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타 이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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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스카타 이치오는 1915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정치에 입문하여, 일본 사회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다. 1963년부터 1978년까지 요코하마 시장을 지내며 미나토미라이 21 도시 재개발 등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했고, 전국혁신시장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혁신 지방자치 운동을 이끌었다. 1977년 일본 사회당 위원장이 되었으나, 당내 파벌 갈등과 노선 갈등으로 인해 지지율을 높이는 데 실패하고, 1983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시민 운동에 참여하다 199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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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타 이치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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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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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스카타 이치오 |
원어 이름 | 飛鳥田 一雄 |
로마자 표기 | Asukata Ichio |
출생일 | 1915년 4월 2일 |
출생지 |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다키가시라 정 |
사망일 | 1990년 10월 11일 |
사망지 |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
국적 | 일본 |
학력 | 주오 대학전문부 중퇴 메이지 대학 법학부 졸업 |
직업 | 변호사 |
종교 | 미상 |
친족 | 아버지: 아스카타 기이치 (요코하마시 의회 의원, 검찰관), 딸: 고이즈미 요시코 (여성 운동가) |
배우자 | 데라다 사치코 (데라다 도루 도쿄 대학 교수의 여동생)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일본사회당 → 좌파사회당 → 일본사회당 |
중의원 의원 (선거구) | 도쿄도 제1구 |
중의원 의원 (당선 횟수) | 2회 |
중의원 의원 (임기 시작) | 1979년 10월 8일 |
중의원 의원 (임기 종료) | 1983년 11월 28일 |
중의원 의원 (선거구) | 가나가와현 제1구 |
중의원 의원 (당선 횟수) | 4회 |
중의원 의원 (임기 시작) | 1953년 4월 20일 |
중의원 의원 (임기 종료) | 1963년 4월 9일 |
요코하마시 시장 (대수) | 제18대 |
요코하마시 시장 (당선 횟수) | 4회 |
요코하마시 시장 (임기 시작) | 1963년 4월 23일 |
요코하마시 시장 (임기 종료) | 1978년 3월 1일 |
일본사회당 위원장 (대수) | 제8대 |
일본사회당 위원장 (임기 시작) | 1977년 12월 13일 |
일본사회당 위원장 (임기 종료) | 1983년 9월 7일 |
2. 생애
2. 1. 정계 입문 이전
1915년 4월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카마쓰 고검장과 요코하마시의회 의장을 역임한 변호사 아스카다 기이치(飛鳥田喜一)였다.[1][11] 아스카타는 5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다리에 장애가 남았다. 이를 계기로 이름의 발음을 가즈오(かずお)에서 이치오(いちを)로 고쳤다.[1]장애를 이유로 진학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나가노 마사요시 등 다른 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가나가와현립 제일중학교(현 가나가와현립 키보우가오카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후 구제 미토 고등학교(현 이바라키 대학)에 진학하고자 입시에 응했는데 장애 때문에 불합격되었다. 아스카타는 3~4개월 정도 집에서만 머문 채 독서에만 열중했는데 특히 미하일 바쿠닌의 서적에 큰 감명을 받았다.[12]
이후 주오 대학 전문부에 진학했지만 중퇴했고, 메이지 대학 예과에 진학했다. 영화연구부에서 활동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서적을 읽고 좌익적 활동을 시작했다.[14] 1937년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15]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BC급 전범의 변호를 맡았다.
2. 2. 정치 활동
아스카타 이치오는 1949년 요코하마시의회 의원, 1951년 가나가와현의회 의원을 거쳐, 1953년 일본 사회당 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해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3] 일본 사회당 내에서는 좌파인 평화동지회에 속해 주로 군사 기지 반대와 미일 안보 조약 반대를 주장했다.[3]1963년에는 일본 사회당의 지지를 받아 요코하마 시장에 당선되었다. 전국 진보 시장 협회를 설립하는등,[3][4] 진보적인 지방자치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3] 시장 재임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시의회 보수파 의원들의 비판을 받았다. 공원, 어린이집, 환경오염 방지등의 정책을 추진했지만, 보좌관의 조명권 관련 부정부패 사건으로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반전 및 반 군사기지 발언을 계속하면서 1972년 일본의 '탱크 투쟁'을 지지했다.
1977년 나리타 도모미의 뒤를 이어 일본 사회당 당수가 되었다. 1979년 11월 미국 방문에서 사회당이 집권하더라도 미일 안보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지 않겠다고 밝히며 미일 안보 조약에 대한 당의 입장을 수정했다.[7] 1983년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하자 당수직과 정계를 은퇴했다.
2. 3. 요코하마 시장 시절 (1963-1978)
1963년 요코하마 시장 선거에서 일본 사회당의 지지를 받아 "시장실에는 문이 없다", "시민세는 중점 정책으로 시민에게 돌려준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되었다.[3] 자유민주당 후보 다나카 쇼고를 꺾고 요코하마 시장(横浜市長)에 당선된 이후, 전국에서 혁신 지방자치단체장이 연이어 탄생하면서 아스카타는 혁신자치체의 리더로 여겨졌다. 1964년에는 전국혁신시장회를 결성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3][4]요코하마 시장으로서 1만 시민 집회 등을 통해 주민 참여를 확대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다.[3] 이는 시의회를 경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시의원 경험이 있던 아스카타는 시의원들의 역량에 대한 불신이 커 직접 민주제를 중시했다.

또한 공원이나 보육 시설과 같은 사회자본을 확충하고, '시민의 숲' 제도 등 녹화 사업을 추진했다. 고정자산세를 줄이고, 탄생 시 나무를 심는 “오겨어 식수(おぎゃあ植樹)”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시장 권한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쓰마고이촌 양배추, 이시가키섬 소고기, 소련산 유엽어를 직거래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쓰마고이 촌 양배추는 상한 가격을 정해 판매하고 시 예산으로 손해를 보전했으며, 이스가키섬 쇠고기 직거래도 시행했다.
대규모 택지 개발에 대응하기 위해 택지개발요강과 같은 재량 행정(요강행정)을 추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조권 비리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노조 출신 공무원이 건설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아 체포되는 등 스캔들이 발각되면서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반전·반기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2년 8월 전차 투쟁(전차반출저지투쟁)을 통해 미군 전차 수송을 방해했다. 무라사메바시 사건(무라사메바시 투쟁)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가나가와구의 무라우바시와 사가미하라시의 사가미 종합보급창 앞에서 많은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고, 기동대가 배치되기도 했다. 차량제한령에 근거해 시도를 관리하는 시장 자격으로 통행제한명령을 내렸으나, 내각에서 정령을 개정하여 주일 미군 차량에는 통행제한명령을 내리지 못하도록 바뀌었다.
1978년 퇴임 시, 시장 특별 수당 1억 2,888만 엔을 반환하고 일반 공무원 기준 퇴직금 1,592만 엔만 받았다.
또한, 미국 대통령 보좌관에 해당하는 젊은 인재들을 공무원으로 영입하여 부처 간 칸막이 행정을 타파하는 데 앞장섰다.[27] 당시 법정치의 1/2~3/4를 밑도는 이소고 화력발전소(磯子火力発電所)의 매연 규제, 당시 대기오염의 주범이었던 일본강관(日本鋼管)(현 JFE홀딩스(JFEホールディングス)) 경함 제철소의 해상 이전 계획에 대한 대책협의회 설치를 가나가와현(神奈川県)과 가와사키시(川崎市)에 요청하는 등 공해 규제와 공원 등 사회기반시설 정비 면에서도 시장으로서의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요코하마시(横浜市)의 기반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요코하마 시 6대 사업'(横浜市六大事業)을 추진했다.
# 요코하마 미나토미라이 21(横浜みなとみらい21)(미나토미라이 21)을 중심으로 한 도심 강화 사업
# 이와 연계된 가나자와 지역 매립 사업
# 코호쿠 뉴타운(港北ニュータウン) 사업
# 간선도로 사업
# 요코하마 시영 지하철(横浜市営地下鉄) 사업
# 요코하마 베이브리지(横浜ベイブリッジ) 사업
특히 미나토미라이 21 사업은 미쓰비시 중공업 요코하마 조선소(三菱重工横浜造船所)의 이전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실현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아스카타 사후 계획대로 완성되었다.
아스카타가 추진한 요코하마 시내 간선도로 정비에 있어 요코하마 시전(横浜市電) 폐지를 결단하면서 "마이카족의 이기심에 휘둘렸다(マイカー族のエゴにやられちゃったよ)"라고 회고했다고 한다.[29]
또한 飛鳥田는 "요코하마 공원(横浜公園)에 프로야구 공식 경기를 할 수 있는 야구장을 짓고 싶다", "그 신구장을 프로야구팀의 본거지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여, 현재의 요코하마 스타디움(横浜スタジアム) 건설을 추진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사회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시청 직원 노동조합(労働組合)에 관대하여 시청 직원 급여(給与)의 대폭 인상으로 재정을 압박했고, 당시 전국 정령지정도시(政令指定都市) 중 최저 수준이었던 환상도로(環状道路) 정비 상황 등도 해결하지 못한 채 임기를 마쳤다.
2. 4. 일본 사회당 위원장 시절 (1977-1983)
1977년 12월 13일 사회당은 제41회 정기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위원장 나리타 도모미는 제1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패배한 책임을 지고 사임 의사를 밝혔고, 후임 위원장으로 아스카타 이치오가 선출되었다. 아스카타는 다음 해 3월 상순에 요코하마 시장직에서 물러났는데, 사임에 반대하는 시위가 거세 고향인 요코하마가 아니라 도쿄에서 총선에 출마해야 했다. 1978년 12월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 때는 제1야당 대표가 국회의원 신분이 아니었기에 사회당은 부위원장 시모다이라 쇼이치에게 투표했다.1979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는,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가 노동운동가 오타 가오루를 무리하게 밀어붙여, 전 중의원 의원 아소 요시카타가 반발해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바람에 혁신계 표가 갈리면서 자민·공명·민사 3당의 공천을 받은 스즈키 슌이치가 당선됐다. 같은 해 10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아스카다는 도쿄도 1구에 출마해 당선됐지만, 고향인 요코하마를 등지고 기반이 다져지지 않은 도쿄에 출마하면서 위원장으로서 다른 사회당 후보의 지지 유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고 이는 아스카타의 당내 구심력이 저하하는 데 영향을 줬다.
아스카다는 위원장에 취임하는 조건으로 모든 당원이 참여하는 위원장 직선제 도입을 이루어냈고, 열린 정당을 지향하며 이탈리아 공산당의 카드 당원에서 힌트를 얻어 백만 당원 건설 운동을 전개해 당원 확충에 힘을 쏟았다. 또한 1983년 제1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때 사회당과 일치하는 정책을 내건 58개 시민단체와 정치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사회당은 사회주의협회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와 갈등을 빚는 의원들이 많았고, 이들은 당내에서 사회주의협회의 세력을 배제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아스카다는 이를 위해 교조주의적이라고 비판받는 당의 강령 「일본에서 사회주의로의 길」을 개정했다. 또한 총평의 압력도 있었기에 1980년 공명당과 연립 정권을 구상하고 이후 민사당까지 끌어들여 사공민 노선을 내세워 자민당을 압박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사회당의 오랜 공투 대상이던 일본공산당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되었다.
1980년 5월 제2차 오히라 내각에 대한 내각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했다. 당시 자민당은 주류파인 오히라 마사요시·다나카 가쿠에이와 비주류인 후쿠다 다케오·미키 다케오 간의 격렬한 다툼이 전개되고 있었기에 사회당이 제출한 불신임 결의안이 자민당 비주류파의 기권으로 통과되었다. 오히라는 즉시 중의원을 해산하여 양원 동시 선거가 이루어졌다. 사회당은 "자민당은 금권으로 부패한 군사 대국의 길을 가려고 한다"라며 자민당을 공격했지만 사공민 노선으로 사회당과 척을 지게 된 공산당은 "사회당은 반혁명 세력이다"라며 사회당을 비판했다. 민사당은 자민당과의 협조를 고려하여 "사회당의 방위 정책이 불명확하다"라며 비판에 가세했다. 선거 도중에 오히라가 급사하자 자민당에게 동정표가 몰려 자민당이 유례없는 대승을 거두었고 아스카다는 당선엔 성공했지만 자민당의 요사노 가오루와 오쓰카 유지에게 밀려 3등에 그쳐야 했다. 당내에선 아스카타가 총리대신이 되긴 힘들 거라는 얘기도 나왔다. 또한 사회당의 전직 의원이던 가토 기요마사가 4등으로 낙선하면서 가토의 지지자들이 아스카타를 성토했고 가토는 사회당을 탈당해 자민당으로 당적을 옮기게 된다.
1981년 12월 위원장 선거에서 사회주의협회, 삼월회, 가쓰마타 세이이치 파벌 등의 지지를 받아 위원장 재선에 성공했다. 아스카다는 우파적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 공명당과의 공투를 이어나가는 것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고 68%의 득표율을 올리면서 무토 산지와 시모다이라를 여유롭게 이겼다.
1982년 좌파 성향의 바바 노보루를 서기장에 발탁하자 우파가 반발했고 또 다시 아스카타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 1983년 참의원 선거 때 사회당이 패배하자 결국 위원장을 사임했고 이와 함께 정계도 은퇴했다.
2. 5. 정계 은퇴 이후
아스카타 이치오는 제2차 아쓰기 기지 소음 공해 소송에 참여해 시민들을 변호하는 등 시민 운동을 이어나갔다. 만년에 쓴 회고록에서 "보수와 혁신으론 더 이상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이데올로기는 중요하지만 지금과 같은 의식으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항하는 건 어렵다"라고 말했다.1990년 10월 뇌경색으로 가마쿠라시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3. 평가 및 영향
아스카타 이치오는 요코하마 시장 재임 시절 미나토 미라이 21 도시 재개발 마스터 플랜과 같은 업적을 남겼지만, 일본 사회당 위원장으로서는 당의 지지율을 높이는 데 실패했다.[3] 사회당은 아스카타의 지도 아래 정치 중도로 이동하기도 했으나,[8] 1977년 12월 지지율은 13.2%에 불과했다.
아스카타는 당내 파벌 항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위원장직을 맡아, 서기들에게 파벌 대립 중단, 정시 출근, 책상 정리를 지시하는 등 기강 확립에 힘썼다.[39] 외교적으로는 소원했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과의 교류를 재개하고,[40] 미국을 방문하여 월터 몬데일 부통령과 의견을 교환했다.[41] 그러나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의 관계는 프랑스의 중동 무기 수출 문제로 소원해졌다.[4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방문 당시 주체사상과 김일성을 칭송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비판을 받았다.[43] 그는 "주체사상은 ... 일본과 세계 각지에서 널리 연구되고 각국 인민의 투쟁을 고무하는 사상이 되고 있다", "나는 ... 김일성 주석에게 지금도 반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그러나 사회당 본부 중앙 집행위원을 지낸 후나바시 시게유키(船橋成幸)는 아스카타가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매우 싫어했으며, 북한 측의 찬양 요구에도 굽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44][22]
아스카다는 1987년 회고록에서 이시카와현 노토반도 연안의 일본해에 출몰하는 북한 공작선에 대해 언급하며, 위원장 시절(1978년 2월경) 현지 어민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했다고 밝혔다.[45]
위원장 시절 관리 파시즘을 제기하며, 프롤레타리아라는 좁은 개념을 넘어선 모든 계급을 포함한 원동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46]
1977년 12월 14일에는 방송에서 "사회당은 특수 부락"이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으나, 곧바로 사과하고 차별 부락 지역 이름을 언급하며 문제 해결 의지를 보였다.[47]
3. 1. 비판
아스카타 이치오는 요코하마 시장 재임 시절 미나토 미라이 21 도시 재개발 마스터 플랜과 같은 업적을 남겼지만, 일본 사회당 위원장으로서는 당의 지지율을 높이는 데 실패했다.[3] 사회당은 아스카타의 지도 아래 정치 중도로 이동하기도 했으나,[8] 1977년 12월 지지율은 13.2%에 불과했다.아스카타는 당내 파벌 항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위원장직을 맡아, 서기들에게 파벌 대립 중단, 정시 출근, 책상 정리를 지시하는 등 기강 확립에 힘썼다.[39] 외교적으로는 소원했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과의 교류를 재개하고,[40] 미국을 방문하여 월터 몬데일 부통령과 의견을 교환했다.[41] 그러나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의 관계는 프랑스의 중동 무기 수출 문제로 소원해졌다.[4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방문 당시 주체사상과 김일성을 칭송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비판을 받았다.[43] 그는 "주체사상은 ... 일본과 세계 각지에서 널리 연구되고 각국 인민의 투쟁을 고무하는 사상이 되고 있다", "나는 ... 김일성 주석에게 지금도 반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그러나 사회당 본부 중앙 집행위원을 지낸 후나바시 시게유키(船橋成幸)는 아스카타가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매우 싫어했으며, 북한 측의 찬양 요구에도 굽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44][22]
아스카다는 1987년 회고록에서 이시카와현 노토반도 연안의 일본해에 출몰하는 북한 공작선에 대해 언급하며, 위원장 시절(1978년 2월경) 현지 어민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했다고 밝혔다.[45]
위원장 시절 관리 파시즘을 제기하며, 프롤레타리아라는 좁은 개념을 넘어선 모든 계급을 포함한 원동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46]
1977년 12월 14일에는 방송에서 "사회당은 특수 부락"이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으나, 곧바로 사과하고 차별 부락 지역 이름을 언급하며 문제 해결 의지를 보였다.[47]
4. 요코하마 시장으로서의 아스카타 이치오
아스카타 이치오는 1963년 요코하마시장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후보를 꺾고 당선된 후, 전국혁신시장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혁신자치체의 리더로 활동했다.[26] 시장 재임 기간 동안 주민 참여를 위한 직접 민주제를 실현하고자 노력했으며, 공원 및 보육 시설 확충, 녹화 사업 추진 등 사회 자본 확충에 힘썼다.[26]
요코하마 시장으로서 아스카타 이치오는 다음과 같은 주요 정책들을 추진했다.
- 도심 재개발: 미나토미라이 21 사업을 추진하여 미쓰비시 중공업 요코하마 조선소 이전을 포함한 대규모 도심 재개발을 기획했다. 이 사업은 아스카타 이치오 시장 퇴임 이후에 완성되었다.
- 교통 정책: 요코하마 시영 지하철 건설을 추진하고, 요코하마 베이브리지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 환경 정책: 이소고 화력발전소의 매연 규제를 강화하고, 당시 대기오염의 주범이었던 일본강관(현 JFE홀딩스) 제철소의 해상 이전 계획을 추진했다.
- 시민 참여: 시민의 숲 조성, 오겨어 식수(출생 기념 식수) 제도 도입 등 시민 참여를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반전·반기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미군 전차 수송을 방해하는 전차 투쟁을 주도하기도 했다.[3]
이러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요코하마 스타디움 건설을 추진하였으며, 다이요 호에일즈(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요코하마 이전을 성사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였다.[35]
하지만, 사회당 출신 시장으로서 시청 직원 노동조합에 관대하여 시 재정을 압박했다는 비판과, 전국 정령지정도시 중 최저 수준이었던 환상도로 정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5. 일본 사회당 위원장으로서의 아스카타 이치오
아스카타 이치오는 1977년 12월 나리타 도모미의 뒤를 이어 일본 사회당 위원장에 취임했다.[3] 취임 당시 사회당은 파벌 간의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아스카타는 당 개혁을 위해 노력했다.[39] 위원장 직선제를 도입하고, '백만 당원 건설 운동'을 전개하여 당원 확충에 힘썼다.[3]
아스카타는 당 노선을 사공민 노선으로 전환하여 공명당, 민사당과의 연립 정권을 추진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일본공산당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3] 1980년 양원 동시 선거에서 사회당은 참패했고, 아스카타는 당내 입지가 약화되었다.[3]
외교적으로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과 교류를 재개하고,[40] 미국을 방문하여 월터 먼데일 부통령과 회담하는 등[41]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미일 안보 조약에 대한 입장 변화를 시사하면서도, 기존의 반대 입장을 완전히 철회하지는 않았다.
1983년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패배하자 아스카타는 위원장직을 사임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3]
6. 역대 선거 기록
선거명 | 실시년도 | 회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총선거 | 1952년 | 25회 | 중의원 의원 | 가나가와현 1구 | 좌파사회당 | 43,245표 (11.2%) | 5위 | 낙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53년 | 26회 | 중의원 의원 | 가나가와현 1구 | 좌파사회당 | 71,680표 (20.1%)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55년 | 27회 | 중의원 의원 | 가나가와현 1구 | 좌파사회당 | 74,689표 (18.0%)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58년 | 28회 | 중의원 의원 | 가나가와현 1구 | 일본사회당 | 86,404표 (17.6%)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60년 | 29회 | 중의원 의원 | 가나가와현 1구 | 일본사회당 | 141,354표 (29.2%)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시장 선거 | 1963년 | 5회 | 요코하마시장 |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 일본사회당 | 279,964표 (42.86%) | 1위 | 당선 | |
시장 선거 | 1967년 | 6회 | 요코하마시장 |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 일본사회당 | 465,374표 (62.02%) | 1위 | 당선 | |
시장 선거 | 1971년 | 7회 | 요코하마시장 |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 일본사회당 | 663,543표 (69.85%) | 1위 | 당선 | |
시장 선거 | 1975년 | 8회 | 요코하마시장 |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 일본사회당 | 764,701표 (69.52%) | 1위 | 당선 | |
총선거 | 1979년 | 35회 | 중의원 의원 | 도쿄도 1구 | 일본사회당 | 50,823표 (21.23%)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80년 | 36회 | 중의원 의원 | 도쿄도 1구 | 일본사회당 | 50,142표 (17.04%)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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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奈川県の被差別部落
三一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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