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 대성당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스톡홀름 대성당은 스웨덴 감라스탄에 위치한 교회로, 스톡홀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이다. 스톡홀름 증권 거래소 건물과 스톡홀름 궁전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바로크 양식의 외관을 갖추고 있다. 1306년에 봉헌되었으며, 중세 시대부터 스웨덴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대관식, 왕실 결혼식, 주요 행사와 장례식 등이 거행되었으며, 스웨덴 종교 개혁의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주요 소장품으로는 은제 제단화, 성 게오르기우스와 용 조각상, 베데르솔스타블란 그림 등이 있으며, 17세기부터 콘서트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스톡홀름 대성당은 감라스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원래 도시 전체의 교구 교회였으며 중세 도시 중심부에 건설되었다. 교회의 내부는 중세 시대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지만, 외부는 18세기에 이루어진 변화의 결과이다.[10][11]
스톡홀름 대성당(스토르키르칸)은 1279년 처음 언급된 이후 오랜 역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306년 봉헌 기록을 통해 스톡홀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알려졌지만, 그 이전의 역사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2. 위치 및 주변 환경
2. 1. 주변 건물과의 관계
스톡홀름 대성당은 감라스탄의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스톡홀름 증권 거래소 건물과 스톡홀름 궁전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교회는 궁전, 스토르토리에트 광장, 그리고 스톡홀름의 첫 번째 시청과 함께 초기 도시 개발의 핵심을 형성했다.[1][2] 왕궁, 악셀 옥센셰르나 궁전, 슬로츠바켄과 그 오벨리스크, 그리고 테신 궁전과 함께, 바로크 건축 양식의 통일된 조화를 이루는 건물군의 일부이다.[3][4] 스톡홀름 대성당은 스톡홀름 도시 경관에서 "대체 불가능한" 부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5]
스톡홀름 대성당은 세 면이 트롱순드, 스톡홀름 (서쪽), 스토르키르코브린켄과 호그바크테라센 (북쪽) 및 슬로츠바켄 (동쪽) 거리로 둘러싸여 있다.[1] 교회 바로 남쪽에는 안뜰이 있는데, 안뜰 반대편에는 증권 거래소 건물의 뒷면이 있다. 에릭 팔름스테트가 증권 거래소의 날개로 설계한 두 개의 작은 건물은 실제로 교회의 장례 예배당과 마차고로 1767년에 지어졌다.[1] 서쪽과 동쪽으로 안뜰은 벽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장식 철 세공 문을 통해 통로가 있다. 두 문 기둥 모두 원래 우화 조각으로 장식되었지만, 서쪽 문에 있는 한 쌍만 아직 제자리에 있다. 이 두 조각상은 아마도 1675년 피터 슐츠가 만든 이성(남쪽 기둥)과 신성한 사랑(북쪽 기둥)을 묘사하고 있을 것이다.[6] 예전 동쪽 문 기둥에 있던 조각상은 경계와 희망을 상징하는 여성을 묘사했는데, 이 한 쌍은 1702년 Daniel Kortz|다니엘 코르츠sv가 만들었다.[7]
스웨덴의 종교 개혁가 올라우스 페트리를 묘사한 또 다른 조각상은 교회의 동쪽 외관에 인접해 있다. 슬로츠바켄을 향하고 있으며, 스톡홀름 대성당과 공식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교회 건물군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 조각상은 1898년에 봉헌되었으며 Theodor Lundberg|테오도르 룬드베리sv가 만들었다.[8] 동쪽 외관 옆 포장도로에는 성가대석의 이전 범위를 표시하는 선이 있는데, 이는 구스타브 바사 국왕의 통치 기간에 철거되었다.[9]
2. 2. 올라우스 페트리 조각상
스웨덴 종교개혁가 올라우스 페트리를 묘사한 조각상은 스톡홀름 대성당 동쪽 외관에 인접해 있다. 슬로츠바켄을 향하고 있으며, 공식적으로는 스톡홀름 대성당과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교회 앙상블의 일부를 형성한다. 1898년에 봉헌되었으며 Theodor Lundberg|테오도르 룬드베리sv가 만들었다.[1] 동쪽 외관 옆 포장도로에는 성가대석의 이전 범위를 표시하는 선이 있는데, 이는 국왕 구스타브 바사의 통치 기간에 철거되었다.[2]
3. 건물의 역사
중세 시대에는 성 니콜라스를 주보성인으로 모셨으며, 성모 마리아와 성 에릭에게도 헌정되었다.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스웨덴의 마그누스 4세 부부의 기증 등으로 여러 예배당이 추가되며 점진적으로 확장되었고, 1474년부터 1496년 사이에는 대규모 재건축을 통해 예배당들이 통합되고 균일한 높이의 천장이 설치되었다.
16세기 스웨덴 종교 개혁은 교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가톨릭에서 루터교로 종교가 바뀌면서 교회 재산이 몰수되고 일부 조각상이 훼손되었으며,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 통치 시기에는 요새화되기도 했다.
18세기에는 니코데무스 테신 더 영거의 제안과 요한 에버하르드 칼버그의 주도로 교회의 외관이 바로크 양식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1736년부터 1745년 사이에 고딕 건축 양식에서 바로크 양식으로 변모했으며, 이후 19세기에는 네오 고딕 양식 창살이 설치되었다. 1903년부터 1909년 사이에는 에른스트 스텐함마르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져 현재의 노출된 벽돌 내부가 완성되었다. 1942년, 스토르키르칸은 스톡홀름 교구의 대성당으로 승격되었다.
3. 1. 중세 시대
스톡홀름에 교회가 있었다는 사실은 1279년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2] 1306년에는 도시 교회의 봉헌이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스토르키르칸을 스톡홀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가 되었다.[3] 따라서 교회의 초기 역사는 다소 불분명하다. 스톡홀름은 13세기에 세워졌으며, 1306년까지 도시가 기능을 하는 교회를 갖지 않았을 가능성은 낮다고 여겨진다. 또한 전통에 따르면 비르예르 얄이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1306년에 봉헌된 교회 이전에 다른 교회가 있었거나, 오랫동안 건설 중이었거나, 1306년에 재헌당되었을 가능성이 있다.[4] 어쨌든 현재 건물의 가장 오래된 부분은 1306년에 봉헌된 교회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5] 중세 시대 동안 교회의 주요 수호 성인은 성 니콜라스였다. 13세기부터 특히 한자동맹이 스톡홀름에서 그랬던 것처럼 활동했던 도시에서 성 니콜라스에게 헌정된 여러 교회가 발트해 지역에 있었다.[6] 교회는 또한 성모 마리아와 성 에릭에게도 헌정되었다.[1] 이 교회는 1590년대까지 스톡홀름의 유일한 교구 교회로 남아 도시 전체에 봉사했다.[7] 일반적으로 교회 건물의 중세 역사는 복잡하고 세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기록된 자료가 거의 없고, 장식품이 부족하여 양식적 근거로 다양한 부분의 연대를 추론하기가 어렵다.[8]
원래 교회는 두 개의 복도가 있는 본당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6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나무 천장이 있었다.[9] 건축 자재는 벽돌이었다. 주요 입구는 서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북쪽과 남쪽 벽에 측면 입구가 있었을 수도 있다.[10] 양식적으로 이 교회는 당시 멜라렌 호 주변에 세워진 벽돌 교회 집단의 일부였으며, 여기에는 스트렝네스 대성당, 시그투나의 성 마리아 교회, 스코클로스테르 교회가 포함되었다.[11] 이 교회는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재건축되고 확장되었다.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스웨덴 군주와 스톡홀름 시민 모두가 그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과시하는 방법이었다.[12]
마그누스 4세와 그의 아내 나뮈르의 블랑슈가 1346년에 교회에 기증한 것은 여러 예배당 중 첫 번째가 교회에 추가되었음을 나타낼 수 있다.[13] 이 예배당은 원래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되었으며 교회의 동쪽 끝 남쪽에 위치했다. 예배당에 속한 네 개의 만은 스토르키르칸 내부에서 여전히 식별할 수 있다.[14] 비슷한 예배당들이 대략 같은 시기에 비스비 대성당과 뤼벡의 성 마리아 교회에 건설되었다.[15] 이 예배당은 스웨덴 교회에서는 드문 초기 고딕 벽화로 장식되었다(나중에 심하게 복원됨).[16] 두 번째 예배당은 1361년 이전에 교회에 추가되었고, 15세기 초에 더 많은 예배당이 건설되었다. 중세 시대 말까지 스토르키르칸에는 30개 이상의 예배당 또는 특별히 헌정된 제단화가 있었는데, 이는 중세 스웨덴의 대성당과 비교할 수 있는 양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예배당이 추가되면서 점진적으로 성장했다. 알베르투스 픽토르가 그린 또 다른 벽화 세트가 15세기에 추가되었으며, 서남쪽 천장을 장식했다(현재 교회 바닥에서는 그림이 보이지 않음). 1474년에서 1496년 사이에 교회 대규모 재건축이 이루어졌으며, 이 때 이 예배당들을 하나의 통일된 공간으로 통합하고 새로운 볼트를 설치하여 균일하게 높은 천장을 만들었다. 교회는 대략 같은 시기에 동쪽으로도 크게 확장되었으며, 합창단도 추가되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교회가 도시의 인구 증가에 비해 너무 작아졌기 때문이다. 합창단은 16세기에 파괴되었다. 탑 또한 15세기 초에 건설되었으며, 원래는 주로 방어탑으로 사용되었다. 15세기 말까지 스토르키르칸은 현재와 같은 기본적인 형태와 크기를 갖추게 되었다.
3. 2. 종교 개혁과 이후의 변화
16세기 스웨덴 종교 개혁으로 교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가톨릭교는 폐지되고 루터교가 채택되었으며, 국가는 스토르키르칸 예배당과 제단의 은을 비롯한 교회 재산 대부분을 몰수했다.[1] 종교 개혁 시기 스웨덴 전역에서 광범위한 성상 파괴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교회 내 가톨릭 조각상 일부는 훼손되었다.[2]
1520년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가 스톡홀름에 머물 당시 교회는 요새화되었는데, 이는 1521년 스톡홀름 피바다로 이어진 정치적 긴장을 반영한다. 아담 판 뷔렌은 이 작업을 담당하며 교회 기둥 기단 장식에 사용된 우화적인 조각상을 만들었다.[3] 이 조각상은 남성과 여성 사자, 장어와 함께 의미가 불분명한 풍자적인 비문을 묘사한다.[2] 요한 3세 통치 기간에는 교회 내부 공간을 조화롭게 만들기 위해 기둥, 아치, 벽에 몇 가지 변화가 추가되었다.[4]
3. 3. 18세기 바로크 양식으로의 변화
18세기 동안 스토르키르칸의 외관은 큰 변화를 겪었다. 중세 시대의 외관은 바로크 양식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니코데무스 테신 더 영거는 외관을 보다 현대적인 스타일로 바꾸자는 제안을 내놓았다.[1] 1736년, 요한 에버하르드 칼버그가 교회 탑의 수리를 감독하기 위해 고용되었다. 곧, 그 임무는 외관의 완전한 개조와 새로운 탑 첨탑 설치로 확대되었다. 칼버그와 칼 호르르만은 왕궁 건축가로 니코데무스 테신 더 영거의 뒤를 이었는데, 즉시 새로운 탑 첨탑에 대한 여러 제안을 내놓았으며, 이는 외관을 현대화하려는 생각이 오랫동안 고려되었음을 보여준다.[2] 특히 호르르만은 교회가 궁궐 주변 환경에 양식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본 것으로 보인다.[3] 두 건축가는 서로의 교회 첨탑 디자인에 기술적인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4] 결국, 칼버그의 네 번째 새로운 첨탑 제안은 그의 아이디어와 호르르만의 아이디어 사이의 절충안이었고 채택되었으며, 칼버그는 외관의 다른 변화도 설계했다.[5] 고딕 양식에서 바로크 양식 건물로의 이러한 교회 외관 변형은 1736년에서 1745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외관은 여전히 칼버그의 작업의 결과이다.[6]
같은 세기 후반, 건축가 에릭 팜스테트가 스토르토리에트의 증권 거래소 건물을 짓는 것과 관련하여 1777년에 교회 안뜰의 남쪽 면을 재설계하면서 추가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7] 동시에, 그는 또한 교회의 서쪽 끝, 탑의 남쪽에 부착된 계단실을 설계했으며, 계단실은 1778년에 완공되었다.[8] 이러한 추가와 나중에 철거된 몇 가지 다른 추가 사항은 중세의 뿌리와 대조적으로 교회의 고전 건축적인 외관을 더욱 강조했다.[9]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는 더 나아가 교회를 완전히 철거하고 로마의 판테온에서 영감을 받은 새로운 교회로 대체하고 싶어했다.[10]
3. 4. 19세기 이후의 역사
1860년대에 창문에는 새로운 단조 창살 세공이 네오 고딕 양식으로 설치되었다.[1] 19세기 후반에는 교회의 화재 안전을 높이기 위한 몇 가지 추가적인 변경이 이루어졌다.[1] 1903년부터 1909년까지는 건축가 에른스트 스텐함마르의 지휘 아래 더 철저한 개보수가 진행되었다.[1] 특히 벽돌 기둥과 벽을 덮고 있던 백색 페인트가 제거되어, 그 이후로는 노출된 벽돌로 내부가 특징지어졌다. 이는 더 "중세적인" 내부를 재현하려는 시도였지만, 실제로는 내부가 항상 백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1] 1952년부터 1954년까지 또 다른 포괄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졌다.[1] 1942년에 이 교회는 새롭게 설립된 스톡홀름 교구의 대성당으로 승격되었다.[1]
4. 역사적 중요성과 왕실과의 관계
스토르키르칸은 스웨덴 역사에서 중요한 행사들이 열린 장소였다. 중세 시대 스톡홀름의 부와 영향력이 커지면서 왕궁과 가까운 이 교회는 웁살라 대주교와 스웨덴 국왕의 관심을 받았다. 1338년에는 투르쿠의 헤밍 주교가 스토르키르칸에서 서품을 받기도 했다.[2]
스웨덴의 종교 개혁은 스토르키르칸에서 부분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루터교가 스웨덴어로 처음 공개 설교되었고, 1525년에는 스웨덴 최초로 미사가 라틴어가 아닌 스웨덴어로 거행되었다.[2] 스웨덴 종교 개혁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올라우스 페트리는 당시 스토르키르칸의 사제였다.[2] 이후 스토르키르칸은 스톡홀름에서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교인들만 사용하게 되었고, 독일어와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교인들은 각각 독일 교회와 시청의 예배당으로 옮겨갔다.[2]
스토르키르칸은 왕족의 매장 교회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지만,[2] 20세기 동안 여러 유명 인사의 장례식이 이곳에서 열렸다. 1930년에는 실패한 안드레의 북극 기구 탐험 대원들(살로몬 아우구스트 안드레, 크누트 프뢴켈, 닐스 스트린드베르크)의 장례식이 거행되었고,[2] 최근에는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2002년 사망)과 스웨덴 아카데미 상임 서기 사라 다니우스(2019년 사망)의 장례식도 이곳에서 열렸다.[2] 1994년 MS ''에스토니아''호 침몰 사고와 2003년 안나 린드 외무부 장관 암살 사건 이후 추모 예배도 스토르키르칸에서 열렸다.[2]
스웨덴 제국 시대에는 나르바 전투 (1700년), 풀투스크 전투, 토른 포위전, 스벤스순드 해전 등 여러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가 교회에서 열렸다.[2] 신분 의회 시대에는 성직자 신분이 스토르키르칸에서 회의를 열었고,[2] 오늘날에도 스토르키르칸의 설교는 전통적으로 매년 가을 국회 개회를 알린다.[2] 중세 시대에는 스톡홀름 시의회 회의도 이곳에서 열렸다.[2]
4. 1. 대관식
이 교회는 여러 차례 스웨덴 국왕과 여왕의 대관식에 사용되었다. 스토르키르칸에서 열린 최초의 왕실 대관식은 1336년 마그누스 4세와 남르의 블랑슈의 대관식이었다. 대관식은 모든 스웨덴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타르투 주교인 Engelbert von Dolen|엥엘베르트 폰 돌렌de이 집전했다.[2] 그러나 중세 시대의 대부분의 대관식은 웁살라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2] 다음 대관식은 1497년에 덴마크의 요한 국왕이 칼마르 동맹 동안 스웨덴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른 것이었다.[2] 그의 아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는 1521년 11월 4일 스토르키르칸에서 크리스티안 국왕의 통치에 대한 스웨덴의 복종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의식에서 대관식을 치렀다.[2] 의식 동안 카를 5세 황제의 대표가 국왕에게 황금 양모 훈장을 수여했다.[2] 며칠 후 스톡홀름 피바다가 일어났다.[2]
얼마 동안 지배 군주가 스토르키르칸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것은 불길하게 여겨졌다.[2] 그러나 스웨덴의 에릭 14세와 카린 몬스도터의 결혼식과 결혼식 이후의 대관식은 1568년 스토르키르칸에서 열렸다.[2]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엘레오노라 역시 1620년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과 결혼한 후 스토르키르칸에서 스웨덴 여왕으로 대관식을 치렀다.[2] 다음으로 스토르키르칸에서 대관식을 치른 지배 군주는 130년의 공백기를 거쳐 1650년 크리스티나였다.[2] 다음 두 국왕의 대관식은 웁살라에서 열렸지만 스웨덴의 칼 12세 국왕은 1697년 대관식을 위해 다시 스토르키르칸을 선호했다.[2] 스웨덴의 프레드리크 1세 국왕의 대관식도 1720년 스토르키르칸에서 거행되었다.[2] 그 이후 스웨덴의 구스타브 4세 아돌프를 제외한 모든 스웨덴 군주의 대관식이 스토르키르칸에서 열렸다.[2] 스웨덴 군주의 마지막 대관식은 1873년 스웨덴의 오스카르 2세 국왕의 대관식으로, 스토르키르칸에서 열렸다.[2]
4. 2. 왕실 결혼식
이 교회는 여러 차례 왕실 결혼식이 거행된 장소이다.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 바사 국왕의 두 딸과 요한 3세 국왕의 아들이 이 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823년에는 미래의 스웨덴의 오스카르 1세 국왕과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세핀의 결혼식이 열렸으며, 19세기와 20세기 동안 다른 여러 왕족 구성원들도 이 교회에서 결혼했다. 2010년에는 스웨덴의 빅토리아 공주와 다니엘 베스틀링의 결혼식이 스토르키르칸에서 거행되었다.4. 3. 기타 행사
스토르키르칸은 스웨덴 역사에서 중요한 행사 장소였다. 중세 시대 스톡홀름의 부와 영향력이 커지고 왕궁과 교회가 인접해 있어 웁살라 대주교와 스웨덴 국왕의 관심을 끌었다.스웨덴의 종교 개혁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스토르키르칸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스웨덴어로 처음으로 루터교가 공개적으로 설교되었고, 스토르키르칸은 1525년에 미사가 스웨덴어(라틴어)로 거행된 스웨덴 최초의 교회였다.
이 교회는 여러 차례 스웨덴 국왕과 여왕의 대관식에 사용되었다. 스토르키르칸에서 열린 최초의 왕실 대관식은 1336년 마그누스 4세와 남르의 블랑슈의 대관식이었다. 중세 시대의 대부분의 대관식은 웁살라 대성당에서 거행되었지만, 1497년에 덴마크의 요한 국왕이 칼마르 동맹 동안 스웨덴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그의 아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는 1521년 11월 4일 스토르키르칸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며칠 후 스톡홀름 피바다가 일어났다.
스웨덴의 에릭 14세와 카린 몬스도터의 결혼식과 결혼식 이후의 대관식은 1568년 스토르키르칸에서 열렸다.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엘레오노라 역시 1620년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과 결혼한 후 스토르키르칸에서 스웨덴 여왕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1650년 크리스티나의 대관식 이후, 스웨덴의 칼 12세 국왕은 1697년 대관식을 위해 다시 스토르키르칸을 선호했다. 스웨덴의 프레드리크 1세 국왕의 대관식도 1720년 스토르키르칸에서 거행되었다. 그 이후 스웨덴의 구스타브 4세 아돌프를 제외한 모든 스웨덴 군주의 대관식이 스토르키르칸에서 열렸다. 스웨덴 군주의 마지막 대관식은 1873년 스웨덴의 오스카르 2세 국왕의 대관식이었다.
이 교회는 여러 차례 왕실 결혼식에 사용되었다.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 바사 국왕의 두 딸과 요한 3세 국왕의 아들이 스토르키르칸에서 결혼했으며, 미래의 스웨덴의 오스카르 1세 국왕과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세핀의 결혼식은 1823년 스토르키르칸에서 열렸다. 2010년, 스토르키르칸은 스웨덴의 빅토리아 공주와 다니엘 베스틀링의 결혼식 장소였다.
스토르키르칸은 왕족의 매장 교회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지만, 20세기 동안 여러 유명 인사의 장례식이 스토르키르칸에서 열렸다. 1930년 실패한 안드레의 북극 기구 탐험의 세 멤버(살로몬 아우구스트 안드레, 크누트 프뢴켈 및 닐스 스트린드베르크)의 장례식, 아스트리드 린드그렌(2002년 사망), 스웨덴 아카데미 상임 서기 사라 다니우스(2019년 사망)의 장례식이 스토르키르칸에서 열렸다. MS ''에스토니아''가 1994년 침몰했을 때, 왕족과 스웨덴 총리가 참석한 추모 예배, 2003년 외무부 장관 안나 린드의 암살 이후 추모 예배가 스토르키르칸에서 열렸다.
스토르키르칸은 다른 공공 행사에도 사용되었다. 스웨덴 제국 시대 동안 여러 군사적 승리가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기념되었다. 나르바 전투 (1700년)에서의 승리 축하 행사, 풀투스크 (1703), 토른 (1703) 및 스벤스순드 (1790)에서의 승리도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기념되었다. 신분 의회 시대 동안 성직자 신분은 일반적으로 스토르키르칸에서 회의를 열었다. 오늘날에도 스토르키르칸의 설교는 전통적으로 매년 가을 국회의 개회를 알린다. 중세 시대에 이 교회는 스톡홀름 시의회 회의에도 사용되었다.
5. 건축
스톡홀름 대성당은 벽돌을 주재료로 건축되었으며, 기초는 사암과 화강암으로 강화되었다. 외관은 바로크 양식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내부는 강당 교회 형식이다.
5. 1. 외부
교회의 건축 자재는 벽돌이며, 기초는 사암과 화강암으로 강화되었다.[1][2] 스토르키르칸은 길이가 63m, 폭은 37.2m로, 규모가 작은 편이다.[3][4] 외관은 균일하게 바로크 양식이며, 팜슈테트가 추가한 계단실만이 약간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5] 북쪽과 남쪽 정면은 부벽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필라스터로 처리되었다. 외관의 요소들은 수직보다는 수평으로 배치되어 있다. 탑과 교회의 박공은 칼베르그의 원래 제안을 단순화한 버전의 필라스터와 몰딩으로 장식되어 있다.[6] 교회의 남동쪽 모퉁이에는 16세기 해시계가 벽에 부착되어 있다.[7] 라틴어로 된 비문이 새겨진 대형 기념 명판은 18세기에 교회를 재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교회의 동쪽 벽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8] 28개의 창문이 내부로 빛을 공급한다.[9] 주요 입구는 교회 서쪽 끝에 있는 탑 기단에 있으며, 다른 입구는 북쪽 벽에, 남쪽으로 두 개의 작은 입구가 더 있다.[10]5. 2. 내부
스투르키르칸은 폭이 5칸, 길이가 8칸인 강당 교회이다.[11] 평면은 불규칙한 직사각형인데, 이는 건물의 형태가 기존의 인접한 거리에 맞춰져야 했기 때문이다. 기둥과 풍부하게 조형된 복합 기둥이 지지하는 벽돌 볼트가 내부 전체를 덮고 있다.[11] 8개의 중앙 칸은 복잡하고 특이한 디자인의 리브 볼트로 덮여 있고,[11] 교회의 나머지 부분은 맞댄 볼트로 되어 있다.[11] 내부 공간은 중앙 본당으로 구분되며, 양쪽에 열린 벤치가 있다. 성가대석 바닥은 교회의 나머지 부분보다 세 계단 높으며, 북쪽과 남쪽에 있는 연철 울타리로 제한되어 있다. 세 개의 갤러리가 내부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그중 하나에는 교회 오르간이 있다. 대부분의 창문은 투명하지만, 북서쪽 창문은 20세기에 에이나르 포르세트가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다. 동쪽 벽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장미 창은 1858년에 교회에 기증되었으며, 프랑스에서 제작되었다.[11]6. 가구 및 비품
스톡홀름 대성당에는 다양한 가구와 비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중세 시대에는 여러 개의 제단화가 있었는데, 이 중 일부는 다른 곳에 보존되어 있다. 보글뢰사 교회에 있는 제단화는 15세기에 스톡홀름 대성당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1478년에서 1481년 사이에 판매되었다. 예데르 교회에 있는 제단화도 원래 스톡홀름 대성당에 속해 있었다. 1468년 뤼베크에서 제작된 세 번째 제단화는 아마도 헤르멘 로데가 제작했으며, 스웨덴 역사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1] 또 다른 제단화는 카를 옐렌힐름이 1629년에 스톡홀름 대성당에 기증했는데, 그는 이를 현재의 폴란드에 있는 브라니에보에서 약탈해 왔다. 은제 제단화가 설치된 후 옐렌힐름의 제단화는 불필요해져 결국 기증되었다. 그 중앙 부분만 남아 있으며, 현재 클레케베르가 교회Kläckeberga kyrka|클레케베르가 쉬르카sv에 있다.[2]
6. 1. 은제 제단화
스톡홀름 대성당의 주요 제단화는 은제 제단화(silveraltaret|실베랄타레트sv)이다. 1652년 요한 아들러 살비우스의 미망인 마가레타 페데르스도테르가 기증했다.[1] 바로크 양식의 이 제단화는 함부르크의 유스타키우스 에르드뮐러의 작업장에서 흑단과 은으로 제작되었다.[2] 중앙 부분은 프레델라 위에 세 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으며 부활한 그리스도의 작은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각 층에는 은 부조 패널이 있는데, 아래에서 위로 예수의 십자가형, 예수의 매장, 죽은 자들의 영역에 있는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프레델라의 부조는 최후의 만찬을 묘사한다.[2] 십자가형을 묘사한 부조가 가장 크며, 1620년 피터 폴 루벤스의 그림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2] 독립된 은색 조각상이 중앙 패널 양쪽에 배치되어 있는데, 모세와 세례자 요한은 십자가형 패널 양쪽에, 4명의 복음사가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패널 양쪽에 위치해 있다.[2]
6. 2. 성 게오르기우스와 용

성가대 북쪽에는 거대한 후기 중세 시대의 기마상이 있는데, 이는 ''성 게오르기우스와 용''의 전설을 묘사하고 있다. 이 조각상은 스투르키르칸에서 "가장 인상적인 중세 예술 작품"이자 "가장 기묘한 기념물"로 묘사되어 왔다.[1][2] 높이는 약 3.5m이며, 용과 싸우는 기마 성인을 묘사하고 있다.[3] 부수적인 조각은 성인이 용으로부터 구출하는 공주와 상징적인 하느님의 어린 양을 묘사하고 있다.[4] 받침대는 또한 성 게오르기우스의 전설 장면으로 장식되어 있다.[5]
이 조각상은 1471년 브룬케베르크 전투에서 덴마크 군대를 상대로 승리한 후, 섭정 스텐 스투레 늙은이가 그와 그의 아내를 위한 장례 기념물로 의뢰했다.[6] 스텐 스투레는 전투 중에 군대를 보호해 달라고 성인에게 기도했다.[7] 1489년에 봉헌되었다.[8] 베르트 노트케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9][10] 이 조각상은 종교 예술 작품일 뿐만 아니라 스텐 스투레와 그의 덴마크 군대 승리를 기리는 정치적, 개인적 기념물로 해석되었으며, 아마도 그렇게 의도되었을 것이다.[11]
6. 3. 기타 중세 시대 비품
교회는 또한 노트케 또는 같은 전통에서 활동한 예술가가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는 십자가를 소장하고 있다.[1][2] 십자가는 참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이전의 다색을 잃었다.[2] 아마도 1475년에서 1500년 사이에 만들어졌을 것이다.[3][4] circa|c.la 1400년경에 만들어진 십자고상은 이전에 스토르키르칸에 속해 있었지만, 현재는 스톡홀름 중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3]교회의 세례반은 측면에 새겨진 비문에 따르면 1514년에 만들어졌다. 이는 스웨덴 중부와 북부에서 발견되는, 스타일이 유사한 세례반 그룹에 속한다. 웁랜드산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다.[3][5]
370cm 높이의 일곱 갈래 청동 촛대는 15세기 말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교회에 속해 있다.[6] 발 부분에는 사자 조각상으로, 기둥에는 두 개의 인간 얼굴로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촛대는 스웨덴에서는 드물지만(예: 룬 대성당에도 존재), 아마도 제작되었을 독일에서는 더 흔하다.[3]
1564년에는 스웨덴 군대가 노획한 가장 오래된 전쟁 전리품인 성 올라프의 투구와 박차가 스토르키르칸에 전시되었다. 1860년대에는 스웨덴 역사 박물관으로 옮겨졌다.[7]
6. 4. 베데르솔스타블란
스톡홀름을 색상으로 묘사한 가장 오래된 그림은 소위 베데르솔스타블란(Vädersolstavlan|햇무리 그림sv)으로, 1535년 올라우스 마그누스가 교회에 기증했다. 이 그림은 우르반 몰라레가 그렸다. 현재 보이는 그림은 1636년 야콥 하인리히 엘브파스가 제작한 복사본이며, 그림 속 건물 세부 사항으로 판단컨대 충실하게 재현된 것으로 보인다.[12] 이 그림은 16세기 초 스톡홀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 위에는 1535년 4월 20일 스톡홀름 상공에서 관측된 대기 광학 현상인 햇무리가 그려져 있다.[12] 1998–99년에 복원되었다.[12]
6. 5. 기타 그림
다비드 클뢰케르 에렌슈트랄이 그린 두 개의 기념비적인 그림이 있는데, 1695년에 그려진 ''십자가형''과 1696년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이다. 이 그림들은 원래 세 개의 왕관의 왕실 예배당에 전시될 예정이었지만, 성을 파괴한 화재로부터 구출되어 스톡홀름 대성당에 전시되었다. ''십자가형''의 높이는 7.4m이고, ''최후의 심판''은 10m 이상이다.[1]스톡홀름 대성당에 있는 다른 그림들 중에는 1626년 프롬보르크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묘비와 1703년 전투 후 스웨덴 군대에 의해 노획되어 칼 마그누스 스튜어트 장군에 의해 교회에 기증된, 아마도 모스크바에서 제작된 17세기의 러시아 성화인 성 니콜라스의 성화가 있다.[1]
6. 6. 왕실 예배석과 설교단
스톡홀름 대성당의 설교단은 본당 북쪽 기둥에 부착되어 있으며, 1698년에서 1702년 사이에 부르차르트 프레히트가 설계 및 제작했다. 금박을 입힌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몰딩과 릴리프로 장식되어 있다.[1] 설교단 동쪽으로 한 칸 떨어진 곳에는 두 개의 왕실 예배석이 있다. 하나는 본당 북쪽 기둥에, 다른 하나는 남쪽 기둥에 부착되어 있으며,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쪽은 장식된 나무 울타리로 막힌 좌석 공간으로, 원래 각 예배석에는 왕좌가 놓여 있었다. 각 예배석 윗부분은 모방된 드레이퍼리 형태의 배경에 천사 조각상이 받치고 있는 과장된 왕관 형태의 금박을 입힌 나무 캐노피이다. 왕족을 위해 제작된 왕실 예배석은 니코데무스 테신 더 영거가 설계하고 부르차르트 프레히트가 제작했다.[1]
6. 7. 무덤과 장례 기념물
19세기까지 교회 내 매장이 명망 있는 것으로 여겨져 교회는 무덤으로 가득 찼다.[1] 교회에는 여전히 많은 수의 장식된 무덤과 장례 기념물이 있으며, 이 중 예스페르 맷손 크루스 아프 에데비 가문의 무덤과 요한 아들러 살비우스의 무덤이 가장 정교하다.[2] 벽에는 니코데무스 테신 더 엘더, 니코데무스 테신 더 영거, 칼 구스타프 테신을 기리는 명판 등 많은 추모 명판이 부착되어 있는데, 이 명판들은 조각가 칼 밀레스가 만든 비교적 최근의 작품이다.[3]6. 8. 헌납선
스톡키르칸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헌납선 중 하나가 있다. 이 헌납선은 17세기에 제작되었으며, 현재 스톡홀름 해양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교회에는 복제품이 걸려 있다.[13][14]7. 음악
마르쿠센 & 쇠네 (Marcussen & Søn)에서 덴마크에서 제작한 스톡홀름 대성당의 오르간은 1960년에 제작되었다. 오르간의 정면은 1789년에 설계되었으며 너비가 3개 구역이다.[9]
18세기 말부터 이 교회는 콘서트 장소로 사용되어 왔다.[16] 오늘날 이 교회에는 4개의 합창단이 있다. 그 중 하나인 스톡키르칸 고스쾨르(Storkyrkans Gosskör, '스톡키르칸 소년 합창단')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15] 스톡키르칸의 오르가니스트 중 적어도 세 명은 안드레아스 듀벤(1597/98–1662), 페르디난드 젤벨 더 영거(1719–1780), 하랄드 프뤼클뢰프(1882–1918)와 같이 작곡가이기도 했다.[16]
참조
[1]
웹사이트
Storkyrkans historia
https://www.svenskak[...]
Church of Sweden
2016-10-07
[2]
웹사이트
Olavus Petri
https://sok.riksarki[...]
Svenskt biografiskt lexikon
[3]
간행물
Vigsel mellan Kronprinsessan Victoria och herr Daniel Westling
http://www.royalcour[...]
Royal Court of Sweden
2009-03-23
[4]
웹사이트
Polarforskarnas kistor i Storkyrkans dopkor
https://stockholmska[...]
Stockholm Municipality
[5]
웹사이트
Musiken präglade Astrid Lindgrens begravning
https://www.aftonbla[...]
Aftonbladet
2002-03-08
[6]
웹사이트
Drottninglik begravning för Sara Danius
https://www.svt.se/k[...]
Sveriges television
2019-11-08
[7]
서적
En granskning av Estoniakatastrofen och dess följder
https://data.riksdag[...]
1998
[8]
뉴스
Minnesgudstjänst för Anna Lindh i Storkyrkan
https://sverigesradi[...]
2003-09-11
[9]
웹사이트
Slaget vid Svensksund
https://digitaltmuse[...]
Marinmuseum
[10]
웹사이트
Storkyrkan
https://www.svenskak[...]
Church of Sweden
2020-06-01
[11]
서적
Glasmåleri. Kulturhistorisk inventering av kyrkligt glasmåleri i Växjö stift, Jönköpings län
https://www.svenskak[...]
Jönköpings läns museum
2005
[12]
웹사이트
Vädersolstavlan – en bild av Stockholm år 1535
https://stockholmska[...]
Stockholm Municipality
[13]
웹사이트
Fartygsmodell
https://digitaltmuse[...]
Maritime Museum (Stockholm)
2020-03-26
[14]
웹사이트
Modeller
https://www.sjohisto[...]
Maritime Museum (Stockholm)
2018-05-28
[15]
웹사이트
Körer
https://www.svenskak[...]
Church of Sweden
2020-06-01
[16]
웹사이트
Andreas Düben d.ä. (Ca 1597/98−1662)
https://www.swedishm[...]
Royal Swedish Academy of Music
20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