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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모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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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르 모방은 1803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829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었으나, 조선 선교를 자원하여 1836년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며 신자 수를 늘렸지만, 기해박해 때 자수하여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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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모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모방 베드로
모방 베드로
본명Pierre Philibert Maubant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
출생1803년 9월 20일
출생지바시
사망1839년 9월 21일
사망지새남터
직업사제, 순교자
축일12월 31일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시복일1925년 12월 31일
시복자교황 비오 11세
시성일1984년 12월 31일
시성자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매장지명동 대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2. 생애와 조선 입국

모방 신부는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바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출생한 날 바로 바시 성당에서 「피에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2] 이후 비르에서 중등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생 쉴피스 신학교 출신 신부들이 지도하던 바이어 교구 대신학교에 진학했다.[2] 1829년 5월 13일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가 되었으며, 비르 북서쪽의 데제르본당과 비르 남동쪽의 샹뒤블본당에서 보좌 신부로 사목했다.

1831년(순조 31년) 모방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이듬해 중국 사천교구 선교사로 임명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천주교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 조선선교사가 되기로 자원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국경의 감시가 심하여 만주에 머물렀다.[2] 소설가 박목원이 쓴 《새남터》(독서문화)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글들을 읽고 조선에서 같이 활동하고 싶어한 것으로 묘사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뇌일혈로 선종하자, 모방은 혼자 삿갓에 상복 차림을 하고 1836년 1월 12일(1835년 음력 11월 24일) 조신철, 정하상 등의 인도로 압록강을 건너 입국하였고 15일 뒤에는 한양에 도착했다.[1]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최초로 조선 땅을 밟은 사람이다.[1] 그는 조선어를 공부하며 먼저 경기도충청도 교우촌을 방문하여 200여 명에게 영세를 주었다.[1]

2. 1. 프랑스에서의 성장과 사제 서품

모방 신부1803년 9월 20일 프랑스 바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톨릭신문 정병일 기자에 따르면, 모방 신부는 출생한 날 바로 바시 성당에서 「피에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2] 이후 비르에서 중등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생 쉴피스 신학교 출신 신부들이 지도하던 바이어 교구 대신학교에 진학했다.[2] 1829년 5월 13일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가 되었으며, 비르 북서쪽의 데제르본당과 비르 남동쪽의 샹뒤블본당에서 보좌 신부로 사목했다.

2. 2. 조선 선교사 자원

1831년(순조 31년) 모방 신부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이듬해 중국 사천교구 선교사로 임명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천주교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 조선선교사가 되기로 자원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국경의 감시가 심하여 만주에 머물렀다.[2] 소설가 박목원이 쓴 《새남터》(독서문화)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글들을 읽고 조선에서 같이 활동하고 싶어한 것으로 묘사했다.

2. 3. 조선 입국

브뤼기에르 주교가 병(뇌일혈)으로 선종하자, 모방은 혼자 삿갓에 상복 차림을 하고 1836년 1월 12일(1835년 음력 11월 24일) 조신철, 정하상 등의 인도로 압록강을 건너 입국하였고 15일 뒤에는 한양에 도착했다.[1]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최초로 조선 땅을 밟은 사람이다.[1] 그는 조선어를 공부하며 먼저 경기도충청도 교우촌을 방문하여 200여 명에게 영세를 주었다.[1]

3. 조선에서의 사목 활동

모방 신부는 조선에서 사목 활동을 하면서 한자에 능통하여 이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었다.[1] 샤스탕 신부와 함께 조선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조선의 천주교 신도 수를 약 6천 명에서 9천 명 이상으로 늘리는 데 기여했다.

3. 1. 초기 사목 활동

그는 언제나 전신에 상복 차림을 하고 다녔다. 한자에 능통했으므로, 주로 한자나 통역사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었다.[1] 그와 그에 이어 입국한 샤스탕 신부는 누추한 움막에서 살며 산나물잡곡밥을 먹는 등 조선의 낯선 환경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1] 그는 결국 중병에 걸려 샤스탕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았으나, 3개월 후 질병은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다.[1]

3. 2. 샤스탕 신부와의 협력

샤스탕 신부와 함께 조선의 천주교 신도 수를 약 6천 명으로 추산했다. 두 선교사는 여러 산의 주로 격지에다가 선교 기지를 설립하고 빈번히 그곳들을 방문했다. 각각의 선교지에서 교리 교사를 임명했다. 1837년 한 해 동안만 해도, 1,237 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2,087 명에게 고해성사를 들었으며, 1,950 명에게 영성체를 분배했다. 그리하여 조선의 천주교 신자 수를 6천여 명에서 9천여 명 이상으로 증가시켰다.

4. 기해박해와 순교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외국인 천주교 사제의 존재는 민중들은 물론 관리들에게도 알려졌다. 조선 조정선교사들을 찾기 위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고문했다. 앵베르 주교자수하는 것이 신자들에게 미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 요한복음을 인용하며 자수를 권유했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앵베르 주교의 권유에 따라 9월 6일 홍주 근처에서 대기 중인 포졸들에게 자수하였으며, 9월 21일 한강새남터에서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와 함께 참수된 후 군문효수되었다.[1] 모방 신부는 프랑스인 선교사로 순교할 당시 35세였다.[1]

세 명의 유해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 걸쳐 있는 삼성산에 묻혔다가 훗날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로 이장되었다.[1] 절두산 순교성지와 삼성산 성지에도 일부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며, 1989년 축성식을 가진 삼성산 성지는 성지 본당인 삼성산 성당에서 관리하고 있다.[1]

4. 1. 기해박해

외국 천주교 사제의 존재는 민중들을 비롯하여 관리들에게까지 알려졌다. 조선 조정선교사들을 찾기 위해 많은 천주교 교인들을 고문했다. 앵베르 주교자수하는 것이 교우들에게 미치는 해악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 "착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라며 요한복음서를 인용하여 자수를 권유했다.

4. 2. 자수와 순교

1839년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앵베르 주교의 권면에 따라 9월 6일 홍주 근처에서 대기 중인 포졸들에게 자수하였으며, 9월 21일(음력 8월 14일) 한강새남터에서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와 함께 참수된 후 군문효수되었다.[1] 모방 신부는 프랑스인 선교사로 순교할 당시 35세였다.[1]

세 명의 유해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 걸쳐 있는 삼성산에 묻혔다가 훗날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로 이장되었다.[1] 절두산 순교성지와 삼성산 성지에도 일부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며, 1989년 축성식을 가진 삼성산 성지는 성지 본당인 삼성산 성당에서 관리하고 있다.[1]

5. 시복과 시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와 모방 베드로 신부, 샤스탕 야고보 신부1925년 7월 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의 집전으로 시복식을 통해 복자가 되었고,[7][8]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 미사 중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이 되었다.

6. 기타 논란

피에르 모방이 한국교회사 최초의 서양인 천주교회 신부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임진왜란조선에 일본군 군종사제로 입국한 세스페데스 신부가 이미 있기 때문이다. 다만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서는 최초이다.

6. 1. 최초의 서양인 천주교 신부인가?

피에르 모방이 한국교회사 최초의 서양인 천주교회 신부인지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다. 임진왜란 때 서양인 천주교회 신부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 일본군 군종사제로 입국한 일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다만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서는 최초이다.

참조

[1] 웹인용 절두산 순교성지 성인 유해실 http://www.jeoldusan[...] 2022-02-25
[2] 웹인용 GoodNews 가톨릭정보 http://maria.catholi[...] 2018-01-22
[3] 웹인용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아이처럼 즐겁게 형장으로, 천국으로 http://h21.hani.co.k[...] 2018-01-28
[4] 웹인용 GoodNews 가톨릭정보 http://maria.catholi[...] 2018-01-22
[5] 저널 역사탐방 : 민족혼의 제단에 바친 밀알 - 김대건과 민영환 - http://kiss.kstudy.c[...] 대한지방행정공제회 2016-02-13
[6] 서적 김대건 계몽사
[7]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4-11-02
[8] 뉴스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http://www.pbc.co.kr[...] 평화방송 201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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