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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그노 아키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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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니그노 아키노 2세는 필리핀의 정치인으로, 1932년 루손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언론인,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필리핀 상원의원, 타를라크 주지사 등을 역임했다. 6.25 전쟁 종군 기자로 활동했으며,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특사로 후크발라합 반군 지도자를 설득해 투항시키는 데 기여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투옥되었으며, 1983년 귀국 후 암살당했다. 그의 암살은 반 마르코스 정서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아내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현재 필리핀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 등 여러 시설과 기념물에 그의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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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그노 아키노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80년대 경의 아키노
본명베니그노 시메온 아키노 2세
별칭니노이
출생1932년 11월 27일
출생지콘셉시온, 타를라크주, 필리핀
사망1983년 8월 21일
사망 장소마닐라 국제공항, 파라냐케, 필리핀
사망 원인암살
안장지마닐라 메모리얼 파크 – 수캇, 파라냐케, 필리핀
국적필리핀
배우자코라손 코후앙코 (1954년 결혼)
자녀5명 (베니그노 3세 / "노이노이", 크리스 포함)
학력아테네오 데 마닐라 대학교
필리핀 대학교 딜리만 캠퍼스
직업언론인
정치인
서명
웹사이트니노이 아키노 웹사이트
정치 경력
상원 의원필리핀
소속 정당라반 (1978–1983)
자유당 (1959–1983)
이전 소속 정당국민당 (1955–1959)
임기 시작1967년 12월 30일
임기 종료1972년 9월 23일
임기 시작1959년 12월 30일
임기 종료1961년 2월 15일
콘셉시온 시장콘셉시온, 타를라크주
임기 시작1955년 12월 30일
임기 종료1959년 12월 30일
임기 시작1949년
임기 종료1954년
개인 정보
부모베니그노 아키노 시니어
아우로라 아키노
친척아키노 가문
수상

2. 초기 생애 및 경력

베니그노 시메온 아키노 주니어는 1932년 11월 27일 루손섬 타를라크주 콘셉시온에서 태어났다.[10] 그의 아버지는 당시 필리핀 상원 제3선거구의 상원의원이자 필리핀 상원 원내대표였던 베니그노 아키노 시니어였고, 어머니는 유서 깊은 아시엔다 가문 출신의 아우로라 아키노였다.[10] 그의 할아버지 세르빌라노 아키노는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이끈 혁명군의 장군이었다.[11] 아버지 베니그노 시니어는 호세 라우렐 정권에서 활동한 정치인이었으나, 태평양 전쟁 당시 대일 협력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아키노는 데 라 살 대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고, 퀘존 시의 세인트 조셉 칼리지를 거쳐 산 베다 칼리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아테네오 데 마닐라 대학교에서 문학 학위를 목표로 공부했으나 중도에 학업을 그만두었다.[12] 그는 스스로를 평범한 학생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12] 17세의 어린 나이에 ''마닐라 타임스'' 소속으로 6.25 전쟁을 취재하며 최연소 종군 기자가 되었다.[12] 이 공로로 18세 때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으로부터 필리핀 명예 훈장을 받았다.[12]

이후 필리핀 대학교 딜리만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다시 학업을 중단하고 언론인 경력을 이어갔다.[12] 대학 시절 그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같은 동문회인 업실론 시그마 파이의 회원이었다.[12] 21세에는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라몬 막사이사이의 측근이 되었다.[12]

1954년 초,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개인 특사로 임명되어 반정부 단체 후크발라합의 지도자 루이스 타루크의 항복을 설득하는 임무를 맡았다.[13] 그는 4개월간의 끈질긴 협상 끝에 타루크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냈고,[13] 이 공로로 1954년 10월 14일 지휘관 훈위의 두 번째 필리핀 명예 훈장을 받았다.[14] 같은 해(1954년), 코라손 코후앙코와 결혼했으며,[12] 22세의 나이로 고향 콘셉시온의 시장에 당선되었다.

이후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 카를로스 P. 가르시아 대통령의 보좌관을 거쳤다. 1961년에는 타를라크주 주지사로 선출되었고,[12] 1966년에는 자유당 간사장에 취임했다. 1967년에는 35세의 나이로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는데, 이는 필리핀 역사상 최연소 상원의원 당선 기록으로 남아 있다.

3. 정치 경력

베니그노 아키노 2세(오른쪽)와 당시 국방부 장관 라몬 막사이사이 (1951년 8월)


아키노는 필리핀의 유력 정치 및 토지 소유 가문 출신으로 정치에 일찍부터 익숙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에밀리오 아기날도 대통령 밑에서, 아버지는 케손과 라우렐 대통령 밑에서 공직을 수행했다. 대학 중퇴 후 저널리스트가 되었으나, 1954년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지시로 반정부 단체 후크발라합의 지도자 루이스 타르크를 4개월간 설득하여 투항시키는 데 성공하며 명성을 얻었다.[76] 그는 막사이사이 대통령과 가르시아 대통령 밑에서 특별 보좌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후 1955년 23세(다른 자료에서는 22세[76])의 나이로 콘셉시온 시장에 당선되었고,[15] 같은 해 코라손 코판코와 결혼했다.[76] 5년 후인 1960년경에는 27세의 나이로 전국 최연소 부지사가 되었으며(이 기록은 1980년 봉봉 마르코스가 22세로 갱신했다), 1961년에는 타를라크 주 주지사가 되었다.[76]

1966년 자유당 사무총장이 되었고,[76] 1967년에는 35세의 나이로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필리핀 역사상 최연소 상원의원 기록을 세웠다.[76] 상원의원 임기 첫해인 1968년부터 아키노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군대 예산을 늘리고 국방부를 측근 장성들로 채우며 '주둔 국가'를 만들려 한다고 비판했다.[16][17] 그는 마르코스 정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화려한 언변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호세 W. 디오크노와 함께 있는 아키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아키노를 만나는 날짜 미상의 사진


특히 1969년 2월 10일의 '이멜다를 위한 판테온' 연설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가 주도한 필리핀 문화 센터 건립을 사치스러운 '수치의 기념비'라 비난하고, 이멜다를 '필리핀의 에바 페론'에 빗대며 비판했다. 이에 마르코스 대통령은 아키노를 '선천적인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으며, 이러한 아키노의 '재정 감시' 활동은 상원에서의 그의 상징적인 모습이 되었다.[18][17]

마르코스와 아키노의 대립은 1971년 8월 21일 플라자 미란다 폭탄 테러로 더욱 격화되었다. 이날 저녁 자유당의 선거 유세 현장에서 두 차례의 수류탄 폭발로 8명이 사망하고 120여 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1967년에 상원의원에 당선된 아키노는 당시 선거 후보가 아니었기에 현장에 없었으나, 그의 부재를 두고 일각에서는 아키노가 신인민군(NPA)으로부터 사전 정보를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19] 이 공격의 배후는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나,[20] 많은 역사가는 마르코스가 계엄령 선포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거짓 깃발 작전을 벌인 것으로 의심한다.[21][22] 반면, 역사학자 조셉 스칼리체는 당시 필리핀 공산당(PKP)이 마르코스 정부와 협력하여 폭탄 테러를 일으켰다는 주장[23]과 달리, 또 다른 필리핀 공산당(CPP)이 자유당과 연계하여 혁명을 가속화하기 위해 폭탄 테러를 감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기도 한다.[24] 1971년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올랐으나, 이듬해 마르코스의 계엄령 선포로 정치 활동에 큰 제약을 받게 된다.

4. 계엄령 시기 및 투옥

1971년 자유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1972년 9월 21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포고령 1081을 통해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정치적 탄압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마르코스는 9월 23일 자정에 계엄령 선포를 공표했고, 아키노는 호세 디오크노 상원의원 등과 함께 가장 먼저 체포된 인물 중 하나였다.[76][77]

아키노는 살인, 불법 무기 소지, 정부 전복 음모 및 파괴 등 조작된 혐의로 포트 보니파시오에 수감되었다. 그는 호세 시주코 소장이 이끄는 군사 위원회 2호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재판 과정에서 누에바 에시하의 포트 막사이사이에 있는 "알파"라는 암호명의 독방으로 이송되기도 했다.

1975년 4월 4일, 아키노는 군사 재판의 불의에 항의하며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소금 알약, 탄산수소나트륨, 아미노산, 그리고 하루 두 잔의 물만으로 연명하며 40일간 투쟁을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그의 체중은 54kg에서 36kg까지 줄었으며, 심한 오한과 경련에 시달리면서도 군인들에 의해 강제로 재판정에 끌려 나가야 했다. 그의 가족과 지지자들은 매일 산후안의 산투아리오 데 산 호세 성당에서 그의 생존을 위한 미사를 드렸다. 단식 40일째인 1975년 5월 13일, 가족과 사제, 친구들의 간곡한 만류로 단식을 중단했다.

수감 생활은 계속되었고 재판은 몇 년 동안 지연되었다. 아키노는 재판 내내 군사 재판소가 자신과 공동 피고인들을 재판할 관할권이 없다고 주장했다. 1977년 11월 25일, 군사 위원회는 아키노와 NPA 지도자 베르나베 부스카이노(일명 쿰만데르 단테), 빅토르 코르푸스 중위에게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고 총살형을 언도했다. 그러나 아키노의 높은 인지도와 마르코스 정권의 인권 탄압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판이 거세지자, 마르코스는 사형 집행을 보류하고 선고를 감형했다.

수감 중 아키노는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를 통해 그는 비폭력주의를 자신의 정치적 노선으로 확립하고, 마르코스 독재 정권을 비판하면서도 국민들에게는 평화적인 저항을 호소했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훗날 아내 코라손 아키노의 정치 활동과 필리핀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가 사후 "순교자"로 추앙받는 배경이 되었다.

결국 1980년, 마르코스 정권은 건강 악화를 이유로 아키노가 미국에서 심장 수술을 받도록 허락한다는 명분으로 사실상 그를 국외로 추방했다.

5. 1978년 선거와 심장 수술

아키노가 1973년 8월부터 1980년까지 구금되었던 방


1978년 아키노는 감옥에서 1978년 필리핀 의회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허가받았다. 그의 자유당 동료들이 선거를 보이콧하기로 결정하자, 아키노는 여러 야당 인사들과 개인들을 모아 '바얀의 힘'(Lakas ng Bayan|라카스 낭 바얀tl)이라는 연합체를 결성했다. 이 당은 아키노 자신을 포함하여 제6-A 지역(메트로 마닐라)에 21명의 후보를 내세웠다. 아키노는 처음에는 정부가 이미 모든 권력과 정치 조직을 장악하고 있다는 이유로 보이콧에 동의했으나, 거의 6년 동안 수감되어 있었기에 국민들과 소통할 기회를 갖고자 선거 참여로 마음을 바꾸었다.[32]

1978년 3월 10일, 그는 GTV의 '페이스 더 네이션' 프로그램에서 단 한 차례 텔레비전 인터뷰를 할 기회를 얻었다. 로니 나다니엘즈가 진행하고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엔리케 로무알데스, 타임스 저널의 레날도 나발, 불레틴 투데이의 테디 오웬이 패널로 참여한 이 인터뷰는, 오랜 수감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날카로운 언변과 투지가 전혀 꺾이지 않았음을 보여주어 대중에게 놀라움과 깊은 인상을 남겼다.[33] 아키노는 인터뷰에서 국민들의 불만과 분노를 표출할 통로를 제공하고, 임시 바타상 팜반사(의회)에서 감시자 역할을 수행하고 싶다고 밝혔다. 또한 자신의 고향인 타를라크 대신 메트로 마닐라에서 출마한 이유에 대해, 자신의 승리가 개인의 승리가 아닌 야당 전체의 승리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32] 그러나 선거 결과, '바얀의 힘' 후보 전원이 패배했다. 아키노는 21명을 뽑는 선거에서 22위를 기록하며 야당 후보 중에서는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34]

1980년 3월 중순, 주로 독방에 수감되어 있던 아키노는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그는 필리핀 심장 센터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두 번째 심장마비를 겪었다. 검사 결과 동맥이 막힌 것으로 진단되었다. 필리핀 외과 의사들은 정치적 논란에 휘말릴 것을 우려하여 관상 동맥 우회술 집도를 꺼렸다. 아키노 또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의 의도를 불신하여 필리핀 의사들의 치료를 거부하고, 미국에서 수술받거나 아니면 포트 보니파시오의 감방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요구했다.

결국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이멜다 마르코스가 병원을 비밀리에 방문한 후 아키노는 가족과 함께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응급 휴가'는 아키노가 필리핀으로 돌아올 것과 미국 망명 중 마르코스 정권을 비판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 가지 조건 하에 허락되었다. 아키노는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필리핀계 미국인 심장 전문의 롤란도 M. 솔리스에게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빠르게 회복한 그는 "악마와의 계약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마르코스와의 합의를 파기했다.[35]

이후 아키노는 아내 코리와 자녀들과 함께 매사추세츠주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서 펠로우십 지원을 받으며 두 권의 책을 집필하고 강연 활동을 이어갔다. 미국 전역을 다니며 마르코스 정부를 비판하는 연설을 했고, 시리아 다마스쿠스까지 가서 이슬람 지도자들과 모로 민족 해방 전선(MNLF)을 만나 모로 분쟁 중재를 시도하기도 했다.[37][36] 망명 기간 동안 그는 미국에서의 생활이 일시적이라는 점을 항상 인지하고 있었으며, 언젠가는 필리핀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잃지 않았다. 7년 7개월의 수감 생활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가족의 생계를 꾸리면서도 미국 각지에서 열리는 심포지엄에 참석하고 강연하며 마르코스 정권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연설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1981년 2월 15일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윌셔 에벨 극장에서 열린 연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37]

6. 필리핀 귀국 및 암살

1983년 초, 아키노는 필리핀의 정치 상황 악화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건강이 루푸스로 인해 나빠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극단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마르코스를 만나 민주주의로의 평화로운 복귀를 설득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오랜 망명 생활로 인해 필리핀 국민들이 마르코스의 통치에 체념하고 중도 야당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가지고 있었다.[38]

아키노는 투옥되거나 살해될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필리핀 귀국을 결심했다. 그는 "암살자의 총알에 맞아 죽는 것이 내 운명이라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대응이나 암살의 두려움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 머물 수는 없다..."[39]라고 말했다. 당시 아키노 가족의 여권은 만료되었고 필리핀 영사관은 외무부 지시로 여권 갱신을 거부했다. 이에 아키노는 먼저 혼자 귀국하고 가족은 나중에 합류하기로 계획했다. 그는 전 민다나오 입법자이자 모로족 분리주의 단체 방사모로 해방 전선 창립자인 라시드 루크만의 도움으로 '마르시알 보니파시오'(Marcial Bonifacio영어)라는 가명이 적힌 여권을 얻었다. 이 가명은 계엄령(Martial Law)과 그가 수감되었던 포트 보니파시오(en)를 상징했다.[40] 이후 일로코스노르테 국회의원 로케 아블란 주니어의 도움으로 합법적인 여권도 확보했다. 마르코스 정부는 모든 국제 항공사에 아키노 탑승 시 착륙 거부 및 강제 송환을 경고했지만, 아키노는 귀국이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1983년 8월 13일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로스앤젤레스, 싱가포르를 경유하는 우회 경로를 택했다. 싱가포르에서는 당시 조호르의 툰쿠 이브라힘 이스마일을 만나 말레이시아 조호르로 이동하여 술탄 이스칸다르 등 다른 말레이시아 지도자들을 만났다.[41][42] 이후 홍콩을 거쳐 타이베이로 향했다. 필리핀이 중화민국(대만)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기 때문에 타이베이를 마지막 경유지로 선택했는데, 이는 대만 정부가 그의 존재를 모른 척할 수 있어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귀국 전 아키노는 "필리핀인은 죽을 가치가 있다"고 선언하며 위험을 감수할 의지를 보였다.[43] 그는 마르코스에게 평화로운 정권 교체와 민주주의 제도 복귀를 호소하고자 했다. 타이베이 그랜드 호텔 인터뷰에서는 방탄복을 입을 것이라면서도 "그것은 몸에만 좋고, 머리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비행기에 동승한 기자들에게 "카메라를 항상 준비해야 한다. 이 행동은 매우 빨리 끝날 수 있다. 3, 4분 안에 모든 것이 끝날 수 있고, [웃음] 이 후에 당신들과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44] 암살 직전 비행기 안에서 기자 짐 로리와 가진 마지막 텔레비전 인터뷰[45]가 그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그는 전달하지 못한 마지막 성명에서 "나는 비폭력을 통해 우리의 권리와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돌아왔다. 나는 대립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밝히려 했다.[46]

1983년 8월 21일, 아키노는 타이베이 타오위안 국제공항에서 탑승한 중화항공 811편(보잉 767)으로 마닐라 국제공항(현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기내에는 그의 귀국을 취재하기 위한 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동승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필리핀군 병사 3명이 기내로 들어와 아키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병사들은 함께 나가려던 아키노의 의동생이자 동행 취재 중이던 켄 카시와하라에게 "You just take a seat!|유 저스트 테이크 어 시트!영어"라고 소리치며 제지했다. 아키노가 병사들에게 이끌려 보딩 브리지 옆 계단을 내려가던 순간,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고 그는 머리에 총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74] 그의 마지막 말은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 기자에게 남긴 "반드시 무언가가 일어날 테니, 비디오 카메라를 계속 돌려두세요"였다.

TBS 텔레비전의 요코이 요시오 카메라맨과 ABC의 오오구시 마사아키 카메라맨(이 영상으로 에미상 수상) 등은 총성 직후 계단 아래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 있는 아키노와 푸른 옷을 입은 다른 남성(롤란도 갈만)의 시신을 촬영했다.[74] 하지만 병사들이 출입구를 막아섰기 때문에 발포 순간을 직접 포착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TBS가 촬영한 영상에는 아키노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할 때, 계단 아래에서 대기하던 병사가 필리핀어로 "푸시라! 푸시라!(쏴라! 쏴라!)"라고 외치는 소리가 녹음되었고, 직후 총성이 울렸다.

사건 직후 필리핀 정부는 공항 경비원으로 위장한 롤란도 갈만(Rolando Galman)이라는 남성이 아키노를 사살했으며, 범인은 현장에서 군인들에게 즉시 사살되었다고 발표했다. 또한 정부는 이 사건이 필리핀 공산당 산하 게릴라 조직인 신 인민군 소속 갈만의 단독 범행이며, 정부나 군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키노와 동행 취재했던 일본인 저널리스트 와카미야 키요시는 연행하던 병사가 아키노를 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75] 마르코스 독재 정권 하의 필리핀 정부는 이러한 목격 증언을 묵살했다.

TBS는 사건 일주일 후인 8월 28일, 보도 프로그램 JNN 보도 특집에서 "아키노 백주 대낮 암살"이라는 제목의 특별 방송을 통해 촬영된 영상을 분석하며 필리핀 정부 발표의 모순점을 지적했다. 방송에서는 연행 병사가 발표된 3명이 아니라 4명(후에 필리핀 정부는 지휘관 1명을 포함해 총 5명이라고 정정)이었으며, 시신의 총상이 뒤통수에서 턱으로 비스듬히 관통한 점을 들어 갈만의 .357 매그넘탄으로는 그러한 상처가 남기 어렵다는 총기 전문가의 분석을 제시했다. 또한, 일본 음향 연구소의 스즈키 마츠미는 발포음 분석을 통해 암살에 사용된 총이 갈만의 것이 아닌 필리핀 군인이 휴대하는 콜트 M1911임을 밝혀냈고, 항공기 소음을 제거한 음성 분석 결과 아키노를 연행하던 병사들이 "아코나(내가 한다)", "푸실라(쏴)"라고 외친 사실을 확인하여 필리핀 법정에서 증언했다.

사건 당시 마르코스 대통령은 신장 이식 수술 후 회복 중이어서 직접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알려졌다. 그는 병상에서 사건 소식을 접하고 다음 날, 좋지 않은 몸 상태로 기자회견을 열어 조사위원회 설치를 지시했다. 약 1년 후인 1984년 10월, 중립조사위원회는 이 암살이 군 참모총장 파비안 C. 베르 장군이 꾸민 군사적 음모라고 결론 내렸다. 위원회는 베르 장군을 포함한 다수의 군 고위 간부들을 공모 혐의로 고발했지만, 그들은 재판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활주로 경비를 섰던 하급 병사들은 무기 징역을 선고받고 투옥되었으나, 나중에 사면으로 감형되었다. 투옥된 병사 중 한 명은 암살의 배후로 마르코스의 친구이자 코라손 아키노의 사촌인 Eduardo Cojuangco Jr.|에두아르도 코후앙코 주니어영어를 지목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필리핀 국민들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그의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가 암살을 사주했다고 믿었다.

8월 31일에 거행된 아키노의 장례식은 오전 9시에 시작되었으나, 200만 명이 넘는 추모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관이 묘지에 안치된 것은 12시간이 지난 오후 9시였다. 장례 미사는 필리핀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하이메 신 추기경이 산토 도밍고 교회에서 집전했다. 마르코스 정권의 눈치를 보던 대부분의 언론 매체는 장례식 중계를 꺼렸지만, 가톨릭 교회가 후원하는 라디오 베리타스 아시아가 유일하게 장례식 상황을 실황 중계했다. 장례식 행렬이 리잘 공원을 지날 때, 군중들은 기념비에 게양되어 있던 필리핀 국기를 강제로 내려 반기로 게양하며 마르코스 정권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7. 암살 이후 및 여파

B-1836, 아키노 암살 당시 이용된 중화항공 여객기가 홍콩 카이탁 공항에 주기된 모습.


2008년 타를라크의 아키노 센터 및 박물관에 전시된 아키노 암살 당시 피 묻은 옷가지들.


아키노는 1983년 8월 21일 귀국 직후 마닐라 국제공항(현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 활주로에서 머리에 총격을 당해 암살되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부는 롤란도 갈만이라는 인물을 암살범으로 지목하고, 그가 필리핀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청부 살인범이라고 발표했다.[75] 그러나 현장에서 즉시 사살된 갈만의 단독 범행이라는 정부 발표는 많은 의혹을 낳았으며, 필리핀 국민들은 마르코스 부부의 사주 가능성을 강하게 의심했다.

사건 조사를 위해 코라손 아그라바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군 참모총장 파비안 베르를 포함한 군인 25명과 민간인 1명을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1985년 12월 2일, 산디간바얀(필리핀 특별법원)은 이들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훗날 필리핀 대법원은 이 재판을 "독재적 대통령"의 명령에 따른 "모의 재판"이었다고 평가하며 강하게 비판했다.[47]

마르코스 정권이 에드사 혁명으로 붕괴된 후,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이루어져 16명의 군인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들은 1990년 산디간바얀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48] 유죄 판결을 받은 군인들은 수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석방되었으며, 마지막 석방자는 2009년 3월에 풀려났다.[49][50] 재판 과정에서는 일본 TBS 텔레비전 카메라맨이 촬영한 영상과 일본 음향 연구소의 스즈키 마츠미 소장이 분석한 음성 기록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되었다. 스즈키 소장은 분석을 통해 암살 직전 병사들이 필리핀어로 "아코나(내가 한다)", "푸실라(쏴)"라고 외치는 소리를 확인했으며, 사용된 총기가 갈만의 것으로 알려진 .357 매그넘탄 리볼버가 아닌 군용 콜트 M1911 권총임을 밝혀내 필리핀 법정에서 증언했다.[74] 또한 사건 당시 아키노와 동행했던 일본인 저널리스트 와카미야 키요시는 연행하던 병사가 아키노를 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75]

아키노 암살 사건은 필리핀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마르코스 독재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촉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산발적이었던 반 마르코스 운동은 사건 이후 필리핀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야당 세력은 연합 민족 민주 기구(UNIDO)와 필리핀 민주당-국민의 힘(PDP–Laban)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마르코스의 집권당인 신사회운동(KBL)에 맞섰다. 아키노 암살 이후 고조된 반정부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1984년 필리핀 의회 선거에서 야당은 총 183석 중 61석(약 33%)을 확보하며 이전 선거에 비해 크게 약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51]

아키노의 암살은 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를 정치 무대의 중심으로 이끌었다. 코라손 아키노는 1986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단일 후보로 출마하여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맞붙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마르코스의 승리를 선언했으나, 광범위한 부정 선거 의혹이 제기되면서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결국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민중 시위인 에드사 혁명(피플 파워 혁명)이 일어났고, 후안 폰세 엔릴레 국방장관과 피델 라모스 부참모총장 등 군부 핵심 인사들마저 마르코스에게 등을 돌렸다. 민중의 힘과 군부의 지지 철회로 마르코스는 결국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으며, 코라손 아키노가 필리핀의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민주주의 회복의 길을 열었다.

8. 장례식

암살 몇 시간 후, 아키노의 유해는 마카티에 있는 로욜라 메모리얼 채플에서 부검을 받았다.[53][54] 당시 보스턴에 있던 그의 아내 코리는 일본 국회의원이자 가족 친구인 이시하라 신타로로부터 전화로 남편의 암살 소식을 들었다.[55]

다음 날, 그의 유해는 케손 시 타임스 스트리트에 있는 아키노 자택에 안치되어 며칠간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때 그의 옷은 암살 당시 피 묻은 그대로였으며, 얼굴의 총상 부위를 가리기 위한 어떠한 처리도 하지 않았다. 이는 아키노의 어머니 오로라가 장례식장에 "그들이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사람들이) 보게 하라"며 화장이나 방부 처리를 하지 말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후 유해는 산토 도밍고 교회로 옮겨졌다.[56] 수천 명의 지지자들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57] 아내 코라손과 자녀 발시, 핑키, 비엘, 베니그노 아키노 3세, 그리고 크리스 아키노는 8월 23일 필리핀에 도착했다.[56]

아키노의 유해는 8월 29일, 그의 고향인 타를락 주 콘셉시온과 아시엔다 루이시타 예배당에서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옮겨졌다.[56]

1983년 8월 31일, 최종 장례 행렬을 위해 유해는 메트로 마닐라로 돌아왔다. 장례식은 오전 9시 산토 도밍고 교회에서 마닐라 대주교인 하이메 신 추기경의 집전으로 장례 미사를 시작하여, 오후 9시 파라냐케의 마닐라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될 때까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58] 2백만 명이 넘는 엄청난 인파가 거리로 나와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이 장례식은 정부의 언론 통제에도 불구하고 교회 소유의 라디오 베리타스와 DZRH 등 일부 방송국을 통해 필리핀 전역에 중계되었다.[59]

당시 자유당 대표였던 호비토 살롱가는 아키노를 추모하며 "우리가 결코 갖지 못했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칭했다.[60]


9. 역사적 평가 및 유산

2000년 필리핀 우표 속 니노이 아키노


아키노는 당대 가장 뛰어나고 역동적인 정치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 계엄령 선포 이전에는 필리핀 정치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기득권 가문의 엘리트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매력적이고 뛰어난 언변을 가졌지만, 비판적인 시각에서는 집권 정치 계급의 야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범죄자 신분으로 7년 7개월간 투옥되었을 때, 워터게이트 공모자였던 찰스 컬슨의 저서 ''Born Again''을 읽고 정신적인 각성을 경험했다.[61]

이후 그의 남은 삶은 뚜렷한 영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그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억압적인 통치에 맞서 비폭력 저항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로 부상했으며, 이는 필리핀의 독립 영웅 호세 리잘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마하트마 간디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저항 노선을 따랐다.[62] 당시 마르코스 정권에 맞서 싸웠던 일부 학생 운동가들(현재 상원의원인 리사 혼티베로스 포함)은 처음에는 아키노를 기성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여겼으나, 그가 목숨을 걸고 필리핀으로 돌아와 결국 암살당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단순한 정치인 이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회고한다.[63][64]

케손 시티에 있는 반타요그 응 마가 바야니의 기억의 벽 상세, 니노이 아키노를 포함한 반타요그 명예 헌정자 첫 번째 배치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아키노의 희생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필리핀 사회에 큰 영향을 남겼다. 그가 암살된 마닐라 국제공항은 1987년 그의 이름을 따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NAIA)으로 개명되었다. 니노이 아키노 공원 및 야생동물 센터를 비롯한 여러 학교, 도로, 공공 시설에도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의 모습은 500 페소 지폐 도안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발행된 지폐에는 부인 코라손 아키노와 함께 등장한다.

1987년 발행된 500페소 지폐(실효권).


2004년 2월 25일,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은 아키노의 서거일을 기려 매년 8월 21일을 '니노이 아키노 데이'라는 이름의 특별 공휴일로 지정하는 공화국법 제9256호에 서명했다. 필리핀 곳곳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졌다. 대표적으로 마카티의 파세오 데 록사스와 아얄라 애비뉴 교차로에 있는 청동 기념물, 타를라크주 콘셉시온 시청 앞의 동상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케손 시티의 피플 파워 기념비,[67] 파라냐케,[68] 타를라크 시티, 마닐라 등 여러 지역에 기념물이 있다.

아키노는 마르코스 독재 정권에 저항한 인물들을 기리는 기념물인 반타요그 응 마가 바야니(영웅들의 기념비)에 호세 W. 디옥노, 로렌조 타냐다 전 상원의원 등과 함께 가장 먼저 헌정된 인물 중 한 명이다. 또한 필리핀 폴리텍 대학교의 중앙 도서관은 '니노이 아키노 도서관 및 학습 자원 센터'로 명명되어 그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그의 아들 베니그노 아키노 3세는 2010년 필리핀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이었으며, 딸 크리스 아키노는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10. 수상 내역


  • 케손 십자 훈장 약장
    케손 십자 훈장 - 사후 추서 (2004년 8월 21일)
  • 필리핀 명예 훈장, 사령관 (1958) 약장
    필리핀 명예 훈장, 사령관, 제1 브론즈 아나하우 잎 (1958), 가르시아 행정부 대통령 보좌관 역임 공로.
  • 필리핀 명예 훈장, 사령관 (1954) 약장
    필리핀 명예 훈장, 사령관 (Komandante) (1954), 루이스 타루크의 필리핀 정부 항복 협상 공로.
  • 필리핀 명예 훈장, 장교 약장
    필리핀 명예 훈장, 장교 (Pinuno) (1950), 한국 전쟁에서 필리핀 군대의 상황 보고 공로.
  • 리잘 기사단 약장
    리잘 기사단 - 리잘 기사단 대십자 훈장.[70] 사후 추서 (1986년)

11. 개인사

베니그노 시메온 아키노 주니어는 1932년 11월 27일 타를락주 콩셉시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Benigno Aquino Sr.|베니그노 아키노 시니어eng는 당시 필리핀 상원 의원이자 필리핀 상원 원내대표였으며, 호세 P. 라우렐 정권 하에서도 활동한 정치인이었으나,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어머니는 유서 깊은 아시엔다 가문의 아우로라 아키노였다.[10] 그의 할아버지 세르빌라노 아키노는 초대 필리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혁명군 장군이었다.[11]

아키노는 데 라 살 대학교 기초 교육 과정을 거쳐 퀘존 시 세인트 조셉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산 베다 칼리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아테네오 데 마닐라 대학교에서 문학 학위를 받기 위해 공부했으나 중단했다.[12] 그는 스스로를 평범한 학생이라고 생각했으며, 성적은 뛰어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7세에는 ''마닐라 타임스'' 소속으로 한국 전쟁을 취재한 최연소 종군 기자가 되었고, 이 공로로 18세에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으로부터 필리핀 명예 훈장을 받았다. 이후 필리핀 대학교 딜리만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같은 동문회인 업실론 시그마 파이 회원이 되었으나, 다시 학업을 중단하고 언론인 경력을 이어갔다.[12]

1954년 10월 11일, 그는 코라손 수물롱 코후앙코(코리)와 파사이의 슬픔의 성모 교회에서 결혼했다. 결혼식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라몬 마그사이사이가 증인으로 참석했다.[12] 코라손과의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두었다.[71]

이름출생일배우자자녀
마리아 엘레나 ("볼시")1955년 8월 18일엘돈 크루즈저스틴 베니그노(지기), 엘돈 주니어(존티)
아우로라 코라손 ("핑키")1957년 12월 27일마누엘 아벨라다미겔 제라르도(미겔), 아나 코라손(니나)
베니그노 시메온 3세 ("노이노이")1960년 2월 8일 ~ 2021년 6월 24일(미혼)(없음)
빅토리아 엘리사 ("비엘")1961년 10월 27일조셉 디프란시스 조셉(키코), 자신타 파트리샤(자)
크리스티나 베르나데트 ("크리스")1971년 2월 14일제임스 얍 (2010년 이혼)조슈아 필립 아키노 살바도르(조쉬), 제임스 아키노 얍 주니어(빔비)



아키노는 가톨릭교 신자로 자랐다. 1981년 팻 로버트슨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 하에서 독방에 수감되었을 때 복음주의 기독교 작가 찰스 콜슨의 1976년 저서 ''Born Againeng''을 읽고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었다고 밝혔다.[72]

미국 망명 시절에는 비슷한 처지에 있던 대한민국 정치인 김대중과 인연을 맺었다. 1982년 말부터 1983년 여름까지 짧은 기간이었지만 깊은 친분을 쌓았고, 아키노는 자신이 아끼던 수동식 타자기를 김대중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이 인연으로 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는 1998년 김대중의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76][77]

12. 대중문화

베니그노 아키노 2세는 여러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연극 등에서 묘사되었다.


  • 영화:
  • 1994년 영화 《세자르 클리마코 시장》에서는 배우 아마도 코르테스가 아키노를 연기했다.
  • 1997년 영화 《일라반 모, 바얀 코: 오벳 파그다낭안 이야기》에서는 당시 상원 의원이자 아키노의 상원 법률 참모였던 라울 로코가 그를 연기했다.
  • 2003년 전기 영화 《차비트: 일로코스의 피의 아들》에서는 당시 발렌수엘라 시장이었던 바비트 카를로스가 아키노 역을 맡았다.
  • 다큐멘터리 영화 《니노이의 마지막 여정》에서는 그의 조카인 전 상원 의원 밤 아키노가 직접 아키노를 연기했다.
  • 영화 《위험한 삶》에서도 아키노는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 영화 《순교자 혹은 살인자》에서는 이스코 모레노가 아키노를 연기했으며, 어린 시절의 아키노는 제롬 폰세가 연기했다.[73]
  • 역사 드라마 영화 《아코 시 니노이》에서는 JK 라바호가 아키노 역을 맡았다.

  • 텔레비전:
  • 2010년 방영된 ABS-CBN의 드라마 《마알라알라 모 카야》의 "니노이 & 코리 아키노 이야기" 2부작 에피소드("칼라파티"와 "마키닐리아")에서는 배우 피올로 파스쿠알이 아키노를 연기했다.

  • 연극:
  • 뮤지컬 《Here Lies Love》에서는 배우 콘라드 리카모라가 아키노 역을 맡아 오프 브로드웨이와 시애틀 레퍼토리 극장 무대에 섰다. 리카모라는 2023년 브로드웨이에서 재상연된 같은 뮤지컬에서도 동일한 역할을 다시 연기했다.

  • 문학 및 음악:
  • 아키노는 1973년 구금되어 있던 시절, 부인 코리 아키노를 위해 19절로 이루어진 시 I Have Fallen in Love with the Same Woman Three Times|나는 같은 여자를 세 번 사랑에 빠졌다영어를 썼다.
  • 이 시는 훗날 가수 호세 마리 찬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져 그의 1989년 앨범 《끊임없는 변화》(Constant Change|끊임없는 변화영어)에 수록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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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뉴스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 전 대통령,한국 개혁 기원한다 http://imnews.imb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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