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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도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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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탠리 도넌은 1924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에서 태어나, 1940년대 할리우드에서 안무가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진 켈리와 공동 연출한 뮤지컬 영화 《춤추는 대뉴욕》, 《사랑은 비를 타고》, 《7인의 신부》 등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이후 독립 프로듀서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파자마 게임》, 《샤레이드》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제작했으며, 1998년 아카데미 명예상을 수상했다. 도넌은 영화 뮤지컬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영화 기법과 스타일에 혁신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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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도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10년의 스탠리 도넌
2010년의 도넌
직업영화 감독
영화 프로듀서
안무가
무용가
연극 감독
활동 기간1940년–2003년
배우자잔 코인 (1948년 결혼, 1951년 이혼)
매리언 마셜 (1952년 결혼, 1959년 이혼)
아델 오코너 비티 (1960년 결혼, 1971년 이혼)
이베트 미미외 (1972년 결혼, 1985년 이혼)
파멜라 브래든 (1990년 결혼, 1994년 이혼)
동반자일레인 메이 (1999년부터 동거)
자녀3명, 조슈아 도넌 포함
대표작사랑은 비를 타고
On the Town
Funny Face
샤레이드
출생일1924년 4월 13일
출생지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
사망일2019년 2월 21일
사망지미국 뉴욕주 뉴욕
로마자 표기Doneon
수상
수상 내역산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언제나 둘이서 , 1967년)

2. 초기 생애 및 무대 경력

스탠리 도넌은 1924년 4월 13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에서 의류점 관리자 모데카이 모세스 도넌과 보석 판매상의 딸 헬렌(코헨) 사이에서 태어났다.[4] 1937년 8월, 여동생 칼라 도넌 데이비스가 태어났다.[4] 도넌은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젊은 시절 무신론자가 되었다.[4]

도넌은 컬럼비아에서 몇 안 되는 유대인 중 한 명으로서 외롭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회상했다.[32] 학교에서는 반유대주의를 가진 급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4] 이러한 고립감을 해소하기 위해 지역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특히 서부극, 코미디, 스릴러 영화를 좋아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영화는 1933년 프레드 아스테어진저 로저스가 출연한 뮤지컬 영화 ''리우로 가는 길''이었다. 도넌은 이 영화를 통해 "모든 것이 행복하고 편안하며 쉽고 지지받는 어떤 환상의 세계"를 경험했고, "웰빙의 감각"을 느꼈다고 말했다.[5] 그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8mm 필름 카메라와 프로젝터로 홈 영화를 찍고 상영하기도 했다.[32]

아스테어에게 영감을 받은 도넌은 컬럼비아에서 댄스 레슨을 받았고,[32] 지역 타운 극장에서 공연했다.[5] 그의 가족은 여름 휴가 때마다 뉴욕시로 여행을 갔는데, 그곳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고 댄스 레슨을 받았다.[32] 뉴욕에서 그의 초기 강사 중 한 명은 1910년에 11살의 아스테어를 가르쳤던 네드 웨이번이었다.[4] 16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심리학을 공부했다.[4] 1940년 가을, 어머니의 권유로 뉴욕시로 이사하여 무대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두 번의 오디션을 거쳐 리처드 로저스와 로렌츠 하트의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프로덕션 ''팔 조이''에서 코러스 댄서로 캐스팅되었다. 조지 애벗이 연출을 맡았고, 신예 진 켈리가 타이틀 롤인 팔 조이 역을 맡아 브로드웨이 스타가 되었다.[32] 이후 애벗은 도넌을 다음 브로드웨이 쇼 ''베스트 풋 포워드''의 코러스에 캐스팅했다. 도넌은 이 쇼의 보조 무대 감독이 되었고, 켈리는 그에게 보조 안무가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4] 비록 도넌은 ''베스트 풋 포워드''에서 해고되었지만,[4] 1942년에는 애벗의 다음 쇼 ''비트 더 밴드''의 무대 감독이자 보조 안무가로 활동했다.[32][6] 1946년, ''콜 미 미스터''의 댄스 넘버 안무를 돕기 위해 잠시 브로드웨이로 돌아왔다.[5]

3. 영화 경력

스탠리 도넌은 춤추는 대뉴욕(1949), 사랑은 비를 타고(1952), 7인의 신부(1954), 파리의 연인(1957), 샤레이드(1963), 아라베스크(1966), 언제나 둘이서(1967) 등을 감독한 영화 감독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 출신으로, 부모는 모두 유대인이었다.[73] 대학 중퇴 후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코러스를 맡다가 주연 배우 진 켈리와 함께 할리우드로 진출했다.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GM)에서 안무가 및 댄서로 경력을 시작한 후, 켈리와 공동으로 『춤추는 대뉴욕』, 『사랑은 비를 타고』를 감독하여 크게 흥행시켰다.[73] 특히 『사랑은 비를 타고』는 뮤지컬 영화의 명작으로 꼽힌다. 켈리와 결별한 후에는 『7인의 신부』, 『파리의 연인』, 『샤레이드』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다.

1998년 아카데미 명예상을 받았으며, 수상 소감으로 노래와 탭댄스를 선보였다. 저작권에 관대한 편이라 그의 작품 중에는 퍼블릭 도메인이 된 경우가 많다. 2019년 2월 21일, 뉴욕 맨해튼에서 심부전으로 94세의 나이에 사망했다.[72][73]
주요 작품

연도제목비고
1949춤추는 대뉴욕 On the Town진 켈리와 공동 연출
1951로열 웨딩 Royal Wedding
1952사랑은 비를 타고 'Singin in the Rain''진 켈리와 공동 연출
19547인의 신부 Seven Brides for Seven Brothers
1954내 마음 깊은 곳에 Deep in My Heart
1957파리의 연인 Funny Face
1957파자마 게임 The Pajama Game조지 애보트와 공동 연출
1958무분별 Indiscreet
1958댐 야키스! Damn Yankees!조지 애보트와 공동 연출
1960잔디는 푸르다 The Grass Is Greener
1963샤레이드 Charade
1966아라베스크 Arabesque
1967언제나 둘이서 Two for the Road
1967일곱가지 유혹 Bedazzled
1974어린 왕자 The Little Prince
1978무비 무비 Movie Movie
1980새턴 3 Saturn 3


3. 1. 1943–1949: 할리우드 안무가

1943년,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GM)의 뮤지컬 영화 제작자 아서 프리드는 ''Best Foot Forward''의 영화 판권을 사들여 루실 볼과 윌리엄 갹스턴이 출연하는 영화 버전을 제작했다. 도넌은 영화 오디션을 위해 할리우드로 이주하여 MGM과 1년 계약을 맺었다.[4] 도넌은 코러스 댄서로 출연했으며, 찰스 월터스에 의해 안무 조수가 되었다.[4] MGM에서 도넌은 뮤지컬에서 조연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진 켈리와의 우정을 다시 쌓았다. 켈리가 영화를 위해 컬럼비아 픽처스에 대여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댄스 시퀀스를 안무할 기회를 얻었고 도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4] 켈리는 "스탠리에게는 일자리가 필요했고, 저에게는 카메라맨을 위해 세어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즉, 스텝을 알고 제가 무엇을 할지 설명해서 촬영을 제대로 설정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라고 말했다.[7] 도넌은 이를 받아들여 ''Cover Girl''(1944)에서 켈리와 함께 세 개의 댄스 시퀀스를 안무했다.[4] 도넌은 켈리의 모습이 가게 창문 밖으로 튀어나와 함께 춤을 추는 "얼터 에고" 댄스 시퀀스 아이디어를 냈다. 찰스 비더 감독은 이 아이디어가 절대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도넌과 켈리는 직접 그 장면을 연출했으며,[4] 도넌은 1년 이상 편집에 매달렸다.[4][5] 이 영화는 켈리를 영화 스타로 만들었고, 많은 영화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중요하고 혁신적인 뮤지컬로 간주한다.[32] 도넌은 컬럼비아와 1년 계약을 맺고[4] 그곳에서 여러 편의 영화를 안무했지만,[8] 켈리가 다음 영화에서 도움을 원했기 때문에 이듬해 MGM으로 돌아갔다.[4]

''Anchors Aweigh''에서 시나트라와 켈리


1944년, 도넌과 켈리는 1945년에 개봉한 뮤지컬 ''Anchors Aweigh''를 안무했으며, 켈리와 프랭크 시나트라가 출연했다. 이 영화는 켈리가 톰과 제리 만화의 제리 마우스와 춤을 추는 획기적인 장면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윌리엄 한나와 조셉 바베라가 감독했으며 프레드 큄비라는 MGM 애니메이션 프로듀서의 작품으로 되어 있지만, 이 장면의 아이디어는 도넌의 것이었다.[32][4] 도넌과 켈리는 원래 이 시퀀스에 미키 마우스도널드 덕을 사용하고 싶어 월트 디즈니를 만나 이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했지만, 디즈니는 ''The Three Caballeros''(1944)에서 비슷한 아이디어를 작업 중이었고 MGM에 자신의 캐릭터 중 하나를 라이선스해 줄 의향이 없었다.[4] 두 사람은 켈리가 춤추는 장면을 촬영하는 데 두 달을 보냈고, 도넌은 이 장면을 프레임별로 완벽하게 만드는 데 1년을 보냈다. 바베라에 따르면 "제가 갔던 ''Anchors Away''의 시사회에서 그 결과는 관객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라고 말했다.[4]

켈리가 1944년부터 1946년까지 사진 작가로 미국 해군 항공 서비스에서 복무하는 동안,[32] 도넌은 뮤지컬 영화에서 안무가로 무명의 작업을 했다. 이 기간에 대해 도넌은 "음악, 트랙, 사진과 함께 작업하면서 제 기량을 연마했습니다. 저는 종종 시퀀스를 연출했습니다. 저는 항상 뮤지컬 시퀀스를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라고 말했다.[5] 도넌은 고혈압으로 인해 4-F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고 말했다.[4] 켈리가 민간인 생활로 돌아왔을 때, 그는 도넌과 함께 ''Living in a Big Way''(1947)에서 켈리의 댄스 장면을 연출하고 안무했다.[5] 그 후 그들은 20세기 초반의 두 야구 선수가 오프 시즌을 보드빌 노래와 댄스 남자로 보내는 오리지널 스토리를 시작했다. 이 영화는 결국 ''Take Me Out to the Ball Game''(1949)이 되었다. 켈리와 도넌은 영화를 공동 연출하기를 희망했지만, 프리드는 대신 버스비 버클리를 고용했고, 그들은 켈리의 댄스 장면만 연출했다. 이 영화에는 켈리, 프랭크 시나트라, 줄스 문신이 출연했다.[32]

3. 2. 1949: 《춤추는 대뉴욕》

1949년, 프리드는 도넌과 진 켈리에게 ''Take Me Out to the Ball Game''의 성공 이후, ''춤추는 대뉴욕(On the Town)''을 연출할 기회를 주었다. 이 영화는 베티 콤덴과 아돌프 그린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각색한 것으로, 뉴욕시에서 휴가를 보내는 해군들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로케이션 촬영을 한 최초의 뮤지컬 영화였다. 도넌과 켈리는 영화 전체를 뉴욕에서 촬영하고 싶어했지만, 프리드는 스튜디오를 떠나 촬영할 수 있는 기간을 1주일로 제한했다.[32]

그 1주일 동안 촬영된 것이 영화의 오프닝 넘버인 "New York, New York"이었다.[32] 스튜디오의 간섭과 사운드 스테이지의 제약에서 벗어나, 도넌과 촬영 감독 해럴드 로슨은 뉴욕 시의 거리에서 촬영을 진행했고, 이는 10년 후 프랑스 누벨바그에 의해 채택될 많은 영화 기법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기법에는 공간적인 점프 컷, 360도 팬, 숨겨진 카메라, 갑작스러운 화면 방향의 변화, 비전문 배우의 기용 등이 포함되었다. 도넌의 전기 작가 조셉 A. 캐스퍼는 이 장면이 불필요하거나 아마추어 같아 보이는 것을 피하면서도 "플롯을 전개하고, 배경을 묘사하는 동시에 활기찬 분위기와 광적인 분위기를 전달하며, 캐릭터를 소개하고 묘사"한다고 말했다.[32] 캐스퍼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이 영화는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즉, 춤과 뮤지컬 장르를 극장에서 벗어나 영화 '안에서' 그리고 '위해' 캡처한 최초의 진정한 뮤지컬 영화, 도시를 중요한 캐릭터로 만든 최초의 영화, 그리고 코러스를 버린 최초의 영화이다."[5]

''춤추는 대뉴욕''은 켈리, 프랭크 시나트라, 줄스 문신이 뉴욕에서 24시간 해안 휴가를 보내는 세 명의 해군으로 출연하여, 그들의 낭만적인 추구가 앤 밀러, 베티 개럿, 베라 엘렌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는 재정적으로나 비평적으로 모두 성공을 거두었으며[5], 제2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뮤지컬 영화 스코어링)을 수상했고, 각본가 콤덴과 그린은 미국 작가 조합상에서 미국 작가 조합상을 수상했다. 오슨 웰스처럼 도넌은 25세에 감독 데뷔를 했다.[9] 도넌은 켈리가 "대부분의 댄스 동작을 담당했다. 나는 드라마와 뮤지컬 시퀀스에서 카메라 뒤에 있었다."라고 말했다.[5] 켈리는 자신과 도넌이 "훌륭한 팀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아주 잘 보완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10]

3. 3. 1952: 《사랑은 비를 타고》

''사랑은 비를 타고''의 진 켈리


도넌은 파리의 아메리카인 (1951) 개봉 이후 절정에 달했던 진 켈리와 다시 손을 잡고, 역대 가장 호평을 받은 영화 중 하나가 될 ''사랑은 비를 타고''(1952)를 만들었다.[15] 이 영화는 아서 프리드가 제작하고, 베티 콤든과 아돌프 그린이 각본을 썼으며, 해롤드 로슨이 촬영했고, 진 켈리, 데비 레이놀즈, 도널드 오코너, 진 헤이건, 밀라드 미첼, 시드 채리스가 출연했다.[15]

도넌은 켈리와 함께, 프리드(또한 코메덴과 그린을 고용하여 각본을 쓰게 했다)[15]가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에 그와 작곡가 나시오 허브 브라운이 쓴 옛 노래들을 사용하여 뮤지컬을 만들도록 데려왔다.[15] 코메덴과 그린은 노래가 쓰여진 시대에서 영감을 받은 이야기를 쓰기로 결정하고, 1920년대 후반 할리우드의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의 전환을 풍자했다. 코메덴, 그린, 도넌은 그 시대에 할리우드에 있었던 MGM의 모든 사람들을 인터뷰했고,[15] 최초의 영화 뮤지컬과 초기 유성 영화의 기술적 어려움을 모두 조롱했다.[4] 여기에는 프리드와 버스비 버클리를 느슨하게 기반으로 한 캐릭터[4]와 무성 영화 스타 존 길버트를 언급하는 장면이 포함되었다.[15] 도넌과 켈리는 또한 MGM의 1920년대의 대규모 세트, 소품, 의상 및 구식 장비를 활용했다.[15]

''사랑은 비를 타고''의 스틸


영화에서 돈 록우드(켈리)와 리나 라몬트(헤이건)는 할리우드의 두 무성 영화 스타인데, 그들의 경력은 유성 영화의 발명으로 위협받는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코스모 브라운(오코너)과 연인 캐시 셀던(레이놀즈)의 도움으로 록우드는 최신 영화를 뮤지컬로 바꾸어 경력을 구한다.[32]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도넌은 켈리의 "브로드웨이 멜로디" 발레 시퀀스가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4] "Singin' in the Rain" 뮤지컬 넘버는 안무하는 데 몇 달이 걸렸고, 도넌과 켈리는 거리에 웅덩이를 만들기 위해 시멘트에 구멍을 파야 했다.[16]

이 영화는 1952년 4월 개봉했을 때 히트를 쳐서 7600000USD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15] 켈리의 ''파리의 아메리카인''은 3월 아카데미상에서 예상치 못한 작품상 수상작이 되었고, MGM은 이를 재개봉하기로 결정했다. ''사랑은 비를 타고''는 이전 영화를 선보이기 위해 많은 극장에서 상영이 중단되어 더 이상의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4] ''사랑은 비를 타고''는 아카데미상에서 헤이건의 여우조연상과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 2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도널드 오코너는 골든 글로브 뮤지컬/코미디 영화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코메덴과 그린은 다시 한번 최우수 각본 미국 뮤지컬 부문에서 미국 작가 조합상을 수상했다.[15] 처음에는 보슬리 크로더와 같은 비평가들로부터 미온적인 평가를 받았고,[4][15] 1960년대 후반까지 널리 찬사를 받기 시작하지 않았다.[4] 초기 지지자 중 한 명은 비평가 폴린 케이엘이었는데, 그녀는 이 영화가 "아마도 모든 영화 뮤지컬 중에서 가장 즐겁고, 역대 최고의 할리우드 뮤지컬"이라고 말했다.[32] 1975년에 비평적 및 대중적 성공을 거두며 재개봉되었다.[4][5]

3. 4. 1952–1955: 추가적인 성공과 MGM과의 결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스탠리 도넌, 1952년경


성공적인 영화 감독으로 자리 잡은 도넌은 MGM에서 단독으로 Fearless Fagan (1952)을 제작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는 군대에 입대하면서 애완 사자를 데려가는 병사 역으로 칼턴 카펜터가 출연했다. 도넌의 뮤지컬 Give a Girl a Break (1953)에는 데비 레이놀즈, 마지 챔피언과 헬렌 우드가 새로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주연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세 명의 야심 찬 댄서로 출연했다. 밥 포시, 가우어 챔피언과 커트 카스즈나르도 출연했으며, 버튼 레인과 아이라 거슈윈이 음악을 맡았다. 레이놀즈와 포시가 함께 추는 "Give a Girl a Break" 댄스는 거꾸로 안무된 후 반대로 재생되어 두 사람이 손가락만 대면 즉시 수백 개의 풍선이 나타나는 환상을 만들어냈다.[4] 이 영화의 안무를 두고 포시와 가우어 챔피언 사이의 촬영 현장 싸움으로 인해 도넌에게는 쓰라린 경험이 되었다.[4] 영화는 개봉 당시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평판이 좋아졌다.[32]

도넌은 단독 경력을 굳히고 뮤지컬 Seven Brides for Seven Brothers (1954)로 또 한 번의 히트를 쳤다.[32] 스티븐 빈센트 베네트의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사울 채플린과 진 드 폴이 음악을 맡았고, 조니 머서가 작사를, 마이클 키드가 안무를 맡았다. 제인 파웰은 1850년대 서부 개척 시대 여성 밀리를 연기하며, 그는 아담(하워드 킬)을 만나 몇 시간 만에 결혼한다. 밀리는 아담과 함께 오리건 외딴 지역의 통나무집으로 돌아가 남편의 여섯 형제가 문명화되지 않고 무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그들을 교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밀리의 비꼬는 제안에 따라 형제들은 이웃 마을에서 여섯 명의 여자를 납치하여 결혼한다. 이 영화는 새로운 시네마스코프 형식으로 촬영되었으며, 특히 건축과 건설이 곡예 발레 스텝이 되는 "헛간 세우기 장면"으로 댄스 시퀀스로 기억된다.[32] ''Seven Brides for Seven Brothers''는 1954년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영화 중 하나였으며[4] 많은 평론가들의 10대 영화 목록에 올랐다. 이 영화는 작품상, 최우수 음악상(뮤지컬 영화의 스코어)을 포함하여 다섯 개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며, 이 부문에서 수상했다.[5] 그 성공은 MGM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고, MGM은 다른 두 편의 뮤지컬인 ''로즈 마리''와 켈리가 출연한 ''브리가둔''에 더 많은 투자를 했다.[4] ''Seven Brides for Seven Brothers''는 다른 두 영화, 그리고 ''On the Town''과 ''사랑은 비를 타고''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렸으며, 그 성공은 도넌의 경력에 있어 주요 전환점이 되었다.[5] 이 영화는 소설가 프랜신 프로스에 의해 나중에 비판을 받았는데, 그는 이 영화를 반여성적이라고 묘사하며 "지금까지 만들어진 남성과 여성에 관한 가장 역겨운 영화 중 하나"이자 강간에 관한 뮤지컬이라고 불렀다.[4]

Deep in My Heart (1954)는 헝가리 출신 미국 오페레타 작곡가인 지그문트 롬버그에 관한 도넌의 전기 영화이다. 호세 페러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는 진 켈리와 그의 동생 프레드의 유일한 스크린 페어링을 포함하여 많은 MGM 전속 배우들이 카메오로 출연했다. 평가는 그저 그랬지만 롬버그의 지위는 영화를 히트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4]

도넌과 켈리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연출 협업은 또 다른 뮤지컬인 ''It's Always Fair Weather'' (1955)였다. 이 영화는 프리드가 제작하고, 컴덴과 그린이 각본을 썼으며, 앙드레 프레빈이 작곡했다. 켈리, 댄 데일리, 시드 채리스, 마이클 키드, 돌로레스 그레이가 출연했다. ''On the Town''의 속편으로 기획된 이 영화에서 켈리, 데일리, 키드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10년 만에 재회하여 삶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세 명의 전직 군인 역할을 한다.[32] 켈리는 도넌에게 이 프로젝트를 제안했고, 처음에는 도넌은 자신의 성공 때문에 망설였다. 제작 과정에서 그들의 우정은 악화되었고[32] 도넌은 "첫날부터 분위기가 매우 긴장되었고 아무도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고 언급했다.[4] 그는 이를 "백 퍼센트 악몽"이자 "시작부터 끝까지의 투쟁"이라고 불렀다.[17] 이번에는 MGM이 공동 감독들이 뉴욕에서 현장 촬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5] ''It's Always Fair Weather''는 적당한 수익을 올렸지만 이전 두 편의 영화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켈리 또는 프리드와 함께 한 도넌의 마지막 영화였다.[32] 완성 후 그는 MGM 계약에 따라 다른 스튜디오에서 일했다. MGM에서의 마지막 프로젝트는 1955년 7월 빈센트 미넬리 감독의 ''Kismet''의 마지막 4일 촬영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5][18]

3. 5. 1956–1959: 감독 겸 독립 프로듀서

오드리 헵번의 ''화니 페이스''


도넌의 다음 영화는 파라마운트 픽쳐스에서 프로듀서 로저 에덴스를 위해 제작되었다. ''화니 페이스''(1957)에는 프레드 아스테어가 출연했던, 관련이 없는 1927년 브로드웨이 동명 뮤지컬(화니 페이스)의 오리지널 조지와 아이라 거슈윈의 노래 4곡이 담겨 있다. 패션 사진가 리처드 아베돈의 삶을 바탕으로, 영화의 시각적 컨설턴트이자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를 디자인했으며, 레너드 거셰가 각본을 쓰고 거셰와 에덴스가 추가 음악을 담당했다.[32] 도넌과 에덴스는 MGM에서 사전 제작을 시작했지만, 아스테어와 오드리 헵번의 파라마운트 계약, 원했던 거슈윈 음악에 대한 워너 브라더스 소유권, 그리고 자신들의 MGM 계약을 조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도넌을 MGM 계약에서 해제하고 파라마운트와 워너 브라더스에서 각각 다음 두 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4] 아스테어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헌책방에서 지적인 보헤미안 헵번을 발견하여 그녀를 새로운 모델로 만들고, 그녀와 파리에서 사랑에 빠지는 노련한 패션 사진가를 연기한다.[32] 도넌, 아베돈, 촬영 감독 레이 준은 파라마운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이 시기의 패션 사진과 유사한 추상적이고 스모키한 느낌을 주기 위해 협력했는데, 파라마운트는 최근 선명한 비스타비전 필름 형식에 투자했다.[4] ''화니 페이스''는 1957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상영되었으며, 보슬리 크로서와 같은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4] 반면, ''Sight & Sound''는 이 영화가 반 지성적이라고 비난했다.[5]

''화니 페이스'' 사전 제작 중, 도넌은 그의 옛 상관인 조지 애보트로부터 애보트의 연극 히트작 ''파자마 게임''을 워너 브라더스에서 영화화하자는 초대를 담은 편지를 받았다. ''화니 페이스''를 위해 원했던 워너 소유의 거슈윈 음악을 확보하기 위한 합의의 일환으로 도넌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4] 그와 애보트는 영화 버전을 공동 연출했다.[32] ''파자마 게임''(1957)[19]도리스 데이존 레이트가 주연을 맡았으며, 리처드 애들러와 제리 로스가 음악을, 밥 포스가 안무를 맡았다. 레이트는 잠옷 공장의 생산 관리자로, 공장의 노조 조직자(데이)와 끊임없이 갈등을 겪다가 결국 사랑에 빠진다.[4] 도넌은 애보트와의 작업 관계를 편안하다고 묘사하며, "[애보트는] 테니스를 치고, 세트장에 와서 한 시간 동안 구경하다가 러시를 보고 집으로 갔다"고 말했다.[4] 재정적으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지만,[32] 장뤼크 고다르는 이 영화를 칭찬하며 "도넌은 확실히 영화 뮤지컬의 대가이다. ''파자마 게임''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선언했다.[4]

도넌의 다음 영화는 ''키스 뎀 포 미''(1957)였다. 그는 캐리 그랜트로부터 직접 연출 제안을 받았고, MGM과의 계약 기간 동안 개발을 시작했다.[4] ''사랑은 비를 타고''와 줄거리가 매우 유사한 이 영화는 그랜트, 레이 월스턴, 래리 블라이든이 194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휴가를 보내는 세 명의 해군 장교로 출연한다. ''사랑은 비를 타고''와 달리, ''키스 뎀 포 미''는 휴가 중인 장교들의 이타적인 영웅주의와 자기중심적인 쾌락주의를 대조하는 어두운 코미디이다. 이 영화는 대부분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32][5]

1957년에 세 편의 영화를 개봉한 후, 도넌은 독립 프로듀서 겸 감독이 되었다. 그는 20세기 폭스가 MGM과의 남은 계약을 매입하는 조건으로 ''키스 뎀 포 미'' 연출에 마지못해 동의했다.[32][4] 계약상의 의무에서 벗어난 그는 그랜트와 함께 그란돈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워너 브라더스와 배급 계약을 체결했다.[4] 도넌은 경력의 나머지 기간 동안 거의 모든 영화를 직접 제작했으며, 때로는 "스탠리 도넌 프로덕션"이라는 이름으로 제작했다. 도넌과 그랜트는 노먼 크라스나의 연극을 바탕으로 그랜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출연한 ''인디스크릿''(1958)을 통해 회사를 시작했다. 버그만의 스케줄 때문에 영화는 런던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했다. 버그만은 유명하고 은둔적인 여배우로, 결혼한 것으로 알려진 바람둥이 외교관 그랜트와 사랑에 빠진다. 버그만은 그가 아내가 있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랜트의 완전한 애정을 얻기 위해 다른 남자와 속임수를 쓴다. 영화의 한 장면은 도넌이 엄격한 영화 검열 제도를 영리하게 회피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장면에서 그랜트는 파리에 있고 버그만은 여전히 런던에 있으며, 두 사람은 전화로 베개 이야기를 나눈다. 도넌은 두 배우의 분할 화면을 사용하여 마치 같은 침대에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동기화된 움직임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재정적, 비평적으로 성공했으며,[5] 도넌은 에른스트 루비치조지 큐커와 같은 감독들과 비교되었다.[32]

도넌은 조지 애보트의 브로드웨이 히트작을 바탕으로 한 ''댐 야키스!''(1958)로 잠시 뮤지컬 장르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애보트와 공동 연출을 맡았으며, 첫 번째 영화와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간섭 없이 협력했다.[4] ''파자마 게임''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는 애들러와 로스의 음악과 밥 포스의 안무가 포함되어 있다. 탭 헌터, 그웬 버든, 레이 월스턴이 출연했다. ''댐 야키스!''는 파우스트 전설을 각색한 것으로, 워싱턴 세네터스의 팬이 패배하는 팀에 좋은 타자를 주기 위해 영혼을 팔겠다는 내용이다. 월스턴은 브룩스 브라더스 스타일의 악마로 출연하여 팬의 소원을 들어주고 그를 근육질의 젊은 타자 조 하디(헌터)로 변신시킨다.[32] 도넌은 7대의 숨겨진 카메라를 사용하여 3번의 실제 세네터–양키 경기를 로케이션 촬영할 수 있었다.[5] 저예산 영화는 어느 정도 재정적으로 성공했으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5] 이 영화는 또한 ''어린 왕자''(1974)까지 도넌의 마지막 뮤지컬 영화였다.[20]

3. 6. 1960–1969: 영국

스탠리 도넌은 1970년대 초반까지 잉글랜드에 정착했다.[4] 뮤지컬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도넌은 코미디 영화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런던을 기반으로 하면서 할리우드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든, 이미 무엇을 했든 상관없이 내 길을 가는 것은 만족스러웠다. 또한 유럽의 영향력, 즉 삶과 영화 제작에 대한 그들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라고 말했다.[32] 1960년대 초 영국에 머무는 동안 도넌은 당시 새롭게 부상하던 영국 뉴 웨이브 영화 운동에 초기 영향을 준 인물로 칭송받았다.[5]

1950년대 후반, 도넌은 컬럼비아 픽처스와 독점 계약이 아닌 세 편의 영화 제작 계약을 맺었다.[4] 이 계약에 따라 제작된 첫 번째 영화는 《한 번 더, 느낌으로!》(1960)였다. 해리 커니츠가 자신의 연극을 각색한 이 영화는 파리에서 촬영되었으며, 율 브리너가 그의 변덕에 지쳐 돈을 목적으로 그와 결혼하여 빠르게 이혼하려는 지배적인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케이 켄달이 그의 정부로 출연했다. 켄달은 촬영 중 백혈병 말기였으며, 개봉 전에 사망했다. 이 영화는 재정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32]

도넌은 브리너, 커니츠와 다시 뭉쳐 영화 《서프라이즈 패키지》(1960)를 제작했다. 이 영화에서 브리너는 그리스 로도스 섬으로 추방된 미국 갱스터로, 미치 게이너는 브리너를 달래기 위해 섬으로 보내진 "서프라이즈 패키지"로, 노엘 카워드는 브리너가 폐위시키려는 로도스 왕으로 출연한다. 이 영화는 재정적으로 성공하지 못했고, 도넌은 "개인적인 이유로 돈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만들었다고 말했다.[5] 이 두 편의 영화만이 도넌이 컬럼비아 계약에 따라 완성한 작품이었다. 스튜디오는 저조한 흥행 성적을 이유로 계약을 취소했고, 도넌은 당시 추진하던 프로젝트, 즉 극작가 로버트 볼트의 《사계절의 사나이》와 《파치의 푸른색》을 제작할 수 없었는데, 이 두 작품 모두 다른 감독에 의해 성공적인 영화가 되었다.[4]

그랜드온 프로덕션이 도넌의 다음 영화 《잔디는 더 푸르다》를 제작하여 1960년 12월 유니버설 픽처스를 통해 개봉했다. 캐리 그랜트와 데보라 커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기 위해 저택의 가이드 투어를 허용해야 하는 잉글랜드의 대저택의 백작 부인으로 출연한다. 로버트 미첨은 커와 사랑에 빠지는 미국 석유 재벌로, 진 시몬스는 그랜트의 전 여자친구인 괴짜 미국 상속녀로 출연한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는 재정적으로 실망스러웠지만, 원래 연극 버전이 웨스트 엔드에서 히트를 기록한 영국에서는 성공했다.[32]

캐리 그랜트와 오드리 헵번, 도넌의 가장 성공적인 영화 《샤레이드》


도넌의 가장 호평을 받은 영화 중 하나는 캐리 그랜트, 오드리 헵번, 월터 매튜, 제임스 코번, 조지 케네디와 네드 글래스가 출연한 《샤레이드(1963)》였다. 도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와 같은 영화를 항상 만들고 싶었다"[5]라고 말했고, 이 영화는 "히치콕이 만들지 않은 최고의 히치콕 영화"라고 불리기도 했다.[21] 《샤레이드》는 스탠리 도넌 프로덕션에서 제작되었으며,[4] 유니버설을 통해 개봉되었고, 피터 스톤이 자신의 소설을 각색했다. 레지 램퍼트(헵번)는 남편이 살해당했고, (최소한) 세 명의 불길한 남자들이 그가 어딘가에 숨겨둔 25만달러의 금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피터 조슈아(그랜트)는 레지를 돕고,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세 명의 깡패들로부터 레지를 보호한다. 이 영화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불과 2주 후인 1963년 12월에 개봉되었으며, "암살하다"라는 단어는 두 번이나 다시 녹음해야 했다.[4] 이 영화는 도넌의 가장 성공적인 영화였으며[4] 이후 몇 년 동안 개봉된 많은 로맨틱 코미디 스릴러에 영향을 미쳤다.[32] 영화 평론가 주디스 크리스트는 이 영화를 "세련되고 재미있는 멜로드라마"라고 불렀고, 폴린 케일은 "다른 나라의 영화와 달리 신선함과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1963년] 최고의 미국 영화일 것이다."라고 말했다.[4] 이 영화는 조나단 드미 감독에 의해 《찰리의 진실》(2002)로 리메이크되었다.[22]

도넌은 그레고리 펙소피아 로렌이 출연한 《아라베스크(1966)》로 또 다른 히치콕 영감을 받은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줄리안 미첼과 스탠리 프라이스가 쓰고, 피터 스톤이 크레딧에 오르지 않은 채 다시 썼다.[4] 펙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미국인 교수로, 고대 상형 문자에 정통하다. 그는 암살을 시도하는 조직을 조사하고 상형 문자를 사용하여 소통하는 중동 총리의 요청을 받는다. 조사는 펙을 끊임없이 미스터리로 이끌었고, 종종 총리의 신비로운 정부(로렌)와 관련되었다. 이 영화는 도넌의 두 번째 연속 히트작이었다.[4]

도넌은 오드리 헵번과 앨버트 피니가 출연하고 엘리너 브론, 윌리엄 다니엘스와 재클린 비셋이 조연을 맡은 《두 사람(1967)》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도넌이 구상하고 소설가 프레데릭 라파엘이 썼으며,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32] 이 영화는 도넌의 가장 개인적인 영화 중 하나로, "이전에 드러나지 않았던 열정의 불꽃"과 "영화 편집에 관한 진정한 교과서"라고 불린다.[32] 이 영화의 복잡하고 비선형적인 이야기는 헵번과 피니의 12년간의 관계를 프랑스 남부에서 그들이 함께 보낸 네 번의 (서로 얽힌) 로드 트립을 통해 보여준다. 이 영화는 흥행에서는 중간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비평가들의 반응은 매우 엇갈렸다.[5] 보슬리 크로더는 이 영화를 "상업적인 미국 쓰레기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불렀다.[4] 또한 도넌은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가장 자주 질문을 받은 영화라고 말했다.[4]

영국에 살면서 도넌은 영국 연극 《비욘드 더 프린지》의 열렬한 팬이 되었고, 이 쇼의 두 참여자인 피터 쿡더들리 무어와 함께 작업하고 싶어했다.[32] 그 결과물인 영화가 《매혹당한 자(1967)》였는데, 이는 파우스트 전설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쿡이 쓰고 무어가 음악을 담당했으며, 엘리너 브론과 라켈 웰치도 출연했다. 무어는 동료(브론)에 대한 짝사랑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외로운 젊은이로 출연한다. 바로 그때 악마(쿡)가 나타나 그의 영혼과 교환하여 일곱 가지 소원을 제안한다. 이 영화는 1960년대 스윙잉 런던과의 유쾌한 연관성 때문에 비평가들을 갈라놓았지만, 로저 에버트는 그 풍자를 "가시 돋치고 현대적이며 ... 건조하고 절제되었다"라고 칭했고, 전반적으로 "웅장하게 촬영된, 지적이고, 매우 재미있는 영화"라고 평했다.[23] 반면에, 《타임》지는 이 영화를 파우스트 테마를 가장 약하게 변형한 작품이라고 불렀다.[32] 이 영화는 히트를 쳤고[4] 특히 미국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4] 도넌은 이 영화를 자신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여겼으며[32],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매우 개인적인 영화"라고 말했다.[5] 이 영화는 해롤드 래미스 감독에 의해 《매혹당한 자(2000)》로 리메이크되었다.[24]

《계단(1969)》은 찰스 다이어의 자전적 연극을 더들리 무어가 음악을 맡아 도넌이 각색한 작품이다. 렉스 해리슨과 리처드 버튼은 런던의 이발소를 운영하며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중년의 게이 커플로 출연한다.[32] 이 영화는 세금 문제로 파리에서 촬영되었으며 재정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개봉 당시 혹평을 받았지만, 2007년 영화 평론가 아먼드 화이트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그는 이 영화를 "지혜, 유머, 따뜻함으로 게이의 경험을 묘사한 희귀한 할리우드 영화"이자 "잃어버린 보물"이라고 불렀다.[25]

3. 7. 1970–2003: 후기 작품

스탠리 도넌은 아델 비티와의 결혼 생활이 끝난 후 1970년 할리우드로 돌아왔다.[5] 프로듀서 로버트 에반스는 도넌에게 1943년에 처음 출판된 아동 도서 ''어린 왕자''의 영화 각색을 연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작사가 앨런 제이 레너와 작곡가 프레데릭 로위가 음악과 시나리오를 썼고 촬영은 튀니지에서 진행되었다.[32] ''어린 왕자''(1974)에는 스티븐 워너가 타이틀 롤을 맡았고 리처드 킬리, 밥 포스, 진 와일더, 도나 맥케치니가 출연했다. 이 영화는 ''젠키스!'' 이후 도넌의 첫 번째 뮤지컬 영화였다. 춤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포스는 뱀 역할로 자신의 댄스 장면을 안무했다. 레너는 도넌이 "자신이 모든 템포를 바꾸고, 원하는 대로 악절을 삭제하고, 모든 노래의 의도를 왜곡하여 전체 악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말했다.[26] 1974년에 개봉되었으며 재정적으로 실패했다.[32]

도넌의 다음 영화는 리자 미넬리, 진 해크만, 버트 레이놀즈가 출연한 ''럭키 레이디''(1975)였다. 미넬리는 금주법 시대의 밀주업자로, 멕시코에서 캘리포니아로 술을 밀수하며 해크만과 레이놀즈의 도움을 받는데, 두 사람은 그녀의 애정을 놓고 경쟁한다. 도넌은 "나는 [이 영화에] 정말 신경 썼고 3년을 바쳤다... 아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5] 예산을 초과했고 흥행에 실패했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열광적이지 않았지만 제이 콕스는 이 영화가 "193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특징인 반짝이는 표면과 전속력의 경박함"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다.[32]

옛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향수는 도넌의 다음 영화 ''무비 무비''(1978)의 주제가 되었다. 루 그레이드의 ITC 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하고 래리 겔바트와 셸던 켈러가 시나리오를 쓴 이 영화는 가짜 영화 예고편과 코미디언 조지 번스의 소개가 포함된 구식 이중 상영회로 제시된 두 개의 짧은 영화로 구성되어 있다. 조지 C. 스콧, 트리시 반 드버, 레드 버튼스, 마이클 키드, 엘리 왈라크가 출연했으며 1978년 제29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경쟁 부문에 초연되었다. 두 영화 중 첫 번째 영화는 복싱-도덕 영화에 대한 흑백 트리뷰트인 ''다이너마이트 핸즈''이다. 두 번째 영화는 버스비 버클리의 사치스러운 뮤지컬에 대한 헌사인 ''1933년 벡스터의 미녀''이다.[32] 도넌의 이전 두 영화와 마찬가지로 재정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리뷰는 더 긍정적이었다.[5] ''뉴욕 타임스''에서 빈센트 캔비는 이 영화를 "우아함이 돋보이는 할리우드 속임수"라고 불렀다.[27]

도넌은 커크 더글러스, 패라 포셋, 하비 케이틀이 출연한 SF 영화 ''새턴 3''(1980)을 만들었다. 도넌은 작가(이자 ''무비 무비''의 세트 디자이너) 존 배리가 그에게 보여주었을 때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고, 도넌은 그것을 루 그레이드에게 전달했다. 도넌은 처음에 제작자로 고용되었지만, 그레이드는 신인 감독 배리가 연출할 수 없게 되자 그에게 영화를 완성해 달라고 요청했다.[5] 도넌에 따르면 "배리가 촬영한 것 중 아주 작은 부분만이 완성된 영화에 사용되었다."[5] 이 영화는 비평적, 재정적 재앙이었고[32] 처음에는 도넌이 감독으로 크레딧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5] 1980년대 초, 도넌은 스티븐 킹의 ''데드 존''을 영화화하는 것을 연출하기로 했고, 작가 제프리 보암과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도넌은 결국 이 프로젝트에서 탈락했고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몇 년 후 영화를 연출했다. 보암은 도넌이 처음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던 이유는 "현대 젊은 관객들과 소통"하고 싶었고, 그들이 함께 작업한 시나리오는 "데이비드가 결국 만들게 된 시나리오와 매우 유사했다"고 말했다.[28]

도넌의 마지막 극장 영화는 ''리우에 죄를 뒤집어씌워라''(1984)였다. 이 영화는 클로드 베리의 영화 ''Un moment d'égarement''(1977)의 리메이크작이며[4] 겔바트와 찰리 피터스가 각본을 썼다. 마이클 케인, 조세프 볼로냐, 미셸 존슨, 발레리 하퍼, 데미 무어가 출연했으며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촬영되었다. 케인과 볼로냐는 리우에서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는 부유한 임원 역할을 맡았으며, 케인은 볼로냐의 십 대 딸(존슨)과 불륜을 저지른다. 이 영화는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지만 재정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32]

1986년 도넌은 제58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TV 시상식을 제작했는데, 여기에는 주운 앨리슨, 레슬리 카론, 마지 챔피언, 시드 차리스, 캐서린 그레이슨, 하워드 킬, 앤 밀러, 제인 파월, 데비 레이놀즈, 에스터 윌리엄스가 함께 부른 "Once a Star, Always a Star"의 뮤지컬 공연이 포함되었다. 또한 1986년 도넌은 인기 TV 시리즈 ''문라이팅''의 에피소드를 위해 뮤지컬 시퀀스를 연출했고, 라이오넬 리치의 노래 "Dancing on the Ceiling"의 뮤직 비디오를 연출했는데, 이 곡에는 ''로열 웨딩''의 "You're All the World to Me"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은 회전식 촬영 기법이 사용되었다.[4] 1989년 도넌은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연설에서 도넌은 자신이 탭 댄서를 하다 박사가 된 최초의 사람이자 졸업생을 위해 탭 댄스를 춘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4] 대략 같은 시기에 도넌은 로버트 레드포드의 요청으로 선댄스 연구소에서 영화 뮤지컬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다.[4]

1993년, 도넌은 마이클 잭슨이 출연하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을 뮤지컬 영화로 각색하여 제작 및 연출할 예정이었다. 잭슨이 네버랜드 랜치에서 어린 소년들을 성추행했다는 혐의가 타블로이드 스캔들로 번진 후, 이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4] 그해 후반, 도넌은 거슈윈 극장에서 무대 뮤지컬 ''레드 슈즈''(파웰과 프레스버거 영화를 기반으로 함)를 연출했다. 그는 쇼가 열리기 불과 6주 전에 원래 연출가 수잔 슐만을 교체했다. 4일 만에 막을 내렸다.[4]

도넌의 마지막 영화는 1999년 4월에 방영된 텔레비전 영화 ''러브 레터스''였다. 이 영화는 스티븐 웨버와 로라 리니가 출연했으며, A. R. 거니의 연극을 기반으로 했다. 웨버는 오랫동안 잃어버린 사랑(리니)이 최근에 죽은 것을 알게 된 성공한 미국 상원 의원 역할을 한다. 두 사람은 수년 동안 편지로만 연락을 주고받았고, 웨버는 오래된 러브 레터 모음을 통해 리니를 기억한다. 도넌은 이 연극의 극장 영화 버전을 만들고 싶었지만 어떤 주요 스튜디오에서도 자금을 확보할 수 없었고 대신 이 프로젝트를 ABC에 가져갔다.[29] 2002년 도넌은 데니 아이엘로와 지니 베를린이 출연한 엘레인 메이의 뮤지컬 연극 ''어른 엔터테인먼트''를 코네티컷주 스탬퍼드에서 연출했다.[30] 2004년 그는 황금사자상 경력상을 제6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했다.[31]

4. 기술 혁신

스탠리 도넌과 진 켈리의 영화는 특수 효과, 애니메이션, 편집, 촬영 기법에서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그들의 첫 공동 작업인 커버 걸은 "알터 에고" 댄스 시퀀스를 통해 이러한 의도를 잘 보여주었다. 이 시퀀스는 라이브 촬영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특수 효과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캐릭터의 내면 갈등을 드러냈다. 닻을 올리고에서는 실사 캐릭터와 애니메이션 캐릭터(제리 마우스)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을 연출하여 영화의 잠재력을 시험했다.[35]

테이크 미 아웃 투 더 볼 게임은 버스비 버클리 스타일에서 벗어나 코미디, 서사, 가사, 스타의 개성과 연기력에 중점을 둔 작품이었다. 마틴 루빈은 이를 "뮤지컬 영화의 변화하는 트렌드를 보여주는 지표"라고 평가했으며, 도넌과 켈리가 버클리의 "서사 공간과 공연 공간의 분리" 스타일에 비해 뮤지컬을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4]

사랑은 비를 타고는 영화 뮤지컬의 탄생을 다룬 뮤지컬로, 버클리를 풍자하는 뮤지컬 몽타주가 포함되어 있다. 케이시 차르네스는 이 영화가 할리우드 뮤지컬이 처음으로 자기 성찰적이고 과장된 춤 실력에 대해 재미있어했다고 말했다.[34] 또한 영화의 촬영 기법이 "관객의 시선을 춤과 함께 이동시킨다"라고 말했다.[34]

차르네스는 ''사랑은 비를 타고''의 타이틀 넘버에 대해 "기술적으로 완성된 춤은 없지만, 열린 우산으로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도는 느낌은 훌륭하게 적절한 움직임 선택이며, 실제로 춤에 대한 운동 감각을 전혀 모르는 관객도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움직임과 함께 켈리가 우산을 가장 넓게 휘두르는 동시에 높은 크레인 샷으로 숨 가쁘게 당겨지는 장면이 있다. 그 효과는 어지럽다. 아마도 도넌-켈리 작품에서 카메라 기술을 춤에 적용한 가장 훌륭한 단일 예일 것이다."라고 평가했다.[34]

도넌은 르네 클레르, 에른스트 루비치, 프레드 아스테어의 초기 뮤지컬을 "통합된" 뮤지컬이라고 평가했지만, "루비치와 클레르의 초기 뮤지컬에서는 캐릭터가 오페라처럼 노래할 것임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다. 진과 나는 그렇게까지 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4]

4. 1. 스타일

스탠리 도넌은 영화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그의 경력은 종종 진 켈리와의 비교 대상이 되곤 했다. 특히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작품에서 누가 더 큰 공헌을 했는지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하지만 도넌이 단독으로 감독한 영화들은 켈리의 영화들보다 평론가들에게 더 좋은 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었다. 프랑스 영화 평론가 장-피에르 쿠르도동은 도넌이 할리우드 뮤지컬 발전에 기여한 바가 "빈센트 미넬리를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빛난다"고 평가했다.[32] 데이비드 퀸란은 그를 "할리우드 뮤지컬의 왕"이라고 칭했다.[33]

도넌은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를 현실적인 백스테이지 드라마에서 노래가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이 되는, 보다 통합된 예술 형식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도넌과 켈리가 영화를 만들기 전에는 버스비 버클리의 화려하고 양식화된 작품과 같이 뮤지컬 영화는 브로드웨이 무대 환경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고, 뮤지컬 넘버는 무대 쇼의 일부로 표현되었다. 반면 도넌과 켈리의 영화는 더욱 영화적인 형태를 만들어냈으며, 영화 매체에서만 구현할 수 있는 춤을 포함시켰다. 도넌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아스테어 - 로저스 뮤지컬에서 직접 이어지는 것"이며, "이는 다시 르네 클레르와 루비치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한 일은 현실주의보다는 비현실주의를 지향했다"고 말했다.[32]

도넌은 패션 사진작가 리처드 아베돈의 삶을 바탕으로 영화의 시각적 컨설턴트와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를 디자인한 ''화니 페이스''(1957)에서 추상적이고 스모키한 느낌을 구현했다.[32]

4. 2. 시네 댄스

도넌은 영화 뮤지컬을 연극 무대에서 벗어나 영화와 춤을 통합하는 영화적인 형태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영화에서만 가능한 춤, 즉 '시네 댄스'라는 개념이 탄생했다.[15]

도넌과 진 켈리가 영화를 만들기 전에는 버스비 버클리의 화려한 뮤지컬처럼 브로드웨이 무대 환경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았다. 이러한 뮤지컬은 뮤지컬 넘버가 무대 공연의 일부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도넌과 켈리는 영화 매체에서만 구현 가능한 춤을 포함하여 더욱 영화적인 형태를 만들어냈다. 도넌은 자신이 하는 일이 프레드 아스테어-진저 로저스 뮤지컬에서 이어지는 것이며, 이는 다시 르네 클레르와 에른스트 루비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32]

영화 학자 케이시 차르네스는 "시네 댄스"를 "이전에 결코 해본 적 없는 춤과 영화 제작의 독특한 강점을 융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넌과 켈리는 카메라와 무용수 사이에 균형을 발전시켜 춤의 창작과 효과에 기여하도록 했다.[34]

도넌과 켈리의 영화는 특수 효과, 애니메이션, 편집 등에서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커버 걸''의 "알터 에고" 댄스 시퀀스는 특수 효과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캐릭터의 내면 갈등을 드러냈다. ''닻을 올리고''에서는 실사 캐릭터와 애니메이션 캐릭터(제리 마우스)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을 연출했다.[35]

''테이크 미 아웃 투 더 볼 게임''은 버클리 스타일에서 벗어나 코미디, 서사, 가사, 스타의 개성과 연기력에 중점을 둔 작품이었다. 도넌과 켈리는 뮤지컬을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4]

''사랑은 비를 타고''는 영화 뮤지컬의 탄생을 다룬 뮤지컬로, 버클리를 풍자하는 뮤지컬 몽타주가 포함되어 있다. 차르네스는 이 영화가 할리우드 뮤지컬이 처음으로 자기 성찰적이고 과장된 춤 실력에 대해 재미있어했다고 말했다.[34]

''사랑은 비를 타고''의 타이틀 넘버에 대해 차르네스는 "기술적으로 완성된 춤은 없지만, 열린 우산으로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도는 느낌은 훌륭하게 적절한 움직임 선택이며, 실제로 춤에 대한 운동 감각을 전혀 모르는 관객도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움직임과 함께 켈리가 우산을 가장 넓게 휘두르는 동시에 높은 크레인 샷으로 숨 가쁘게 당겨지는 장면이 있다. 그 효과는 어지럽다. 아마도 도넌-켈리 작품에서 카메라 기술을 춤에 적용한 가장 훌륭한 단일 예일 것이다."라고 평가했다.[34]

도넌은 르네 클레르, 루비치, 아스테어의 초기 뮤지컬을 "통합된" 뮤지컬이라고 평가했지만, "루비치와 클레르의 초기 뮤지컬에서는 캐릭터가 오페라처럼 노래할 것임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다. 진과 나는 그렇게까지 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4]

4. 3. 기법

도넌은 영화 역사가들에게 매우 존경받고 있지만, 그의 경력은 종종 진 켈리의 경력과 비교되며, 그들의 협업에 누가 더 많은 공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그들의 관계는 전문적이면서 개인적으로도 복잡했지만, 도넌의 단독 감독으로서의 영화는 일반적으로 켈리의 영화보다 평론가들에게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랑스 영화 평론가 장-피에르 쿠르도동은 도넌이 할리우드 뮤지컬의 진화에 기여한 것은 "빈센트 미넬리를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빛난다"고 말했다.[32] 데이비드 퀸란은 그를 "할리우드 뮤지컬의 왕"이라고 불렀다.[33]

도넌은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많은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예술에 대한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영화 뮤지컬을 연극을 촬영한 현실적인 무대 배경에서 영화와 춤을 통합하는 보다 영화적인 형태로 전환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결국 영화 학자들은 이 개념을 "시네 댄스"(영화 매체에서만 창조될 수 있는 춤)라고 명명했으며, 그 기원은 도넌/켈리 영화에 있다.[15] 영화 학자 케이시 차르네스는 "시네 댄스"를 "이전에 결코 해본 적 없는 춤과 영화 제작의 독특한 강점을 융합한 것"이라고 묘사하고, 도넌과 켈리가 "할리우드 댄스를 춤이나 사진 기술의 단순한 과시에서 무용수의 능력과 카메라가 볼 수 있는 것을 모두 통합하는 인식으로 끌어올린 것 같다... [그들은] 카메라와 무용수 사이에 균형을 발전시켜 사진작가와 안무가 모두 춤의 창작과 최종적인 효과에 상당한 기여를 하도록 장려했다"고 덧붙였다.[34]

"토키(talkie)"가 영화 산업에서 탄력을 받기 시작했을 때,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브로드웨이 멜로디와 버스비 버클리의 42번가와 같은 뮤지컬 영화를 만들기 위해 브로드웨이 최고의 인재를 영입했다. 이 영화들은 줄거리가 무대 쇼와 이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하위 장르인 백스테이지 뮤지컬을 확립했다. 이들은 뮤지컬 장르의 기준을 세웠고, 뮤지컬 넘버를 무대 공연의 맥락 안에 넣거나, 스토리를 발전시키거나 캐릭터를 개발하지 않고 덧붙여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다.[15] 도넌은 이를 싫어했고, 자신의 영화가 "그러한 백스테이지 뮤지컬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말했다.[5] 도넌은 프로듀서 프리드를 이러한 전환의 원동력으로 꼽으며, 프리드는 "뮤지컬을 백스테이지 세상에서 다른 무언가로 바꾸려는 일종의 본능이 있었다. 그는 무엇으로 바꿔야 할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바꿔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5] 켈리는 도넌이 뮤지컬이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지, 그리고 영화 매체에 더 적합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8]

도넌과 켈리의 영화는 특수 효과, 애니메이션, 편집, 촬영 기법에서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그들의 첫 번째 공동 작업인 ''커버 걸''은 특히 "알터 에고" 댄스 시퀀스를 통해 그들의 의도를 확고히 했다. 이 시퀀스는 라이브 촬영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특수 효과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캐릭터의 내면 갈등을 드러냈다. 도넌과 켈리는 실사 캐릭터가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춤을 추는 최초의 영화 중 하나인 ''해군 기지''에서 제리 더 마우스 댄스를 통해 영화의 잠재력을 시험했다.[35]

그들이 ''우리들의 블루스''를 만들 즈음, 마틴 루빈이 "뮤지컬 영화의 변화하는 트렌드를 보여주는 지표"라고 부른 것을 완벽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버클리 쇼와는 달리 "코미디, 서사로의 전환, 가사의 재치, 스타의 개성과 연기력에 중점을 두는 비교적 소규모의 작품"이었다. 루빈은 도넌과 켈리가 버클리의 "서사 공간과 공연 공간의 분리" 스타일에 비해 뮤지컬을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4] ''우리들의 블루스''는 버클리가 감독으로 참여한 마지막 영화였으며, 오늘날에는 시대의 교체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도넌과 켈리 모두 버클리와의 작업에 어려움을 느꼈고,[15] 영화가 완성되기 전에 감독은 떠났다.[4]

도넌과 켈리는 ''시티 라이트''를 개봉하면서, 당시의 관습을 깨고 뉴욕 현지에서 촬영한 화려한 뮤지컬 넘버를 빠른 편집과 실험적인 카메라 기법으로 과감하게 영화를 시작했다. 그들의 가장 유명한 영화인 ''사랑은 비를 타고''는 영화 뮤지컬의 탄생을 다룬 뮤지컬에 적합하다. 이 영화에는 도넌이 "우리는 여기서 버스비 버클리를 하고 있지만, 그를 조롱하고 있다"라고 말한 뮤지컬 몽타주가 포함되어 있다.[4] 차르네스는 ''사랑은 비를 타고''가 버클리에 대한 언급을 통해 "할리우드 뮤지컬이 처음으로 자기 성찰적이고, 과장된 춤 실력 부족에 대해 재미있어했다"라고 말했고, 버클리의 "머리 위 만화경 꽃무늬 패턴이 주로 특징이며, 탭 댄스를 추는 코러스 라인이 무릎 아래로만 보인다"라고 말했다.[34] 차르네스는 또한 영화의 촬영 기법이 "관객의 시선을 춤과 함께 이동시킨다"라고 말했다.[34]

차르네스는 영화의 유명한 타이틀 넘버를 특별히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기술적으로 완성된 춤은 없지만, 열린 우산으로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도는 느낌은 훌륭하게 적절한 움직임 선택이며, 실제로 춤에 대한 운동 감각을 전혀 모르는 관객도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움직임과 함께 켈리가 우산을 가장 넓게 휘두르는 동시에 높은 크레인 샷으로 숨 가쁘게 당겨지는 장면이 있다. 그 효과는 어지럽다. 아마도 도넌-켈리 작품에서 카메라 기술을 춤에 적용한 가장 훌륭한 단일 예일 것이다."[34] 그는 또한 "모세가 추측하건대" 넘버에서 도넌의 연출을 칭찬하며 "도넌이 이제 정형화한 특정 카메라 기법... 한 샷의 끝과 다른 샷의 시작을 나타내기 위한 미디엄 샷으로의 돌리 샷"을 포함했다.[34] 도넌은 르네 클레르, 에른스트 루비치, 프레드 아스테어의 초기 뮤지컬을 "통합된" 뮤지컬이라고 평가했지만,[4] "루비치와 클레르의 초기 뮤지컬에서는 캐릭터가 오페라처럼 노래할 것임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다. 진과 나는 그렇게까지 가지 않았다. '모세가 추측하건대'에서 그는 도널드와 함께 노래를 부를 뻔했다"라고 말했다.[4] 도넌의 ''로열 웨딩''과 ''브레이크 아웃''은 정교한 댄스 시퀀스를 만들기 위해 특수 효과 샷을 계속 사용했다.[4][4]

5. 진 켈리와의 관계

도넌과 진 켈리는 함께 작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종종 켈리에 대해 격렬하게 이야기할 정도로 복잡한 관계였다. 켈리는 도넌에 대해 명시적으로 부정적인 발언을 한 적은 없지만,[15] 켈리의 발언은 종종 거만했으며 "그들의 공동 작업에 대한 도넌의 기여를 폄하하려는 오랜 시도"를 보여주었다는 주장이 있다.[4]

두 사람의 갈등에는 개인적인 이유와 직업적인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두 사람 모두 무용가 잔 코인을 좋아했고,[8] 도넌은 켈리가 자신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38] 이들은 공동 감독 및 공동 안무를 맡은 작품들에서 누가 더 많은 공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4][36][37]

도넌과 켈리의 관계는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의 돈 록우드와 코스모 브라운처럼 켈리가 스타 연기자, 도넌이 그의 조력자로 묘사되기도 한다.[5] 켈리는 도넌을 아들처럼 여겼지만,[4] 도넌은 켈리를 "차가웠고, 자기중심적이며, 매우 거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8] 도넌은 켈리가 영화 제작 경력을 시작하도록 도왔다고 인정했지만,[42] MGM 프로듀서 로저 에덴스가 자신을 가장 많이 후원했다고 말했다.[4]

많은 사람들은 도넌이 켈리에게 모든 것을 빚졌다고 믿었다. 켈리의 전기 작가 클라이브 허쉬혼은 도넌을 "특별한 정체성이나 재능이 없는... 쇼 비즈니스에서 성공하고 싶어하는 남부 출신의 아이"라고 묘사했다.[15] 그러나 도넌은 스스로 할리우드로 이주했다고 밝혔다.[4] 켈리는 때때로 도넌을 공개적으로 망신시키는 행동을 했지만,[38][4] 도넌은 함께 작업하는 동안 감정과 직업적인 태도를 유지했다.[38]

두 사람의 긴장은 《언제나 쾌적한 날씨》 촬영장에서 폭발했다. 도넌은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켈리와의 우정이 끝났다고 말했다.[5] 빈센트 미넬리의 《브리가둔》(켈리가 연출을 원했던 작품),[38] 켈리의 《춤에의 초대》가 재정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도 긴장 요소였다.[4][15]

도넌은 켈리가 그들의 작품에 대해 충분한 공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불평했지만, 켈리는 제리 더 마우스[38]와 "알터 에고" 댄스 시퀀스에 대해 도넌에게 공을 돌렸다.[38] 1992년 도넌은 "그에게 감사하지만, 나는 그 빚을 10배로 갚았고, 그는 나에게서 충분한 가치를 얻었다"고 말했다.[4]

두 사람의 기여도에 대한 논쟁은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이어졌다. 데이비드 톰슨은 "두 사람의 협업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가 "도넌의 경력을 평가하는 데 따르는 문제"라고 지적했다.[60] 작곡가 소울 챕린은 "진은 주동자였고 스탠리는 열정적이고 재능 있는 제자였다"고 말했다.[44] 그러나 《시티 라이트》 촬영 당시 MGM의 모든 메모와 서신은 켈리가 아닌 도넌에게만 전달되었다.[4]

《사랑은 비를 타고》의 미술 감독 랜들 듀엘은 "진이 쇼를 이끌었다. 스탠은 몇 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냈지만, 그는 여전히 진의 '사무실 소년'이었다"고 말했다.[15] 도넌과 켈리의 영화를 단독 연출로 비교하면, 도넌의 영화가 대체로 더 호평을 받았고 재정적으로도 성공했다. 켈리의 영화 《헬로, 돌리!》(1969)는 할리우드 뮤지컬을 사실상 종식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4]

5. 1. 잔 코인

도넌과 진 켈리의 관계는 복잡했다. 두 사람 모두 무용가 잔 코인을 좋아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갈등이 있었고,[8] 도넌은 켈리가 자신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직업적인 갈등도 있었다.[38]

지앤 코인과 1958년 켈리(오른쪽 끝). 코인은 1948년 도넌과 결혼했고, 이후 1960년 켈리와 결혼했다.


코인은 7살 때 펜실베이니아주 존스타운에 있는 진 켈리 댄스 스튜디오에 등록했고, 켈리에게 소녀 팬심을 품게 되었다.[4][15][38] 20대에는 《최고의 발걸음》(Best Foot Forward)에 출연하여 켈리와 재회했고, 도넌을 처음 만났으며,[38] 이후 그들과 함께 할리우드로 이사했다.[4][38] 그녀와 도넌은 1948년에 결혼했지만,[38]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38] 그들은 1950년에 별거했고, 1951년에 이혼했다.[4]

코인은 도넌과 결혼 생활 중에도 여러 영화에서 켈리의 개인 비서로 일했으며, 사망할 때까지 켈리를 보조했다. 켈리와 코인은 코인이 도넌과 결혼한 기간 동안과 이후에도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있었고,[38] 도넌은 켈리의 첫 번째 부인인 베치 블레어를 사랑했다는 소문도 있었다.[38]

켈리는 도넌과 코인의 충동적인 결혼이 정서적 미성숙과 판단력 부족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38] 켈리는 "스탠리가 지앤을 볼 때마다, 그가 사랑했던 베치를 보았고, 지앤이 스탠리를 볼 때마다, 내가 보였을 것이다. 어떻게든 모든 것이 상당히 근친상간적이었다"고 말했다.[8] 켈리와 블레어는 1957년에 이혼했고, 이후 켈리는 코인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들은 1960년에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38] 코인은 1973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38]

5. 2. 직업적 갈등

도넌과 진 켈리의 관계는 복잡했다. 도넌은 켈리가 자신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의 공동 작업에 대한 공로를 누가 더 많이 가져가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38][4][36][37] 켈리는 도넌을 아들처럼 여겼지만,[4] 도넌은 켈리를 "차가웠고, 자기중심적이며, 매우 거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8]

많은 사람들은 도넌이 켈리에게 모든 것을 빚졌다고 믿었지만,[15] 도넌은 자신이 스스로 할리우드로 이주했다고 밝혔다.[4] 켈리는 때때로 도넌을 공개적으로 망신시키고 깔보는 행동을 했다.[38][4]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은 《언제나 쾌적한 날씨》 촬영장에서 폭발했다. 도넌은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켈리와의 우정이 끝났다고 말했다.[5] 다른 긴장 요소로는 도넌의 히트작과 빈센트 미넬리의 《브리가둔》(켈리가 연출을 원했던 작품),[38] 그리고 켈리 자신의 야심작 《춤에의 초대》가 있었는데, 두 작품 모두 재정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4][15]

도넌은 켈리가 그들의 작품에 대해 충분한 공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자주 불평했지만, 켈리는 제리 더 마우스와[38] "알터 에고" 댄스 시퀀스에 대해 도넌에게 공을 돌렸다.[38] 1992년 도넌은 "그에게 감사하지만, 나는 그 빚을 10배로 갚았고, 그는 나에게서 충분한 가치를 얻었다"고 말했다.[4]

두 사람의 기여도에 대한 논쟁은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이어졌다. 데이비드 톰슨은 "도넌의 경력을 평가하는 데 따르는 문제"는 "두 사람의 협업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라고 지적했다.[60] 작곡가 소울 챕린은 "진은 주동자였고 스탠리는 열정적이고 재능 있는 제자였다"고 말했다.[44] 그러나 《시티 라이트》 촬영 당시 MGM에서 제작진에게 보낸 모든 메모와 서신은 켈리가 아닌 도넌에게만 전달되었다.[4]

《사랑은 비를 타고》의 미술 감독 랜들 듀엘은 "진이 쇼를 이끌었다. 스탠은 몇 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냈고 진과 함께 일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는 여전히 진의 '사무실 소년'이었지만, 진은 그를 매우 존경했다"고 말했다.[15] 도넌과 켈리의 영화를 단독 연출자로 비교해 보면, 도넌의 영화가 일반적으로 켈리의 영화보다 비평적으로 더 호평을 받았고 재정적으로도 성공했다. 켈리의 영화 《헬로, 돌리!》(1969)는 할리우드 뮤지컬을 사실상 종식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4]

5. 3. 감독 경력

도넌과 진 켈리의 관계는 복잡했다. 도넌은 켈리와 함께 작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종종 전 친구이자 멘토였던 켈리에 대해 격렬하게 이야기했다. 켈리는 도넌에 대해 명시적으로 부정적인 발언을 한 적은 없었지만[15], 그의 발언은 종종 거만했으며 "그들의 공동 작업에 대한 도넌의 기여를 폄하하려는 오랜 시도"를 보여주었다.[4]

그들의 갈등 이유는 개인적인 것(두 사람 모두 무용가 잔 코인을 좋아했다)[8]과 직업적인 것(도넌은 항상 켈리가 자신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이었다.[38] 그들은 공동 프로젝트, 즉 공동 감독으로 3편, 공동 안무가로 4편의 작품에 대해 누가 더 많은 공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4][36][37]

도넌과 켈리의 관계는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의 돈 록우드와 코스모 브라운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묘사되었으며, 켈리가 스타 연기자이고 도넌이 그의 믿음직한 조력자였다.[5] 켈리는 도넌을 자신에게 아들 같은 존재로 묘사했고,[4] 도넌은 처음에는 켈리를 우상화했지만, 그를 "차가웠고, 자기중심적이며, 매우 거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8] 도넌은 켈리가 "자신의 영화 제작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하도록 도왔다"고 인정했지만,[42] MGM 프로듀서인 로저 에덴스가 자신을 가장 많이 후원했다고 말했다.[4]

많은 사람들은 도넌이 모든 것을 켈리에게 빚졌다고 믿었고, 켈리의 전기 작가인 클라이브 허쉬혼은 도넌을 "특별한 정체성이나 재능이 없는... 쇼 비즈니스에서 성공하고 싶어하는 남부 출신의 아이일 뿐"이라고 묘사했다.[15] 켈리는 때때로 《커버 걸》의 리허설 동안 춤 동작을 따라가지 못하는 도넌을 질책하는 등, 공공장소에서 도넌을 당황하게 하고 깔보는 행동을 했다.[38][4]

도넌은 켈리에 대한 불만을 키워가는 와중에도,[38] 함께 작업하는 동안 자신의 감정과 직업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38]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은 《언제나 쾌적한 날씨》 촬영장에서 폭발했다. 도넌은 최근 《내 마음 깊이》와 《일곱 신부》의 성공 이후 켈리와 또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4] 그들은 촬영장에서 처음으로 싸웠고, 이제 더 자신감을 얻은 도넌이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38] 도넌은 거의 영화에서 하차할 뻔했고,[4] 켈리와의 우정은 끝났다.[5]

다른 긴장 요소로는 도넌의 히트작과[5][38] 빈센트 미넬리의 《브리가둔》 (켈리가 밀접하게 관여했고 연출을 원했던 작품)[38], 그리고 켈리 자신의 야심작 《춤에의 초대》가 있었는데, 두 작품 모두 재정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4][15] 《일곱 신부》 촬영 동안, 도넌은 종종 예산 제약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고, 《브리가둔》은 훨씬 더 큰 예산을 가지고 있었다.[4]

나중에 도넌은 켈리에 대해 좋은 말은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43] 1991년 코멘과 그린에 대한 헌정 행사에서, 켈리는 공개 연설에서 도넌이 "성장하기 위해 [자신]이 필요했다"고 말했지만, "나는 카메라 뒤에 스탠리가 필요했다"고 덧붙였다.[4] 그는 또한 도넌을 MGM에서 자신의 희생양으로 여겨졌다고 묘사했다.[8] 도넌은 켈리가 그들의 작품에 대해 충분한 공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자주 불평했지만, 켈리는 제리 더 마우스[38]와 "알터 에고" 댄스 시퀀스에 대해 도넌에게 공을 돌렸다.[38] 1992년 도넌은 "그에게 감사하지만, 나는 그 빚을 10배로 갚았고, 그는 나에게서 충분한 가치를 얻었다"고 말했다.[4]

두 사람의 기여도의 상대적인 중요성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어왔다. 데이비드 톰슨은 "두 사람의 협업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도넌은 연출가로서 실제로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대한 "도넌의 경력을 평가하는 데 따르는 문제"에 대해 글을 썼다.[60] 도넌은 "처음부터 끝까지 천만 번이나 되풀이하다 보면, 몇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린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할 수 없다"고 말했다.[5] 작곡가 소울 챕린은 "진은 주동자였고 스탠리는 열정적이고 재능 있는 제자였다"고 말했다.[44] 영화 《시티 라이트》 촬영 당시 MGM에서 제작진에게 보낸 모든 메모와 서신은 켈리가 아닌 도넌에게만 전달되었다.[4]

《사랑은 비를 타고》의 미술 감독 랜들 듀엘은 "진이 쇼를 이끌었다. 스탠은 몇 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냈고 진과 함께 일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는 여전히 진의 '사무실 소년'이었지만, 진은 그를 매우 존경했다"고 말했다.[15] 도넌과 켈리의 영화를 단독 연출자로 비교해 보면, 도넌의 영화가 일반적으로 켈리의 영화보다 비평적으로 더 호평을 받았고 재정적으로도 성공했다. 켈리의 영화 《헬로, 돌리!》(1969)는 할리우드 뮤지컬을 사실상 종식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4]

6. 개인사

스탠리 도넌은 다섯 번 결혼하고 이혼했으며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 번째 부인은 무용가, 안무가, 배우인 잔 코인으로, 1948년에 결혼하여 1951년에 이혼했다.[4] 두 번째 부인은 배우 마리온 마샬이었으며, 두 아들 피터 도넌(1953–2003)과 조슈아 도넌(1955년생)을 두었다. 1952년부터 1959년까지 결혼 생활을 했다.[45] 세 번째 부인은 제2대 베티 백작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아델, 베티 백작 부인이었다. 1960년에 결혼하여 아들 마크 도넌(1962년생)을 두었고 1971년에 이혼했다.[4] 네 번째 부인은 미국 배우 이베트 미미엑스로, 1972년부터 1985년까지 결혼했다.[4] 다섯 번째 부인은 파멜라 브래든이었고, 1990년부터 1994년까지 결혼했다.[4]

1940년대 초, 배우 주디 홀리데이와 교제했다.[4] 또한 첫 번째 결혼과 두 번째 결혼 사이에 1년 동안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교제했다.[4] 말년에는 작가이자 감독인 엘레인 메이와 오랫동안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으며,[42] 1999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교제했다.[9]

장남 피터 도넌은 시각 효과 아티스트로 활동하다 2003년 50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46] 차남 조슈아 도넌은 영화 제작자이다.[47] 셋째 아들 마크 도넌은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48]

1959년, 아버지 모르데카이는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어머니 헬렌은 1989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7. 영화 목록

다음은 스탠리 도넌의 선별된 영화 작품 목록이다.

연도제목감독제작비고참고
1949춤추는 대뉴욕아니오진 켈리와 공동 연출[59]
1951로열 웨딩아니오[59]
1952사랑은 영원히아니오[59]
1952사랑은 비를 타고아니오진 켈리와 공동 연출, 안무[59]
19547인의 신부아니오[59]
1955언제나 맑은 날씨아니오진 켈리와 공동 연출, 안무[59]
1957퍼니 페이스아니오[59]
1957키스 뎀 포 미아니오[59]
1957파자마 게임조지 애보트와 공동 연출[59]
1958인디스크릿[59]
1958젠키스조지 애보트와 공동 연출[59]
1960다시 한번, 열정적으로![59]
1960서프라이즈 패키지[59]
1960잔디는 푸르다[59]
1963샤레이드[59]
1966아라베스크[59]
1967언제나 둘이서[59]
1967일곱가지 유혹[59]
1969계단[59]
1974어린 왕자[59]
1975럭키 레이디아니오[59]
1978무비 무비[59]
1980새턴 3[59]
1984리오의 연정[59]
1999러브 레터스아니오텔레비전 영화[59]


8. 수상 및 후보 목록

시상식연도부문후보결과출처
아카데미상1998년명예 아카데미상스탠리 도넌수상[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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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GENE KELLY: ANATOMY OF A DANCER https://www.pbs.org/[...] 2022-07-04
[3] 웹사이트 Stanley Donen [biography] http://memory.loc.go[...] 2022-07-04
[4] 서적 Dancing on the Ceiling: Stanley Donen and His Movies Knopf
[5] 서적 Stanley Donen Scarecrow Press
[6] 웹사이트 Visual History with Stanley Donen http://www.dga.org/C[...] 2011-12-28
[7] 서적 Gene Kelly: A Celebration Pavilion Books Ltd.
[8] 서적 Gene Kelly: a Biography W.H. Allen
[9] 잡지 Out to Lunch with Stanley Donen http://www.vanityfai[...] 2013-02-22
[10] 간행물 Dialogue on Film. American Film 4, #4
[11] 영화 Royal Wedding
[12] 웹사이트 Royal Wedding (1950) https://www.bfi.org.[...] BFI 2019-02-23
[13] 웹사이트 Royal Wedding http://dev.tcm.com/t[...] TCM 2021-02-24
[14] 영화 Love Is Better Than Ever
[15] 서적 Singin' in the Rain: The Making of an American Masterpiece https://archive.org/[...] University Press of Kansas
[16] 뉴스 Stanley Donen: Master of the Movie Musical https://abcnews.go.c[...] 2012-08-17
[17] 서적 Singin' in the Rain: The Making of an American Masterpiece https://archive.org/[...] University Press of Kansas
[18] 웹사이트 Kismet (1955) http://www.tcm.com/t[...] tcm.com 2011-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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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웹사이트 Charade (1963) http://decentfilms.c[...] 2011-12-28
[22] 웹사이트 Joel Siegel Reviews New Movies https://abcnews.go.c[...] ABC 2019-02-23
[23] 웹사이트 Reviews: ''Bedazzled'' https://www.rogerebe[...] 1968-01-30
[24] 웹사이트 Bedazzled Review https://lylesmoviefi[...] Lyles Movie Files 2012-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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