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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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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간의 평화(Välirauha)는 1940년 3월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겨울 전쟁이 끝난 후 1941년 6월 핀란드가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계속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핀란드는 이 기간 동안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소련의 압박과 나치 독일과의 협력 심화로 인해 결국 전쟁에 다시 휘말리게 되었다. 핀란드는 북유럽 국방 동맹을 시도하고, 스웨덴과의 연합을 모색했지만, 소련과 독일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한편, 핀란드는 독일과의 군사 협력을 강화하며 바르바로사 작전 준비에 참여했고, 1941년 6월 소련의 공습으로 인해 계속 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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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의 평화
개요
명칭막간의 평화
다른 이름밸리라우하 (Välirauha, 핀란드어)
기간1940년 3월 13일 - 1941년 6월 25일
이전겨울 전쟁
다음계속 전쟁
배경
원인겨울 전쟁의 종결
결과모스크바 평화 조약 체결
사건
주요 사건핀란드의 대소련 관계 악화
핀란드의 나치 독일과의 협력
소련의 핀란드에 대한 정치적 압박 증가
영향
결과계속 전쟁 발발
핀란드의 영토 일부 상실 (카렐리야 등)
핀란드의 국내 정치 변화
기타
관련 인물리스토 뤼티 (당시 핀란드 대통령)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핀란드 원수)
요시프 스탈린 (소련 지도자)

2. 배경

1939년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겨울 전쟁1940년 3월 12일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 체결 시점부터 1941년 계속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핀란드에서는 '막간의 평화'(Välirauhafi)라고 부른다.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 후 세력권 확장을 노리던 소련핀란드에 영토 할양 등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를 했고, 핀란드가 이를 거부하자 1939년 11월 30일 침공하여 겨울 전쟁을 일으켰다. 국제 사회의 실질적인 도움 없이 고군분투한 핀란드는 결국 소련에 불리한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핀란드는 비푸리를 포함한 영토의 상당 부분과 산업 능력의 일부를 상실했으며, 약 42만 명에 달하는 카렐리아 지역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이주해야 했다. 핀란드 국민들은 이 조약을 매우 부당하게 여겼고, 상실한 영토 회복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었다. 이러한 가혹한 평화 조건과 언제 다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이 시기는 완전한 평화가 아닌 잠시 멈춘 전쟁 사이의 기간으로 인식되었고 '막간의 평화'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2. 1. 독소 불가침 조약과 겨울 전쟁

1940년 핀란드 스키부대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은 소련나치 독일의 관계를 명확히 했다. 이 조약을 통해 소련은 전쟁 발발 시 동유럽에서 전략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발트 3국핀란드에 압력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발트 3국은 곧 소련의 기지 설치 및 부대 이동 권한 요구에 굴복했지만, 핀란드는 이를 계속 거부했다. 외교적 압박이 실패하자 소련은 무력 사용을 결심했고, 1939년 11월 30일 핀란드를 침공하여 겨울 전쟁을 시작했다.

겨울 전쟁핀란드인들에게 국제 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했다. 국제 연맹과 세계 여러 나라의 비난은 소련의 정책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듯 보였다. 스웨덴은 자원 봉사자들의 핀란드 군대 합류는 허용했지만, 군사적 지원은 보내지 않았고 프랑스영국 군대의 자국 영토 통과도 거부했다. 이들 국가가 약속했던 지원 병력 규모도 실제로는 미미했다. 심지어 핀란드우익 극단주의자들조차 나치 독일이 전혀 도움을 주지 않고 오히려 다른 나라들의 물질적 지원을 방해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겨울 전쟁은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나, 핀란드에서는 이 조약이 크나큰 불의로 여겨졌다. 비푸리(핀란드의 주요 도시[1])를 포함하여 협상 테이블에서 잃은 것이 실제 전장에서의 손실보다 더 심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영토의 9%와 산업 생산 능력의 5분의 1을 상실했다. 잃어버린 영토에 살던 핀란드 인구의 12%에 해당하는 42만 명 이상이 새로운 국경의 핀란드 쪽으로 이주했으며, 원래 살던 곳에 남은 사람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2. 2. 모스크바 평화 조약 이후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 따라 핀란드가 소련에 할양한 영토


1940년 3월 12일에 서명된 모스크바 평화 조약은 핀란드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는 1930년대 핀란드의 외교 정책이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핀란드는 과거 국제 연맹이 구축한 세계 질서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의 우호 관계에 의존했으나, 이제는 구속력 있는 양자 조약을 추구하고 소비에트 연방이나 나치 독일과 같은 이념적 적대국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핀란드는 특히 다음과 같은 국가들과 더 가깝고 개선된 관계를 모색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시도는 소비에트 연방의 견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소련은 핀란드가 자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을 경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전개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핀란드 여론은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핀란드령 카렐리아를 떠나야 했던 인구의 12%가 고향을 되찾기를 강하게 열망했다. 많은 이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열릴 강화 회의에 희망을 걸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가혹한 평화 조약 이후 '막간의 평화'(Välirauhafi)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1940년 6월 막간의 평화 기간 동안 탐페레의 Hämeenkatu 거리 교통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 항의하며 두 명의 장관이 사임하자, 뤼티 총리는 즉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해야 했다. 국민적 합의를 넓히기 위해 극우 성향의 IKL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참여했다.

리스토 뤼티


가장 임명하기 어려웠던 자리는 외무부 장관이었는데, 뤼티와 만네르헤임은 먼저 런던 주재 핀란드 대사인 G. A. 그리펜베르크를 고려했으나, 그리펜베르크 자신이 베를린에서 인기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롤프 비팅이 선택되었다. 비팅은 상대적으로 덜 친영국적이었고 나치 독일 및 소비에트 연방과의 관계 개선에 더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롤프 비팅


평화 조약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확대, 식량 부족, 군대의 열악한 상태 등으로 인해 전쟁의 긴장감은 가시지 않았다. 언론 검열은 계속되었으며, 특히 모스크바 평화 조약 비판이나 반소련적 의견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었다.

퀴외스티 칼리오 대통령은 만네르헤임에게 대장 직위를 유지하며 군대 재건과 새로운 국경 요새화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평화 조약 체결 일주일 만에 요새화 작업이 시작되었고, 첫 번째로 사이마호를 따라 1200km 길이에 달하는 살파선("볼트 라인") 구축이 시작되었다.

여름과 가을에 걸쳐 겨울 전쟁 중 구매하거나 기증받은 군수 물자가 도착했지만, 만네르헤임이 군 상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1940년 군사비 지출은 국가 예산의 45%까지 증가했으며, 군수품 구매가 민간 수요보다 우선시되었다. 만네르헤임의 강력한 지위와 지속적인 전쟁 준비는 군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데 기여했지만, 때로는 민간 정부와 충돌하는 이중 정부와 같은 문제를 낳기도 했다.

'''철반지'''는 핀란드가 겨울 전쟁, 특히 모스크바 평화 이후 방공의 필요성을 위해 군사 장비를 구매하기 위해 금반지를 기증한 대가로 핀란드인이 받은 반지이다. 약 315,000명의 핀란드인이 금반지를 "철반지"로 교환했다.


모스크바 평화 조약 발효일인 3월 13일, 영국 경제전쟁부(MEW)는 핀란드와의 우호 관계 확보를 위해 신속히 협상을 시작할 것을 외무부에 요청했다. MEW의 찰스 조셀린 햄브로(Charles Jocelyn Hambro)는 핀란드와의 전쟁 무역 조약 체결 권한을 부여받고 4월 7일 헬싱키로 향했다.

햄브로와 리스토 뤼티는 이미 서신을 교환하며 기본적인 조약 내용에 합의를 보았다. 무역 재개를 갈망했던 핀란드는 첫 회의에서 제시된 예비 조약을 즉시 수락했다. 이 조약은 핀란드가 군수품 및 기타 필요 물자를 받는 대가로 전략 물자를 영국에 수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햄브로는 이 조약이 최종 승인을 받아야 공식화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결국 다음 날 나치 독일노르웨이를 침공하면서 영국과의 교역로는 차단되었고, 이 조약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3. 핀란드의 외교적 노력

겨울 전쟁 이후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인해 상당한 영토를 상실하고 국제적으로 고립된 핀란드는 국가의 생존과 안보를 위해 새로운 외교적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 이 시기 핀란드는 주변 강대국들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각적인 외교적 노력을 펼쳤다.

우선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과의 연대를 통해 지역 안보를 강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소련의 반대와 나치 독일스칸디나비아 침공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한편, 모스크바 평화 조약의 이행 과정에서 소련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긴장 상태에 놓였으며, 소련은 다양한 방식으로 핀란드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갔다.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영국 역시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황 속에서 소련과의 협력을 우선시하며 핀란드의 안보 우려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외교적 고립과 소련의 위협 속에서 핀란드는 생존을 위해 나치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게 된다.

3. 1. 북유럽 국방 동맹 시도

노르웨이 침공 첫 날, 오슬로로 진군하는 독일군.


겨울 전쟁이 끝날 무렵, 핀란드의 배이뇌 탄네르와 스웨덴의 페르 알빈 한손은 지역 안정을 위해 노르웨이덴마크까지 포함하는 북유럽 방위 동맹의 가능성을 논의했다. 이 구상은 3월 15일 핀란드 의회에서 논의하기 위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곧바로 난관에 부딪혔다. 3월 29일, 소비에트 연방은 이 동맹이 겨울 전쟁을 종결시킨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설상가상으로 나치 독일덴마크노르웨이를 침공(노르웨이 전역)하면서, 핀란드가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도 핀란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던 더 작은 규모의 스칸디나비아 방위 연합 구상마저 완전히 무산되었다. 결국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군사적 행동으로 인해 핀란드를 포함한 북유럽 국가들의 자체적인 안보 강화 노력은 좌절되었다.

3. 2. 소련과의 관계

모스크바 평화 조약의 이행 과정은 핀란드인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국경 획정 과정에서 소련 측 위원들은 핀란드 영토로 간주되던 스베토고르스크 산업 지역 문제나, 핀란드가 철수하며 가져간 기계 및 철도 차량의 반환 요구, 어업권 및 사이마 운하 이용 문제 등에서 경직된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소련의 태도는 핀란드 내에서 소련의 의도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새로 부임한 헬싱키 주재 소련 대사 이반 조토프는 외교적으로는 능숙했지만, 핀란드 내에서 소련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그는 여러 차례 본국 외무부에 핀란드를 완전히 합병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1940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소련은 핀란드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였다.

핀란드는 협상을 통해 시간을 벌려 했으나, 결국 1940년 9월 6일 소련의 군사 통과권을 인정했고, 10월 11일에는 올란드 제도의 비무장화에 합의했다. 페차모 광산 문제에 대한 협상은 계속되었다.

1940년배이뇌 탄네르


한편, 1940년 5월 22일에는 핀란드 공산당의 주도로 친소련 단체인 '핀란드-소련 평화 및 우호 협회'가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소련 대사관과 긴밀히 협력하며 소련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핀란드 정부와 군대를 비판했다. 협회는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여 한때 회원 수가 3만 5천 명에 달했으며, 1940년 8월에는 거의 매일 폭력 시위를 조직했다. 핀란드 정부는 소련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협회 간부들을 체포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고, 결국 이 단체는 1940년 12월 해체되었다.

소련은 핀란드 내정에 직접적으로 간섭하기도 했다. 소련은 겨울 전쟁 당시 내각 각료였으며 반소련 성향으로 간주된 배이뇌 탄네르의 사임을 요구했다. 탄네르는 공개 연설에서 '핀란드-소련 평화 및 우호 협회'를 제5열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으나, 결국 1940년 8월 15일 사임했다. 이후 리스토 뤼티 총리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소련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밝혔다.

1940년퀴외스티 칼리오 대통령


1940년 8월 28일, 퀴외스티 칼리오 대통령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직무 수행이 불가능해졌다. 그가 11월 27일 사임 의사를 밝히자, 소련은 칼 구스타브 에밀 만네르헤임 남작과 같이 반소련적인 인물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경우 모스크바 평화 조약 위반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발트 3국이 소련에 의해 점령당했던 과정을 떠올리게 했고, 핀란드 국민들 사이에서는 소련의 다음 목표가 핀란드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커져갔다.

3. 3. 영국과의 관계

모스크바 평화 조약 이후 핀란드는 기존 외교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며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1940년 여름부터 영국의 외교 정책 우선순위가 바뀌면서 핀란드의 기대는 실현되기 어려웠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면서 영국은 나치 독일에 맞서기 위해 소련의 지원을 확보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를 위해 처칠 정부는 노동당 내 좌파 성향으로 알려진 스태퍼드 크립스 경을 모스크바 주재 대사로 임명했다.

스태포드 크립스 경 (1947년)


크립스는 겨울 전쟁 당시 소련이 핀란드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꼭두각시 정부인 핀란드 민주공화국(이른바 테리요키 정부)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핀란드 대사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에게 "핀란드가 발트 3국처럼 소련에 합병되기를 원하지 않느냐"고 묻는 등 핀란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또한 핀란드 대통령 퀴외스티 칼리오를 부유한 농민을 뜻하는 러시아어 단어인 "쿨라크"라고 부르며 비하했고, 북유럽 국가들의 사회 민주주의를 "반동적"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크립스의 이러한 발언들은 영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었으며, 영국 외무부는 그의 발언에 대해 핀란드 대사 그리펜베르크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영국의 기본적인 외교 노선은 핀란드의 안보 우려보다는 소련과의 협력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영국은 핀란드스웨덴이 군사적으로 협력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했으며, 1941년 3월나치 독일의 영향력이 노골화되기 전까지는 소련이 핀란드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사실상 묵인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핀란드는 영국의 정책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핀란드의 대외 무역은 영국 해군의 해상 통제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영국은 소련과의 관계를 의식하여 핀란드 관련 무역 허가를 내주는 데 매우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페차모 지역의 니켈 광산을 둘러싼 협상 과정에서도 영국의 이러한 태도가 나타났다. 영국 외무부는 해당 광산의 개발권을 보유하고 있던 영국-캐나다 합작 회사에 압력을 넣어 면허를 "일시적으로" 포기하도록 했다. 이는 생산된 니켈 광석이 나치 독일로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는 조건 아래, 소련이 광산을 관리하려는 시도를 외교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핀란드의 경제적 이익보다는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한 결정으로 평가받는다.

3. 4. 나치 독일과의 관계 개선

1940년 4월 9일, 나치 독일스칸디나비아 침공 작전인 베저위붕 작전 이후, 핀란드는 서방의 전통적인 무역 시장으로부터 물리적으로 고립되었다. 핀란드를 오가는 해상 항로는 이제 독일 해군에 의해 통제되었다. 발트해 출구가 봉쇄되었고, 북쪽으로는 로바니에미에서 페차모의 부동항까지 이어지는 비포장 북극 도로가 유일한 통로였으나, 이마저도 독일이 점령한 노르웨이 해안을 길게 통과해야 했다. 핀란드스웨덴처럼 점령은 피했지만, 사실상 나치 독일소련에 의해 포위된 형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네르헤임 원수의 지원 아래 자원 부대가 조직되어 노르웨이 전역에서 독일군에 맞서 싸우기도 했으나, 독일군이 해당 지역을 점령하자 핀란드로 돌아왔다.

칼 구스타브 에밀 만네르헤임 남작 (1940년)


특히 비료 수입 중단은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인한 경작지 손실, 겨울 전쟁 후 피난 과정에서의 가축 손실, 1940년 여름의 악천후와 맞물려 식량 생산량을 예상 수요의 3분의 2 이하로 급감시켰다. 일부 부족분은 스웨덴소련에서 구매할 수 있었지만, 소련은 배송 지연을 통해 핀란드에 압력을 가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핀란드는 나치 독일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나치 독일은 전통적으로 발트해 지역에서 러시아에 대한 균형추 역할을 해왔기에, 아돌프 히틀러제3제국이 침략적인 성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핀란드는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독일의 노르웨이 점령과 연합군의 노르웨이 북부 철수 이후, 독일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1940년 5월 9일, 핀란드는 독일에 무기 구매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독일은 논의 자체를 거부했다.

하지만 1940년 5월부터 핀란드는 1930년대 말 악화되었던 독일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핀란드는 나치-소련 관계의 취약성과 양국 국민 간의 개인적인 친분(스포츠, 과학, 산업, 군사 분야)에 기대를 걸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1940년 6월, 외교적 수완이 뛰어난 전 총리 토이보 미카엘 키비매키베를린 주재 대사로 임명했다. 핀란드 언론은 독일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고 정부의 방침에 협조했으며, 반대 의견은 검열되었다. 이는 당시 반(反)나치 성향이 강했던 스웨덴 언론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프랑스 공방전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1940년 6월 말 스톡홀름 주재 핀란드 대사는 영국이 곧 독일과 평화 협상을 할 수도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을 통해 승전국과의 우호 관계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던 핀란드는 독일에 대한 접근을 더욱 강화했다.

독일의 태도 변화는 1940년 7월 말, 독일 외무부 장관의 비밀 대표 루트비히 바이사우어가 핀란드를 방문하면서 나타났다. 그는 만네르헤임리티에게 소련에 대항하여 자국을 방어할 의지가 있는지 물었다. 만네르헤임은 추가 무기 지원 없이는 핀란드군이 몇 주밖에 버틸 수 없다고 답했다. 바이사우어는 별다른 약속 없이 돌아갔다.

아돌프 히틀러칼 구스타브 에밀 만네르헤임 남작


핀란드는 몰랐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프랑스 침공 성공 이후 소련 침공 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핀란드에 큰 관심이 없던 히틀러는 이제 핀란드를 작전 기지로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1940년 8월 첫 주, 독일은 소련의 즉각적인 핀란드 공격 가능성을 우려하며 핀란드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해제했고, 겨울 전쟁 중 중단되었던 무기 지원이 재개되었다.

1940년 8월 18일, 헤르만 괴링의 대표이자 무기 상인인 요제프 벨트옌스가 핀란드를 방문했다. 그는 리티만네르헤임과 만나 무기 및 기타 물자 지원을 대가로 독일군이 핀마르크 (북부 노르웨이)와 보트니아만 항구 사이를 통과할 수 있는 권리를 협상했다. 처음에는 스웨덴을 경유했으나 나중에는 핀란드로 직접 수송되었다. 이 협정은 나치 독일에게는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위반이었고, 핀란드에게는 모스크바 평화 조약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당시 병석에 있던 퀴외스티 칼리오 대통령이 이 사실을 제대로 보고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2]

핀란드 내에서는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 대한 불만이 컸기 때문에, 독일과의 관계 강화 및 협력은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여겨졌다. 검열된 언론은 핀란드의 외교 노선 변경을 지지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소련과의 한코 임차 지역 병력 이동 협정 당시 소련 측이 의회 논의나 투표 없이 비밀리에 처리할 것을 요구했던 선례는, 핀란드 정부가 독일과의 군대 수송 협정을 1940년 9월 21일 첫 독일군이 바사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비밀로 유지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독일군의 도착은 소련의 위협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던 핀란드 국민들에게 대체로 환영받았다. 대부분의 반대 의견은 수송 자체보다는 협정 체결 방식의 비밀주의에 집중되었으며, 국민들은 협정의 구체적인 내용을 거의 알지 못했다. 독일군의 주둔은 소련의 추가적인 위협에 대한 억제력이자, 소련군에게 부여된 수송권에 대한 균형추로 인식되었다. 독일군 수송 협정은 1940년 11월 21일 더욱 확대되어, 부상병과 휴가 병력의 투르쿠 경유 수송까지 허용되었다. 독일군은 바사오울루에서 일리토르니오와 로바니에미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 카레수반토, 킬피스예르비, 이발로, 페차모를 거쳐 노르웨이 북부의 스키보튼과 키르케네스까지 이어지는 철도 노선을 따라 숙소, 보급 기지 등을 건설했다. 또한 독일은 겨울철 도로 개선 및 신규 도로 건설(이발로-카라쇼크) 자금을 지원했다.

1940년 10월 23일, 리티, 만네르헤임, 국방장관 발덴, 참모총장 하인리히스 등 핀란드 지도부는 독일의 호의를 얻기 위해 라플란드 지역의 핀란드 방어 계획 정보를 독일군에게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정보가 소련 측에 유출될 위험을 감수한 결정이었다.

1940년 11월 12일,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그는 독일에게 핀란드 지원 중단과 함께 발트 국가들과 유사하게 핀란드를 처리할 권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북유럽에서 새로운 군사적 충돌은 원치 않는다며 이를 거절했다. 이후 비공식 경로를 통해 핀란드 측은 "핀란드 지도자들은 평화롭게 잠들 수 있다. 히틀러가 핀란드 위에 우산을 폈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4. 전쟁으로의 길

1940년 가을, 핀란드 군 지도부는 겨울 전쟁 이후 부족해진 군수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나치 독일 및 독일 점령지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이는 소련의 지속적인 압력 속에서 새로운 협력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다. 만네르헤임 원수는 1941년 1월 7일, 헤르만 괴링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베저위붕 작전 당시 노르웨이에서 독일군이 노획한 핀란드 포병 장비의 반환을 요청하기도 했다.

같은 달 파보 탈벨라 소장은 독일을 방문하여 OKH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 대장과 괴링을 만나 소련의 재침공 가능성에 대비한 핀란드의 방어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독일 측은 겨울 전쟁의 경험 공유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초기 접촉은 이후 본격적인 군사 협력으로 나아가는 배경이 되었다.

한편, 핀란드 국내 정치에도 변화가 있었다. 건강 문제로 퀴외스티 칼리오 대통령이 사임하고, 1940년 12월 19일 리스토 뤼티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월 4일에는 요한 빌헬름 랑겔이 새 정부를 구성했는데, 이 내각에는 나치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의식하여 극우 성향의 애국 인민 운동(IKL)이 포함되었다. 이는 핀란드가 점차 독일과의 협력으로 기울어가는 국내외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4. 1.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준비



아돌프 히틀러프랑스 공방전에서 승리한 후 소련 침공 계획(바르바로사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겨울 전쟁 전에는 핀란드에 관심이 없었으나, 이제 핀란드를 작전 기지로 활용하고 핀란드군의 군사적 가치까지 고려하게 되었다. 1940년 8월 첫 주, 독일은 소련의 핀란드 공격 가능성을 우려하여 무기 금수 조치를 해제하고 겨울 전쟁 중 중단되었던 무기 지원을 재개했다.

같은 해 8월 18일, 헤르만 괴링의 대리인인 무기 상인 요제프 벨트옌스가 핀란드를 방문하여 리스토 뤼티 대통령과 만네르헤임 원수와 협상했다. 협상 결과, 독일은 무기와 기타 물자를 제공하는 대가로 보트니아만 항구와 북부 노르웨이의 핀마르크 사이에서 독일 국방군 수송 권리를 확보했다. 처음에는 스웨덴을 통해 무기가 운송되었으나 나중에는 핀란드로 직접 전달되었다. 이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당시 퀴외스티 칼리오 대통령이 병환으로 인해 이 사실을 보고받았는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2]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핀란드에게 독일과의 관계 강화 및 협력 증진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여겨졌다.

9월 21일 첫 독일군이 바사 항구에 도착했으며, 핀란드 정부는 이 군대 수송 협정을 비밀리에 진행했다. 독일군의 주둔은 소련의 추가 위협에 대한 억제책이자 소련군 수송권에 대한 균형추로 여겨져 핀란드 국민들에게 대체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11월 21일, 협정은 부상병과 휴가 중인 병사들이 투르쿠를 통해 수송될 수 있도록 확대되었다. 독일군은 바사오울루에서 일리토르니오와 로바니에미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 카레수반토, 킬피스예르비, 이발로, 페차모를 거쳐 노르웨이의 스키보튼과 키르케네스에 이르는 철도 노선을 따라 숙소, 보급 기지 등을 건설했다. 또한, 독일은 겨울 도로 개선 및 신규 도로 건설 자금을 지원했다.

1940년 10월 23일, 뤼티, 만네르헤임 등 핀란드 지도부는 라플란드 지역의 핀란드 방어 계획 정보를 독일 국방군에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11월 12일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베를린을 방문하여 핀란드에 대한 독일의 지원 중단과 발트 국가와 유사한 취급을 요구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부하며 북유럽에서의 새로운 군사 활동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공식적으로 핀란드 측은 "히틀러가 핀란드 위에 우산을 폈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1941년 5월/6월,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의 유럽 상황


1940년 가을부터 핀란드 장군들은 물자 구매를 위해 독일과 독일 점령지를 방문했다. 1941년 1월 7일, 만네르헤임 원수는 괴링에게 개인 서한을 보내 노르웨이에서 노획된 핀란드 포병 장비 반환을 요청했다. 1월 15일부터 18일까지 파보 탈벨라 소장은 OKH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 대장과 괴링을 만나 핀란드의 방어 계획에 대해 논의했으며, 독일 측은 겨울 전쟁 경험에 대한 발표를 요청하기도 했다.

핀란드 참모총장 하인리히스 중장은 1월 30일부터 2월 3일까지 베를린을 방문하여 공식적으로는 겨울 전쟁 경험 강연을 했으나, 실제로는 할더와 회담했다. 이 자리에서 할더는 소련에 대한 독일의 공격 가능성을 시사했고, 하인리히스 중장은 핀란드의 동원 능력과 방어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페차모의 니켈 광산을 둘러싼 소련과의 갈등이 고조되던 중, 2월 1일 독일은 소련이 무르만스크에 선박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히틀러는 소련이 핀란드를 공격할 경우 즉시 페차모를 점령하도록 작전명 렌티어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2월 18일부터 3월 3일까지 부센하겐 대령이 핀란드를 방문하여 라플란드 지형과 기후 정보를 수집하고 핀란드 군 지도부와 잠재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또한 1940년 12월부터 논의된 핀란드 무장친위대 자원 대대 창설이 1941년 5월 징집과 함께 구체화되었고, 이는 독일의 핀란드 지원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여겨졌다.

1941년 2월부터 4월까지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비밀리에 준비하면서, 군사력 증강이 영국 침공(바다사자 작전) 준비나 훈련 목적이라는 등 허위 정보를 퍼뜨렸다. 5월 5일에는 특사 루드비히 바이사우어를 보내 전쟁이 1942년 봄까지는 시작되지 않을 것이라고 핀란드 측을 안심시키기도 했다. 5월 30일에는 아이로 장군이 독일의 요청으로 여러 국경 수정안을 작성했는데, 이는 실제 협상 목적보다는 핀란드의 바르바로사 작전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5월 20일부터 24일까지 독일 외무부 특사 카를 슈누레가 핀란드를 방문하여 핀란드 참모 장교들을 잘츠부르크 협상에 초대하면서, 양국 간의 군사 협력 논의는 더욱 구체화되었다.

4. 2. 핀란드의 군사적 준비



모스크바 평화 조약 이후에도 제2차 세계 대전의 확대, 식량 부족, 군대의 열악한 상황 등으로 인해 핀란드의 전쟁 준비는 계속되었다. 퀴외스티 칼리오 대통령은 만네르헤임 원수에게 군 통수권 유지, 군대 재정비, 새로운 국경 요새화 등의 임무를 맡겼다. 평화 조약 체결 일주일 후부터 사이마호 인근에 1200km 길이의 살파 선 요새 구축 작업이 시작되었다.

1940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겨울 전쟁 중 구매하거나 기증받은 군수 물자가 도착했지만, 만네르헤임이 군의 상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까지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군사비 지출은 1940년 국가 예산의 45%까지 증가했으며, 군수품 조달이 민간 수요보다 우선시되었다. 이러한 군사력 강화 노력은 군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데 기여했지만, 때로는 민간 정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프랑스 공방전에서 승리한 아돌프 히틀러소련 침공 계획(바르바로사 작전)을 세우기 시작하며 핀란드를 전략적 파트너로 간주하게 되었다. 1940년 8월, 나치 독일소련의 공격 가능성을 이유로 핀란드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해제하고 겨울 전쟁 중 중단되었던 무기 지원을 재개했다.

1940년 8월 18일, 헤르만 괴링의 특사 조셉 벨첸스가 핀란드를 방문하여 리스토 뤼티 대통령, 만네르헤임 원수와 핀란드 북부 및 보트니아만을 경유하는 독일군 이동권 및 군수물자 수송에 대해 협상했다. 이 협정은 처음에는 스웨덴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나중에는 핀란드로 직접 수송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이는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었으며, 당시 건강이 악화된 칼리오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3]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 대한 불만과 소련의 지속적인 압박 속에서 핀란드나치 독일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독일군 이동 협정은 의회 논의 없이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9월 독일군이 바사 항에 도착하면서 핀란드 국민들의 불안감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핀란드인들은 협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했지만, 독일군의 주둔을 소련의 위협에 대한 억제력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11월에는 투르쿠를 경유하는 독일군 부상자 및 휴가자 수송이 허용되는 등 협정이 강화되었고, 독일은 핀란드 북부 철도 노선을 따라 병참 기지를 건설하고 도로망을 개선했다.

1940년 10월 23일, 뤼티, 만네르헤임 등은 라플란드 지역의 핀란드 방어 계획 정보를 독일군에게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소련에 발각될 위험을 감수하는 결정이었다.

1940년 가을부터 핀란드 장군들은 군수 물자 확보를 위해 여러 차례 독일과 독일 점령지를 방문했다. 파보 탈벨라 소장은 1941년 1월 OKH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 대장 및 괴링과 만나 핀란드의 방어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1941년 1월, 소련과의 페차모 니켈 광산 협상이 결렬되고 소련의 군사적 압박이 거세지자, 핀란드 군 수뇌부는 독일과의 협력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인식했다. 핀란드 참모총장 에릭 하인리히스 중장은 1월 말 베를린을 방문하여 할더와 소련 공격 가능성 및 핀란드의 동원 계획 등을 논의했다. 2월에는 독일의 부센하겐 대령이 핀란드를 방문하여 라플란드 지역의 지형과 기후를 파악하고 만네르헤임 등과 작전 관련 논의를 진행했다.

1941년 3월, 독일 무장친위대(Waffen-SS)핀란드에 SS 부대원 모집을 요구했다. 협상 끝에 핀란드는 핀란드 무장친위대 자원 대대 창설에 동의했지만, 자원병 모집 방식과 핀란드군에서의 휴가 승인 등 나치 독일에 대한 국가적 개입 수준을 제한하려는 조건을 달았다. 이는 독일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여겨졌으며, '판티파탈요오나'(Panttipataljoona, 저당 대대)라는 별명이 붙었다.

1941년 5월, 독일 외무부 특사 카를 슈누레의 방문 이후 핀란드 참모 장교단이 잘츠부르크로 파견되었다. 5월 25일, 독일 OKW핀란드 측에 바르바로사 작전의 북부 전선 계획을 설명하고, 페차모-무르만스크, 살라-칸달라크샤 축선 공격에 핀란드 영토 사용 의사를 밝혔다. 이어진 베를린 OKH와의 협상에서 독일은 핀란드가 라도가 호 동쪽 또는 서쪽에서 공세 작전을 수행할 것을 요구했다. 핀란드 측은 보급 능력의 한계를 설명했으며, 협상 수락 조건으로 핀란드의 독립 보장, 겨울 전쟁 이전 국경 회복(또는 그 이상), 곡물 공급 지속, 소련 침공 전 국경 불가침 등을 제시했다.

6월 초 헬싱키에서 열린 실무 협상에서는 울루 북부 지역 작전 지휘권을 독일이 맡고, 핀란드는 북부에 2개 사단을 제공하며 독일 공군에게 비행장 사용을 허가하기로 합의했다. 핀란드는 핀란드 영토에서 침공 작전이 개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6월 6일 킬에서는 해군 작전 협상이 진행되어, 전쟁 발발 시 핀란드 만 기뢰 부설 등에 합의했다.

1941년 6월 7일부터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여할 독일군 부대가 페차모와 보트니아만 항구를 통해 핀란드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SS 노르트 사단독일 제169보병사단 등이 핀란드 북부로 이동했다. 6월 9일, 핀란드 의회에 처음으로 상황이 통보되었고, 단계적인 동원령이 내려졌다. 독일로부터 요구 조건 수락을 보장받은 후, 6월 17일 전면 동원이 재개되었다.

6월 18일부터 독일 공군은 핀란드 비행장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6월 20일 핀란드 정부는 소련 국경 지역 주민 45,000명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다. 6월 21일, 핀란드 참모총장 에릭 하인리히스는 독일로부터 공격 개시 임박 통보를 받으며 핀란드의 군사적 준비는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다.

4. 3. 계속 전쟁 발발

바르바로사 작전은 1941년 6월 21일 늦은 시간 북부 발트해에서 시작되었다. 핀란드 군도에 숨어 있던 독일 기뢰 부설함들이 핀란드만 입구와 중앙에 두 개의 대규모 기뢰밭을 설치했다.[1] 이 기뢰밭은 소련 발트 함대를 전쟁 기간 동안 핀란드만 동쪽 끝에 묶어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 핀란드 잠수함 3척도 기뢰 부설 작전에 참여하여, 1941년 6월 22일 아침 핀란드 잠수함 베테히넨을 시작으로 수르사리 섬과 에스토니아 해안 사이에 9개의 소규모 기뢰밭을 추가로 설치했다.[1]

같은 날 밤, 동프로이센에서 발진한 독일 폭격기들이 핀란드만을 따라 레닌그라드까지 비행하며 항구와 네바강에 기뢰를 부설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폭격기들이 핀란드 남부 영공을 통과했으며, 핀란드 방공군은 이를 인지했다. 귀환하는 폭격기들은 우티 비행장에서 급유를 받기도 했다.[1]

핀란드 정부는 소련이 올란드 제도를 점령하여 스웨덴 및 독일로 향하는 해상 교통로를 차단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대응하여 1941년 6월 22일 이른 아침, 킬파푸르예흐두스 작전 (돛 경주 작전)을 개시하여 핀란드군을 올란드 제도로 수송했다.[1] 소련 폭격기들이 1941년 6월 22일 오전 6시 5분경 올란드 제도로 향하는 핀란드 함선들을 공격했으나, 별다른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1] 또한 항코에 주둔한 소련 포병 부대가 아침 일찍 핀란드 진지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지만, 핀란드 측의 반격 허가가 나기 전에 사격을 중단했다.[1]

한편, 1941년 6월 22일 아침 독일 노르웨이 산악군은 렌티어 작전을 개시하여 북부 노르웨이에서 페차모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1] 독일은 독일 제163보병사단을 노르웨이에서 핀란드로 수송하기 위해 스웨덴과 철도 이용 협상을 벌였고, 스웨덴은 1941년 6월 24일 이를 승인했다.[1]

작전 개시 당일인 1941년 6월 22일 아침, 소련과 핀란드는 서로에 대해 중립을 지킬 것을 선언했다.[1] 그러나 나치 지도부는 핀란드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핀란드 군도를 기지로 사용하고 핀란드 비행장에서 급유하는 등 소련의 반응을 자극하려 했다.[1] 히틀러는 공개 성명에서 독일이 볼셰비즘에 맞서 "핀란드 자유 영웅과 연합하여" 북쪽에서 공격할 것이라고 발표하며 핀란드의 참전을 기정사실화하려 했다.[1] 이는 1941년 6월 24일 영국 외무장관 이든이 의회에서 핀란드의 중립을 확인한 발언과 명백히 배치되는 것이었다.[1]

핀란드는 자국 영토 내에서 독일군이 소련을 직접 공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페차모와 살라 지역의 독일군에게 사격 중지를 명령했다. 공습 또한 금지되었고, 핀란드 북부의 악천후도 독일 공군의 활동을 제한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핀란드 남부에서 백해 운하를 목표로 한 단 한 차례의 공격만이 승인되었으나 이마저도 악천후로 취소되었다.[1] 국경에서는 소련과 핀란드 국경 수비대 간에 산발적인 소규모 총격전이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전선은 조용한 상태를 유지했다.[1] 양측과 독일군은 국경 너머로 활발한 공중 정찰을 수행했지만, 직접적인 공중 교전은 발생하지 않았다.[1]

그러나 이러한 불안정한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41년 6월 25일 이른 아침, 소련은 460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핀란드 내 18개 도시를 목표로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1] 공습은 주로 비행장을 겨냥했지만, 민간 목표물에도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특히 투르쿠는 가장 큰 피해를 입어 비행장이 일주일간 운영 불능 상태에 빠졌고, 중세 시대의 투르쿠 성도 손상을 입었다. (투르쿠 성은 전후 복원되었으나 1961년에야 완료되었다.)[1] 코트카와 헤이놀라 역시 민간 지역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1] 다행히 민간인 사상자는 비교적 적었다.[1]

소련 측은 이 공습이 핀란드 내 독일군 목표물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1] 당시 핀란드 주재 영국 대사관조차 공습이 집중된 핀란드 남부 지역과 비행장에는 독일군이 주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공격 당시 독일군이 주둔했던 목표는 북부의 로바니에미와 페차모 두 곳뿐이었다.[1] 1941년 6월 26일, 영국 외무장관 이든은 다시 한번 의회에서 소련이 전쟁을 시작했음을 시인해야 했다.[1]

소련의 공습이 있었던 1941년 6월 25일, 핀란드 의회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당초 랑겔 총리는 핀란드가 소련-독일 전쟁에서 중립을 지킬 것이라는 내용을 발표할 계획이었으나, 소련의 폭격으로 인해 계획을 변경하여 핀란드가 다시 한번 소련과 전쟁 상태에 돌입했음을 선언했다.[1] 이로써 계속 전쟁이 시작되었다.[1]

5. 핀란드-독일 군사 협력의 심화

겨울 전쟁 이후 소련의 지속적인 압박과 독일바르바로사 작전 준비는 핀란드와 독일 간의 군사 협력을 점차 심화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특히 소련이 페차모 지역의 니켈 광산에 대한 권리를 강하게 요구하며 외교적, 군사적 압력을 가하자, 핀란드는 자국 안보를 위해 독일과의 관계 강화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1년 봄, 핀란드와 독일의 고위 군사 관계자들은 여러 차례 회담을 갖고 소련에 대한 공동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5. 1. 잘츠부르크 및 베를린 회담 (1941년 5월)

1940년 봄부터 핀란드는 페차모의 콜로요키 니켈 광산 생산을 두고 독일과 협상을 진행했다. 같은 해 7월, 핀란드는 독일 회사 I.G. 파르벤인더스트리와 계약을 맺어 생산된 니켈의 60%를 독일로 보내기로 합의했다. 이는 6월에 해당 광산과 인근 발전소의 75% 소유권 및 지역 보안 처리 권한을 요구했던 소련을 자극했다. 독일 측 보고에 따르면, 콜로요키 광산의 니켈 매장량은 10억 라이히스마르크 이상의 가치를 지니며, 이는 제3제국의 20년치 니켈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양으로 평가되었다. 1940년 말, 독일은 이 매장량을 기존 추정치의 4배로 상향 조정했다.

소련과의 니켈 관련 협상이 6개월간 지지부진하자, 1941년 1월 14일 소련 외무부는 조속한 협상 타결을 촉구하며 같은 날 핀란드로의 곡물 공급을 중단했다. 1월 18일에는 조토프 소련 대사가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소련 라디오 방송은 핀란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1월 21일, 소련 외무부는 이틀 내 니켈 협상 타결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이러한 긴장 고조 속에서 핀란드 군사 정보부는 국경 너머 소련군의 병력 이동을 감지했다. 만네르헤임은 1941년 1월 23일 부분 동원을 제안했으나, 대통령 리티랑겔 총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키비매키 주독 핀란드 대사는 1월 24일 독일이 새로운 연령대의 병력을 징집하고 있으며, 이는 영국과의 전쟁 외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보고했다.

핀란드 참모총장 하인리히스 중장은 1941년 1월 30일부터 2월 3일까지 베를린을 방문했다. 공식적인 방문 목적은 겨울 전쟁에서의 핀란드 경험에 대한 강연이었지만, 독일 육군 참모총장 할더와의 비밀 회담도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할더는 소련에 대한 독일의 공격 가능성을 내비쳤고, 하인리히스는 독일이나 스웨덴의 참전 여부에 따른 핀란드의 동원 능력과 방어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같은 시기, 독일군 부센하겐 대령은 2월 1일 소련이 북부 노르웨이에서 사단 병력을 수송할 수 있는 어선 500척을 무르만스크에 집결시켰다고 보고했다. 이에 히틀러는 소련이 핀란드를 공격할 경우, 노르웨이 주둔 독일군에게 즉시 페차모를 점령하라는 작전명 렌티어(Unternehmen Rentierdeu)를 발령할 준비를 지시했다.

핀란드 내부에서는 계속되는 소련의 압박과 유화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만네르헤임이 2월 10일 사임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는 유화 정책으로는 국가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으나, 리티 대통령과의 논의 후 다음 날 사의를 철회했다. 이후 핀란드 협상단은 광업권 지분의 49%만 소련에 넘기고, 발전소는 별도 핀란드 회사 소유로 하며, 최고 경영직은 핀란드인이 맡고, 소련은 더 이상 핀란드에 대한 선동을 중단한다는 강경한 지침을 받았다. 그러나 소련은 2월 18일 이 제안을 거부하며 니켈 협상은 최종 결렬되었다.

5. 2. 헬싱키 회담 (1941년 6월)

실무적인 세부 사항 조율을 위한 협상이 1941년 6월 3일부터 6일까지 헬싱키에서 열렸다. 이 협상에서 독일은 울루 북쪽 지역의 작전 책임을 맡기로 결정했다. 해당 지역은 인구가 희박하고, 핀란드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남부 지역 방어와 거리가 있었기에 독일 측에 작전 책임이 이관되었다.

또한 핀란드 측은 북부 핀란드에서 독일군이 사용할 2개 사단(약 3만 명) 병력을 제공하고, 독일 공군이 헬싱키와 케미예르비의 비행장을 사용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후 독일 항공기 수가 늘어나면서 케미로바니에미 비행장도 추가로 사용이 허가되었다.

한편, 핀란드는 독일 측에 명확한 조건을 제시했다. 만약 독일이 퀴슬링 정권과 같은 괴뢰 정부를 핀란드에 세우려 하거나, 핀란드를 침략자로 보이게 만들거나, 핀란드 영토에서 소련 침공을 시작할 경우, 독일과의 군사 협력을 즉시 중단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는 핀란드가 전쟁에 연루되더라도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고 침략의 주체로 비춰지는 것을 피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참조

[1] 서적 Suomenmaan Tilastollinen Vuosikirja 1940 https://www.doria.fi[...]
[2] 웹사이트 MANNERHEIM - Commander-in-Chief - Transit Pact http://www.mannerhei[...]
[3] 웹사이트 http://www.mannerh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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