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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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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세복은 일제강점기 대종교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81년 밀양에서 태어나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만주에서 동창학교 등을 설립하고 흥업단 등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1923년 대종교 3대 도사교가 되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나, 광복 후 귀국하여 대종교 재건에 힘썼으며, 홍익대학교 설립에도 기여했다. 1960년 사망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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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복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윤세복
원어 이름尹世復
출생일1881년 3월 29일
출생지조선 경상도 밀양군
거주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망일1960년 2월 13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별명호(號)는 단애(檀崖)
본명윤세린(尹世麟) → 윤세복(尹世復)
국적대한민국
본관나주
민족한민족(무송 윤씨)
경력
교단대종교
직책제3대 도사교 (1923년 11월 22일 ~ 1950년 5월 3일)
칭호대종교 제3대 총전교 (1958년 10월 19일 ~ 1960년 2월 1일)
활동 기간1909년 ~ 1960년 2월 1일
전임자정관
후임자정관
가족
친척윤세용(친형), 윤세주(6촌 재종제)
훈장
상훈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웹사이트

2. 생애

1881년 3월 29일 조선 경상도 밀양군(지금의 대한민국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태어났다. 본관무송이며, 윤세주는 친가친척 6촌 재종 아우이다. 1909년 11월 초순 한성부로 상경하여, 이듬해 경술국치늑약 체결 불과 한 달 전인 1910년 7월 13일 나철이 이끌던 대종교에 입문하였다. 이후 윤세복은 친형 윤세용(尹世茸)과 상의하여 수천 석의 가산을 정리하고 남만주 회인현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대종교 포교에 헌신하는 한편, 사재를 들여 동창, 백산 등의 학교를 설립하고, 흥업단, 광정단, 독립단 등 독립 운동 관련 단체를 조직하여 대한 독립 운동에 헌신하였다.[1]

1923년 11월 22일 무원종사(김헌)의 유명(遺命)을 받고 연안현에서 제3세 도사교로 취임하였다.[1] 그러나 취임 5년째인 1928년 1월 초, 지린 독군(督軍) 겸 성장(省長)인 장쭤린에 의해 대종교 금지령이 내려졌다.[1] 이에 윤세복은 총본사를 미산 당벽진으로 옮기고 박찬익난징 국민정부장제스에게 보내 교섭하게 하여, 1930년 동북 4성(봉천(奉天)·길림(吉林)·흑룡강(黑龍江)·열하(熱河))에 대한 대종교 해금령을 이끌어냈다.[1]

1931년 만주사변으로 종교 활동이 정지되면서, 3개의 도본사(道本司)와 경성부(서울)의 남도 도본사가 폐쇄되었다. 1934년 윤세복은 교세 갱장을 위해 닝안 현 둥징성(東京城)으로 총본사를 옮기고 단군 천진전(天眞殿)을 모시고 대종학원(大宗學園)을 세웠다.

일제영사의 인가를 받아 하얼빈에 대종교 선도회(宣道會)를 설치하고 교적간행사업, 단군 천진궁 건축을 추진하던 중, 1942년 11월 23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만주국 형사재판에 회부되었다. 1943년 1월 8일, 내란 소요 책동죄 등으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같은 해 3월 14일 만주국 창건 11주년 기념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1944년 4월 12일 단군 천진궁 건축 관련 문제로 다시 체포되어, 1944년 7월 18일 만주국 형사재판에서 내란 소요 목적 취향 집단 금품 절도죄 등으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으로 출옥할 때까지 복역했다. 이 사건들을 각각 임오교변, 갑신교변이라 한다.

1946년 3월 5일 귀국하여 미군정 조선 시대의 수도 서울에 총본사를 설치했다. 그 뒤 교당 설치, 교적(敎籍) 수집과 간행, 홍익대학교 설립 등 활동을 전개했으며,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돌아온 원로 교인 이시영 등을 맞아 단군전 봉안운동을 일으켜 전국 방방곡곡에 단군전을 건립했다. 윤세복은 교통전수제도를 폐지하고 선거에 의한 총전교(總典敎)제도를 채택하여 제1대 총전교에 취임했다.

1960년 2월 13일 별세했다.

2. 1. 출생 및 초기 생애

1881년 3월 29일 조선 경상도 밀양군(지금의 대한민국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태어났다. 본관무송이며, 윤세주는 친가친척 6촌 재종 아우이다.

2. 2. 대종교 입교와 독립운동

1909년 11월 초순 한성부로 상경하여, 이듬해 경술국치늑약 체결 불과 한 달 전인 1910년 7월 13일 나철이 이끌던 대종교에 입문하였다. 이후 '''윤세복'''은 친형 윤세용(尹世茸)과 상의하여 수천 석의 가산(家産)을 정리하고 남만주 회인현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대종교 포교에 헌신하는 한편, 사재를 들여 동창, 백산 등의 학교를 설립하고, 흥업단, 광정단, 독립단 등 독립 운동 관련 단체를 조직하여 대한 독립 운동에 헌신하였다.[1]

1923년 11월 22일 무원종사(김헌)의 유명(遺命)을 받고 연안현에서 제3세 도사교로 취임하였다.[1] 그러나 취임 5년째인 1928년 1월 초, 지린 독군(督軍) 겸 성장(省長)인 장쭤린에 의해 대종교 금지령이 내려졌다.[1] 이에 윤세복은 총본사를 미산 당벽진으로 옮기고 박찬익난징 국민정부장제스에게 보내 교섭하게 하여, 1930년 동북 4성(봉천(奉天)·길림(吉林)·흑룡강(黑龍江)·열하(熱河))에 대한 대종교 해금령을 이끌어냈다.[1]

2. 3. 대종교 도사교 취임과 시련

1931년 만주사변으로 종교 활동이 정지되면서, 3개의 도본사(道本司)와 경성부(서울)의 남도 도본사가 폐쇄되었다. 1934년 윤세복은 교세 갱장을 위해 닝안 현 둥징성(東京城)으로 총본사를 옮기고 단군 천진전(天眞殿)을 모시고 대종학원(大宗學園)을 세웠다.

일제영사의 인가를 받아 하얼빈에 대종교 선도회(宣道會)를 설치하고 교적간행사업, 단군 천진궁 건축을 추진하던 중, 1942년 11월 23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만주국 형사재판에 회부되었다. 1943년 1월 8일, 내란 소요 책동죄 등으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같은 해 3월 14일 만주국 창건 11주년 기념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1944년 4월 12일 단군 천진궁 건축 관련 문제로 다시 체포되어, 1944년 7월 18일 만주국 형사재판에서 내란 소요 목적 취향 집단 금품 절도죄 등으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으로 출옥할 때까지 복역했다. 이 사건들을 각각 임오교변, 갑신교변이라 한다.

2. 4. 만주사변과 종교 활동의 정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종교 활동이 정지되어 해금령은 실효를 보지 못했다. 그 동안 동·서·북 3개의 도본사(道本司)가 해체되었으며, 1930년에는 경성부(서울)의 남도 도본사마저 폐쇄되었다. 교세 회복을 위해 재기를 결의한 그는 1934년 닝안 현 둥징성(東京城), 즉 발해의 옛 도읍으로 총본사를 옮겨 단군 천진전(天眞殿)을 모시고 대종학원(大宗學園)을 세웠다.[1]

또한 일제영사의 인가를 얻어 하얼빈(哈爾賓)에 대종교 선도회(宣道會)를 설치하고, 대대적인 교적간행사업(敎籍刊行事業) 추진과 단군 천진궁 건축을 서둘렀다. 그러나 1942년 11월 23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만주국 형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며, 1943년 1월 8일 내란 소요 책동죄 등으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같은 해(1943년) 3월 14일 만주국 건국 11주년 기념 특사로 석방되었지만, 1944년 4월 12일 단군 천진궁 건축 관련 문제로 다시 투옥되었다. 이를 각각 임오교변과 갑신교변이라 한다. 1944년 7월 18일 만주국 형사재판에서 내란 소요 목적 취향 집단 금품 절도죄 등으로 무기형(無期刑)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함께 출옥하였다.[1]

2. 5. 총본사 이전과 대종학원 설립

1934년 닝안 현 둥징성(東京城), 즉 발해의 옛 도읍으로 총본사를 옮겨 단군 천진전(天眞殿)을 모시고 대종학원(大宗學園)을 세웠다.

2. 6. 임오교변과 갑신교변

1942년 11월 23일, 윤세복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만주국 형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며, 1943년 1월 8일 내란 소요 책동죄 등으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같은 해 3월 14일, 만주국 창건 11주년 기념 특사로 석방되었지만, 1944년 4월 12일 단군 천진궁 건축 관련 긴축 작전 등이 다시 일제 경찰관에게 적발되어 재투옥되었다. 이를 각각 임오교변과 갑신교변이라 한다.

1944년 7월 18일, 만주국 형사재판에서 내란 소요 목적 취향 집단 금품 절도죄 등으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함께 출옥하였다.

2. 7. 광복과 귀국, 대종교 재건

1931년 만주사변으로 종교 활동이 정지되면서 해금령은 실효를 보지 못했다. 동·서·북 3개의 도본사(道本司)가 해체되었고 1930년에는 경성부(서울)의 남도 도본사마저 폐쇄되었다. 1934년 그는 닝안 현 둥징성(東京城), 즉 발해의 옛 도읍으로 총본사를 옮겨 단군 천진전(天眞殿)을 모시고 대종학원(大宗學園)을 세웠다.

일제영사의 인가를 얻어 하얼빈(哈爾賓)에 대종교 선도회(宣道會)를 설치하고, 대대적인 교적간행사업(敎籍刊行事業)을 추진하고 단군 천진궁 건축을 서두르던 중 1942년 11월 23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만주국 형사재판에 회부되었다. 1943년 1월 8일 내란 소요 책동죄 등으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같은 해 3월 14일 만주국 건국 11주년 기념 특사로 석방되었다. 1944년 4월 12일 단군 천진궁 건축 관련 문제로 다시 투옥되었는데, 이를 각각 임오교변과 갑신교변이라 한다. 1944년 7월 18일 만주국 형사재판에서 내란 소요 목적 취향 집단 금품 절도죄 등으로 무기형(無期刑)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함께 출옥했다. 1946년 3월 5일 귀국하여 미군정 조선 시대의 수도 서울에 총본사를 설치했다.

그 뒤 교당 설치, 교적(敎籍) 수집과 간행, 홍익대학교 설립 등 활동을 전개했으며,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돌아온 원로 교인 이시영 등을 맞아 단군전 봉안운동을 일으켜 전국 방방곡곡에 단군전을 건립했다. 윤세복은 교통전수제도를 폐지하고 선거에 의한 총전교(總典敎)제도를 채택하여 제1대 총전교에 취임했다.

1960년 2월 13일 별세했다.

2. 8.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의 협력

1946년 3월 5일 귀국하여 미군정 조선 시대의 수도 서울에 총본사를 설치했다. 그 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돌아온 이시영 등을 맞아 단군전 봉안운동을 일으켜 전국 방방곡곡에 단군전을 건립했다. 교통전수제도를 폐지하고 선거에 의한 총전교(總典敎)제도를 채택하여 제1대 총전교에 취임했다.[1]

2. 9. 총전교 제도 도입과 사망

1946년 3월 5일 귀국하여 당시 미군정 조선 시대의 수도 서울에 총본사를 설치했다. 교당 설치, 교적(敎籍)의 수집과 간행, 홍익대학교 설립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으며,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돌아온 원로 교인인 이시영 등을 맞아 단군전 봉안운동을 일으켜 전국 방방곡곡에 단군전을 건립했다. 단애종사(윤세복)는 교통전수제도를 폐지하고 선거에 의한 총전교(總典敎)제도를 채택하여 제1대 총전교에 취임했다.[1]

1960년 2월 1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1]

3. 구국운동과 대종교

1909년 1월 15일, 나철은 오기호 등 동지 10명과 함께 한성부(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단군교 포명서》를 공표하며 단군교를 창시했다. 1910년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고 동간도와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여 만주 일대까지 포교하였다.[2]

1915년 일제의 종교 탄압으로 대종교가 위기에 처하자 나철1916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결하였다. 이후 김교헌이 2세 교주가 되어 북로군정서를 통해 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일제의 보복으로 많은 교도들이 학살되었고, 김교헌은 병사하였다. 김교헌은 『신단실기』, 『신단민사』, 『단조사고』 등을 저술하여 대종교 역사 고증에 힘썼다.[2]

3. 1. 대종교의 창시와 초기 발전

1923년 11월 22일, 대종교의 3세 교주가 된 윤세복은 일제의 압력을 받은 중화민국 길림성장 장쭤린에 의해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내려지자, 만주에 있던 대한제국 동포 서상용의 지원을 받으며 총본사를 발해의 옛 도읍터였던 동경성(東京城)으로 이전했다. 윤세복은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대종교서적간행회를 발족시켜 『삼일신고』, 『종지강연』 등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천전(天殿) 건립을 서두르던 중 1942년 11월 23일, 윤세복 외 20명의 간부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구성>이란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옥사하였다.[2]

3. 2. 일제의 탄압과 나철의 순교

1915년 10월 일제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대종교를 탄압하였고, 이에 교단의 존폐 위기에 봉착한 나철은 이듬해 1916년 9월 1일 초대 도사교에서 물러나고, 1916년 9월 12일(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서 일제의 폭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2]

3. 3. 김교헌의 대종교 중흥과 독립운동

1916년 9월 1일, 대종교 2세 교주가 된 김교헌(金敎獻)은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和龍)으로 옮긴 뒤 홍범규칙(弘範規則)을 공포하는 한편,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시켰으며, 1920년 청산리 전투(靑山里戰鬪)에서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음 해에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김교헌은 통분 끝에 병으로 죽었다. 김교헌은 대종교를 제도적으로 정립하고 역사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신단실기』(神檀實記), 『신단민사』(神檀民史), 『단조사고』(檀祖事攷) 등을 저술하였다.[2]

3. 4. 윤세복의 대종교 계승과 시련

1910년 7월 13일 도사교 나철이 이끌던 대종교에 입문한 윤세복은 친형 윤세용과 함께 가산을 정리하여 남만주 회인현으로 이주했다. 그는 대종교 포교에 헌신하며 동창학교, 백산학교 등을 설립하고, 흥업단, 광정단, 독립단 등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힘썼다.[2]

1923년 11월 22일, 김교헌의 유명을 받고 연안현에서 제3세 도사교로 취임했다. 그러나 1928년 1월, 지린 독군 겸 성장 장쭤린에 의해 대종교 금지령이 내려졌다. 윤세복은 총본사를 미산 당벽진으로 옮기고 박찬익을 통해 난징 국민정부장제스와 교섭하여 1930년 동북 4성(봉천, 길림, 흑룡강, 열하)에 대한 대종교 해금령을 이끌어냈다.[2]

하지만 1931년 만주사변 발발로 종교 활동이 정지되어 해금령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동·서·북 3개 도본사가 해체되고 1930년에는 경성부 남도 도본사마저 폐쇄되었다. 1934년 윤세복은 교세 회복을 위해 총본사를 닝안 현 둥징성(발해 옛 도읍)으로 옮겨 단군 천진전을 모시고 대종학원을 세웠다.[2]

일제영사의 인가를 얻어 하얼빈에 대종교 선도회를 설치하고 교적 간행 사업, 단군 천진궁 건축을 추진하던 중 1942년 11월 23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1월 8일 내란 소요 책동죄 등으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같은 해 3월 14일 만주국 창건 11주년 기념 특사로 석방되었다.[2]

1944년 4월 12일 단군 천진궁 건축 관련 문제로 다시 투옥(임오교변, 갑신교변)되었고, 7월 18일 만주국 형사재판에서 내란 소요 목적 취향 집단 금품 절도죄 등으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으로 출옥, 1946년 3월 5일 귀국하여 서울에 총본사를 설치했다.[2]

이후 교당 설치, 교적 수집 및 간행, 홍익대학교 설립 등 활동을 전개하고 상하이 임시정부 원로 교인 이시영 등과 단군전 봉안 운동을 벌여 전국에 단군전을 건립했다. 윤세복은 교통전수제도를 폐지하고 선거에 의한 총전교 제도를 채택, 제1대 총전교에 취임했다.[2]

3. 5. 임오교변과 갑신교변

1923년 11월 22일 대종교 3세 교주가 된 윤세복은 일제의 압력을 받은 중화민국 길림성장 장쭤린에 의해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내려지자, 만주 동포 서상용의 지원을 받으며 총본사를 발해의 옛 도읍터였던 동경성(東京城)으로 이전했다. 윤세복은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대종교서적간행회를 발족시켜 『삼일신고』, 『종지강연』 등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천전(天殿) 건립을 서두르던 중 1942년 11월 23일, 윤세복 외 20명의 간부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구성>이란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옥사하였다.[2]

4. 저서

윤세복의 저서로는 《삼법회통(三法會通)》이 있다.

4. 1. 《수진삼법회통(修眞三法會通)》

윤세복의 저서 《삼법회통(三法會通)》은 정식 명칭이 《수진삼법회통(修眞三法會通)》이다. 이 책은 대종교 3대 교주인 윤세복 단애종사가 1942년 11월 23일1944년 4월 12일에 각각 일어났던 임오교변과 갑신교변 당시, 만주 목단강성 액하옥중(掖河獄中)에 투옥되었을 때 저술한 옥중 저서이다.

5.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윤세복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77년에는 대종교 제2대 교주 김교헌과 제3대 교주 윤세복을 도왔던 서상용도 같은 훈장을 받았다.[1]

5. 1.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대한민국 정부는 윤세복(故 尹世復)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하였다. 15년 후인 1977년에는 대종교 제2대 교주였던 김헌(故 金獻, 1868~1923)과, 대종교 제3대 교주였던 윤세복을 생전에 직간접적으로 원조했던 서상용(故 徐相庸, 1873~1961)도 같은 훈격의 서훈(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참조

[1] 웹사이트 일제에 정면으로 맞섰던 제3대 대종교 교주 윤세복 http://navercast.nav[...]
[2] 서적 대종교 한국사전연구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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