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밍데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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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역사
- 2.1. 19세기: 창립과 성장 (1861-1899)
- 2.2. 20세기: 혁신과 확장 (1900-1999)
- 2.2.1. 혁신적인 소매 방식 도입 (1900년대 초)
- 2.2.2. 뉴욕 지하철 개통과 제1차 세계 대전 (1910년대)
- 2.2.3. 대공황과 페더레이티드 백화점 합병 (1920-1930년대)
- 2.2.4. 미국 디자이너와 패션 영향력 (1945-1960)
- 2.2.5. 첫 번째 지점 개점 (1940년대 후반)
- 2.2.6. 상품 구성 변화와 디자이너 전용 부서 개설 (1960-1975)
- 2.2.7. 뉴욕 지역 외 확장 (1976)
- 2.2.8. 카탈로그 발행과 추가 확장 (1978-1980년대)
- 2.2.9. 경제적 어려움과 메이시스 합병 (1990년대)
- 2.3. 21세기: 현재 (2000-현재)
- 3. 고객 관리
- 4. 점포
- 참조
1. 개요
블루밍데일스는 미국을 대표하는 고급 백화점 체인으로, 1861년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시작되었다. 현재 미국 내 36개 매장을 운영하며, 고급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교외 지역으로 확장했으며, 1994년 메이시스에 인수되었다. 2010년 두바이에 첫 해외 매장을 열었고, 2023년 말 기준 여러 곳에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블루밍데일스는 고객 관리를 위해 판매사원이 직접 고객을 관리하는 마케팅 전략을 사용하며, 고객 모델링을 통해 판매 실적을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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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밍데일스 - [회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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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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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일 | 1861년 |
설립자 | 조지프 B. 블루밍데일 라이먼 G. 블루밍데일 |
본사 위치 | 59번가 및 렉싱턴 애비뉴 |
본사 소재지 | 뉴욕주 뉴욕 |
서비스 제공 지역 | 미국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
주요 인물 | 토니 스프링 (회장 겸 CEO) |
제품 | 의류 신발 가죽 제품 보석 화장품 향수 침구 욕실용품 가구 가정 장식 주방용품 카페 |
수익 | 10억 7200만 미국 달러 |
모기업 | 메이시스 |
공식 웹사이트 | 블루밍데일스 공식 웹사이트 |
점포 수 | |
2023년 3분기 | 58개 |
2. 역사
미국 내에 36개 점포를 운영하며, 넓은 매장에서 고급 상품을 주로 취급한다. 미국에서는 '''블루미'''(Bloomie's)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미국을 대표하는 백화점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판매 상품의 평균 가격은 노드스트롬과 비슷한 수준이며, 삭스 피프스 애비뉴나 니만 마커스보다는 다소 저렴한 편으로 알려져 있다.
블루밍데일스는 유대계 미국인인 조셉 블루밍과 라이먼 블루밍 형제가 창립했다. 1872년 뉴욕에서 시작한 유럽 의류 판매점이 그 기원이다.
2. 1. 19세기: 창립과 성장 (1861-1899)
블루밍데일스는 유대계 미국인인 조셉 블루밍데일과 라이먼 블루밍데일 형제가 창립했다. 1872년, 형제는 뉴욕에 유럽 의류를 판매하는 가게를 열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초기 매장은 당시 개발이 덜 된 맨해튼 동쪽 지역에 있었으나, 이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개관, 세인트 패트릭 성당 이전, 센트럴 파크 완공, 뉴욕 지하철 착공 등 주변 지역의 발전과 함께 부유한 고객층이 유입되면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2. 1. 1. 창립 (1861)
최초의 블루밍데일스는 1861년 벤자민 블루밍데일과 그의 아들 라이먼 블루밍데일에 의해 뉴욕 시 로어 이스트 사이드 지역에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블루밍데일스 후프스커트'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당시 유행하던 후프스커트와 유럽 패션 제품 판매에 주력했다.이후 후프 스커트의 인기가 줄어들면서, 블루밍데일스 형제는 서드 애비뉴(Third Avenue)와 56번가에 있던 '이스트 사이드 바자(East Side Bazaar)'의 문을 닫기도 했다. 이 매장은 작은 연립 주택에 위치하며 숙녀용 치마, 코르셋, 남성용품(gent's furnishings) 등 다양한 의류를 취급했다. 당시 맨해튼 동쪽 지역은 빈민가와 쓰레기 더미가 있는 노동자 계급의 주거지였으며, 대부분의 고객과 경쟁 점포들은 서쪽 지역에 밀집해 있었다.
유대계인 라이먼 블루밍데일과 그의 형제 조셉 블루밍데일은 빠르게 변화하는 소매 환경 속에서 성장 기회를 포착했다. 1872년, 두 형제는 미드타운 맨해튼의 965 서드 애비뉴 (56번가와 57번가 사이)에 '블루밍데일스 그레이트 이스트 사이드 바자'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매장을 열었다. 이 매장은 나중에 인근의 세 개 건물로 확장 이전했으며, 최종적으로 현재 플래그십 스토어가 위치한 59번가와 서드 애비뉴의 건물로 자리를 옮겼다.[5]
매장 개점 후 몇 년 사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개관하고, 다운타운에서 이전해 온 세인트 패트릭 성당이 근처에 봉헌되었으며, 센트럴 파크가 완공되고 뉴욕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주변 환경의 변화는 부유한 고객들을 동쪽 지역으로 유입시키는 데 기여했다.
2. 1. 2. 이전과 확장 (1860년대-1890년대)
후프 스커트의 인기가 줄어들면서 블루밍데일스 형제는 서드 애비뉴(3번가)와 56번가의 작고 평범한 연립 주택에 위치했던 이스트 사이드 바자(East Side Bazaar)의 문을 닫았다. 이 가게에서는 숙녀용 치마, 코르셋, 겐츠 가구(gent's furnishings), 유럽 패션 제품과 같은 다양한 의류를 판매했다. 당시 맨해튼 동쪽 지역은 빈민가와 쓰레기 더미, 가축 수용소가 있는 노동자 계급의 주거지였으며, 대부분의 고객과 경쟁자들은 서쪽 지역에 있었다. 또한 당시 대부분의 좋은 점포들은 한 가지 상품에 특화하여 운영하였다.이스트 사이드 바자를 연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개관하고, 다운타운 지역에서 이전하여 점포 근처에 새로 지어진 세인트 패트릭 성당이 봉헌되었으며, 뉴욕 센트럴 파크가 완공되고 뉴욕 지하철이 착공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부유한 고객들을 동쪽 지역으로 유입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새로운 공원 주변으로 갈색 벽돌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872년, 매장은 가족의 이름을 반영하고 사업의 번창과 성장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블루밍데일스"로 이름을 변경했다.
1886년, 블루밍데일스는 59번가와 렉싱턴 애비뉴(Lexington Avenue)의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이 매장은 커다란 평판 유리 쇼윈도와 널찍한 진열 공간을 갖추도록 설계되었는데, 이는 블루밍데일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상품 진열의 혁신을 가져왔다. 일반적인 상점들이 쇼윈도를 어수선하게 채우던 것과 달리, 블루밍데일스는 각 쇼윈도에 몇 가지 상품만을 연극의 한 장면처럼 연출하여 진열했다. 특히 유럽에서 수입된 상품들을 주로 전시하여 우아함을 더했다. 이 이전은 블루밍데일스의 위상을 주요 소매점으로 굳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5]
창업자 중 한 명인 조셉 블루밍데일은 1896년에 회사에서 은퇴했고, 그의 형제 라이먼 블루밍데일이 회사를 완전히 장악했다.
2. 2. 20세기: 혁신과 확장 (1900-1999)
20세기에 들어서 블루밍데일스는 혁신적인 상품 진열과 광고 전략, 그리고 뉴욕의 교통망 발달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1902년 "모든 자동차는 블루밍데일스로 통한다"는 슬로건은 블루밍데일스의 입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4] 뉴욕 지하철 개통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공익적 활동에도 참여했다.[4]1920년대에는 매장 규모를 지속적으로 확장하여 뉴욕시의 한 블록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고,[4] 1930년대에는 아르데코 양식으로 건물을 리모델링하며 현대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1929년 검은 월요일 이후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30년 페더레이티드 백화점(Federated Department Stores, 현 메이시스)에 합병되어 위기를 극복했다.[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블루밍데일스는 뉴욕 외곽 지역으로 첫 지점을 개설하며 본격적인 확장을 시작했다. 1949년 퀸스의 프레시 메도우스에 맞춤형 매장을 열었으며, 같은 해 페더레이티드 백화점 그룹에 공식적으로 합류했다.[4] 이후 수십 년간 블루밍데일스는 미국 디자이너를 발굴하고 국제적인 패션 트렌드를 소개하며 고급 백화점으로서의 명성을 쌓아갔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상품 구성을 다양화하고, 디자이너 쇼핑백, 상징적인 원형 로고와 "브라운 백" 등을 도입하며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했다. 또한 할스톤, 랠프 로런 등 유명 디자이너를 위한 전용 공간을 마련하고, "Bloomie's"라는 자체 브랜드를 론칭하는 등 혁신적인 시도를 이어갔다. 이 시기 블루밍데일스는 뉴욕 지역을 넘어 워싱턴 D.C. 근교 등 다른 지역으로 매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4]
1980년대에는 우편 카탈로그 발행을 통해 전국적인 인지도를 높였고,[1] 플로리다, 캘리포니아, 텍사스 등 미국 전역으로 활발하게 매장을 늘려나갔다.[1][6] 1990년대 초 잠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1994년 모회사인 페더레이티드가 메이시스를 인수한 후, 기존 메이시스 계열 백화점이었던 더 브로드웨이 매장을 인수하며 미국 서부 지역까지 진출하는 등 성장을 지속했다.[4] 이처럼 블루밍데일스는 20세기 동안 끊임없는 혁신과 확장을 통해 미국을 대표하는 백화점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2. 2. 1. 혁신적인 소매 방식 도입 (1900년대 초)
1886년 59번가와 렉싱턴 에비뉴(Lexington Avenue)로 이전하면서 블루밍데일스는 혁신적인 상품 진열 방식을 선보였다. 커다란 평판 유리 쇼윈도와 넓은 진열 공간을 활용하여, 당시 일반적이던 어수선한 진열 대신 몇 가지 상품만을 연극 무대처럼 연출했다. 특히 유럽에서 수입된 고급 상품들을 주로 전시하여 우아함을 더했다.20세기에 들어서면서 블루밍데일스는 당시 뉴욕시 트롤리 시스템의 중심지였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크게 성장했다. 매장에서는 저렴한 여성용 스타킹(당시 10센트)부터 10USD짜리 울 수트, 149USD짜리 업라이트 피아노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상품을 취급했다. 1902년에는 "모든 자동차는 블루밍데일스로 통한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대대적인 광고 캠페인을 펼쳤다. 이는 블루밍데일스의 위치가 마치 도시의 중심지처럼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유명 미술가 리처드 F. 아웃콜트(Richard F. Outcault)에게 주변을 주제(라틴어 Thema|테마la에서 유래)로 한 그림을 의뢰하기도 했으며, 이 슬로건은 옥외 광고판뿐만 아니라 길거리 상인과 배달 트럭 운전기사에게 무료로 나누어 준 5,000개의 양산(비치솔)에도 부착되었다.
2. 2. 2. 뉴욕 지하철 개통과 제1차 세계 대전 (1910년대)
1905년, 뉴욕의 상류층 쇼핑 지역이 식스 애비뉴와 14번가에서 23번가 사이의 다운타운으로 옮겨가면서 블루밍데일스는 한때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913년, 뉴욕 지하철 렉싱턴 애비뉴선의 59번가역이 블루밍데일스 백화점 건물 지하에 건설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이 지하철역 개통으로 "모든 차는 블루밍데일스로 통한다"(All Cars Transfer to Bloomingdale's영어)는 슬로건이 다시 힘을 얻었고, 블루밍데일스의 사업은 회복세를 보였다. 이러한 성장에 힘입어 1920년까지 블루밍데일스는 뉴욕 시의 한 블록 전체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2. 2. 3. 대공황과 페더레이티드 백화점 합병 (1920-1930년대)
1930년 블루밍데일스는 기존의 Lexington영어 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고객층을 확보하고자 했다. 빠르게 성장하면서 점포는 한 블록 전체로 확장되었고 11층까지 건물을 높였다. 이 과정에서 건축가 스타렛 & 밴 블렉(Starrett & van Vleck)에 의해 아르데코 양식으로 건물이 새롭게 단장되었다.1949년, 블루밍데일스는 당시 거대 유통 그룹이었던 페더레이티드 백화점 (현 메이시스)에 합병되었다.
2. 2. 4. 미국 디자이너와 패션 영향력 (1945-1960)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블루밍데일스는 전후 미국 패션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백화점은 유럽 디자이너 및 트렌드와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동시에 미국 디자이너를 홍보하며, 패션 트렌드와 미국 패션 감각의 진화에 영향을 미쳤다.이 시기(1945-1960)는 블루밍데일스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며 최고급 백화점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단계였다. 1950년대에 이르러 블루밍데일스는 확고한 입지를 다진 영향력 있는 소매 기관이 되었다. 이 백화점은 광범위한 고품질 상품을 제공하고 패션 트렌드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며, 향후 수십 년간 이어질 지속적인 성장과 유산의 토대를 마련했다.
2. 2. 5. 첫 번째 지점 개점 (1940년대 후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경제 호황 속에서 블루밍데일스는 1947년 뉴욕 시 맨해튼 외곽인 뉴로셸에 첫 번째 지점을 열었다. 이곳은 이전에 있던 웨어 백화점 건물을 인수한 것이었다. 그러나 뉴로셸 시와 일부 주민들은 블루밍데일스 입점이 교통 체증을 유발하고 기존 지역 상권을 위축시킬 것을 우려하여 반대하기도 했다.이후 블루밍데일스는 기존 건물을 활용하는 대신, 회사의 매장 구성에 더 적합하도록 직접 설계한 건물을 짓는 방식을 택했다. 이에 따라 1949년 퀸스의 이스트 강 건너편 프레시 메도우스 지역에 첫 맞춤형 매장을 선보였다. 이 매장은 개점 첫날에만 25,000명 이상이 방문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4]
같은 해(1949년), 블루밍데일스는 뉴욕주 이스트체스터의 버논 힐스 쇼핑센터에 가구 전문점을 열었다. 이후 뉴로셸 지점과 이스트체스터 가구점을 통합하여 화이트 플레인스에 모든 상품을 취급하는 새로운 지점을 개설했다. 화이트 플레인스 지점은 쇼핑몰 내 입점 형태가 아닌 독립 건물로 운영되는 드문 사례 중 하나이며, 블루밍데일스 체인 내에서 가장 붐비는 외곽 매장 중 하나로 성장했다.
또한 1949년에 블루밍데일스는 대형 유통 그룹인 페더레이티드 백화점(Federated Department Stores, 현 메이시스)에 합병되었다.
2. 2. 6. 상품 구성 변화와 디자이너 전용 부서 개설 (1960-1975)
1960년대 동안 블루밍데일스는 상품 구성을 변경하여 파리에서 수입한 오트쿠튀르 패션과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가구를 포함시켰다. 1961년에는 "Esprit de France" 전시를 홍보하기 위해 디자이너 쇼핑백을 처음 선보였다. 이 쇼핑백은 미술가 Jonah Kinigstein이 프랑스 타로 카드의 강렬한 빨강, 검정, 흰색 그림자를 기반으로 디자인했다.1969년, 블루밍데일스는 뉴욕 플래그십 스토어를 넘어 본격적인 확장을 시작했다. 경영진은 플래그십 스토어의 공간 관리와 함께 교외 지역으로의 지점 확장에 집중했다. 이 해에 롱아일랜드 가든 시티(Garden City)와 펜실베이니아주 젠킨타운(Jenkintown)에 두 개의 지점을 열었으며, 동부 해안 지역에 가정용 가구 전문점을 개점하여 플래그십 스토어의 가정용 가구 부문 상품을 판매했다. 또한, 같은 해 블루밍데일스는 최초로 단일 디자이너 전용 부서를 개설했는데, 이는 디자이너 할스톤(Halston)을 위한 공간이었다. 곧이어 남성 매장에는 랠프 로런 전용 부티크가 마련되었다.
1970년대 초, 블루밍데일스는 아방가르드한 유럽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특히 1971년 국제 연합이 중국의 가입을 승인한 이후, 공산주의 시대 중국 제품을 판매한 최초의 미국 소매업체가 되었다. 1972년에는 현재 블루밍데일스를 상징하는 원형 로고가 처음 등장했다.
같은 해 실시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블루밍데일스 고객의 60% 이상이 매장 근처 고급 고층 아파트에 거주하거나 인근 사무용 건물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블루밍데일스는 이러한 젊고 부유한 전문직 고객층의 취향에 맞춰 '애완돌(pet rocks)'이나 '빙하 얼음 조각(glacial ice cubes)'과 같은 당시 유행 상품을 발 빠르게 도입했다. 또한 랠프 로런, 페리 엘리스, 노마 카말리와 같은 신진 패션 디자이너들을 소개하며 패션 트렌드를 이끌었다.
1973년에는 블루밍데일스의 상징 중 하나인 "브라운 백(Brown Bag)" 쇼핑백이 출시되었다. 현재 블루밍데일스의 로고타이프를 디자인한 마시모 비녤리(Massimo Vignelli)가 디자인했으며, 소형, 중형, 대형의 세 가지 크기로 제작되었다. 패션 디자이너 미켈레 볼브라흐트(Michaele Vollbracht)는 한 면에는 격식 있는 옷차림의 남성, 다른 면에는 여성을 그린 쇼핑백을 디자인했으며, 안토니오 로페즈(Antonio Lopez), 마크 코스타비(Mark Kostabi)와 같은 예술가들도 쇼핑백 디자인에 참여했다. 같은 해, 블루밍데일스는 젊고 트렌디한 이미지 강화를 위해 자체 브랜드 "Bloomie's"를 론칭하고, 이 로고가 인쇄된 여성용 팬티를 판매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블루밍데일스가 유명 관광 명소가 되면서 "Bloomie's" 로고 상품은 관광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기념품이 되었다.
뉴욕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블루밍데일스는 교외 지역으로 꾸준히 확장하며 1970년대 내내 번창했다. 1975년에는 뉴욕주 화이트 플레인스에 약 24154.79m2 규모의 당시 가장 큰 지점을 열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최초의 지점이었던 뉴로셸(New Rochelle) 지점은 폐쇄했다.
2. 2. 7. 뉴욕 지역 외 확장 (1976)
1976년, 블루밍데일스는 버지니아주 타이슨스, 워싱턴 D.C. 교외, 노던 버지니아에 뉴욕시 지역 외 첫 번째 매장을 열었다. 당시 영부인인 베티 포드가 명예 손님으로 개업식에 참석했다.[4]1981년, 블루밍데일스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쇼핑몰이었던 킹 오브 프러시아 몰 (King of Prussia Mall)의 필라델피아 교외에 지점을 열었다. 그 외에도 미국 동해안, 플로리다, 시카고, 댈러스 등에도 새로운 매장이 문을 열었다.[6]
2. 2. 8. 카탈로그 발행과 추가 확장 (1978-1980년대)
1978년, 블루밍데일스는 우편 카탈로그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블루밍데일스 매장이 없는 지역의 미국 전역 고소득 가정까지 영향력을 넓힐 수 있었다.[1]1980년대에 들어 유통 시장이 호황을 맞으면서 블루밍데일스는 더욱 활발하게 확장했다. 새로운 매장들이 미국 동부 해안 지역을 비롯해 플로리다주, 캘리포니아주, 그리고 텍사스주의 댈러스 등지에 문을 열었다.[1]
2. 2. 9. 경제적 어려움과 메이시스 합병 (1990년대)
블루밍데일스는 1990년대 초반에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댈러스, 신선한 초원, 코네티컷주 스탬퍼드 지점이 문을 닫게 되었다. 1994년, 페더레이티드 백화점은 2년간 파산 상태였던 메이시스 체인을 인수했다. 이후 1996년, 블루밍데일스는 미국 서부로 사업을 확장했는데, 메이시스와의 합병 과정에서 인수한 더 브로드웨이 체인의 남부 캘리포니아 지점 4곳을 하루 만에 블루밍데일스 매장으로 전환했다.[4] 블루밍데일스는 메이시스 합병으로 인해 중복되는 지점을 정리하면서 성장을 이어갔다.2. 3. 21세기: 현재 (2000-현재)

2000년대 들어 블루밍데일스는 변화하는 소매 환경에 맞춰 다양한 시도를 했다. 2004년에는 소호에 약 7618.05m2 규모의 매장을 열며 맨해튼 시내로 복귀했고, 2006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유니언 스퀘어에 맨해튼 플래그십 매장을 제외하고 가장 큰 약 30658.00m2 규모의 매장을 열었다. 2007년에는 캘리포니아주의 샌디에이고 (패션 밸리)와 코스타메사 (사우스 코스트 플라자)로 확장하며 서부 해안 지역 공략을 강화했다.[4] 이 매장들은 폐점한 로빈슨스-메이 매장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개점했다.
2007년 6월, 모회사인 페더레이티드 스토어는 더 널리 알려진 메이시스로 회사 이름을 변경했지만, 블루밍데일스 매장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4]
2008년에는 대침체의 영향으로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약 16722.55m2 규모의 매장을 열려던 계획이 무산되었다.[7][8] 같은 해, 온라인 판매(bloomingdales.com)에 집중하기 위해 우편 카탈로그 발행을 단계적으로 중단했다. 또한 워싱턴 D.C.의 더 숍스 앳 조지타운 파크(약 7618.05m2),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의 웨스트필드 밸리 페어(약 13935.46m2), 산타 모니카의 산타 모니카 플레이스(약 19045.12m2)에 새로운 매장을 열 계획을 세웠으나, 조지타운 파크 계획은 쇼핑몰 모회사의 파산으로 무산되었다.[9] 산타 모니카 매장은 2010년에 개장했지만 2021년에 문을 닫았고, 산호세 매장은 2020년에야 개장했다.[4][10]
2010년에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첫 해외 매장을 열었고, 이는 현지 기업인 알 타이어 그룹 LLC와의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운영되었다.[11] 같은 해 버지니아주 포토맥 밀스에 첫 아울렛 매장을 개점했다.[4] 이후 2017년에는 쿠웨이트에도 매장을 열며 해외 사업을 확장했다.[12]
하지만 2012년에는 미니애폴리스(몰 오브 아메리카), 애틀랜타(퍼리미터 몰), 워싱턴 D.C.(화이트 플린트 몰), 시카고(오크브룩 센터) 지역의 매장 4곳을 폐쇄하는 등[36][37] 구조조정을 겪기도 했다.
2019년 말, 모회사 메이시스는 동물 복지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2020년 말부터 블루밍데일스를 포함한 모든 매장에서 모피 제품 판매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13] 또한, 뉴욕 플래그십 매장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2018년과 2019년에 걸쳐 약 약 18580.61m2 규모의 공간을 리모델링하고, 매그놀리아 베이커리나 사라 제시카 파커의 신발 라인(SJC 컬렉션) 부티크 같은 새로운 콘텐츠를 도입했다.[4]
2020년 3월, 코로나19 팬데믹 확산으로 인해 모든 매장이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으며, 일부 매장은 1년 이상 영업을 중단하기도 했다.[14] 이후 2022년 9월에는 창립 150주년을 맞아 뉴욕 플래그십 매장에서 연말까지 다양한 기념행사와 특별 상품을 선보였다.[4]
2. 3. 1. 맨해튼 시내 복귀와 추가 확장 (2004-2007)
몇 년간 캘리포니아 지역의 제품 수요 파악을 위해 고심한 끝에, 블루밍데일스는 2006년과 2007년에 걸쳐 샌프란시스코와 샌디에이고, 코스타메사에 새로운 점포를 개점하며 캘리포니아 시장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움직임이었다.2. 3. 2. 해외 진출과 아울렛 매장 개점 (2010)
2008년 9월 22일, 모회사 메이시스는 첫 해외 진출 계획을 발표했다. 2010년 2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두 개의 점포를 개점한다는 내용이었다. 하나는 3개 층, 13600m2 규모의 의류 및 액세서리 점포이며, 다른 하나는 1개 층, 5000m2 규모의 가정용품 점포이다. 해외 진출은 현지 아랍에미리트의 재벌 그룹인 Al Tayer Group LLC가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운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블루밍데일스 CEO는 추가적인 해외 진출 계획은 없으며, 두바이 점포가 유일한 해외 점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2010년 8월에는 버지니아주 Woodbridge의 Potomac Mills 몰에 첫 번째 블루밍데일스 아울렛 매장이 문을 열었다. 이 매장은 이전에 Sports Authority가 있던 자리에 들어섰으며, 블루밍데일스는 가까운 시일 내에 두 개 정도의 아울렛 점포를 더 개점할 것이라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3. 고객 관리
블루밍데일스는 다른 소매업체와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을 사용한다. TV나 인쇄 광고에 비용을 투자하는 대신, 모든 판매 사원이 직접 고객 관리를 담당하도록 한다. 판매 사원은 과거에 매장을 방문했거나 상품을 구매한 이력이 있는 고객에게 직접 연락하여 다가오는 세일 정보를 미리 알려준다.
이 방식은 고객이 마치 블루밍데일스의 내부자처럼 느끼게 만들며(이는 블루밍데일스 직원 임무 슬로건의 일부이기도 하다), 일반 고객보다 먼저 상품을 구매하거나 내부 고객에게만 제공되는 특별 가격으로 구매할 기회를 제공한다.
블루밍데일스는 '고객 모델링'이라는 제도를 운영하는데, 이는 판매 사원이 자신의 '수첩(Book)'에 등록된 기존 고객(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세일 정보를 전달하는 고객)으로부터 일정 비율 이상의 매출을 달성하도록 요구하는 방식이다. 요구되는 매출 비율은 각 지점마다 다르며, 판매 직원의 근무 기간이 길어질수록 기존 고객으로부터 올려야 하는 매출 비중도 높아진다. 또한 블루밍데일스는 판매 직원의 효율적인 고객 관리를 지원하기 위해 관련 기술 개발 및 도입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4. 점포
국가
영업
면적
(sq 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