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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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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상순은 1894년에 태어나 1963년에 사망한 시인으로, 도시샤 대학교 종교철학과를 졸업하고, 1920년 잡지 《폐허》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어둡고 절망적인 시를 주로 썼으며, 개신교에서 불교로 개종하여 독신으로 살았다. 보성고보 교사, 불교중앙학림 교수를 역임하고, 예술원 종신회원, 서울특별시 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오상순 시선》 등이 있으며, 1963년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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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오상순
한글오상순
한자吳相淳
히라가나ごそうじゅん
가타카나オ・サンスン
작가 정보
이름오상순
출생일1894년 8월 9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일1963년 6월 3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조선 → 대한제국 → 대한민국
선운(禪雲), 공초(空超)
필명오성해(吳星海)
학력일본 도시샤 대학교 종교철학과 학사
직업시인, 수필가
장르시문학, 수필
소속동국대학교 교수
활동 기간1920년 ~ 1963년
종교개신교불교
배우자
자녀

2. 생애

오상순은 일본 도시샤 대학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한 후, 1920년 동인지 《폐허》 활동을 통해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아시아의 밤》, 《허무혼의 독언》 등 허무주의적 경향의 시를 발표했으며, 이후 교직 생활을 거쳐 불교에 귀의하여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담배 애호가로도 알려져 있다. 말년에는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고, 1963년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894년 음력 8월,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1가 10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 오씨(海州吳氏)이며, 아버지는 오태언(吳泰兗)이다. 그의 집안은 5백 석 규모의 지주로 상당히 부유했으며, 아버지 역시 오상순이 신교육을 받는 것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일찍이 어의동학교(於義洞學校, 현 서울교동초등학교)와 경신학교(儆新學校, 현 경신고등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오상순이 13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이후 재혼하였다. 이러한 가정 환경의 영향인지, 그는 18세 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집을 나섰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교 종교철학과(同志社大學文學部哲学科일본어)에 입학하였다. 1918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2. 2. 문단 활동과 방랑

1920년, 김억, 남궁벽, 염상섭, 황석우 등과 함께 동인지 《폐허》를 창간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폐허》에 평론 「시대고와 희생(時代苦とその犠牲)」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이 글에서 그는 3.1 운동 실패 후 일제강점기라는 현실 속에서 좌절을 겪던 조선인들에게 희생정신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건설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의 초기 작품에서는 극복 의지보다는 운명에 대한 허무함이 더 강하게 나타나기도 했다.

《폐허》 동인으로 활동하던 시기, 오상순은 독일계 미국인 선교사의 딸과 연애를 하였으나, 혼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여성은 동인이었던 황석우의 전 애인이었고, 이로 인해 친구의 연인을 빼앗았다는 오해를 받게 되어 결국 헤어졌다.

1921년에는 조선중앙불교학교의 교원으로 활동했으며, 1923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6년, 그는 부산 범어사에 들어가 2년간 머무르며 선(禪)을 수행하였다. 본래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그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는데, 이는 삶의 '허무'를 해탈을 통해 극복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범어사에서 나온 후에는 대구와 부산 등지를 방랑하며 시를 썼다. 대구에서는 이상화의 집에 머물며 이장희, 백기만 등과 교류하였다. 그의 방랑 생활을 안타깝게 여긴 친구들의 주선으로 한 여성과 만나 대구 덕산동에서 함께 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오뎅 가게를 열었으나, 손님들에게 술을 자주 대접하는 바람에 장사는 잘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시기 '안나'라는 이름의 개를 길렀는데, 개가 죽자 관을 만들어 '공초견장(空超犬葬)'이라 이름 붙여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2. 3. 해방 이후와 말년

1945년 해방 직후 서울 서대문 근처에 잠시 거주했지만 곧 대구로 돌아갔다. 1946년에는 서울 근교의 역경원, 선학원, 조계사 등지에 기식하며 지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무렵에는 다시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피난 생활을 하였다. 1953년 서울이 수복되자 상경하여 조계사에 몸을 의탁하고 정착하였다. 이때부터 매일 아침 명동의 다방에 나가 젊은이들에게 시와 철학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이 되었고, 1956년에는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1961년 10월, 불교계 분쟁이 일어나자 지인 심하벽(沈河碧)이 근무하던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의 정이비인후과병원(鄭耳鼻咽喉科病院)에서 약 5개월간 생활하기도 했다. 1962년에는 서울시문화상과 대통령상을 받았다.

1963년 2월, 고혈압, 심장병, 폐렴 등의 지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가 20여 일 만에 퇴원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3월 6일 병세가 다시 악화되어 적십자병원에 재입원하였다. 결국 1963년 6월 3일 밤 9시 37분, 향년 70세의 나이로 적십자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북한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3. 작품 세계

1920년 문예 동인지 《폐허》의 동인으로 참여하며 한국 신시 초창기부터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아시아의 밤》, 《허무혼의 독언》 등 어둡고 절망적인 분위기의 시를 주로 썼다. 1930년 불교중앙학림(동국대학교의 전신)에서 교편을 잡았던 인연으로 불교에 귀의한 이후에는 작품 경향에 변화가 나타난다. 후기 작품으로는 《한잔술》, 《첫날밤》 등이 있으며, 그의 시들을 모은 저서로 《오상순 시선》이 있다.

4. 평가

1920년 문예 동인지 《폐허》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한국 신시 초창기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식민지 현실 속에서 겪는 고통과 허무를 깊이 있게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아시아의 밤》, 《허무혼의 독언》과 같은 초기 시들은 어둡고 절망적인 분위기를 통해 시대적 아픔과 개인적인 고뇌를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불교에 귀의하면서 불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이러한 허무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시는 전반적으로 어두운 정서를 담고 있지만, 단순히 절망에 머무르지 않고 암울한 시대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5. 유행어

"이라 하면 수주(변영로)를 뛰어넘을 자가 없고 담배라 하면 공초('''오상순''')를 뛰어넘을 자가 없다."라는 말이 1950년대 중반 서울에서 유행했다. 이는 당시 시인이었던 변영로가 유명한 애주가였고, '''오상순'''이 유명한 애연가였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6. 기타

공초문학상은 오상순의 시문학 업적을 기념하여 제정된 문학상이다.

7. 오상순을 연기한 배우

8.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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