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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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수 대전은 383년, 전진과 동진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로, 소수의 정예병이 다수의 군대를 물리친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 전투에서 동진이 승리하면서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전진은 멸망하고 화북 지역은 여러 국가로 분열되었다. 비수 대전은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칭화 대학의 레이하이종 교수는 이 전투를 기준으로 중국 역사를 "고전적 중국"과 "종합적 중국" 시대로 구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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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 대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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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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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 비수 전투 |
날짜 | 383년 11월 30일 |
장소 | 비수, 중국 |
영토 | 동진이 황하 남쪽 영토를 되찾음 |
결과 | 동진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전진 |
교전국 2 | 동진 |
지휘관 및 지도자 | |
전진 | 부견 (전진 선소제) 부융 요장 모용위 모용덕 모용보 |
동진 | 사안 사현 사석(謝石) 사염(謝琰) 환충 환이 |
병력 규모 | |
전진 | 870,000명 (《진서》 기록) |
동진 | 80,000명 (정예 북부군) |
사상자 및 피해 | |
전진 | 《진서》 기록에 700,000명 이상 |
동진 | 최소 |
추가 정보 |
2. 배경
화북(華北)의 패권을 장악했던 후조(後趙)가 멸망한 후, 저족을 중심으로 건국한 전진(前秦)이 점차 성장하여 화북의 패권을 차지했다. 357년 제위에 오른 부견(符堅)은 한인 출신 재상 왕맹(王猛)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실행, 국력을 크게 성장시켰다.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전진은 단기간에 동쪽의 전연(前燕), 남쪽의 양(梁), 북쪽의 대(代), 서쪽의 전량(前凉)을 정복하고 서역까지 원정하여 376년 화북을 통일하였다. 남은 것은 남쪽의 동진뿐이었다.
부견은 민족 융합을 중시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관중 동쪽에 선비족을 이동시키고, 자신의 민족인 저족을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또한 왕맹의 조언에 따라 저족 외 다른 민족의 인재를 적극 등용했다. 이러한 조치는 여러 민족을 융화시켜 다민족국가를 세우고, 이후 천하통일을 위한 동진 정벌의 포석이었다. 그러나 왕맹은 민족 간 대립이 여전하고, 한인들이 동진을 본국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동진과의 전쟁은 위험하다고 판단, 부견에게 남정(南征)을 취소할 것을 여러 차례 진언하였다.
375년 왕맹은 "진을 공격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진은 내부적으로 결속이 단단하고 국력도 강합니다. 또한 동진은 장강이라는 천험의 지형을 안고 있어 쉽게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선비족 출신인 전연(前燕)에서 항복한 모용수(慕容垂)와 강족(羌)의 귀족 요장(姚萇)이 더 위험합니다. 투항하긴 했으나 그들은 전진의 오랜 숙적이었기에 그대로 놔두면 훗날 큰 후환이 될 것입니다. 서서히 그들의 힘을 꺾고 제거하는 것이 순서입니다."[14]라고 유언을 남기며 사망했다.
378년 부견은 부비에게 7만 대군을 주어 동진의 양양을 공격하게 했다. 379년 양양을 지키던 주서(朱序)가 항복하면서 전진군은 광릉을 압박했으나, 사현이 5만 북부병을 이끌고 반격하여 4전 4승을 거두었다.
383년 5월, 환충이 지휘하는 10만 명의 동진 군대가 양양 탈환을 시도했으나, 5만 명의 전진 구원 부대에 의해 격퇴되었다.[9] 이에 부견은 동진에 대한 총동원령을 내렸다. 10명 중 6명의 건장한 남자를 징집했고, 3만 명의 정예 친위대를 모았다. 8월, 부견은 원정 반대론자였던 동생 부융, 양평공을 선봉으로 30만 대군을 보냈다. 그달 말, 부견은 27만 기병과 60만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장안에서 출병했다.[9] 9월, 부견은 양성에 도착했다. 별동대가 쓰촨에서 하류로 진격하기로 했지만, 주 공세는 회하의 수춘을 목표로 할 예정이었다. 진 효무제는 서둘러 방어 준비를 했다. 그는 환충에게 중장강 방어를 맡기고, 회수의 방어는 사석(謝石)과 사현 그리고 8만 명의 북부병에게 맡겼다. 사안은 총괄적인 전략을 지휘했다.[7][8]
환충은 수도 지원을 위해 3천 명의 정예 병사를 보냈지만, 사안은 이를 거절하고 서쪽 수비에 전념할 것을 당부했다. 환충은 사안이 군사 지휘에 미숙하다고 비판하며, 동진의 미래를 걱정했다.[10] 이후, 동진의 군대가 전진 군대를 격파했고, 환충은 이 소식을 듣고 수치심에 휩싸여 57세의 나이로 병사했다.[11]
2. 1. 전진의 성장과 부견의 통치
후조가 멸망한 후, 저족을 중심으로 건국한 전진이 성장하여 화북의 패권을 차지했다. 357년 부견은 한인 출신 재상 왕맹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추진, 국력을 크게 성장시켰다.[4]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전진은 단기간에 동쪽의 전연, 남쪽의 양(梁), 북쪽의 대, 서쪽의 전량을 정복하고 서역까지 원정하여 376년 화북을 통일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남쪽의 동진뿐이었다.[7]
부견은 민족 융합을 중시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관중 동쪽에 선비족을 이동시키고, 자신의 민족인 저족을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또한 왕맹의 조언에 따라 저족 외 다른 민족의 인재를 적극 등용했다. 이러한 조치는 여러 민족을 융화시켜 다민족국가를 세우고, 이후 천하통일을 위한 동진 정벌의 포석이었다.
그러나 왕맹은 민족 간의 대립이 여전하고, 한인들이 동진을 본국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동진과의 전쟁은 위험하다고 판단, 부견에게 남정(南征)을 취소할 것을 여러 차례 진언하였다.
375년 왕맹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14]
376년 동진은 북방을 통일한 전진의 침략에 대비하여 재상 사안이 조카 사현을 예주자사로 임명하여 광릉(廣陵)에 배치했다.
2. 2. 동진의 방어 태세
376년 동진은 북방을 통일한 전진의 침략에 대비하여 재상 사안(謝安)이 조카 사현을 예주(豫州)자사로 임명하여 광릉(廣陵)에 배치했다.[8] 사현은 문무를 겸비한 명장으로, 사안이 관할하던 장강 하류 지역 5개 주(양주(揚州), 예주(豫州), 서주(徐州), 연주(兖州), 청주(靑州))의 군사권을 쥐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그의 휘하에는 유뇌지(劉牢之), 하겸 등의 맹장들이 있었고, 이렇게 단련된 정예병들을 북부병(北府兵)이라 불렀다.[8]378년 전진의 부견(苻堅)은 부비에게 7만 대군을 주어 동진의 양양을 공격하게 했다. 379년 양양을 지키던 주서(朱序)가 항복하면서 전진군은 광릉을 압박했으나, 사현이 5만의 북부병을 이끌고 반격하여 4전 4승을 거두었다. 이 공으로 사안은 건창현공(建昌縣公)에 봉해졌다.[8]
383년 5월, 환충이 지휘하는 10만 명의 동진 군대가 양양 탈환을 시도했으나, 5만 명의 전진 구원 부대에 의해 격퇴되었다.[9] 진 효무제는 환충에게 중장강 방어를 맡기고, 회수의 방어는 사석(謝石)과 사현 그리고 8만 명의 북부병에게 맡겼다. 사안은 총괄적인 전략을 지휘했다.[9]
환충은 수도 지원을 위해 3천 명의 정예 병사를 보냈지만, 사안은 이를 거절하고 서쪽 수비에 전념할 것을 당부했다. 환충은 사안이 군사 지휘에 미숙하다고 비판하며, 동진의 미래를 걱정했다.[10]
3. 진행 과정
383년 5월, 전진의 남정 소식을 접한 동진은 환충에게 10만 병력을 주어 양양을 공격하게 하고, 양량에게는 촉을 공격하게 했다. 전진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8월에 부견의 동생 부융, 장모, 부방, 양성, 모용위, 모용수 등에게 25만 병력을 주어 선봉으로 삼고, 부견 자신은 보병 60만, 기병 27만 명을 이끌고 장안을 출발했다. 이 병력은 합쳐서 100만이라고 불렸으나, 실제 전투 병력은 절반도 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9]
동진은 사석을 대도독으로, 사현을 선봉장으로 삼아 약 8만의 병력으로 3방향에서 전진을 견제하고자 했다.
10월, 부융의 군대는 동진 수도 건강의 북서쪽 200km에 위치한 수춘(壽春, 현재의 안후이성 수현)을 함락시켰고, 양성의 군대는 낙안에 주둔했다. 이때 사현 휘하의 장수 유뢰지가 5천 정병을 이끌고 낙안을 기습하여 전진군을 격파하고 양성을 죽였다.[9]
그 후 동진군은 비수에 진격했고, 부견의 본진도 수춘에 도착했다. 양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부견은 주서를 사자로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주서는 동진을 돕고자 사석 등에게 "전진의 100만 대군이 집결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 선봉을 깨뜨린다면 적에게 큰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라고 진언했다.[9]
사석은 이 계책을 받아들여 부견에게 도하하면 싸우지 않겠다고 유혹했고, 부견은 이를 승낙했다. 부견은 군대를 조금 물려서 동진군이 강을 절반쯤 건널 때 공격하려 했으나, 병사들에게 작전을 설명하지 않아 혼란이 발생했다. 주서가 "진군이 패했다!"라고 외치자 전진군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4] 도하를 끝낸 동진군이 공격하자 전진군은 무너졌다. 부융은 전사하고 부견은 도망쳤으며, 군대는 흩어졌다. 부견은 모용수의 보호를 받으며 12월에 장안으로 귀환했다.[9]
3. 1. 전진군의 구성과 문제점
부견의 군대는 정복한 북부 영토에서 징집된 소규모 군대와 선비족, 흉노족 등 북방 유목 민족에서 차출된 기병으로 구성되었다.[4] 이들 대부분은 전진에 대한 충성심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으며, 강제로 합류하거나 군대 식량과 급여 때문에 합류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많은 대대가 지휘관의 지시에 따르기 어려웠다.[4]부견은 이러한 군대의 훈련 부족에 대한 경고를 받았지만, 군대의 규모에 의존하기로 결정하고 "내 군대는 너무 거대해서 모든 병사들이 채찍을 양쯔강에 던지면 그 흐름이 멈출 것이다."(投鞭断流|투편단류중국어)라고 말했다.[4]
3. 2. 동진군의 전략과 승리
淝水之戰중국어에서 동진은 사현을 중심으로 약 8만의 정예병을 구성하여 전진에 맞섰다.[12] 동진군은 전진군의 약점을 파악하고, 심리전과 기습 공격을 통해 전진군을 혼란에 빠뜨렸다.383년 10월, 유뢰지(劉牢之중국어)는 정예병 5,000명을 이끌고 전진군의 선두 부대를 기습하여 15,000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9] 이후, 동진군은 전진의 병력에 맞먹는 규모로 보이도록 넓게 병력을 배치하여, 부견이 동진군의 규모를 과대평가하게 만들었다.
비수에서 양군이 대치한 상황에서, 사현은 전진군에게 강을 건너 싸울 수 있도록 군대를 뒤로 물릴 것을 제안했다.[9] 부견은 동진군이 강을 건너는 동안 공격하여 전술적 우위를 점하고자 이 제안을 받아들여 퇴각을 명령했다.[9]
그러나 전진군은 퇴각 명령에 혼란을 일으켰다. 많은 병사들이 갑작스러운 퇴각 명령의 이유를 알지 못했고, 이미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이때, 주서가 "진군이 패했다!"라고 외치자 전진군은 공황 상태에 빠져 궤멸되었다.[4] 사현과 장수 사염(謝琰중국어) 및 환이는 강을 건너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고,[9] 전진군은 완전히 붕괴되었다.[9] 이 과정에서 전진군 병력의 70~80%가 전투, 기아, 그리고 혹독한 환경 노출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9]
이러한 동진군의 승리는 사현의 뛰어난 전략과 전진군의 내부 분열, 부견의 오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4. 결과
비수 대전의 패배로 전진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화북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동진은 이 전투의 승리를 발판 삼아 북벌을 감행하여 황하 이남의 옛 영토를 되찾았으나, 사안의 사망과 사현의 은퇴 후에는 수세로 일관했다.
이 전투는 병력 훈련, 사기, 충성심, 조직적인 전투 지휘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진다. 또한, 이 전투로 인해 남중국은 589년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13]
4. 1. 전진의 붕괴와 화북의 혼란
383년 비수 대전에서 대패한 전진은 급격히 통제력을 상실하여, 화북 지역은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모용수는 384년 업에서 자립하여 후연(後燕)을 건국하였다.[15]모용홍은 동생 모용충과 합세하여 전진의 요장을 격파하고 장안 함락을 목표로 하였으나,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모용충이 뒤를 이어 서연(西燕)을 건국하였다. 모용홍에게 패한 요장은 위수 북쪽에서 강족을 규합하여 후진(後秦)을 건국하였다.[15]
전진의 장군 여광은 서역 원정 후 복귀 중에 비수의 패전 소식을 듣고 간쑤성(甘肅)에서 자립하여 후량(後凉)을 건국하였다.[15]
부견은 385년 7월 요장에게 붙잡혀 선양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하고 살해당했다.[15] 이 소식을 듣고 부비가 뒤를 계승했으나 서연에게 대패 후 도망 중 동진군에게 죽었다. 이후에도 전진의 일족이 저항을 계속했으나, 394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15]
북방의 혼란은 386년 탁발규에 의해 부활한 대나라가 북위로 이름을 바꾼 뒤에 세력을 확장해 최종적으로 화북을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15]
4. 2. 동진의 생존과 남북조 시대의 지속
비수 대전의 승리로 동진은 황하 이남의 영토를 회복했으나, 사안의 사망과 사현의 은퇴 이후 수세에 몰렸다. 373년(영강 원년) 대사마(大司馬) 환온이 사망하자 병권은 사안과 환온의 동생 환충에게 위임되었다. 사안은 전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조카 사현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유뢰지 등을 참모로 등용하여 정예 북부군을 창설했다.[1] 그러나 북부군의 병력은 8만 명 정도로 전진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2]이러한 상황에서도 사안은 침착하게 주위 사람들을 안심시켰다고 전해진다.[3] 비수 대전의 승전 소식이 전해졌을 때도, 사안은 손님과 바둑을 두면서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 나막신 굽이 부러지는 것도 몰랐다는 일화가 있다.[4] 이 승리로 사안의 가문은 낭야 왕씨에 버금가는 명문가로 떠올랐다. 그러나 사안이 2년 후 사망하면서 동진의 안정기는 끝나고, 황족 사마도자의 등장으로 동진은 쇠퇴했다.[5]
한편, 비수 대전에서 패배한 전진은 급격히 통제력을 상실하여 화북 지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6] 384년 모용수는 업에서 자립하여 후연(後燕)을 건국했고,[7] 모용홍과 모용충 형제는 서연(西燕)을 건국했다.[8] 요장은 후진(後秦)을 세웠고,[9] 여광(呂光)은 간쑤성(甘肅)에서 후량(後凉)을 건국했다.[10] 385년 7월 부견은 요장에게 붙잡혀 살해당했고,[11] 뒤를 이은 부비도 서연에게 패배한 후 동진군에게 죽임을 당했다.[12] 전진은 394년에 완전히 멸망했다.[13]
이후에도 혼란은 계속되었으나, 386년 탁발규가 대나라를 부흥시켜 북위로 이름을 바꾸고 세력을 확장하여 최종적으로 화북을 통일했다.[14] 결국 비수 대전은 중국이 남북조 시대로 이어지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5. 역사적 의의
비수 대전은 소수의 정예병으로 다수의 군대를 격파할 수 있음을 보여준 역사적 사례이다. 이 전투는 10만도 안 되는 동진(東晋)의 군대가 백만에 달하는 전진(前秦)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한 전투였다.[15]
이 전투는 민족 간의 갈등과 융합, 그리고 권력의 분산과 균형의 중요성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제공한다. 특히, 칭화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 레이하이종은 이 전투를 중국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보았다. 그는 비수 대전을 기준으로 중국사를 두 개의 주기로 나누었는데, 첫 번째 주기는 순수한 화하 민족이 문화를 창조한 "고전적 중국" 시대였고, 두 번째 주기는 북방 이민족과 불교의 영향으로 이민족과 한족이 융합하고 인도와 중국 문화가 동화되어 간 "종합적 중국" 시대였다.[16][17]
만약 비수 대전에서 전진이 승리했다면, 강남에 남아있던 한족 세력은 소멸될 위험이 있었고, 이는 중국 문화의 개성을 유지하면서 외래 문화를 수용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16][17]
이 승전으로 사안의 일족은 동진 건국의 원훈인 낭야 왕씨에 이어 일류 명문가로 평가받게 되었다. 동진은 잠시 안정과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사안의 사망 이후 쇠퇴하게 되었다.
6. 평가
비수 대전은 민족 융합의 어려움과 권력 집중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부견은 다양한 민족을 통합하려는 이상적인 정책을 추진했지만,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혔다. 그의 신하들 대다수는 "동진에는 사안 등 인재가 갖춰져 있고, 장강의 험준함으로 지켜지고 있어 공격하기 쉽지 않으며, 중원을 평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장병들이 피로하다"며 시기상조라고 반대했다.[15] 심지어 "진을 치지 말라고 하는 자가 충신이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간언하는 이도 있었다.[15] 그러나 모용수만이 "약자가 강자에게 병합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이제 폐하의 위엄은 해외에 전해지고, 호랑이 같은 군병 100만이 있습니다. 한신과 백기와 같은 용맹한 장수가 조정에 가득합니다. 지금 주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쌀알 같은 강남뿐입니다. 무엇을 주저하시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찬성했고, 부견은 "짐과 함께 천하를 정하는 자는 오직 경뿐이다"라며 매우 기뻐했다.
동진의 승리는 군사적 역량뿐만 아니라 내부 결속과 전략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승전 소식이 전해졌을 때 사안은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손님이 어떻게 되었냐고 묻자 "어린 놈들이 도적을 이겼다"고 태연한 척했지만, 손님이 돌아간 후 방 안에서 껑충거리며 나막신의 굽을 부딪혀 부러뜨렸지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동진 역시 권력 투쟁과 귀족 정치의 폐단으로 인해 쇠퇴의 길을 걸었다. 사안의 사후 권력을 잡은 황족 사마도자는 동진을 쇠퇴로 이끌었다. 이는 권력 집중이 국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참조
[1]
논문
Die Schlacht am Fei (383) und ihre Folgen. Ein Beitrag zur chinesischen Historiographie nebst einer Übersetzung aus Sima Guangs Zizhi tongjian
https://www.jstor.or[...]
Harrassowitz Verlag
2022-06-14
[2]
논문
The Myth of the Battle of the Fei River (A.D. 383)
https://www.jstor.or[...]
Brill
2022-06-14
[3]
논문
The Six Dynasties, Volume 1
[4]
서적
Imperial Chinese Armies (1) 200 BC - AD 589
Osprey Publishing
[5]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6]
서적
Zhongguoren Shigang
Yuanliu chu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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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Zizhi Tongjian
[8]
서적
Zizhi Tongjian
[9]
서적
Zizhi Tongjian
[10]
서적
Book of Jin
[11]
서적
Book of Jin
[12]
서적
China Between Empires: The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Belkn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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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ook of Jin
[14]
서적
『晋書』巻114, 苻堅載記下附王猛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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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晋書』巻114, 苻堅載記下
[16]
문서
[17]
문서
[18]
서적
《[[진서]]》(晉書) 권10 <제기>(帝紀) 제9 효무제(孝武帝) - 태원 8년 10월 을해(乙亥) 기사에 의함.
[19]
문서
호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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