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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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옥저는 고대 함경도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부족 사회이다. 처음에는 위만조선에 속했으나 한나라의 한사군 설치 이후 현도군에 편입되었고, 이후 고구려에 신종했다. 3세기에는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며, 백산말갈을 거쳐 발해의 일부가 되었다. 옥저는 동옥저, 남옥저, 북옥저로 구분되기도 하며, 고구려와 유사한 문화와 풍습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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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저 - 구파해
구파해는 서기 25년 남옥저에서 백제에 귀화하여 백제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으며, 온조왕은 그의 귀화를 받아들여 백제의 국경 안정과 주변 세력과의 경쟁 우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했다. - 한국의 고대 부족 - 동예
동예는 오늘날 원산에서 강릉에 이르는 동해안 중부 지역에 위치했던 부여족 계통의 군장국가로, 옥저와 함께 한사군에 속했으며, 매년 음력 10월에 무천이라는 축제를 열었고, 단궁, 과하마, 반어피 등의 특산물이 있었다. - 원삼국 시대 - 진국
진국은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사이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로 추정되지만, 실존 여부, 위치, 규모에 대한 학계 논쟁이 있으며, 사서 기록에 따라 위만조선에 복속된 국가로, 또는 삼한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 원삼국 시대 - 동예
동예는 오늘날 원산에서 강릉에 이르는 동해안 중부 지역에 위치했던 부여족 계통의 군장국가로, 옥저와 함께 한사군에 속했으며, 매년 음력 10월에 무천이라는 축제를 열었고, 단궁, 과하마, 반어피 등의 특산물이 있었다.
| 옥저 | |
|---|---|
| 개요 | |
![]() | |
| 존속 기간 | 기원전 3세기 ~ 서기 285년 |
| 위치 | 한반도 북동부 및 만주 동부 |
| 민족 | 예맥족 |
| 종교 | 토속신앙 |
| 언어 | 예맥어 |
| 명칭 | |
| 한글 | 옥저(沃沮) |
| 로마자 표기 | Okjeo |
| 어원 | '비옥한 늪' 또는 '소금 웅덩이' |
| 역사 | |
| 성립 이전 | 고조선 |
| 주요 사건 | 기원전 3세기: 건국 1세기: 고구려에 복속 244년: 위나라의 침공으로 궤멸 285년: 선비족의 침공으로 멸망 |
| 사회 | |
| 정치 체제 | 군장이 다스리는 읍락 국가 |
| 풍습 | 민며느리제 가족 공동 무덤 |
| 경제 | |
| 주요 생산물 | 소금 어물 |
2. 위치
옥저는 고대 함경도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한 부족 사회였다. 북쪽으로는 읍루·부여, 남쪽으로는 예(濊)와 접하고 있었다. 옥저는 동옥저라고도 불렸으며, 남옥저와 북옥저로 구분되었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남옥저는 함흥 일대에, 북옥저는 길림 연변에서 두만강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다.
『삼국지』에서는 옥저가 고구려의 개마대산(장백산맥) 동쪽에서 해안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읍루와 부여, 남쪽으로는 예맥과 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옥저의 언어는 고구려와 대체로 같고 때로는 조금 달랐다.
"옥저"라는 독자적인 국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한 현토군의 부조현(현재의 함경남도 함흥시 부근)에 있던 예맥계 종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옥저는 예에서 갈라져 나온 부여·동예나 고구려와 동계로 여겨진다. 1958년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서 출토된 "부조예군(夫租薉君)" 은인(銀印)과 1961년 출토된 "부조장인(夫租長印)" 은인(銀印), 『한서』 지리지 "부조" 등을 볼 때 본래는 "부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3]。그러나 『삼국지』 이후에는 옥저로 표기되는데, 이는 부조를 오기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북옥저는 『삼국지』 동옥저전에 나오는 명칭으로, 별명은 '''치구루'''이다. 남옥저(동옥저)에서 800리 떨어져 있지만, 남북 모두 같은 습속을 가지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읍루, 서쪽으로는 부여,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해 있었다. "치구루"는 "매구"로 적힌 예가 있어, 통설에서는 "치구루"는 오기이고 "매구루"가 옳다고 여겨진다.
2. 1. 통설
옥저는 고대 함경도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한 북부의 부족 사회였다. 북쪽은 읍루·부여, 남쪽은 예(濊)에 접하고 있었다. 옥저는 동옥저로도 불렸고, 다시 남옥저와 북옥저로 구분되었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남옥저는 함흥 일대에 있었고, 남쪽으로는 영흥 부근에서 동예와 경계를 이루었으며, 북옥저는 길림 연변에서 두만강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다.[12]《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옥저와 주변국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위치하여 큰 바다(大海)와 접해 있었다. 그 지형은 동북쪽은 좁고, 서남쪽은 길어서 천 리나 되었다. 북쪽에는 부여와 읍루, 남쪽에는 예맥과 접해 있었다.
-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에 있으며, 남쪽으로 조선, 예맥, 동쪽으로 옥저, 북쪽으로 부여와 접해 있었다.
- 북옥저는 치구루라고도 불렸다. 남옥저에서 8백여 리 거리에 있었으며, 풍속은 남옥저와 북옥저가 같았고, 읍루와 접해 있었다.
- 읍루는 부여 북동쪽 천여 리에 있으며, 큰 바다와 접해 있었다. 남쪽으로는 북옥저와 접해 있었고, 북쪽은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 예는 남쪽으로 진, 북쪽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해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와 접해 있었다.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12]
《후한서》 「동이열전」의 옥저에 대한 내용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같거나 거의 비슷하다.
2. 2. 다른 의견
- 윤내현은 옥저가 원래 고조선의 제후국으로 요서 지역의 대릉하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나라가 이 유역에 현토군을 설치하자 이를 피해 동쪽으로 이동하여 함경도에 정착한 것이 동옥저이며 옥저와 동옥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3]
- 《후한서》에서는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치어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라고 하였다.[14] 이덕일은 옥저를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 옥저의 위치에 의문을 제기하였다.[15]
- 옥저는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서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臣屬)하게 되었다.[16][15]
3. 변천
기원전 2세기경 남옥저 집단은 위만조선에 복속되었고, 기원전 108년에는 한의 군현에 소속되었다. 임둔군에 소속되었다가 기원전 82년 임둔군이 폐지되면서 현도군으로 소속이 변경되었고, 기원전 75년 현도군이 제2 현도군으로 이동하면서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소속된 것으로 추정된다.[17] 기원후 30년 한의 제후국으로 봉해졌으나, 56년에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244년 관구검이 이끄는 위(魏)나라 군대에 큰 피해를 입었고, 285년 고구려의 직접 지배가 시작되었다.[18] 북옥저 지역에 남은 무리들은 이후 동부여를 이루었고, 이 동부여는 410년 광개토대왕의 원정으로 소멸되었다.
thumb 시대, 서기 1년경.]]
옥저는 초기 역사에서 중국 군현과 고구려의 지배 사이를 오갔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108년까지 고조선의 통치를 받았다. 기원전 107년에는 현도군에 편입되었다.[2] 현도군이 고구려의 팽창으로 요동반도로 후퇴하면서, 동옥저는 낙랑군의 동부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2] 옥저는 주변 국가들의 끊임없는 간섭으로 인해 완전한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했다. 기원전 28년, 동명성왕은 부위엄을 보내 북옥저를 공격했다. 서기 1세기 또는 2세기에는 고구려 태조왕이 옥저를 조공국으로 만들어 고구려에 특산물을 바치게 했다. 244년 위의 고구려 침입 때, 고구려 동천왕은 잠시 북옥저로 후퇴했고, 285년에는 부여의 조정 또한 북방 유목민의 공격을 피해 일시적으로 옥저로 피신했다.
5세기 초, 옥저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었다.
삼국지 동옥저전에 따르면, 처음에는 위만조선에 귀속되었으나, 한나라 무제에 의해 한사군(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이 설치되었을 때, 옥저성(부조성)을 현도군의 현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옥저(부조)는 현도군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후에 현도군의 축소에 따라 부조현이 낙랑군으로 전속되면서 옥저(부조)는 낙랑군에 귀속되었다. 이후, 3세기 무렵에는 고구려에 신종했다.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고구려 왕 우위거가 북옥저로 도망쳤다고 한다. 이 기사에 이어 북옥저·남옥저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남옥저는 동옥저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후에 옥저는 「백산말갈」이 되었고, 발해가 건국된 이후에는 발해인의 일부가 되었다.
4. 문화
옥저 문화에 대한 지식은 단편적이다. 동예와 마찬가지로, 옥저의 언어, 음식, 의복, 건축 양식, 풍습 등은 고구려와 유사했다. 옥저인들은 아이의 신부가 성년이 될 때까지 신랑의 가족과 함께 사는 약혼 풍습을 행했으며, 한 가족의 죽은 자를 하나의 관에 합장했다.[1]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현토태수 왕기가 관구검의 명령으로 고구려 왕을 추격하여 북옥저의 동쪽 경계에 이르렀을 때, 그곳 노인에게 "이 바다의 동쪽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까?"라고 묻자, 노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옛날에 이곳 사람이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폭풍우를 만나 10일 동안 표류하여 동쪽의 어떤 섬에 표착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섬에는 사람이 있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의 풍속에서는 매년 7월에 어린 여자를 골라 바다에 빠뜨립니다."
- "바다 건너편에 여자만 있고 남자가 없는 나라도 있습니다."
- "한 장의 천으로 된 옷이 바다에서 흘러왔습니다. 그 몸통은 보통 사람과 다름없었지만, 양쪽 소매는 3장이나 되었습니다. 또한, 난파선이 해안가에 밀려온 적이 있었는데, 그 배에는 목덜미에도 얼굴이 하나 더 있는 인간이 있어서 생포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을 걸어도 말이 통하지 않았고, 음식을 먹지 않은 채 죽었습니다."[2]
5. 옥저 관련 기록
옥저는 동옥저로도 불렸고, 남옥저와 북옥저로 구분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남옥저는 함흥 일대에 위치했으며, 남쪽으로는 영흥 부근에서 동예와 경계를 이루었다. 북옥저에 대해서는 길림 연변에서 두만강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옥저와 주변국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대상 | 내용 |
|---|---|
| 동옥저 |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으로 큰 바다(大海)와 접해 있다. 지형은 동북쪽은 좁고 서남쪽은 길어서 천 리나 된다. 북쪽으로는 부여와 읍루, 남쪽으로는 예맥과 접해 있다.[12] |
| 고구려 | 요동 동쪽 천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조선, 예맥, 동쪽으로는 옥저, 북쪽으로는 부여와 접해 있다.[12] |
| 북옥저 | 치구루라고도 불린다. 남옥저에서 8백여 리 떨어져 있으며, 풍속은 남북이 같고, 읍루와 접해 있다.[12] |
| 읍루 | 부여 동북쪽 천여 리에 있으며, 큰 바다와 접해 있다. 남쪽으로는 북옥저와 접해 있고, 북쪽은 그 끝을 알 수 없다.[12] |
| 예 | 남쪽으로는 진,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와 접해 있다.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12] |
《후한서》 「동이열전」의 옥저 관련 내용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같거나 거의 비슷하다.
통설과 다른 소수 의견은 다음과 같다.
- 윤내현은 옥저가 원래 고조선의 제후국으로 요서 지역의 대릉하 유역에 위치했으나,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나라가 이 유역에 현토군을 설치하자 이를 피해 동쪽으로 이동하여 함경도에 정착한 것이 동옥저이며, 옥저와 동옥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3]
- 《후한서》에서는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을 현도군으로 삼았다. 이후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4] 이덕일은 이를 옥저가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겨진 것으로 해석하여 옥저의 위치에 의문을 제기하였다.[15]
- (옥저는)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서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臣屬)하게 되었다.[15][16]
6. 기타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후한의 현토태수 왕기가 관구검의 명령으로 고구려 왕을 추격하여 북옥저의 동쪽 경계에 이르렀을 때, 그곳의 노인에게 "이 바다의 동쪽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까?"라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1]
"옛날에 이곳 사람이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폭풍우를 만나 10일 동안 표류하여 동쪽의 어떤 섬에 표착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섬에는 사람이 있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의 풍속에서는 매년 7월에 어린 여자를 골라 바다에 빠뜨립니다."
또한, 노인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1]
"바다 건너편에 여자만 있고 남자가 없는 나라도 있습니다. 한 장의 천으로 된 옷이 바다에서 흘러왔는데, 그 몸통은 보통 사람과 다름없었지만, 양쪽 소매는 3장이나 되었습니다. 또한, 난파선이 해안가에 밀려온 적이 있었는데, 그 배에는 목덜미에도 얼굴이 하나 더 있는 인간이 있어서 생포되었으나, 말을 걸어도 말이 통하지 않았고 음식을 먹지 않은 채 죽었습니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encykorea.aks[...]
Academy of Korean Studies
[2]
웹사이트
http://encykorea.aks[...]
Academy of Korean Studies
[3]
서적
朝鮮地域史の形成
岩波書店
1999
[4]
문서
三国志』魏書・烏丸鮮卑東夷伝・高句麗「東夷旧語以為夫餘別種,言語諸事,多与夫餘同」、『後漢書』東夷列伝・高句驪「東夷相傳以為夫餘別種,故言語法則多同」
[5]
문서
『三国志』魏書・烏丸鮮卑東夷伝・東沃沮「其言語与句麗大同,時時小異」、濊「言語法俗大抵与句麗同,衣服有異」、『後漢書』東夷列伝・東沃沮「言語,食飲,居處,衣服有似句驪」、濊「耆旧自謂与句驪同種,言語法俗大抵相類」
[6]
문서
『三国志』魏書・烏丸鮮卑東夷伝・挹婁「其人形似夫餘,言語不与夫餘、句麗同」、『後漢書』東夷列伝・挹婁「人形似夫餘,而言語各異」
[7]
문서
범엽, 《후한서》(5세기), 〈제85권〉 “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흙은 비옥하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오곡이 마땅히 잘 되며 밭농사에 좋다.)
[8]
문서
《삼국지》〈위지〉오환선비동이전 옥저전(其土地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
[9]
문서
범엽, 《후한서》(5세기), 〈제85권〉 “言語、食飲、居處,衣服,有似句驪。”(언어·음식·거처·의복은 고구려와 닮았다.)
[10]
문서
범엽, 《후한서》(5세기), 〈제85권〉 “其葬,作大木槨,長十餘丈,開一頭為戶,新死者先假埋之,令皮肉盡,乃取骨置槨中。家人皆共一槨,”(장사는 큰 목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장이나 되고 한쪽에 개구부를 만든다. 새로 죽은 자는 이를 임시로 묻었다가, 피부와 살이 썩어지면 이에 뼈만을 취하여 넣는다. 가족이 모두 하나의 곽을 쓴다.)
[11]
문서
노태돈 '옥저' digital 민속학 // '옥저', 《한국민족문화대사전》 // 이현혜 《한국사》4권 - 초기국가:고조선 부여 삼한 〈동예와 옥저〉 국사편찬위원회.
[12]
문서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13]
뉴스
"우리 역사의 출발점… 만주·한반도 지배"
http://weekly.hankoo[...]
주간한국
2007-02-12
[14]
문서
범엽, 《후한서》(5세기), 〈제85권〉 동이열전 > 옥저전 : “ 武帝滅朝鮮,以沃沮地為玄菟郡。後為夷貊所侵,徙郡於高句驪西北,更以沃沮為縣,屬樂浪東部都尉”
[15]
서적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08-25
[16]
문서
범엽, 《후한서》(5세기), 〈제85권〉 “ 其土迫小,介於大國之間,遂臣屬句驪。”( 그 땅이 궁핍하고 작으며, 큰 나라 사이에 끼여 있어서, 마침내 고구려에 신하 나라로서 복속하였다. )
[17]
문서
이현혜, 《한국사》4권 - 『초기국가:고조선 부여 삼한』「동예와 옥저」, 국사편찬위원회, p.247
[18]
웹인용
옥저
http://10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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