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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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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치다 고사이(内田 康哉)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구마모토번 출신이다. 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외무성에서 근무하며, 런던, 베이징, 오스트리아, 미국, 러시아 등지에서 대사직을 역임했다. 제2차 사이온지 내각과 여러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냈으며, 하라 다카시 암살과 가토 도모사부로의 급서로 두 차례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를 맡았다. 만주사변 이후에는 만주국 승인과 국제 연맹 탈퇴를 추진했으며, 193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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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고사이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우치다 고사이
본명우치다 야스야
출생1865년 9월 29일 (양력), 게이오 원년 8월 10일 (음력)
출생지히고국야쓰시로군류호쿠정(현재 구마모토현야쓰시로군히카와정)
사망1936년 3월 12일
사망지도쿄부도쿄시
학력도시샤 대학, 도쿄 제국대학 법과 졸업
직업외교관, 정치가
작위백작
신분종1위
훈장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배우자우치다 마사코
친족구로다 고로자에몬(조부), 우치다 겐신(부), 우치다 간지(양자), 도쿠라 쇼자부로(의부)
경력
소속 정당무소속
주요 직책제24, 34, 44대 외무대신
내각총리대신 임시 겸임
정치 경력
외무대신제2차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
하라 다카시 내각
다카하시 고레키요 내각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
사이토 마코토 내각
외무대신 임기1911년 8월 30일 - 1912년 12월 21일
1918년 9월 29일 - 1923년 9월 2일
1932년 7월 6일 - 1933년 9월 14일
내각총리대신 임시 겸임하라 다카시 내각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
내각총리대신 임시 겸임 임기1921년 11월 4일 - 1921년 11월 13일
1923년 8월 24일 - 1923년 9월 2일
이미지
우치다 고사이
우치다 고사이

2. 생애

1932년 타임지 표지에 실린 우치다 고사이


구마모토번 출신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도시샤 영어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 중퇴하고 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외무성에 들어가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청나라, 오스트리아-헝가리, 미국, 러시아 제국 등에서 공사 및 대사로 근무했으며, 사이온지 긴모치, 하라 다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에서 여러 차례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파리 강화 회의와 워싱턴 회의에 참여하여 베르사유 체제와 워싱턴 체제 구축에 관여하는 등 초기에는 국제 협조 노선을 따랐다.

1921년 하라 다카시 총리 암살과 1923년 가토 도모사부로 총리의 병사로 총리가 유고했을 때, 내각 서열에 따라 두 차례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를 맡았다. 두 번째 임시대리 중에는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여 잠시 재해 수습을 지휘하기도 했다.

1931년 남만주 철도 총재로 취임한 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초기 불확대 방침에서 선회하여 적극적인 확대 지지자로 변모했다. 1932년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다시 외무대신으로 기용된 후에는 만주국의 승인과 국제 연맹 탈퇴를 강행하며 강경 노선을 주도했다. 특히 중의원에서 "나라를 잿더미로 만들더라도 만주국의 권익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초토 연설'''을 하여 국내외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5] 이는 과거 국제 협조 노선을 보였던 그의 행보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1936년 2·26 사건 발생 직후 병으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구마모토번의 번의 우치다 겐신과 구마모토 사족 구로다 고자에몬의 장녀 미카의 아들로 히고국 야쓰시로군 류호쿠 (현 구마모토현 야쓰시로군 히카와정)에서 태어났다. 야쓰시로군 가가미정에 있던 나와 도잔의 신카와 의숙 등에서 배운 후[1], 도시샤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영어를 공부했으나 중퇴하였다. 이후 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갔다.

2. 2. 외교관 경력



도쿄 제국 대학 법과 졸업 후 외무성에 들어가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런던 공사관 근무를 시작으로 청나라 베이징 공사관 근무(임시 대리 공사 겸임), 오스트리아-헝가리 공사(겸 스위스 공사), 미국 대사, 러시아 제국 대사 등을 역임하며 경력을 쌓았고, 제4차 이토 내각에서는 외무 차관을 지냈다.[1]

제2차 사이온지 내각에서 처음으로 외무대신을 맡았으며, 이후 하라 내각, 다카하시 내각,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에서도 연이어 외무대신으로 활동했다. 특히 하라 내각 이후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 회의와 워싱턴 회의 시기에 외무대신으로서 베르사유 체제와 워싱턴 체제 구축에 직접 관여했다. 그는 이러한 국제 협조 체제 구축에 대해 "세계 평화 수립에 대한 인류의 진지한 요구의 발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에서 산둥성의 구 독일 제국령에 대한 일본의 권익을 주장한 조항은 산둥 문제를 야기하여 1922년 산둥 현안 해결에 관한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중국과의 갈등을 지속시켰다.

1921년 하라 다카시 암살과 1923년 가토 도모사부로의 급서로 총리가 공석이 되었을 때, 두 차례 모두 내각 서열 차석이었던 우치다가 황실 의제령 규정에 따라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를 맡았다.[2] 특히 두 번째 임시대리 기간 중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자, 후임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이 정식 출범하기 전까지 2일간 행정 수반으로서 재해 대책을 지휘했다.[3]

1925년에는 추밀 고문관에 임명되었고, 1928년에는 부전 조약에 일본 전권 대표로 조인했다. 그러나 조약문 중 "인민의 이름으로(in the names of their respective peoples)"라는 문구가 천황의 통치 대권을 침해한다는 논란이 국내에서 발생하자 책임을 지고 추밀 고문관직을 사임했다. 1930년 4월 11일 귀족원 의원으로 칙선되었다.[4]

1931년 남만주 철도(만철) 총재로 취임했다. 당시 만철은 장쉐량 정권과의 관계 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외교관 경력이 있는 우치다가 발탁된 것이다. 같은 해 9월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초기에는 사태 불확대 방침을 가졌으나, 만철 이사이자 사변 확대파였던 소가와 신지의 주선으로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와 면담한 후 적극적인 확대 지지자로 돌아섰다. 1932년 5월 사이토 내각이 성립되자 다시 외무대신으로 기용되었다.

외무대신으로 복귀한 우치다는 이전의 국제 협조 노선과는 정반대의 강경 노선을 걸었다. 국제 연맹에서 만주국 문제가 논의되자, 마쓰오카 요스케 전권이 마련한, 중화민국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일본의 세력권을 확보하는 타협안을 거부하고 만주국의 즉각적인 승인과 국제 연맹 탈퇴를 강행했다. 1932년 8월 25일, 중의원에서 "나라를 잿더미로 만들더라도 만주국의 권익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발언(이른바 '''초토 연설''')을 하여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발언은 질문자였던 모리 가쿠조차 놀라 수정을 요청할 정도였으나 우치다는 거부했다. 과거 국제 협조 시대를 이끌었던 외교가의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초토 외교'로 불리며 큰 물의를 빚었다. 외교 평론가 기요자와 키요시는 "나라가 잿더미가 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외교"라고 비판했으며, 과거 그를 외무대신으로 기용했던 사이온지 긴모치 역시 그의 변모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5]

1936년 2·26 사건 발생 15일 후인 3월 12일 병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도쿄 후추의 다마 영원에 있다.[6]

2. 3.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우치다는 하라 다카시 내각, 다카하시 고레키요 내각,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1921년 하라 다카시가 암살되고, 1923년 가토 도모사부로가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현직 총리가 공석이 되는 일이 두 차례 발생했다. 이때마다 우치다는 내각 서열(또는 궁중 서열)상 내각총리대신 다음 순위였기 때문에, 황실 의제령의 규정에 따른 관례에 따라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를 맡았다.[2]

특히 두 번째 임시대리를 맡았을 때[2], 후임 총리로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내각을 구성하기 전에 간토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우치다는 제2차 야마모토 내각이 정식으로 발족하기 전까지 2일 동안 일본의 행정 수장으로서 지진 재해 수습을 지휘해야 했다.[3]

이처럼 긴급 상황에서 총리 임시대리직을 두 번이나 수행한 인물은 사이온지 긴모치(임시대행과 임시 겸임의 두 번)와 우치다뿐이다. 그러나 사이온지는 이후 정식 총리가 되었지만, 우치다는 정식 총리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2. 4. 만주사변과 외무대신 재임

1930년 일본 제국 의회의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4], 1931년에는 남만주 철도(만철) 총재로 취임했다. 당시 만철은 장쉐량 정권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외교관 경력을 인정받아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사태 확대를 원치 않았으나, 만철 이사 소가와 신지의 주선으로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와 만난 후 적극적인 확대 지지자로 입장을 바꾸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국제 협조 체제 구축에 관여했던 그의 이전 행보와는 상반되는 급격한 변화였다.

1932년 4월, 이누카이 내각이 군부에 비판적이던 만철 부총재 에구치 사다카즈를 파면하자, 우치다는 이에 항의하여 사표를 제출했으나 군부의 설득으로 총재직에 남았다. 같은 해 5월 성립된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7월에 다시 외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외무대신 재임 중 국제 연맹에서 만주국 문제가 논의되자, 마쓰오카 요스케 전권 대표가 마련한 일본 측에 유리한 조정안(만주국의 주권을 중화민국에 잠재적으로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세력권'으로 삼는다는 내용)을 거부했다. 대신 우치다는 일본의 만주국 공식 승인과 국제 연맹 탈퇴를 추진했다.

1932년 8월 25일, 중의원에서 "나라를 잿더미로 만들더라도 만주국의 권익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강경 발언(소위 '''초토 연설''')을 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5] 이 발언은 일본의 침략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았다. 질문자였던 모리 가쿠마저 놀라 발언 수정 의사를 물었으나 우치다는 응하지 않았다. 당시 외교 평론가 기요자와 키요시는 "나라가 잿더미가 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외교일 것"이라고 비판했으며, 과거 자신의 내각에서 우치다를 외무대신으로 기용했던 사이온지 긴모치 역시 그의 변모에 경악하고 실망했다고 전해진다.[5] 이러한 강경 노선으로 우치다는 1932년 9월 5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 인물로 등장하기도 했다.

1936년 3월 12일, 2.26 사건 발생 15일 후에 병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도쿄 다마 영원에 있다.[6]

2. 5. 사망

1936년 3월 12일, 2·26 사건 발생 15일 후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묘소는 도쿄 후추의 다마 영원에 있다.[6]

3. 평가

외교 평론가이자 전 태국 대사인 오카자키 히사히코는 우치다 고사이에 대해 "그에 대한 기록에서 그의 사상과 신념을 아는 것은 어렵다. 아마도 특별한 철학이 없는 단순한 유능한 사무 관료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행동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해간다. 그런 의미에서 우치다의 의견은 당시 국민 의식의 변화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7] 참고로 오카자키 히사히코의 조부 오카자키 구니스케는 입헌정우회 소속 중의원 의원이었으며, 우치다가 외무대신으로 있던 내각의 여당 측 인물이었다.[7]

4. 기타

1899년에 결혼한 아내 마사(政)는 도쿠라 쇼자부로의 차녀였다.[8] 도지샤 여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 경험(브린모어 칼리지 1897년 졸업[9])도 있는 마사는 영어를 잘했으며, 약혼 당시에는 영어로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8]

5. 기념비

고향인 구마모토현 야시로군 히카와정에는 '우치다 고사이 선생 탄생의 땅'이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6. 훈장 및 서훈

'''위계'''



'''훈장 등'''



'''외국 훈장 착용 허가'''

날짜수여 국가훈장 내용출처
1896년 12월 17일대청 제국제2등 제2쌍룡 보성[10][33]
1901년 10월 4일스페인 왕국이사벨 라 카톨리카 훈장 그랑 크로와[10][34]
1902년 6월 4일대청 제국두등 제3쌍룡 보성[10][35]
1907년 11월 26일교황청비오 9세 1등 훈장[10]
1909년 11월 2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레오폴드 대수장[10]
1913년 2월 17일프랑스 공화국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 크로아[10][36]
1914년 4월 21일이탈리아 왕국성 마우리치오 라자로 1등 훈장[10][37]
1919년 10월 18일그리스소브르 1등 훈장[10]


7. 대중문화

2006년 중국 텔레비전 드라마 《더 링 공주》(Princess Der Ling)에서 배우 미우라 켄이치(三浦研一일본어)에 의해 연기되었다.

참조

[1] 서적 肥後の人物ものがたり 熊本教育振興会事務局 1988
[2] 간행물 官報 号外 https://dl.ndl.go.jp[...] 1923-08-25
[3] 법률 治安維持の為にする罰則に関する件 1923-09-07
[4] 서적 貴族院要覧(丙) 貴族院事務局 1947
[5] 서적 日中十五年戦争史 中公新書 1996
[6] 웹사이트 内田康哉 http://www6.plala.or[...] 2024-12-06
[7] 서적 重光・東郷とその時代 PHP文庫 2003
[8] 웹사이트 Who's Who http://www.dwc.doshi[...]
[9] 서적 Bryn Mawr College Calendar https://archive.org/[...] Bryn Mawr College 1914
[10] 아시아역사자료센터 内田康哉
[11] 간행물 官報 第2127号「叙任及辞令」 1890-08-01
[12] 간행물 官報 第2776号「叙任及辞令」 189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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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간행물 官報 第2640号「叙任及辞令」 1921-05-21
[20] 간행물 官報 第1670号「叙任及辞令」 1932-07-25
[21] 간행물 官報 第2759号「叙任及辞令」 1936-03-16
[22] 간행물 官報 第3354号「叙任及辞令」 1894-09-01
[23] 간행물 官報 第5243号「叙任及辞令」 1900-12-21
[24] 간행물 官報 第5598号「叙任及辞令」 1902-03-06
[25] 간행물 官報 号外「叙任及辞令」 1907-03-31
[26] 간행물 官報 第199号・付録「辞令」 1913-04-01
[27] 간행물 官報 第7307号 1907-11-05
[28] 간행물 官報 第8454号「叙任及辞令」 1911-08-25
[29] 간행물 官報 第1310号・付録「辞令」 1916-12-13
[30] 간행물 官報 第2431号「叙任及辞令」 1920-09-08
[31] 간행물 官報 第2858号・付録「辞令」 1922-02-14
[32] 간행물 官報 第1499号・付録「辞令二」 1931-12-28
[33] 간행물 官報 第4051号「叙任及辞令」 1896-12-28
[34] 간행물 官報 第5488号「叙任及辞令」 1901-10-16
[35] 간행물 官報 第5718号「叙任及辞令」 1902-07-26
[3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3-02-19
[37]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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