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사이드 알사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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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함마드 사이드 알사하프는 1940년 이라크에서 태어난 인물로, 바그다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에 입당하여 외교관, 외무 장관, 정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정보부 장관으로서 매일 진행한 브리핑으로 유명해졌으며, 미군을 비난하는 그의 과장된 발언은 '바그다드 밥' 또는 '코미컬 알리'라는 별명을 얻으며 서방 언론에서 풍자 대상이 되었다.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군에 투항하여 석방되었으며, 현재까지 사망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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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사이드 알사하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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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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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정보부 장관 |
별칭 | 바그다드 밥 코미컬 알리 |
본명 | 무함마드 사이드 알사하프 |
출생일 | 1940년 7월 30일 |
출생지 | 이라크 힐라 |
소속 정당 | 이라크 바트당 |
학력 | 바그다드 대학교 |
경력 | |
외무부 장관 | 임기 시작: 1992년 6월 6일 임기 종료: 2001년 4월 23일 |
정보부 장관 | 임기 시작: 2001년 임기 종료: 2003년 5월 |
이전 직책 | |
외무부 장관 전임 | 타리끄 아지즈 |
외무부 장관 후임 | 나지 사브리 |
정보부 장관 전임 | 후맘 압드 알카리크 압드 알가푸르 |
정보부 장관 후임 | (정보부 해체) |
재임 당시 | |
대통령 | 사담 후세인 |
2. 생애
무함마드 사이드 알사하프는 1940년 바빌론 주 힐라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모하마드 시드 이븐 카심 알 사하프이다. 알사하프의 '알'은 '위대한'이라는 뜻의 접미사이다. 바그다드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중등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다가 바트당에 입당하여, 1968년 7월 17일까지 중등 영어교사로 재직했다. 바트당 혁명 당시 핫산 정권 붕괴 후 이라크 국영방송국을 장악하는 데 공을 세워 국영방송국과 라디오 방송사 이사, 이라크군 육군 대령, 이라크 국영방송국 편성국장과 이라크 국영방송국 사장을 지냈다. 이라크 국영방송국 사장 재직 당시 일본 NHK 방송국을 시찰하기도 했다.
주인도 대사와 미얀마 대사로 6년간 근무한 뒤 이라크 외교차관이 되었다. 그 뒤 UN주재대사, 주이탈리아 대사, 주스웨덴 대사, 주미얀마 대사, 주인도 대사 등을 거쳐 이라크 외교부 차관을 거쳐, 1992년 이라크 외교장관에 임명됐다.[1]
석유 문제와 걸프전쟁 전후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나 성과는 없었고, 표면상 이유는 전임자보다 성과 부족이나 대통령 사담 후세인의 장남 우다이 후세인과의 알력으로 2001년 외무 장관직에서 해임되고 공보부 장관으로 전임되었다.[1] 2004년 3월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 대항하여 이라크군을 독려하면서 부시와 블레어, 미국·영국 행정부 및 연합군을 상대로 독설을 날려 화제가 되었다. 특유의 화술과 독설로 "이라크의 입", "코미컬 알리" 등의 별명을 얻었다.
2004년 5월 이라크가 전쟁에서 패하자 잠적하였다. 사망설이 돌자 한 대학생은 그의 죽음에 회의를 느껴 자해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후 미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무함마드 사이드 알사하프는 1940년 바빌론 주 힐라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모하마드 시드 이븐 카심 알 사하프이다. 바그다드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중등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다가 1963년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에 입당했다.[1][2] 1968년 7월 17일까지 영어교사로 재직했다. 바트당 혁명 당시 핫산 정권 붕괴 후 이라크 국영방송국을 장악하는 데 공을 세워 국영방송국과 라디오 방송사 이사, 이라크군 육군 대령, 이라크 국영방송국 편성국장과 이라크 국영방송국 사장을 지냈다. 바트당 통치 초기에는 국영 텔레비전에서 최근 처형된 이라크인들에 대한 정기적인 발표를 읽었다.[3] 이라크 국영방송국 사장 재직 당시 일본 NHK 방송국을 시찰하기도 했다.그는 주인도 대사와 미얀마 대사로 6년간 근무한 뒤 이라크 외교차관이 되었다. 이후 UN주재대사, 주이탈리아 대사, 주스웨덴 대사, 주미얀마 대사, 주인도 대사 등을 거쳐 이라크 외교부 차관을 역임했다.
2. 2. 바트당 입당 및 언론 경력
무함마드 사이드 알사하프는 1940년 바빌론 주 힐라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모하마드 시드 이븐 카심 알 사하프이다. 바그다드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중등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다가 바트당에 입당하였다.[1] 1963년 바트당에 입당하기 전에는 영어 교사가 되려고 했다.[3] 바그다드 대학교 졸업 후 당 활동을 하면서 사마라에서 중학교 영어 교사로 재직했다.[16]1963년, 카심 정권 타도를 위한 쿠데타에 가담하여 공적을 인정받아 바트당에 입당했다. 1968년 7월 17일까지 중등 영어교사로 재직했다. 바트당 혁명 당시 핫산 정권 붕괴 후 이라크 국영방송국을 장악하는 데 공을 세워 국영방송국과 라디오 방송사 이사, 이라크군 육군 대령, 이라크 국영방송국 편성국장과 이라크국영방송국 사장을 지냈다.
1968년 7월 쿠데타 당시 군 라디오 방송국 제압 임무를 맡았으며, 쿠데타 후에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대변인 역할을 했다. 그 후 이라크 국영 방송 기술 제작 국장에 취임했다. 당시 이라크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은 카심 정권 하에서 이라크 공산당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취임 후 공산당 색채를 일소하고 바트주의를 철저히 하기 위해 엄격한 언론과 미디어 통제를 실시했다. 한편 방송 기술의 현대화와 직무 효율화를 위해 노력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바트당 통치 초기에는 국영 텔레비전에서 최근 처형된 이라크인들에 대한 정기적인 발표를 읽었다.[3] 1974년에는 이라크 미디어 연수단의 일원으로 방일하여 NHK에서 방송 기술 연수를 받았으며, 일본과 NHK에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18] 이라크 국영방송국 사장 재직 당시 일본 NHK 방송국을 시찰하기도 했다.
2. 3. 외교관 경력
무함마드 사이드 알사하프는 주인도 대사와 미얀마 대사를 6년간 역임한 뒤 이라크 외교차관이 되었다. 그 뒤 UN주재대사, 주이탈리아 대사, 주스웨덴 대사, 주미얀마 대사, 주인도 대사 등을 거쳐 이라크 외교부 차관을 역임했다.[1] 1974년 인도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스웨덴, 미얀마, UN, 이탈리아 등 각국 주재 대사를 역임했다. 1980년대 초반에는 미국 정부와의 협상에도 참여했으며, 외무 차관이었던 1983년에는 레이건 행정부 특사 도널드 럼즈펠드의 바그다드 방문을 미국 국무부와 조율하는 이라크 측 창구 역할을 맡았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주 이탈리아 대사를 역임했으며, 당시 로마에 있는 이라크 대사관이 이란-이라크 전쟁 중에 풍족한 자금을 얻었던 점도 있어 이라크에서 가장 성공한 대사 중 한 명으로 꼽혔다. 1990년 8월 쿠웨이트 침공은 주 이탈리아 대사 재임 중에 일어났다.2. 4. 외무 장관
바그다드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중등학교의 영어교사로 근무하다가 바트당에 입당, 1968년 7월 17일까지 중등 영어교사로 재직했다. 바트당 혁명 당시 핫산 정권 붕괴 후 이라크 국영방송국을 장악하는 데 공을 세워 국영방송국과 라디오 방송사 이사, 이라크군 육군 대령, 이라크 국영방송국 편성국장과 이라크 국영방송국 사장을 지냈다. 이라크 국영방송국 사장 재직 당시 일본 NHK 방송국을 시찰하기도 했다.주인도 대사와 미얀마 대사로 6년간 근무한 뒤 이라크 외교차관이 되었다. 그 뒤 UN주재대사, 주이탈리아 대사, 주스웨덴 대사, 주미얀마 대사, 주인도 대사 등을 거쳐 이라크 외교부 차관, 1992년 이라크 외교장관에 임명됐다.[1]
석유문제와 걸프전쟁 전후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나 성과는 없었고, 표면상 이유는 전임자보다 성과 부족이나 대통령 사담 후세인의 장남 우다이 후세인과의 알력으로 2001년 외무 장관직에서 해임되고 공보부 장관으로 전임되었다.[1]
2. 5. 정보 장관 및 이라크 전쟁
2001년 4월, 알사하프는 외무장관에서 정보장관으로 갑작스럽게 자리를 옮겼다. 이는 아랍 연맹 회의에서의 실패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여겨지지만, 일설에 따르면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의향에 따른 의제 설정 실패가 원인이었다고도 한다. 이 회의에서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주권 승인과 영토 안전 보장 확약을 거부하여 외교적 손실을 초래했다.[20]2002년 11월, 알사하프는 이라크 대통령 특별 대사로 인도에 파견되어 공격 회피를 위한 협력을 요청했다.
2003년 3월 20일, 미·영 주도의 연합군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알사하프는 국영 텔레비전 국장 시절부터 쌓아온 선전 기술을 발휘하여 정보전을 펼쳤다. 걸프 전쟁 당시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언론을 초청하고, 정부가 원하는 장소로 안내하는 '정보성 버스 투어'를 실시하며 취재를 규제했다. 또한, 대통령 성명을 대독하며 아랍어로 자국민과 아랍 무슬림에게 호소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려 노력했다.[21]
2004년 3월,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 대항하여 이라크군을 독려하면서 부시와 블레어, 미국·영국 행정부 및 연합군을 상대로 독설을 날려 화제가 되었다. 특유의 화술과 독설로 "이라크의 입", "코미컬 알리" 등의 별명을 얻었다.
2004년 5월 이라크가 전쟁에서 패하자 잠적하였다가 미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2. 5. 1. 이라크 전쟁 당시 발언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바그다드에서 매일 진행했던 언론 브리핑으로 유명하다. 그의 다채로운 모습은 미국 언론에서 그에게 "바그다드 밥"(Baghdad Bob)[4]이라는 별명을 붙이게 만들었다. 영국 언론에서는 그를 "코미컬 알리"(Comical Ali)라고 불렀고, 이탈리아 언론에서는 이와 유사하게 "알리 일 코미코"(Alì il Comico)라고 불렀다. 이러한 별명들은 그가 분쟁에 대해 현실과 동떨어진 발언을 했고, 서방 언론이 이라크 전쟁 초기 단계에서 그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붙여졌다.[5]그의 발표에는 미군 병사들이 도시 밖에서 "수백 명"씩 자살하고 있다는 주장과, 그가 연설하고 있었던 기자회견장으로부터 불과 수백 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미군 부대의 전투 소리가 배경에서 이미 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그다드에 미군 전차가 없다는 부인이 포함되어 있었다.[6] 그는 2003년 4월 8일 마지막 공식 석상에서 미국인들이 "항복하거나 전차 안에서 불타 죽을 것이다. 그들은 항복할 것이다. 항복할 자는 바로 그들이다"라고 말했다.[7] 정보 출처에 대한 질문에 그는 "진실한 출처—많은 진실한 출처"라고 답했다.[8] 그는 자신이 "자신의 일을 하는 전문가"라고 지적했다.[8]
그는 이라크 주둔 미군을 묘사하기 위해 이교도에 대한 모호하고 특히 모욕적인 용어인 ''‘ulūj'' (علوجar)를 자주 사용했다. 이로 인해 아랍어 미디어에서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대부분 "흡혈 곤충"을 의미한다고 결론지었다. 2003년 8월 아부다비 TV와의 인터뷰에서 알사하프는 이 단어가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에게 기인하는 고대 용어라고 말했다.[9]
미국 정보 분석가들은 알사하프가 자신이 말하는 것을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거짓 진술을 했다고 결론 내렸다. 미군이 바그다드에 접근하자, 이라크군은 미군을 성공적으로 반격하여 수많은 전차를 파괴하고 수백 명의 미군 병사를 죽였다고 거짓 보고했다. 제5군단 정보 부참모인 스티브 볼츠 육군 대령은 알사하프가 보고한 정보를 진실로 믿었다고 확신했다. 볼츠는 사담 정권이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을 자주 처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군 장교들이 전장의 상황에 대해 조작된 보고서를 작성했을 것이라고 보았다.[10]
무함마드 사이드 알사하프의 발언은 이라크 전쟁 당시 해외 언론을 상대로 바그다드의 팔레스타인 호텔 앞에서 매일 기자 회견을 열었을 때 가장 유명하며,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압도적으로 미군이 우세한 상황에서 미군을 모두 격퇴하고, 바그다드 주변에는 미군 병사가 한 명도 없다고 강변했으며, 그 초현실적이고 황당무계한 내용 때문에 미국에서는 "코미컬 알리", "바그다드 밥"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랍어를 구사한 그의 변설에 통쾌함을 느낀 아랍 민중도 많았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그가 사용한 "العلوج(olouj 또는 oulouj: 불신자, 거머리의 뜻으로 알려짐. 미영군을 가리키는 말)"라는 단어는 아랍어권에서 유행어가 되었다.
2003년 4월 8일, 미군이 바그다드 시내에 입성했다. 미군의 전차가 시내를 순찰하는 가운데, 팔레스타인 호텔에 모습을 나타내, "미국인의 전차는 하나도 남김없이 자폭하고, 패배할 것이다. 지는 것은 저들이다. 지는 것은 저들이다!"라고 강변을 계속했지만, 이것이 정보부 장관으로서의 마지막 회견이 되었다.
그의 주요 발언은 다음과 같다.
- "내 마음은... 항상 변함없다. 우리는 저들을 몰살시켜 버릴 것이다!"
- "우리의 초기의 추정에 따르면, 저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
- "신은 지옥에서 이라크 인민에게 저들의 뱃속을 태워버리게 할 것이다."
- "나는 세 번이나 보장한다! 바그다드에는 미군 병사가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 "영국 따위는 낡은 신발짝만도 못하다."
- "나는 내가 한 일에 책임을 진다. 저들은 바그다드 성벽 아래에서 자살을 시작하는 것이다. 더, 더 자살하라!"
- "미군을 대환영한다. 저들을 정육으로 만들 것이다!"
세계적으로 전쟁 후반의 발언의 황당무계함이 화제가 되어, 코미디의 대상으로 취급되기에 이르렀지만, 프로파간다 기관의 장관으로서 정보 전쟁을 치렀다는 관점에서, 제한된 장비와 영향력 속에서 선전했다고 평가하는 목소리도 있다.
개전 전부터 관제 보도라는 점에서 정보부 장관의 발표는 편향된 시각으로 보였지만, 초기의 질의응답은 미군과 서방 언론의 오류를 즉시 수정하고 "알게 되는 대로 답하겠다"라고 한 질문에도 다음 회견에서 반드시 답변하는 등, 어느 정도의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이라크군은 개전 직후 지령 계통과 주요 군사 시설을 상실했고, 패전은 결정적이었다. 따라서 정확한 정보의 파악은 곤란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전투 후반에는 아마 사담 후세인 대통령과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도 한다. 정보부 장관인 그에게조차 정보가 전혀 들어오지 않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어제와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라고 매일 고민했다는 부하의 증언도 있어, 그 어려운 임무의 압박이 컸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 발언 내용 때문에 서구 및 아랍 지역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NBC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정보부 장관의 회견이 시작되면 무엇을 제쳐두고라도 그것을 봤다고 밝히며 "그(사하프)는 최고다"라고 평했다. 미국, 독일, 이집트에서 팬 사이트가 개설되어 화제가 되었고, 이집트에서는 "나는 사하프가 아니다"라는 코미디 영화의 소재가 되었으며, 아일랜드의 항공사 Ryanair는 신문 광고에 전쟁 중의 사하프의 사진과 발언을 사용, 영국에서는 그의 발언을 이용한 댄스 음악이 제작된 것 외에, 미국의 Herobuilders사가 사하프를 본뜬 액션 피겨 "Talking Baghdad Bob"을 29.95USD에 판매한 결과, 24시간 만에 16,000체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2. 6. 이라크 전쟁 이후
2003년 6월 25일, 영국의 신문 데일리 미러는 알사하프가 바그다드의 검문소에서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었다고 보도했다.[4] 이 보고는 군 당국에 의해 확인되지 않았고, 알사하프의 가족은 아부다비 TV를 통해 이를 부인했다. 다음 날, 알사하프는 리야드에 본사를 둔 뉴스 채널 알 아라비야를 위해 인터뷰를 녹화했다.[12] 그는 이 텔레비전 인터뷰에 대해 최대 200000USD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인터뷰에서 그는 전쟁 중에 보여주었던 과장된 모습과는 달리 매우 침울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답변은 대부분 간단한 "예" 또는 "아니오"로 이루어졌다. 그는 이라크 정부 붕괴의 원인에 대한 추측을 거부했고, 사담 후세인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비디오 클립이 진짜인지에 대한 질문에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라고만 답했다. 당시에는 후세인이 전쟁 중에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그의 명성은 전쟁이 이라크 반군 단계로 접어들면서 빠르게 사라졌다. 2003년 중반부터 그는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더 이상 전쟁의 중심 인물이 아니었다. 알사하프는 자신이 미군에 항복했고, 그들에게 심문을 받은 후 석방되었다고 말했다.[13][14] 그는 사담 후세인 정부에서의 역할로 기소되지 않았다.[14]
2008년 3월, 더 타임스는 알사하프가 아랍 에미리트에 살고 있다고 보도했다.[15]
2003년 4월 18일, 이란 국경으로 도망쳐 온 이라크 난민의 이야기로, 바그다드 함락 직후 목을 매 자살했다는 보도가 이란 통신사에 보도되었고, 여장을 하고 빈민가에 숨어 있다는 추측이 나돌았지만, 이후 쿠르드인 조직 PUK 관계자의 이야기로 사하프는 한때 모술로 도망친 후 바그다드의 숙모 집에 몸을 의탁하며 신변 보호를 요구하며 미군에 투항을 타진 중이라고 전해졌다.
6월 25일, 그가 바그다드 시내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영국의 데일리 미러지가 "농담이 아닙니다"라는 주의 문구를 덧붙여 보도했다. 그 다음 날, 아랍에미리트 연합의 위성 방송국인 두바이의 알 아라비야와 아부다비의 아부다비 TV가 인터뷰에 성공했다. 풍성한 검은 머리는 불과 몇 달 만에 백발로 변했고, 초췌해져서, 예전의 강변도 들을 수 없게 된 충격적인 모습이 방송되어, 예전의 그를 아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25]。그는 마침내 자군의 패배를 인정하고, 체포가 아닌 투항이며, 2~3시간의 심문 후에 석방되었다고 말했다. 이라크 전쟁의 시비, 신 이라크 정부에 대해서는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라며 명확한 언급을 피했지만, "회고록" 집필을 시사했다.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정보부 장관을 맡은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26]。
영국 BBC 방송의 존 심슨 기자가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기고한 기사에 따르면, 사하프는 미군에 투항하는 것을 원치 않고, 영국으로의 정치 망명을 희망했다고 한다[27]。
7월 11일, 아랍에미리트 연합의 자예드 빈 술탄 알 나흐얀 대통령(당시)의 장남, 할리파 빈 자예드 알 나흐얀 왕세자(당시)가 준비한 전세기로 가족과 함께 아부다비로 이주했다.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아부다비로 향하는 기내에서, 동행한 아부다비 TV의 인터뷰에 응해, 자예드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하며 "바그다드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라고 말하며, 아부다비 체류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비쳤다.
가정에서는 아내와, 이미 성년이 되어 결혼한 2남 1녀가 있다. 손자도 있으며, 6월 26일에 진행된 알 아라비야와의 인터뷰에서 정치 활동 은퇴를 시사하며 "가족이 내 마음을 채워줄 것이다", "이제부터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4년 말에 이라크 신정부에의 신병 인도를 피하기 위해 리비아로 이주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 후에도 아부다비에서 가족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2003년 7월 25일에 사담의 두 아들이 미군에 의해 살해된 것에 대해, 아부다비 TV의 인터뷰에 응해, "두 사람은 무장 투쟁의 지휘자가 아니다"라고 단언하며, 두 사람의 살해가 반미 무장 투쟁의 종식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그들의 부적절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당에서도 정부에서도 인심을 떠나게 했다"라고 말하며, 갈등이 전해졌던 대통령의 아들에 대한 마음을 드러냈다.
9월 18일부터, 아부다비 TV에서 『사하프의 전쟁: الصحاف الحرب』이라는 제목의 총 5회에 걸친 인터뷰 형식의 프로그램이 방송되어, 전쟁 중 자신의 행동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안에서, 바그다드 방위 계획을 실패라고 비난하고, 결코 사임이나 국외 퇴거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담에 대해 비판적인 어조로 이야기했지만, 사회자가 사담을 "전 대통령"이라고 칭하는 것에 대해, 일관되게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전쟁 중에 회견에서 발표한 정보의 정확성에 대해,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에서 전달된 것이었지만, 정보가 정확한지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고, 국방부 장관이었던 술탄 하심 아흐마드 앗 타이 중장과의 관계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동료"라고 답하며, 군과 정보성의 연계가 원활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또한, 남부에서 행해졌다고 하는 시아파 주민의 대량 학살에 대해 질문받고, "책임자는 처벌받아야 하지만, 그것에는 확고한 증거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깊이 언급하지 않았다. 자신의 현재 입장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는 "나는 당과 함께 있다"라고 말하며, 바트당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나타냈다.
12월 14일의 사담 후세인 구속에 대해, 아부다비 TV에 대해, "구속은 시간 문제였다. 놀랄 일은 아니지만, 그가 싸우지 않고 잡힌 것은 놀랍다"라고 말하며, "그는 잡히는 것보다 죽음을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하며, 이라크 전쟁 중 마지막 각료 회의에서, 사담이 각료들에게 "투항은 금한다. 잡힐 바에는 저항하고, 자결하라"라고 명령했던 것을 밝혔다. 그러나 자신을 포함해, 이 말을 충실히 실행한 대신은 아무도 없었다(자결한 간부는 한 명도 없었지만, 사담의 두 아들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참고로, 이슬람교에서는 자살이 금지되어 있다.)
또한 사담에 대한 재판은, 보복이 아닌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하며, 증거에 의해서만 죄가 입증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이후, 그의 발언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때때로, 아랍 미디어에서 동향이 보도된다.
2004년 4월, 후에 플레임 사건으로 발전하는, 2002년에 이라크가 니제르로부터 우라늄을 구매한 것으로 알려진 정보 조사를 맡았던 전 주 가봉 미국 대사 조셉 C. 윌슨 4세가, 저서 "The Politics of Truth"에서, 2004년 1월에 다시 니제르를 방문해 "1999년에 옐로케이크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라크인 비즈니스맨과 접촉했다"라는 정보를 가져온 니제르 정부의 관료와 다시 만났을 때, 옐로케이크를 원했던 이라크인 비즈니스맨은 사하프 정보부 장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28]。
2007년 1월 9일, alarab.net의 정보로 알 아라비야 등에서, 사하프는 이미, 이라크 전쟁 중의 행동과, 우다이 후세인과의 갈등, 대 이란 외교 등에 대해 쓴 "회고록"을 완성했지만, 출판 시기는 불명이라는 보도가 나왔지만, 본인에게 확인은 되지 않았다[29]。
바트당에 가까운 소식통에 따르면, 사하프의 "회고록"은 유용할 수도 있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라크의 수배자 트럼프 카드에는 사하프는 포함되지 않았다.
2009년 4월 16일, 아야드 알라위 정권 하에서 주 이집트 대사를 역임한 여성 인권 운동가 사피아 탈레브 알리 알 수하일이, 그녀의 아버지이며, 1994년에 베이루트에서 암살된 탈레브 아스 수하일 앗 타미미 살해에,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사하프가 관여했다고 하여, 이라크 특별 형사 재판소로부터 살인죄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고 발표했지만, 이라크 정부로부터의 공식적인 확인도 부정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하프 본인도 이 건에 대한 코멘트는 거부하고 있다[30]。
2. 7. 사망
2014년 11월 5일, 알사하프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문과 함께 병상에 있는 그와 가족을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영상이 SNS를 통해 확산되었고, 일부 언론에서도 보도되었다.[31] 그러나 알사하프 본인이 다른 언론과의 인터뷰에 응함과 동시에 Al-Basrah.net에 건강하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병세설을 일축했고, 비디오 영상에 대해서는 악의적인 행위라며 불쾌감을 표시했다.[32][33]이후에도 SNS를 중심으로 사망설이 종종 돌았지만, 그때마다 바트당 관계자가 성명으로 부인했다. 그 과정에서 알사하프가 UAE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21년 3월 5일 아침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바트당 계열의 트위터는 이를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여[35]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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