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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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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현광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1554년에 태어나 1637년에 사망했다. 그는 퇴계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계승했으며, 이기론과 심성론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관직에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대부분 사퇴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기에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류성룡 등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허목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저서로는 《여헌집》, 《역학도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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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광
기본 정보
본관인동 장씨(仁同 張氏)
덕회(德晦)
여헌(旅軒)
출생1554년
사망1637년
생애 및 활동
주요 활동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정치가
학문이황의 학통을 계승
관직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활동
사상적 특징주리론적 입장에서 이기론을 비판적으로 수용
저서여헌집(旅軒集), 역학도설(易學圖說) 등
가계
아버지장운(張澐)
어머니안동 권씨(安東 權氏)
배우자미상
자녀장남: 장선징(張善澄), 차남: 장정징(張精澄)

2. 생애

장현광은 1554년 경상북도 인동현(仁同縣) 인선방(仁善坊) 남산(南山)에서 고려 상장군 장금용의 후손이자 덕녕부윤 장안세의 8대손으로 태어났다. 7세 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8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9세 때부터 매형인 송암 노수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세 때부터 진사 장순(張峋)에게 학문을 배웠고, 18세에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저술하였다. 성리대전을 읽고 심취하여 스스로 깨우치고 연구하였으며, 이황조식의 문인이었던 정구와 교류하며 김종직-김굉필-정붕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였다. 23세 때 재사(才士)로 천거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591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전옥서 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으로 피난하였다. 1595년 류성룡의 천거로 보은현감에 임명되었으나 1년 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이후 거창현감, 공조좌랑, 형조좌랑, 용담현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고, 의성현령 역시 반년 만에 사퇴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02년 거창현감, 경서언해교정낭청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다가, 1602년 11월 공조좌랑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공조좌랑으로 재직 중 주역 교정 사업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으로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에 사퇴하였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이어서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몇 달 만에 사퇴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 김장생, 박지계와 함께 성균관 사업(司業)에 선발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당시 조정이 서인 일색이었던 점과 공신들의 권력 남용 등을 지적했으며, 남인 재상 이원익의정부영의정이 되면서 출사를 권고했으나 이마저도 사양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6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어 잠시 부임하였으나, 곧 사헌부대사헌, 부호군,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사헌부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636년 81세에 자헌대부로 승진한 후 공조판서가 되고, 이어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같은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정부우참찬에 임명되었으며,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와 물품을 모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통탄해했다. 이후 입암산으로 들어가 후학을 가르치다가 반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인조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장면
(삼전도비 부조상)

2. 1. 불우한 유년기 (1554년 ~ 1566년)

장현광은 1554년 경상북도 인동현(仁同縣) 인선방(仁善坊) 남산(南山)에서 고려 상장군 장금용의 후손이자 덕녕부윤 장안세의 8대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장열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로 제릉참봉 이팽석의 딸이다. 그는 경상북도 인동에서 성장하였다.

7세 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8세 때 아버지 장열을 여의었다. 9세 때부터 매형인 송암 노수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11세 때 학자인 신당 정붕의 아들 정각은 그를 보고 "이 아이는 기상이 굉위(宏偉)하여 반드시 세상에서 특출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2. 2. 수학과 청년기 (1567년 ~ 1591년)

14세 때부터 진사 장순(張峋)에게 학문을 배웠고, 18세에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저술하며 대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말미에 '능히 천하의 제일사업(第一事業)을 할 줄 알아야 바야흐로 천하제일의 인물이 된다'라고 원대하고 굉위한 포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성리대전을 읽고 심취하여 스스로 깨우치고 연구하였으며, 이황조식의 문인이었던 정구와 교류하며 김종직-김굉필-정붕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였다. 23세 때 재사(才士)로 천거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2. 2. 1. 수학

1567년(명종 22) 14세 때부터 진사 학거(鶴渠) 장순(張峋)에게 학문을 배웠고, 1571년(선조 4) 18세에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어 대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말미에 '능히 천하의 제일사업(第一事業)을 할 줄 알아야 바야흐로 천하제일의 인물이 된다'라고 원대하고 굉위한 포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장순의 문하에서 성리대전을 읽고 심취하여 스스로 깨우치고 연구했다. 18세 때 〈우주요괄첩〉을 지었다. 그 뒤 이황조식의 문인이었던 정구의 사위(26세 때)가 되어 교류하였다. 김종직-김굉필-정붕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였고, 처삼촌이자 당대의 대 유학자였던 정구로부터는 이황조식의 학통을 계승했다.

2. 2. 2. 천거와 사퇴

1591년(선조) 학행으로 천거되어 전옥서 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으로 피난하였다.

2. 3. 관료 생활 (1592년 ~ 1623년)

1595년 류성룡이 학행으로 천거하여 보은현감에 임명되었다. 장현광은 고을 부자들과 매월 초하루, 보름에 모여 향약회를 열어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며 덕, 효도, 우애, 염치를 권장하여 고을 전체가 크게 감화되었다. 그러나 1년 만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이후 거창현감, 공조좌랑, 형조좌랑, 용담현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고, 의성현령 역시 반년 만에 사퇴한 후 선산 월파촌으로 옮겨 살았다.

1597년 여러 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했던 류성룡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류성룡은 아들 류진을 장현광의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 경서언해교정낭청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602년 11월 공조좌랑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공조좌랑으로 재직 중 주역 교정 사업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으로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에 사퇴하였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어서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의성현령 재직 중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으나, 몇 달 만에 사퇴하고 물러났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광해군 즉위 후 북인이 집권하면서 여천군수,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처숙 정구가 사망하자 그의 문하에 있던 허목이 다시 장현광을 찾아와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청했다. 그는 호기심이 많던 허목을 보고 범상하지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바로 자신의 문하에 받아들여 수학하게 하였다.

2. 3. 1. 임진왜란 전후

1591년(선조 24) 겨울 어머니 경산이씨의 상을 당하였다. 상중에 특별히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시묘살이하던 중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잠시 금오산(金烏山)으로 피신하여 있었다.

1594년(선조 27)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 해에 저서 「평설(平說)」을 지어 발표하였다. 1595년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정장을 세 번 올려 거듭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다시 세 번 사직을 청한 뒤 받아들여지지 않자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향리에 돌아갔다가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곧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가 풀려나 되돌아갔다.

류성룡김우옹 등이 그의 학덕을 높이 사 여러번 천거하였지만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2. 3. 2. 관료 생활

1595년 류성룡이 학행으로 천거하여 보은현감이 되었다. 그는 고을 부자들과 매월 초하루, 보름에 모여 향약회를 열어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며 덕, 효도, 우애, 염치를 권장하여 고을 전체가 크게 감화되었다. 1년 만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으며, 이후 거창현감, 공조좌랑, 형조좌랑, 용담현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고, 의성현령 역시 반년 만에 사퇴한 후 선산 월파촌으로 옮겨 살았다.

1597년 여러 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했던 류성룡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류성룡은 아들 류진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 경서언해교정낭청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602년 11월 공조좌랑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공조좌랑으로 재직 중 주역 교정 사업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으로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에 사퇴하였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어서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의성현령 재직 중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으나, 몇 달 만에 사퇴하고 물러났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광해군 즉위 후 북인이 집권하면서 여천군수,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처숙 정구가 사망하자 그의 문하에 있던 허목이 다시 장현광을 찾아와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청했다. 그는 호기심이 많던 허목을 보고 범상하지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바로 자신의 문하에 받아들여 수학하게 하였다.

2. 3. 3. 인조 반정 전후

인조 반정 이후 서인 김장생, 박지계와 함께 성균관 사업(司業)에 선발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을 받고 사헌부지평, 성균관사업 등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당시 조정이 서인 일색이었던 점과 공신들의 권력 남용, 압력 등을 지적했으며, 남인 재상 이원익의정부영의정이 되면서 출사를 권고했으나 이마저도 사양하였다.

2. 4. 생애 후반 (1624년 ~ 1637년)

1624년 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조참의, 승정원동부승지, 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어 잠시 부임하였으나, 곧 사헌부대사헌, 부호군,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사헌부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 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31년 우주설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31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11장은 답동문이라는 부분을 붙여 썼다.

1636년 81세에 자헌대부로 승진한 후 공조판서가 되고, 이어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정부우참찬에 임명되었으며,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고 각 고을 부로들에게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와 음식, 군자물품을 모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통탄해했다. 이후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영천(永川) 입암산으로 들어가 고요히 몸을 닦으며 12목의 벽서와 소강절의 서서금(西書今)을 쓰고 후학을 가르치다가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2. 4. 1. 사퇴와 학문 연구

1624년 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조참의, 승정원동부승지, 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임명되어 잠시 부임하였으나, 곧 사헌부대사헌, 부호군,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사헌부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 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31년 우주설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31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11장은 답동문이라는 부분을 붙여 쓴 것이다.

1636년 81세에 자헌대부로 승진한 후 공조판서가 되고, 이어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2. 4. 2. 병자호란과 최후

1636년(인조 14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정부우참찬에 임명되었으며,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고 각 고을 부로들에게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와 음식, 군자물품을 모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탄식하기를 '하늘도 땅도 없으니 가면 어디로 가랴'하며 크게 통탄해했다. 이후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영천(永川) 입암산(立嵒山)으로 들어가 고요히 몸을 닦으며 12목의 벽서와 소강절의 서서금(西書今)을 쓰고 후학을 가르치다가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3. 저서


  • 《여헌집》
  • 《역학도설》
  • 《성리설》
  • 《용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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