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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석 (17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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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성석은 1714년 경기도 영평군 일동면 기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숙종 대의 문신 이상우의 손자이다. 이인수의 아들이었으나, 아들이 없던 이익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794년 정조 때 노인직으로 가설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기로연에 초대되고 세찬을 받았다. 1799년에 사망하였으며, 묘소는 영평군 일동면 덕현에 있다. 해평 윤씨 윤응화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이한운 등을 두었다.

2. 생애

경기도 영평군 일동면 기산리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숙종 대의 문신 이상우이며, 생부(生父)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이인수(李仁壽)이다. 그는 본래 이인수의 다섯째 아들이었으나, 아들이 없던 숙부이자 교관을 지낸 이익수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의 가계는 조선 왕족과 연결되지만 서출의 배경도 가지고 있었다.

영평 일동면에서 생활하다가 후에 한성부 북부(현재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강북구 일대)로 이주하였다. 정확한 이주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사대부로 인정받았으며, 이는 일성록승정원일기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1][2]

1794년(정조 18년) 노인직(老人職)으로 가설(加設)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4][5][6][7] 이후 매년 정조가 주관하는 기로연에 초대되었고, 1796년에는 정조로부터 신년 세찬(歲饌, 설음식)을 하사받기도 했다.[9][10]

1799년(정조 23년) 1월 12일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고향인 경기도 영평군 일동면 기산리 덕현(현재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1리 덕현)에 있다.

2. 1. 가계와 배경

경기도 영평군 일동면 기산리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숙종 대의 문신 이상우(李商雨)이며, 양아버지는 교관을 지내고 사후 호조참판에 추증된 이익수이다. 생부(生父)는 이상우의 아들이자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사후 호조참판에 추증된 이인수(李仁壽)이다. 그는 본래 이인수의 다섯째 아들이었으나, 아들이 없던 숙부이자 이인수의 둘째 형인 이익수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의 가계는 본래 경기도 광주군 출신으로, 선조~인조 대의 의관 이희헌의 후손이다. 이희헌의 증손이자 이경태의 아들인 할아버지 이상우는 족숙(族叔, 집안 아저씨뻘) 이영구(李英久)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이상우의 생모 전주 이씨와 생조모 전주 이씨 이애임(李愛任)은 조선 왕족 출신이었으나 모두 서출(庶出)이었다. 이상우의 생 외조부인 진용교위 이집(李鏶)은 세종대왕의 아들 영해군 이당의 손자 영춘군 이인의 6대손 가선대부 이숙명(李叔命)의 서자였다. 또한, 이상우의 생가 쪽 친할머니인 이애임은 정종의 아들 선성군 이무생의 5대손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홍주의 서녀(庶女)였다. 이애임의 생모는 신순복(申福順)인데, 그녀는 삼괴당 신종호의 4대손 신례(申椽+忠+忠)와 노비 출신 첩 향운(香雲)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였으나 양인으로 인정받았다. 신순복의 친정 증조모는 성종의 서녀인 혜숙옹주였다.

양아버지이자 숙부인 이익수의 구체적인 행적은 오랫동안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후에 승정원일기 기록을 통해 관상감 명과학 겸교수, 부사용 등을 역임한 사실이 밝혀졌다. 선원록 등에도 그가 교관을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의 행적은 1970년대 승정원일기한글 번역 및 왕실 족보 공개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었다.

양아버지 이익수는 양자 이성석이 1794년 노인직(老人職)에 오르면서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동지의금부사추증되었다. 생부 이인수 역시 생가의 여섯째 아들 이원석(李元錫)이 노인직에 오르면서 동일한 직위로 추증되었다.

그의 양누이(사촌 누이)는 양녕대군의 차남 서산군 이혜의 10대손 이동모(李東模)와 혼인했다. 또한 이성석의 딸 중 한 명은 이동모의 동생인 이동주(李東柱)와 혼인하였다.

그는 사대부(士夫)로 인정받았으며, 이는 일성록승정원일기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1][2]

부인은 해평 윤씨로 윤응화(尹應和)의 딸이다. 부인의 가계는 오음 윤두수의 후손으로, 증조부 윤오(尹墺)는 무과에 급제하여 사과(司果)를 지냈고, 고조부 윤겸지(尹謙之)는 훈련원 도정으로 정묘호란 때 순절했으며, 5대조 윤간(尹旰)은 광해군인조 대에 병마절도사방어사를 지낸 무신이다.[3]

경기도 영평군 일동면 기산리(현 포천시 일동면 기산1리)에서 태어났으나, 이후 한성부 북부(현재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강북구 일대)로 이주하여 생활했다. 정확한 이주 시기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2. 2. 혼인과 가족 관계

그의 양 누이이자 사촌 누이는 양녕대군의 차남 서산군 이혜의 10대손 이재춘의 아들 이동모(李東模)에게 출가했다. 그의 딸 중 한 명은 다시 이재춘의 다른 아들 이동주에게 시집갔다.

그의 다른 딸은 세조의 아들 덕원군 이서의 11대손 이득채에게 출가했다.

관계이름생몰년비고
할아버지이상우(李商雨)1648년 ~ 1741년
백부이필수(李必壽)
친 아버지이인수(李仁壽)1685년 6월 20일 ~ 1755년 9월 12일
친 어머니경주이씨(慶州李氏)1687년 5월 5일 ~ 1755년 8월 27일이유곤(李維坤)의 딸, 판서 이시발(李時發) 후손
양 아버지이익수(李益壽)1682년 9월 23일 ~ 1755년 10월 29일숙부
양 어머니 (초배)전주이씨(全州李氏)1684년 1월 6일 ~ 1718년 2월 19일이기(李耋)의 딸, 판서 이로(李輅)의 후손
양 어머니 (계배)동래정씨(東萊鄭氏)1694년 5월 18일 ~ 1742년 11월 4일무과 정유행(鄭裕行)의 딸
양 누이우계이씨1729년 ~ 1755년
양 매부이동모(李東模)1724년 ~ ?부 이재춘(李載春), 이로(李輅) 차남 이유후(李裕後) 5대손, 서산군 이혜(瑞山君 李譿) 11대손
부인해평윤씨(海平尹氏)1713년 3월 1일 ~ 1785년(?)/1798년(?) 3월 6일윤응화(尹應和)의 딸
아들이한운(李漢雲)1735년 6월 22일 ~ 1806년 6월 8일
며느리밀양 박씨1735년 6월 12일 ~ 1813년 11월 27일동지중추부사 박성희(朴聖希)의 딸
손자이현상1770년 ~ 1822년
아들이한우(李漢禹)1739년 ~ 1790년
아들이한갈(李漢葛)1745년 ~ 1785년
아들이한걸(李漢傑)1747년 ~ 1799년아들이 없어 형 이한우의 아들 현과(顯果)를 양자로 함
우계이씨1737년 ~ 1798년
사위이동주(李東柱)1736년 ~ 1795년부 이재춘(李載春), 이로(李輅) 차남 이유후(李裕後) 5대손, 서산군 이혜(瑞山君 李譿) 11대손
우계이씨(羽溪李氏)1755년 11월 23일 ~ ?
사위이득채(李得采)덕원군 서의 증손 금평군 이의수(錦平君 李義壽)의 7대손
장인윤응화(尹應和)오음 윤두수 5남 윤간(尹旰) 5대손


2. 3. 관직 생활

경기도 영평군 일동면 기산리 출신이지만 뒤에 한성부 북부(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강북구 일대)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가 언제 이사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는 후에 사부(士夫)로 분류되었으며[1][2], 사대부로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일성록승정원일기에 나타난다.

1794년(정조 18년) 2월 7일 병조판서 서유방(徐有防), 승정원 우승지 이면긍(李勉兢) 등이 입시했을 때 병비(兵批)에서 가설동지(加設同知, 임시직 동지)에 임명되었다.[4] 같은 날 정조이조 참판 정범조(丁範祖), 병조 판서 서유방(徐有防)을 불러 정사를 논의할 때, 가설(加設) 동지중추부사에 특별 임명되었다.[5][6] 2월 15일에는 다시 병비(兵批)를 통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7] 이때 승지 이면긍(李勉兢)은 노인직을 제수받은 이들이 (老病)을 앓고 있으니 숙사(肅謝, 관직에 임명된 뒤 임금에게 감사하는 의례)를 생략하거나 재외(在外)에 있는 경우 올라오지 않더라도 의례를 감해줄 것을 상주하였고, 정조가 이를 윤허하였다.[8] 이성석이 어떤 질병을 앓았는지는 승정원일기일성록 등의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이후 그는 매년 정월 초하루 및 연중 정조가 친히 주관하는 기로연에 초대되었다. 1795년(정조 19) 1월 2일 정조가 신년(新年)을 맞이하여 한성부의 각 사서(司署) 노인들을 추천할 때, 한성부 북부 지역의 사대부 중 한 사람으로서 초청되었다.[9] 1796년(정조 20) 1월 1일에는 정조의 왕명으로 한성부에서 세찬 제급(題給, 설음식을 내려줌) 대상자로 보고되어, 정조로부터 신년의 세찬을 받았다.[10]

1799년(정조 23년) 1월 12일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고향 근처인 경기도 영평군 일동면 기산리 덕현(현재의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1리 덕현(德峴)) 고개 간좌(艮坐, 동북방을 등진 자리)에 마련되었다.

3. 가족 관계

그의 양 누이이자 사촌 누이는 양녕대군의 차남 서산군 이혜의 10대손 이재춘의 아들 이동모(李東模)에게 출가했다. 그런데 그의 딸 중 한명은 다시 이재춘의 다른 아들 이동주에게 시집갔다.

그의 다른 딸은 세조의 아들 덕원군 이서의 11대손 이득채에게 출가했다.

이성석의 가족관계
관계이름생몰년비고
할아버지이상우(李商雨)1648년 ~ 1741년
백부이필수(李必壽)
친아버지이인수(李仁壽)1685년 6월 20일 ~ 1755년 9월 12일
친어머니경주이씨(慶州李氏)1687년 5월 5일 ~ 1755년 8월 27일이유곤(李維坤)의 딸, 판서 이시발(李時發) 후손
양아버지이익수(李益壽)1682년 9월 23일 ~ 1755년 10월 29일숙부
양어머니 (초배)전주이씨(全州李氏)1684년 1월 6일 ~ 1718년 2월 19일이기(李耋)의 딸, 판서 이로(李輅)의 후손
양어머니 (계배)동래정씨(東萊鄭氏)1694년 5월 18일 ~ 1742년 11월 4일무과 정유행(鄭裕行)의 딸
양 누이우계이씨1729년 ~ 1755년
양 매부이동모(李東模)1724년 ~ ?부 이재춘(李載春), 이로(李輅) 차남 이유후(李裕後) 5대손, 서산군 이혜(瑞山君 李譿) 11대손
부인해평윤씨(海平尹氏)1713년 3월 1일 ~ 1785년(?)/1798년(?) 3월 6일윤응화의 딸
아들이한운(李漢雲)1735년 6월 22일 ~ 1806년 6월 8일
며느리밀양 박씨1735년 6월 12일 ~ 1813년 11월 27일동지중추부사 박성희(朴聖希)의 딸
손자이현상(李顯相)1770년 ~ 1822년
아들이한우(李漢禹)1739년 ~ 1790년
아들이한갈(李漢葛)1745년 ~ 1785년
아들이한걸(李漢傑)1747년 ~ 1799년아들이 없어 형 이한우의 아들 현과를 양자로 함
우계이씨1737년 ~ 1798년
사위이동주(李東柱)1736년 ~ 1795년부 이재춘(李載春), 이로(李輅) 차남 이유후(李裕後) 5대손, 서산군 이혜(瑞山君 李譿) 11대손
우계이씨(羽溪李氏)1755년 11월 23일 ~ ?
사위이득채(李得采)덕원군 서의 증손 금평군 이의수(錦平君 李義壽)의 7대손
장인윤응화(尹應和)오음 윤두수 5남 윤간(尹旰) 5대손


4. 기타

경기도 영평군 일동면 기산리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숙종 대의 문신 이상우(李商雨)이고, 양아버지는 교관을 지내고 호조참판에 추증된 이익수(李益壽)이다. 생부는 이상우의 아들로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사후 호조참판에 증직된 이인수(李仁壽)였다. 그는 본래 이인수의 다섯째 아들이었으나, 아들이 없던 숙부 이익수(이인수의 둘째 형)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의 가계는 본래 경기도 광주군 출신으로 선조~인조 대의 의관 이희헌(李希憲)의 후손이다. 할아버지 이상우는 족숙 이영구(李英久)의 양자로 입양되었는데, 이상우의 생모와 생조모는 모두 조선 왕족인 전주 이씨였으나 서출이었다. 생 외조부 이집(李鏶)은 세종대왕의 아들 영해군의 후손인 이숙명(李人+叔命)의 서자였고, 생 조모 이애임(李愛任)은 정종의 아들 선성군의 5대손 이홍주의 서녀였다. 이애임의 생모 신순복 역시 신종호의 후손인 신례(申椽+忠+忠)와 노비 출신 첩 사이의 서녀였으나 양인으로 인정받았으며, 신순복의 증조모는 성종의 서녀인 혜숙옹주였다.

양아버지 이익수는 승정원일기 기록에 따르면 관상감 명과학 겸교수, 부사용 등을 역임했으며, 선원록에는 교관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행적은 오랫동안 우계 이씨 족보에서 실전되었다가 1970년대 승정원일기와 왕실 족보가 대중에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훗날 양자 이성석이 1794년 노인직에 오르면서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추증되었다.

생부 이인수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이성석의 여섯째 동생) 이원석(李元錫)이 노인직에 오르면서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

양 누이(사촌 누이)는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동모(李東模)에게 출가했으며, 이성석의 딸 중 한 명은 이동모의 형제인 이동주에게 시집갔다. 이는 왕실 족보가 공개되면서 확인되었다.

그는 사부(士夫)로 분류되었으며[1][2], 이는 일성록승정원일기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영평 일동면 출신이지만 후에 한성부 북부(현재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강북구 일대)로 이주하여 생활했다. 정확한 이주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부인은 해평 윤씨로 윤응화(尹應和)의 딸이다. 오음 윤두수(梧陰 尹斗壽)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진영(尹鎭英), 증조부는 무과 급제 후 사과를 지낸 윤오(尹墺), 고조부 윤겸지(尹謙之)는 훈련원도정으로 정묘호란 때 순절했으며, 5대조 윤간(尹旰)은 광해군인조병마절도사방어사 등을 지낸 무신이다.[3]

1794년(정조 18년) 2월 7일 노인직으로 가설동지중추부사(加設同知中樞府事, 임시직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4][5][6], 2월 15일 다시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7] 당시 승지 이면긍(李勉兢)은 노인직을 받은 이들이 (老病) 상태임을 들어 의례를 간소화해 줄 것을 정조에게 상주하여 윤허받았다.[8] 그가 어떤 질병을 앓았는지는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이후 그는 매년 정월 초하루 및 연중에 정조가 주관하는 기로연에 초대되었다. 1795년(정조 19년) 1월 2일 정조가 신년(新年)을 맞아 한성부의 노인들을 추천할 때, 한성부 북부 지역 사대부의 한 사람으로서 초청되었다.[9] 1796년(정조 20년) 1월 1일에는 정조의 명으로 한성부의 세찬 제급(題給) 대상자로 선정되어 신년 세찬(歲饌)을 하사받았다.[10]

1799년(정조 23년) 1월 12일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고향 근처인 경기도 영평군 일동면 기산리 덕현(현재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1리 덕현(德峴)) 고개 간좌(艮坐, 동북방을 등진 자리)에 매장되었다. 아들 이한운의 묘도 근처 포천시 일동면 덕현 인좌(寅坐)에 있다.

참조

[1] 기록 한성부가 노인의 세찬에 관해 별단으로 아뢰었다 1795-01-02
[2] 기록 기로(耆老)의 대신과 문무(文武)의 경재(卿宰) 이하에게 세찬(歲饌)을 사급(賜給)하였다 1796-01-01
[3] 인물 윤간은 오음 윤두수의 서자이다
[4] 기록 1794-02-07
[5] 기록 정사가 있었다 1794-02-07
[6] 기록 兵批의 관원현황 1794-02-07
[7] 기록 1794-02-15
[8] 기록 1794-02-15
[9] 기록 한성부가 노인의 세찬에 관해 별단으로 아뢰었다 1795-01-02
[10] 기록 기로(耆老)의 대신과 문무(文武)의 경재(卿宰) 이하에게 세찬(歲饌)을 사급(賜給)하였다 179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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