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로돔 서이하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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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로돔 시아누크는 1941년부터 1955년, 그리고 1993년부터 2004년까지 캄보디아의 국왕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의 지배 하에서 캄보디아의 독립을 이끌었으며, 이후 퇴위 후 정치 활동을 재개하여 총리, 국가 원수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1970년 쿠데타로 인해 망명 생활을 하였고, 크메르 루주 정권 하에서 국가 원수로 복귀했으나 실권은 없었다. 1993년 다시 국왕으로 즉위했으나 2004년 퇴위 후에도 '국왕 부친'으로 존경받았으며, 2012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시아누크는 캄보디아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고 영화 제작, 음악 활동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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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로돔 서이하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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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호 | 캄보디아 국왕 |
| 재위 기간 (첫 번째)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
| 즉위일 | 1941년 5월 3일 |
| 이전 통치자 | 시소와트 모니봉 |
| 다음 통치자 | 노로돔 수라마리트 |
| 재위 기간 (두 번째) | 1993년 9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
| 이전 통치자 | 군주제 복원; 본인 (국가 수반) |
| 다음 통치자 | 노로돔 시하모니 |
| 출생일 | 1922년 10월 31일 |
| 출생지 | 프랑스령 캄보디아 프놈펜 |
| 사망일 | 2012년 10월 15일 |
| 사망지 | 중국 베이징 |
| 안장일 | 2014년 7월 13일 |
| 안장지 | 캄보디아 왕궁 실버 파고다 (유골 안치) |
| 배우자 | 파트 칸홀 (1942년 결혼, 1946년 이혼) 시소와트 퐁산모니 (1942년 결혼, 1951년 이혼) 시소와트 모니케산 (1944년 결혼, 1946년 사망) 맘 마니반 파니봉 (1949년 결혼, 1955년 이혼) 노로돔 타벳 놀레악 (1955년 결혼, 1968년 이혼) 노로돔 모니네아트 (1955년 결혼) |
| 자녀 | 보파 데비 공주 유바네아트 왕자 라나리트 왕자 라비봉 왕자 차크라퐁 왕자 나라디포 왕자 소리야 로엥시 공주 칸타 보파 공주 케마누락 왕자 보툼 보파 공주 수자타 공주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 나린드라퐁 왕자 아룬라스미 공주 |
| 아버지 | 노로돔 수라마리트 |
| 어머니 | 시소와트 코사마크 |
| 왕가 | 노로돔 왕가 |
| 종교 | 상좌부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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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식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 통치 | |
| 정치 체제 | 입헌 군주제 |
| 주요 정책 | 시아누크주의 |
| 기타 직위 | |
| 국가 수반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
| 이전 국가 수반 | 추오프 헬 (대행) |
| 다음 국가 수반 | 청 헹 (대행) |
| 국가 수반 | 1993년 6월 14일 – 1993년 9월 24일 |
| 이전 국가 수반 | 체아 심 (국가평의회 의장) |
| 다음 국가 수반 | 본인 (국왕) |
| 국가 간부회 의장 | 1975년 4월 17일 – 1976년 4월 2일 |
| 이전 국가 간부회 의장 | 삭 수차칸 (최고위원회 의장) |
| 다음 국가 간부회 의장 | 키우 삼판 (국가 간부회 의장) |
| 수상 | 1945년 3월 18일 – 1945년 8월 13일 1950년 4월 28일 – 1950년 5월 30일 1952년 6월 16일 – 1953년 1월 24일 1954년 4월 7일 – 1954년 4월 18일 1955년 10월 3일 – 1956년 1월 5일 1956년 3월 1일 – 1956년 3월 24일 1956년 9월 15일 – 1956년 10월 15일 1957년 4월 9일 – 1957년 7월 7일 1958년 7월 10일 – 1960년 4월 19일 1961년 11월 17일 – 1962년 2월 13일 |
| 국왕 위원회 의장 | 1955년 10월 – 1956년 1월 |
| 정치 경력 | |
| 정당 | 무소속 (1945–1955, 1970–1981, 1991–2012) 상쿰 (1955–1970) FUNCINPEC (1981–1991) |
| 학력 | |
| 교육 기관 | 소뮈르 기병 학교 |
2. 어린 시절
1955년 3월 2일, 시아누크는 갑작스럽게 왕위를 포기했고, 그의 아버지 노로돔 수라마리트가 뒤를 이었다. 그의 퇴위는 부모를 포함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시아누크는 퇴위 연설에서 궁정 생활의 "음모"에서 벗어나 "평범한 시민"으로서 일반 사람들에게 더 쉽게 다가가기 위해 퇴위한다고 설명했다. 역사가 밀턴 오스본에 따르면, 시아누크의 퇴위는 그가 왕이었을 때 신하들로부터 받았던 존경을 계속 누리면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해주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인기가 관리들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정부에 의해 버려질까 두려워했다.[1] 퇴위 후 시아누크는 "전하"라는 칭호로 불렸다.
베트남 전쟁 중이던 1970년 3월, 당시 총리 겸 국방상이었던 론 놀 장군과 부총리 시리크 마타크(시아누크의 사촌) 등이 주도한 세력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외국 순방 중이던 시아누크 국가원수는 해임되었고, 의회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선포했다. 국명은 크메르 공화국으로 변경되었으며, 론 놀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 쿠데타는 미국이 시아누크를 북베트남 및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과 가깝다고 보고, 친미 성향의 론 놀을 지원하여 발생했다는 시각이 있다. 시아누크는 이전부터 캄보디아 영토 내 호치민 루트의 존재를 용인하고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을 비판해왔다.
1978년 12월 22일,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 정권을 축출했다. 1979년 1월 초, 시아누크는 폴 포트의 요청으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베트남의 침공을 규탄하기 위해 캄보디아를 떠나게 되었다. 1월 6일 베이징에 도착하여 덩샤오핑의 영접을 받았고, 다음 날 프놈펜은 베트남군에게 함락되었다. 1월 9일, 시아누크는 뉴욕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 참석하여 캄보디아 집단 학살을 자행한 크메르 루주와 캄보디아를 침공한 베트남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미국과 프랑스에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1991년 10월 23일, 시아누크는 푼신펙, 크메르 루주, KPNLF, PRK를 이끌고 1991년 파리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캄보디아 최고 국가 평의회(SNC)를 "캄보디아 주권의 합법적 대표"로 인정하고, 1992년부터 1993년까지 과도 정부 역할을 할 캄보디아 주둔 유엔 임시 행정 기구(UNTAC)를 창설했다. UNTAC는 캄보디아에 평화 유지군을 주둔시켜 네 개 교전 세력의 군대 무장을 감시하고 1993년까지 국가 선거를 실시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시아누크는 1991년 11월 14일, 13년의 망명 생활 끝에 프놈펜으로 돌아왔다.[99] 훈 센과 함께 시아누크는 포첸통 공항에서 왕궁까지 오픈카를 타고 가면서 그의 귀환을 환영하기 위해 거리에 늘어선 시민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2004년 10월 14일, 왕위 평의회는 시아누크의 후계자로 그의 아들 노로돔 시하모니를 만장일치로 선택했다.[23] 시하모니는 2004년 10월 29일 캄보디아 국왕으로 즉위했다.[24]
[1]
간행물
British Legation Phnom Penh's telegrams 86 and 87 (1955)
PRO, FO 371/117124

노로돔 시아누크는 1922년 10월 31일 프놈펜에서 노로돔 수라마리트와 시소와스 코사막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다.[85] 어린 나이에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랄 경우 사망할 위험이 있다는 왕실 점성가의 조언에 따라, 부모는 코사막의 할머니인 팟의 보살핌을 받도록 했다. 팟이 사망하자 코사막은 시아누크를 그의 아버지인 노로돔 수타로트와 함께 살게 했고, 수타로트는 양육 책임을 자신의 딸인 노로돔 켓 카냐몸에게 위임했다.
시아누크는 프놈펜에 있는 프랑수아 보두앵 학교와 누온 모니람 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아마추어 공연단과 축구팀을 이끌기 위해 외할아버지인 시소와스 모니봉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1936년, 시아누크는 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였던 베트남 사이공으로 보내져 기숙학교인 리세 샤슬루 라보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다. 이후 프랑스 소뮈르에 있는 기병육군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1941년 4월 23일, 외할아버지이자 재위 중이던 국왕 시소와스 모니봉이 사망하자, 당시 캄보디아를 포함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최고 실력자였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 장 드쿠는 시아누크를 그의 후계자로 선택했다. 시아누크의 국왕 임명은 다음 날인 4월 24일 캄보디아 왕실 평의회에 의해 공식화되었으며, 그의 대관식은 1941년 5월 3일에 거행되어 18세의 나이로 즉위했다.[85]
캄보디아의 왕가는 노로돔 왕(재위 1840년 - 1904년)을 시조로 하는 노로돔 가문과 시소와트 왕(재위 1904년 - 1927년, 노로돔 왕의 동생)을 시조로 하는 시소와트 가문으로 나뉘어, 왕위 계승에 있어 양 가문 간 다툼이 있었다. 프랑스가 시아누크를 선택한 배경에는 그가 노로돔과 시소와트 양 가문의 혈통을 모두 이어받았다는 점(시아누크는 양 국왕의 증손자에 해당)과, 아직 젊은 나이였기에 종주국 프랑스의 의향에 따를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3. 즉위와 독립 운동 (1941년 ~ 1953년)
1941년 4월 23일, 외할아버지이자 재종조부인 시소와스 모니봉 국왕이 승하하자, 당시 베트남 사이공(현 호찌민 시)에서 중등 교육을 받고 있던 18세의 노로돔 시아누크는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당시 캄보디아를 포함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최고 실력자였던 비시 프랑스 정권 하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 장 드쿠는 노로돔 가문과 시소와트 가문 양쪽의 혈통을 이었고, 나이가 어려 프랑스의 통제 하에 두기 용이하다고 판단한 시아누크를 선택했다. 캄보디아 왕실 평의회는 다음 날 이를 공식화했고, 시아누크는 1941년 5월 3일 또는 10월에 대관식을 갖고 정식으로 즉위했다.[85]
제2차 세계 대전 중 캄보디아의 일본 점령 기간 동안, 시아누크는 주로 스포츠 활동이나 영화 촬영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1945년 3월, 인도차이나 반도에 진주한 일본군이 프랑스 식민 통치 기구를 해체하자, 시아누크는 일본의 압력 하에 캄보디아의 독립을 선언하고 총리직을 겸임했다. 총리로서 그는 프랑스 식민 당국이 강제했던 크메르 문자의 로마자 표기법을 폐지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이후, 민족주의자 손 응옥 타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총리가 되었으나, 곧 프랑스가 복귀하면서 그는 실각하고 시아누크의 삼촌인 시소와스 모니렛이 총리가 되었다. 프랑스는 1946년 1월, 캄보디아에 프랑스 연합 내에서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잠정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프랑스-캄보디아 공동 위원회가 구성되어 헌법 초안을 마련했으며, 시아누크는 1947년 5월 보편 선거권(남성)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첫 헌법을 공포했다. 이 시기 시아누크는 프랑스 소뮈르의 기갑 기병대 훈련 학교에서 두 차례 군사 훈련을 받기도 했다.
1949년 초, 시아누크는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해 프랑스 연합 내에서 캄보디아를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새로운 프랑스-크메르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는 이름뿐인 독립으로, 외교와 일부 국방 관련 사항을 제외한 대부분의 자치권, 특히 경찰권과 군사권은 여전히 프랑스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한적인 독립에 만족하지 못한 시아누크는 완전한 독립을 향한 노력을 강화했다. 국내에서는 민주당과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고, 1949년 9월 시아누크는 의회를 해산하고 약 2년간 칙령으로 통치했다. 1951년 캄보디아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하고, 망명 중이던 손 응옥 타인이 귀국하여 반정부, 반프랑스 활동을 벌이자 국내 정세는 더욱 불안정해졌다. 시골 지역에서는 군주제와 프랑스에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했고, 시아누크는 민주당이 배후에 있다고 의심하며 1952년 6월 민주당 출신 총리를 해임하고 직접 총리직에 올랐다. 그는 당시 미국 외교관에게 캄보디아 현실에 의회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회의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1953년 초, 시아누크는 프랑스를 방문하여 뱅상 오리올 대통령에게 캄보디아 내 고조되는 반프랑스 감정을 언급하며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시아누크는 캐나다와 미국을 방문하여 언론 인터뷰를 통해 국제 여론에 호소했다. 그는 당시 서방 세계의 반공주의 정서를 이용하여, 캄보디아가 베트남의 베트민과 같은 공산주의 위협에 직면해 있으며 완전한 독립만이 이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53년 6월 캄보디아로 돌아온 시아누크는 시엠립에 머물며 독립을 위한 투쟁을 촉구하는 대중 집회를 열고, 약 13만 명 규모의 시민 민병대를 조직하는 등 국내외적인 압박을 강화했다. 이러한 시아누크의 끈질긴 노력과 고조되는 독립 요구에 직면한 프랑스는 결국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1953년 8월 사법 및 내무부 관련 통제권을, 10월에는 국방 관련 통제권을 캄보디아에 이양했다. 마침내 1953년 11월 9일, 시아누크는 수도 프놈펜으로 돌아와 캄보디아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고, 신생 "캄보디아 왕국"이 공식 출범했다. 이로써 시아누크는 국민들로부터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되었다.
4. 퇴위와 정치 활동 (1955년 ~ 1970년)
1955년 4월 7일, 시아누크는 자신의 정치 단체인 인민 사회주의 공동체(상쿰) 창당을 발표했다. 상쿰은 사실상 정당이었지만, 시아누크는 상쿰을 정치 "조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군주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유일한 조건으로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상쿰의 창설은 기존 정당들을 약화시키려는 움직임으로 여겨졌다.[2] 상쿰은 다프 추온의 '승리의 북동부'당, 론 놀의 크메르 혁신당,[3] 인민당, 그리고 자유당을 포함한 네 개의 작은 군주주의 우익 정당을 기반으로 했다.
동시에 시아누크는 점점 더 좌경화되는 민주당과 좌익 프라체아촌에 대한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는데, 두 정당 모두 그의 정당과 합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를 반대하는 선거 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 안보 국장으로 다프 추온을 임명했고, 추온은 국가 경찰에게 민주당과 프라체아촌 지도자들을 투옥하고 선거 유세를 해산하도록 명령했다. 상쿰은 같은 해 9월 1955년 캄보디아 총선에서 유효 투표의 83%를 얻어 국회 모든 의석을 차지하며 압승했고, 이른바 '시아누크 익찬 체제'를 구축했다. 시아누크는 총리 겸 외무부 장관에 취임했다.

시아누크는 집권 후 여성 참정권 확대, 크메르어를 국가의 유일한 공식 언어로 채택하고, 왕이 아닌 총리에게 행정부의 정책 결정 권한을 부여하여 캄보디아를 입헌 군주제로 만드는 등 몇 가지 헌법 개정을 도입했다. 그는 사회적 평등을 확립하고 국가적 결속력을 키우는 이상적인 개념으로 사회주의를 보았다. 1956년 3월, 그는 사회주의 원칙을 옹호하면서도 왕국의 불교 문화를 유지하는 '불교 사회주의'로 알려진, 또는 "왕제 사회주의"[86][87]라고도 불리는 독자적인 국가 노선을 추구했다.
1955년에서 1960년 사이에 시아누크는 과로를 이유로 여러 번 총리직을 사임하고 재임했다. 국민 의회는 시아누크가 물러날 때마다 심 바르나 산 윤과 같은 인물을 총리로 지명했지만, 내각 각료 간의 정책 이견으로 인해 그들 역시 몇 달 만에 사임하는 경우가 잦았다.
외교적으로 시아누크는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반둥 회의)와 비동맹 운동에 초기부터 참여하며 엄격한 중립 정책을 표방했다. 1955년 5월 미국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아들였으나, 이듬해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가 캄보디아를 친서방 군사 동맹인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의 보호 아래 두려 했을 때는 단호히 거절했다. 시아누크는 SEATO를 주변국을 겨냥한 공격적 동맹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후 시아누크는 미국이 자신의 정부를 약화시키고 민주당을 비밀리에 지원한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반면,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1956년 2월 중국 방문 시 저우언라이 총리의 환대를 받았고, 중국은 캄보디아에 4000만달러 상당의 경제 원조를 약속하는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시아누크의 친중 행보와 중립 노선은 친미 성향의 이웃 국가 지도자들, 즉 태국의 사릿 타나라트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에게 공산주의 동조자로 비춰졌다. 남베트남은 잠시 무역 제재를 가하기도 했으며, 1958년 캄보디아가 중국과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자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국내적으로는 민주당 잔존 세력이 신문을 통해 상쿰과 시아누크를 계속 비판했다. 1957년 8월, 시아누크는 민주당 지도자 5명을 왕궁으로 불러 공개 토론을 벌였다. 그는 호전적인 태도로 민주당의 비판 근거 제시를 요구하고 상쿰 참여를 압박했다. 민주당 지도자들이 머뭇거리자, 이는 군주제에 대한 불충성으로 비춰졌고, 토론 후 이들은 시아누크의 묵인 하에 정부 군인들에게 구타당했다. 이 사건으로 민주당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민주당이 사라지자 시아누크는 1958년 캄보디아 총선 준비에 집중했다. 그는 좌파 프라체아촌의 지지를 얻기 위해 후 유온, 후 님, 차우 센 등 좌익 정치인들을 상쿰 후보로 영입했다. 프라체아촌은 5명의 후보를 냈으나, 경찰의 방해로 4명이 사퇴했다. 선거 결과 상쿰은 다시 한번 국회 모든 의석을 차지했다.
시아누크의 중립 노선과 권력 강화는 외부 세력의 개입 시도를 불렀다. 1958년 12월, 응오딘지엠의 동생이자 고문인 응오딘뉴는 시아누크를 전복시키기 위한 이른바 방콕 음모를 계획했다. 뉴는 친미 성향의 내무장관 답 추온에게 접근하여 쿠데타 준비를 사주했고, 추온은 태국, 남베트남, CIA로부터 비밀 자금과 군사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1959년 1월, 시아누크는 중개인을 통해 이 계획을 미리 알게 되었고, 다음 달 군대를 보내 추온을 체포, 즉결 처형함으로써 쿠데타 시도를 막았다. 시아누크는 남베트남과 미국이 쿠데타 배후라고 비난했다.
6개월 후인 1959년 8월 31일, 왕궁으로 소포 폭탄이 배달되었다. 의전 장관 노로돔 바크리반이 상자를 열다 즉사했고, 근처에 있던 시아누크의 부모 수라마릿 국왕과 코사막 왕비는 무사했다. 수사 결과 폭탄은 사이공의 미군 기지에서 발송된 것으로 밝혀졌다. 시아누크는 공개적으로 응오딘뉴를 비난했지만, 내심 미국 연루를 강하게 의심하며 미국에 대한 불신을 더욱 깊게 했다.
1960년 4월 부왕 노로돔 수라마리트가 사망하자 왕위는 공석으로 두었다. 대신 어머니 시소와트 코사막이 태후로서 국가의 상징적 지위를 맡았고, 시아누크는 새로 만든 국가 원수 직위에 취임하여 실질적인 통치를 이어갔다.
시아누크의 통치 아래 캄보디아는 인접국 베트남과 라오스가 전란에 휩싸인 와중에도 냉전 시대 동서 양 진영으로부터 원조를 받아내며 비교적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좌우파 간의 정치적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시아누크는 정국 안정을 위해 때로는 좌파 인사를 중용하다가도 필요에 따라 탄압하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폴 포트, 이에 사리, 키우 삼판과 같은 좌파 지도자들이 결국 도시를 떠나 정글에서 무장 투쟁을 준비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5. 쿠데타와 망명, 크메르 루주와의 협력 (1970년 ~ 1979년)

쿠데타 직후인 1970년 3월 22일, 시아누크는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권 복귀 의사를 밝혔으나 국가원수 칭호 유지에는 연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망명설을 부인했다.[88]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받아 베이징에서 망명 정부인 캄푸치아 왕국 민족 연합 정부(GRUNK)를 결성하고 론 놀 정권 타도를 호소했다. 
한편, 론 놀 정권은 집권 후 격렬한 반베트남 캠페인을 벌이며 캄보디아 내 베트남계 주민들을 박해, 학살, 추방했다. 또한 미국군과 남베트남군에게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추격을 명분으로 캄보디아 영내 침공을 허용했으며, 이로 인해 미군의 공습은 인구 밀집 지역을 포함한 캄보디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농민이 희생되었고, 200만 명 이상이 국내 난민이 되었으며[89] 농촌 기반 시설은 파괴되어 식량 수출국이었던 캄보디아는 식량 수입국으로 전락했다.[90] 이러한 혼란은 크메르 루주의 세력 확장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시아누크의 호소는 캄보디아 농민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캄퐁참 등 여러 주에서 시아누크 지지 봉기가 일어났으나 무력으로 진압되었다.[91] 시아누크는 과거 자신이 탄압했던 폴 포트파 크메르 루주와의 협력을 꺼렸으나, 중국의 마오쩌둥과 북한의 김일성 등의 설득으로 결국 손을 잡았다. 왕에 대한 농민들의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시아누크가 크메르 루주 지지를 호소하자, 크메르 루주 병력은 6,000명에서 5만 명까지 급증했다. 그러나 새로 합류한 병력 대다수는 정치나 사회주의 이념보다는 왕을 지지하는 농민들이었다. 시아누크는 명목상 통일 전선의 수장이었지만, 이념적으로 폴 포트파와는 양립하기 어려웠고 양측의 관계는 처음부터 긴장 상태였다.
1975년 4월 17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받은 크메르 루주는 마침내 프놈펜을 함락시키고 크메르 공화국을 무너뜨렸다. 폴 포트파는 시아누크를 국가원수로 하는 공산주의 국가 민주 캄푸치아 수립을 선언했고, 시아누크는 캄보디아로 귀국했다.[5] 그러나 그는 실권 없는 상징적인 국가 수반이었으며,[6] 사실상 프놈펜 왕궁에 유폐된 상태였다. 크메르 루주가 마련한 지방 시찰 외에는 외부 활동이 제한되었고, 이 시찰을 통해 강제 노동과 인구 이동 등 변해버린 조국의 참혹한 현실을 목격했다. 왕궁에는 제6부인 모니크 비와 두 아들(시하모니, 나린드라퐁), 그리고 소수의 측근만 함께 지낼 수 있었다.
크메르 루주 집권 기간 동안 시아누크의 다른 가족들은 지방으로 추방되었고, 그 결과 자녀 5명과 손자 14명이 학살당했다. 시아누크 본인도 살해될 위기에 처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압력으로 목숨을 건졌다. 왕궁 안에서도 폴 포트 지지자로 변한 아들 나린드라퐁이 부모를 비난하는 등 정신적 압박에 시달렸으며, 언제 살해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모든 인민에게 검은 농민복 착용이 강요되었고[92][93][94], 시아누크 자신도 이를 입으며 스스로를 "검은 메르세데스"라고 자조했다.[95] 이 시기 민주 캄푸치아에서는 기아, 질병, 학살 등으로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아누크는 병 치료를 이유로 해외 출국을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계속된 간청 끝에 1976년 4월, 국가원수직 사임이 인정되었고[7][96][97] (후임 국가 간부 회의 의장은 키우 삼판), 이후 왕궁에 완전히 유폐되어 외부 세계와의 소통이 단절되었다.
1978년 12월 22일,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 크메르 루주 정권은 위기에 처했다. 1979년 1월 초, 시아누크는 크메르 루주에 의해 잠시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프놈펜으로 돌아와 폴 포트를 만나기도 했다. 1월 6일, 그는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함락시키기 직전 베이징으로 탈출하여 덩샤오핑의 영접을 받았다. 다음 날인 1월 7일 프놈펜은 함락되었다. 1월 9일, 시아누크는 뉴욕으로 가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 참석하여 캄보디아 집단 학살을 자행한 크메르 루주와 캄보디아를 점령한 베트남 양측을 모두 규탄했다. 이후 미국과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하고 최종적으로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6. 베트남 침공과 망명 정부 수립 (1979년 ~ 1991년)
베트남의 지원으로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PRK)이 수립되자, 중국의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은 시아누크에게 크메르 루주와 협력하여 PRK 정부에 대항할 것을 제안했다. 시아누크는 크메르 루주의 잔혹 행위에 대한 반감으로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1981년 3월, 시아누크는 자신의 정파인 FUNCINPEC과 산하 무장 조직인 Armée Nationale Sihanoukiste|시하누크 민족군fra (ANS)를 창설했다.
중국의 군사 지원 필요성 때문에 시아누크는 결국 크메르 루주와의 협력에 동의했고, 1981년부터 손 산이 이끄는 크메르 인민 민족 해방 전선(KPNLF) 및 크메르 루주와 반PRK 연합 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덩샤오핑과 싱가포르의 리콴유 등의 중재를 거쳐[88] 1982년 6월, 3개 파벌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CGDK를 결성하고 시아누크를 수반으로 추대했다. CGDK는 유엔에서 캄보디아의 합법 정부로 인정받았으며, 시아누크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국가 원수의 지위를 유지했다.[8]
CGDK 의장으로서 시아누크는 베트남군 철수와 캄보디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초기 협상은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아들 노로돔 라나리드가 ANS의 사령관이 되었다. 1987년 12월, 시아누크는 처음으로 PRK 총리인 훈 센과 만나 대화를 시작했으며, 이는 이후 4개 파벌(FUNCINPEC, KPNLF, 크메르 루주, PRK) 간의 협상으로 이어졌다. 1988년부터 인도네시아 외무장관 알리 알라타스의 중재로 자카르타 비공식 회담(JIM)이 여러 차례 열렸고, 1989년 7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국제 평화 회의가 개최되었다.
1989년 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했지만, 훈 센 정부는 유지되었다. 평화 협상이 진행되면서 1990년 9월, 유엔 주도로 과도기적 통치 기구인 SNC가 설립되었다. 1991년 7월, 시아누크는 FUNCINPEC을 탈당하고 SNC의 중립적인 의장으로 선출되어[9] 캄보디아 평화 정착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7. 왕정 복고와 재즉위, 퇴위 (1993년 ~ 2004년)
UNTAC 행정부는 1992년 2월에 설치되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무장 해제에 협조하지 않아 평화 유지 작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시아누크는 1992년 7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UNTAC에 크메르 루주를 평화 유지 과정에서 배제할 것을 촉구했다. 이 기간 동안 시아누크는 주로 시엠립에 거주하며, 헬리콥터를 타고 KPNLF, 푼신펙, 크메르 루주 저항 기지에서 선거 준비를 감독하기 위해 가끔 여행했다. 시아누크는 1992년 11월 베이징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떠났으며, 선거 직전인 1993년 5월 캄보디아로 돌아올 때까지 그곳에서 6개월을 머물렀다. 베이징에 머무는 동안 시아누크는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에게 캄보디아의 대통령제 정부를 제안했지만, 크메르 루주의 반대에 직면한 후 곧 그 생각을 철회했다.
1993년 캄보디아 총선거가 유엔의 감시 하에 1993년 4월부터 6월까지 실시되었고, 시아누크의 아들 노로돔 라나리드가 이끄는 푼신펙이 승리하여 제1당이 되었고, 훈 센이 이끄는 캄보디아 인민당(CPP)이 2위를 차지했다. CPP는 선거 결과에 불만을 품었고, 1993년 6월 3일, 훈 센과 체아 심은 시아누크에게 정부를 이끌어 줄 것을 요청했다. 시아누크는 이에 응하여 훈 센과 라나리드를 부총리로 하는 임시 국민 정부(PRG)를 구성한다고 발표했다. 라나리드는 아버지의 계획에 대해 미리 통보받지 못해 놀랐고, 호주, 중국, 영국, 미국과 함께 이 계획에 반대했다. 다음 날, 시아누크는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신의 발표를 철회했다.
1993년 6월 14일, 라나리드가 주재하는 캄보디아 제헌 의회에서 시아누크는 국가 원수로 복귀했으며, 이 기회를 빌려 1970년 자신을 전복시킨 쿠데타를 "불법"으로 선언했다. 국가 원수로서 시아누크는 캄보디아 군대를 1970년 이전의 이름인 캄보디아 왕립군으로 개칭했다. 그는 또한 공식적으로 국가의 이름을 캄보디아 국가에서 단순히 "캄보디아"로 변경하고, 가사를 약간 수정하여 "노코르 리치"를 캄보디아 국가로, 그리고 캄보디아 국기를 1970년 이전 디자인으로 복원하는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시아누크는 라나리드와 훈 센을 동등한 권한을 가진 공동 총리로 임명했다. 이 임시적인 합의는 1993년 7월 2일 제헌 의회에서 비준되었다. 1993년 8월 30일, 라나리드와 훈 센은 시아누크를 만나 국왕이 수반하는 입헌 군주제를 규정하는 헌법 초안과 국가 원수가 이끄는 공화국을 규정하는 헌법 초안 두 개를 제시했다. 시아누크는 캄보디아를 입헌 군주국으로 규정하는 초안을 선택했으며, 이 초안은 1993년 9월 21일 제헌 의회에서 비준되었다.
새 헌법은 1993년 9월 24일에 발효되었고, 시아누크는 캄보디아 국왕으로 복위했다. 푼신펙, CPP, 그리고 제3 정당인 불교 자유 민주당(BLDP) 간에 영구적인 연립 정부가 구성되었다. 이에 따라 시아누크는 라나리드와 훈 센을 각각 제1총리와 제2총리로 임명했다. 그 직후 시아누크는 베이징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몇 달 동안 암 치료를 받았다. 1994년 4월 시아누크가 돌아왔고, 그 다음 달에 크메르 루주를 정부에 참여시키기 위해 새로운 선거를 치르도록 정부에 요구했다.
라나리드와 훈 센 모두 그의 제안을 거부했지만, 시아누크는 계속 압박했고, 그를 수장으로 하는 푼신펙, CPP, 크메르 루주로 구성된 국가 연합 정부를 추가로 제안했다. 다시 한번 두 총리는 크메르 루주의 과거 완고한 태도를 들어 제안이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하며 시아누크의 제안을 거부했다. 시아누크는 물러섰고, 훈 센과 라나리드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좌절감을 표현했다. 노로돔 시리부드와 그의 이복 동생이자 공식 전기 작가인 훌리오 젤드레스는 이 상황을 총리에 대한 왕실의 국가 사무 통제 능력이 감소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조로 여겼다.
1994년 7월,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노로돔 차크라퐁이 정부를 전복하려는 1994년 캄보디아 쿠데타 시도를 주도했다. 쿠데타 시도 이후 차크라퐁은 프놈펜의 한 호텔로 피신했지만, 정부군은 곧 그의 은신처를 발견하고 호텔을 포위했다. 차크라퐁은 시아누크에게 전화했고, 시아누크는 정부 대표와 협상하여 그가 말레이시아로 망명할 수 있도록 했다.[10] 이 쿠데타 미수 사건 이후 국내는 대체로 안정되었다. 그 다음 해 11월, 시리부드는 훈 센 암살 음모 혐의로 기소되어 투옥되었다. 시아누크는 시리부드가 감옥에 남아 있으면 암살될 것이라는 은밀한 계획이 있다고 확신하고, 시리부드를 내무부 본부로 구금하도록 중재했다. 시리부드가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진 후, 시아누크는 훈 센에게 시리부드와 그의 가족이 함께 프랑스로 망명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고, 훈 센은 이를 수락했다.
두 공동 총리인 라나리드와 훈 센 간의 관계는 1996년 3월부터 악화되었는데, 라나리드는 CPP가 지방 정부 하위 직책을 푼신펙에 배정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지연시켰다고 비난했다. 라나리드는 그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연립 정부에서 탈퇴하고 같은 해에 총선을 치르겠다고 위협하여 훈 센과 다른 CPP 관리들 사이에 불안감을 조성했다. 다음 달, 시아누크는 파리에서 여러 왕족과 푼신펙 고위 관리들 간의 회의를 주재하며 푼신펙이 연립 정부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훈 센이나 CPP를 전복하려는 반동적 요소가 없다고 확신시켜 양측 간의 긴장을 완화하려 했다.
1997년 3월, 시아누크는 대중들 사이에서 높아지는 반왕족 정서가 왕실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왕위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훈 센은 시아누크의 제안을 따르면 왕족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헌법 개정을 도입하겠다고 경고했다.[11] 훈 센은 시아누크가 캄보디아 유권자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있었기에, 그가 퇴위하고 정치에 참여할 경우 향후 선거에서 승리하여 CPP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1997년 캄보디아 쿠데타인 1997년 7월, 프놈펜에서 CPP와 푼신펙에 각각 우호적인 보병 부대 사이에 폭력적인 충돌이 발생했다. 이 충돌에서 푼신펙 군대가 패배한 후 라나리드는 실질적으로 축출되었다. 시아누크는 훈 센이 충돌을 조작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지만, 푼신펙 구성원들이 사용한 용어인 라나리드의 축출을 "쿠데타"라고 부르기를 꺼렸다. 1997년 8월 6일 국민 의회가 라나리드를 대신하여 웅 호트를 제1총리로 선출하자, 시아누크는 라나리드의 축출이 불법이라고 비난하고 왕위에서 물러나겠다는 제안을 다시 내놓았지만,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12]
1998년 9월, 시아누크는 푼신펙과 삼 랭시 당(SRP)이 1998년 캄보디아 총선의 부정행위에 대해 CPP 주도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인 후 시엠립에서 정치 회담을 중재했다. 훈 센이 암살 시도를 간신히 모면한 후, 그가 삼 랭시에게 배후 조종 혐의를 씌우면서, 회담은 그 달 말에 결렬되었다. 두 달 후인 1998년 11월, 시아누크는 CPP와 푼신펙 간의 두 번째 정치 회담을 주선하여[13] CPP와 푼신펙 간의 또 다른 연립 정부를 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시아누크는 정치적 문제에 대한 논평과 1950년대와 1960년대 캄보디아의 옛 사진을 게시하는 월간 게시판을 유지했다. 1997년, "룸 리스"라는 이름의 인물이 처음으로 그의 월간 게시판에 등장하여 훈 센과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논평을 했다. 훈 센은 룸 리스의 비판에 불쾌감을 느꼈고, 1998년과 2003년 최소 두 차례 시아누크에게 그의 논평을 중단하도록 설득했다. 라나리드에 따르면, 룸 리스는 시아누크의 또 다른 자아였는데, 시아누크는 이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2002년 7월, 시아누크는 왕위 자문회의 조직과 기능에 대한 상세한 헌법 조항이 없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훈 센이 시아누크의 우려를 일축하자, 시아누크는 2002년 9월 왕위 자문회를 소집하여 새 군주를 선출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퇴위를 위협했다.
2003년 7월, 2003년 캄보디아 총선이 다시 치러졌고, CPP가 승리했다. 그러나 새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헌법에서 요구하는 전체 의석의 3분의 2 투표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선거에서 2, 3위를 차지한 푼신펙과 SRP는 CPP의 정부 구성을 막았다. 대신 2003년 8월, 이들은 선거 부정 의혹에 대해 헌법 위원회에 불만을 제기했다. 그들의 불만이 기각되자 푼신펙과 SRP는 국회의원 취임식 보이콧을 위협했다. 시아누크는 두 정당에게 결정을 바꾸도록 설득하며, 만약 그들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 역시 취임식 주재를 거부하겠다고 말했다. 두 정당은 결국 위협에서 물러섰고, 2003년 10월 시아누크가 참석한 가운데 취임식이 열렸다. CPP, 푼신펙, SRP는 정치적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2004년까지 추가 회담을 가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동시에 시아누크는 세 정당의 정치인들이 공동으로 이끄는 연립 정부를 제안했지만, 훈 센과 라나리드는 모두 이를 거부했다.
2004년 2월, 시아누크는 동성 결혼을 옹호하고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이는 그 문제가 상대적으로 금기시되고 캄보디아가 보수적인 사회라는 배경과 대조적이었으며, 그는 캄보디아의 LGBT 인구에 대한 지원으로 칭찬을 받았다.
2004년 7월 6일, 시아누크는 공개 서한을 통해 다시 한번 퇴위할 계획을 발표했다. 동시에 그는 지난 1년간의 정치적 교착 상태를 해결하기 위한 자신의 제안을 무시한 훈 센과 라나리드를 비판했다. 한편, 훈 센과 라나리드는 공개 투표 제도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에 동의했으며, 이로 인해 국회의원들은 거수 방식으로 내각 장관과 국회 의장을 선출해야 했다. 시아누크는 공개 투표 제도에 반대하며 체아 심 상원 의장에게 개정안에 서명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체아 심이 시아누크의 조언을 따르자, 체아 심은 7월 15일 개정안 투표를 위한 국회 소집 직전에 국외로 출국했다.
2004년 7월 17일, CPP와 푼신펙은 연립 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여 SRP를 야당으로 남겨두었다. 2004년 10월 6일, 시아누크는 왕위 계승자 선출을 위해 왕위 평의회를 소집하라는 서한을 작성했다. 국회와 상원은 군주의 퇴위를 허용하는 법률 통과를 위해 긴급 회의를 열었다. 2004년 10월 14일, 왕위 평의회는 시아누크의 후계자로 그의 아들 노로돔 시하모니를 만장일치로 선택했다.[23] 시하모니는 2004년 10월 29일 캄보디아 국왕으로 즉위했다.[24]
8. 퇴위 이후와 사망 (2004년 ~ 2012년)
퇴위 후 시아누크에게는 "삼덱 아오"(សម្តេចឪ|삼덱 아오khm, 중국에서는 태황으로 불림[101])라는 경칭이 주어졌다.[102][103] 그는 주로 베이징에서 요양 생활을 이어갔다.[104] 퇴위 후에도 그는 국내외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2005년 3월, 태국, 라오스, 베트남이 캄보디아 영토를 침범했다고 비난하며 국경 문제 최고 국가 위원회(SNCBA)의 수장을 맡았으나,[24] 훈 센 정부가 별도의 국경 문제 국가 당국(NABA)을 구성하면서 SNCBA는 자문 기구 역할에 그쳤고, 시아누크는 2005년 10월 SNCBA를 해산했다.[25][26] 2007년 8월, 한 인권 단체가 캄보디아 특별 법정(ECCC)에서의 증언을 위해 그의 국가 면제 해제를 요구하자,[27] 시아누크는 ECCC 관계자를 왕궁으로 초청하여 인터뷰하는 방식을 제안했으나 ECCC 측이 법적 권한 문제를 이유로 거절하면서 무산되었다.[28][30] 2008년 7월에는 쁘레아 비헤아르 사원 주변 영토 분쟁과 관련하여 캄보디아의 입장을 지지하는 공보문을 발표했다.[31] 2009년 8월, 시아누크는 노령으로 인해 개인 웹사이트에 더 이상 메시지를 게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32]
2009년부터 2011년 사이 시아누크는 의료 치료를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베이징에서 보냈다. 그는 2011년 10월 30일, 89번째 생일과 파리 평화 협정 20주년을 기념하여 프놈펜에서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33] 이후 캄보디아에 머물 의사를 표명했으나, 2012년 1월 중국 의사들의 조언에 따라 추가 치료를 위해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갔다.[34]
2012년 10월 15일, 시아누크는 베이징에서 심부전(심장마비)으로 향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105][106][37]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과 훈 센 총리 등 캄보디아 정부 관계자들이 조문을 위해 베이징으로 갔다.[107] 캄보디아 정부는 2012년 10월 17일부터 24일까지 7일간의 공식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39] 10월 17일, 시아누크의 유해는 중국국제항공 항공편으로 프놈펜으로 운구되었으며,[108] 공항에서 왕궁까지 약 120만 명의 시민이 운집하여 그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109][40]
시아누크의 유해는 왕궁에 안치되었다가[42] 2013년 2월 1일부터 국장이 거행되었다.[41] 2월 4일 왕립 화장터에서 화장되었으며,[43] 유골의 일부는 차토목 강에 뿌려졌고 나머지는 왕궁의 옥좌 홀에 약 1년간 보관되었다.[44] 2013년 10월에는 독립 기념비 옆에 시아누크의 청동상이 있는 탑이 세워졌고,[45] 2014년 7월, 남은 유골은 딸 칸타 보파의 유골과 함께 은탑에 최종 안치되었다.[46]
9. 유산

시아누크는 60년 이상 캄보디아 공공 생활의 최전선에 있었으며, 현대 캄보디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47][48] 언론인 마틴 울라콧은 ''가디언'' 지에서 "현대 시대에 노로돔 시아누크만큼 자신의 국가의 삶과 운명을 완전히 구현한 군주는 없었다"고 평가했다.[49] 그는 프랑스로부터 캄보디아의 독립을 이끌어낸 아버지로 칭송받는 동시에,[48][62] 냉전 시대 비동맹 운동을 통해 중립 외교를 펼치려 노력했다.
그는 캄보디아의 혼란스러운 역사 속에서 다양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두 번의 국왕 재위 외에도 총리, 국가 원수, 섭정, 망명 정부 수반, 대통령 등 여러 직책을 거쳤다. 이러한 경력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은 시아누크를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 역할을 수행한 정치인"으로 인정했다.[50][103] 그가 역임한 주요 직책은 다음과 같다.직책 기간 (대략적) 국왕 1941년–1955년 총리 여러 차례 (1945년, 1950년, 1952년–1962년 간헐적) 국가 원수 1960년–1970년, 1975년–1976년, 1993년 캄푸치아 민족통일전선(FUNK) 및 왕립 캄푸치아 민족 연합 정부(GRUNK) 수반 (망명) 1970년–1975년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CGDK) 수반 (망명) 1982년–1987년 (명목상 1991년까지) 캄보디아 최고 국가 평의회(SNC) 의장 1991년–1993년 국왕 1993년–2004년
그러나 1970년 캄보디아 쿠데타로 축출된 후 크메르 루주와 연대한 결정은 그의 정치적 행보에 큰 오점으로 남았다. 비록 시아누크 자신이 크메르 루주의 집단 학살 의도를 알지 못했고 오히려 그 정권 하에서 가택 연금과 가족의 희생을 겪었지만,[48][55][56][57] 이 연대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시아누크 자신도 이후 크메르 루주 정권과 그 만행을 공식적으로 규탄했다.[48][55][56][57]
시아누크는 복잡하고 때로는 모순적인 정치 행보에도 불구하고 많은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깊은 충성과 존경을 받았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쿠데타, 전쟁, 정권 교체, 기근, 집단 학살을 겪으면서도 그는 "신왕(데바라자)"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으며, 혼란 속에서 유일하게 연속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인식되었다.[47][56][64][58][59] 캄보디아 정보 센터가 1986년부터 1997년까지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그는 꾸준히 56%에서 72%의 지지율을 얻으며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로 나타났다.[65] 역사가 앙리 로카르는 시아누크를 앙코르나 국기와 같은 캄보디아의 주요 상징과 동급으로 평가하며 "국가의 상징"이라고 불렀다.[66]
정치 활동 외에도 시아누크는 예술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생전에 약 50편의 영화를 제작, 감독, 각본, 출연했다. 1941년 즉위 직후부터 아마추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1966년 첫 장편 영화인 《압사라》(km)를 제작했다. 그의 영화는 캄보디아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가졌으나, 냉전 시대의 민족주의적 선전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의 영화 《요술의 숲》(fr)은 1967년 제5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1968년과 1969년에는 프놈펜 국제 영화제를 개최했으며, 1997년에는 제20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특별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2006년 마지막 영화인 《미스 아시나》(fr)를 제작하고 2010년 영화 제작에서 은퇴했다.
시아누크는 음악가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다. 그는 클라리넷, 색소폰, 피아노, 아코디언 등 여러 악기를 연주했으며,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최소 48곡의 음악 작품을 작곡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주로 낭만적이거나 애국적인 주제를 다루었으며, 부인 모니크에게 헌정된 곡들도 있다. "바탐방의 꽃"(km), "케프 시의 아름다움"(km) 등은 캄보디아의 지역과 애국심을 노래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1970년 축출 이후에는 김일성, 호치민 등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찬양하는 혁명가 스타일의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는 망명 시절 자신을 지원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그는 북한의 김일성과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했으며, 이는 망명 기간 동안 형성된 관계였다.
시아누크는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의 초상은 여러 리엘 지폐에 사용되고 있다.[103] 2012년 10월 15일 베이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 캄보디아 정부는 7일간의 공식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그의 장례식은 2013년 2월에 거행되었으며, 수많은 국민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40] 2013년 10월에는 프놈펜의 독립 기념비 옆에 그의 청동상이 세워졌고,[45] 그의 유골 일부는 은탑에 안치되었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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