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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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마부는 사마방의 셋째 아들로, 조조를 섬기며 조비, 조예, 조방, 조모, 조환 대에 걸쳐 위나라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경전에 능통하고 문재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조식의 문학연으로 발탁되어 그의 간언을 여러 번 했다. 명제 시기에는 도지상서로 임명되어 제갈량의 침공에 대비했고, 고평릉의 변 당시에는 사마의의 쿠데타를 도왔다. 위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깊어 사마염이 서진을 건국한 후에도 위나라 신하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았으며,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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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망은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촉한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서진 건국 후 요직을 역임하며 서진 발전에 기여했고 사후 의양성왕으로 불렸다. - 서진의 태재 - 사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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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기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였던 사마의는 조조, 조비, 조예 3대에 걸쳐 중용되며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 조위의 태부 - 종요
후한 말부터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서예가였던 종요는 조조를 도와 옹주 내정을 담당했고 위나라 건국 후 상국, 태위에 올랐으며, 특히 해서체 발전에 기여하여 "해서체의 아버지"로 불린다.
사마부 | |
---|---|
인물 정보 | |
이름 | 사마부 |
한자 표기 | 司馬孚 |
자 | 숙달 (叔達) |
생몰 | 180년 ~ 272년 4월 3일 (향년 92세) |
출생지 | 하내군 온현 |
사후 시호 | 헌왕(獻王) |
봉호 | 안평왕(安平王) |
가문 | 사마씨 |
가계 | |
아버지 | 사마방 |
배우자 | 이부인 (李夫人, 정실), 번부인 (樊夫人, 첩) |
자녀 | 사마옹 사마망 사마부 사마이 사마황 사마규 사마규 사마형 사마경 |
관련 인물 | 사마의, 사마소, 사마염 |
관직 및 경력 | |
위나라 | 태부 (太傅) |
서진 | 태재 (太宰) 안평왕 (安平王) |
생애 | |
주요 활동 | 조조, 조비, 조예, 조방, 조모, 조환, 사마염 섬김 왕릉의 난 진압 제갈탄의 난 진압 |
기타 정보 | |
로마자 표기 | Sima Fu |
2. 생애
사마부는 조조 사후 조비의 즉위에 공헌하여 상서, 상서령을 지냈다. 사마의, 사마소, 사마사에게 협력하여 조모를 옹립하자고 진언했으나, 이후 조모가 가충에게 시해당하자 그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며 장례를 치를 것을 사마소에게 허락받았다.
사마부는 사마방의 여덟 아들 중 셋째로, 후한 말 영제 치세에 수도 경조윤을 지낸 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했다. 그는 독서를 즐기고 유능하며 어려운 이들에게 관대한 인물로 알려졌다. 조식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그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조식의 문학연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12]
조조의 장례식에서 사마부는 조비에게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고 천하의 모범이 될 것을 충고했고, 다른 관리들에게는 위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슬픔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라고 질책했다.
명제 시기, 위나라가 제갈량의 침공으로 어려움을 겪자 사마부는 군사 재정을 담당하는 도지상서에 임명되었다. 그는 병력과 물자를 정확히 보충하여 사마의의 군사 활동을 지원했고, 명제는 "두 명의 사마의를 얻었다"며 기뻐했다.[11]
249년 고평릉의 변 당시, 사마부는 상서령으로서 태위 장제와 함께 군기고를 점령하고, 낙양 궁궐 성문을 봉쇄하여 쿠데타 성공에 기여했다. 이후 사공과 태위에 임명되었다.
253년, 오나라의 제갈각이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를 침공하자, 사마부는 20만 군사를 이끌고 합비 신성의 포위를 풀고 제갈각을 격퇴했다.
사마부는 위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고, 감로의 변에서 조모가 암살당했을 때 그의 시신을 안고 통곡했다. 사마소가 조모를 서민의 예로 장례하려 하자, 사마부는 황태후에게 상소하여 왕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265년 사마염이 서진을 건국하고 조환에게서 선양을 받자, 사마부는 퇴위하는 조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죽는 날까지 위나라의 신하로 남겠다"고 말했다.[12] 사마염은 사마부를 안평왕에 봉하고 태재, 지절, 도독 중외제군사에 임명했지만, 사마부는 이를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위나라 신하로서의 정체성을 지켰다.[12]
272년 9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장례는 후한 유창의 예에 따라 성대하게 치러졌다.[12]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사마부는 사마방의 여덟 아들 중 셋째였다. 그는 책을 많이 읽고, 관료로서 매우 유능했으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대하기로 유명했다. 형들처럼 조조를 섬겼다. 『진서』에 따르면 온후하고 관대하며 성실한 성격으로, 사람을 원망한 적이 없다고까지 평가받았다. 경전에 정통하고 문재에도 뛰어나, 처음 주어진 관직은 조조의 아들이자 문재를 인정받은 조식의 문학연이었다. 분방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조식을 여러 번 간했고, 조식은 처음에는 그 간언에 반발했지만, 나중에는 그 잘못을 사과하고 사마부를 후하게 대우했다.[12]조조의 장례식 때에는 조비의 곡례가 너무 격렬한 것을 간하며 "당신은 천하의 규범이 되어야 할 분, 소인의 예는 취하지 마십시오"라고 충고했고, 다른 관리들에게는 "지금, 위왕을 잃어 해내는 혼돈의 극치인데, 당신들에게 울고 있을 틈이 없습니다"라고 질책했다.
위에는 도지상서라는 군사 재정을 전담하는 국무장관이 있었다. 제갈량의 침공에 시달리던 명제는 사마의의 동생이었던 사마부를 이에 발탁했다. 사마부는 병력과 물자를 정확하게 보충하여 형의 싸움을 후방에서 지원했다. 명제는 "나는 두 명의 사마의를 얻었다"라고 기뻐했다고 한다.[11]
정시 10년(249년), 고평릉의 변에서 사마부는 상서령으로 태위 장제와 함께 군기고를 점령했다.[5] 재빨리 낙양의 궁궐 성문을 틀어막고 내외를 진무했다. 쿠데타는 성공했고, 조상은 주살되었다. 사마부는 가평 3년(251년) 2월에 사공이 되었고, 7월에 태위가 되었다.
가평 5년(253년) 3월, 오의 제갈각은 대군을 이끌고 위에 침공했지만, 관구검과 문흠은 합비 신성의 장특과 함께 이를 막았다. 같은 해 7월, 사마부는 20만 병력을 이끌고 동정하여 합비 신성의 포위를 풀고 제갈각을 철수시켰다.
2. 2. 조위에서의 활약
고평릉의 변에서는 상서령으로 태위 장제와 함께 군기고를 점령했고, 오나라의 제갈각과의 교전에서는 20만 병력을 이끌고 동정하여 합비 신성의 포위를 풀고 제갈각을 철수시켰다.[12] 촉과의 전투에서는 등애의 후속 부대로 참전했다. 진나라의 대신이라기보다는 위나라의 충신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12]『진서』에 따르면 온후하고 관대하며 성실한 성격으로, 사람을 원망한 적이 없다고까지 평가받았다. 경전에 정통하고 문재에도 뛰어나, 처음 주어진 관직은 조조의 아들이자 문재를 인정받은 조식의 문학연이었다. 분방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조식을 여러 번 간했고, 조식은 처음에는 그 간언에 반발했지만, 나중에는 그 잘못을 사과하고 사마부를 후하게 대우했다.
조조의 장례식 때에는 조비의 곡례가 너무 격렬한 것을 간하며 "당신은 천하의 규범이 되어야 할 분, 소인의 예는 취하지 마십시오"라고 충고했고, 다른 중신들에게는 "지금, 위왕을 잃어 혼돈의 극치인데, 당신들에게 울고 있을 틈이 없습니다"라고 질책했다.
위나라에는 도지상서라는 군사 재정을 전담하는 국무장관이 있었다. 제갈량의 침공에 시달리던 명제는 사마의의 동생이었던 사마부를 이에 발탁했다. 사마부는 병력과 물자를 정확하게 보충하여 형의 싸움을 후방에서 지원했다. 명제는 "나는 두 명의 사마의를 얻었다"라고 기뻐했다고 한다[11]。
정시 10년(249년), 사마의는 조상에게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사마의에게 협력하는 중호군 사마사와 상서령 사마부는 재빨리 낙양의 궁궐 성문을 틀어막고 내외를 진무했다. 쿠데타는 성공했고, 조상은 주살되었다. 사마부는 가평 3년(251년) 2월에 사공이 되었고, 7월에 태위가 되었다.
가평 5년(253년) 3월, 오의 제갈각은 대군을 이끌고 위에 침공했지만, 관구검과 문흠은 합비 신성의 장특과 함께 이를 막았다. 같은 해 7월, 사마부는 20만 병력을 이끌고 동정하여 합비 신성의 포위를 풀고 제갈각을 철수시켰다.
위에 중용된 사마부는 위나라에 대한 충성이 두터웠고, 항상 황실을 존중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감로의 변에서 고귀향공 조모가 암살되었을 때, 사마부는 그 시신에 매달려 통곡했고, 더 나아가 사마소가 태후(곽씨)의 명이라며 조모를 서인의 격식으로 장례하려 하자, 이에 감연히 반대하여 황태후에게 상소하여 왕후의 격식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허가를 받아 그렇게 행했다. 그는 신중한 성격으로, 형이 권세를 잡았지만, 항상 한 발짝 물러선 겸손한 태도로 충근에 힘썼으며, 음모에는 일절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조카인 사마사나 사마소 등은 숙부가 황실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도, 손을 대지 않았다.
2. 3. 위나라에 대한 충성
고평릉의 변에서는 상서령으로 태위 장제와 함께 군기고를 점령했고, 대오전에서는 제갈각과 교전했고, 대촉한전에서는 등애의 후속 부대로써 교전했다.[12] 또한 진나라의 대신이라기보다는 위나라의 충신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12] 265년, 사마염이 조환에게서 선양을 받자 황제에서 퇴위한 진류왕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12] 안평왕에 봉해지고, 태재 · 지절 · 독중외제군사에 임명되었다.[12] 비록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를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항상 근심에 빠졌으며 시종 위나라의 신하였음을 잊지 않았다.[12]사마부는 위나라 정권이 진나라로 대체된 후에도 위나라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명했다.[6] 사마사와 사마소가 조위의 섭정으로 재임하는 동안 두 형제는 사마부를 어른으로 존경하며 그가 조위에 충성을 다하도록 허용했다.[7] 260년 6월, 위 황제 조모가 사마소에게서 권력을 되찾기 위한 쿠데타가 실패하여 암살당했을 때, 사마부는 조모의 장례식에서 슬퍼한 몇 안 되는 위나라 관리 중 한 명이었다. 266년 2월, 사마염이 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 후, 그는 그의 숙부인 사마부를 안평왕으로 봉하는 등 친척들에게 작위를 하사했다. 사마부는 봉해짐에 대해 "나는 위나라의 신하이며, 항상 그래왔다"고 말했다.[8]
위에 중용된 사마부는 위나라에 대한 충성이 두터웠고, 항상 황실을 존중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감로의 변에서 고귀향공 조모가 암살되었을 때, 사마부는 그 시신에 매달려 통곡했고, 더 나아가 사마소가 태후(곽씨)의 명이라며 조모를 서인의 격식으로 장례하려 하자, 이에 감연히 반대하여 황태후에게 상소하여 왕후의 격식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허가를 받아 그렇게 행했다. 그는 신중한 성격으로, 형이 권세를 잡았지만, 항상 한 발짝 물러선 겸손한 태도로 충근에 힘썼으며, 음모에는 일절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조카인 사마사나 사마소 등은 숙부가 황실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도, 손을 대지 않았다.
태시 원년(265년), 사마염이 서진의 무제로 즉위하고, 전 황제인 원제가 금용성으로 이송되었을 때, 사마부는 원제의 손을 잡고 "신은 죽는 날까지 위나라의 신하로 남겠습니다"라고 눈물로 사과했다.
2. 4. 서진 건국 이후
265년, 사마염이 조환에게서 선양을 받자 황제에서 퇴위한 진류왕의 손을 잡고 "신은 죽는 날까지 위나라의 신하로 남겠습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12] 황제에서 물러나는 조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위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다.사마염은 큰 할아버지인 사마부를 존경하여 안평왕에 봉하고 40000호의 식읍을 하사했으며, 더 나아가 태재·지절·도독 중외제군사에 임명하는 등 우대했지만, 사마부는 울적해하며 즐거워하지 않았다.[12] 비록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를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항상 근심에 빠졌으며 시종 위나라의 신하였음을 잊지 않았다.[12]
태시 8년 2월 임진(272년 4월 3일), 사망하였다. 향년 93세의 장수였다. 그의 장례는 후한의 동평왕 유창의 예에 따라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며, 매우 성대한 장례였다고 한다. 무제의 동생인 제왕 사마유의 장례도, 사마부의 예에 따라 행해진 것이 『진서』 제헌왕전에 보인다. 또한, 북위의 양현지 『낙양가람기』에 청하왕 원익의 장례가 사마부의 예를 따라 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조조가 죽자 조비의 즉위에 공헌하여 상서, 상서령을 지냈다. 사마의, 사마소, 사마사에게 협력하여 조모를 옹립하자고 진언했으나, 나중에 조모가 사마소파의 가충에게 시해당하자 죽은 조모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며 조모의 장례를 치를 것을 사마소에게 허락받았다. 265년 사마염이 즉위하자 안평왕에 봉해졌으나 받지 않고 죽을 때까지 위나라의 신하로 살았다.
4. 평가
사마부는 사마방의 여덟 아들 중 셋째로, 책을 많이 읽고 유능하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대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조식과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5]
사마의는 249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후 위나라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고, 이후 그의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가 그 뒤를 이었다. 사마부는 위나라에서 상서령, 태위, 태부 등의 고위 관직을 역임했으며, 촉한 및 동오와의 전투에서 군사 지휘관으로도 활약했다.[5]
266년 2월, 사마염이 진나라를 건국한 후에도 사마부는 위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지켰다.[6] 사마염은 그를 안평왕으로 봉했지만, 사마부는 "나는 위나라의 신하이며, 항상 그래왔다"라고 말했다.[8] 그는 272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진나라에서 태재(太宰) 직을 역임했으며, 최소 아홉 아들과 14명의 손자를 두었다.[9][10]
4. 1. 긍정적 평가
사마부는 책을 많이 읽고 관료로서 매우 유능했으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조식과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5]사마부는 위나라가 진나라로 바뀐 후에도 위나라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명했다.[6] 사마사와 사마소가 조위의 섭정으로 있을 때, 두 형제는 사마부를 어른으로 존경하여 그가 조위에 충성하는 것을 허용했다.[7] 260년 6월, 위나라 황제 조모가 사마소에게서 권력을 되찾기 위한 쿠데타에 실패하여 암살당했을 때, 사마부는 조모의 장례식에서 슬퍼한 몇 안 되는 위나라 관리 중 한 명이었다. 266년 2월, 사마염이 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 후, 그의 숙부인 사마부를 안평왕으로 봉하는 등 친척들에게 작위를 주었다. 사마부는 이에 대해 "나는 위나라의 신하이며, 항상 그래왔다"라고 말했다.[8]
5. 친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큰형 | 사마랑 | |
작은형 | 사마의 | |
맏아들 | 사마옹 | 안평정왕(安平貞王)[12] |
손자 | 사마숭(崇) | [12] |
손자 | 사마융 | 안평목왕(安平穆王)[12] |
아들 | 사마망 | 의양성왕(義陽成王)[12] (형 사마랑의 양자) |
아들 | 사마보 | 태원성왕(太原成王)[12] |
아들 | 사마익 | [12] (요절) |
아들 | 사마괴 | 태원열왕(太原烈王)[12] (사마옹의 아버지) |
아들 | 사마규 | 고양원왕(高陽元王)[12] |
아들 | 사마형 | 상산효왕(常山孝王)[12] |
아들 | 사마경 | 패순왕(沛順王)[12] |
아들 | 사마황 | 하비헌왕 |
참조
[1]
서적
Jin Shu
[2]
서적
Jin Shu
[3]
간행물
Tongdian
[4]
서적
Book of Jin
0272-04-03
[5]
서적
Sanguozhi
0251-08-22
[6]
서적
Jin Shu
[7]
서적
Jin Shu
[8]
문서
Sima Wang and Wang's two sons Sima Hong
[9]
서적
Book of Jin
0266-02-17
[10]
서적
Jin Shu
[11]
서적
晋書
[12]
위키문헌
진서 권37 열전 제7
:zh:晉書/卷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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