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요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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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요시군은 1915년 일본령 가라후토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이다. 4세기부터 삿분 문화, 오호츠크 문화가 번성했고, 중세에는 안도 씨가 에조를 통괄하며 몽골의 사할린 침공에 대항했다. 에도 시대에는 마쓰마에 번의 관할, 이후 천령이 되었다가 1875년 러시아령이 되었다. 1905년 러일 전쟁 이후 일본령으로 복귀했다가, 1945년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어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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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부터 1949년까지 존재했던 일본령 사할린의 에스토루군은 우시로군, 구슈나이군, 나요시군의 일부를 통합하여 설치되었으며 에스토루 지청 관할 하에 3개의 읍과 1개의 촌으로 구성되었으나 1945년 소련의 사할린 침공으로 점령당해 1949년 사할린청 폐지와 함께 소멸되었다. - 에스토루 지청 - 나요시정
나요시정은 1941년 가라후토 나요시군에 설치되었던 정으로, 1943년 내지로 편입되었으나 1945년 소련에 점령된 후 1949년 폐지되었으며, 정내에는 소규모 광산과 홋카이도 탄광 철도 나요로 선, 여러 공립 국민학교가 있었다. - 가라후토청의 군 - 시스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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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부터 1949년까지 존재했던 일본령 사할린의 에스토루군은 우시로군, 구슈나이군, 나요시군의 일부를 통합하여 설치되었으며 에스토루 지청 관할 하에 3개의 읍과 1개의 촌으로 구성되었으나 1945년 소련의 사할린 침공으로 점령당해 1949년 사할린청 폐지와 함께 소멸되었다. - 가라후토청 - 시스카군
시스카군은 1915년에 발족하여 1945년 소련에 점령될 때까지 존재했던 사할린 섬의 군으로, 다양한 문화가 번성했으며, 몽골 제국과의 전투, 일본의 통치 등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 가라후토청 - 마오카정
마오카정은 일본 제국 시대 가라후토에 있던 정으로 러일 전쟁 후 일본의 통치하에 발전했으나, 1945년 소련군 점령 후 귀환선 출발지가 되었으며 현재는 유적과 관광 명소가 남아있다.
나요시군 | |
---|---|
에스토루 지청 정보 | |
지청 | 에스토루 지청 |
위치 | 가라후토청 |
설치 | 1907년 12월 |
행정 구역 | |
에스토루군 | 진나이정 우시로촌 에스토루정 도로정 |
나요시군 | 나요시정 니시사쿠탄촌 |
2. 군역
1915년(다이쇼 4년) 행정 구역 발족 당시 군역은 에스토루 정, 도로 정, 나요시 정, 니시사쿠탄 촌의 3정 1촌 구역에 해당한다.[42]
4세기경 나요시군 지역에서는 스즈야 문화가, 5세기경부터 오호츠크 문화가 번성했다. 오호츠크 문화는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 기술되어 있으며, 아스카 시대에 아베노 히라후와 교전했던 숙신(미시와세)으로 여겨진다. 이후, 삿분 문화의 진출과 함께 오호츠크인은 사할린 남부에서 쫓겨났다.
3. 역사
11세기 초 삿분 문화가 나요시군 지역에도 진출했다. 삿분 문화는 아이누의 조상 집단에 해당한다. 당시 왜인 사회에서 무사가 대두하기 시작하면서 화살깃이나 갑옷 등의 재료로 수리부엉이 깃털과 해수(海獸) 가죽의 수요가 높아졌고, 이는 중요한 교역품이 되었다. 수리부엉이 깃털이나 물개 가죽 등은 아베 씨나 오슈 후지와라 씨를 비롯한 오우의 호족을 경유하여 전국으로 유통되었다.[1] 왜인 사회에서 유통되는 물자가 증가한 것은 삿분 문화에서 아이누 문화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도사미나토를 거점으로 에미시의 자손을 자칭하는 에조 칸레이·안도 씨가 '당자'라고 불리는 에조(아이누)를 통괄했다(『스와 묘진 그림말』).[2][3] 안도 씨는 오슈 후지와라 씨를 계승하는 형태로 동해 북부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회선식목』),[4][5] 중세의 안도 씨는 육지의 호족인 동시에 안도 수군을 옹호하며, 에조 사회의 소란 시에는 쓰가루 해협 이북으로 출병했다.[6]
당시 당자 에조(골괴)는 사할린을 북상하여 독수리 깃털 등의 산품을 두고 북사할린에 사는 길리미(기레미, 길열멸)와 갈등이 있었다. 길리미는 책봉 체제 하에 있었고, 원에 "골괴(쿠이)"나 "역리우(이리우)"가 쳐들어온다고 호소하여 몽골의 사할린 침공을 초래했다.
아이누 인구는 적어 병력은 많아야 수백 명으로 여겨지며,[10] 무기의 재료가 되는 철 등도 왜인 사회로부터 공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몽골은 1264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수천 명, 만 명 단위의 병사나 배 1000척 등 대규모 병력을 여러 번 파견했다(『원사』, 『원문류』권 사십일).[12]
당시 홋카이도나 사할린 주변에서 조직적으로 몽골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안도 수군을 옹호하는 안동씨 이외에는 없었고,[13] 당자 에조는 안동씨의 지원을 받아[14] 반세기 가까이 싸움을 계속했다고 보여진다. 1275년(겐지 원년) 니치렌 유문 『종종어진무어서』에는 에조의 쟁란을 수습하기 위해 출병한 안도 고로가 목을 베인 것이 기록되어 있어, 몽골과 싸웠다는 견해도 있다.
당자 에조 진영과 몽골은 거의 대등하게 싸웠고, 1308년(도쿠지 3년/엔쿄 원년) 당자 측에서 정전 조건을 제시하여 실질적인 "강화"를 하고 전투를 멈추고 교역하게 되었다. 이때 안동씨는 교전 지속파와 정전파로 나뉘어 안도씨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15]
에도 시대에는 마쓰마에 번이 아이누들을 지배했다. 나요시군 지역의 아이누들은 소야, 혼토군 시라누시, 혼토군 톤나이 등에서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얻었다. 막부는 근번소를 설치하고, 옴샤 등을 통해 무육 정책을 시행했다. 옴샤에서는 노약자를 돕거나, 오토나, 코즈카이, 도산토리 등 역에조를 임명했다.[20]
18세기 후반, 스메렌쿠르 에조나 산단인을 나요로(도마리군나요시 촌)의 소오토나가 살해하여, 우쇼로(우시로군)의 아이누 오토나도 만주족에게 조공을 강요받았다.[21] 아이누들은 몇 년에 한 번씩 산단으로 가야 했는데, 그 부담이 컸다.
분카 4년(1807년) 분카의 난(文化露寇)의 영향으로[22][23][24] 나요시 군역은 마쓰마에 봉행 관할 공의 어료가 되었다가 ( ~1821년), 이후 마쓰마에 번령으로 돌아왔다.
아이누들은 산단인과의 무역에서 큰 빚을 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산단인에게 끌려가 가족이 곤궁해지거나 마을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마쓰다 덴지로는[27][28] 산단 무역을 막부 직영으로 하고, 하쿠슈 회소에서만 거래하도록 개혁했다. 막부는 아이누가 갚을 수 없는 빚을 대신 갚아주었지만, 이후에도 아이누들은 생계를 위해 힘든 노동을 해야 했다.
교와 원년(1801년), 다카하시 지다유(잇칸) 등이 서안의 쇼야 곶(나요시정 기타소야)까지 조사했다. 분카 5년(1808년), 마쓰다 덴주로와[29] 마미야 린조가[30] 북사할린 방면을 조사했다. 당시 나요시군역은 인가가 적고 우쇼로 아이누의 어장이었으며, 산탄인이 자주 나타나는 최남단이었다.
1855년 러일 화친 조약에서 사할린 방면의 국경 확정을 미루었다.[34] 같은 해부터 사할린을 포함한 에조치 전역은 다시 공의어료가 되었고, 아키타 번이 나요시 군역의 경비를 실시했으며, 동계에는 어장의 반야에 머무는 번인을 그대로 무장화하여 아시가루로 등용하여 경비했다.
1858년 오노번(번주: 도이 도시타다)의 준령, 우쇼로(우시로) 장소(우쇼로령)에 포함되었다.[24][35] 그 범위는 북 에조지 서쪽 해안의 우시로 군 구역과 나요시 군 및 북위 50도선 바로 북쪽의 북 사할린 호로코탄(포로케이)까지의 지역에 해당한다.
1859년 3월, 에치젠 오노번 무사 하야카와 야고자에몬 등 30명이 사할린 오지 개발을 위해 번선 「오노마루」로 우쇼로에 부임했다.
1867년 사할린 잡거 조약 체결로 사할린 전 지역이 러일 양국 공동 통치 지역이 되면서, 사할린 포기까지 나요시 군역에 러시아인의 침입이 있었다.
1869년 북에조치를 가라후토 주(국)로 개칭[40]하고, 개척사 직할령이 되었다.
1875년, 가라후토-치시마 교환 조약에 의해 러시아령이 되었다. 이 조약 제6조에서는 러시아령 시대에도 일본인의 어업권이 인정되었으며,[41] 쿠슌나이에서 가라후토 최북단까지는 북서 해안 어구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사할린섬 남부를 획득하면서 나요시 군 지역은 다시 일본령이 되었다.[21][22][23] 1907년에는 사할린청이 설치되었고, 초기에는 마우카 지청 나요시(명호) 출장소의 관할이었다가 1908년 4월 마오카 지청 나요시 출장소로 개칭되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독립하여 명호 지청이 되었다.
1909년에는 사할린청령으로 '부락 총대 규정'이 제정되어 주요 집락에 촌장에 해당하는 총대를 두고 행정 사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1913년 6월에는 관할 지청이 구춘내 지청으로 개칭되었고, 구・명호 지청이 북명호 출장소로 개칭되었다가 10월에는 도마리 지청으로 변경되었다.
1915년 6월 26일, "가라후토의 군 및 정촌 편제에 관한 건"(다이쇼 4년 칙령 제101호)에 따라 '''나요시 군'''이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당시 나요시 군에는 에스토루 촌, 나오시 촌, 아베츠 촌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도마리오르 지청 기타나요시 출장소가 관할하였다.
1918년 6월, 기타나요시 출장소는 나오시 출장소로 개칭되었다. 이후 1929년 7월 1일 가라후토 정촌제가 시행되면서 '''에스토루 정'''과 '''나요시 촌''' (2급 정촌)이 발족하였다.
1938년 4월 1일, 에스토루 정의 일부가 분리되어 '''도로 정''' (1급 정촌)이 발족하면서 나요시 군은 2정 1촌 체제가 되었다. 1941년 4월 1일에는 나오시 촌의 일부에 '''나요시 정''' (1급 정촌)이, 나머지 지역에는 '''니시사쿠탄 촌''' (1급 정촌)이 발족하여 3정 1촌 체제가 되었다.
1942년 11월, 에스토루 정과 도로 정이 에스토루 군으로 소속이 변경되면서 나요시 군에는 나요시 정과 니시사쿠탄 촌만 남게 되었다.
1943년 4월 1일, "가라후토에 시행하는 법률의 특례에 관한 건"(다이쇼 9년 칙령 제124호)이 폐지되면서 사할린은 일본 내지에 편입되었다. 같은 해 6월 1일에는 가라후토 정촌제가 폐지되고 가라후토에서 정촌제가 시행되었으며, 2급 정촌은 지정 정촌이 되었다.
1945년 소련군이 점령하였다.[38][39][40] 1949년 국가 행정 조직법 시행으로 사할린청 및 나요시 군은 법적으로 폐지되었다.[41]
3. 1. 고대
4세기경 나요시군 지역에서는 스즈야 문화(鈴谷文化)가, 5세기경부터 오호츠크 문화가 번성했다.
오호츠크 문화는 『일본서기』나 『속일본기』에 기술되어 있으며, 아스카 시대에 아베노 히라후와 교전했던 숙신(미시와세)으로 여겨진다. 이후, 삿분 문화(擦文文化)의 진출과 함께 오호츠크인은 사할린 남부에서 쫓겨났다.
11세기 초 삿분 문화가 나요시군 지역에도 진출했다. 삿분 문화의 담당자는 아이누의 조상 집단에 해당한다. 당시 왜인 사회에서 무사가 대두하기 시작하면서 화살깃이나 갑옷 등의 재료로서 수리부엉이 깃털과 해수(海獸) 가죽의 수요가 높아졌고, 중요한 교역품으로서 이것들을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리부엉이 깃털이나 물개 가죽 등은 아베 씨나 오슈 후지와라 씨를 비롯한 오우의 호족을 경유하여 전국으로 유통되었다.[1] 동시에, 왜인 사회에서 유통되는 물자가 증가한 것이 삿분 문화에서 아이누 문화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3. 2. 중세
가마쿠라 시대에는 도사미나토를 거점으로 에미시의 자손을 자칭하는 에조 칸레이·안도 씨가 '당자'라고 불리는 에조(아이누)를 통괄했다(『스와 묘진 그림말』).[2][3] 안도 씨는 오슈 후지와라 씨를 계승하는 형태로 동해 북부를 중심으로 상당히 광범위하게 활동했다고 한다(『회선식목』).[4][5] 중세의 안도 씨는 육지의 호족인 동시에 안도 수군을 옹호하며, 에조 사회의 소란 시에는 종종 쓰가루 해협 이북으로 출병했다.[6]
당시 당자 에조(골괴)는 사할린을 북상하여 독수리 깃털 등의 산품을 두고 북사할린에 사는 길리미(기레미, 길열멸)와 갈등이 있었다. 길리미는 책봉 체제 하에 있어 자신이 신종하는 원(몽골인이 세운 왕조)에 "골괴(쿠이)"나 "역리우(이리우)"가 쳐들어온다고 호소하여 몽골의 사할린 침공을 초래했다.
아이누 인구는 적어 병력은 많아야 수백 명으로 여겨지며,[10] 무기의 재료가 되는 철 등도 왜인 사회로부터 공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은 1264년부터 반세기 가까운 기간 동안 수천 명, 만 명 단위의 병사나 배 1000척 등 대규모의 것만 여러 번(두 자릿수)에 걸쳐 파견했다(『원사』, 『원문류』권 사십일).[12]
당시 홋카이도나 사할린 주변에서 활동하며 조직적으로 몽골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안도 수군을 옹호하는 안동씨 이외에는 없었고,[13] 당자 에조는 안동씨의 연계나 지원을 받아[14] 반세기 가까이 싸움을 계속했다고 보여진다. 1275년(겐지 원년)에 쓰여진 니치렌 유문 『종종어진무어서』에는, 에조의 쟁란을 수습하기 위해 출병한 안도 고로가 목을 베인 것이 기록되어 있어, 몽골과 싸웠다는 견해도 있다.
당자 에조 진영과 몽골은 거의 호각으로 싸웠고, 1308년(도쿠지 3년/엔쿄 원년)에 당자 측에서 정전 조건을 제시하여 실질적인 "강화"를 하고 전투를 멈추고 교역하게 되었다. 이때 안동씨는 교전 지속파와 정전파로 나뉘어 안도씨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15]
3. 3. 근세
에도 시대에는 마쓰마에 번이 아이누들을 지배했다. 나요시군 지역의 아이누들은 소야, 혼토군 시라누시, 혼토군 톤나이 등에서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얻었다. 막부는 근번소를 설치하고, 옴샤 등을 통해 무육 정책을 시행했다. 옴샤에서는 노약자를 돕거나, 오토나, 코즈카이, 도산토리 등 역에조를 임명했다.[20]
18세기 후반, 스메렌쿠르 에조나 산단인을 나요로(도마리군나요시 촌)의 소오토나가 살해하여, 우쇼로(우시로군)의 아이누 오토나도 만주족에게 조공을 강요받았다.[21] 아이누들은 몇 년에 한 번씩 산단으로 가야 했는데, 그 부담이 컸다.
분카 4년(1807년) 분카의 난(文化露寇)의 영향으로[22][23][24] 나요시 군역은 마쓰마에 봉행 관할 공의 어료가 되었다가 ( ~1821년), 이후 마쓰마에 번령으로 돌아왔다.
아이누들은 산단인과의 무역에서 큰 빚을 지게 되었고, 빚 때문에 산단인에게 끌려가 가족이 곤궁해지거나 마을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마쓰다 덴지로는[27][28] 산단 무역을 막부 직영으로 하고, 하쿠슈 회소에서만 거래하도록 개혁했다. 막부는 아이누가 갚을 수 없는 빚을 대신 갚아주었지만, 이후에도 아이누들은 생계를 위해 힘든 노동을 해야 했다.
교와 원년(1801년), 다카하시 지다유(잇칸) 등이 서안의 쇼야 곶(나요시정 기타소야)까지 조사했다. 분카 5년(1808년), 마쓰다 덴주로와[29] 마미야 린조가[30] 북사할린 방면을 조사했다. 당시 나요시군역은 인가가 적고 우쇼로 아이누의 어장이었으며, 산탄인이 자주 나타나는 최남단이었다.
3. 4. 막말 ~ 메이지 시대
1855년 러일 화친 조약에서 사할린 방면의 국경 확정을 미루었다.[34] 같은 해부터 사할린을 포함한 에조치 전역은 다시 공의어료가 되었고, 아키타 번이 나요시 군역의 경비를 실시했으며, 동계에는 어장의 반야에 머무는 번인을 그대로 무장화하여 아시가루로 등용하여 경비했다.
1858년 오노번(번주: 도이 도시타다)의 준령, 우쇼로(우시로) 장소(우쇼로령, 령의 항목도 참조)에 포함되었다.[24][35] 그 범위는 북 에조지 서쪽 해안의 우시로 군 구역과 나요시 군 및 북위 50도선 바로 북쪽의 북 사할린 호로코탄(포로케이)까지의 지역에 해당한다.
1859년 3월, 에치젠 오노번 무사 하야카와 야고자에몬 등 30명이 사할린 오지 개발을 위해 번선 「오노마루」로 우쇼로에 부임했다.
1867년 사할린 잡거 조약 체결로 사할린 전 지역이 러일 양국 공동 통치 지역이 되면서, 사할린 포기까지 나요시 군역에 러시아인의 침입이 있었다.
1869년 북에조치를 가라후토 주(국)로 개칭[40]하고, 개척사 직할령이 되었다.
1875년, 가라후토-치시마 교환 조약에 의해 러시아령이 되었다. 이 조약 제6조에서는 러시아령 시대에도 일본인의 어업권이 인정되었으며,[41] 쿠슌나이에서 가라후토 최북단까지는 북서 해안 어구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3. 5. 일본령 복귀 (1905년 ~ 1945년)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사할린섬 남부를 획득하면서 나요시 군 지역은 다시 일본령이 되었다.[21][22][23] 1907년에는 사할린청이 설치되었고, 초기에는 마우카 지청 나요시(명호) 출장소의 관할이었다가 1908년 4월 마오카 지청 나요시 출장소로 개칭되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독립하여 명호 지청이 되었다.
1909년에는 사할린청령으로 '부락 총대 규정'이 제정되어 주요 집락에 촌장에 해당하는 총대를 두고 행정 사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1913년 6월에는 관할 지청이 구춘내 지청으로 개칭되었고, 구・명호 지청이 북명호 출장소로 개칭되었다가 10월에는 도마리 지청으로 변경되었다.
1915년 6월 26일, "가라후토의 군 및 정촌 편제에 관한 건"(다이쇼 4년 칙령 제101호)에 따라 '''나요시 군'''이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당시 나요시 군에는 에스토루 촌, 나오시 촌, 아베츠 촌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도마리오르 지청 기타나요시 출장소가 관할하였다.
1918년 6월, 기타나요시 출장소는 나오시 출장소로 개칭되었다. 이후 1929년 7월 1일 가라후토 정촌제가 시행되면서 '''에스토루 정'''과 '''나요시 촌''' (2급 정촌)이 발족하였다.
1938년 4월 1일, 에스토루 정의 일부가 분리되어 '''도로 정''' (1급 정촌)이 발족하면서 나요시 군은 2정 1촌 체제가 되었다. 1941년 4월 1일에는 나오시 촌의 일부에 '''나요시 정''' (1급 정촌)이, 나머지 지역에는 '''니시사쿠탄 촌''' (1급 정촌)이 발족하여 3정 1촌 체제가 되었다.
1942년 11월, 에스토루 정과 도로 정이 에스토루 군으로 소속이 변경되면서 나요시 군에는 나요시 정과 니시사쿠탄 촌만 남게 되었다.
1943년 4월 1일, "가라후토에 시행하는 법률의 특례에 관한 건"(다이쇼 9년 칙령 제124호)이 폐지되면서 사할린은 일본 내지에 편입되었다. 같은 해 6월 1일에는 가라후토 정촌제가 폐지되고 가라후토에서 정촌제가 시행되었으며, 2급 정촌은 지정 정촌이 되었다.
3. 6. 소련 점령 ~ 현재
1945년 소련군이 점령하였다.[38][39][40] 1949년 국가 행정 조직법 시행으로 사할린청 및 나요시 군은 법적으로 폐지되었다.[41]
4. 일본과 러시아 간의 영토 분쟁
에도 시대 초기인 1603년(게이초 8년)부터 나요시 군 지역은 소야에 설치된 역사의 관할이었고, 1685년(조쿄 2년)부터 소야 장소에 포함되었다. 이로 인해 나요시 군 지역 주민 가라후토 아이누들은 와진치까지 가지 않고도 생활 필수품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1700년(겐로쿠 13년) 마쓰마에 번이 막부에 제출한 '''[https://ja.wikisource.org/wiki/%E6%9D%BE%E5%89%8D%E5%B3%B6%E9%83%B7%E5%B8%B3 마쓰마에 섬 향장]'''에는 "세우야"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는 후의 나요시 정 기타소야에 해당한다.
1752년(호레키 2년)경 시라누시(혼토군요시니촌 시라누시)에서 교역이 시작되었고, 1790년(간세이 2년) 마쓰마에 번이 가라후토 상장(장소)을 개설하면서 아베야 무라야마 가가 장소 청부인이 되었다. 이후 나요시 군 지역 주민들은 시라누시와 톤나이(혼토케시, 혼토군혼토정)에서 생활 물자를 얻었다. 막부는 근번소를 설치했고, 교역 거점이자 번의 출장 기관 기능을 겸하는 운상옥에서는 '''옴샤''' 등이 시행되었다. 옴샤에서는 노약자 부조, 오토나, 코즈카이, 도산토리 등 역에조 임명이 이루어졌다.
1855년(안세이 2년) 러일 화친 조약으로 사할린 국경이 미확정 상태가 되면서, 1862년(분큐 2년) 무렵부터 시르톡탄나이(나요시 촌 고츠, 니시사쿠탄 촌과의 경계) 부근에 러시아인이 나타났고, 1863년(분큐 3년)에는 아이누 신병 강탈 사건이 발생했다('''러시아 군함 대마도 점령 사건''' 및 제국주의·남하 정책 참조).
1867년 사할린 전 지역을 러일 양국 공동 통치 지역으로 하는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이 사할린을 포기할 때까지 나요시 군 지역에 러시아인들이 침투했다. 1868년(메이지 원년) 4월 12일, 하코다테 재판소(윤4월 24일에 하코다테 부로 개칭) 관할이 되었고[38][39], 1869년(메이지 2년) 북에조치가 가라후토 주(국)로 개칭되었다.[40] 같은 해 개척사 직할령, 1870년(메이지 3년) 가라후토 개척사령을 거쳐, 1871년(메이지 4년) 홋카이도 개척사와 재통합되어 개척사 직할령으로 복귀했다. 같은 해 8월 29일, 폐번치현이 실시되었다.
1875년(메이지 8년) 가라후토-치시마 교환 조약에 의해 러시아령이 되었으나, 이 조약 제6조에 따라 러시아령 시대에도 일본인의 어업권은 인정되었으며[41], 쿠슌나이에서 가라후토 최북단까지는 북서 해안 어구 범위에 포함되었다.
4. 1. 일본의 입장
일본은 아이누족과의 역사적 관계, 에도 시대 마쓰마에 번의 지배, 막부의 조사 등을 근거로 사할린 남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에도 시대 마쓰마에 번은 1700년 막부에 제출한 '''[https://ja.wikisource.org/wiki/%E6%9D%BE%E5%89%8D%E5%B3%B6%E9%83%B7%E5%B8%B3 마쓰마에 섬 향장]'''에서 "세우야"(후의 나요시정 기타소야)를 언급했다.[1] 1790년에는 가라후토 상장(장소)을 개설하고, 1809년부터 1875년까지 스하라 가와 다테 가가 공동으로 청부했다.[24]
1801년 다카하시 지다유 등이 서안의 쇼야 곶(나요시정 기타소야)까지 답사했고, 1808년에는 마쓰다 덴주로와 마미야 린조가 북사할린 방면을 조사했다.[29] 1854년 막부는 가미카와 사무라이지로를 서해안의 북위 50도선 바로 북쪽에 있는 호로코탄(호로케이)까지, 마쓰마에번사 이마이 하치큐로는 낫코(북사할린, 랏카·라카라고도 함. 러명 라하)까지 조사하게 했다. 이를 통해 사할린 서안 아이누 거주지 북쪽 끝인 호로코탄까지 일본의 통치가 미치고 있음을 확인했다.[33]
1855년 러일 화친 조약에서는 사할린 방면의 국경 확정을 미루었다. 1867년 사할린 잡거 조약 체결 이후 사할린 전 지역이 러일 양국 공동 통치 지역이 되었다.
4. 2. 러시아의 입장
1875년 가라후토-치시마 교환 조약으로 사할린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획득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의 점령과 실효 지배를 통해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주장이 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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