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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4세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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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두앵 4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으로, 어릴 적 나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117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몽기사르 전투에서 살라딘을 상대로 승리하는 등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였으나, 나병의 악화로 인해 섭정을 거쳐 보두앵 5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2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용기와 결단력은 십자군 역사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대중문화에서도 여러 작품으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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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4세 (예루살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볼드윈 4세의 13세기 대관식 묘사
볼드윈 4세의 대관식 (13세기 묘사)
군주 칭호예루살렘 왕
재위 기간1174년 7월 11일1185년 3월
대관식1174년 7월 15일
선임자아모리
후임자보두앵 5세 (단독 왕으로서)
섭정보두앵 5세 (1183년–1185년)
섭정 유형공동 왕
왕가앙주
아버지아모리 1세
어머니아녜스 드 쿠르트네
출생일1161년 중반
출생지예루살렘 왕국
사망일1185년 3월에서 5월 사이
매장지성묘 교회
별칭나병왕
통치 기간
통치 시작1163년
통치 종료1174년

2. 젊은 시절

보두앵은 1161년 중반, 예루살렘의 아말릭과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대부는 삼촌인 보두앵 3세였다. 보두앵 3세는 세례 선물이 예루살렘 왕국이라고 농담했다.[2] 당시 보두앵 3세는 젊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카가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은 낮아 보였지만, 1163년에 자식 없이 사망했다.[2] 아말릭이 그의 상속자가 되었지만, 왕국의 귀족들은 아그네스에게 강하게 반대했다. 예루살렘 고등 법원은 아말릭이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근친상간을 이유로 결혼 무효에 동의하도록 강요했다.[2] 아말릭은 결혼 무효에도 불구하고 아그네스와의 자녀인 예루살렘의 시빌라와 보두앵의 적자 선언을 성공시켰다.[2]

보두앵은 아버지의 궁정에서 어머니 없이 자랐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했기 때문이다. 보두앵이 9세가 되던 해, 고전학자이자 역사학자인 티레대주교 기욤이 가정교사로 배치되어 가르침을 받았다. 어느 날, 보두앵이 친구들과 놀다가 서로의 손을 할퀴었는데, 보두앵만이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기욤은 보두앵을 의사에게 데려갔고, 나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1] 이후 보두앵의 나병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1174년, 아버지 아말릭 1세가 이질로 사망하자, 보두앵 4세는 13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1]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귀족 파벌 간의 대립과 살라딘 휘하 이슬람 세력의 확장으로 존망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보두앵은 나이가 어려 국정을 맡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에, 트리폴리의 레몽 3세와 플랑시의 밀 등 두 명의 섭정이 비공식적으로 섭정을 맡았다.[1] 1175년, 레몽 3세는 살라딘과 조약을 맺었다.[1]

나병 환자였던 보두앵의 재위 기간과 상속자 생산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이에 따라 신하들과 영주들은 왕위 계승 후보자인 누이 시빌라 공주와 배다른 누이 이사벨라 공주의 영향력을 받게 되었다.[1]

2. 1. 교육과 나병의 발견

보두앵은 어렸을 때 아버지 예루살렘의 아말릭과 어머니 쿠르트네의 아그네스가 강제로 헤어지면서, 아버지의 궁정에서 어머니 없이 자랐다. 9세 때 티레대주교이자 역사학자인 티레의 기욤에게 교육을 받았다.

어느 날, 보두앵이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서로의 손을 할퀴었는데, 보두앵만이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기욤은 보두앵을 의사에게 데려갔고, 보두앵은 나병 진단을 받았다. 기욤에 따르면, 보두앵은 재능 있고 매력적인 미소년이었으며, 쾌활하고 활발하며 운동 신경도 좋았고, 이미 혼자서 말을 능숙하게 탈 수 있었다. 또한 머리 회전이 빠르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모욕은 잊지 않았지만 받은 은혜는 더더욱 잊지 않았다. 특히 라틴 문학과 역사에 열중했다.[1]

놀이터에서 놀던 보두앵과 티레의 윌리엄이 보두앵의 나병 초기 증상을 발견하는 모습, 1250년대 프랑스에서 제작된 ''에스투아르 데르라클''에서


아말릭 왕은 보두앵이 훌륭한 교육을 받도록 했다. 아랍 의사 아부 술라이만 다우드가 보두앵을 치료했고, 다른 아랍인 아불카이르가 보두앵에게 승마를 가르쳤다. 보두앵은 한 손에만 감각이 있었기 때문에, 말타기 훈련을 할 때 오로지 무릎만 사용하여 말을 제어하는 법을 배웠고, 신체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승마를 숙달했다.

2. 2. 나병의 확산과 왕위 계승

보두앵은 어린 시절 아버지 아말릭 1세와 어머니 쿠르트네의 아녜스가 6년간의 결혼 생활 후 강제로 헤어진 후, 어머니 없이 자랐다.[2] 아녜스는 결혼 무효 후 곧 재혼했다.[2] 해밀턴은 그녀가 보두앵을 공적인 자리에서만 만났을 것이라고 추측한다.[2] 보두앵은 증조모 이오베타에 의해 성 라자루스 수도원에서 자란 누나 시빌라도 거의 만나지 못했다.[2] 여섯 살 때 의붓어머니 예루살렘의 마리아 콤네네 여왕을 얻었지만, 그녀와는 친하지 않았다. 마리아 여왕은 야심 찬 여성이었고 보두앵을 자신의 자녀들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3]

아말릭 왕은 왕국의 추정 상속자인 보두앵이 훌륭한 교육을 받도록 했다. 아홉 살의 보두앵은 학식이 풍부하고 여행 경험이 많은 성직자인 티레의 윌리엄과 함께 살도록 보내졌다. 윌리엄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보두앵은 친구들이 꼬집어도 울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튜터는 보두앵이 오른팔에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4]

왕은 아랍 의사 아부 술라이만 다우드를 고용하여 보두앵을 치료하고, 또 다른 아랍인 아불카이르를 고용하여 보두앵에게 승마를 가르치게 했는데, 이는 프랑크 귀족에게 필수적인 기술이었다. 보두앵은 한 손에만 감각이 있었기 때문에, 말타기 훈련을 할 때 오로지 무릎만 사용하여 말을 제어하는 법을 배워야 했고, 신체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승마를 숙달했다.[5] 나병이 의심되었지만 아직 뚜렷한 증상은 없었고, 의사들은 소년이 직면하게 될 낙인 때문에 진단을 망설였다.[5] 어린 보두앵에게 그러한 진단이 내려졌다면, 보두앵은 나병에 걸린 기사와 병참병으로 구성된 군사 기사단인 성 라자루스 기사단에 입단해야 했을 것이다.

보두앵이 아홉 살이 되던 해, 고전학자이자 역사학자인 티레대주교 기욤이 가정교사로 배치되어 가르침을 받았다. 어느 날, 보두앵이 친구들과 놀다가 서로의 손을 할퀴는 부상을 입었는데, 보두앵만이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기욤은 즉시 보두앵을 의사에게 데려갔고, 보두앵은 나병이라는 심각한 피부병 진단을 받았다.[1] 이후 보두앵의 나병은 급속도로 확산되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1]

청소년이 된 보두앵은 조숙하고, 결단력이 있으며, 질병에 굴하지 않는 낙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아버지의 외모, 체형, 걷는 모습, 표현 방식 등을 닮았다. 보두앵은 빠르게 배우는 학생이었지만 말을 더듬었다. 그는 이야기와 역사 수업을 듣는 것을 즐겼다. 그의 튜터인 윌리엄은 보두앵의 뛰어난 기억력에 대해 언급하며, 그가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친절과 모욕을 모두 잊지 않는다고 말했다.

1174년, 아버지 아말릭 1세가 죽자 보두앵 4세는 13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1]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귀족 파벌 간의 대립과 살라딘 휘하 이슬람 세력의 확장으로 존망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보두앵은 나이가 어려 국정을 맡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에, 트리폴리의 레몽 3세와 플랑시의 밀 등 두 명의 섭정이 비공식적으로 섭정을 맡았다.[1] 1175년, 레몽 3세는 살라딘과 조약을 맺었다.[1]

아말리크가 보두앵 4세를 왕으로 즉위시키는 모습은 13세기 후반 ''십자군 이야기''의 판본에 묘사되어 있다.


아말리크가 사망하자, 고등 법원은 왕위 계승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고등 법원은 보두앵이 나병에 걸렸다는 왕실 의사들의 의심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대안은 없었다. 보두앵은 왕의 유일한 아들이었고, 아말리크의 두 번째 결혼으로 두 딸이 태어났지만 이사벨라만이 유아기를 넘겼다. 여성의 계승도 명시적으로 허용되었지만, 시빌라는 미혼의 십대였고 이사벨라는 겨우 두 살이었다. 남성 후보인 아말리크의 사촌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3세, 안티오키아의 보두앵,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는 정치적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보에몽은 멀리 떨어진 안티오키아 공국에 묶여 있었고, 보두앵은 비잔틴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를 섬기고 있었으며, 레몽은 9년 동안 이슬람 포로 생활을 한 후 남작들에게 거의 낯선 사람이었다.

3일간의 심의 끝에 보두앵 4세가 선택되었고, 그가 영향을 받는 것으로 밝혀지면 그를 계승할 시빌라의 남편을 찾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어린 왕의 대관식은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 네슬의 아말리크에 의해 즉시 성묘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중세 통치자들은 일반적으로 일요일에 대관식을 치렀지만, 보두앵의 경우 1174년 7월 15일이 제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 75주년이었기 때문에 대신 선택되었다.

나병 환자였던 보두앵의 재위 기간과 상속자 생산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이에 따라 신하들과 영주들은 왕위 계승 후보자인 누이 시빌라 공주와 배다른 누이 이사벨라 공주의 영향력을 받게 되었다. 시빌라는 베타니아 수녀원의 대고모 로베타의 보살핌을 받았고, 이사벨라는 어머니 나블루스의 왕태후 마리아 콤네나의 보살핌을 받았다.[1]

3. 통치 기간

트리폴리 백작레몽 3세의 섭정은 보두앵 4세의 즉위 2주년에 끝났다. 보두앵 4세는 15세 성년이 되자, 레몽이 살라딘과 맺은 조약을 비준하는 대신 다마스쿠스베카 계곡 주변을 급습했다. 이는 왕국에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외삼촌 조슬랭 3세를 에데사 백작에 임명하여 신뢰할 수 있는 보조자로 삼았다.[2]

레몽은 시빌라 공주의 결혼 상대로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사촌인 몬페라토의 굴리엘모와의 교섭을 시작했다. 굴리엘모는 10월 초에 도착해 야파와 아스칼론의 백작이 되었고, 시빌라와 함께 보두앵의 뒤를 이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1177년 6월 말라리아로 사망하고, 시빌라는 아들 보두앵 5세를 낳았다.[2]

보두앵 4세는 이집트에 있는 살라딘의 세력 기반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며, 동로마 제국의 마누엘 1세 콤네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샤티용의 레날드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레날드는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의 의붓아버지였기 때문에 마누엘이 그의 몸값을 지불하여 해방되었고, 이후 밀리의 스테파니와의 결혼으로 사해 근처의 알 카라크 성채를 얻었다. 보두앵 4세는 레날드와 굴리엘모에게 남쪽 방위에 대한 협력을 보증받았다.

1177년 8월, 보두앵의 사촌 플랑드르의 필리프가 예루살렘에 왔으나, 필리프의 요구에 이벨린의 보두앵이 항의하자 예루살렘을 떠났다.

1177년 11월, 살라딘은 2만 6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아스칼론 요새를 급습하려 했다. 보두앵 4세는 약 400명의 기병과 수천의 보병을 이끌고 요새에 도착하여 포위당했으나, 예수가 못박혔다고 전해지는 성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며 병사들을 고무시켜 항전 의지를 다졌다. 몽기사르 전투에서 살라딘의 대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으로 개선했다.[3] 같은 해, 보두앵은 의붓어머니 마리아와 이벨린의 발리앙의 혼인을 승낙했다.

1179년 마르주 아윤 전투에서 패배하고, 야곱의 여울 전투에서 샤스텔레 성 건설이 좌절되기도 했지만,[3] 요르단강 상류에 요새를 건설하고 살라딘 군과 계속 싸웠으며, 1180년에는 이슬람 세력과 강화 협정을 맺었다.[3]

1180년 여름, 보두앵 4세는 시빌라를 기와 결혼시켰다. 기는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의 가신이라는 점이 강점으로 부각되어 보두앵 5세의 후견인으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보두앵은 또한 여덟 살의 이복 누이 이사벨라를 토론의 험프리 4세와 약혼시켰다.

1181년, 르노 드 샤티용이 휴전을 파기하고 대상단을 습격하자, 1182년 살라딘은 외요르단으로 쳐들어왔다. 보두앵 4세는 르노의 행동에 격분했지만, 구원 요청을 받고 모압에서 갈릴리까지 전전하며 살라딘의 대군을 물리쳤고, 8월에는 베이루트 방어에도 성공했다.[3]

기는 레날드와 손잡고 대상을 괴롭혔고, 살라딘은 1182년 벨보어 성 전투로 앙갚음했으나 십자군이 승리했다. 1183년경 보두앵의 병세가 악화되자 기가 섭정을 위임받았으나, 무능함과 불충으로 인해 섭정 지위를 박탈당했다.

보두앵 4세는 이슬람권 내 누르 앗딘 가문에 속하는 알레포 총독과 모술 총독의 독립을 도와 살라딘에 대항했다. 이 두 도시를 살라딘이 공격하자 보두앵 4세는 다마스쿠스호란 지방에 강력한 견제 공격을 가했고, 다마스쿠스 근교 다라야까지 진격했다. 1183년 11월, 르노가 다시 히자즈 지방을 약탈하여 살라딘의 반격을 유발하자, 보두앵 4세는 전신 불수, 맹인인 상태로 들것에 실려 케라크 성에 도착하여 살라딘 군과 싸웠다. 살라딘이 퇴각한 후, 수비대를 증강하고 성벽을 재건하기 전까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았다.[3]

3. 1. 섭정 시대



아말리크가 사망하자, 고등 법원은 왕위 계승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1] 왕실 의사들은 보두앵이 나병에 걸렸다고 의심했지만, 아직 확진 판정을 내리지는 않은 상태였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두앵 외에는 마땅한 왕위 계승자가 없었다. 보두앵은 아말리크의 유일한 아들이었고, 아말리크의 두 번째 결혼으로 태어난 두 딸 중에서는 이사벨라만이 유아기를 넘겼다.[3][4] 여성의 왕위 계승도 허용되었지만, 시빌라는 미혼의 십대였고 이사벨라는 겨우 두 살이었다.[5]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3세, 안티오키아의 보두앵,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 등 아말리크의 사촌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적합하지 않았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공국에 묶여 있었고, 보두앵은 비잔틴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를 섬기고 있었으며, 레몽은 9년간 이슬람 포로 생활을 해 남작들에게 낯선 인물이었다.

3일간의 논의 끝에 보두앵 4세가 왕으로 선택되었고, 만약 그가 병약해지면 시빌라의 남편이 왕위를 계승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어린 보두앵의 대관식은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 네슬의 아말리크에 의해 성묘 교회에서 즉시 거행되었다. 중세 통치자들은 보통 일요일에 대관식을 치렀지만, 보두앵의 대관식은 1174년 7월 15일에 거행되었는데, 이날은 제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 75주년이었다.

트리폴리의 레이몽 3세의 인장


보두앵은 예루살렘 왕국의 법에 따라 15세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을 통해 통치해야 했다. 처음에는 재상 플랑시의 밀레스가 섭정을 맡았다. 얼마 후,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왕의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섭정 자리를 주장했고, 성공했다. 플랑시는 권력을 확대하려다 살해당했다. 이후 2년 동안 재상은 임명되지 않았고, 어린 보두앵은 섭정 레몽이 군사 임무나 트리폴리 방문으로 자리를 비울 때 어려운 고등 법원 회의를 주재했다.

보두앵의 어머니 아그네스는 레몽이 섭정이 되자 궁정으로 돌아왔다. 역사가들은 아녜스가 아들의 병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고 비난하지만, 보두앵의 가정교사였던 티레의 윌리엄을 포함한 동시대 자료들이 아녜스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보두앵은 두 살 때부터 어머니 없이 자랐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었지만, 아녜스는 아들에게 헌신적으로 친절했고, 보두앵은 어머니에게 강한 애착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섭정 기간 동안 보두앵이 실제로 나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감염 경로는 확실하지 않다. 의학 역사가 피어스 미첼은 보두앵이 어린 시절 가족, 유모, 하인 등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뚜렷한 증상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에게서 감염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사춘기는 나병의 나종 형태 발달을 가속화했을 수 있다. 보두앵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었고, 사지와 얼굴이 가장 심하게 영향을 받아 백성들이 그에게 다가갈 때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나 일반적인 관행과 달리, 보두앵은 이슬람 관찰자들도 놀랄 정도로 격리되지 않았다. 나병 환자였던 보두앵은 결혼하거나 자녀를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보두앵의 여동생이자 추정 상속녀인 시빌라의 정략 결혼이 우선 과제가 되었다. 레몽은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변경백 몬페라토의 빌헬름 5세의 아들이자 신성 로마 제국 프리드리히 1세와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사촌인 몬페라토의 빌헬름을 시빌라의 남편감으로 선택했다.

3. 2. 살라딘과의 전쟁

트리폴리 백작레몽 3세의 섭정이 끝난 후, 보두앵 4세는 살라딘과의 조약을 비준하지 않고 다마스쿠스베카 계곡 주변을 급습했다. 이는 잠재적으로 왕국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2] 그는 자신의 외삼촌 조슬랭 3세를 에데사 백작으로 임명하여 신뢰할 수 있는 보조자로 삼았다.

보두앵 4세는 이집트에 있는 살라딘의 세력 기반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동로마 제국의 마누엘 1세 콤네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샤티용의 레날드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2] 레날드는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의 의붓아버지였기 때문에 마누엘이 그의 몸값을 지불하여 해방되었고, 이후 밀리의 스테파니와의 결혼으로 사해 근처의 알 카라크 성채를 얻었다. 보두앵 4세는 레날드와 몬페라토의 굴리엘모에게 남쪽 방위에 대한 협력을 보증받았으나, 굴리엘모는 말라리아로 사망했다.[2]

1177년 11월, 살라딘은 2만 6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아스칼론 요새를 급습하려 했다. 보두앵 4세는 약 400명의 기병과 수천의 보병을 이끌고 요새에 도착하여 포위당했으나, 예수가 못박혔다고 전해지는 성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며 병사들을 고무시켜 항전 의지를 다졌다. 보두앵 4세의 군대는 몽기사르 전투에서 살라딘의 대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으로 개선했다.[3]

1179년 마르주 아윤 전투에서 패배하고, 야곱의 여울 전투에서 샤스텔레 성 건설이 좌절되기도 했지만,[3] 요르단강 상류에 요새를 건설하고 살라딘 군과 계속 싸웠으며, 1180년에는 이슬람 세력과 강화 협정을 맺었다.[3]

1181년, 르노 드 샤티용이 휴전을 파기하고 대상단을 습격하자, 1182년 살라딘은 외요르단으로 쳐들어왔다. 보두앵 4세는 르노의 행동에 격분했지만, 구원 요청을 받고 모압에서 갈릴리까지 전전하며 살라딘의 대군을 물리쳤고, 8월에는 베이루트 방어에도 성공했다.[3]

보두앵 4세는 이슬람권 내 누르 앗딘 가문에 속하는 알레포 총독과 모술 총독의 독립을 도와 살라딘에 대항했다. 이 두 도시를 살라딘이 공격하자 보두앵 4세는 다마스쿠스호란 지방에 강력한 견제 공격을 가했고, 다마스쿠스 근교 다라야까지 진격했다. 1183년 11월, 르노가 다시 히자즈 지방을 약탈하여 살라딘의 반격을 유발하자, 보두앵 4세는 전신 불수, 맹인인 상태로 들것에 실려 케라크 성에 도착하여 살라딘 군과 싸웠다. 살라딘이 퇴각한 후, 수비대를 증강하고 성벽을 재건하기 전까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았다.[3]

3. 3. 내정 문제와 후계자 선정

보두앵 4세는 즉위 2주년에 섭정 기간이 끝나고 15세의 성년이 되었다. 그는 섭정이었던 레몽이 살라딘과 맺은 조약 대신 다마스커스와 베카 계곡 주변을 급습했다. 외삼촌 조슬랭 3세를 에데사 백작으로 임명하여 신뢰할 수 있는 보조자로 삼았다.[4]

레몽은 시빌라 공주의 결혼 상대로 몬페라토의 굴리엘모와의 교섭을 시작했다. 굴리엘모는 10월 초에 도착해 야파와 아스칼론의 백작이 되었고, 시빌라와 함께 보두앵의 뒤를 이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굴리엘모는 1177년 6월 말라리아로 사망하고, 시빌라는 아들 보두앵 5세를 낳았다.[5]

보두앵 4세는 이집트에 있는 살라딘의 세력 기반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며,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샤티용의 레날드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레날드는 사해 근처의 알 카라크 성채를 손에 넣었고, 보두앵은 레날드와 굴리엘모에게 남쪽 방위에 대한 협력을 보증받았다.

1177년 8월, 보두앵의 사촌 플랑드르의 필리프가 예루살렘에 왔으나, 필리프의 요구에 이벨린의 보두앵이 항의하자 예루살렘을 떠났다. 1177년 11월, 살라딘은 아스칼론을 공격하려 했으나, 보두앵 4세는 성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여 사기가 충전된 군대를 이끌고 몽기사르 전투에서 승리했다. 같은 해, 보두앵은 의붓어머니 마리아와 이벨린의 발리앙의 혼인을 승낙했다.

1180년 여름, 보두앵 4세는 시빌라를 기와 결혼시켰다. 기는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의 가신이라는 점이 강점으로 부각되어 보두앵 5세의 후견인으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보두앵은 또한 여덟 살의 이복 누이 이사벨라를 토론의 험프리 4세와 약혼시켰다.

기는 레날드와 손잡고 대상을 괴롭혔고, 살라딘은 1182년 벨보어 성 전투로 앙갚음했으나 십자군이 승리했다. 1183년경 보두앵의 병세가 악화되자 기가 섭정을 위임받았으나, 무능함과 불충으로 인해 섭정 지위를 박탈당했다.

1180년 성주간 동안, 안티오키아 공트리폴리 백작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시빌라를 이벨린의 보두앵과 결혼시키려 했으나, 보두앵 4세는 시빌라와 기의 결혼을 성사시켜 쿠데타는 실패했다.

보두앵 4세는 살라딘과의 2년 휴전을 제안했고, 살라딘은 이를 받아들였다. 1180년 중반부터 1181년 중반까지 조셀린이 부재한 동안 정부의 모든 부담은 건강이 악화되고 있던 보두앵의 어깨 위에 놓였다.

1180년 10월, 보두앵은 이사벨라를 토론의 험프리 4세와 약혼시키고, 험프리는 토론을 보두앵에게 양도했다.

보두앵 4세는 조카의 섭정에 대한 문제로 고심했고, 시빌라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184년 초, 보두앵은 기에게 알현을 명령했으나 기는 거부했다. 보두앵은 고등 법원의 수행원들과 함께 아스칼론으로 이동했으나, 기는 도시 문을 열지 않았다. 보두앵은 아크레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기의 봉토를 압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보두앵 4세는 6월까지 총대주교, 대수도원장과 화해하고, 유럽에 외교 사절로 보냈다. 그는 살라딘이 다시 케라크를 포위하고 있다고 알렸고, 살라딘은 보두앵이 접근하자 포위를 풀었다.

병이 깊어져 결혼의 희망이 사라지자 보두앵은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1183년 가족 회의에서 기에게 섭정권을 위임했지만, 곧 무능함을 드러내 섭정권을 빼앗기고, 11월에 5세의 보두앵 5세 즉위가 선언되었다. 1185년 기는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베두인족을 학살하여, 보두앵 4세는 왕국의 전권을 레몽에게 위임했다.

4. 죽음

보두앵 4세는 1184년 아크레에서 모후인 아그네스가 죽은 지 몇 달 후인 1185년 봄, 예루살렘에서 24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4] 병세가 깊어져 결혼할 희망을 잃게 되자, 보두앵 4세는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보두앵 4세는 시빌라에게 악의는 없었으나, 왕위 계승에서 제외했다. 그는 아그네스와 그녀의 남편 뤼지냥, 레몽, 그리고 다른 봉신들의 지지를 받아 5살에 불과한 어린 조카를 후계자로 임명했다. 보두앵 4세는 조카가 성년이 될 때까지 레몽이 보호자로서 섭정을 맡도록 하였다. 보두앵 4세는 통치를 계속하면서 1183년 11월 20일 어린 조카를 보두앵 5세로 공동 지배자로 내세웠다.[5]

1184년 초, 보두앵 4세는 시빌라와 의 혼인을 무효화하려 했다. 기는 이에 반발하여 보두앵 4세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내 시빌라와 함께 자신의 영지인 아스칼론으로 돌아갔다. 또한 예루살렘 왕국에 귀순하여 보호받던 베두인족을 학살하기도 하였다. 왕실 내분과 케락 구원을 위한 군사 원정으로 보두앵 4세의 건강은 매우 나빠졌다.

1280년판 티레의 윌리엄의 ''Outremer의 역사''에서 발두인 4세의 죽음과 발두인 5세의 대관식


1184년 말, 보두앵 4세는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이집트의 정보를 제공하던 다룸 왕령지의 베두인족 학살에 기가 연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곧 열병에 걸렸다. 1184년 말 또는 1185년 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보두앵 4세는 트리폴리의 레몽에게 섭정을 맡겼다. 그는 죽기 직전 고등 법원에 조카 보두앵 5세의 영구적인 섭정을 임명하도록 소환했고, 레몽이 선택되었다. 죽어가는 왕은 조카를 왕으로, 레몽을 섭정으로 삼아 경의를 표하고, 성묘 교회에서 엄숙한 대관식을 거행하라고 명령했다.

보두앵 4세는 1185년 3월 또는 1185년 5월 16일 이전에 사망했고, 보두앵 5세가 유일한 왕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아버지 아말리크 왕 곁에 있는 성묘 교회에 묻혔다.

5. 평가와 유산

보두앵 4세는 하틴 전투에서 기독교 세력이 패배하면서 그의 유산이 훼손되었고, 역사가들은 보두앵의 통치 기간에 치명적인 불화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보두앵 4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예루살렘 왕국은 영토를 잃지 않았고, 경제적, 정신적으로 번영했다. 보두앵 4세는 살라딘의 세력을 억제하는 것이 중요함을 이해했고, 그의 측근 선택에 이러한 점이 반영되었다. 그는 전략이나 외교를 혼자 결정하지 않고, 교회 후원과 재정 관리를 각각 그의 어머니 아그네스와 삼촌 조슬랭에게 위임했다. 그의 주요 공헌은 나병으로 인해 통치가 견딜 수 없는 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적합한 후계자를 찾을 때까지 퇴위하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그의 통치 기간, 특히 그 재앙적인 여파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보두앵 4세는 홀로 왕국의 단결을 유지했다.

케라크 성

5. 1. 중세 시대의 평가

보두앵 4세는 1183년부터 부축 없이는 걷거나 손을 사용할 수 없었다. 눈을 깜빡일 수 없어 각막이 건조해져 시력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라딘알레포를 정복한 후 남쪽으로 진군하자 6월에 군대를 소집해야 했다. 그 후 국왕은 생명을 위협하는 열병에 걸렸고, 어머니와 새로운 총대주교인 헤라클리우스의 간호를 받으며 인근 나사렛에 머물렀다. 고등 법원에 소환되어 침상에 누운 보두앵 4세는 정부를 매제인 에게 맡겼는데, 기는 다음 왕위 계승자였다.[1] 기를 섭정으로 임명하는 것은 영구적인 것이었다. 보두앵 4세는 예루살렘 시에 대한 왕의 칭호와 권한만을 유지했지만, 보두앵 4세가 살아 있는 동안 왕이 되거나 왕실 영지의 일부를 양도하지 않겠다고 기에게 맹세하게 했다.[2][3]

보두앵 4세는 그의 남작들 사이의 불만을 두려워하여 그를 섭정으로 임명하기 전에 기에게 군사적 지휘 경험을 전혀 주지 못했다.[4] 실제로 왕국의 거대 영주들, 안티오키아트리폴리의 독립 통치자들, 그리고 군사 기사단의 대수장들은 기와 협력하기를 거부했다.[5] 보두앵 4세는 예상치 못하게 회복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해안 기후가 그의 건강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된 보두앵 4세는 티레와 교환하여 기에게 예루살렘을 제공했다. 기는 티레가 더 수익성이 높았을 가능성이 있어 무례하게 거절했고, 보두앵 4세는 심하게 모욕감을 느꼈다.

보두앵 4세의 이복 여동생 이사벨라와 토론의 험프리 4세의 결혼식이 1183년 말 케라크에서 거행되었다. 축제 기간 동안 살라딘이 공격하여 왕의 이복 여동생과 그녀의 남편을 생포하기 위해 성을 포위했다. 은퇴한 국왕은 포위 공격에 대한 소식을 듣고 왕국의 정부에 대해 알리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즉시 기를 섭정에서 해임하고 권력을 되찾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중요한 요새와 그 안에 있는 국왕의 이복 여동생의 방어를 군대를 지휘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사람에게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섭정에서 기를 제거한 것은 사실상 상속권 박탈이었다. 회의의 주장에 따라 왕위 계승에 대한 심의가 이어졌다. 시빌라의 다섯 살 된 아들 보두앵을 공동 왕으로 만들자는 국왕의 어머니의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소년은 11월 20일에 대관했다.

11월 말, 보두앵 4세는 다윗의 탑에 봉화를 설치하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격렬한 폭격을 받고 있는 케라크의 수비수들을 격려하기 위한 일련의 봉화 중 첫 번째였을 것이다. 보두앵 4세는 다시 한번 군대를 동반했지만, 시력을 잃고 움직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이번에는 두 마리의 말 사이에 매달린 들것을 타고 갔다. 그의 존재는 불화하는 남작들을 통합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심지어 굴욕을 당한 매제도 그의 부하들을 이끌었다. 정찰병으로부터 국왕의 접근에 대한 경고를 받고 이집트를 경계 없이 남겨둔 것을 우려한 살라딘은 12월 4일에 포위를 풀었다. 보두앵 4세는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며 케라크로 들어갔다.

5. 2. 현대의 평가

샤를-필리프 라리비에르가 그린 19세기 몽기사르 전투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보두앵 4세의 모습. 보두앵은 가마에 탄 모습으로 묘사되었지만, 당시에는 여전히 활동적이었으며 이 전투에서 말을 타고 싸웠다.


보두앵 4세 사후 2년 뒤 벌어진 하틴 전투에서 기독교 세력이 패배하면서 왕의 유산은 훼손되었고, 역사가들은 치명적인 불화가 보두앵의 통치 기간에 있었다고 보았다.[1] 그러나 보두앵이 왕위에 있는 동안, 왕국은 영토를 잃지 않았고[1] 경제적, 정신적으로 번영했다.[2] 보두앵은 살라딘의 세력을 억제하는 것이 중요함을 이해했고, 이는 그의 측근 선택에 반영되었다. 그는 전략이나 외교를 혼자 결정하지 않고, 교회 후원과 재정 관리를 각각 그의 어머니 아그네스와 삼촌 조슬랭에게 위임했다.[3] 그의 주요 공헌은 나병으로 인해 통치가 견딜 수 없는 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적합한 후계자를 찾기 전까지는 퇴위하지 않겠다는 그의 결의였다.[4] 그의 통치 기간, 특히 그 재앙적인 여파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보두앵은 홀로 왕국의 단결을 유지했다.[5]

당시 기독교 신학자들은 나병 문제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보두앵에 대해 글을 쓰면서 나병을 "신의 정당한 심판"이라고 선언하며 거의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학파는 신자들이 고통받는 자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도록 격려했다. 보두앵의 통치는 13세기 예루살렘 왕국에서 질병에 대한 낙인을 덜어주는 결과를 낳았을 수도 있다. 그의 백성들이 그의 질병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일부 무슬림들을 당황하게 했다.[5] 무슬림 역사가 이마드 알-딘 알-이스파하니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مرضه لم يمنع الفرنج من موالاته، وبذلوا كل ما في وسعهم له ... كانوا قانعين به كحاكم. أشادوا به ... أرادوا إبقاءه في منصبه ولم يهتموا بمرضه بالجذام.|그의 질병에도 불구하고 프랑크족들은 그에게 충성했으며, 그에게 모든 격려를 보냈다... 그를 통치자로 두는 것에 만족했고, 그를 높이 칭송했다... 그들은 그를 계속 직위에 두고 싶어했지만, 그의 나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ar[5]

보두앵의 긍정적인 이미지는 그의 순결함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을 수 있는데, 이는 특별한 경건함의 증거로 여겨졌고, 살라딘에 대한 그의 성공은 신의 은총의 징표로 해석되었다. 비참했던 제7차 십자군 이후, 한 십자군이 다마스쿠스에서 한 노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لقد رأيت الملك بالدوين ملك القدس، الذي كان مصابًا بالجذام، يهزم صلاح الدين، على الرغم من أنه لم يكن معه سوى 300 جندي مسلح وكان لدى صلاح الدين 3000. ولكن الآن وصلت خطاياكم إلى ذروتها، ونحن نطردكم من الحقول كالوحوش.|나는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즉 나병 환자였던 그가 살라딘을 물리쳤던 때를 보았소, 비록 그에게는 300명의 무장 병사 밖에 없었고 살라딘에게는 3,000명이 있었지만 말이오. 그러나 이제 당신들의 죄가 극에 달하여 우리가 당신들을 짐승처럼 들판에서 몰아내고 있소.ar



인식된 경건함에도 불구하고 보두앵은 특별히 독실하지 않았다. 그는 성격과 성장 배경 모두에서 기사였으며, 동시대 사람들에게 그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그의 용기와 명예로움이었다.

5. 3. 대중문화 속의 보두앵 4세

조피아 코사크슈추카는 나왕이라는 보두앵에 관한 소설을 집필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에드워드 노턴이 보두앵 4세를 연기한다.[1]

참조

[1] 서적 十字軍 角川文庫
[2] 서적 十字軍 角川文庫
[3] 서적 十字軍 角川文庫
[4] 서적 十字軍 角川文庫
[5] 서적 十字軍 角川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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