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 (오호 십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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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오호 십육국)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존재했던 선비족 국가로, 걸복국인에 의해 385년에 건국되었다. 걸복국인은 대선우를 자칭하고 용사성에 수도를 정했으며, 이후 걸복건귀가 금성으로 천도하고 전진, 후진 등 주변 국가들과 복속 및 외교 관계를 맺었다. 걸복건귀 사후 걸복치반이 즉위하여 북량과 대립하며 불교를 융성시켰으나, 토욕혼과 강족의 반란으로 쇠퇴하여 431년 혁련정에 의해 멸망했다. 서진의 역대 군주들은 황제를 칭하지 않고 대선우, 진왕 등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주요 통치자로는 걸복국인, 걸복건귀, 걸복치반, 걸복모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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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오호 십육국)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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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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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통칭 | 서진 (西秦) |
공통 명칭 | 서진 |
토착어 명칭 | 387–388: 원천 (苑川) 388–389, 394, 411–414: 하남 (河南) 389–394: 금성 (金城) 394–395: 양 (梁) 395–400, 409–411, 414–431: 진 (秦) |
존속 기간 | 385년–400년, 409년–431년 |
지위 | 속국 |
종주국 | 전진 후진 동진 북위 |
정부 형태 | 군주제 |
수도 | 385–388: 융시청 (勇士城) 388–395: 진청 (金城) 395–400: 시청 (西城) 400, 410–412: 원천 (苑川) 409–410: 두젠산 (度堅山) 412: 탄자오 (譚郊) 412–429: 포한 (枹罕) 429–430: 정련 (定連) 430–431: 남안 (南安) |
현재 국가 | 중국 |
역사 | |
주요 사건 | 기복국인의 전진에 대한 반란 (383년) 기복간귀의 남량에 대한 항복 (400년) 기복건귀의 독립 재선언 (409년) 기복건귀의 기복공부에 의한 암살 (412년) |
멸망 | 하에 의해 멸망 |
군주 | |
군주 1 | 이름: 기복국인 재임 기간: 385년–388년 |
군주 2 | 이름: 기복간귀 재임 기간: 388년–400년, 409년–412년 |
군주 3 | 이름: 기복치반 재임 기간: 412년–428년 |
군주 4 | 이름: 기복모말 재임 기간: 428년–431년 |
2. 역사
선비족 걸복부(乞伏部) 출신의 걸복국인은 본래 전진 부견 휘하의 남선우(南單于)였으나, 383년 비수대전 이후 전진의 세력이 약화되자 농서(隴西) 일대에서 세력을 규합하였다. 385년, 부견이 후진의 요장에게 살해되자, 걸복국인은 대선우(大單于)를 자칭하고 용사성(勇士城)을 수도로 삼아 독립적인 정권을 세웠다.
388년 걸복국인의 뒤를 이은 동생 걸복건귀는 수도를 금성(金城)으로 옮겼으며, 389년에는 전진의 부등으로부터 금성왕(金城王)으로 책봉받았다. 394년, 부등이 후진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구원을 요청하자 이에 응했으나 부등은 전사하였다. 걸복건귀는 부등의 아들 부숭마저 몰아내고, 후구지의 양정과 연합한 부숭 세력을 격파하여 전진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농서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후 서성(西城)과 원천(苑川)으로 여러 차례 천도하였으나, 400년 후진의 침공으로 패배하여 남량으로 망명하면서 서진은 일시적으로 멸망하였다.
걸복건귀는 남량을 거쳐 후진에 귀순하여 장수가 되었고, 401년 옛 수도였던 원천에 부임하여 다시 세력을 키웠다. 409년, 후진이 쇠퇴한 틈을 타 도견산(度堅山)에서 다시 독립하여 서진을 재건하였다. 410년 수도를 원천으로 옮기는 등 국가 정비에 힘썼으나, 412년 조카인 걸복공부(乞伏公府)에게 살해당했다.
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은 걸복공부를 제거하고 하남왕(河南王)으로 즉위하였다. 414년 남량을 멸망시키고 진왕(秦王)을 자칭하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이로 인해 북량과 국경을 맞닿게 되어 대립하였다. 428년 걸복치반이 병사하고 아들 걸복모말이 즉위하였으나, 그의 폭정으로 민심이 떠났다. 430년 북량의 위협을 피해 북위에 귀순하려 했으나 하의 방해로 실패하였고, 431년 결국 하의 황제 혁련정에게 멸망당하였다.
2. 1. 건국 이전
선비족의 서쪽 분파인 걸복부(乞伏部)는 약 265년경 서진 초기에 롱서 지역 주변으로 이주했다. 걸복부의 조상은 루푸(如弗)로 전해지며, 그는 걸복 부족과 스인(斯引), 출련(出連), 칠루(叱盧) 등 세 부족을 이끌고 고비 사막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인산 산맥에 자리 잡았다. 이후 걸복부는 허타오 지역 북쪽, 샤위안(夏緣), 가오핑강(高平川, 현재의 닝샤 후이족 자치구 구위안) 일대를 거쳐 이동했으며, 고차(高車)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목 생활을 이어가던 걸복부는 걸복사번의 시대에 이르러 두젠산(度堅山, 현재의 간쑤성 바이인 징위안현)에 정착했다.371년, 걸복사번은 적족이 세운 전진에 복속하였다. 당시 전진의 부견과 왕맹은 화북 통일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전진의 익주자사왕통의 공격을 받은 걸복부는 항복했다. 걸복사번은 장안으로 보내져 부견으로부터 남선우(南單于)로 임명되었다. 373년에는 선비족 발한(勃寒)이 롱서(隴西)를 침입하자, 부견의 명을 받아 이를 토벌하고 그 공으로 용사천(勇士川, 현재의 간쑤성 란저우 위중현)을 영토로 받았다.
376년 걸복사번이 사망하자 아들 걸복국인이 뒤를 이었다. 383년 비수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걸복국인은 전장군(前將軍)으로서 동진 정벌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출정 직전 숙부인 걸복보퇴가 롱서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부견은 걸복국인에게 방향을 돌려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했다. 걸복보퇴는 오히려 걸복국인을 설득하여 자립할 것을 권유했고, 전진의 패망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걸복국인은 숙부의 제안에 동조하여 롱서에 그대로 머물렀다.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동진에게 참패하면서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자, 걸복국인은 이 기회를 틈타 주변의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약 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모으는 등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385년 부견이 후진의 요장에게 살해되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지 않고 전진에 복속하는 형태를 유지했다.
2. 2. 건국과 초기 발전
하서 및 롱서 지방에 거주하던 서부 선비의 일파인 걸복부는 삼국 시대에 고평천 유역(현재 닝샤 후이족 자치구 중부)에 자리 잡았다. 이후 원천(현재 간쑤성 란저우시 위중현)과 맥전(현재 간쑤성 바이인시 핑촨구)을 거쳐, 4세기 중반에는 걸복사번의 지도 아래 도견산(현재 간쑤성 바이인시 징위안현)으로 이동하여 유목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전진의 부견과 왕맹 등이 화북 통일을 추진하면서 걸복부도 그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371년, 전진의 익주자사 왕통의 공격을 받아 걸복부는 항복했고, 걸복사번은 장안으로 보내져 부견으로부터 남선우(南單于)로 임명되었다. 373년, 선비의 발한이 롱서를 침범하자 부견은 걸복사번에게 토벌을 명했고, 이 과정에서 용사천(원천)을 영토로 삼게 되었다.376년 걸복사번이 사망하고 아들 걸복국인이 뒤를 이었다. 383년 비수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걸복국인의 숙부 걸복보퇴가 농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부견은 걸복국인에게 토벌을 명했으나, 걸복보퇴는 오히려 조카를 환영하며 맞이했다. 걸복국인은 전장군으로서 비수대전에 참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숙부의 반란을 계기로 농서에 머물렀다.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동진에게 대패하자, 숙부로부터 자립을 권유받은 걸복국인은 농서 인근의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10만여 명의 병력을 확보하며 세력을 키웠다.
385년 8월, 부견이 후진의 요장에게 살해되자, 9월에 걸복국인은 대선우(大單于)를 자칭하고 연호를 건의(建義)로 정했으며, 수도를 원천의 용사성(勇士城)으로 옮겨 독립 정권을 세웠다. 이는 서진 건국의 시작으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아직 국호를 '진(秦)'이라 칭하지 않았고, 387년에는 원천공(苑川公) 칭호를 받으며 전진의 봉신 지위를 유지하기도 했다. 걸복국인은 388년 6월 사망할 때까지 주변 부족들을 복속시키며 세력을 다졌다. 그의 아들 걸복공부(乞伏公府)가 너무 어려, 동생인 걸복건귀가 대선우·하남왕(河南王)으로 추대되어 뒤를 이었다.
걸복건귀는 즉위 후 388년 9월 수도를 금성(金城, 현재 간쑤성 란저우시 시구구)으로 옮겼다. 그는 전진에 복속하는 한편 후진과는 대립하며 주변 부족들을 차례로 복속시키고 토욕혼으로부터 조공을 받으며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세력 확장은 391년부터 후량과의 충돌로 이어졌고, 392년 8월에는 명작협(현재 간쑤성 란저우시 시구구)에서 후량에게 패배하기도 했다. 389년에는 전진의 부등에게 금성왕(金城王)으로 책봉되었다.
394년 6월, 부등은 걸복건귀에게 하남왕(河南王)의 작위를 내렸으나, 7월에 후진의 요흥에게 패배하여 살해당했다. 부등이 전사하자 걸복건귀는 전진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자립했다. 10월에는 부등의 아들 부숭이 황중(湟中)에서 즉위하자 이를 압박하여 몰아냈다. 부숭은 후구지의 양정에게 망명하여 연합군을 결성, 서진을 공격했으나 걸복건귀는 이들을 격파하여 전진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농서 일대를 장악했다. 이후 12월, 걸복건귀는 진왕(秦王)을 자칭하고 동진이나 조위와 유사한 정부 구조를 세웠다. 역사가들은 이 국가를 전진 및 후진과 구별하기 위해 서진(西秦)이라고 부른다.
진왕을 칭한 후에도 후량과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후량 여광의 압력으로 395년 6월 수도를 서성(西城, 현재 간쑤성 바이인시 징위안현)으로 옮겼고, 7월에는 아들 걸복치반을 인질로 보내며 잠시 후량에 복속했다. 그러나 397년, 후량 내부에서 토발(禿髮) 선비와 저거(沮渠) 노수가 반란을 일으켜 각각 남량과 북량을 건국하면서 후량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걸복건귀는 이 기회를 틈타 남량과 연대하여 다시 자립했다. 400년, 수도를 다시 원천(苑川, 현재 간쑤성 바이인시 핑촨구)으로 옮겼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후진의 대규모 침공을 받아 크게 패배했다. 결국 걸복건귀는 남량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후진에 투항하면서 서진은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2. 3. 1차 멸망과 부흥
400년 1월, 걸복건귀(乞伏乾歸)는 수도를 원천(苑川)으로 옮겼으나, 5월에 서쪽으로 진군해 온 후진(後秦) 군대에게 패배하였다. 결국 7월에 남량(南凉)으로 피신했으나, 남량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11월에는 장안(長安)으로 가서 후진의 요흥(姚興)에게 항복하였다. 요흥은 걸복건귀를 하주자사(刺史) 겸 귀의후(歸義侯)로 봉하여 후진의 신하로 삼았고, 이로써 서진은 일단 멸망하였다. 그러나 걸복건귀는 옛 수도였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받아, 이후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면서 후진의 장수로서 후량, 후구지(後仇池), 토욕혼(吐谷渾) 등을 공격하며 영향력을 키웠다.402년 5월, 후진은 북위(北魏)와의 시벽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면서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407년 6월에는 하(夏)가 독립하는 등 후진의 약화가 뚜렷해지자, 409년 7월, 걸복건귀는 도견산(度堅山)에서 스스로 진왕(秦王)을 칭하고 연호를 경시(更始)로 바꾸며 후진으로부터 독립하여 서진을 다시 일으켰다.
410년 8월, 걸복건귀는 수도를 다시 원천으로 옮기고, 약양군(略陽郡), 남안군(南安郡), 농서(隴西) 등 후진의 영토를 잇달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당시 후진은 동진(東晉)과 하(夏)의 압박으로 서진에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기에, 걸복건귀의 지배를 인정하고 그를 대선우(大單于) 겸 하남왕(河南王)으로 봉하여 형식적인 신하로 삼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후 걸복건귀는 남량과 토욕혼을 공격하며 세력을 더욱 넓혔고, 412년 2월에는 담교(譚郊, 현재의 감숙성 린샤 후이족 자치주 지스산 바오안족 둥샹족 사라족 자치현)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형 걸복국인(乞伏國仁)의 아들인 걸복공부(乞伏公府)에게 10여 명의 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2. 4. 쇠퇴와 멸망
400년에 후진에게 패배하여 서진은 일단 멸망하였다. 걸복건귀는 남량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후진에 귀순하여 후진의 장수가 되었다. 401년에는 걸복부의 수장으로서 옛 수도였던 원천(苑川)에 부임하여 농서 일대를 다시 장악하였다. 409년, 후진이 하와 남량의 성장 및 동진의 압력 등으로 쇠퇴하자, 걸복건귀는 도견산(度堅山)에서 다시 서진을 건국하고 진왕(秦王)을 자칭했다. 410년에는 수도를 원천으로 다시 옮기고 후진의 여러 군을 점령했으며, 남량과 토욕혼을 상대로 원정을 벌였다. 후진은 걸복건귀를 하남왕(河南王)으로 책봉하여 명목상의 신하로 삼는 데 그쳤다. 412년, 걸복건귀는 수도를 담교(현대 린샤 후이족 자치주, 간쑤성)로 옮겼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걸복국인의 아들인 걸복공부(乞伏公府)에게 암살당했다.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은 걸복공부를 죽이고 하남왕(河南王)으로 즉위했다. 그는 수도를 부한(현대 린샤, 간쑤성)으로 옮겼다. 그의 통치 시기 서진의 불교 지원이 뚜렷했으며, 빙링 사원이 이때 처음 건설되었다. 414년에는 남량을 멸망시키고 진왕(秦王) 칭호를 회복하였으나, 이로 인해 북량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이후 여러 차례 충돌했다. 또한 토욕혼 등 여러 부족을 공격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417년, 동진의 유유가 후진을 정복하자 걸복치반은 동진에 신하로 복속하여 하남공(河南公)에 봉해졌다. 그러나 418년 하의 혁련발발이 관중 지역을 점령하면서 동쪽으로부터 새로운 위협을 받게 되었다.
421년, 북량이 서량을 멸망시키면서 서쪽 국경이 안정되자 서진에 대한 압박이 심해졌다. 걸복치반은 북위와 연계하여 하를 공격하게 하는 등 상황 타개를 시도했으나, 하와 북량에게 연이어 패배하였고, 426년에는 큰 패배를 겪었다. 내부적으로도 토욕혼과 강족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 국력은 계속 쇠퇴했다. 428년 걸복치반이 병사하고 아들 걸복모말이 뒤를 이었으나, 이미 서진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429년, 북량의 압박으로 걸복모말은 수도를 정련(定連, 현대 린샤, 간쑤)으로 옮겨야 했다. 430년에는 하의 공격을 받자 북위에 귀순하려 했으나, 상규로 가던 중 하의 황제 혁련정에게 저지되어 남안(南安, 현대 룽시 현 남동쪽, 간쑤)에 머물렀다. 한편, 서진의 남은 영토는 토욕혼에게 점령당했다. 431년 1월,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혁련정이 남안을 공격하여 걸복모말에게 항복을 강요했고, 이로써 서진은 완전히 멸망했다. 같은 해 6월, 걸복모말과 그의 일족 500여 명은 하에 의해 모두 처형당했다.

3. 역대 군주
묘호 |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 |
---|---|---|---|---|
열조 | 선렬 | 걸복국인 | 385년 ~ 388년 | 건의(建義) 385년 ~ 388년 |
고조 | 무원 | 걸복건귀 | 388년 ~ 400년, 409년 ~ 412년 | 태초(太初) 388년 ~ 400년 경시(更始) 409년 ~ 412년 |
태조 | 문소 | 걸복치반 | 412년 ~ 428년 | 영강(永康) 412년 ~ 419년 건홍(建弘) 420년 ~ 428년 |
– | – | 걸복모말 | 428년 ~ 431년 | 영홍(永弘) 428년 ~ 431년 |
- 열조 선렬왕(걸복국인): 재위 385년 ~ 388년. 처음에는 大單于|대선우중국어를 칭했으며, 전진(前秦)에 의해 苑川王|원천왕중국어으로 봉해졌다.
- 고조 무원왕(걸복건귀): 재위 388년 ~ 400년, 409년 ~ 412년. 처음에는 大單于|대선우중국어, 河南王|하남왕중국어을 자칭했다. 이후 전진에 의해 梁王|양왕중국어으로 봉해졌다. 394년에는 秦王|진왕중국어을 칭했다. 400년부터 409년까지는 후진(後秦)에 복속하였다가, 409년에 다시 독립하여 진왕을 칭했다.
- 태조 문소왕(걸복치반): 재위 412년 ~ 428년.
- 후주(걸복모말): 재위 428년 ~ 431년. 마지막 군주이다.
서진의 군주들은 황제를 칭한 적은 없다.
4. 국가 체제
서진은 선비족 걸복부가 농서 지역을 기반으로 건국한 국가였으나, 한족 호족 세력의 영향으로 상당 부분 한화된 특징을 보였다. 통치 구조는 한과 위의 제도를 대체로 따랐으며, 황족인 걸복 씨가 중심이 되었지만 한족이나 정령 출신 인물들도 등용되었다.
한편, 서진은 건국 초기부터 전진, 후진, 후량 등 여러 강대국에 둘러싸인 불안정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 이 때문에 국가의 존속을 위해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가 매우 중요했으며, 때로는 복속하고 때로는 자립하는 등 복잡한 관계를 유지했다. 잦은 수도 이전 역시 이러한 외교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4. 1. 통치 체제
서진의 세력 기반이었던 농서 지역은 한족 호족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선비족은 상당 부분 한화되었다. 이 때문에 최고 통치자를 뜻하는 선우대가 세워지지 않았고, 오호를 통치하기 위한 특별한 기구도 없었다. 관제 역시 한과 위 시대부터 내려오던 삼성육경 및 사정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형태를 따랐다. 고위 관직은 주로 황족인 걸복 씨가 차지했지만, 세력 기반의 특성상 한족이나 정령 출신 인물들도 적지 않게 등용되었다.4. 2. 외교 관계
서진은 건국 초기부터 전진, 후진, 후량 등 여러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존속을 위해 외교 관계가 매우 중요했다.388년 6월, 걸복국인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걸복건귀가 대선우와 하남왕(河南王)을 칭하며 뒤를 이었다. 그는 9월에 수도를 서쪽의 금성(현재의 간쑤성 란저우시 시구 구)으로 옮겼다. 걸복건귀는 전진에 복속하는 한편, 후진과는 대립했다. 주변 부족들을 차례로 복속시키고 토욕혼으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나, 세력 확장은 후량과의 충돌로 이어져 392년 8월에는 명작협(鳴雀峽, 현재의 간쑤성 란저우시 시구 구)에서 후량에게 패배했다.
394년 6월, 걸복건귀는 전진의 부등으로부터 하남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7월에 부등이 후진의 요흥에게 살해당하자, 걸복건귀는 전진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자립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부등의 후계자 부숭과 후구지의 양정을 격파하여 롱시 지역을 평정하고, 12월에는 스스로 진왕(秦王)을 칭했다.
하지만 후량과의 적대 관계는 계속되었다. 후량의 군주 여광의 압력을 받아 395년 6월에는 수도를 서성(西城, 현재의 간쑤성 바이인시 징위안 현)으로 옮겨야 했고, 7월에는 아들 걸복치반을 인질로 보내며 여광에게 종속했다. 그러나 397년, 후량 내부에서 남량과 북량이 독립하면서 후량이 쇠퇴하자, 걸복건귀는 남량과 연대하여 다시 자립했다.
400년 1월, 걸복건귀는 수도를 원천(苑川, 현재 간쑤성 바이인시 핑촨 구)으로 옮겼으나, 5월에 후진의 대규모 침공을 받아 패배했다. 결국 7월에 남량으로 망명했으나, 그곳에서도 반란을 의심받자 11월에 장안으로 도망쳐 후진의 요흥에게 귀순했다. 요흥은 그를 하주자사·귀의후(歸義侯)에 봉하며 신하로 삼았고, 이로써 서진은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하지만 걸복건귀는 옛 영토인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받아 세력을 유지하며 후진의 장수로서 후량, 후구지, 토욕혼 등을 공격했다.
402년 5월, 후진은 북위와의 시벽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407년 6월에는 하(夏)가 자립한 일도 있어 그 쇠퇴가 현저해졌으므로, 409년 7월에 걸복건귀는 도견산(度堅山)에서 다시 진왕을 칭하고 연호를 경시(更始)로 바꾸며 서진을 재건했다.
410년 8월, 걸복건귀는 수도를 다시 원천으로 옮기고 약양군·남안군·농서군 등 옛 후진 영토를 잇달아 점령했다. 당시 동진과 하의 압박을 받던 후진은 서진까지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후진은 걸복건귀의 지배를 인정하고 그를 대선우·하남왕에 봉하여 형식적인 복속 관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이후 걸복건귀는 남량, 토욕혼을 공격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412년 2월에는 담교(潭敎, 현재의 간쑤성 린샤 후이족 자치주 지스산 바오안족 둥샹족 사라족 자치현)로 천도했지만, 6월에 걸복건귀는 형 걸복국인의 아들 걸복공부에 의해 살해당했다.
걸복공부의 반란 당시 원천에 진수하여 화를 면한 걸복건귀의 장남 걸복치반은 즉시 걸복공부를 토벌하고 즉위했다. 412년 10월에는 수도를 부한(枹罕, 현재의 간쑤성 린샤 후이족 자치주 린샤현)으로 옮겼다. 414년 5월에는 남량을 멸망시키고, 진왕을 자칭했다. 또한 토욕혼을 공격하여 익주(益州) 서부를 병합했고, 더 나아가 후진이 동진의 유유에 의해 공격받자 동진에 종속하여 후진 영토를 일부 차지하고 한중 진출을 꾀했지만 하(夏)와 충돌할 것을 두려워하여 단념했다. 또한 북량과 서량의 항쟁을 이용하여 하서(河西) 방면으로 진출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서진은 주변이 전진, 후진, 북위, 후량, 서량, 동진, 남량, 하 등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항상 존속과 연대를 위해 외교가 필수적이었으며, 혹은 복속하여 번국(藩國)을 칭하는 등 주변 제국으로부터 견제를 계속 받았다. 수도를 단기간에 여러 곳으로 옮긴 것도 외교 정책의 일환이었다. 참고로 역대 군주는 황제, 천왕 등을 자칭한 적이 한 번도 없고, 항상 복속한 국가로부터 지위를 받았다. 이 때문에 독립국이라기보다는 반독립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시적으로 진왕을 자칭한 시기만을 독립국으로 볼 수도 있다. 421년 북량이 서량을 멸망시키면서 서쪽 국경을 확보하고 서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자 서진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걸복치반은 북위와 동맹을 맺고 그들이 하를 공격하도록 하려 했지만, 그는 하와 북량에 계속해서 손실을 입었고, 426년에 최악의 패배를 겪었다. 내부적으로 서진은 또한 토욕혼과 강족 신민들의 반란과 싸우고 있었다. 걸복치반은 428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걸복모말에게 본질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을 남겼다.
429년, 북량의 압력으로 인해 걸복모말은 수도를 정련(定連, 현재의 간쑤성 린샤 후이족 자치주)으로 옮겨야 했다. 430년, 걸복모말은 북위에 항복했지만, 상규(上邽, 현재의 간쑤성 톈수이시)에서 북위 군대와 합류하러 가는 길에 하 황제 혁련정이 그를 가로막고 남안(南安, 현재의 간쑤성 룽시 현 남동쪽)에 머물도록 강요했다. 한편, 서진의 나머지 영토는 토욕혼에 의해 정복되었고, 걸복모말에게는 단 하나의 도시만 남았다. 431년, 혁련정은 서쪽으로 확장하려는 마지막 시도로 남안을 공격하여 걸복모말에게 항복을 강요했고, 이로써 서진 왕조는 멸망했다. 걸복모말과 그의 씨족 구성원 500명은 모두 하에 의해 처형되었다.
5. 언어
서진에서 사용된 언어는 기부(치푸)라고 불린다. 이 언어는 5세기경 간쑤성 남서부 지역에서 선비족 기부족에 의해 사용되었다.
언어학자 시무넥은 기부족의 언어를 파라몽골어의 일종인 "세르비"로 분류한다. 시무넥의 분류에 따르면, "세르비" 어파에는 기부어 외에도 탁발어, 토욕혼어, 거란어 등이 포함된다.[2]
6. 서진 통치자 가계도
409년 ~ 4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