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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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는 기원전 2세기 셀레우코스 제국의 반란 왕으로,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지원을 받아 데메트리오스 2세에 대항하여 시리아의 왕위를 주장했다. 그는 이집트 상인의 아들이라는 설과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들이라는 설 등 출신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며, '자비나스'라는 이름은 '사서 온 노예'라는 뜻으로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때 시리아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으나, 안티오코스 8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당하면서 그의 통치는 종말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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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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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알렉산드로스 2세 테오스 에피파네스 니케포로스 |
로마자 표기 | Aléxandros II Theós |
그리스어 | Ἀλέξανδρος Θεός Ἐπιφανής Νικηφόρος |
통치 | |
칭호 | 시리아의 왕 (셀레우코스 제국) |
재위 기간 | 기원전 128년 – 기원전 123년 |
선임자 | 데메트리오스 2세 |
후임자 | 클레오파트라 테아, 안티오코스 8세 |
생애 | |
출생 추정 시기 | 기원전 150년경 |
사망 시기 | 기원전 123년 |
왕조 | 셀레우코스 왕조 |
아버지 | 아마도 알렉산드로스 1세 |
2. 역사적 배경
기원전 2세기 후반, 셀레우코스 제국은 오랜 왕위 계승 분쟁과 파르티아 제국의 침공으로 인해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는 파르티아에 포로로 잡혔다가 기원전 129년에 풀려나 왕위를 되찾았으나, 그의 복귀는 제국 내외의 새로운 갈등을 촉발했다.
동시에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그의 누이이자 전 부인인 클레오파트라 2세 사이에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클레오파트라 2세는 자신의 사위인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이집트 왕위 계승권까지 제안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기원전 128년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진격했다.
데메트리오스 2세의 이집트 개입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는 데메트리오스 2세를 시리아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방책으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위를 주장하는 새로운 경쟁자를 내세우기로 결정했다. 이때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지원을 받아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였다.[1][2]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를 셀레우코스 왕위 주장자로 공식 인정하고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여 시리아로 보냈다. 이 조치는 성공을 거두어, 데메트리오스 2세는 이집트 원정을 중단하고 시리아 내부의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알렉산드로스 2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불안정한 내부 사정과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권력 투쟁이라는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역사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2. 1. 셀레우코스 왕조의 분열




기원전 175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왕위를 불법적으로 계승하면서 왕조의 위기가 시작되었다. 셀레우코스 4세의 적법한 상속자인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는 당시 로마 공화국에 인질로 잡혀 있었고, 셀레우코스 4세의 어린 아들 안티오코스가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안티오코스 4세는 공동 통치자가 되어 왕위를 찬탈했고, 기원전 170/169년경 조카인 어린 안티오코스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164년 안티오코스 4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 5세 에우파토르가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3년 뒤인 기원전 161년, 로마에서 탈출한 데메트리오스 1세가 왕위를 되찾고 안티오코스 5세를 살해했다. 이로써 셀레우코스 왕조는 셀레우코스 4세 계열과 안티오코스 4세 계열로 나뉘어 극심한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다.
기원전 150년, 안티오코스 4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가 등장하여 데메트리오스 1세를 폐위시키고 살해했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와 동맹을 맺고 그의 딸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결혼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곧 입장을 바꿔 데메트리오스 1세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를 지지했고, 클레오파트라 테아를 알렉산드로스 1세와 이혼시킨 뒤 데메트리오스 2세와 결혼시켰다. 결국 알렉산드로스 1세는 기원전 145년 프톨레마이오스 6세에게 패배하여 살해당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6세 역시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그의 누이이자 클레오파트라 테아의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1세의 측근이었던 디오도토스 트리폰은 기원전 144년 알렉산드로스 1세의 어린 아들 안티오코스 6세 디오니소스를 왕으로 내세웠다가, 기원전 142년에 그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를 찬탈했다. 트리폰은 안티오케이아를 포함한 제국의 서부 지역을 장악했지만, 데메트리오스 2세는 여전히 왕국의 상당 부분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141년 파르티아 제국이 바빌로니아를 침공했고, 데메트리오스 2세는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다가 기원전 138년에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데메트리오스 2세가 파르티아에 포로로 잡히자 그의 동생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가 왕위를 계승하고 형의 아내였던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결혼했다. 안티오코스 7세는 트리폰과 파르티아를 연이어 격파하며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토를 상당 부분 회복했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클레오파트라 2세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자로 선포했다. 이에 분노한 클레오파트라 2세는 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131년까지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이집트 대부분을 장악했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키프로스로 도피해야 했다. 파르티아는 안티오코스 7세를 견제하기 위해 포로로 잡고 있던 데메트리오스 2세를 석방했다. 안티오코스 7세는 기원전 129년 메디아에서 파르티아 군대와 싸우다 전사했고, 데메트리오스 2세는 그해 시리아로 돌아와 왕위와 아내 클레오파트라 테아를 되찾았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추방된 지 2년 만에 이집트로 돌아와 누이 클레오파트라 2세와의 전쟁을 재개했고,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했다. 위기에 처한 클레오파트라 2세는 사위인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이집트 왕위를 제안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이집트로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여 기원전 128년 봄에는 국경 도시 펠루시움에 도달했다.
이에 대응하여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시리아에서 데메트리오스 2세에 대항하는 반란을 부추겼다. 당시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케이아는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안티오코스 7세의 어린 아들을 잠시 왕으로 인정하기도 했으나, 곧 다른 인물을 찾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데메트리오스 2세를 이집트에서 철수시키기 위해 알렉산드로스 2세라는 인물을 반왕(맞서 싸우는 왕)으로 내세워 시리아로 보냈다.[1][2] 역사가 포르피리오스와 트로구스의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후원을 받았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시리아인들이 직접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왕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그가 알렉산드로스 2세를 선택했다고 기록했다. 트로구스의 역사서 서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데메트리오스 2세에 맞서기 위해 알렉산드로스 2세를 매수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는 본래 이집트 상인 프로타르코스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스스로는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의 양자 또는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1][2] 그는 파르티아에게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빼앗기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세력을 일으켰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자신의 누이이자 정적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동맹을 맺은 데메트리오스 2세를 견제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 2세를 괴뢰 왕으로 내세웠다.[1] '자비나스(Zabinas)'라는 별명은 셈어에서 유래한 말로 "사들여진 노예"라는 뜻인데,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의 관계 때문에 붙여진 멸칭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128년, 알렉산드로스 2세는 안티오케이아를 점령했으며[2], 안티오케이아와 아파메아 등 일부 도시들은 데메트리오스 2세의 통치에 대한 반감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2세를 왕으로 인정했다.
2. 2. 안티오코스 7세와 데메트리오스 2세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의 측근이었던 디오도토스 트리폰은 기원전 144년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6세를 왕으로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트리폰은 기원전 142년에 안티오코스 6세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트리폰은 안티오크를 포함한 셀레우코스 제국 서부 지역을 장악했으나, 데메트리오스 2세는 여전히 제국의 상당 부분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141년 파르티아 제국이 바빌로니아를 침공하면서 데메트리오스 2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파르티아에 맞서 원정을 시작했지만, 기원전 138년에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그의 동생인 안티오코스 7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데메트리오스 2세의 아내였던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결혼했다. 안티오코스 7세는 트리폰을 격파하고 파르티아를 상대로 군사적 성공을 거두며 잃어버렸던 셀레우코스 영토를 일부 회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파르티아는 안티오코스 7세를 압박하기 위해 포로로 잡고 있던 데메트리오스 2세를 석방했다. 결국 안티오코스 7세는 기원전 129년 미디아에서 벌어진 파르티아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로 인해 데메트리오스 2세는 같은 해에 다시 왕위와 아내 클레오파트라 테아를 되찾을 수 있었다.
2. 3. 이집트의 정세 변화
기원전 145년,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사망하자 그의 누이이자 공동 통치자였던 클레오파트라 2세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결혼하여 그를 새로운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기원전 141년과 140년 사이에 클레오파트라 2세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딸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추가로 결혼하고 공동 통치자로 선포하면서 이집트 왕실 내 갈등의 씨앗을 뿌렸다.
이러한 조치는 결국 클레오파트라 2세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반란을 일으켜 이집트 시골 지역을 장악했고, 기원전 131년 9월경에는 수도 알렉산드리아 민심마저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서 등을 돌렸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키프로스로 도망쳐야 했다.
한편, 셀레우코스 제국에서는 파르티아 제국에 포로로 잡혀 있던 데메트리오스 2세가 기원전 129년에 석방되어 왕위를 되찾았다. 이집트에서 권력을 장악한 클레오파트라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사위인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이집트 왕위를 제안하기까지 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이집트로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여 기원전 128년 봄에는 국경 도시 펠루시움에 도달했다.
궁지에 몰린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데메트리오스 2세의 개입에 맞서기 위한 반격에 나섰다. 그는 먼저 시리아에서 데메트리오스 2세에 대항하는 반란을 부추겼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라는 인물을 새로운 셀레우코스 왕으로 내세워 시리아에 보냈다. 이는 데메트리오스 2세가 이집트에서 철수하도록 압박하기 위한 조치였다. 고대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데메트리오스 2세에 대항하기 위해 사들였거나[1], 혹은 시리아인들의 요청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보낸 인물이었다. 그의 별명 "자비나스(Zαβίνας|Zavínasgrc)"는 셈어로 "사들여진 노예"를 의미하는데,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의 관계를 암시하는 경멸적인 호칭이었다.[1]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지원을 받은 알렉산드로스 2세는 기원전 128년 안티오크를 점령하고[2], 기원전 126년에는 다마스쿠스 근교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 2세를 격파하는 등 초기 성공을 거두었다.[1]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지원을 끊고, 오히려 데메트리오스 2세의 아내였던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그녀의 아들 안티오코스 8세와 손을 잡았다.[1] 이처럼 이집트 내부의 복잡한 권력 투쟁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위 계승 문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는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등장하고 몰락한 인물이었다.
2. 4. 알렉산드로스 2세의 등장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그의 누이이자 전 부인인 클레오파트라 2세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키프로스로 도망쳤고, 알렉산드리아에 포위된 클레오파트라 2세는 자신의 사위인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이집트 왕위를 제안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기원전 128년 봄,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진격하여 국경 도시 펠루시움에 도착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데메트리오스 2세를 견제하기 위해 시리아에서 반란을 부추겼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2세를 반왕으로 내세워 시리아로 보냈고, 결국 데메트리오스 2세는 이집트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는 본래 이집트 상인 프로타르코스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스스로는 안티오코스 7세의 양자 또는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1][2] 그의 칭호인 '자비나스(Ζαβίνας|자비나스ell)'는 셈어에서 유래한 말로 "사들여진 자" 또는 "노예"를 의미하며,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의 관계 때문에 붙여진 경멸적인 별명으로 여겨진다.[1] 요세푸스에 따르면 시리아인들이 직접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왕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그가 알렉산드로스 2세를 선택했다고도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지원을 받은 알렉산드로스 2세는 기원전 128년 안티오키아를 점령했다.[2] 안티오키아와 아파메아를 비롯한 일부 도시들은 데메트리오스 2세의 통치에 대한 반감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2세를 왕으로 인정했다.
3. 출신과 이름
알렉산드로스 2세는 기원전 150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이름 '알렉산드로스'는 고대 그리스어로 "인간의 보호자"를 의미한다.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고대 기록들 사이에 상반된 내용이 전해진다. 역사가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2세는 프로타르쿠스라는 이집트 상인의 아들이었으며, "알렉산드로스"라는 이름은 시리아인들이 그에게 부여한 왕명이고 그가 안티오코스 7세의 양자라는 이야기는 조작된 것이라고 한다. 반면, 포르피리오스는 알렉산드로스 2세가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다른 설명을 제시했다.
알렉산드로스 2세는 '자비나스(Ζαβίνας|자비나스grc)'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다" 또는 "얻다"를 의미하는 아람어 동사에서 파생된 셈어 이름이다. 이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포르피리오스는 알렉산드로스 2세가 시리아인들에게 "사서 온 노예"였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고 기록했으며, 언어학자 피에르 주게는 이를 "시장에서 팔린 노예"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역사학자 필립 쿠리 히티와 화폐학자 니콜라스 L. 라이트 등은 에스라기에 등장하는 유사한 이름을 근거로, 본래 "신에게서 사들인 자"라는 종교적인 의미를 가졌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의 출신과 이름의 의미에 대한 논란은 그의 정통성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3. 1. 다양한 출신 기록



알렉산드로스 2세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역사가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2세는 프로타르쿠스라는 이집트 상인의 아들이었다. 유스티누스는 또한 "알렉산드로스"라는 이름은 시리아인들이 그에게 부여한 왕명이며, 그가 안티오코스 7세의 양자라는 이야기는 조작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별명인 "자비나스(Zαβίνας|Zavínasgrc)"는 셈어에서 유래한 말로 "사들여진 노예"라는 의미이며,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의 관계 속에서 그의 출신을 낮춰 부르기 위해 사용된 멸칭으로 해석된다.[1]
반면, 포르피리는 알렉산드로스 2세가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다른 설명을 제시했다. 현대 역사 연구에서는 초기에는 알렉산드로스 2세의 부계에 대한 주장과 안티오코스 7세와의 연관성에 대한 유스티누스의 자세한 설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2세가 발행한 주화들은 다른 가능성을 시사한다. 기원전 125년에 발행된 금 스타테르 연작에는 그의 별칭 '에피파네스'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버지인 안티오코스 4세가 사용했던 별칭과 동일하며, 안티오코스 4세의 동전과 같은 순서로 배열되었다. 스타테르 뒷면에는 제우스가 니케 여신을 들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니케는 안티오코스 4세 주화의 특징인 별칭 ''에피파네스''를 상징하는 월계관을 들고 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 2세의 주화에는 안티오코스 4세 가문의 특징들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기원전 150년 알렉산드로스 1세가 사용했던 신 디오니소스 도상과 사자 가죽을 쓴 모습은 알렉산드로스 1세의 주화에서도 발견되는 요소이다. 더 나아가 알렉산드로스 2세는 방사형 왕관을 쓴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안티오코스 6세의 초상화 특징과 유사하다. 이러한 주화 증거들을 바탕으로, 알렉산드로스 2세가 알렉산드로스 1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포르피리의 설명이 유스티누스의 설명보다 설득력이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3. 2. '자비나스'라는 이름의 의미
알렉산드로스 2세의 성(姓)은 동전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고대 문헌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이 성은 여러 철자로 표기되는데, 라틴어 ''필리피카 역사''(''Philippic Histories'') 제39권 서문에는 "Zabinaeus"로, 요세푸스는 "Zebinas"를 사용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나 포르피리오스 같은 많은 역사가들은 그리스어 표기인 Ζαβίνας|자비나스grc를 사용했다."자비나스"는 "사다" 또는 "얻다"를 의미하는 아람어 동사 'זבן|자븐arc'에서 유래한 셈어 이름이다. 이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언어학자 피에르 주게는 포르피리오스의 기록을 근거로 '자비나스'가 "시장에서 팔린 노예"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포르피리오스는 알렉산드로스 2세가 시리아인들에게 "사서 온 노예"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기록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 2세를 내세운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의 관계 속에서 붙여진 멸칭일 수 있다는 해석과 연결된다.[1] 그러나 고고학자 장-앙투안 레트론은 왕을 조롱하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 대중을 위한 동전에 새겨질 리 없다고 주장하며 이 해석에 의문을 제기했다.
반면, 역사학자 필립 쿠리 히티는 '자비나스'의 다른 표현인 'Zebina'가 에스라기 (10:43)에 등장하며, 이는 본래 "신에게서 사들인"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화폐학자 니콜라스 L. 라이트 역시 '자비나스'가 "신에게서 사들인"을 뜻한다고 보았다. 라이트는 알렉산드로스 2세가 알렉산드로스 1세의 사생아로, 사제가 되도록 정해졌기 때문에 '신에게서 사들여진 자'라는 의미의 '자비나스'로 불렸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3. 3. 정통성 논란
알렉산드로스 2세의 출신에 대해서는 고대 기록부터 의견이 엇갈린다. 유스티누스는 그가 프로타르쿠스라는 이집트 상인의 아들이며, 안티오코스 7세의 양자라는 이야기는 조작된 것이라고 기록했다. 반면, 포르피리오스는 알렉산드로스 2세가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유스티누스의 기록을 따라 알렉산드로스 2세를 셀레우코스 왕조의 정통 후계자가 아닌 사칭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별명인 '자비나스(Ζαβίνας|Zabínasgrc)'는 셈어로 "사들여진 자"를 의미하는데, 포르피리오스는 시리아인들이 그를 "사서 온 노예"라는 경멸적인 의미로 불렀다고 기록했다. 이는 그가 왕족 출신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여겨진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2세가 실제로는 정통 셀레우코스 왕조의 후손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반론과 증거들도 존재한다. 그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포르피리오스의 기록과 알렉산드로스 2세가 발행한 동전의 도상학적 특징에 주목한다.
- 동전 증거: 알렉산드로스 2세의 동전에는 안티오코스 4세, 알렉산드로스 1세, 안티오코스 6세 등 그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왕들의 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기원전 125년에 발행된 금 스타테르에는 안티오코스 4세가 사용했던 별칭이 같은 순서로 새겨져 있으며, 뒷면의 제우스가 들고 있는 니케는 안티오코스 4세의 별칭 '에피파네스'를 상징하는 월계관을 들고 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 1세의 동전처럼 디오니소스 숭배나 사자 가죽을 쓴 모습, 안티오코스 6세와 유사한 방사형 왕관 착용 모습 등이 나타난다. 이는 알렉산드로스 2세가 의도적으로 셀레우코스 왕가의 정통성을 강조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 '자비나스' 재해석: '자비나스'라는 이름이 반드시 "사들여진 노예"라는 경멸적인 의미만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필립 쿠리 히티와 화폐학자 니콜라스 L. 라이트는 이 이름이 에스라기에도 등장하며, "신에게서 사들인 자"라는 종교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해석했다. 라이트는 알렉산드로스 2세가 원래 사제가 되기로 예정된 알렉산드로스 1세의 어린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으로 불렸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 라이트의 추가 주장: 니콜라스 L. 라이트는 유스티누스의 기록에 논리적 허점이 있다고 지적하며, 알렉산드로스 2세가 알렉산드로스 1세의 사생아였을 가능성도 제시했다. 또한 포르피리오스가 언급한 안티오코스 7세에 의한 입양설이 사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라이트는 안티오코스 6세가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입양되었을 가능성을 근거로, 알렉산드로스 2세 역시 왕가의 분열을 봉합하기 위해 안티오코스 7세에게 입양된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리아노스의 기록에 등장하는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바로 알렉산드로스 2세를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평민 출신의 이집트인이라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시리아인들이 그를 왕으로 받아들였을 리 없으며, 이집트 출신설은 데메트리오스 2세나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 8세 측에서 퍼뜨린 정치적 비방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한편, 요세푸스는 알렉산드로스 2세를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주 중 한 명으로 기록했지만, 그의 구체적인 혈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역사학자 카이 엘링은 요세푸스가 알렉산드로스 2세의 성공적인 선전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고 해석했다.
결론적으로 알렉산드로스 2세의 정통성에 대한 논란은 고대 기록의 상반된 내용과 현대 학자들의 다양한 해석으로 인해 여전히 진행 중이다.
4. 시리아의 왕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데메트리오스 2세를 타도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 2세를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위 주장자로 내세웠다.[1] 그는 자신이 안티오코스 7세의 양자이거나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지만,[1][2] '자비나스(Ζαβίνας|자비나스grc)', 즉 "사들여진 노예"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했다.[1]
기원전 128년, 알렉산드로스 2세는 안티오케이아를 점령했고,[2]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반감을 가진 아파메이아 등 일부 도시들의 지지를 얻었다. 왕위에 오른 그는 파르티아가 돌려보낸 안티오코스 7세의 유해를 정중히 매장하여 안티오케이아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는 이집트의 지원으로 즉위했기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주화에 이집트 양식인 두 개의 풍요의 뿔 도상이 나타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고대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쿨루스는 알렉산드로스 2세가 비교적 관대한 성품을 지녔다고 기록했으며, 기원전 128년경 라오디케이아에서 일어난 부하 장교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주동자들을 사면하기도 했다.
기원전 126년, 알렉산드로스 2세는 다마스쿠스 근교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 2세를 격파하고[1] 클레오파트라 테아가 통치하던 프톨레마이스 일대를 제외한 시리아 대부분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경계한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지원을 철회하고 오히려 데메트리오스 2세의 아내였던 클레오파트라 테아 및 그녀의 아들 안티오코스 8세와 손을 잡았다.[1]
결국 알렉산드로스 2세는 이집트의 지원을 받은 안티오코스 8세에게 패배하여 안티오케이아로 도망쳤다. 그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안티오케이아의 제우스 신전을 약탈했는데,[1] 제우스 상의 손에 있던 니케 황금상을 떼어내며 "제우스가 나에게 승리를 주었다"고 농담했다고 전해진다. 이 신성모독 행위에 분노한 안티오케이아 시민들은 그를 도시에서 추방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2세는 기원전 123년 도적들에게 붙잡혔고, 안티오코스 8세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
4. 1. 왕위 등극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자신의 누이 클레오파트라 2세와 결탁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 데메트리오스 2세를 견제하고 타도하기 위해 새로운 인물을 왕으로 내세웠다.[1]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이집트 상인 프로타르코스의 아들로 알려진 인물을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로 내세우며, 그가 죽은 안티오코스 7세의 양자이거나 혹은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게 했다.[1][2]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은 파르티아에게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빼앗기는 등 혼란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2세의 별명인 "자비나스(Ζαβίνας|자비나스grc)"는 셈어에서 유래한 말로 "사들여진 노예"라는 뜻인데, 이는 그가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꼭두각시임을 비꼬는 멸칭이었다.[1]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원을 등에 업은 알렉산드로스 2세는 기원전 129/128년(셀레우코스력 184년)경 북부 시리아에 상륙하여 스스로 왕위를 주장했다. 그는 기원전 128년 봄에 수도 안티오케이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시리아인들은 데메트리오스 2세의 통치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데메트리오스 2세가 아닌 다른 어떤 왕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민심 덕분에 안티오케이아 시민들은 알렉산드로스 2세를 왕으로 인정했다.[2] 안티오케이아 점령 직후, 알렉산드로스 2세는 라오디케이아 아드 마레와 타르수스를 자신의 영토로 편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아파메이아와 같은 다른 도시들은 데메트리오스 2세가 이집트 원정을 떠난 사이에 이미 독립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즉시 알렉산드로스 2세의 권위 아래 들어오지는 않았다.
4. 2. 칭호와 왕실 이미지
헬레니즘 왕조는 현대의 관행인 재위 번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대신 비슷한 이름의 군주와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칭호를 사용했다. 알렉산드로스 2세의 동전 대부분에는 칭호가 없었지만, 기원전 125년 금 스타테르 시리즈에는 ''테오스 에피파네스'' (신 현현)와 ''니케포로스'' (승리의 전달자) 칭호가 새겨져 있었다. 셀레우키아 피에리아에서 주조된 청동 화폐 3종에는 ''테오스'' 칭호가 빠져 있지만 ''에피파네스''와 ''니케포로스''는 유지되었다. 이러한 칭호는 안티오코스 4세의 칭호를 연상시키며, 알렉산드로스 2세의 셀레우코스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알렉산드로스 대왕 (기원전 323년 사망), 마케도니아 제국의 건국자는 헬레니즘 세계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유산을 사용하여 정통성을 확립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의 동전에 자신의 초상을 주조한 적이 없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같은 그의 후계자들은 그와 자신을 연관시키려 노력했다; 도시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그의 초상이 동전에 나타났다. 반대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기억은 셀레우코스 왕실 이데올로기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집트의 지원을 받은 알렉산드로스 1세와 알렉산드로스 2세는 마케도니아 왕과 밀접하게 관련된 모티프인 사자 가죽을 쓰고 자신을 묘사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유일한 셀레우코스 왕이었다. 알렉산드로스 2세는 자신을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연관시킴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테마를 사용한 알렉산드로스 1세의 관행을 이어갔다. 이는 알렉산드로스 2세가 이집트 상인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고[1][2] "자비나스(Ζαβίνας|자비나스grc)" 즉, "사들여진 노예"라는 멸칭으로 불렸던[1] 그의 불확실한 출신 배경과 관련하여 정통성 확보가 중요했기 때문일 수 있다.

고유의 시리아-페니키아 종교 복합체는 최고신, 최고 여신, 그리고 그들의 아들로 구성된 삼위일체를 기반으로 했으며, 기원전 145년까지 디오니소스가 아들의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 레반트는 다민족, 다문화 지역이었지만, 종교 복합체는 통합적인 힘이었다. 셀레우코스 군주들은 삼위일체에 자신들을 통합함으로써 현지인들 사이에서 지지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이 복합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셀레우코스 왕들이 신성의 표시인 방사관을 사용하는 것은 아마도 왕이 시리아의 최고 여신인 아타르가티스의 배우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이다. 방사관은 안티오코스 4세가 처음 사용했으며, 알렉산드로스 1세의 별명인 발라스는 왕 자신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레반트의 최고신인 바알의 그리스어 표현이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이러한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바알의 화신임을 선언했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또한 최고 여신과의 의례적인 결혼을 나타내기 위해 방사관을 사용했다. 알렉산드로스 2세는 자신의 동전에 디오니소스의 모티프를 많이 사용했다. 디오니소스를 활용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 2세는 자신이 알렉산드로스 1세의 정치적 상속자일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신(바알로서의 알렉산드로스 1세)의 영적인 후계자임을 나타냈을 가능성이 있다.
4. 3. 통치 정책
알렉산드로스 2세는 자신의 통치 기반을 다지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펼쳤다. 즉위 직후, 파르티아인들이 돌려보낸 안티오코스 7세의 유해를 정중히 매장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안티오코스 7세에게 충성했던 안티오키아 시민들의 호감을 얻고 그의 지지 세력을 포섭하려는 계산된 행동으로 평가된다.[1]그는 또한 주화를 통해 자신의 왕권을 선전했다. 기원전 125년에 발행된 금화에는 'Θεός Ἐπιφανής|테오스 에피파네스grc'(신의 현현)와 'Νικηφόρος|니케포로스grc'(승리자)라는 칭호를 새겼는데, 이는 안티오코스 4세를 연상시키며 자신이 셀레우코스 왕조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더 나아가, 알렉산드로스 1세의 선례를 따라 주화에 사자 가죽을 쓴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과의 연관성을 부각시키려 했다.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른 그가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종교적으로는 디오니소스 숭배를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주화에는 디오니소스 관련 도상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시리아-페니키아 지역의 종교적 신앙 체계와 자신을 연결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알렉산드로스 1세가 최고신 바알의 화신을 자처했던 것처럼, 알렉산드로스 2세는 디오니소스를 통해 자신이 선왕의 종교적 후계자임을 나타내려 했을 수 있다.
한편, 그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사실은 그의 주화에도 반영되었다. 시리아 주화에서는 드물었던 이집트 스타일의 띠로 묶인 두 개의 풍요의 뿔 도상이 그의 주화에 등장하는데,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집트에서 이 도상은 왕과 왕비의 결합을 상징하기도 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2세가 프톨레마이오스 공주와 결혼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은 없다.
고대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쿨루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2세는 "친절하고 관대하며 말이 부드러워"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128년경 라오디케이아에서 안티파테르, 클로니오스, 아에로포스 등 부하 장교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후, 주동자들을 처벌하지 않고 사면하는 관용을 보이기도 했다.
4. 4. 유대와의 관계
안티오코스 7세 치하에서 유대의 대제사장이자 통치자였던 요한 히르카누스 1세는 봉신 군주의 지위를 가졌으며, 시리아 군주의 이름으로 조공을 바치고 화폐를 주조했다. 안티오코스 7세가 사망한 후, 요한 히르카누스 1세는 조공을 중단하고 자신의 이름을 새긴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했지만, 초기 동전에 셀레우코스 왕을 나타내는 모노그램을 넣어 셀레우코스 왕국과의 관계는 유지했다. 이 사건은 대략 기원전 129년 또는 128년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유대를 침공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집트 침공 실패와 시리아 내부 반란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요한 히르카누스 1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 치하에서 "크게 번성"했으며, 데메트리오스 2세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알렉산드로스 2세와 동맹을 맺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27년, 유대는 로마에 사절단을 보내 원로원에 시리아가 야파, 지중해 항구들(야브네, 가자 포함), 게젤과 페게(크파르 사바 근처) 같은 도시들, 그리고 안티오코스 7세가 점령했던 다른 영토들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어달라고 요청했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14권, 250절)에 기록된 로마의 ''원로원 결의''는 유대인들의 도시 관련 요청은 승인했지만, 게젤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원로원 결의는 당시 시리아 왕을 '안티오코스의 아들 안티오코스'라고 지칭하는데, 이는 기원전 114/113년에 즉위한 안티오코스 9세 키지케노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칙령은 시리아가 이미 기원전 126/125년에 게젤을 포기했음을 시사할 수 있으며, 이는 알렉산드로스 2세와 요한 히르카누스 1세 사이의 협정이 알렉산드로스 2세의 통치 초기에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협정은 알렉산드로스 2세와 유대 사이에 동맹을 맺고,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게젤 남쪽 땅을, 알렉산드로스 2세가 사마리아를 포함한 게젤 북쪽 지역을 통제하는 영토 분할을 규정했을 수 있다.
요한 히르카누스 1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를 자신의 군주로 인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발행한 초기 동전 시리즈에는 요한 히르카누스 1세의 이름 위에 그리스 문자 Α (알파)가 눈에 띄게 표시되어 있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알파가 셀레우코스 왕의 이름 첫 글자, 즉 알렉산드로스 2세를 나타낸다고 제안한다. 알렉산드로스 2세와 요한 히르카누스 1세의 관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단서는 후자의 동전에 풍요의 뿔 모티프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유대 지도자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풍요의 뿔 중앙에는 석류 모티프가 추가되었다. 이는 요한 히르카누스 1세의 신중한 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다. 만약 알렉산드로스 2세가 패배한다면, 동전의 모티프는 후계자를 달래기에 충분히 중립적이었고, 알렉산드로스 2세가 승리하여 유대 문제에 개입한다면, 풍요의 뿔 동전은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이미 알렉산드로스 2세의 종주권을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대제사장은 결국 알렉산드로스 2세 치세 후반에 유대의 독립을 쟁취했고,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관계를 끊자 알파가 제거되었다.
5. 데메트리오스 2세와의 전쟁
알렉산드로스 2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위를 주장하며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도전했다. 그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키웠는데[1],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자신의 누이이자 정적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동맹을 맺은 데메트리오스 2세를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 2세는 기원전 128년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2], 기원전 126년에는 다마스쿠스 인근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 2세를 결정적으로 격파하여[1] 시리아 대부분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으며,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변심과 새로운 경쟁자인 안티오코스 8세의 등장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5. 1. 전쟁의 발발
기원전 127년 8월과 기원전 126년 8월 사이에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알렉산드리아를 되찾자, 그의 누이이자 대립하던 클레오파트라 2세는 이집트의 보물을 가지고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도망쳤다.[1]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클레오파트라 2세와 결탁한 데메트리오스 2세를 타도하기 위해, 이집트 상인 프로타르코스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스스로는 안티오코스 7세의 양자 또는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알렉산드로스 2세를 지원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으로 내세웠다.[1][2] 알렉산드로스 2세에게 붙여진 '자비나스(Zαβίνας|자비나스grc)'라는 별명은 셈어에서 유래한 말로 "사들여진 노예"라는 의미이며,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의 관계를 비꼬는 멸칭이었다.기원전 128년 알렉산드로스 2세는 안티오키아를 점령했고[2], 안티오키아와 아파메아 등 일부 도시들은 데메트리오스 2세의 통치에 대한 반감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2세를 왕으로 인정했다. 비록 알렉산드로스 2세가 수도 안티오키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데메트리오스 2세는 여전히 킬리키아를 장악하고 있었고, 셀레우키아 피에리아와 코일레-시리아의 많은 도시들도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이로 인해 알렉산드로스 2세는 코일레-시리아 지역에서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두 왕의 군대가 유대 땅을 지나면서 주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자, 유대인들은 로마에 사절단을 보내 왕실 군대가 유대 영토와 그 백성을 통과하는 것을 금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사절단은 기원전 127년에서 125년 사이에 파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26년 10월까지 아스칼론은 알렉산드로스 2세의 손에 들어갔으며, 화폐 증거는 사마리아 역시 그의 지배 하에 들어갔음을 시사한다.
기원전 126년 알렉산드로스 2세는 다마스쿠스 교외의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 2세를 격파했다.[1] 패배한 데메트리우스 2세는 기원전 125년 초 프톨레마이스로 도망쳤으나, 그의 아내 클레오파트라 테아는 그가 도시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데메트리우스 2세는 배를 타고 티레로 향했다. 데메트리우스 2세는 티레의 신전에서 보호를 요청했지만, 기원전 125년 봄 또는 여름에 그 도시의 지휘관에게 살해당했다.


알렉산드로스 2세는 데메트리우스 2세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주화를 발행했다. 앞면에 코끼리 머리 장식을 한 자신의 모습과 뒷면에 배의 아플라스톤을 새긴 청동화는 해상에서의 승리를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데메트리우스 2세가 프톨레마이스에서 티레로 항해하는 동안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는 기록되지 않은 해상 전투와 관련 있을 수 있다. 코끼리 머리 장식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주화에서 유래한 모티브로, 알렉산드로스 2세가 이를 사용한 것은 티레를 정복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업적을 상기시키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또한 기원전 125년에 발행된 금 스타테르 역시 데메트리우스 2세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를 기념하여 특별히 주조된 것으로 보인다.
5. 2. 데메트리오스 2세의 패배와 죽음
기원전 127년 8월과 기원전 126년 8월 사이에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알렉산드리아를 되찾자, 그의 누이이자 대립하던 클레오파트라 2세는 이집트의 보물을 가지고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도망쳤다. 알렉산드로스 2세가 수도 안티오키아를 점령했지만, 데메트리오스 2세는 여전히 킬리키아를 장악하고 있었고, 셀레우키아 피에리아와 코일레-시리아의 많은 도시들도 그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 2세는 이 지역에서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두 왕의 군대가 유대 땅을 통과하며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자, 유대인들은 로마에 도지테우스의 아들 시몬, 알렉산더의 아들 아폴로니우스, 야손의 아들 디오도루스를 사절단으로 보내 왕실 군대가 유대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금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절단은 기원전 127년에서 125년 사이에 파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26년 10월까지 아스칼론이 알렉산드로스 2세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화폐 증거로 미루어 사마리아 역시 그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기원전 125년 초, 데메트리오스 2세는 다마스쿠스 인근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 2세에게 패배하고 프톨레마이스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의 아내였던 클레오파트라 테아는 그가 도시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데메트리오스 2세는 배를 타고 티레로 향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티레의 신전 보호권(아실럼)을 요청했으나, 기원전 125년 봄 혹은 여름에 도시의 지휘관(praefectus)에게 살해당했다.
데메트리오스 2세를 제거한 알렉산드로스 2세는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는 화폐를 발행했다. 앞면에 코끼리 머리 가죽 투구를 쓴 자신의 모습을, 뒷면에는 배의 장식물인 아플라스톤을 새긴 청동화를 주조했는데, 이는 그가 해전에서의 승리를 주장했음을 시사할 수 있다. 밀레토스에서 발견된 "시리아 왕 알렉산드로스의 제독"이라 칭하는 메노필루스의 아들 안티고노스의 비문이 알렉산드로스 2세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문헌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알렉산드로스 2세와 데메트리오스 2세 사이의 해전은 데메트리오스 2세가 프톨레마이스에서 티레로 항해하는 도중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코끼리 머리 가죽 투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발행한 화폐에서 유래한 도상이다. 일부 학자들은 알렉산드로스 2세가 이 도상을 사용함으로써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티레 정복을 상기시키려 했다고 해석하지만, 셀레우코스 제국에서는 동방에서의 승리를 상징한다는 다른 견해도 있다. 또한 기원전 125년에 발행된 금화(스타테르) 역시 행정관 표식이 없는 특별 발행물로서, 데메트리오스 2세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드로스 2세는 이집트 상인 프로타르코스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스스로는 안티오코스 7세의 양자 또는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들이라고 칭했다.[1][2] 그는 파르티아에게 메소포타미아를 빼앗긴 혼란기에 등장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자신의 누이 클레오파트라 2세와 손잡은 데메트리오스 2세를 견제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 2세를 지원했다.[1] '자비나스'(Ζαβίνας|자비나스grc)는 셈어에서 유래한 '사들여진 노예'라는 뜻의 별명으로,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의 관계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28년에 안티오키아를 점령했으며[2], 안티오키아와 아파메아 등 일부 도시는 데메트리오스 2세의 통치에 반감을 느껴 알렉산드로스 2세를 왕으로 인정했다.
기원전 126년 다마스쿠스 외곽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 2세를 격파한[1] 알렉산드로스 2세는 클레오파트라 테아가 통치하는 프톨레마이스 주변을 제외한 시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가 너무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아 그에 대한 지원을 끊고, 조카인 클레오파트라 테아 및 그녀의 아들 안티오코스 8세와 손을 잡았다.[1]
결국 알렉산드로스 2세는 이집트의 지원을 받은 안티오코스 8세에게 패배하여 안티오키아로 도망쳤다. 그는 자금 마련을 위해 그곳의 제우스 신전을 약탈하여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1] 이때 제우스 상 손에 있던 니케 황금상을 떼어내며 "제우스가 나에게 승리(니케)를 주었다"고 농담했다고 전해진다. 이 신성모독 행위에 분노한 안티오키아 시민들에 의해 추방당했고, 기원전 123년 도적에게 사로잡혀 안티오코스 8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6. 권력의 정점과 이집트와의 결별
기원전 126년 다마스쿠스 교외의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 2세를 격파한[1] 알렉산드로스 2세는 클레오파트라 테아가 통치하던 프톨레마이스 주변을 제외한 시리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데메트리우스 2세 사망 후에는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장악하고, 기원전 125년에는 킬리키아 등 다른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안티오크, 셀레우키아 피에리아, 아파메아, 다마스쿠스 등 여러 주요 도시에서 그의 이름으로 주화가 발행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2세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그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후원자였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유스티누스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알렉산드로스 2세의 오만함 때문에 지원을 철회했다고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시리아에 강력한 군주가 들어서는 것을 경계한 이집트의 정치적 판단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에 대한 지원을 끊고, 데메트리오스 2세의 아내였던 조카 클레오파트라 테아 및 그녀의 아들 안티오코스 8세와 손을 잡았다.[1] 기원전 124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딸 트리파에나가 안티오코스 8세와 결혼하고, 이집트 군대가 안티오코스 8세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면서 알렉산드로스 2세는 과거의 후원자였던 이집트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6. 1. 세력 확장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는 이집트 상인 프로타르코스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지만, 스스로는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의 양자 또는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의 아들이라고 칭했다.[1][2] 그는 파르티아에게 메소포타미아를 빼앗긴 혼란을 틈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지원을 받아 봉기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자신의 누이이자 경쟁자였던 클레오파트라 2세와 손잡은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를 견제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 2세를 내세웠다.[1] '자비나스(Zαβίνας|Zabínasgrc)'는 셈어로 "사들여진 노예"를 뜻하는 말로,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의 관계 때문에 붙여진 경멸적인 별칭이다.
기원전 128년 알렉산드로스 2세는 안티오키아를 점령했다.[2] 안티오키아와 아파메아 등 일부 도시는 데메트리오스 2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알렉산드로스 2세를 왕으로 받아들였다. 기원전 126년에는 다마스쿠스 외곽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 2세를 격파했다.[1] 데메트리우스 2세가 사망하자 알렉산드로스 2세는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장악했으며, 기원전 125년에는 킬리키아를 포함한 다른 지역들도 정복했다. 그의 세력을 보여주듯, 알렉산드로스 2세의 동전은 안티오크, 셀레우키아 피에리아, 아파메아, 다마스쿠스, 베이루트, 아스켈론, 타르수스 등 시리아 북부와 남부, 킬리키아의 여러 도시에서 주조되었다. 이로써 그는 클레오파트라 테아가 통치하던 프톨레마이스 주변 지역을 제외한 시리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1]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테아는 프톨레마이스에서 알렉산드로스 2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 데메트리우스 2세가 패배한 해인 기원전 126/125년(셀레우코스력 187년)에 자신을 시리아의 유일한 통치자로 선포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테트라드라크마 주화를 발행했다. 데메트리우스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셀레우코스 5세 필로메토르가 스스로 왕위를 주장하자 그를 암살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시리아 사회는 여성을 단독 군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 테아는 결국 기원전 125/124년(셀레우코스력 186년)에 데메트리우스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다른 아들 안티오코스 8세를 공동 통치자로 내세웠다.
한편, 알렉산드로스 2세를 지원했던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입장을 바꾸었다.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데메트리우스 2세가 죽은 뒤 알렉산드로스 2세에 대한 지원을 끊고, 클레오파트라 2세와 화해하여 이집트로 돌아가 공동 통치를 재개했다. 유스티누스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알렉산드로스 2세의 성공에 따른 오만함과 은인에 대한 무례함 때문에 그를 버렸다고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알렉산드로스 2세가 시리아에서 너무 강력해지는 것을 이집트가 원치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클레오파트라 테아가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동맹을 맺었을 수도 있다. 클레오파트라 2세가 이집트로 돌아온 직후인 기원전 124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의 딸인 트리파에나가 안티오코스 8세와 결혼했고, 이집트 군대가 안티오코스 8세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 2세의 세력 확장에 대한 견제와 함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 간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의미했다.
6. 2. 이집트와의 관계 변화
알렉산드로스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지원을 받아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위를 차지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자신의 누이이자 경쟁자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손잡은 데메트리오스 2세를 축출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 2세를 이용한 것이다.[1] 알렉산드로스 2세의 별명인 "자비나스(Zαβίνας|자비나스grc)"는 셈어로 "사들여진 노예"를 의미하며,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의 관계를 암시하는 경멸적인 호칭이었다.
이집트의 지원을 등에 업은 알렉산드로스 2세는 기원전 128년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2], 기원전 126년에는 다마스쿠스 인근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 2세를 격파했다.[1] 이로써 그는 클레오파트라 테아가 통치하던 프톨레마이스 주변 지역을 제외한 시리아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 2세가 사망하자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고대 역사가 유스티누스는 알렉산드로스 2세가 성공에 도취되어 후원자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오만하게 굴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강력해진 알렉산드로스 2세를 경계하여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당시 이집트에게 강력한 시리아 군주는 위협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정책을 바꿔 클레오파트라 2세와 화해하고 이집트로 돌아갔으며, 동시에 데메트리오스 2세의 아내였던 조카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동맹을 맺었다.[1] 클레오파트라 테아는 프톨레마이스에서 알렉산드로스 2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남편 데메트리오스 2세가 패배한 기원전 126/125년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화폐를 주조하며 시리아의 단독 통치자임을 선언했다. 그녀는 데메트리오스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맏아들 셀레우코스 5세 필로메토르가 스스로 왕위를 칭하자 그를 암살하고, 기원전 125/124년에는 어린 아들 안티오코스 8세를 공동 통치자로 내세웠다.
기원전 124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의 딸인 트리파에나가 안티오코스 8세와 결혼하면서 이집트와 시리아의 동맹은 더욱 공고해졌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안티오코스 8세를 지원하기 위해 이집트 군대를 파견했다. 결국 알렉산드로스 2세는 이집트의 지원을 받은 안티오코스 8세에게 패배했고, 이는 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7. 안티오코스 8세와의 전쟁, 패배와 죽음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점차 강성해지는 알렉산드로스 2세를 경계하여 지원을 철회하고, 대신 자신의 조카인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그녀의 아들 안티오코스 8세와 손을 잡았다.[1] 이집트 군대의 지원을 받게 된 안티오코스 8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에게 반격을 시작했고, 알렉산드로스 2세는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하며 대부분의 영토를 잃었다. 기원전 124/123년에는 아스켈론을 상실했으며, 기원전 123년 상반기에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패배 후 안티오키아로 도망친 알렉산드로스 2세는 군자금 마련을 위해 제우스 신전을 약탈하는 신성 모독 행위를 저질렀다.[1] 이 행위는 안티오키아 시민들의 분노를 사 쫓겨나는 결과를 낳았고, 이후 강도들에게 붙잡혀 안티오코스 8세에게 넘겨져 처형되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시점은 불분명하나, 기원전 123년 10월 이전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드로스 2세에게는 후사가 없었으며, 그의 죽음으로 안티오코스 4세의 혈통은 완전히 끊어졌다. 고대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그의 몰락을 지켜본 사람들이 "운명의 변덕과 인간 운명의 예측 불가능함"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7. 1. 안티오코스 8세의 반격

이집트 군대의 지원을 받은 안티오코스 8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와 전쟁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 2세는 대부분의 영토를 잃었다. 그는 셀레우코스력 189년(기원전 124/123년)에 아스켈론을 상실했다. 마지막 전투는 기원전 123년 상반기에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벌어졌으며, 알렉산드로스 2세의 패배로 끝났다.
고대 역사가들은 알렉산드로스 2세의 최후에 대해 서로 다른 설명을 남겼다. 요세푸스는 그가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했다고 간략하게 언급했다. 반면 에우세비우스는 알렉산드로스 2세가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독약을 마셔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와 유스티누스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2세는 백성들이 정치적 변화를 원하거나 전쟁의 고통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여 안티오코스 8세와의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려 했다. 그는 대신 왕실 재산을 챙기고 제우스 신전의 귀중품까지 훔쳐 밤에 그리스로 도망가려 했다. 일부 외국인 부하들과 함께 제우스 신전을 약탈하던 중 백성들에게 발각되었으나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망쳤다.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포시디움으로 향했지만, 그의 신성모독 소문이 먼저 퍼져 도시는 문을 닫았다. 그는 포시디움 외곽에서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신전을 약탈한 지 이틀 만에 붙잡힌 그는 사슬에 묶인 채 안티오코스 8세의 진영으로 끌려가 적들 앞에서 모욕과 굴욕을 당했다. 그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한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기에 큰 충격을 받았고, 현실을 받아들인 후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 유스티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2세는 안티오코스 8세에게 패배한 후 안티오키아로 도망쳤다. 군대를 모을 자금이 부족해지자, 그는 유피테르(제우스) 신전에 있던 황금 니케 조각상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며 "승리는 유피테르에게서 빌린 것"이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며칠 후에는 밤중에 유피테르의 황금 신상 자체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신성모독 행위에 분노한 안티오키아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알렉산드로스 2세는 도시에서 쫓겨나 도망쳐야 했다. 이후 그는 부하들에게도 버림받고 강도들에게 붙잡혔으며, 강도들은 그를 안티오코스 8세에게 넘겼다. 안티오코스 8세는 그의 처형을 명령했다.

알렉산드로스 2세가 발행한 두 종류의 금 스타테르 중, 그의 별칭 없이 왕의 칭호(바실레우스)만 새겨진 후기 스타테르가 유스티누스가 언급한 니케상 절도 사건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스타테르의 도안이 그의 후기 테트라드라크마와 더 유사하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 2세의 마지막 동전은 셀레우코스력 190년(기원전 123/122년)에 발행되었지만, 고대 역사가들은 그의 정확한 사망 날짜를 명시하지 않았다. 안티오코스 8세의 첫 안티오키아 주화가 같은 해(기원전 123/122년)에 발행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알렉산드로스 2세는 아마도 기원전 123년 10월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마스쿠스는 셀레우코스력 191년(기원전 122/121년)까지 알렉산드로스 2세의 이름으로 주화를 계속 발행하다가 안티오코스 8세의 군대에 점령되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알렉산드로스 2세의 몰락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운명의 변덕, 인간 운명의 예측 불가능한 역전, 그리고 삶의 급격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알렉산드로스 2세에게 아내나 자녀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그의 죽음으로 안티오코스 4세의 혈통은 완전히 끊어졌다.
7. 2. 최후의 전투와 죽음
이집트 군대의 지원을 받은 안티오코스 8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와 전쟁을 벌였고, 알렉산드로스 2세는 대부분의 영토를 잃었다. 그는 셀레우코스력 189년(기원전 124/123년)에 아스칼론을 잃었다. 마지막 전투는 기원전 123년 상반기에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벌어졌고 알렉산드로스 2세의 패배로 끝났다.
고대 역사가들은 알렉산드로스 2세의 최후에 대해 각기 다른 설명을 제시했다. 요세푸스는 그저 왕이 패배하여 죽었다고만 언급했다. 반면 에우세비우스는 알렉산드로스 2세가 패배를 견디지 못하고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기록했다. 더 상세한 기록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와 유스티누스에게서 찾을 수 있다:
-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2세는 백성들이 정치적 변화를 열망하거나 전쟁의 고난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 여겨 안티오코스 8세와의 전투를 피하려 했다. 그는 전투 대신 왕실 재산을 챙기고 제우스 신전의 귀중품을 훔쳐 밤에 그리스로 도망치려 했다. 일부 외국인 부하들과 제우스 신전을 약탈하다가 발각되어 간신히 탈출했다.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포시디움(Posidium)으로 향했으나, 신성 모독 소문이 먼저 퍼져 도시는 문을 닫았다. 그는 포시디움 근처에서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신전을 약탈한 지 이틀 만에 붙잡혀 사슬에 묶인 채 안티오코스 8세의 진영으로 끌려가 적들 앞에서 모욕을 당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의 몰락에 충격을 받았고, 현실을 받아들인 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 유스티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2세는 안티오코스 8세에게 패배한 후 안티오키아로 도망쳤다. 군 자금이 부족하자 유피테르(제우스) 신전에서 황금 니케 조각상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며 "승리는 유피테르에게서 빌린 것"이라고 농담했다. 며칠 후에는 유피테르의 황금 조각상 자체를 밤중에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이 신성 모독 행위에 분노한 안티오키아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도망쳐야 했다. 이후 부하들에게 버려져 강도들에게 붙잡혔고, 강도들은 그를 안티오코스 8세에게 넘겼으며, 안티오코스 8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알렉산드로스 2세는 두 종류의 금 스타테르를 발행했다. 하나는 그의 별칭을 포함하며 기원전 125년경에 발행된 것으로 추정되고(올리버 후버, 아서 호턴 등), 다른 하나는 왕의 칭호(''바실레우스'')만 있다. 에드워드 시어도어 뉴웰이나 어니스트 바벨론 같은 초기 화폐학자들은 기원전 125년 스타테르만 알고 있었고, 이것이 신전 약탈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이 스타테르의 도상은 왕관 장식이 목에 곧게 늘어져 있어 알렉산드로스 2세 후기 주화와 일치하지 않는다. 반면, 왕실 별칭이 없는 스타테르의 왕관 장식 배열은 그의 후기 테트라드라크마와 더 유사하므로, 이 스타테르를 니케 절도 사건과 연관시키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알렉산드로스 2세의 마지막 동전은 셀레우코스력 190년(기원전 123/122년)에 발행되었지만, 고대 역사가들은 그의 정확한 사망 날짜를 명시하지 않는다. 안티오코스 8세의 첫 안티오키아 주화가 셀레우코스력 190년(기원전 123/122년)에 발행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아마도 기원전 123년 10월까지는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마스쿠스는 셀레우코스력 191년(기원전 122/121년) 안티오코스 8세의 군대가 점령할 때까지 알렉산드로스 2세의 이름으로 주화를 계속 발행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의 최후를 목격한 많은 이들은 "운명의 변덕, 인간 운명의 부침,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삶의 변화무쌍함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논평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2세에게 아내나 자녀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그의 죽음으로 안티오코스 4세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7. 3. 신전 약탈 사건
이집트 군대의 지원을 받은 안티오코스 8세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알렉산드로스 2세는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기원전 123년 상반기에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도 패배했다. 이후 그는 안티오키아로 도망쳤다.군대를 유지하고 병사들에게 급여를 지급할 자원이 부족해지자, 알렉산드로스 2세는 안티오키아에 있는 제우스 신전을 약탈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건과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고대 역사가들의 기록이 다소 차이를 보인다.
-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기록: 알렉산드로스 2세는 안티오코스 8세와의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고, 왕실 재산과 함께 신전의 귀중품을 훔쳐 밤에 그리스로 달아나려 했다. 그는 일부 외국인 용병들과 함께 제우스 신전을 약탈하다가 안티오키아 시민들에게 발각되었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망쳤다. 이후 포시디움으로 피신하려 했으나, 그의 신성 모독 소식이 먼저 퍼져 도시 진입을 거부당했다. 결국 신전을 약탈한 지 이틀 만에 도적들에게 붙잡혀 사슬에 묶인 채 안티오코스 8세의 진영으로 끌려가 모욕을 당했다. 디오도로스는 그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한 사람들이 운명의 변덕과 인간사의 예측 불가능함에 충격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 유스티누스의 기록: 알렉산드로스 2세는 안티오코스 8세에게 패배한 후 안티오키아로 도망쳤다. 군자금이 부족해지자 제우스 신전에서 황금으로 만든 니케 조각상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며 "승리는 유피테르(제우스)에게서 빌린 것"이라고 농담했다고 한다. 며칠 뒤에는 제우스의 거대한 황금 신상 자체를 밤중에 몰래 가져가라고 명령했다. 이 신성 모독 행위에 분노한 안티오키아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알렉산드로스 2세는 도망쳐야 했다. 그는 이후 부하들에게 버려지고 도적들에게 붙잡혔으며, 도적들은 그를 안티오코스 8세에게 넘겼다. 결국 안티오코스 8세는 그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1]
결과적으로 신전 약탈이라는 신성 모독 행위는 안티오키아 시민들의 큰 분노를 샀고, 알렉산드로스 2세가 도시에서 추방당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는 결국 도적들에게 붙잡혀 기원전 123년경 안티오코스 8세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드로스 2세가 발행한 일부 황금 스타테르는 이때 신전에서 약탈한 금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7. 4. 죽음의 의미
이집트 군대의 지원을 받은 안티오코스 8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와 전쟁을 벌였고, 알렉산드로스 2세는 대부분의 영토를 잃었다. 그는 셀레우코스력 189년(기원전 124/123년)에 아스켈론을 잃었다. 마지막 전투는 기원전 123년 상반기,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벌어졌고 알렉산드로스 2세의 패배로 끝났다.
고대 역사가들은 알렉산드로스 2세의 최후에 대해 각기 다른 설명을 제시했다. 요세푸스는 그저 왕이 패배하여 죽었다고만 언급했다. 반면 에우세비우스는 알렉산드로스 2세가 패배를 견디지 못하고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언급했다. 상세한 내용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와 유스티누스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기록:''' 알렉산드로스 2세는 백성들이 정치적 변화를 열망하거나 전쟁의 고난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여 안티오코스 8세와의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려 했다. 그는 대신 왕실 재산을 챙기고 신전의 귀중품을 훔쳐 밤에 그리스로 달아나려 했다. 제우스 신전을 약탈하던 중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겨우 도망쳤다.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라스 알-바싯(포시디움)으로 향했지만, 그의 신성 모독 소문이 먼저 퍼져 도시는 문을 닫았다. 결국 그는 라스 알-바싯 근처에서 피신해야 했으나, 신전 약탈 이틀 만에 붙잡혀 사슬에 묶인 채 안티오코스 8세의 진영으로 끌려가 적들에게 모욕을 당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광경에 충격을 받았고, 이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유스티누스의 기록:''' 알렉산드로스 2세는 안티오코스 8세에게 패배한 후 안티오키아로 도망쳤다. 군자금이 부족해지자 유피테르(제우스) 신전에서 황금 니케 조각상을 가져오게 하며 "승리는 유피테르에게서 빌린 것"이라고 농담했다고 한다. 며칠 뒤에는 유피테르의 황금 조각상 자체를 밤중에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이 신성 모독 행위에 분노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도망쳐야 했다. 이후 부하들에게 버려지고 강도들에게 붙잡혀 안티오코스 8세에게 넘겨졌고, 결국 처형되었다.
알렉산드로스 2세는 두 종류의 금 스타테르를 발행했다. 하나는 그의 별칭을 포함하며 올리버 후버, 아서 호턴 등 다수 화폐학자들에 의해 기원전 125년경 발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하나는 왕의 칭호(''바실레우스'')만 포함한다. 에드워드 시어도어 뉴웰이나 어니스트 바벨론 같은 초기 화폐학자들은 기원전 125년 스타테르만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신전에서 약탈한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이 스타테르의 도상은 알렉산드로스 2세 후기 주화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왕관 장식이 목에 곧게 늘어져 있음). 반면, 왕실 별칭이 없는 스타테르의 왕관 장식 배열은 그의 후기 테트라드라크마와 더 유사하여, 이 스타테르가 니케 절도 사건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겨진다.
알렉산드로스 2세의 마지막 동전은 셀레우코스력 190년(기원전 123/122년)에 발행되었지만, 고대 역사가들은 그의 정확한 사망 날짜를 명시하지 않는다. 안티오코스 8세가 셀레우코스력 190년(기원전 123/122년)에 첫 안티오키아 동전을 발행한 것으로 보아, 알렉산드로스 2세는 아마도 기원전 123년 10월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마스쿠스는 셀레우코스력 191년(기원전 122/121년)까지 알렉산드로스 2세의 이름으로 주화를 계속 발행했으며, 이 시기에 안티오코스 8세의 군대가 도시를 점령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2세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운명의 변덕, 인간 운명의 예측 불가능한 변화, 그리고 삶의 무상함"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2세에게 아내나 자녀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그의 죽음으로 안티오코스 4세의 혈통은 끊어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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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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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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