 자연에 대한 태도는 동바 사제인 허 슌(He Shun)의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세 아들에게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나무를 베는 것을 금했는데, 이는 신들을 화나게 하고 그의 가족에게 불행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널리 행해지는 동바 의례 중 하나인 ''Zzerq Ciul Zhuaq''(말 그대로 나무의 빚을 갚는다)는 슈밍 마을에서 설명되었다. 이 의례는 누군가가 질병이나 불운에 시달릴 때 동바 사제와 상의하여 행해졌다. 많은 경우, 그 사람이 숲에서 벌목이나 더러운 것을 씻는 행위를 했던 것으로 나타나면, 관련된 가족이나 사람은 동바 사제에게 그 활동이 일어났던 곳 근처에서 의례를 거행하고 자연의 신 슈에게 사과해야 했다.
보수적인 성향의 마을 주민들은 벌목을 금지했으며, 나뭇가지 자르기나 침엽수의 마른 솔잎을 줍는 것조차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솔잎을 줍는 것은 숲이 무성하고 푸른 7월에만 허용되었으며, 가구당 한 사람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여 노동자 수가 더 많거나 적은 가구 간의 공정성을 유지했다. (마른 솔잎은 돼지똥과 섞어 비료로 사용한다. 푸른 솔잎은 축제 기간 동안 마당에 지면을 덮는 데 사용된다.) 'Lao Min'(老民|라오민중국어)으로 알려진 마을 원로들은 이 모든 활동을 감시했다. 원로들은 또한 자발적으로 마을의 공공 업무를 수행했다. 전통적으로 그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여전히 많은 마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용천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벌목과 땔나무 채취에 대한 전통적인 규정을 가지고 있다. 현지 사람들은 ''Jjuq-ssaiq'' 또는 ''Jjuq-Hal-Keel''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특정 마을 근처의 산림 지역에서 2~3년마다 나무와 땔나무를 정기적으로 벌채하는 것을 의미한다. Lao Min, 마을 대표, 산림 감시원으로 구성된 사람들이 미리 절차를 준비한다. 최근 몇 년 동안에도 나시족 마을은 여전히 숲을 보호하는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이 조직은 마을 위원회 구성원에 의해 관리되는데, 여기에는 농업 생산 협동조합의 책임자, 여성 연합 회원, 마을 산림 감시원이 반드시 포함된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집권할 때까지 마을 주민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원칙을 따랐고, 미래 세대를 위해 자연 자원 보존을 고려하여 자연 자원을 신중하게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949년 이후 나시족에게 심각한 문화적,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고, 정부는 나시족 지역에서 한족 군대에 의한 벌목을 장려했으며, 이는 전통 관습의 영향력 상실로 이어졌다.
6. 2. 티베트 불교
나시족은 전통 신앙 외에도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나시족 마을에서 티베트 불교 관련 건물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특히 모소족 사이에서는 티베트 불교가 널리 존중받는다.14세기에 8대와 10대 카르마파가 리장 지역에 머물렀던 것은 나시족의 불교 수용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영향으로 많은 나시족이 카규파 계열의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후 리장의 나시족은 불교 사원을 건립하여 신앙 공동체의 예배 장소로 삼았다. 라시바에 있는 최초의 사원인 오그민 남링은 10대 카르마파인 촉잉 도르제가 창건한 것이다. 일부 나시족 가정에서는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마니돌을 찾아볼 수도 있다.
나시족 왕실과 티베트 불교의 관계도 깊었다. 1516년, 나시족 왕은 8대 카르마파인 미교 도르제를 리장으로 초청했다. 왕은 그의 안전을 위해 네 명의 장군과 만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하여 호위했으며, 국경에서는 코끼리를 타고 직접 마중 나와 웅장한 환영식을 열었다. 기록에 따르면 왕은 카르마파 앞에 엎드려 예를 표했다고 한다.
나시족 고유의 종교인 톤파교 역시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이지만, 조직화된 신자 집단이나 사찰은 없는 독자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Sons of Heaven, Brothers of Nature: The Naxi of Southwest China
2012
[2]
간행물
6 modern societies where women literally rule
http://mentalfloss.c[...]
MentalFloss
2017-03-04
[3]
웹사이트
China and Nepal
http://friends.backc[...]
Backcountry
[4]
서적
Lessons in Being Chinese: Minority Education and Ethnic Identity in Southwest Chin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9
[5]
서적
Identity and Schooling Among the Naxi: Becoming Chinese with Naxi Identity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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