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드라굽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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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무드라굽타는 굽타 제국의 통치자로, 319년에서 350년 사이에 즉위하여 380년 이전까지 통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찬드라굽타 1세의 아들이자 쿠마라데비의 아들로, 북인도 정복과 남인도 원정을 통해 굽타 제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군사적 업적 외에도 종교적 관용, 문화 예술 후원, 동전 주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인도의 나폴레옹'으로 평가받는다. 사무드라굽타 사후에는 아들 찬드라굽타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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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드라굽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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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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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마하라자디라자 4해의 정복자 파람바가바타 데바라자 |
재위 기간 | 기원후 335년 ~ 375년경 |
출생 | 기원후 318년경 |
사망 | 기원후 380년경 |
배우자 | 다타데비 |
자녀 | 찬드라굽타 2세 라마굽타(추정) |
왕조 | 굽타 왕조 |
아버지 | 찬드라굽타 1세 |
어머니 | 쿠마라데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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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정보 | |
참전 전투 | 굽타-사카 전쟁 |
계승 정보 | |
전임자 | 찬드라굽타 1세, 카차(추정) |
후임자 | 찬드라굽타 2세, 라마굽타(추정) |
2. 즉위 및 통치 기간
현대 학자들은 사무드라굽타의 통치 시작 시점을 대략 319년부터 350년 사이로 다양하게 추정한다.
굽타 왕들의 비문은 일반적으로 319년을 기원으로 하는 굽타 달력 시대의 연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시대의 창시자가 누구인지는 논쟁의 대상이며, 학자들은 그 창시자를 찬드라굽타 1세 또는 사무드라굽타로 다양하게 귀속시킨다. 찬드라굽타 1세는 프라야그 기둥 비문이 그가 노년에 이르러 아들을 후계자로 임명했다는 점을 시사하므로, 아마도 긴 통치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은 정확하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사무드라굽타의 통치 시작 시점 또한 불확실하다.
만약 사무드라굽타가 굽타 시대의 창시자로 여겨진다면, 그의 즉위는 대략 319–320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반면에 그의 아버지 찬드라굽타 1세가 굽타 시대의 창시자로 여겨진다면, 사무드라굽타의 즉위는 더 늦은 시점으로 추정해야 한다. 사무드라굽타는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메가바르나 왕과 동시대 인물이었지만, 이 왕의 재위 기간 또한 불확실하다. 스리랑카에서 붓다의 죽음에 대해 채택된 전통적인 계산법에 따르면, 그는 304–332년에 통치했지만, 빌헬름 가이거와 같은 현대 학자들이 채택한 수정된 연대기에서는 그의 통치를 352–379년으로 간주한다. 전자의 날짜를 받아들인다면 사무드라굽타의 즉위는 대략 320년이 될 것이고, 후자의 날짜를 받아들인다면 대략 350년이 될 것이다.
사무드라굽타의 통치 종료 시점 또한 불확실하다. 사무드라굽타의 손녀 프라바바티굽타는 그의 아들 찬드라굽타 2세의 통치 기간인 대략 380년에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굽타 시대의 기원을 319년으로 가정). 따라서 사무드라굽타의 통치 종료는 이 해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무드라굽타의 재위 기간에 대한 다양한 추정치는 다음과 같다.
- A. S. Altekar: 대략 330–370년
- A. L. Basham: 대략 335–376년
- S. R. Goyal: 대략 350–375년
- Tej Ram Sharma: 대략 353–373년
사무드라굽타는 굽타 왕조의 창시자인 찬드라굽타 1세를 아버지로, 명문가 릿차비 가문의 딸 쿠마라데비(Kumāradevī)를 어머니로 두었다. 아라하바드 비문에는 찬드라굽타 1세가 많은 자식들 중에서 삼드라굽타를 후계자로 지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삼드라굽타가 통치 초기에 다른 형제들의 반란에 직면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삼드라굽타의 치세는 북인도에 대한 신속한 원정과 그 성공으로 시작되었다. 삼드라굽타가 즉위했을 당시 굽타 왕조는 비하르 북부와 벵골 지방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삼드라굽타는 찬드라굽타 1세의 유언에 따라 힌두교의 정치적 이상인 디그비자야(세계 정복)를 시작했다. 삼드라굽타의 군사 활동으로 북인도의 벵골, 마투라, 에란에 이르는 지역이 굽타 왕조의 지배 영역에 편입되었다.
이어 삼드라굽타는 남방 원정에 착수했다. 벵골 만을 따라 진출하여 데칸 고원 동부를 거쳐 칸치푸람(현재의 타밀나두 주 내 위치)에까지 이르렀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이 남방 원정에서는 삼드라굽타의 직접적인 지배가 세워지지는 않았다. 원정 후, 포획한 왕을 복위시키고 굽타 왕조의 종주국으로서 간접 지배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한때 마우리아 제국이 아소카 왕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분열되었지만, 굽타 제국은 삼드라굽타 사후에도 그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삼드라굽타는 "대왕 중의 통왕"이나 "최고의 제왕"과 같은 칭호를 사용하며, 신격화된 군주로 행동했다. 또한, 365년경에 힌두교(바라문교)의 대제사인 아슈바메다(말 제사)를 거행했다.
2. 1. 즉위 과정
사무드라굽타는 굽타 제국 황제 찬드라굽타 1세와 리차비 씨족 출신인 쿠마라데비 여왕의 아들이었다. 그의 단편적인 에란 석비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헌신, 의로운 행위, 용맹" 때문에 후계자로 선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은 찬드라굽타 1세가 그를 신하들 앞에서 고귀한 인물이라고 칭하며 "세상을 보호"하도록 임명한 방법을 유사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묘사는 찬드라굽타 1세가 노년에 왕위를 포기하고 아들을 다음 황제로 임명했음을 시사한다.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에 따르면 찬드라굽타 1세가 그를 다음 황제로 임명했을 때, "동등한 출생"을 가진 다른 사람들의 얼굴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한 해석은 이 다른 사람들이 인접한 왕들이었고, 사무드라굽타의 즉위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 다른 이론은 이 다른 사람들이 왕위를 놓고 경쟁하는 굽타 왕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찬드라굽타 1세 황제에게 실제로 여러 아들이 있었다면, 리차비 공주의 아들이라는 사무드라굽타의 배경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라하바드 비문에는 찬드라굽타 1세가 많은 자식들 중에서 삼드라굽타를 후계자로 지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삼드라굽타가 통치 초기에 다른 형제들의 반란에 직면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는 카차라는 굽타 통치자의 동전은 그를 "모든 왕의 섬멸자"라고 묘사한다. 이 동전들은 사무드라굽타가 발행한 동전과 매우 유사하다. 한 이론에 따르면 카차는 사무드라굽타의 초기 이름이었고, 황제는 제국의 지배를 바다까지 확장한 후 통치 이름 사무드라("바다")를 채택했다. 다른 이론은 카차가 사무드라굽타 이전 또는 이후에 번성한 별개의 왕(아마도 왕위를 놓고 경쟁하는 경쟁자)이었다는 것이다.
삼드라굽타는 365년경에 힌두교(바라문교)의 대제사인 아슈바메다(말 제사)를 거행했다.
3. 군사적 업적
굽타 제국의 비문들은 사무드라굽타가 뛰어난 군사적 업적을 이룩했음을 보여준다. 사무드라굽타의 에란 석비문에는 그가 "모든 왕족"을 복속시켰으며, 적들은 그를 꿈에서조차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이 비문에는 패배한 왕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사무드라굽타가 이미 여러 왕들을 제압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은 사무드라굽타의 재상이자 군 장교였던 하리셰나가 작성한 찬사로, 그의 광범위한 정복 활동을 상세히 칭송하고 있다. 이 비문은 사무드라굽타가 백 번의 전투를 치렀고, 백 개의 상처를 입었으며, "Prakrama"(용맹)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기록한다. 찬드라굽타 2세의 마투라 석비문은 사무드라굽타를 "모든 왕의 파괴자", "네 바다의 물로 명성이 맛보인" 자로 묘사한다.
현대 학자들은 사무드라굽타의 군사 작전 동기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은 그의 목표가 지구 통일(''dharani-bandha'')이었음을 시사하며, 이는 차크라바르틴 (세계 통치자)이 되려는 열망을 보여준다. 나가족의 아슈바메다 수행 또한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남부 원정은 인도와 동남아시아 간 무역 통제라는 경제적 고려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을 수 있다.
사무드라굽타의 제국은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북인도 핵심 영토와 여러 군주 국가 및 부족 조공국으로 구성되었다. 역사학자 R. C. 마줌다르는 사무드라굽타가 서쪽 라비 강(펀자브)에서 동쪽 브라마푸트라 강(벵골 및 아삼)까지, 북쪽 히말라야 산기슭에서 남쪽 빈디아 언덕까지의 지역을 직접 통치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영토 남서쪽 경계는 카르날에서 빌사까지 이어지는 가상의 선을 따랐다.
남쪽으로 사무드라굽타의 제국은 현재 마디아프라데시의 에란을 포함했다.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은 그가 남쪽 칸치푸람까지 진격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왕의 찬양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남쪽 왕들은 그의 직접적인 종주권 아래 있지 않았고, 단지 조공을 바쳤을 뿐이다.
역사학자 쿠날 차크라바르티에 따르면, 사무드라굽타의 군사 원정은 현재 펀자브와 라자스탄의 부족 공화국을 약화시켰지만, 이들 역시 그의 직접적인 종주권 아래 있지 않았고 조공만 바쳤다. 사무드라굽타가 다른 왕들을 통제했다는 주장은 의문스럽다. 역사학자 아슈비니 아그라왈은 가다하라 부족 금화에 '사무드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사무드라굽타의 통치가 펀자브 지역 체나브 강까지 미쳤음을 시사한다고 언급한다.
J. F. 플리트 등 일부 학자들은 데바라슈트라를 마하라슈트라, 에란다팔라를 에란돌과 동일시하여 사무드라굽타가 마하라슈트라 일부를 정복했다고 믿었다. 에란돌에서 굽타 시대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더 이상 옳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알라하바드 비문은 사무드라굽타가 격파한 세력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33]
- 사무드라굽타에 의해 멸망한 후 완전히 영토를 병합당한 제후
- * 갠지스강 유역의 독립 정권
- 공물을 바치고 굽타 왕조에 편입된 제후
- * 데칸고원의 마하나디강과 고다바리강 사이에 존재했던 12명의 영주
- 신종을 맹세한 변경 지방의 제왕
- * 아삼, 말와, 구자라트, 서펀자브, 라지푸타나에 존재했던 족장
- 사절을 파견하여 사무드라굽타의 권위를 인정한 원격지의 제왕
- * 사카인이 인도에 세운 왕국(인도-스키타이 왕국), 쿠샨 왕조
### 북인도 정복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에는 사무드라굽타가 아슈유타, 나가세나, 간파티-나가로 추정되는 통치자를 "근절"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아리아바르타 (북인도)의 왕들로, 비문 후반부에 다시 언급된다. 이 왕들은 현재 우타르프라데시 서부 지역 통치자들로 확인된다. 비문에 따르면, 사무드라굽타는 이들이 용서를 구한 후 복위시켰다.
이 세 왕의 이름이 반복되는 이유는 불분명하다. 일설에는 이들이 사무드라굽타의 아버지 사후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후 복위되었으나, 다시 반란을 일으켜 재차 진압되었다고 한다. 혹은 비문 작성자가 아리아바르타 지역 정복을 묘사하면서 이 왕들의 이름을 반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사무드라굽타는 코타 가문의 후손을 포획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코타족은 펀자브 지역 통치자로 추정되며, "코타"라는 문구와 시바 및 황소 상징이 새겨진 동전이 발견되었다. 굽타 군대가 코타 통치자를 포획하는 동안, 사무드라굽타는 푸쉬파라는 도시에서 "놀았다"고 묘사된다. 이는 왕자 시절의 업적을 묘사하거나, 수도에 머물며 군대만 파견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에는 사무드라굽타가 아리아바르타의 여러 왕들을 "강제로 뿌리 뽑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 이름 |
---|
루드라데바 |
마틸라 |
나가다타 |
찬드라바르만 |
가나파티나가 |
나가세나 |
아추타-난딘 |
발라바르만 |
남부 왕들과 달리, 이 왕들이 통치한 영토는 언급되지 않아 굽타 제국에 병합되었음을 시사한다. 비문에는 언급되지 않은 다른 왕들도 있는데, 시인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 루드라데바: 카우샴비에서 동전이 발견된 루드라와 동일인물일 수 있다. 혹은 우자이의 서부 크샤트라파 왕 루드라다만 2세나 루드라세나 3세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바카타카 왕 루드라세나 1세와 동일시하는 설도 있으나, 루드라데바는 북부, 바카타카는 남부 지역을 통치했기에 정확하지 않다.
- 마틸라: 정체는 불확실하다. 불란드시하르에서 발견된 테라코타 인장으로 알려진 마틸라와 동일시하는 설이 있었으나, 고고학적 근거에 따라 이 인장의 연대가 6세기로 추정되어 부정되었다.
- 나가다타: 다른 기록에는 없지만, 나가 분파 통치자로 추정된다. 굽타 총독 가문의 조상이라는 설도 있다.
- 찬드라바르만: 서벵골 푸슈카라나(현대 파칸나) 통치자 찬드라바르만과 동일시된다. 만다소르 비문에 언급된 찬드라바르만과 동일시하는 설도 있으나, 사무드라굽타가 아리아바르타 왕들을 "멸망"시키고 영토를 병합했기에 이 설은 부정된다.
- 나가세나: ''하르샤차리타''에 언급된 나가 왕 나가세나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 아추타-난딘: 비문 앞부분에 언급된 아추타와 동일인물로 보이며, 운율을 위해 이름이 축약되었을 수 있다. 아히치차트라 통치자 아추타와 동일인물이며, 그에게 귀속된 동전이 발견되었다.
- 발라바르만: 코삼비의 마가 왕조 통치자로 추정된다. 굽타의 가신이었던 마우카리 왕들의 조상이라는 설도 있다. 에란의 샤카 통치자 슈리다라-바르만의 후계자라는 설도 있다. 카마루파 바르만 왕조 발라바르만과 동일시하는 설도 있으나, 동시대인이 아니며 카마루파는 별개 국경 왕국으로 언급되어 부정된다.
알라하바드 비문은 사무드라굽타에게 격파된 세력을 멸망 후 영토를 병합당한 갠지스강 유역의 독립 정권, 공물을 바치고 굽타 왕조에 편입된 제후, 신종을 맹세한 변경 지방 제왕, 사절을 파견하여 권위를 인정한 원격지 제왕으로 분류한다.[33]
### 남인도 원정
사무드라굽타의 남인도 원정은 알라하바드 석주 명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명문에 따르면, 사무드라굽타는 남부 지역인 다크시나파타의 여러 왕들을 점령했다가 풀어주었다. 이 왕들은 주로 인도의 동부 해안 지역을 통치했으며, 사무드라굽타는 중앙 인도의 삼림 지대를 지나 동부 해안에 도달한 후, 벵골 만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무드라굽타가 풀어준 왕들은 다음과 같다.
- 코살라의 마헨드라: 차티스가르와 오디샤 일부를 포함하는 다크시나 코살라 지역을 통치했다.
- 마하칸타라의 비야그라-라자: 차티스가르의 바스타르-칸케르 지역으로 추정되는 마하칸타라를 다스렸다.
- 쿠랄라의 만타라자: 안드라 프라데시의 콜레루 호수 주변 지역으로 추정되는 쿠랄라를 통치했다.
- 피슈타푸라의 마헨드라기리: 안드라 프라데시의 현대 피타푸람인 피슈타푸라를 다스렸다.
- 코투라의 스바미다타: 안드라 프라데시의 현대 코투루(또는 코투르)로 비정되는 코투라를 통치했다. 그는 사무드라굽타가 칼링가 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저항한 족장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에란다팔라의 다마나: 스리까쿨람 근처의 에란다팔리로 비정되는 에란다팔라를 통치했다.
- 칸치의 비슈누고파: 칸치푸람의 팔라바 통치자로, 그의 조카 스칸다바르만 3세를 위해 섭정 역할을 했을 때 사무드라굽타의 침략을 받았다.
- 아바무크타의 닐라라자: 고다바리 강 유역에 위치한 "아비무크타-크셰트라"라는 지역과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불확실하다.
- 벵기의 하스티바르만: 안드라 프라데시의 벵기 (현대 페다베기)의 샬랑카야나 왕이었다.
- 팔라카의 우그라세나: 팔라바 부왕국의 본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팔라카다를 다스렸다.
- 데바라스트라의 쿠베라: 옐라만칠리 탈루카로 비정되는 데바라스트라를 통치했다.
- 쿠스탈라푸라의 다난자야: 텔랑가나의 알레루 강 유역에 위치한 현대 콜라누파카(또는 콜리파크)로 비정되는 쿠스탈라푸라를 다스렸다.
명문은 사무드라굽타가 이들 왕들을 풀어주고 호의(''아누그라하'')를 베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사무드라굽타가 이들을 종속국으로 복위시켰다고 본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사무드라굽타가 크리슈나 강까지 진출했다가 남부 왕들의 연합에 직면하여 퇴각했으며, 왕들을 풀어주었다는 주장은 실패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남부 왕들이 연합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포로로 잡힌 왕을 풀어주는 것은 고대 인도의 정치적 이상에 부합한다는 반론도 있다. 칼리다사의 ''라구밤샤''에 언급된 것처럼, 굽타 시대에도 의로운 정복자는 패배한 왕을 복위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사무드라굽타는 의로운 정복자처럼 행동하여 패배한 왕들을 봉신으로 복위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 변경 지역 및 부족 복속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에 따르면, 사무드라굽타는 숲 지역(atavika)의 모든 왕들을 복속시켰다. 이 숲 지역은 중앙 인도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 지역을 통치했던 파리브라자카 왕조의 비문에는 그들의 조상 왕국이 18개의 숲 왕국 안에 위치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은 여러 국경 왕국과 부족 과두제의 통치자들이 사무드라굽타에게 조공을 바치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 앞에서 경의를 표했다고 언급한다. 이 비문은 다섯 왕국을 국경 영토로 명확하게 묘사한다. 부족들이 통제하는 지역도 사무드라굽타 왕국의 국경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역사학자 우핀더 싱은 이러한 국경 통치자들이 굽타 황제와 맺은 관계가 "봉건적 관계의 몇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이론화한다. 역사학자 R. C. 마줌다르에 따르면, 사무드라굽타가 아리아바르타와 다크시나파타에서 이룬 정복으로 그의 명성이 크게 높아져 국경 통치자와 부족들이 싸움 없이 그에게 복종했을 가능성이 높다.
국경 왕국에는 사마타타(현재의 벵골), 다바카(현재의 아삼), 카마루파(현재의 아삼), 네팔(현재의 네팔), 카르트리푸라(현재의 우타라칸드로 추정)가 포함되었다.
부족 과두정치에는 말라바스, 아르주나야나스, 야우데야스, 마드라카스, 아비라스, 사나카니카스, 카카스, 프라르주나스, 카라파리커스 등이 포함되었다.
- 말라바스: 사무드라굽타 시대에 그들은 아마도 카르코타-나가라(현재 라자스탄의 나가르 요새)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그들의 동전 수천 개가 발견되었다.
- 아르주나야나스: 그들의 동전은 마투라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 야우데야스: 그들은 쿠샨족 이후 수틀레지 강과 야무나 강 사이의 지역을 통치했으며, 사무드라굽타의 조공국이 된 것으로 보인다.
- 마드라카스: 그들은 일반적으로 라비 강과 체나브 강 사이에 위치한다.
- 아비라스: 비문과 문헌 증거에 따르면 그들은 사무드라굽타 시대에 서부 인도에서 통치했다.
- 사나카니카스: 그들은 현재 마드야프라데시의 우다야기리 주변 지역을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 카카스: 그들은 고대 비문에서 카카나다라고 언급된 산치 언덕 주변 지역의 통치자였을 수 있다.
- 프라르주나스: 그들의 위치는 불확실하지만, 중앙 인도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카라파리커스: 그들은 다모 구역의 바티야가르에서 발견된 14세기 돌 비문에 언급된 "카라파라스"와 동일할 수 있다.
알라하바드 비문은 사무드라굽타가 격파한 세력을 갠지스강 유역의 독립 정권, 공물을 바치고 굽타 왕조에 편입된 제후, 신종을 맹세한 변경 지방의 제왕, 사절을 파견하여 사무드라굽타의 권위를 인정한 원격지의 제왕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33]
### 대외 관계
사무드라굽타의 비문은 여러 왕들이 그에게 복종했음을 보여준다. 이 왕들에는 "데이바푸트라-샤히-샤하나샤히, 샤카-무룬다스, 그리고 싱할라와 같은 섬나라의 통치자들"이 포함된다.
화폐학자 존 앨런은 Daivaputra, Shahi, Shahanushahi가 세 개의 다른 국가이거나, Shahi-Shahanushahi가 하나의 국가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역사가 D. R. 반다르카르는 Daivaputra-Shahi-Shahanushahi를 키다라 1세와 같은 단일 통치자로 비정했다.
역사학자 테지 람 샤르마는 Daivaputra는 쿠샨 제국의 왕을, Shahi는 쿠샨의 하위 분파를, Shahanushahi는 사산 제국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반면, 아슈비니 아그왈은 키다라가 샤푸르 2세의 봉신으로 통치하다가 사무드라굽타와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칼리다사는 그의 영웅 라구가 페르시아인을 물리쳤다고 언급하는데, 아그왈은 이것이 사산에 대한 키다라-굽타의 승리에서 영감을 받았을 수 있다고 본다.
아브라함 에랄리 등은 ''데바푸트라 샤히 샤하누 샤히''라는 표현은 쿠샨 왕자들을 지칭하며, 쿠샨의 왕실 칭호인 ''데바푸트라, 샤오, 샤오나노샤오''가 변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7][8][9] 이는 쿠샨이 펀자브를 통치했지만, 굽타 황제의 종주권 아래에 있었음을 시사한다.[10]
한스 T. 바커는 데바푸트라사히의 후보자는 간다라의 마지막 쿠샨 왕인 바수데바 2세 또는 키푸나다이며, 샤카-무룬다와 관련하여 무룬다가 원래 샤카 왕자들이 사용했던 칭호였다고 주장한다. 샤하누샤히는 '왕들의 왕' 샤푸르 2세를 지칭한다.[11]
S.R. 고얄은 사무드라굽타가 사산 제국의 샤푸르 2세가 제기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로 키다라와 동맹을 맺었다고 주장한다. 키다라 1세는 서기 367-368년에 사산 제국에서 승리했다.[12][13]
굽타-샤카 전쟁
스텐 코노우와 같은 학자들은 "무룬다"가 "영주"를 의미하는 샤카 칭호라고 주장한다.
K. P. 자야스와르와 같은 학자들은 샤카족과 무룬다가 서로 다른 두 집단이라고 믿는다. 이 이론에 따르면, 여기서 샤카는 우자라인의 서부 크샤트라파 통치자를 지칭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빈센트 아서 스미스는 샤카를 서부 말와와 사우라슈트라 지역을 지배했던 서부 크샤트라파로 동일시했다. D. R. 반다르카르는 샤카-무룬다 통치자를 산치 (카네르하 비문)와 에란에서 비문이 발견된 샤카 통치자 슈리다라바르만으로 간주했다.[14] 에란은 사무드라굽타의 에란 비문에 의해 증명된 바와 같이 직접 그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14]
중국 기록에 따르면, 메가바르나 (스리랑카) 왕은 보드가야에 수도원을 짓기를 원했고, 사무드라굽타는 이를 승인했다. 현장은 메가바르나가 보낸 풍부한 선물을 조공으로 여겼다.
"다른 섬들"은 인도화 왕국의 동남아시아일 수 있지만, 그들이 사무드라굽타에게 종속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들은 굽타 제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굽타 제국의 항구는 해상로를 통해 이 왕국들과 연결되었을 것이며, 이 왕국들에서 산스크리트어의 광범위한 사용은 굽타의 영향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351년에 로마 역사가에 따르면, 인도 대사관이 로마에 도착했다.[30]
361년 이전에 로마는 사산 왕조와 전쟁 중이었다. 이 기간 동안, 사무드라굽타는 사산 왕조에 대항하는 로마를 지원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무드라굽타는 샤푸르 2세에 대항하여 키다라와 협력하여 사산 왕조의 군대를 묶어두려 했을 것이다.[12]
박트리아와 북서부 인도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칼리다사의 "라구밤사"에 나타난 라구의 정복 묘사가 사무드라굽타의 원정 사건을 바탕으로 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칼리다스는 라구의 군사 원정을 묘사하는데, 여기에는 데칸의 트리쿠타 정복과 파라시카스, 후나스, 캄보자스에 대한 후속 원정이 포함된다.[30]
알라하바드 비문은 사무드라굽타가 격파한 세력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33]
- 사무드라굽타에 의해 멸망한 후 완전히 영토를 병합당한 제후
- * 갠지스강 유역의 독립 정권
- 공물을 바치고 굽타 왕조에 편입된 제후
- * 데칸고원의 마하나디강과 고다바리강 사이에 존재했던 12명의 영주
- 신종을 맹세한 변경 지방의 제왕
- * 아삼, 말와, 구자라트, 서펀자브, 라지푸타나에 존재했던 족장
- 사절을 파견하여 사무드라굽타의 권위를 인정한 원격지의 제왕
- * 사카인이 인도에 세운 왕국(인도-스키타이 왕국), 쿠샨 왕조
3. 1. 북인도 정복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에는 사무드라굽타가 아슈유타, 나가세나, 간파티-나가로 추정되는 통치자를 "근절"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아리아바르타 (북인도)의 왕들로, 비문 후반부에 다시 언급된다. 이 왕들은 현재의 우타르프라데시 서부 지역 통치자들로 확인된다. 비문에 따르면, 사무드라굽타는 이들이 용서를 구한 후 복위시켰다.이 세 왕의 이름이 반복되는 이유는 불분명하다. 일설에는 이들이 사무드라굽타의 아버지 사후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후 복위되었으나, 다시 반란을 일으켜 재차 진압되었다고 한다. 혹은 비문 작성자가 아리아바르타 지역 정복을 묘사하면서 이 왕들의 이름을 반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사무드라굽타는 코타 가문의 후손을 포획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코타족은 펀자브 지역 통치자로 추정되며, "코타"라는 문구와 시바 및 황소 상징이 새겨진 동전이 발견되었다. 굽타 군대가 코타 통치자를 포획하는 동안, 사무드라굽타는 푸쉬파라는 도시에서 "놀았다"고 묘사된다. 이는 왕자 시절의 업적을 묘사하거나, 수도에 머물며 군대만 파견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에는 사무드라굽타가 아리아바르타의 여러 왕들을 "강제로 뿌리 뽑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 이름 |
---|
루드라데바 |
마틸라 |
나가다타 |
찬드라바르만 |
가나파티나가 |
나가세나 |
아추타-난딘 |
발라바르만 |
남부 왕들과 달리, 이 왕들이 통치한 영토는 언급되지 않아 굽타 제국에 병합되었음을 시사한다. 비문에는 언급되지 않은 다른 왕들도 있는데, 시인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 루드라데바: 카우샴비에서 동전이 발견된 루드라와 동일인물일 수 있다. 혹은 우자이의 서부 크샤트라파 왕 루드라다만 2세나 루드라세나 3세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바카타카 왕 루드라세나 1세와 동일시하는 설도 있으나, 루드라데바는 북부, 바카타카는 남부 지역을 통치했기에 정확하지 않다.
- 마틸라: 정체는 불확실하다. 불란드시하르에서 발견된 테라코타 인장으로 알려진 마틸라와 동일시하는 설이 있었으나, 고고학적 근거에 따라 이 인장의 연대가 6세기로 추정되어 부정되었다.
- 나가다타: 다른 기록에는 없지만, 나가 분파 통치자로 추정된다. 굽타 총독 가문의 조상이라는 설도 있다.
- 찬드라바르만: 서벵골 푸슈카라나(현대 파칸나) 통치자 찬드라바르만과 동일시된다. 만다소르 비문에 언급된 찬드라바르만과 동일시하는 설도 있으나, 사무드라굽타가 아리아바르타 왕들을 "멸망"시키고 영토를 병합했기에 이 설은 부정된다.
- 나가세나: ''하르샤차리타''에 언급된 나가 왕 나가세나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 아추타-난딘: 비문 앞부분에 언급된 아추타와 동일인물로 보이며, 운율을 위해 이름이 축약되었을 수 있다. 아히치차트라 통치자 아추타와 동일인물이며, 그에게 귀속된 동전이 발견되었다.
- 발라바르만: 코삼비의 마가 왕조 통치자로 추정된다. 굽타의 가신이었던 마우카리 왕들의 조상이라는 설도 있다. 에란의 샤카 통치자 슈리다라-바르만의 후계자라는 설도 있다. 카마루파 바르만 왕조 발라바르만과 동일시하는 설도 있으나, 동시대인이 아니며 카마루파는 별개 국경 왕국으로 언급되어 부정된다.
알라하바드 비문은 사무드라굽타에게 격파된 세력을 멸망 후 영토를 병합당한 갠지스강 유역의 독립 정권, 공물을 바치고 굽타 왕조에 편입된 제후, 신종을 맹세한 변경 지방 제왕, 사절을 파견하여 권위를 인정한 원격지 제왕으로 분류한다.[33]
3. 2. 남인도 원정
사무드라굽타의 남인도 원정은 알라하바드 석주 명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명문에 따르면, 사무드라굽타는 남부 지역인 다크시나파타의 여러 왕들을 점령했다가 풀어주었다. 이 왕들은 주로 인도의 동부 해안 지역을 통치했으며, 사무드라굽타는 중앙 인도의 삼림 지대를 지나 동부 해안에 도달한 후, 벵골 만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사무드라굽타가 풀어준 왕들은 다음과 같다.
- 코살라의 마헨드라: 차티스가르와 오디샤 일부를 포함하는 다크시나 코살라 지역을 통치했다.
- 마하칸타라의 비야그라-라자: 차티스가르의 바스타르-칸케르 지역으로 추정되는 마하칸타라를 다스렸다.
- 쿠랄라의 만타라자: 안드라 프라데시의 콜레루 호수 주변 지역으로 추정되는 쿠랄라를 통치했다.
- 피슈타푸라의 마헨드라기리: 안드라 프라데시의 현대 피타푸람인 피슈타푸라를 다스렸다.
- 코투라의 스바미다타: 안드라 프라데시의 현대 코투루(또는 코투르)로 비정되는 코투라를 통치했다. 그는 사무드라굽타가 칼링가 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저항한 족장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에란다팔라의 다마나: 스리까쿨람 근처의 에란다팔리로 비정되는 에란다팔라를 통치했다.
- 칸치의 비슈누고파: 칸치푸람의 팔라바 통치자로, 그의 조카 스칸다바르만 3세를 위해 섭정 역할을 했을 때 사무드라굽타의 침략을 받았다.
- 아바무크타의 닐라라자: 고다바리 강 유역에 위치한 "아비무크타-크셰트라"라는 지역과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불확실하다.
- 벵기의 하스티바르만: 안드라 프라데시의 벵기 (현대 페다베기)의 샬랑카야나 왕이었다.
- 팔라카의 우그라세나: 팔라바 부왕국의 본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팔라카다를 다스렸다.
- 데바라스트라의 쿠베라: 옐라만칠리 탈루카로 비정되는 데바라스트라를 통치했다.
- 쿠스탈라푸라의 다난자야: 텔랑가나의 알레루 강 유역에 위치한 현대 콜라누파카(또는 콜리파크)로 비정되는 쿠스탈라푸라를 다스렸다.
명문은 사무드라굽타가 이들 왕들을 풀어주고 호의(''아누그라하'')를 베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사무드라굽타가 이들을 종속국으로 복위시켰다고 본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사무드라굽타가 크리슈나 강까지 진출했다가 남부 왕들의 연합에 직면하여 퇴각했으며, 왕들을 풀어주었다는 주장은 실패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남부 왕들이 연합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포로로 잡힌 왕을 풀어주는 것은 고대 인도의 정치적 이상에 부합한다는 반론도 있다. 칼리다사의 ''라구밤샤''에 언급된 것처럼, 굽타 시대에도 의로운 정복자는 패배한 왕을 복위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사무드라굽타는 의로운 정복자처럼 행동하여 패배한 왕들을 봉신으로 복위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3. 3. 변경 지역 및 부족 복속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에 따르면, 사무드라굽타는 숲 지역(atavika)의 모든 왕들을 복속시켰다. 이 숲 지역은 중앙 인도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 지역을 통치했던 파리브라자카 왕조의 비문에는 그들의 조상 왕국이 18개의 숲 왕국 안에 위치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은 여러 국경 왕국과 부족 과두제의 통치자들이 사무드라굽타에게 조공을 바치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 앞에서 경의를 표했다고 언급한다. 이 비문은 다섯 왕국을 국경 영토로 명확하게 묘사한다. 부족들이 통제하는 지역도 사무드라굽타 왕국의 국경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역사학자 우핀더 싱은 이러한 국경 통치자들이 굽타 황제와 맺은 관계가 "봉건적 관계의 몇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이론화한다. 역사학자 R. C. 마줌다르에 따르면, 사무드라굽타가 아리아바르타와 다크시나파타에서 이룬 정복으로 그의 명성이 크게 높아져 국경 통치자와 부족들이 싸움 없이 그에게 복종했을 가능성이 높다.
국경 왕국에는 사마타타(현재의 벵골), 다바카(현재의 아삼), 카마루파(현재의 아삼), 네팔(현재의 네팔), 카르트리푸라(현재의 우타라칸드로 추정)가 포함되었다.
부족 과두정치에는 말라바스, 아르주나야나스, 야우데야스, 마드라카스, 아비라스, 사나카니카스, 카카스, 프라르주나스, 카라파리커스 등이 포함되었다.
- 말라바스: 사무드라굽타 시대에 그들은 아마도 카르코타-나가라(현재 라자스탄의 나가르 요새)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그들의 동전 수천 개가 발견되었다.
- 아르주나야나스: 그들의 동전은 마투라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 야우데야스: 그들은 쿠샨족 이후 수틀레지 강과 야무나 강 사이의 지역을 통치했으며, 사무드라굽타의 조공국이 된 것으로 보인다.
- 마드라카스: 그들은 일반적으로 라비 강과 체나브 강 사이에 위치한다.
- 아비라스: 비문과 문헌 증거에 따르면 그들은 사무드라굽타 시대에 서부 인도에서 통치했다.
- 사나카니카스: 그들은 현재 마드야프라데시의 우다야기리 주변 지역을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 카카스: 그들은 고대 비문에서 카카나다라고 언급된 산치 언덕 주변 지역의 통치자였을 수 있다.
- 프라르주나스: 그들의 위치는 불확실하지만, 중앙 인도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카라파리커스: 그들은 다모 구역의 바티야가르에서 발견된 14세기 돌 비문에 언급된 "카라파라스"와 동일할 수 있다.
알라하바드 비문은 사무드라굽타가 격파한 세력을 갠지스강 유역의 독립 정권, 공물을 바치고 굽타 왕조에 편입된 제후, 신종을 맹세한 변경 지방의 제왕, 사절을 파견하여 사무드라굽타의 권위를 인정한 원격지의 제왕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33]
3. 4. 대외 관계
사무드라굽타의 비문은 여러 왕들이 그에게 복종했음을 보여준다. 이 왕들에는 "데이바푸트라-샤히-샤하나샤히, 샤카-무룬다스, 그리고 싱할라와 같은 섬나라의 통치자들"이 포함된다.화폐학자 존 앨런은 Daivaputra, Shahi, Shahanushahi가 세 개의 다른 국가이거나, Shahi-Shahanushahi가 하나의 국가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역사가 D. R. 반다르카르는 Daivaputra-Shahi-Shahanushahi를 키다라 1세와 같은 단일 통치자로 비정했다.
역사학자 테지 람 샤르마는 Daivaputra는 쿠샨 제국의 왕을, Shahi는 쿠샨의 하위 분파를, Shahanushahi는 사산 제국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반면, 아슈비니 아그왈은 키다라가 샤푸르 2세의 봉신으로 통치하다가 사무드라굽타와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칼리다사는 그의 영웅 라구가 페르시아인을 물리쳤다고 언급하는데, 아그왈은 이것이 사산에 대한 키다라-굽타의 승리에서 영감을 받았을 수 있다고 본다.
아브라함 에랄리 등은 ''데바푸트라 샤히 샤하누 샤히''라는 표현은 쿠샨 왕자들을 지칭하며, 쿠샨의 왕실 칭호인 ''데바푸트라, 샤오, 샤오나노샤오''가 변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7][8][9] 이는 쿠샨이 펀자브를 통치했지만, 굽타 황제의 종주권 아래에 있었음을 시사한다.[10]
한스 T. 바커는 데바푸트라사히의 후보자는 간다라의 마지막 쿠샨 왕인 바수데바 2세 또는 키푸나다이며, 샤카-무룬다와 관련하여 무룬다가 원래 샤카 왕자들이 사용했던 칭호였다고 주장한다. 샤하누샤히는 '왕들의 왕' 샤푸르 2세를 지칭한다.[11]
S.R. 고얄은 사무드라굽타가 사산 제국의 샤푸르 2세가 제기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로 키다라와 동맹을 맺었다고 주장한다. 키다라 1세는 서기 367-368년에 사산 제국에서 승리했다.[12][13]
굽타-샤카 전쟁
스텐 코노우와 같은 학자들은 "무룬다"가 "영주"를 의미하는 샤카 칭호라고 주장한다.
K. P. 자야스와르와 같은 학자들은 샤카족과 무룬다가 서로 다른 두 집단이라고 믿는다. 이 이론에 따르면, 여기서 샤카는 우자라인의 서부 크샤트라파 통치자를 지칭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빈센트 아서 스미스는 샤카를 서부 말와와 사우라슈트라 지역을 지배했던 서부 크샤트라파로 동일시했다. D. R. 반다르카르는 샤카-무룬다 통치자를 산치 (카네르하 비문)와 에란에서 비문이 발견된 샤카 통치자 슈리다라바르만으로 간주했다.[14] 에란은 사무드라굽타의 에란 비문에 의해 증명된 바와 같이 직접 그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14]
중국 기록에 따르면, 메가바르나 (스리랑카) 왕은 보드가야에 수도원을 짓기를 원했고, 사무드라굽타는 이를 승인했다. 현장은 메가바르나가 보낸 풍부한 선물을 조공으로 여겼다.
"다른 섬들"은 인도화 왕국의 동남아시아일 수 있지만, 그들이 사무드라굽타에게 종속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들은 굽타 제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굽타 제국의 항구는 해상로를 통해 이 왕국들과 연결되었을 것이며, 이 왕국들에서 산스크리트어의 광범위한 사용은 굽타의 영향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351년에 로마 역사가에 따르면, 인도 대사관이 로마에 도착했다.[30]
361년 이전에 로마는 사산 왕조와 전쟁 중이었다. 이 기간 동안, 사무드라굽타는 사산 왕조에 대항하는 로마를 지원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무드라굽타는 샤푸르 2세에 대항하여 키다라와 협력하여 사산 왕조의 군대를 묶어두려 했을 것이다.[12]
박트리아와 북서부 인도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칼리다사의 "라구밤사"에 나타난 라구의 정복 묘사가 사무드라굽타의 원정 사건을 바탕으로 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칼리다스는 라구의 군사 원정을 묘사하는데, 여기에는 데칸의 트리쿠타 정복과 파라시카스, 후나스, 캄보자스에 대한 후속 원정이 포함된다.[30]
알라하바드 비문은 사무드라굽타가 격파한 세력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33]
- 사무드라굽타에 의해 멸망한 후 완전히 영토를 병합당한 제후
- * 갠지스강 유역의 독립 정권
- 공물을 바치고 굽타 왕조에 편입된 제후
- * 데칸고원의 마하나디강과 고다바리강 사이에 존재했던 12명의 영주
- 신종을 맹세한 변경 지방의 제왕
- * 아삼, 말와, 구자라트, 서펀자브, 라지푸타나에 존재했던 족장
- 사절을 파견하여 사무드라굽타의 권위를 인정한 원격지의 제왕
- * 사카인이 인도에 세운 왕국(인도-스키타이 왕국), 쿠샨 왕조
4. 종교 정책
사무드라굽타의 에란 비문에는 비슈누 신상을 사원에 설치한 기록이 있으며, 날란다와 가야 비문은 사무드라굽타를 비슈누 숭배자(''parama-Bhagavata'')라고 칭하고 있다. 그는 불교에 관대하여, 아누라다푸라의 왕 메가바르나가 보드가야에 불교 사원을 건축하는 것을 허용했다.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은 사무드라굽타가 Sattra (소마 제사) 및 Diksha의 브라만교 의식을 수행했으며, "수백만 마리의 암소를 주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아들 찬드라굽타 2세의 마투라 석비 또한 그를 "수백만 마리의 암소와 금"을 주는 자로 묘사한다. 에란 비문은 사무드라굽타가 금을 주는 데 있어서 프리투, 라가바 및 다른 전설적인 왕들을 능가했다고 말한다.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은 그의 왕권신수설을 암시하며, 그를 ''파라마 푸루샤''(최고 존재)와 다나다 (쿠베라), 바루나, 인드라, 안타카 (야마)와 같은 신들에 비유한다. 에란 비문은 그가 쾌락과 분노에 있어서 쿠베라와 야마와 각각 동등하다고 언급한다. 마투라 석비는 유사하게 그를 쿠베라, 바루나, 인드라, 야마와 같은 신들과 동등하다고 묘사한다.
사무드라굽타는 고대 인도 왕들이 제국의 주권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아슈바메다 의식을 거행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금화를 발행했다. 바카타카 여왕이었던 사무드라굽타의 손녀 프라바바티-굽타의 동판 비문에는 그가 여러 번의 말 희생 의식을 거행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찬드라굽타 2세의 마투라 석비에는 사무드라굽타를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아슈바메다 희생을 복원한 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바라시바, 바카타카, 샬랑카야나, 팔라바 왕조를 포함한 여러 왕들이 이전 몇 년 동안 아슈바메다 의식을 거행했다. R. C. 마줌다르에 따르면 사무드라굽타는 여러 세기 동안 마가다 지역에서 희생 의식을 거행한 최초의 왕이었다. 마줌다르는 또한 바라시바, 바카타카 및 기타 동시대 왕들이 거행한 아슈바메다 의식이 "종교적 성격에 더 가까웠던" 반면, 사무드라굽타의 의식은 실제로 그의 제국 주권을 증명하는 것을 포함했다고 이론화한다.
사무드라굽타의 현존하는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의 구절에는 아슈바메다 의식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한 이론에 따르면, 이 비문은 희생자의 찬가가 아슈바메다 의식의 필수적인 부분이었기 때문에 의식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5. 문화 및 경제
사무드라굽타는 굽타 통치자 중 최초로 동전을 주조한 인물이다.[15][16] 굽타 제국의 동전은 초기 쿠샨 제국의 동전에서 유래했으며, 북서부 지역 정복 이후 쿠샨의 무게 기준, 기술, 디자인을 차용했다.[18][19] 심지어 굽타는 쿠샨족의 동전 이름인 ''디나르''(Dinar)를 채택했는데, 이는 로마의 ''데나리우스 아우레우스''(Denarius aureus)에서 유래했다.[20][21][22]
사무드라굽타의 표준 동전 유형은 후기 쿠샨 통치자들의 동전과 매우 유사하지만,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통치자의 머리 장식은 쿠샨족의 뾰족한 모자 대신 꼭 맞는 모자를 착용하고, 삼지창 대신 가루다 표준을 사용했으며, 사무드라굽타의 보석은 인도식이다.[15]
사무드라굽타의 동전에는 산스크리트어 전설이 새겨져 있었으며, 표준형, 궁수형, 전투 도끼형, 호랑이 사냥꾼형, 리리스트형, 아슈바메다형 등 다양한 유형이 발견되었다.[23] 각 유형별 동전의 전설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형 | 앞면 전설 | 뒷면 전설 | 설명 |
---|---|---|---|
표준형 | 사마라-샤타-비타타-비자요-지타-리푸라지토-디밤-자야티(Samara-shata-vitata-vijayo-jita-ripurajito-divam-jayati) | 프라크라마(Prakramah) | "백 번의 전투에서 끊임없이 승리를 거두고 적을 정복한 정복되지 않은 자가 천국을 얻는다" |
궁수형 | 아프라티라타 비지탸 크시팀 수차리타이르 (또는 아브니파티르) 디밤 자야티(Apratiratha vijitya kshitim sucharitair (or avnipatir) divam Jayati) | 아프라티라타흐(Apratirathah) | "적대적인 전차에 반대하지 않고, 땅을 정복하고, 그의 선행으로 하늘을 정복한다" |
전투 도끼형 | 크리탄타-파르슈르-자야티아지타라자제타지-타흐(Kritanta-parshur-jayatyajitarajajetaji-tah) | 크리탄타-파라슈흐(Kritanta-parashuh) | "크리탄타(죽음의 신)의 도끼를 휘두르며, 정복되지 않은 왕들의 정복자는 승리한다" |
호랑이 사냥꾼형 | 바그라-프라크라마흐(Vaghra-prakramah) | "호랑이의 위엄을 가짐" | |
리리스트형 | 왕의 이름 | 사무드라굽타가 비나를 연주하는 모습 | |
아슈바메다형 | 라자디라자흐 프리트빔 아비트바 디밤 자야티아흐리타바지-메다흐(Rajadhirajah prithvim avitva divam jayatyahritavaji-medhah) | 아슈바메다-프라크라마흐(Ashvamedha-prakramah) | "왕 중의 왕, 말을 희생한 자, 땅을 보호한 자는 천국을 정복한다" |
일부 동전에는 ''라자디라자흐 프리트빔 아비트바 디밤 자야티아-프라티바르야-비르야흐''(Rajadhirajah prithvim avitva divam jayatya-prativarya-viryah) ("왕 중의 왕, 저항할 수 없는 용맹함, 땅을 보호하고 천국을 얻는다")라는 다른 전설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화폐학자 존 앨런을 포함한 학자들은 찬드라굽타와 쿠마라데비의 초상이 새겨진 금화가 사무드라굽타가 그의 부모를 기념하기 위해 발행했다고 추정한다.[24][25]
사무드라굽타 시대에는 무게 123그레인(약 7.97g), 금 함유량 87%의 화폐가 주조되었다.[33] 어떤 화폐에는 아슈바메다를 거행하는 모습, 또 다른 화폐에는 비나를 연주하는 사무드라굽타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33]
사무드라굽타는 학문, 시, 음악 등 문화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는 시를 즐겨 썼고, 뛰어난 음악가였다.[33] 그의 궁정에는 많은 시인과 학자들이 모여 세련되고 발전된 인도 문화가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는 많은 건설 사업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존하는 건물은 확인되지 않았다.[33]
사무드라굽타는 다른 굽타 왕조 군주와 마찬가지로 힌두교를 숭배했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자세를 보였다.[33] 예를 들어 불교가 번성한 실론의 왕이 부다가야에 순례자들을 위한 종교 시설을 짓는 것을 허락했다.
6. 유산
빈센트 스미스는 사뭇라굽타를 그의 뛰어난 군사 작전과 전략적 역량 때문에 "인도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렀다.[30] 그의 업적에는 아리아바르타에서 적들의 완전한 패배, 데칸 고원을 가로지르는 광범위한 원정, 그리고 인더스강을 건너는 원정이 포함된다.[30] 사뭇라굽타의 제국은 북인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으며, 신드, 카슈미르의 대부분, 서부 라자스탄과 같은 지역은 제외되었다.[30]
사무드라굽타의 제국 구조는 나폴레옹의 조직 전략과 유사하며, 우호적인 국가와 종속국으로 둘러싸인 강력한 핵심을 특징으로 한다.[30] 나폴레옹처럼 사무드라굽타도 당대의 지배적인 이념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알라하바드 비문은 굽타 시대에 만연했던 힌두교 이상인 차크라바르티트바, 즉 보편적 주권에 대한 그의 열망을 반영한다.[30] 워털루 전투 이후 야망이 꺾인 나폴레옹과 달리, 사무드라굽타는 자신의 비전을 성공적으로 실현하고 아슈바메다 (말 희생)의 수행으로 자신의 업적을 기념했다.[30]
사무드라굽타가 수행한 아슈바메다는 '치로차나'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정교한 형태였다.[30] 알라하바드 비문은 사무드라굽타의 아슈바메다 희생 수행과 함께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30]
사무드라굽타의 통치는 아소카 황제가 불교를 장려한 이후 쇠퇴했던 브라만교의 부활을 알렸다.[30] 사무드라굽타는 군사적 정복을 통해 전통적인 *차크라바르틴*이 되려고 했다.[30]
비크라마디티야가 존재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사무드라굽타가 비크라마라는 칭호를 사용한 최초의 역사적 통치자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30]
6. 1. 평가
사무드라굽타의 동전은 그를 키가 크고 근육질의 체격을 가진 남자로 묘사한다.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은 그를 동정심 많은 통치자로 묘사하며, "마음은 낮은 자, 가난한 자, 무력한 자, 고통받는 자에게 구제를 제공하는 데 전념했다"고 진술한다. 그는 자신에게 패배한 왕들을 포함하여 왕국을 잃은 많은 왕족들을 복위시켰다고 언급되지만, 동시에 엄격한 행정("Prachanda shasana")을 유지했다.이 비문은 사무드라굽타가 시 작품으로 인해 학식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진술하며, 그의 음악적 재능은 비나를 연주하는 모습을 묘사한 금화에서도 확인된다. 비문에는 그가 아름다운 음악 연주로 천상의 음악가 툼부루와 나르다를 부끄럽게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날카로운 지성으로 신들의 주(브리하스파티)의 스승을 부끄럽게 만들었다고 칭찬한다.
빈센트 스미스는 사뭇라굽타를 그의 뛰어난 군사 작전과 전략적 역량 때문에 "인도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렀다.[30] 그의 업적에는 아리아바르타에서 적들의 완전한 패배, 데칸 고원을 가로지르는 광범위한 원정, 그리고 인더스강을 건너는 원정이 포함된다.[30] 사무드라굽타의 제국은 북인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으며, 신드, 카슈미르의 대부분, 서부 라자스탄과 같은 지역은 제외되었다.[30]
사무드라굽타의 제국 구조는 나폴레옹의 조직 전략과 유사하며, 우호적인 국가와 종속국으로 둘러싸인 강력한 핵심을 특징으로 한다.[30] 나폴레옹처럼 사무드라굽타도 당대의 지배적인 이념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알라하바드 비문은 굽타 시대에 만연했던 힌두교 이상인 차크라바르티트바, 즉 보편적 주권에 대한 그의 열망을 반영한다.[30] 워털루 전투 이후 야망이 꺾인 나폴레옹과 달리, 사무드라굽타는 자신의 비전을 성공적으로 실현하고 아슈바메다 (말 희생)의 수행으로 자신의 업적을 기념했다.[30]
사무드라굽타가 수행한 아슈바메다는 '치로차나'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정교한 형태였다.[30] 알라하바드 비문은 사무드라굽타의 아슈바메다 희생 수행과 함께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30]
사무드라굽타의 통치는 아소카 황제가 불교를 장려한 이후 쇠퇴했던 브라만교의 부활을 알렸다.[30] 사무드라굽타는 군사적 정복을 통해 전통적인 *차크라바르틴*이 되려고 했다.[30]
비크라마디티야가 존재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사무드라굽타가 비크라마라는 칭호를 사용한 최초의 역사적 통치자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30]
7. 후계
굽타 왕조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사무드라굽타의 뒤는 찬드라굽타 2세가 이었는데, 그는 다타데비의 아들이었다. 부분적으로 유실된 산스크리트어 극본 ''데비찬드라굽탐''을 재구성한 내용을 바탕으로, 현대 역사가들은 사무드라굽타가 처음에는 라마굽타 (아마도 장남)의 뒤를 이었고, 그 다음 찬드라굽타 2세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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