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메스와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라메스와람은 인도 타밀나두주에 위치한 섬으로, 힌두교 신화 라마야나에서 라마 왕자가 스리랑카로 건너가기 위해 다리를 건설한 장소로 여겨진다. 이 도시는 라마나타스와미 사원을 중심으로 역사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1994년에 기초 자치 단체가 설치되었다. 라메스와람은 스리랑카와 가깝고, 2km 떨어진 팜반 섬에 위치하며, 팜반 다리를 통해 인도 본토와 연결된다. 힌두교 신자들이 순례하는 곳이며, 라마나타스와미 사원은 주요 관광지이다. 또한, 스리랑카 타밀 난민 문제, 어업 분쟁, 카차티부 섬 문제 등 스리랑카와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지역은 A. P. J. 아불 칼람 전 인도 대통령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힌두교 성지 - 바라나시
바라나시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갠지스 강변에 위치한 힌두교 성지이자 문화 중심지로, 고대 카시 왕국의 수도였으며 종교 관광 중심지이자 전통 공예와 문화 활동이 활발하지만, 도시화와 관광객 증가로 인한 환경 문제와 빈곤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 힌두교 성지 - 브린다반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에 위치한 브린다반은 크리슈나 신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힌두교 바이슈나바교의 중요한 순례지이자, 5,500여 개의 사원과 라다 크리슈나 신화 유산을 지닌 '과부들의 도시'로도 알려져 있으나, 도시화로 인한 환경 문제도 안고 있다. - 타밀나두주의 도시 및 마을 - 마두라이
마두라이는 기원전 2세기부터 사람이 거주한 인도의 역사적인 사원 도시로, 고대 타밀 상감의 중심지이자 판디안 왕조의 수도였으며, 미낙시 암만 사원을 비롯한 주요 사원들이 위치한 정치, 산업의 중심지이다. - 타밀나두주의 도시 및 마을 - 마하발리푸람
마하발리푸람은 7~8세기에 팔라바 왕조가 건설한 힌두교 종교 기념물군으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벵골 만 연안에 위치하여 40여 개의 고대 기념물과 힌두 사원을 포함한다. - 힌두교 - 브라만
브라만은 고대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최상위 계급으로,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지위를 갖는 사제 계급이었으나, 현대에는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변화하고 있으며 인도 인구의 약 5%를 차지하고 동남아시아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 힌두교 - 바르나 (힌두교)
바르나는 힌두교의 사회 계급 제도로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네 계급으로 구성되며, 각 계급의 역할과 의무를 규정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의 틀을 제공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차별과 불평등을 야기하여 현대에는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 문제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라메스와람 - [지명]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 | |
공식 언어 | 타밀어 |
별칭 | 라메스와람, 라메스와람, 라메슈와람 |
지리 좌표 | 9.288° N, 79.313° E |
행정 구역 | |
국가 | 인도 |
주 | 타밀나두주 |
지구 | 라마나타푸람 지구 |
정부 유형 | 2급 지방 자치제 |
통치 기관 | 라메스와람 지방 자치제 |
면적 | |
총 면적 | 55 km² |
고도 | |
해발 고도 | 10 m |
인구 통계 | |
총 인구 (2011년) | 44,856명 |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인구 지명 | 라메스와람 마르 |
시간대 | |
시간대 | IST |
UTC 오프셋 | +5:30 |
우편 정보 | |
PIN 코드 | 623526 |
차량 등록 | |
등록 번호 | TN 65 |
웹사이트 | |
웹사이트 | 해당 없음 |
2. 전설
힌두교 신화 라마야나에 따르면, 비슈누 신의 일곱 번째 아바타르인 라마 왕자는 스리랑카에서 악마왕 라바나와 싸우는 동안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 이곳에서 시바에게 기도했다.[2] 푸라나스(힌두 경전)에 따르면, 현자들의 조언에 따라 라마는 아내 시타 및 형제 락슈마나와 함께 이곳에 링감(시바의 상징적인 상징)을 설치하고 숭배하여 브라만 라바나를 죽이는 동안 저지른 죄인 ''브라마하티야''를 속죄했다.[3] 시바를 숭배하기 위해 라마는 링감을 원했고, 그의 믿음직한 부관인 하누만에게 히말라야에서 그것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4] 하누만이 링감을 가져오는 데 시간이 더 걸렸기 때문에 시타는 근처 해변에서 모래로 링감을 만들었는데, 이 링감은 사원의 성소에 있는 링감으로도 여겨진다.[5] 라마는 람세투 다리를 건설하여 스리랑카의 탈라이만나르까지 이어지게 했다.[6]
라메스와람의 역사는 스리랑카(역사적으로는 실론)로 가는 경유지이자 라마나타스와미 사원의 존재를 중심으로 한다. 7~8세기에 세 명의 나야나르(사이비트) 성인 아파르,[1] 순다라르와 티루그나나삼반다르가 쓴 시바 찬가집 ''테바람''에 언급되었다.[2] 촐라 왕조의 왕 라젠드라 촐라 1세(1012–1040 CE)는 짧은 기간 동안 이 도시를 지배했다.[6] 자프나 왕국(1215–1624 CE)은 이 섬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라메스와람의 수호자를 의미하는 ''세투카발란''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7] 힌두교는 그들의 국교였으며, 사원에 많은 기부를 했다.[7] ''세투''는 그들의 동전뿐만 아니라 왕조의 표식으로 비문에도 사용되었다.[7]
라메스와람은 타밀나두 주 남동부, 라마나타푸람 구의 남동쪽, 본토에서 약 2km 떨어진 판반 섬(라메스와람 섬)에 위치한다.[4] 팜반 섬은 만나르 만으로 뻗어 있는 반도의 끝부분에 있으며, 스리랑카의 만나르 섬까지 약 50km 떨어져 있다.[4] 인도 본토와는 판반교로 연결되어 있으며, 첸나이와 마두라이에서 출발하는 철도 노선의 종착역 중 하나이다.[4] 라메스와람은 스리랑카와 가장 가까운 도시이며, 아담스 브리지(람세투)라고 불리는 얕은 여울로 연결되어 있다.[4]
201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라메스와람의 인구는 44,856명이며, 성비는 남성 1,000명당 여성 969명으로 전국 평균 929명보다 높았다. 6세 미만 인구는 5,022명(남성 2,544명, 여성 2,478명)이었다. 지정 카스트 및 지정 부족은 각각 인구의 6.8%와 0.03%를 차지했다. 평균 문맹률은 73.36%로 전국 평균 72.99%보다 높았다.
3. 역사
피리스타에 따르면, 델리 술탄국의 통치자 알라딘 할지의 장군인 말리크 카푸르는 14세기 초 판디아 왕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라메스와람에 도달했다.[8][9][10] 그는 이슬람교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알리아 알-딘 할지라는 이름의 모스크를 세웠다.[8][9] 델리 술탄국의 궁정 역사가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말리크 카푸르는 마두라이, 치담바람, 스리랑감, 브리다찰람, 라메스와람 및 기타 성스러운 사원 도시를 약탈하여 금과 보석의 원천이었던 사원을 파괴했다. 그는 1311년에 드와라사무드라와 판디아 왕국에서 엄청난 약탈물을 델리로 가져왔다.[3][4][5]
15세기 초, 현재의 라마나타푸람, 카무티, 라메스와람은 판디아 왕조에 포함되었다.[6] 1520 CE에 이 도시는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6] 마두라이 나약에서 분리된 세투파티스 왕조는 라마나타푸람을 통치했으며 라마나타스와미 사원에 기여했다.[6][11]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사원을 건축 앙상블로 변화시킨 무투 쿠마라 라구나타와 무투 라말링가 세투파티의 기여이다.[12] 그 후 이 지역은 18세기 중반 찬다 사히브(1740–1754 CE), 아르코트 나바브와 무함메드 유수프 칸(1725–1764 CE)의 통치를 받았다. 1795 CE에 라메스와람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게 되었고, 마드라스 관구에 합병되었다. 1947년 이후, 이 도시는 독립 인도에 속하게 되었다.[6]
1994년부터 라메스와람에는 기초 자치 단체(Municipality)가 설치되었다.
4. 지리
평균 고도는 10m이며, 섬은 61.8km2 면적에 소라 모양을 하고 있다. 면적의 74%는 바다의 존재로 인해 모래 토양이며, 북서쪽의 Palk Strait와 남동쪽의 만나르 만을 포함하여 많은 섬이 주변에 있다. 건조 열대 기후로, 연평균 강수량은 75.73mm이며,[1] 대부분 10월부터 1월까지의 북동 몬순에서 비롯된다.[1]
람세투 다리는 라메스와람과 만나르 섬 사이의 석회암 얕은 여울 연쇄로, 인도와 스리랑카 사이의 이전 육지 연결이었음을 시사한다.[2]
5. 인구 통계
이 도시에는 총 10,579가구가 있었으며, 총 16,645명의 근로자가 있었다. 근로자 구성은 다음과 같다.
2003년 빈곤선 이하(BPL) 가구는 976가구(전체 가구의 10.45%)였으며, 2007년에는 3,003가구(29.12%)로 증가했다.
2011년 종교 인구 조사에 따르면, 힌두교 신자가 87.4%로 가장 많았고, 이슬람교 신자가 4.36%, 기독교 신자가 8.13%, 시크교 신자가 0.03%, 불교 신자가 0.01%였으며, 기타 종교를 따르는 사람이 0.07%였다.
6. 행정
라메스와람은 21개 구역을 가진 3급 시이다.[6] 시의 기능은 일반, 엔지니어링, 수입, 공중 보건, 도시 계획 및 컴퓨터 부서의 6개 부서로 나뉜다. 이 모든 부서는 최고 행정 책임자인 시 공무원의 통제를 받는다. 입법 권한은 21개 구역 각각에서 1명씩 선출된 21명의 구성원으로 구성된 기구에 부여된다. 이 입법 기구는 부의장의 지원을 받는 선출된 의장이 이끈다.[7][8][9]
라메스와람은 라마나타푸람 선거구에 속하며, 5년에 한 번 타밀 나두 입법 의회 의원을 선출한다. 2021년부터 드라비다 무네트라 카자감(DMK)의 카타르바차 무투라말링감(Katharbatcha Muthuramalingam)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라메스와람은 라마나타푸람(로크 사바 선거구)의 일부이며, 현 국회의원은 인도 무슬림 연맹의 K. 나바스카니이다.
7. 경제
라메스와람은 순례 도시로, 주민 대다수는 관광 관련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서비스 부문은 1971년 70%에서 2001년 98.78%로 증가한 반면, 농업 부문은 같은 기간 23%에서 0.13%로 감소했다.[1]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전통적으로 어업이 주된 직업이었으나, 수익성이 낮아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는 추세이다.[1] 인도 국립 은행, 인디안 은행, 인도 연합 은행 등 여러 은행들이 라메스와람에 지점을 두고 있다.[2]
8. 교통 및 통신
팜반 다리는 라메스와람과 인도 본토를 연결하는 팔크 해협에 있는 캔틸레버 다리이다. 1914년에 개통된 철도 다리는 약 2065.32m 길이이며, 선박이 지나갈 수 있도록 들어올릴 수 있는 바스큘교 구간이 있다.[10] 인도 철도는 2007년 8월 12일에 완료된 프로젝트를 통해 이 다리를 광궤 열차 운행이 가능하도록 업그레이드했다. 역사적으로 다리의 두 잎은 작업자가 레버를 사용하여 수동으로 열었다.[10] 매달 약 10척의 선박(화물선, 해안 경비선, 어선 및 유조선)이 이 다리를 통과한다. 다리가 완공된 후 만다팜에서 팜반역까지 미터 궤도 선로가 부설되었으며, 여기서 철도 선로는 두 방향으로 분기되었다. 하나는 라메스와람 방향으로 약 약 10.06km 떨어진 곳으로, 다른 지선은 약 24.14km 떨어진 다누슈코디에서 끝났다. 1915년부터 1964년까지 첸나이 에그모어에서 다누쉬코디까지 보트 메일이 운행되었으며, 승객들은 실론의 탈라이마나르로 페리를 이용했다. 팜반 분기점에서 다누쉬코디까지의 미터 궤도 지선은 1964년 사이클론으로 파괴된 후 폐쇄되었다.[11]
첸나이, 마두라이, 트리치, 코임바토르, 카라이쿠디와 같은 타밀 나두의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일일 급행 열차가 운행된다.[12] 주요 목적지로 연결되는 급행 및 여객 열차도 있다.[12] 라마나타푸람-라메스와람 국도는 라메스와람과 본토를 연결하는 주요 연결 고리이다. 1914년 기차 서비스가 본토와 라메스와람을 연결하기 전에는 배가 라메스와람 섬으로 가는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다.
라메스와람 자치구는 총 52km의 도로를 가지고 있으며, 이 중 20km는 국도이다. 타밀 나두 주 교통 공사는 라메스와람을 연결하는 다양한 도시를 연결하는 일일 서비스를 운영하며, 라메스와람의 자치 버스 정류장에 컴퓨터 예약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라메스와람은 스리랑카의 탈라이마나르까지 페리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연중 운영되지는 않는다. 자프나, 카이츠, 탈라이마나르 및 콜롬보와 제한적인 대외 무역이 이루어진다.
람메스와람 TV 타워는 인도에서 가장 높은 타워 중 하나이다. 이 타워는 높이가 323m이고, 사각형 강철 기둥의 높이가 45m이며, 하단 직경이 24m에서 상단에서 6.5m로 좁아지는 원형 콘크리트 타워이다. 이 타워는 풍속 160km/h에 맞춰 설계되었다. 라메스와람에는 팜반 등대와 람메스와람 등대 두 개의 등대가 있다.
라메스와람은 인도 국영 통신 및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인 바라트 산차르 니감 리미티드(BSNL)의 카라이쿠디 통신 관할구에 속한다. BSNL은 통신 외에도 광대역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며, 릴라이언스를 포함한 다른 주요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도 있다.
9. 교육 및 공공 서비스
라메스와람에는 공립 고등학교가 남자 학교와 여자 학교 각각 하나씩 두 개가 있다. 사립 학교로는 스와미 비베카난다 비디얄라야 매트릭 고등학교, 세인트 조셉 고등 중등학교, 만다팜 판차야트 연합 9 – 학교, 마이크로 매트릭 고등학교, 스리 샹카라 비디얄라야, 홀리 아일랜드 리틀 플라워 학교, 켄드리야 비디얄라야 학교 등 7개가 있다. 알라가파 대학교 저녁 칼리지는 이 마을에 있는 유일한 대학교이며, 가장 가까운 다른 대학들은 라마나타푸람과 파라마쿠디에 있다.
이 마을의 전력 공급은 타밀나두 전력 위원회(TNEB)의 라마나타푸람 관할구에서 관리하고 분배한다. 수도 공급은 라메스와람 시에서 제공하며, 주요 시설은 남부나야키 암만 코빌, 메얌불리, 셈마다맘, 나타라자푸람에 있다. 이 시설에는 총 1430000L 용량의 고가 수조 4개가 설치되어 있다. 매일 약 6ton의 고형 폐기물이 마을 전체 4개 구역에서 수거된다. 라메스와람에는 하수 처리를 위한 하수도 시스템이 없으며, 정화조와 공중 화장실로 처리한다. 길가의 배수로는 처리되지 않은 하수를 마을 밖으로 운반하여 바다로 흘려보내거나 저지대에 모이게 한다.
라메스와람은 인도 국영 통신 및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인 바라트 산차르 니감 리미티드(BSNL)의 카라이쿠디 통신 관할구에 속한다. BSNL은 통신 외에도 광대역 인터넷 서비스와 릴라이언스를 포함한 다른 주요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를 제공한다.
10. 관광
라메스와람은 유명한 힌두교 순례지로, 매일 수천 명의 신자들이 방문한다. 신자들은 사원의 시바 신 상을 보며 ''다르샨''(상서로운 모습)을 받기 위해 모인다. 지역 전설인 지역 전설에 따르면 이 상은 라마에 의해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 도시는 라마나타스와미 사원과 함께 바드리나트, 푸리, 드와르카를 포함하는 가장 성스러운 힌두교의 ''차르 담''(4개의 신성한 장소) 중 하나이다. 상카라차르야에 의해 설립된 힌두교의 불이론 학파는 차르 담의 기원을 예언자에게 귀속시키지만, 그 기원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네 개의 수도원은 인도의 네 모서리에 위치해 있으며, 그에 딸린 사원은 북쪽의 바드리나트에 있는 바드리나트 사원, 동쪽의 푸리에 있는 자간나트 사원, 서쪽의 드와르카에 있는 드와르카디쉬 사원, 그리고 남쪽의 라메스와람에 있는 라마나타스와미 사원이다.
이념적으로 이 사원들은 힌두교의 종파, 즉 샤이비즘과 바이슈나비즘으로 나뉘지만, 차르 담 순례는 모든 힌두교인들의 행사이다. 인도의 네 방위를 순례하는 것은 평생에 한 번 이 사원을 방문하고자 하는 힌두교인들에게 신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통적으로 이 여행은 동쪽 끝의 푸리에서 시작하여 힌두 사원에서 일반적으로 수행되는 순례 방식과 같이 시계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 사원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순례지 중 하나인데, 탄자부르를 통치했던 마라타 왕은 1745년에서 1837년 사이에 마일라두투라이와 라메스와람 전역에 ''차트람'' (휴게소)를 세우고 그들을 사원에 기증했다.
10. 1. 라마나타스와미 사원

라마나타스와미 사원은 라메스와람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역사적 랜드마크이다.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이 사원은 시바 신에게 헌정된 유명한 힌두 사원이다. 이 사원은 시바가 "빛의 기둥"을 의미하는 ''조티르링가'' 형태로 숭배되는 12개의 ''조티르링가'' 사원 중 하나이다.[6] 또한 275개의 ''파달 페트라 스탈람'' 사원 중 하나이며, 가장 존경받는 세 명의 나야나르 성자(7세기 샤이비즘 성자)인 아파르, 순다라르, 캄판타르의 찬송가에서 찬양받고 있다. 현재 구조의 사원은 12세기에 판디아 왕조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 사원은 인도 내 모든 힌두 사원 중 가장 긴 회랑을 가지고 있다. 이 기둥 회랑의 너비는 약 5.18m에서 약 6.40m이고 높이는 약 7.62m이다.[7] 각 기둥은 마두라이 미낙시 암만 사원과 마찬가지로 나약 양식으로 조각되어 있다.[7] 세투파티 왕조 (17세기)의 왕들은 사원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8][7] 프라다니 무티룰라파 필라이의 재임 기간 동안 쇠퇴해가는 탑을 복원하는 데 많은 돈이 사용되었으며, 그는 초카탄 만타팜, 즉 사원의 회랑 구역을 재건했다. 스리랑카의 통치자들도 이 사원에 기여했는데, 파라크라마 바후 (1153–1186 CE)는 사원 성소 건설에 참여했다.[8][7] 동쪽 탑과 나타라자 신사는 1649 CE에 달라바이 세투파티에 의해 건설되었다.[7] 두 번째 울타리는 친나 우다야르 세투파티와 그의 아들 라구나타 티루말라이(1500–1540 CE)의 작품으로 여겨진다.[7] 세 번째 울타리는 무투 라말링가 세투파티(1725–1771 CE)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그의 동상은 회랑 입구에 위치해 있다.[7]
10. 2. 사원 탱크
라메스와람에는 64개의 티르타(성스러운 물)가 있으며, 스칸다 푸라나에 따르면 그 중 24개가 중요하다. 이 중 22개는 라마나타스와미 사원 내에 있는 탱크이다. 이 탱크에서 목욕하는 것은 라메스와람 순례의 주요 부분이며 속죄하는 것과 같다고 여겨진다.[1] 가장 중요한 것은 아그니 티르탐, 즉 바다(벵골 만)이다.[2] 자타유는 독수리/매 반신으로, 시타를 구하기 위해 라크샤사 왕 라바나와 싸우다 날개가 잘려 자타유 티르탐에 떨어졌다고 한다.[2] 빌룬디 티르탐은 문자 그대로 '묻힌 활'로 번역되며, 팜반으로 가는 길에 있는 주요 사원에서 약 7km 떨어져 있다.[2] 이곳은 라마가 시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활을 바닷물에 담근 곳으로 여겨진다.[2] 다른 주요 성스러운 물로는 하누만 티르탐, 수그리바 티르탐, 락슈마나 티르탐이 있다.[2]10. 3. 간다마타나 파르바탐
간다마타나 파르바탐은 섬에서 가장 높은 지점으로, 사원 북쪽으로 3km 떨어진 언덕에 있다. 2층 건물에는 라마의 발자국이 차크라(바퀴)에 새겨져 숭배된다.10. 4. 다누쉬코디
다누쉬코디는 섬의 최남단에 위치하며 라마에게 헌정된 코탄다라마스와미 사원이 있다.[1] 다누쉬코디는 1964년 사이클론으로 유실되었지만, 사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도시 중심에서 18km 거리에 있으며 도로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다누쉬코디는 라마야나에서 라바나의 동생인 비비샤나가 라마에게 항복한 장소이다.[1]10. 5. 힌두교 순례
라메스와람은 많은 힌두교인들에게 중요한 곳인데, 바라나시 순례는 라메스와람 순례 없이는 불완전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라마나타스와미 사원과 함께 바드리나트, 푸리, 드와르카를 포함하는 가장 성스러운 힌두교의 ''차르 담''(4개의 신성한 장소) 중 하나이다. 인도의 네 방위를 순례하는 것은 평생에 한 번 이 사원을 방문하고자 하는 힌두교인들에게 신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통적으로 이 여행은 동쪽 끝의 푸리에서 시작하여 힌두 사원에서 일반적으로 수행되는 순례 방식과 같이 시계 방향으로 진행된다.
11. 스리랑카와의 관계
라메스와람은 인도와 스리랑카 간의 국경 문제, 어업 분쟁, 난민 문제 등으로 자주 언급되는 지역이다. 특히, 국경을 넘나드는 어로 활동과 관련하여 스리랑카 해군에 의한 인도 어부 피격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1983년 스리랑카 내전 발발 이후, 인도와 스리랑카 해상 국경에서 스리랑카 해군에 의해 라메스와람 어부들이 살해되거나 체포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985년 1월에는 콜롬보행 얄데비 열차 공격으로 스리랑카 군인 22명과 민간인 1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1983년부터 2009년까지 약 381명의 어부가 해상 총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인도 정부는 어부들에게 위치 정보 시스템(GPS) 사용을 권장하고, 스리랑카 해역 진입 시 휴대폰 알림을 활성화하는 등 기술적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스리랑카 해군은 인도 해역의 어획량 감소로 인해 인도 어부들이 국경을 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하며,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인도와 스리랑카 사이에 위치한 무인도 카차티부 역시 양국 간 긴장 고조의 원인 중 하나이다.[6] 1974년 협정에 따라 양국 어부들은 이 섬에서 휴식을 취하고 어망을 손질할 수 있지만,[7] 스리랑카 해군이 인도 어부들을 공격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8]
이 외에도, 인도와 스리랑카 사이의 팔크 해협과 만나르 만을 연결하는 세투사무드람 운하 프로젝트는 힌두교 성지인 람세투(아담의 다리)를 훼손할 수 있다는 종교적, 환경적 이유로 논란이 되고 있다.
11. 1. 스리랑카 타밀 난민
1980년대 이후 스리랑카의 격렬한 내전 기간 동안, 라메스와람은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6] 2000년 기준, 타밀나두의 여러 지역에 위치한 129개의 난민 캠프에 총 65,940명의 등록된 스리랑카 난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라메스와람을 통해 입국했다.[7] 라메스와람을 통해 입국하여 만다팜 임시 캠프에 등록하고 캠프 외 타밀나두의 여러 지역에 거주하기로 선택한 비캠프 난민은 20,667명이다.[7] 1990년 3월 11일, 38척의 배를 통해 스리랑카 탈라이만나르에서 라메스와람으로 2,337명의 기록적인 수의 난민이 도착했는데, 이는 1983년 7월의 민족 폭력 사태 이후 하루 동안 도착한 최대 규모의 난민 수였다.[8] 2006년 기준, 약 200,000명의 난민이 만다팜 캠프에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9] 전 인도 총리 라지브 간디 암살 사건의 배후 중 한 명인 시바라산은 1990년 9월 12일 라메스와람 캠프에 난민으로 등록했다.[10]11. 2. 라메스와람 어업
섬이라는 특성상, 라메스와람 주민 상당수는 전통적으로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1983년 스리랑카 내전 이후, 인도와 스리랑카 해상 국경에서 스리랑카 해군에 의해 라메스와람 어부들이 살해되거나 체포되는 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1985년 1월 콜롬보행 얄데비 열차 공격으로 스리랑카 군인 22명과 민간인 16명이 사망한 후 긴장이 고조되자 라메스와람 어부들은 바다로 나섰고, 이는 1만 명의 어부 가족에게 심각한 어려움을 초래했다. 1983년부터 2009년까지 약 381명의 어부가 해상 총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가 종식된 후에도 사상자는 계속 발생하고 있다. 타밀나두 주 정부는 사망 보상금을 10만인도 루피에서 50만인도 루피 (1800USD에서 9000USD)로 인상했다. 지금까지 발생한 381건의 살인 사건 중 인도 사법부에서 기소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다.이러한 기소 미비는 인도 해상 경계선을 넘어 살해된 사람들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없고, 스리랑카 해군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인도 사법부는 외국인을 기소할 수 있는 규정을 가지고 있지만, 관련된 외교적 문제로 인해 진전이 거의 없다. 인도 정부는 어부들이 위치 정보 시스템(GPS)을 사용하고, 스리랑카 해역으로 진입할 때 휴대폰 알림을 활성화하는 등 기술 사용을 시도했다. 스리랑카 해군은 인도 해역의 어획량이 감소하여 인도 어부들이 국제 경계를 넘나드는 보고서를 확인했다.
이 지역에는 연간 45일 동안 모터보트 어업 금지령이 내려진다. 2012년 어업 금지 기간은 4월과 5월이었다. 라메스와람의 부두는 이 지역에서 어선의 가장 큰 하역 센터이며, 어부, 보트 선장, 해안 작업자 등이 고향에서 돌아오면서 금지령 해제 후 활기를 띤다.
11. 3. 카차티부 섬
인도와 스리랑카 정부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또 다른 초점은 스리랑카에 속한 무인도인 카차티부의 사용에 관한 것이다.[6] 1974년 협정에 따르면 양국 어부들은 섬에서 휴식을 취하고 그물을 담글 수 있지만,[7] 스리랑카 해군이 인도 어부들을 공격하여 사망케 하는 사건이 반복되었다.[8] 섬에서 열리는 연례 성 안토니 축제에는 양국 어부들이 모여 상호 문제를 논의한다.[9][10][11]11. 4. 세투사무드람 운하 프로젝트
세투사무드람 운하 프로젝트는 인도와 스리랑카 사이의 팔크 해협과 만나르 만을 연결하는 해운 운하 건설 프로젝트이다. 일부 단체들은 힌두교도들에게 신성하게 여겨지는 람세투(아담의 다리)를 준설하는 것에 대해 종교적, 환경적, 경제적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1] 이 프로젝트는 2010년 3월부터 인도 대법원의 명령에 의해 보류된 상태이다.12. 주요 인물
참조
[1]
웹사이트
Temple Towns of India
http://www.financial[...]
2016-05-04
[2]
뉴스
Is Ram Setu, The Land Bridge Connecting India And Sri Lanka, Manmade? Science Channel Says Yes
https://www.outlooki[...]
2017-12-13
[3]
서적
Eternal Garden: Mysticism, History, and Politics at a South Asian Sufi Center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4]
서적
A short history of South India
https://books.google[...]
Saṁskṛiti
[5]
서적
The Age of Wrath: A History of the Delhi Sultanate
https://books.google[...]
Penguin Books
[6]
웹사이트
Municipal Commissioner
https://www.tnurbant[...]
2023-08-24
[7]
웹사이트
Municipal Chairman
https://www.tnurbant[...]
2023-08-24
[8]
웹사이트
Municipal Vice Chairman
https://www.tnurbant[...]
2023-08-24
[9]
웹사이트
Appointment Committee
https://www.tnurbant[...]
2023-08-24
[10]
뉴스
TN govt gives industry status to tourism sector
https://timesofindia[...]
2023-09-27
[11]
웹인용
Temple Towns of India
http://www.financial[...]
2016-05-04
[12]
뉴스
Is Ram Setu, The Land Bridge Connecting India And Sri Lanka, Manmade? Science Channel Says Yes
https://www.outlooki[...]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