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파키스탄 해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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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파키스탄 해방군은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당시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위해 결성된 무장 단체이다. 1970년 파키스탄 총선 이후 벵골 민족주의가 고조되고 파키스탄 중앙 정부의 차별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1971년 3월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독립 선언과 함께 파키스탄 군의 탄압에 맞서 결성되었다. 무크티 바히니는 정규군과 민간인으로 구성된 게릴라 부대로 나뉘어 활동했으며, 인도, 소련 등의 국제적 지원을 받았다. 전쟁 과정에서 비하리인 학살, 전쟁 포로 및 민간인 학대 등의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방글라데시 독립 이후에는 방글라데시군, 경찰 등의 기반이 되었다. 무크티 바히니의 투쟁은 방글라데시의 문화 유산으로 남아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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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파키스탄 해방군 | |
|---|---|
| 기본 정보 | |
![]() | |
| 원어 이름 | মুক্তিবাহিনী (Freedom Fighters) |
| 원어 이름 (언어) | bn |
| 로마자 표기 | Mukti Bahinee |
| 의미 | 해방군 (자유 투사) |
| 활동 | |
| 활동 기간 | 1971년 3월 – 1971년 12월 |
| 활동 지역 | 동파키스탄 |
| 목표 및 이념 | |
| 주요 목표 | 방글라데시 독립 |
| 이념 | 벵골 민족주의 공화주의 |
| 조직 및 규모 | |
| 소속 | 방글라데시 임시 정부 |
| 병력 규모 | 105,000명 |
| 후신 | 방글라데시군 |
| 지휘부 | |
| 총사령관 | M. A. G. 오스마니 |
| 참모총장 | M. A. 라브 |
| 부참모총장 | A K 칸드케르 |
| 군사 | |
| 소속 부대 | 방글라데시 육군 ∟ K 포스 ∟ S 포스 ∟ Z 포스 방글라데시 해군 방글라데시 공군 방글라데시 라이플 연대 방글라데시 안사르 방글라데시 경찰 특수 게릴라 부대 ∟ 고노 바히니 ∟ 무지브 바히니 ∟ 카데르 바히니 ∟ 헤마예트 바히니 ∟ 아프사르 바히니 크랙 플래툰 |
| 전투 및 작전 | |
| 주요 전투 | 가지푸르 전투 골하티 전투 가리브푸르 전투 카말푸르 전투 달라이 전투 랑가마티 전투 쿠슈티아 전투 다루인 전투 바리살 작전 잭팟 작전 벨로니아 벌지 전투 호텔 인터컨티넨탈 작전 (크랙 플래툰 수행) |
| 지원 및 적대 세력 | |
| 아군 | 인도 소련 |
| 적군 | 파키스탄 |
| 동파키스탄 해방군 (번역본) | |
| 원어 이름 | মুক্তিবাহিনী |
| 참전 |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
| 활동 기간 | 1971년 3월 1일 ~ 1972년 1월 12일 |
| 활동 지역 | 동파키스탄 |
| 이념 | 사회주의 세속주의 |
| 분파 | 마르크스-레닌주의 (방글라데시 공산당) 벵골 국민주의 (아와미 연맹) |
| 상위 단체 | 방글라데시 임시정부 |
| 동맹 국가 | 알바니아 쿠바 중국 소련 |
| 지지 표명 국가 | 인도 |
| 적대 국가 | 파키스탄 미국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
2. 역사적 배경
동파키스탄 해방군, 즉 무크티 바히니의 결성은 파키스탄으로부터의 독립을 향한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오랜 염원과 투쟁의 결과였다. 서파키스탄 중심의 파키스탄 중앙 정부는 벵골어 사용을 억압하고 우르두어를 유일한 공식 언어로 강요하려 했으며[15], 정치적, 경제적으로 동파키스탄을 차별하는 정책을 지속했다.[16][17] 이러한 차별과 소외는 벵골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특히 1970년 보라 사이클론 발생 시 파키스탄 중앙 정부의 미흡한 대처는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분노를 극대화시켰다.[18][19] 이는 1970년 파키스탄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자치를 주장하는 아와미 연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배경이 되었다.[18] 그러나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이끄는 아와미 연맹의 총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서파키스탄의 정치 세력과 군부는 권력 이양을 거부했다.[15][20]
1971년 3월, 야히야 칸 대통령이 파키스탄 국민 의회 소집을 무기한 연기하자[20],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역사적인 3월 7일 연설을 통해 사실상 독립 투쟁을 선언했다.[21] 이후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비협조 운동과 저항이 확산되었고[22], 파키스탄 군대는 벵골인 군인들을 무장 해제하려 시도하며 탄압을 시작했다.[23] 이에 벵골인 군인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인도로 넘어가 해방군의 주력을 형성하게 된다.[24] 마침내 1971년 3월 26일,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공식 선언했으며[25][26], 이는 파키스탄 군대의 전면적인 군사 개입과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의 시작으로 이어졌다.[27]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동파키스탄 해방군이 탄생하게 되었다.
2. 1. 동파키스탄의 정치적 소외
동파키스탄은 파키스탄 중앙 정부가 우르두어만을 유일한 공식 언어로 지정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이는 벵골어 사용을 중시하는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불만을 샀다. 벵골어는 파키스탄 내에서 페르시아-아랍 문자로 표기되지 않는 유일한 언어였다.[15] 또한, 서파키스탄의 여러 주를 하나의 행정 단위로 병합한 조치는 동파키스탄에서 중앙 정부에 대한 깊은 의심을 불러일으켰다.[16] 파키스탄 중앙 정부가 동벵골에 약속했던 자치권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태도 역시 벵골 민족주의를 자극하며 분리 독립 움직임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17]1970년 발생한 1970년 보라 사이클론은 동파키스탄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최소 20만 명에서 최대 50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사회 기반 시설과 교통망 등이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그러나 파키스탄 중앙 정부의 구호 활동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고, 이는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이러한 불만은 1970년 파키스탄 총선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와미 연맹은 동파키스탄에 할당된 169석 중 167석을 휩쓸며 압승했고, 이로써 총 313석의 파키스탄 의회에서 과반수를 확보하는 다수당이 되었다.[18][19]
선거 이후, 당시 파키스탄 대통령이었던 야히야 칸은 아와미 연맹의 지도자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과 파키스탄 인민당의 줄피카르 알리 부토 사이의 권력 분담 협상을 중재하려 했다. 하지만 완전한 자치를 요구하는 무지브와 이를 반대하는 부토 사이의 입장 차이로 인해 회담은 결렬되었다. 부토는 야히야 칸에게 회담 중단을 조언하기까지 했다. 결국 1971년 3월 1일, 야히야 칸 장군은 3월 3일로 예정되었던 파키스탄 국민 의회 소집을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15][20]
이에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1971년 3월 7일, 다카의 라흐마 경기장(수라와르디 우드얀)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서 "이번 투쟁은 우리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다. 이번 투쟁은 우리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다"라는 역사적인 연설을 통해 사실상 독립을 향한 투쟁을 선언했다.[21] 이후 동파키스탄의 텔레비전 방송국들은 서파키스탄에서 금기시되었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노래를 방송하고 서파키스탄 프로그램의 방영 시간을 줄이는 등 문화적 저항을 보였다. 민간인들과 파키스탄 군대 사이의 교류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군대는 점령군처럼 여겨졌다. 현지 상인들은 파키스탄 군대에 물품 공급을 중단하기 시작했다.[22]
상황이 악화되자 파키스탄 군대는 벵골인으로 구성된 동파키스탄 경비대, 경찰, 정규군 병력의 무장을 해제하고 해고하려 시도했다. 이에 분노한 벵골인 장교들과 병사들은 파키스탄 군대에 반란을 일으키고 서파키스탄 출신 장교들을 공격했다.[23] 파키스탄 군대가 민간인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자, 이는 동파키스탄 군인들의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졌고, 이들은 인도로 넘어가 무크티 바히니라는 해방군의 주력을 형성하게 된다.[24]
1971년 3월 26일 자정 직후,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같은 날 파키스탄 대통령 야히야 칸은 전국 방송을 통해 무지브를 반역자로 규정하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25][26] 파키스탄 군대는 임박한 군사적 충돌에 대비하여 보병 및 기갑 부대를 동파키스탄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27]
2. 2. 벵골어 운동과 민족주의 고조
동파키스탄에서는 파키스탄 정부가 우르두어를 유일한 공식 언어로 지정하려는 정책에 반대하는 캠페인이 벌어졌다. 이는 벵골 민족주의가 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벵골어는 파키스탄 내에서 페르시아-아랍 문자로 표기되지 않는 유일한 언어였다.[15] 또한 서파키스탄의 여러 주를 하나의 행정 단위로 병합하려는 정책은 동파키스탄 주민들에게 큰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16] 파키스탄 중앙 정부가 동벵골에 자치권을 부여하려 하지 않는 태도 역시 벵골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분리주의 움직임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17]1970년 발생한 1970년 보라 사이클론은 동파키스탄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최소 20만 명에서 최대 5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사회 기반 시설, 교통망 등이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파키스탄 중앙 정부는 재난 구호에 미온적으로 대처하여 큰 비판을 받았고, 이는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불만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러한 불만은 1970년 파키스탄 총선 결과에도 영향을 미쳐, 아와미 연맹은 동파키스탄에 할당된 169석 중 167석을 휩쓸었다. 이로써 아와미 연맹은 총 313석 규모의 파키스탄 의회에서 과반수를 확보한 다수당이 되었다.[18][19]
그러나 총선 이후, 아와미 연맹의 지도자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정부를 구성하지 못했다.[15] 당시 대통령이었던 야히야 칸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과 서파키스탄의 주요 정치인 부토 사이의 권력 분점 협상을 중재하려 했으나, 회담은 결렬되었다. 무지부르 라흐만은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를 요구했고, 부토는 야히야 칸에게 회담 중단을 조언했다. 결국 1971년 3월 1일, 야히야 칸 장군은 3월 3일로 예정되었던 파키스탄 국민 의회 소집을 무기한 연기했다.[20]
이에 반발하여 1971년 3월 7일,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라흐마 경마장(수라와르디 우드얀)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서 "이번 투쟁은 우리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다. 이번 투쟁은 우리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다"라고 선언하는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21] 이후 동파키스탄의 텔레비전 방송국들은 파키스탄에서 금기시되었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노래를 방송하기 시작했고, 서파키스탄 프로그램의 방송 시간을 줄였다. 파키스탄 군대와 동파키스탄 민간인 간의 교류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군대는 점령군처럼 여겨졌다. 현지 계약업자들은 파키스탄 군대에 대한 물품 공급을 중단했다.[22]
긴장이 고조되면서 파키스탄 군대는 벵골인으로 구성된 동파키스탄 경비대, 경찰, 정규군 병력의 무장 해제와 해고를 시도했다. 이에 벵골인 장교들은 파키스탄 군대에 반란을 일으키고 서파키스탄 출신 장교들을 공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23] 이러한 탄압과 반란은 많은 벵골인 군인들이 인도로 탈출하여 이후 무크티 바히니의 주력을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다.[24] 마침내 1971년 3월 26일,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했다. 같은 날 파키스탄 대통령 야히야 칸은 전국 방송을 통해 무지부르 라흐만을 반역자로 규정했다.[25][26] 파키스탄 군대는 임박한 분쟁에 대비하여 보병 및 기갑 부대를 동파키스탄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27]
2. 3. 1971년 3월의 위기
1970년 파키스탄 총선 이후, 야히야 칸 대통령은 무지브와 부토 사이의 권력 분담 협정을 희망했으나, 양측의 회담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무지브는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를 요구했고, 부토는 야히야에게 회담 중단을 조언했다.[20] 결국 1971년 3월 1일, 야히야 칸 장군은 3월 3일로 예정되었던 파키스탄 국민 의회 개회를 일방적으로 무기한 연기했다.[20] 이 조치는 아와미 연맹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정부를 구성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즉각적인 저항과 시위를 촉발했다.1971년 3월 7일,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다카의 수라와르디 우드얀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통해 사실상 독립을 향한 투쟁을 선언했다. 그는 "이번 투쟁은 우리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다. 이번 투쟁은 우리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다"라고 외치며 벵골 민족의 독립 의지를 천명했다.[21] 이 연설 이후 동파키스탄 내에서는 파키스탄 중앙 정부에 대한 저항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동파키스탄 텔레비전 방송국은 파키스탄에서 금기시되었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노래를 방송하기 시작했고, 서파키스탄 프로그램의 방송 시간을 줄였다. 민간인과 파키스탄 군대 사이의 교류는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군대는 점령군처럼 여겨졌다. 현지 계약자들조차 파키스탄 군대에 물품 공급을 중단하는 등 비협조 운동이 확산되었다.[22]
상황이 악화되자 파키스탄 군부는 벵골인으로 구성된 동파키스탄 소총대, 경찰, 정규군 병력의 무장을 해제하고 해고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벵골인 군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벵골인 장교와 병사들이 파키스탄 군대에 반란을 일으켰고, 일부는 서파키스탄 출신 장교들을 공격하기도 했다.[23] 파키스탄 군대의 민간인에 대한 억압적인 조치들은 동파키스탄 군인들의 반란을 더욱 부추겼고, 이들은 인도로 넘어가 훗날 무크티 바히니의 핵심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24]
마침내 1971년 3월 26일 자정을 넘긴 시각,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공식 선언했다.[25] 이에 파키스탄 대통령 야히야 칸은 같은 날 전국 방송을 통해 무지브를 반역자로 규정하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25][26] 파키스탄 군대는 이미 동파키스탄에서의 군사적 충돌에 대비하여 보병 및 기갑 부대를 이동시키고 있었다.[27] 이로써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둘러싼 갈등은 전면적인 군사적 대결 국면으로 치닫게 되었다.
3. 무크티 바히니의 결성과 발전
1971년 3월 25일, 파키스탄 군부가 동파키스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을 체포하는 등 수색 작전을 개시하며 탄압을 시작하자, 이에 맞서 동파키스탄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무장 저항에 나섰다. 파키스탄 군은 아와미 연맹 당원, 동파키스탄 소총대, 동벵골 연대 등 충성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세력을 공격했으며, 이 공격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무크티 바히니 저항군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28] 동벵골 연대 5개 대대가 반란을 일으키며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본격화되었다.[30]
3월 27일, 지아우르 라흐만 소령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을 대신하여 방글라데시 독립 선언을 발표했으며[22], 파키스탄 군의 1971년 방글라데시 학살에 맞서 민간인들도 무기고를 확보하여 저항에 동참했다. 4월 17일에는 무지브나가르 정부가 수립되어[33] 독립 운동의 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저항 운동이 확산되면서 무크티 바히니는 점차 군사 조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1971년 7월에는 방글라데시 해군이 창설되었고, 8월 15일 작전 잭팟을 개시하여 몽글라, 치타공, 찬드푸르, 나라양간지 등지에서 파키스탄 해군 선박 다수를 침몰시키는 전과를 올렸다.[47][48][49][50] 이 작전은 국제 사회에 파키스탄 점령군의 취약성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51] 방글라데시 해군은 인도의 지원을 받아 확보한 함정으로 기뢰를 부설하고[52] 수중 파괴 공작을 벌이는 등[53] 파키스탄군의 해상 보급로 차단에 기여했다.
같은 해 9월 28일에는 공군 준장 A. K. 칸데르의 지휘 아래 방글라데시 공군(BAF)이 창설되었다. 초기에는 인도 나갈랜드주 디마푸르의 정글 활주로에서 작전을 시작했으나, 점차 해방된 지역의 비행장을 확보해 나갔다. 12월 3일부터는 "킬로 비행" 작전을 통해 오터 DHC-3 항공기로 나라양간지와 치타공의 파키스탄군 유류 저장소 등 주요 보급 시설을 공습하여 파괴했다.[46]
3. 1. 초기 저항 (1971년 3월 - 6월)
1971년 3월 25일, 파키스탄 정부는 동파키스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아와미 연맹의 지도자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을 체포했다. 동시에 파키스탄 군은 서치라이트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외국 언론인들은 국외로 추방되었고, 아와미 연맹은 불법 정당으로 규정되었다. 파키스탄 군은 아와미 연맹 당원, 동파키스탄 소총대, 동벵골 연대 등 파키스탄 정부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판단된 조직과 인물들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이 공격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이후 무크티 바히니 저항군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28] 파키스탄 군 지도부는 벵골인들의 저항이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29] 그러나 동벵골 연대 소속 5개 대대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30]3월 27일, 지아우르 라흐만 소령은 체포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을 대신하여 파키스탄으로부터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벵골 군인들과 함께 치타공 시에서 탈출했다.[22] 수도 다카에서는 서파키스탄 군이 1971년 다카 대학교 학살을 자행하며 1971년 방글라데시 학살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에 맞서 여러 도시의 민간인들은 무기고를 습격하여 확보한 무기로 파키스탄 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특히 치타공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벵골 군대와 파키스탄 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지아우르 라흐만 소령의 독립 선언은 치타공의 칼루르가트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방송되었다.[28]
벵골 군대는 전쟁 초기 몇 달 동안 브라만바리아, 파리드푸르 구, 바리살, 마이멘싱, 코미야, 쿠스티아 등 많은 지역을 장악했다.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1971년 4월과 5월까지 다수의 마을이 벵골 군대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이 시기 주요 전투로는 카말푸르 전투, 다루인 전투, 그리고 치타공 언덕 지대에서 벌어진 랑가마티-마할차리 수로 전투 등이 있다.[31]
독립 움직임은 외교 무대에서도 나타났다. 4월 18일, 인도 콜카타에 주재하던 파키스탄 부영사관 직원들이 파키스탄 정부를 이탈하여 영사관 건물에 방글라데시 국기를 게양했다.[32] 앞서 4월 17일에는 방글라데시 임시 정부(무지브나가르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33]
한편, 서파키스탄 내부에서는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5월, 외무부 장관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야히아 칸 대통령에게 서파키스탄의 권력을 자신의 정당에 이양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야히아 칸은 이러한 요구가 동파키스탄을 서파키스탄의 식민지로 간주하는 무크티 바히니와 방글라데시 임시 정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부토는 지지자들에게 "11월까지 권력을 잡거나 감옥에 갈 것"이라고 공언하며 긴장감을 높였다.[34]
6월 9일, 무크티 바히니 대원들은 다카 시내에서 차량을 탈취한 뒤, 외국인들이 주로 머물던 인터컨티넨탈 호텔, 친정부 성향 신문사인 모닝 포스트 사무실, 그리고 이슬람주의 지도자 골람 아잠의 자택에 수류탄 공격을 감행하며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다.[35]
3. 2. 조직화 및 게릴라전 (1971년 7월 - 11월)
무크티 바히니는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위해 전쟁 지역을 11개 구역으로 나누어 조직했다. 이들의 주요 전략은 방글라데시 내부에서 활동하며 습격, 매복, 파괴 활동을 통해 서파키스탄이 통제하는 해운 항구, 발전소, 산업 시설, 철도, 창고 등을 목표로 삼는 것이었다. 서파키스탄 군대가 넓게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벵골 게릴라들은 5명에서 10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그룹으로 특정 임무를 수행하며 적의 소규모 부대를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특히 파키스탄 육군의 기동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다리, 암거, 연료 저장고, 선박 등을 파괴하는 작전을 펼쳤다.[64]
그러나 초기 몬순 공세에서는 파키스탄 증원군에 밀려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실레트, 코밀라, 마이멘싱 등 국경 초소에 대한 공격은 제한적인 성공에 그쳤으며, 훈련 기간 부족으로 인해 방글라데시군의 활동은 잠시 주춤했다.[36]
몬순 시기가 지난 8월 이후, 무크티 바히니는 다시 활동을 강화하고 더욱 효과적인 작전을 수행했다. 인도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동파키스탄 내부에 여러 기지를 마련해주었다.[37] 무크티 바히니의 파괴 공작으로 동파키스탄의 철도 운송은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렀고, 수도 다카는 낮에도 총격과 폭발 소리가 끊이지 않는 유령 도시처럼 변해갔다.[38] 같은 해 8월, 인도의 동파키스탄 난민 수용소를 방문한 미국 상원의원 테드 케네디는 파키스탄군이 집단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39] 한편, 친파키스탄 성향의 골람 아잠은 파키스탄 정부에 인도를 공격하고 무크티 바히니를 지원하는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아삼 주를 병합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39] 국제 구호단체 옥스팜은 난민 수용소에서 10만 명 이상의 어린이가 사망할 수 있으며, 분쟁으로 인한 식량 부족으로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39]
1971년 9월에는 정규 무크티 바히니 대대가 창설되어[40] 조직적인 전투 능력이 향상되었다. 파키스탄군을 겨냥한 사보타주와 매복 작전도 계속되어 적의 사기를 떨어뜨렸다.[41]
10월 들어 방글라데시 정규군은 여러 차례 성공적인 공세를 펼쳐 파키스탄이 점령하고 있던 300개의 국경 초소 중 90개를 탈환했다. 무크티 바히니는 방글라데시 내부에서 게릴라 공격을 더욱 강화했으며, 이에 파키스탄군은 벵골 민간인에 대한 보복 공격을 강화하는 잔혹성을 보였다.[42]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크티 바히니는 동파키스탄 안팎을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하며 활동을 이어갔다.[43]
11월에는 인도의 군사적 개입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인도 포병과 인도 공군은 일부 공세에서 무크티 바히니를 직접 지원하며 파키스탄군을 압박했다.[44] 주요 기반 시설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과 방글라데시 임시 정부의 영향력 확대로 인해 동파키스탄에 대한 파키스탄 정부의 통제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45]
3. 3. 인도군의 개입과 방글라데시 독립 (1971년 12월)

서파키스탄이 북인도에 대한 칭기즈 칸 작전을 개시하면서 인도는 방글라데시 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이로써 방글라데시군(무크티 바히니)과 인도군 사이에 합동 지휘 체계가 구축되었다. 인도군 3개 군단은 무크티 바히니 3개 여단의 지원을 받았다. 무크티 바히니와 그 지지자들은 인도군을 안내하고 파키스탄군의 이동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했다.[54] 인도군과 무크티 바히니 연합군은 동파키스탄에 주둔한 파키스탄군 3개 사단보다 훨씬 우세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연합군은 실렛 전투, 가리푸르 전투, 보이라 전투, 힐리 전투, 쿠스티아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협력했다. 이들은 파키스탄군이 강력하게 방어하는 요새를 선별적으로 공격하거나 우회하면서 주변 지역을 신속하게 점령해 나갔다. 예를 들어, 메그나 헬리 브리지 작전에서는 헬리콥터를 이용해 파키스탄군의 방어선을 넘어 브라만바리아에서 나르싱디로 연합군 병력을 성공적으로 공수했다. 그 결과 제소르, 마이멘싱, 실렛, 쿠스티아, 노아칼리, 몰비바자르 등 주요 도시들이 연합군에게 빠르게 함락되었다.
한편, 수도 다카에서는 패배가 임박한 파키스탄군과 그들을 지지하는 민병대가 벵골 지식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1971년 벵골 지식인 학살을 자행했다. 역사가 야스민 사이키아는 당시 파키스탄군과 친 파키스탄 민병대가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약탈, 강간, 살해와 같은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55]
무크티 바히니는 12월 중순까지 다카 구의 대부분 지역을 해방하는 데 성공했다. 서파키스탄 전선에서도 인도군이 파키스탄 영토 깊숙이 진격했으며, 주요 항구인 카라치 항은 인도 해군에 의해 해상 봉쇄되었다. 결국 파키스탄군은 1971년 12월 16일, 다카에서 무크티 바히니-인도 연합군에게 공식적으로 파키스탄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56]
4. 무크티 바히니의 조직과 구성

"무크티 바히니"는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하나는 동파키스탄의 준군사, 군사 및 경찰 병력 출신으로 구성된 "니오미토 바히니"(정규군)이고, 다른 하나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고노바히니"(인민군)이다. 이 명칭은 방글라데시 임시 정부가 부여하고 정의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니오미토 바히니를 "무크티 파우즈"로, 고노바히니를 "자유 투사"로 불렀다.[63][1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령 인도군과 파키스탄군에서 복무한 벵골인 참전용사인 M. A. G. 오스마니는 1971년 4월 4일 방글라데시군을 창설했다. 방글라데시 임시 정부는 모든 방글라데시 군대를 오스마니의 지휘 아래 두었으며, 그는 국방부 장관 겸 대장 계급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오스마니는 무크티 바히니를 여러 부서로 나누어 조직했다. 여기에는 육군, 해군, 공군을 포함한 정규군과 Z군과 같은 특수 여단이 포함되었다. 동파키스탄 소총대와 경찰을 포함한 준군사 조직은 "니요미토 바히니"(정규군)로 지정되었으며, 이들은 다시 전방 대대와 구역 부대로 나뉘었다. 이와 별도로 민간인으로 구성된 군사 조직인 "고노바히니"(인민군)가 창설되었는데, 이들은 군 지휘 하에 경무장한 민간 여단 형태로 운영되었다. 고노바히니에는 친서방 성향의 아와미 연맹, 친중국 사회주의 성향의 국민 아와미당, 마울라나 압둘 하미드 칸 바샤니가 이끄는 동파키스탄 공산당의 정치 활동가들이 만든 부대들도 포함되었다.[64]
게릴라 운동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정면 공격을 담당하는 무장 행동 부대, 군사 정보를 수집하는 부대, 그리고 게릴라 활동의 근거지가 되는 기지이다. 1971년 7월 11일부터 17일까지 첫 번째 구역 사령관 회의가 열렸다. 주요 구역 사령관들은 다음과 같다.[65]
| 계급 | 이름 |
|---|---|
| 소령 | 지아우르 라흐만 |
| 소령 | 칼레드 모샤라프 |
| 소령 | K. M. 샤피울라 |
| 대위 | A. N. M. 누루자만 |
| 소령 | 치타 란잔 닷타 |
| 비행단장 | M. 카데물 바샤르 |
| 소령 | 나즈물 후크 |
| 소령 | 카지 누루자만 |
| 소령 | 아부 오스만 초우두리 |
| 소령 | 아불 만주르 |
| 소령 | M. A. 잘릴 |
| 소령 | 아부 타헤르 |
| 비행대장 | M. 하미둘라 칸 |
무지브 바히니는 아와미 연맹의 청년 지도자인 세라줄 알람 칸, 셰이크 파즐룰 후크 모니, 토파엘 아흐메드, 압두르 라자크 등이 이끌었다. 호주 출신 참전 용사인 윌리엄 A. S. 오더랜드는 다카에서 게릴라전을 조직하고 방글라데시군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여 방글라데시 정부로부터 비르 프로틱 훈장을 받았다.[66] 좌익 정치인 카데르 시디케, 헤마예트 우딘, 모니 싱 등도 각자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카데르 시디케는 탕가일 구에서 활동했으며,[67] 동파키스탄 출신의 전직 군인이었던 헤마예트 우딘은 거의 전적으로 현지에서 조달한 물품으로 자신의 부대(바히니)를 창설했다.[68]
독립 방글라데시 라디오 방송국은 무크티 바히니의 문화 부대 역할을 했다. 또한 무크티 바히니는 야전 병원, 무선 방송국, 훈련 캠프, 교도소 등을 운영했다.
4. 1. 민간인 부대 (고노바히니)
(내용 없음)4. 2. 여성 부대
여성들은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동안 무크티 바히니에서 복무했다. 무크티 바히니는 게릴라전을 위해 여러 여성 부대를 훈련시켰다. 타라몬 비비는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의 두 여성 전쟁 영웅 중 한 명이다. 시타라 베굼 대위는 부상당한 무크티 바히니 전사를 위한 야전 병원을 설립한 것으로 유명하다.[84] 다카 대학교의 나즈마 샤힌 교수와 그녀의 여동생은 무크티 바히니의 여성 구성원이었다.[85]5. 무크티 바히니의 장비
무크티 바히니는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중 육상 전력 외에도 공군과 해군을 조직하여 운용했다. 방글라데시 공군(BAF)은 1971년 9월 창설되어 "오터" DHC-3 항공기 등을 이용해 파키스탄군의 연료 보급선을 공격하는 "킬로 비행" 작전을 수행했다.[46] 같은 해 7월 창설된 방글라데시 해군은 작전 잭팟을 통해 파키스탄 해군 선박을 공격했으며,[47][48][49][50] 인도의 지원을 받아 확보한 선박을 기뢰 부설 능력을 갖춘 포격정으로 개조하여 운용하고 수중 전투원을 투입하는 등 파키스탄군의 해상 작전을 방해했다.[51][52][53] 초기 무기는 주로 파키스탄군으로부터 노획하거나 캘커타 등지의 시장에서 구매했으며, 이후 인도로부터 제한적인 지원을 받았다.[70][71]
5. 1. 주요 사용 장비

무크티 바히니는 초기에 1971년 3월과 4월, 벵골군이 점령했던 파키스탄 무기고를 통해 무기를 확보했다. 또한, 캘커타의 무기 시장에서 이탈리아제 곡사포, 알루에트 III 헬리콥터, "다코타" DC-3 항공기, "오터" DHC-3 전투기 등 상당량의 군사 장비를 구매하기도 했다.[70] 인도 정부는 방글라데시군이 캘커타 항구를 통해 독자적으로 무기를 공급받는 것을 허용했으며, 이를 통해 인도군으로부터 제한적인 장비 지원을 받았다.[71] 주로 스텐 기관단총, 리-엔필드 소총, 인도산 수류탄 등을 사용했다.[35]
무크티 바히니가 사용한 주요 무기와 장비는 다음과 같다.
| 종류 | 모델명 |
|---|---|
| 리볼버 | 스미스 & 웨슨 모델 10 |
| 권총 | 툴라 토카레프 33 |
| 소총 | |
| 기관단총 | |
| 기관총 | |
| 수류탄 | HE-36 |
| 박격포 | 120mm 중(重) 박격포 |
| 곡사포 | QF 3.7인치 산악 곡사포 |
| 무반동총 | |
| 대전차 수류탄 | ENERGA 대전차 소총 수류탄 |
6. 국제사회의 반응과 지원
파키스탄군이 동파키스탄에서 자행한 학살은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서파키스탄 정권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켰다.[72] 특히 미국에서는 민주당 소속의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닉슨 행정부가 벵골인 학살을 외면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73][74]
동파키스탄 해방군, 즉 무크티 바히니는 국제적으로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방글라데시 임시 정부는 유럽과 북미 지역의 학생들로 구성된 '국제 여단' 창설을 검토하기도 했으며,[71]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이자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직접 방글라데시 군과 함께 싸우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75]
주요 강대국들도 점차 입장을 정했다. 소련은 파키스탄 정부가 정치적 해결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방글라데시 독립 세력과 인도를 지지하기 시작했다.[71] 인도는 파키스탄군의 만행과 기근으로 인해 국경을 넘어온 천만 명에 달하는 벵골인 난민 문제[77]와 안보적 우려 속에서[78] 1971년 4월부터 방글라데시 군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으며,[79][31] 8월에는 소련과 인도-소련 우호 협력 조약을 체결하여 지원을 더욱 강화했다.[76] 이는 당시 파키스탄을 통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던 미국의 정책에 대한 견제이기도 했다.[76] 그러나 미국과 중국 모두 전쟁 과정에서 파키스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80][81]
전쟁 막바지인 1971년 12월 6일, 부탄이 세계 최초로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같은 날 몇 시간 뒤 인도가 뒤를 이어 방글라데시를 공식 인정했다.[83]
6. 1. 인도
파키스탄군의 만행과 이로 인한 기근으로 인해 약 천만 명에 달하는 벵골인 난민이 국경을 넘어 인접 국가인 인도로 피난했다.[77] 특히 서벵골, 트리푸라 및 바라크 계곡 지역은 동파키스탄과 민족적, 언어적(벵골어), 문화적(벵골 문화) 유대가 깊었기에 많은 난민을 수용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벵골어를 사용하는 지역 사회에 전례 없는 연대감을 형성했으며, 인도 언론과 대중 역시 벵골인과 무크티 바히니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보냈다.[78]인도는 방글라데시 독립 운동이 공산주의 세력에게 주도될 경우, 자국 내 낙살라이트 문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또한 수백만 명의 난민이 인도에 영구적으로 정착하는 상황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78] 방글라데시의 조속한 독립을 지원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따라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는 1971년 4월, 방글라데시 군에 대한 외교적,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승인했다.[79][31] 방글라데시 임시 정부는 인도의 지원 하에 콜카타에 망명 정부 사무국을 설립할 수 있었다. 인도군은 무크티 바히니에게 체계적인 훈련을 제공하고 군사 기지 사용을 허가했다. 훈련소는 비하르, 아루나찰프라데시, 아삼, 나갈랜드, 미조람, 메갈라야, 트리푸라, 서벵골 등 인도 여러 주에 걸쳐 운영되었다.[80][81] 무크티 바히니는 인도의 묵인 하에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할 수 있었다.[82]
한편, 당시 미국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파키스탄을 중시하는 외교 정책을 펼치자, 인도는 이에 대한 견제 및 안보 확보 차원에서 1971년 8월 소련과 인도-소련 우호 협력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인도가 무크티 바히니에 대한 지원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76] 과거 중국과의 전쟁 경험(1962년)이 있던 인도에게 파키스탄 측에 대한 중국의 군사 개입 가능성을 억제하는 중요한 안전장치가 되었다.[80][81]
그러나 모든 무크티 바히니 대원들이 인도의 개입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과거 파키스탄 군 및 정보기관 출신 대원들 중 일부는 인도의 의도에 의구심을 품고 인도의 역할을 축소하려 하기도 했다. 또한 인도가 셰이크 무지브의 추종자들로 구성되었으나 무크티 바히니나 방글라데시 임시 정부의 직접적인 지휘 하에 있지 않은 별도의 조직인 무지브 바히니를 창설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는 이들도 있었다.[3]
결정적으로 인도는 1971년 12월 3일, 파키스탄과의 전면전에 돌입하여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 직접 개입했으며, 12월 6일에는 부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방글라데시를 독립 국가로 공식 인정했다.[83]
6. 2. 소련
소련은 파키스탄이 정치적 해결 의지가 없다고 판단한 후, 방글라데시 군과 인도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71] 당시 미국이 파키스탄을 통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자, 인도는 이에 대응하여 1971년 8월 소련과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 체결 이후 인도는 무크티 바히니에 대한 지원을 더욱 늘렸다.[76] 인도에게 이 조약은 1962년 중국과의 전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파키스탄을 지원하기 위한 중국의 잠재적 개입 가능성에 대비하는 중요한 안전장치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국과 중국 모두 파키스탄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데는 실패했다.[80][81]6. 3. 미국
파키스탄군의 학살 행위는 국제 사회의 광범위한 분노를 일으켰다.[72] 미국 내에서는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 테드 케네디가 동파키스탄에서 자행된 벵골인 학살을 사실상 묵인한 닉슨 행정부에 대해 강력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73][74] 이는 당시 미국 내 여론이 방글라데시 독립에 동정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한편, 닉슨 행정부는 파키스탄을 통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었다.[76] 이러한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중국 모두 전쟁 과정에서 파키스탄에 대한 결정적인 군사적 또는 외교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80][81]
7. 비판과 논란
무크티 바히니는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 중 서파키스탄인과 비하리인에 대한 인권 침해 혐의로 일부 역사학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93][90] 이러한 비판에는 민간인 학살 및 학대 등의 주장이 포함된다.
7. 1. 비하리인 학살
무크티 바히니는 서파키스탄인과 비하리인에 대한 인권 침해 행위로 인해 일부 역사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한다.[93][90]특히 1971년 3월 27일, 무크티 바히니의 일부 구성원들이 나오가온 구의 산타하르 마을에서 우르두어를 사용하는 약 15,000명의 비하리인을 학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91][92] 또한, 전쟁 기간 동안 비하리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간 혐의도 받고 있다.[93]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 이후, 인도 정부의 지원을 받은 벵골 저항 세력인 무크티 바히니가 동파키스탄 지역에서 벵골인이 아닌 주민들(주로 서파키스탄인과 비하리인)을 살해했다는 보고도 있다.[94]
7. 2. 전쟁 포로 및 민간인 학대
무크티 바히니는 서파키스탄인과 비하리에 대한 인권 침해 혐의로 역사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93][90]1971년 3월 27일, 무크티 바히니의 구성원들은 산타하르 마을에서 15,000명의 비하리를 나오가온 지역에서 학살한 혐의를 받았다.[91][92] 그들은 또한 전쟁 중 비하리 여성을 강간한 혐의도 받고 있다.[93]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 이후, 인도 정부의 지원을 받은 벵골 저항 세력인 무크티 바히니가 동파키스탄에서 비(非)벵골인(주로 서파키스탄인과 비하리)을 살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94]
8. 전후 무크티 바히니
방글라데시 독립 이후, 무크티 바히니는 해체되어 방글라데시군, 방글라데시 국경수비대, 방글라데시 경찰 등으로 재편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사회적으로 무기가 광범위하게 유통되면서 방글라데시 정부는 심각한 치안 문제에 직면했다. 일부 민병대 조직은 파키스탄 항복 이후 우르두어를 사용하는 인구에 대한 보복 공격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89]
8. 1. 사회적 기여
무크티 바히니의 정신을 이어받아 방글라데시군, 방글라데시 국경수비대, 방글라데시 경찰이 창설되었다. 전쟁에 참여했던 민간 전투원들에게는 정부 일자리 우선 채용이나 대학교 입학 특례 등 다양한 사회적 혜택이 주어졌다.[87] 또한, 전직 게릴라들을 대표하기 위해 방글라데시 자유 투사 회의가 결성되었으며,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부는 무크티 바히니 구성원들의 복지를 담당하고 있다.[88]
방글라데시는 무크티 바히니 전사들의 용맹을 기리기 위해 여러 훈장을 제정하여 그들의 공헌을 인정하고 있다. 최고 군사 훈장인 비르 슈레스토(최고의 용사)는 다음 7명의 무크티 바히니 전사들에게 수여되었다.
| 이름 |
|---|
| 모하마드 루훌 아민 |
| 모히우딘 자항기르 |
| 모스타파 카말 |
| 하미두르 라흐만 |
| 문시 압두르 라우프 |
| 누르 모하마드 셰이크 |
| 마티우르 라흐만 |
[95]
이 외에도 중요도 순서에 따라 비르 우톰, 비르 비크롬, 비르 프라틱 훈장이 있다.[96]
법적으로도 독립 투사들의 지위와 명예를 보장하고 있다. 2018년에 제정된 ''방글라데시 독립 투사 복지 재단 법, 2018 (2018년 법률 제51호)'' 제2(11)조는 독립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বীর মুক্তিযোদ্ধা|비르 무크티조다bn로 정의했다.[97] 이후 정부는 2020년 10월 29일, 독립 투사라는 용어 앞에 "비르(영웅적)"라는 단어를 추가하도록 공식적으로 명령했다.[98] 이어서 제11대 국회 상임위원회의 결정을 바탕으로, 해방 전쟁부는 2021년 12월 18일 관보를 통해 독립 투사 이름 앞에 "비르"를 존칭 접두사로 사용해야 하며, 비르 무크티조다의 공식 영어 표기는 '''영웅적 독립 투사'''(Heroic Freedom Fighter)임을 재확인했다.[99]
8. 2. 보훈 단체
무크티 바히니의 뒤를 이어 방글라데시군, 방글라데시 국경수비대, 방글라데시 경찰이 창설되었다. 전쟁에 참여했던 민간 전투원들에게는 정부 일자리 우선 채용이나 대학교 입학 특혜 등 다양한 혜택이 주어졌다.[87] 전직 게릴라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방글라데시 자유 투사 회의가 결성되었으며,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부는 무크티 바히니 구성원들의 복지를 담당하고 있다.[88]''방글라데시 독립 투사 복지 재단법, 2018'' (2018년 법률 제51호) 제2조 11항은 독립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বীর মুক্তিযোদ্ধা|비르 무크티조다bn'''로 정의한다.[97] 방글라데시 정부는 2020년 10월 29일 관보를 통해 독립 투사를 지칭할 때 "비르(영웅적)"라는 단어를 추가하도록 명령했다.[98] 이후 제11대 국회의 상임위원회 제13차 회의 결정에 따라, 해방 전쟁부는 2021년 12월 18일 관보를 통해 독립 투사 이름 앞에 '비르'를 존칭 접두사로 사용해야 하며, '비르 무크티조다'의 영어 표기는 'Heroic Freedom Fighter'가 될 것이라고 다시 한번 명시했다.[99]
방글라데시의 최고 군사 훈장인 비르 슈레스토 (최고의 용사)는 7명의 무크티 바히니 전사에게 수여되었다.[95]
| 이름 | 비고 |
|---|---|
| 모하마드 루훌 아민 | |
| 모히우딘 자항기르 | |
| 모스타파 카말 | |
| 하미두르 라흐만 | |
| 문시 압두르 라우프 | |
| 누르 모하마드 셰이크 | |
| 마티우르 라흐만 |
9. 문화적 유산
동파키스탄 해방군(무크티 바히니)의 투쟁은 방글라데시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이들의 활동과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의 경험은 이후 다양한 형태의 예술 작품으로 표현되었으며, 국가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9. 1. 문학

무크티 바히니는 수많은 예술 작품, 문학, 영화 및 텔레비전 제작의 주제가 되었다.
9. 2. 영화
동파키스탄 해방군(무크티 바히니)은 수많은 예술 작품, 문학, 영화 및 텔레비전 제작의 주제가 되었다.9. 3.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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