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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토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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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토 아키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포수와 내야수를 거쳐 지명 타자 등으로 활약했다. 간토 고등학교 시절 61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1988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했다. 1993년 홈런왕과 베스트 나인을 시작으로 1995년에는 홈런왕, 타점왕을 석권하며 센트럴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 성장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를 거쳐 2009년 은퇴했으며, 지도자로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를 역임했다. 통산 364홈런을 기록했으며, 1994년 8월, 1995년 6월, 1999년 8월, 2000년 6월 월간 MVP를 수상하는 등 여름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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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토 아키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에토 아키라
원어 이름江藤 智
로마자 표기Etō Akira
출생일1970년 4월 15일
출생지도쿄도히가시야마토시
신장182cm
체중95kg
타격우타
투구우투
포지션내야수/코치
선수 경력
데뷔 연도1990년
데뷔 팀히로시마 도요 카프
최종 출장 연도2009년
최종 팀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소속 팀히로시마 도요 카프 (1990–1999)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0–2005)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2006–2009)
코치 경력
코치 팀요미우리 자이언츠 (2010–2018)
기록
타율0.268
홈런364
타점1,020
수상
올스타6회 (1993, 1995, 1996, 1998, 1999, 2001)
일본 시리즈 우승3회 (2000, 2002, 2008)
센트럴 리그 홈런왕2회 (1993, 1995)
센트럴 리그 타점왕1회 (1995)
베스트 나인7회 (1993 - 1996, 1998, 2000, 2001)
골든 글러브1회 (1996)

2. 선수 경력

간토 고등학교(현재의 세이토쿠가쿠엔 고등학교) 시절 통산 61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2학년 때 투수에서 포수로 전향했지만, "동쪽의 에토, 서쪽의 타니시게"라고 불릴 정도의 강타 포수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 장타력을 인정받아 1988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부터 5순위 지명을 받아 포수로 입단했다. 간토 고등학교 '''야구부'''에서 프로에 입단한 첫 선수가 되었다(전년에 연습생으로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동교 출신으로 첫 프로 야구 선수가 된 히즈키 테츠시는 육상부였다).

지명 다음 날 계약을 마쳤으며, 1988년도 지명 선수 중 12개 구단 입단 제1호가 되었다. 당시 등번호는 '''51'''번이었다.

에토 아키라는 1989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하여 1999년까지 활동했다. 1989년에는 1군에 출장하지 못했지만, 2군에서 주니어 올스타 게임에 출전하는 등 활약하며 등번호를 33번으로 변경했다.[3][4] 1990년에는 1군에 처음 출장하여 우익수와 1루수로 38경기에 출장, 5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1991년에는 어깨 부상과 타격을 살리기 위해 포수에서 내야수(주로 3루수)로 전향했다. 다츠카와 미츠오가 정규 포수로 있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7번 3루수로 개막 선발 출장하여 첫 두 자릿수 홈런(11개)을 기록했지만, 타율은 2할 초반으로 부진했다. 1992년에는 야마자키 류조, 야마다 카즈토시 등과 3루수 레귤러 자리를 다투었다. 5월과 6월에는 부진했지만, 후반에 타율을 끌어올려 9월에는 대부분의 경기에 4번 타자로 발탁되었다.

1993년에는 레귤러로 정착하여 개막 3경기를 제외하고 모든 경기에 4번 타자로 출장,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우며 34홈런으로 홈런왕 타이틀과 베스트 나인을 획득했다. 1994년에는 전반에 부상으로 뒤처졌지만, 6월 복귀 후 부동의 4번 타자로 정착했다. 8월에는 월간 16홈런의 일본 타이기록을 세웠다. 타율은 .321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최종전에서 2타수 무안타에 그치며 알론조 파웰과 마에다 토모노리에게 밀려 3위에 머물렀다.

1995년에는 2번째 홈런왕과 타점왕을 획득하며 2관왕에 올랐지만, 시즌 막바지에 급성 충수염으로 이탈하여 40홈런에는 미치지 못했다. 14도루로 개인 최다 도루를 기록했고, OPS는 리그 1위였다. 1996년에는 시즌 전반부터 타격 호조를 보이며 타율 3할, 32홈런을 기록했다. 개막부터 4번 타자로 전 이닝 출장을 이어갔지만,[5] 8월 2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니시 토시히사가 친 타구에 얼굴을 맞아 오른쪽 눈 와벽 바닥 골절상을 입고 전선에서 이탈했다.[7] 그해 최고 출루율과 골든 글러브상을 획득했고, OPS도 2년 연속 1위를 기록했다. 12월 6일에는 결혼식을 올렸다.[9]

1997년에는 출루율 3할 8푼을 기록했지만, 타율은 .252에 그쳐 4년 연속 수상했던 베스트 나인을 놓쳤다. 1998년에는 개인 최다 100볼넷, 출루율 3할 8푼을 넘겼지만, 개인 최다 103삼진을 기록했고 타율은 .253에 머물렀다. 후반에는 가네모토 도모아키에게 4번 타자 자리를 양보하기도 했다. 1999년에는 8월 12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전에서 1경기 10타점의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을 세웠다.[10] 그해 타율 3할에 육박하는 성적을 남겼다. 시즌 후 FA 권리를 행사하여 요코하마, 한신, 주니치 등이 영입에 나섰지만, 재경 구단을 희망하여[11][12] 요코하마 이적이 유력시되었다. 하지만 요코하마의 신도 다쓰야가 잔류하면서 12월 6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적이 결정되었다. 등번호 33번은 당시 요미우리 감독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양보했다.[4]

2000년, 전반기 부진에 시달린 다카하시 요시노부를 대신하여 3번 타자로 활약하며 리그 최다 승리 타점을 기록했고 (최다 승리 타점 타이틀 표창은 이 해를 마지막으로 에토가 마지막 수상자가 되었다), 센트럴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특히 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9월 24일 주니치 드래건스전 (도쿄 돔)에서는 4점 뒤진 9회말 당시 마무리 투수 에디 개럴드로부터 동점 만루 홈런을 쳐내는 등 승부 근성을 발휘했다. 이는 200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통산 200호 홈런이었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홈런을 쳤다. 같은 해 시즌 타율은 .256으로 저조했지만 32홈런, 91타점을 기록했다.

2001년에는 이적 후 2년 연속 베스트 나인과 30홈런을 기록하며 슬러거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2002년에는 2할대 초반 타율과 18홈런으로, 주전으로 정착한 이후 최저 성적을 기록했으며, 이 해부터 서서히 성적이 저조해졌다.

2003년에는 전년도부터의 부진이 이어져 2군 (이스턴 리그)으로 강등되는 경험을 하는 등 11년 만에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다. 대타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아졌고, 2004년에는 3루수인 고쿠보 히로키가 다이에에서 이적해 오면서 출장 기회가 더욱 줄어, 선발 출장은 15경기에 그쳤다. 같은 해 홈런도 4개에 그쳐, 전년까지 13년 연속으로 이어지던 두 자릿수 홈런 기록도 끊어졌다.

2005년에는 타율도 2할을 밑돌았고, 선발 출장은 8경기로 완전히 대타 요원이 되었다. 통산 350홈런에 1개만 남겨두고 있었지만, 7월 30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12차전에서 홈런성 타구를 날렸지만, 천장에 맞고 좌익수 플라이가 되어 통산 350호 홈런은 무산되었고, 결국 홈런을 1개도 치지 못했다. 같은 해 오프의 계약 갱신에서는 야구 협약의 한도인 40%를 넘는 삭감이 결정되었다. 그 직후인 2006년 1월 5일,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온 도요다 기요시의 보상 선수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로의 이적이 결정되었다. "FA 이적"과 "다른 선수의 FA 이적에 따른 보상 선수로서의 이적"을 모두 경험한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2006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는 나이와 선수 경력 모두 팀 최고령이 되었으며, 풍부한 경험과 인품으로 젊은 선수들이 많은 팀에서 귀중한 존재감을 나타냈다. 36세 생일인 4월 15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는 우치 류야로부터 2년 만에 통산 350호 홈런을 쏘아 올렸다. 또한 7월 19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는 주축 선수인 알렉스 카브레라나 와다 가즈히로와 같은 주력 타자들이 선발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7년 만에 4번 타자로 출전(마쓰이 히데키기요하라 가즈히로 등의 존재로 인해,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에는 한 번도 4번 타자를 맡지 않았다.)하여, 6회 초에 사토 마코토로부터 좌익수 방향 2루타를 날려 통산 1,500안타를 달성했다. 이적 후에는 주로 대타(좌완 투수 상대)로 기용되었으며, 때로는 지명 타자나 1루수로 선발 출전했다.

2007년에도 대타나 지명 타자로 활약했다. 세이부 이적 후 처음으로 3루 수비를 맡아 3루수로서 9경기에 선발 출장했으며, 카브레라가 실수를 연발했을 때는 카브레라가 지명 타자로 전환하고, 에토가 1루수를 맡는 등, 베테랑이지만 수비에서도 건재함을 과시했다. 9월 29일 오릭스 버펄로스와의 22차전에서 프로 야구 사상 33번째 통산 1,000타점을 달성했다. "열심히 쳤습니다. 폐를 끼쳤지만 이토 감독님, 모두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코멘트했다.

2008년, 전년과 마찬가지로 대타의 비장의 카드로 활약했으며, 크레이그 브라젤이 부상했을 때는 4번 1루수로 선발 기용되었다. 타율은 .206으로 낮았지만, 20개의 안타 중 홈런이 7개로, 장타력을 발휘했다. 이 해에 다시 FA 권리를 얻었지만, 행사하지 않고 잔류하기로 합의했다. 일본 시리즈 제패와 구단 사상 첫 아시아 챔피언에 기여했다.

2009년, 대타 출전이 많았지만, 타율 1할대에 머무는 부진에 빠져, 8월 6일 2군으로 강등되었다. 그 후 다시 1군에 승격되지 못하고, 10월 2일에 현역 은퇴를 발표, 11월 4일에 임의 은퇴 선수로 공시되었다.

2. 1. 프로 입단 전

간토 고등학교(현재의 세이토쿠가쿠엔 고등학교) 시절 통산 61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2학년 때 투수에서 포수로 전향했지만, "동쪽의 에토, 서쪽의 타니시게"라고 불릴 정도의 강타 포수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 장타력을 인정받아 1988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부터 5순위 지명을 받아 포수로 입단했다. 간토 고등학교 '''야구부'''에서 프로에 입단한 첫 선수가 되었다(전년에 연습생으로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동교 출신으로 첫 프로 야구 선수가 된 히즈키 테츠시는 육상부였다).

지명 다음 날 계약을 마쳤으며, 1988년도 지명 선수 중 12개 구단 입단 제1호가 되었다. 당시 등번호는 '''51'''번이었다.

2. 2.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1989년 ~ 1999년)

에토 아키라는 1989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하여 1999년까지 활동했다. 1989년에는 1군에 출장하지 못했지만, 2군에서 주니어 올스타 게임에 출전하는 등 활약하며 등번호를 33번으로 변경했다.[3][4] 1990년에는 1군에 처음 출장하여 우익수와 1루수로 38경기에 출장, 5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1991년에는 어깨 부상과 타격을 살리기 위해 포수에서 내야수(주로 3루수)로 전향했다. 다츠카와 미츠오가 정규 포수로 있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7번 3루수로 개막 선발 출장하여 첫 두 자릿수 홈런(11개)을 기록했지만, 타율은 2할 초반으로 부진했다. 1992년에는 야마자키 류조, 야마다 카즈토시 등과 3루수 레귤러 자리를 다투었다. 5월과 6월에는 부진했지만, 후반에 타율을 끌어올려 9월에는 대부분의 경기에 4번 타자로 발탁되었다.

1993년에는 레귤러로 정착하여 개막 3경기를 제외하고 모든 경기에 4번 타자로 출장,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우며 34홈런으로 홈런왕 타이틀과 베스트 나인을 획득했다. 1994년에는 전반에 부상으로 뒤처졌지만, 6월 복귀 후 부동의 4번 타자로 정착했다. 8월에는 월간 16홈런의 일본 타이기록을 세웠다. 타율은 .321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최종전에서 2타수 무안타에 그치며 알론조 파웰과 마에다 토모노리에게 밀려 3위에 머물렀다.

1995년에는 2번째 홈런왕과 타점왕을 획득하며 2관왕에 올랐지만, 시즌 막바지에 급성 충수염으로 이탈하여 40홈런에는 미치지 못했다. 14도루로 개인 최다 도루를 기록했고, OPS는 리그 1위였다. 1996년에는 시즌 전반부터 타격 호조를 보이며 타율 3할, 32홈런을 기록했다. 개막부터 4번 타자로 전 이닝 출장을 이어갔지만,[5] 8월 29일 요미우리전에서 니시 토시히사가 친 타구에 얼굴을 맞아 오른쪽 눈 와벽 바닥 골절상을 입고 전선에서 이탈했다.[7] 그해 최고 출루율과 골든 글러브상을 획득했고, OPS도 2년 연속 1위를 기록했다. 12월 6일에는 결혼식을 올렸다.[9]

1997년에는 출루율 3할 8푼을 기록했지만, 타율은 .252에 그쳐 4년 연속 수상했던 베스트 나인을 놓쳤다. 1998년에는 개인 최다 100볼넷, 출루율 3할 8푼을 넘겼지만, 개인 최다 103삼진을 기록했고 타율은 .253에 머물렀다. 후반에는 가네모토 도모아키에게 4번 타자 자리를 양보하기도 했다. 1999년에는 8월 12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전에서 1경기 10타점의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을 세웠다.[10] 그해 타율 3할에 육박하는 성적을 남겼다. 시즌 후 FA 권리를 행사하여 요코하마, 한신, 주니치 등이 영입에 나섰지만, 재경 구단을 희망하여[11][12] 요코하마 이적이 유력시되었다. 하지만 요코하마의 신도 다쓰야가 잔류하면서 12월 6일 요미우리 이적이 결정되었다. 등번호 33번은 당시 요미우리 감독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양보했다.[4]

2. 3.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000년 ~ 2005년)

2000년, 전반기 부진에 시달린 다카하시 요시노부를 대신하여 3번 타자로 활약하며 리그 최다 승리 타점을 기록했고 (최다 승리 타점 타이틀 표창은 이 해를 마지막으로 에토가 마지막 수상자가 되었다), 센트럴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특히 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9월 24일 주니치 드래건스전 (도쿄 돔)에서는 4점 뒤진 9회말 당시 마무리 투수 에디 개럴드로부터 동점 만루 홈런을 쳐내는 등 승부 근성을 발휘했다. 이는 200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통산 200호 홈런이었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홈런을 쳤다. 같은 해 시즌 타율은 .256으로 저조했지만 32홈런, 91타점을 기록했다.

2001년에는 이적 후 2년 연속 베스트 나인과 30홈런을 기록하며 슬러거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2002년에는 2할대 초반 타율과 18홈런으로, 주전으로 정착한 이후 최저 성적을 기록했으며, 이 해부터 서서히 성적이 저조해졌다.

2003년에는 전년도부터의 부진이 이어져 2군 (이스턴 리그)으로 강등되는 경험을 하는 등 11년 만에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다. 대타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아졌고, 2004년에는 3루수인 고쿠보 히로키가 다이에에서 이적해 오면서 출장 기회가 더욱 줄어, 선발 출장은 15경기에 그쳤다. 같은 해 홈런도 4개에 그쳐, 전년까지 13년 연속으로 이어지던 두 자릿수 홈런 기록도 끊어졌다.

2005년에는 타율도 2할을 밑돌았고, 선발 출장은 8경기로 완전히 대타 요원이 되었다. 통산 350홈런에 1개만 남겨두고 있었지만, 7월 30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12차전에서 홈런성 타구를 날렸지만, 천장에 맞고 좌익수 플라이가 되어 통산 350호 홈런은 무산되었고, 결국 홈런을 1개도 치지 못했다. 같은 해 오프의 계약 갱신에서는 야구 협약의 한도인 40%를 넘는 삭감이 결정되었다. 그 직후인 2006년 1월 5일,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온 도요다 기요시의 보상 선수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로의 이적이 결정되었다. "FA 이적"과 "다른 선수의 FA 이적에 따른 보상 선수로서의 이적"을 모두 경험한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2. 4.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2006년 ~ 2009년)

2006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서는 나이와 선수 경력 모두 팀 최고령이 되었으며, 풍부한 경험과 인품으로 젊은 선수들이 많은 팀에서 귀중한 존재감을 나타냈다. 36세 생일인 4월 15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는 우치 류야로부터 2년 만에 통산 350호 홈런을 쏘아 올렸다. 또한 7월 19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는 주축 선수인 알렉스 카브레라나 와다 가즈히로와 같은 주력 타자들이 선발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7년 만에 4번 타자로 출전(마쓰이 히데키기요하라 가즈히로 등의 존재로 인해,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에는 한 번도 4번 타자를 맡지 않았다.)하여, 6회 초에 사토 마코토로부터 좌익수 방향 2루타를 날려 통산 1,500안타를 달성했다. 이적 후에는 주로 대타(좌완 투수 상대)로 기용되었으며, 때로는 지명 타자나 1루수로 선발 출전했다.

2007년에도 대타나 지명 타자로 활약했다. 세이부 이적 후 처음으로 3루 수비를 맡아 3루수로서 9경기에 선발 출장했으며, 카브레라가 실수를 연발했을 때는 카브레라가 지명 타자로 전환하고, 에토가 1루수를 맡는 등, 베테랑이지만 수비에서도 건재함을 과시했다. 9월 29일 오릭스 버펄로스와의 22차전에서 프로 야구 사상 33번째 통산 1,000타점을 달성했다. "열심히 쳤습니다. 폐를 끼쳤지만 이토 감독님, 모두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코멘트했다.

2008년, 전년과 마찬가지로 대타의 비장의 카드로 활약했으며, 크레이그 브라젤이 부상했을 때는 4번 1루수로 선발 기용되었다. 타율은 .206으로 낮았지만, 20개의 안타 중 홈런이 7개로, 장타력을 발휘했다. 이 해에 다시 FA 권리를 얻었지만, 행사하지 않고 잔류하기로 합의했다. 일본 시리즈 제패와 구단 사상 첫 아시아 챔피언에 기여했다.

2009년, 대타 출전이 많았지만, 타율 1할대에 머무는 부진에 빠져, 8월 6일 2군으로 강등되었다. 그 후 다시 1군에 승격되지 못하고, 10월 2일에 현역 은퇴를 발표, 11월 4일에 임의 은퇴 선수로 공시되었다.

3. 지도자 경력

에토 아키라는 2009년 11월 10일, 친정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2군 육성 담당 코치로 취임하여 2010년 시즌을 맞이했다. 2011년부터는 1군 타격 코치를 맡았지만, 2014년에 2군 타격 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2015년 10월 27일, 2016년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군 타격 코치로 다시 취임하는 것이 발표되었다.

2018년부터는 3군 감독으로 보직이 변경되었지만, 10월 22일에 2019년 시즌의 코치 계약을 맺지 않기로 발표되어 그대로 퇴단했다.

2022년 3월 21일, MAZDA Zoom-Zoom 스타디움 히로시마(에토 퇴단 후 2009년부터 카프의 홈구장)에서 개최된 카프의 OB전 "Carp Legend Game"에 출전했다. 1999년 오프에 카프를 FA로 떠난 이후, 오랜만에 카프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참여했다. 에토 본인은 오제키 타카후미(더 기스)의 취재에 대해, 처음에는 "FA로 떠난 내가 출전할 자격은 없다"는 이유로 참가를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주변 친구들의 강한 권유와, 같은 FA로 카프를 떠난 김현도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참가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4. 수상 및 타이틀 경력

4. 1. 타이틀


  • 홈런왕 : 2회(1993년, 1995년)
  • 타점왕 : 1회(1995년)
  • 최고 출루율 : 1회(1996년)
  • 최다 승리 타점 : 1회(2000년) ※특별상

4. 2. 수상


  • 베스트 나인 : 7회(1993년 ~ 1996년, 1998년, 2000년, 2001년)
  • 골든 글러브상 : 1회(1996년)
  • 월간 MVP : 4회(1994년 8월, 1995년 6월, 1999년 8월, 2000년 6월)
  • JA 전농 Go·Go상 : 2회(Go Spikes상 : 1994년 4월, Magic Glove상 : 1997년 6월)

5. 개인 기록

; 첫 기록


  • 첫 출장·첫 타석: 1990년 4월 7일, 대 한신 타이거스 1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7회말에 기토 마코토의 대타로 출장, 나카니시 기요키를 상대로 삼진
  • 첫 선발 출장: 1990년 6월 14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1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5번·우익수로 선발 출장
  • 첫 안타: 상동, 6회말에 이마나카 신지를 상대로 유격수 내야 안타
  • 첫 홈런·첫 타점: 1990년 6월 16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즈 11차전 (아이즈 구장), 1회초에 아라우라 스토무를 상대로 좌월 2점 홈런
  • 첫 도루: 1992년 6월 2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1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4회말에 2루 도루 (투수: 척 캐리, 포수: 오쿠보 히로모토)

; 기록 달성 경력

  • 100홈런: 1995년 4월 2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4회말에 마키하라 히로미를 상대로 2점 홈런 ※역대 181번째
  • 150홈런: 1996년 7월 2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3차전 (구레 니카와 구장), 2회말에 미우라 다이스케를 상대로 좌월 솔로 홈런 ※역대 105번째
  • 200홈런: 1998년 6월 3일, 대 한신 타이거스 8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7회초에 고미조 가쓰유키를 상대로 좌월 2점 홈런 ※역대 69번째
  • 1000경기 출장: 1999년 7월 17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6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4번·3루수로 선발 출장 ※역대 352번째
  • 1000안타: 1999년 8월 29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4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3회말에 구와타 마스미를 상대로 중전 안타 ※역대 198번째
  • 250홈런: 2000년 4월 22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5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6회초에 도마베치 데쓰토를 상대로 좌월 3점 홈런 ※역대 40번째
  • 300홈런: 2001년 7월 12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6차전 (도쿄 돔), 4회말에 이시이 가즈히사를 상대로 좌월 3점 홈런 ※역대 25번째
  • 1000삼진: 2003년 4월 29일, 대 한신 타이거스 5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8회초에 이가와 게이를 상대로 ※역대 31번째
  • 1500경기 출장: 2003년 7월 20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20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6번·3루수로 선발 출장 ※역대 139번째
  • 350홈런: 2006년 4월 15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5차전 (인보이스 SEIBU 돔), 7회말에 우치 류야를 상대로 좌월 2점 홈런 ※역대 19번째
  • 1500안타: 2006년 7월 19일, 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3차전 (후쿠오카 Yahoo!JAPAN 돔), 6회초에 사토 마코토를 상대로 좌익선 2루타 ※역대 88번째
  • 1000타점: 2007년 9월 29일, 대 오릭스 버팔로스 22차전 (교세라 돔 오사카), 6회초에 기시다 마모루를 상대로 좌전 적시타 ※역대 33번째
  • 1000득점: 2009년 6월 13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3차전 (세이부 돔), 2회말에 가타오카 야스유키의 적시 2루타로 기록 ※역대 35번째

; 기타 기록

  • 올스타 게임 출장: 6회 (1993년, 1995년, 1996년, 1998년, 1999년, 2001년) ※2000년에도 선출되었지만 출장을 사퇴[22]
  • 시즌 12 희생 플라이: 1995년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
  • 1경기 10타점: 1999년 8월 12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20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
  • 니시노미야 구장 공식전 마지막 홈런: 1996년 8월 24일, 대 한신 타이거스 21차전, 9회초에 유후네 도시로를 상대로

5. 1. 첫 기록

에토 아키라는 1990년 4월 7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와의 1차전에서 7회말 기토 마코토의 대타로 출장하여 첫 타석에서 나카니시 기요오키에게 삼진을 당했다. 1990년 6월 14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11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는 5번 타자 겸 우익수로 첫 선발 출장하여 6회말에 이마나카 신지를 상대로 유격 내야 안타를 기록하며 첫 안타를 신고했다. 1990년 6월 16일 아이즈 구장에서 열린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와의 11차전에서는 1회초 니우라 히사오를 상대로 좌월 2점 홈런을 기록하며 첫 홈런과 첫 타점을 동시에 달성했다. 1992년 6월 25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1차전에서는 4회말에 2루 도루를 성공시키며(투수: 척 케리, 포수: 오쿠보 히로모토) 첫 도루를 기록했다.

5. 2. 기록 달성 경력

에토 아키라는 선수 생활 동안 여러 기록을 달성했다. 1990년 4월 7일, 대 한신 타이거스 1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7회말 기토 마코토의 대타로 출장하여 나카니시 기요키를 상대로 삼진을 당하며 첫 출장 및 첫 타석을 기록했다. 같은 해 6월 14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1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에 5번·우익수로 선발 출장하여 6회말 이마나카 신지를 상대로 유격수 내야 안타를 기록하며 첫 안타를 만들어냈다. 이틀 뒤인 6월 16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즈 11차전(아이즈 구장)에서는 1회초 아라우라 스토무를 상대로 좌월 2점 홈런을 기록하며 첫 홈런과 첫 타점을 동시에 달성했다. 1992년 6월 2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1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는 4회말 2루 도루를 성공시키며 첫 도루를 기록했다.

통산 기록으로는 1995년 4월 2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통산 100홈런, 1996년 7월 2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서 통산 150홈런, 1998년 6월 3일 대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통산 200홈런, 1999년 7월 17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통산 1000경기 출장, 1999년 8월 29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통산 1000안타, 2000년 4월 22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통산 250홈런, 2001년 7월 12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통산 300홈런, 2003년 4월 29일 대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통산 1000삼진, 2003년 7월 20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서 통산 1500경기 출장, 2006년 4월 15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통산 350홈런, 2006년 7월 19일 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 통산 1500안타, 2007년 9월 29일 대 오릭스 버펄로스전에서 통산 1000타점, 2009년 6월 13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통산 1000득점을 기록했다.

그 외에도 올스타 게임에 6회 출장(1993년, 1995년, 1996년, 1998년, 1999년, 2001년)했으며, 2000년에도 선출되었으나 출장을 사퇴했다.[22] 1995년 시즌 12희생 플라이(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 1999년 8월 12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서 1경기 10타점(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을 기록했다. 또한 1996년 8월 24일, 대 한신 타이거스 21차전에서 니시노미야 구장 공식전 마지막 홈런을 기록했다.

5. 3. 기타

에토 아키라는 1993년, 1995년 ~ 1996년, 1998년 ~ 1999년, 2001년에 올스타전에 6회 출장했다. 등장곡으로는 미소라 히바리의 아이상상(2000년), Steve Vai의 「San-San-Nana-Byoshi」(2001년), CHAGE and ASKA의 YAH YAH YAH(2002년 - 2005년), John Lennon의 「Power To The People」 (2006년 - 2009년)를 사용했다.

6. 상세 정보

6. 1.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소속경기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루타타점도루도루자희생 번트희생 플라이볼넷고의 4구사구삼진병살타타율출루율장타율OPS
1990년히로시마388171111732539100010801162.239.325.549.874
1991년91317260335691111003104414606875.215.345.385.730
1992년893172774180140161424522323223514.289.366.513.879
1993년13156948288136151342558274037816949.282.387.529.916
1994년10546639083125210282308171066911816.321.418.5901.008
1995년12756646292132301392811061450129082936.286.396.6081.004
1996년10646938893122191322397983017327682.314.431.6161.047
1997년1104793937899123282017630018144926.252.384.511.896
1998년132580475881201702822181730597131037.253.379.465.845
1999년12151743782127293272437993027523805.291.397.556.953
2000년요미우리12752845784117171322329171465803924.256.340.508.847
2001년134568485861382113025187973373047211.285.381.518.898
2002년125471414531001211816856535249016312.242.322.406.728
2003년105296269307241171294321142002433.268.319.480.798
2004년55111971422404381510001301251.227.324.392.716
2005년811119371640020400021600253.172.288.215.503
2006년세이부521461241530705521910012100312.242.349.419.769
2007년43118109102551341170000801282.229.288.376.664
2008년4211197920107421700011300212.206.297.433.730
2009년20443945200710010301100.128.209.179.389
통산 : 20년183469155866100415592461736429311020833722529232149117592.268.370.504.874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6. 2. 연도별 수비 성적

연도구단포수1루수3루수외야수
경기자살보살실책병살포일수비율경기자살보살실책병살수비율경기자살보살실책병살수비율경기자살보살실책병살수비율
1990히로시마2200001.0006160031.000-17140001.000
1991-2417014117.995533782117.915-
1992-1978826.97769439786.946-
1993-5026219428.98611072163713.971-
1994--105821771319.938-
1995--127942351124.968-
1996--106632081423.951-
1997--110821651313.950-
1998--1321002481823.950-
1999-2420013215.991100831571013.960-
2000요미우리-2657210.983123781801516.945-
2001-22433021.000133851851513.947-
2002-7950231337.994733571610.946-
2003-291118114.99267319567.955-
2004-1058312.984151121031.000-
2005-33133519.99310000--
2006세이부-7484041.000--
2007-201119311.9769314021.000-
2008-2416370121.000--
2009-435011.972--
통산2200001.000383198712620161.99113428892093147192.95317140001.000


  • '''굵은 글씨'''는 골든 글러브 상 수상 연도

6. 3. 등번호

1989년 에토 아키라의 등번호는 51번이었다. 1990년부터 2009년까지는 33번, 2010년부터 2017년까지는 80번, 2018년부터는 77번을 사용하고 있다.

7. 평가 및 기타

에토 아키라는 여름에 강한 "여름 남자"로 알려져 있으며, 1994년 8월을 비롯해 하계에 월간 MVP를 여러 차례 획득했다. 팀 동료였던 마에다 토모노리는 더운 여름 체력이 떨어지는 자신과 달리 에토가 우동이나 라면을 먹는 모습에 경악했다고 말했다.[18]

안타에 비해 홈런이 많아 통산 IsoP는 0.236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에는 키요하라 카즈히로, 마츠이 히데키 등이 4번 타자를 맡아 4번 타자로 선발 출장한 적은 없었다.[19]

다이요・요코하마전에 강해 1993년부터 2001년까지 매년 8개 이상의 홈런을 쳤으며, 1995년에는 14개, 통산 98개의 홈런을 날렸다. 이는 키누가사 사치오, 카네모토 토모아키 등보다 많은 기록이며, 오 사다하루에 이어 3위에 해당한다.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는 통산 42개의 홈런을 기록했고, 프로 생활에서 한 경기 3홈런을 3번 기록했는데 모두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였다.

세이부 시절에는 정신적 지주로서 젊은 선수들에게 존경받았고, 와타나베 히사노부 감독도 "에토 씨"라고 불렀다.[20]

프로 입단 이후 사요나라 안타와 인연이 없었고, 첫 사요나라는 2001년 8월 7일 한신전에서 기록한 사요나라 홈런이었다. 사요나라 홈런 없이 통산 최다 홈런을 기록한 선수이다.

히로시마 시절 사이토 마사키에게 약했고, 첫 안타는 1999년 4월 15일에 나왔다.

체형은 근육과 함께 지방이 붙은 떡대형이었다.[21]

고등학교 동급생으로 만화가 안노 모요코와 전 배구 일본 대표 이즈미카와 마사유키가 있으며, 2년 선배로 Mr.Children사쿠라이 카즈토시가 있다.

세이부 입단 기자 회견에서 소년 시절 라이온즈 벗의 회 (팬클럽)에 가입했음을 밝혔다.

세이부에서의 등장 테마 곡은 존 레논의 "Power to the people"이다.

분카 방송 『분카 방송 라이온즈 나이터』에서는 에토를 "'''미소의 바주카'''"라고 칭하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Akira Eto Japanese Leagues Statistics & History https://www.baseball[...]
[2] 웹사이트 https://www.chugoku-[...]
[3] 문서
[4] 서적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2006年夏季号
[5] 뉴스 広島いきなり10失点 投手もいない、江藤もいない 横浜12-3広島 横浜スタジアム 21回戦(横浜11勝10敗) 朝日新聞 1996-08-31
[6] 뉴스 セ本塁打王だれ?山崎<33>、大豊<32>、松井<32>、江藤<30> V争い絡み過熱 競り合いに強い『経験者』 中日新聞 1996-08-22
[7] 뉴스 江藤(広)が負傷退場 朝日新聞 1996-08-30
[8] 뉴스 江藤は今季絶望 眼窩底骨折 中日新聞 1996-08-31
[9] 뉴스 プロ野球契約更新 【広島】江藤が300万円返上 中日新聞 1996-12-11
[10] 웹사이트 【8月12日】1999年(平11) ハマスタで1試合3本塁打!江藤、3度目の正直 https://web.archive.[...] 2012-09-12
[11] 뉴스 竜 江藤獲得へ名乗り 中日新聞 1999-11-20
[12] 뉴스 読売新聞 1999-11-20
[13] 웹사이트 来季の一、二軍コーチングスタッフについて https://www.giants.j[...] 読売巨人軍公式サイト 2015-10-27
[14] 웹사이트 Carp Legend Game 〜共に立ち上がろう。広島は屈しない〜 https://www.htv.jp/c[...] 広島テレビ放送 2022-11-21
[15] 뉴스 広島江藤智氏、OB戦で現役時代ほうふつ打撃披露「達川さんがお前やれって」最終回に捕手も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新聞社 2022-11-21
[16] 뉴스 広島レジェンドゲーム 江藤智氏が捕手で出場「やらせてもらって良かったなと」 https://www.tokyo-sp[...] 東京スポーツ新聞社 2022-11-21
[17] 뉴스 「殺されそうな練習でも、ただただありがたかった」江藤智とカープの記憶 https://bunshun.jp/a[...] 文藝春秋 2022-11-21
[18] Youtube 【最強の男】前田智徳が憧れた天才バッター!!球界一美しいHRのその裏で…「後輩 荒木雅博は◯◯しない!!」 https://www.youtube.[...] 2024-02-29
[19] 웹사이트 微笑みのバズーカ、江藤智の野球人生に迫る。 https://bbcrix.com/a[...] Baseball Crix 2018-03-12
[20] 웹사이트 "星一徹"に育てられて…西武・江藤智内野手(上) http://www.zakzak.co[...] 夕刊フジ 2008-11-29
[21] Youtube “アニキ”金本知憲も驚愕した 球界の飛ばし屋とは?【ザ・伝説の野球人大全集】 https://www.youtube.[...] フルタの方程式【古田敦也 公式チャンネル】 2021-08-30
[22] 서적 ベースボール・レコード・ブック2001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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