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노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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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노급함은 1860년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 사용된 전함의 한 종류로, 철갑함에서 발전하여 1890년대에 설계를 완성했다. 주포와 부포, 장갑, 추진 시스템을 갖추고 함대함 전투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1906년 드레드노트의 등장으로 구식화되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현재는 일본의 전함 미카사가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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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노급함 | |
|---|---|
| 개요 | |
| 유형 |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
| 사용 국가 | 영국 해군 미국 해군 일본 해군 프랑스 해군 이탈리아 해군 러시아 해군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스페인 해군 브라질 해군 아르헨티나 해군 칠레 해군 오스만 제국 해군 스웨덴 해군 노르웨이 해군 덴마크 해군 |
| 건조 기간 | 1880년대 ~ 1905년 |
| 이전 | 포탑함 |
| 이후 | 드레드노트급 전함 |
| 상세 정보 | |
| 배수량 | 10,000 ~ 16,000톤 |
| 무장 | 대구경 주포 (일반적으로 12인치) 중구경 부포 소구경 속사포 어뢰 발사관 |
| 장갑 | 다양한 두께의 강철 장갑 |
| 추진 | 증기 엔진 |
| 속도 | 16 ~ 18노트 |
| 주요 함급 | |
| 영국 | 로열 소버린급 마제스틱급 카노푸스급 포미더블급 킹 에드워드 7세급 |
| 미국 | 인디애나급 아이오와급 키어사지급 버지니아급 코네티컷급 |
| 일본 | 후지급 시키시마급 가시마급 사츠마급 |
| 프랑스 | 샤를마뉴급 레퓌블리크급 리베르테급 |
| 독일 | 브란덴부르크급 카이저 프리드리히 3세급 비텔스바흐급 브라운슈바이크급 도이칠란트급 |
| 러시아 | 페트로파블롭스크급 보로디노급 에스벤 |
| 배경 | |
| 개발 배경 | 1880년대부터 1905년 사이에 건조된 전함 HMS 드레드노트의 등장으로 구식화됨 |
| 특징 | 주포 외에 다양한 구경의 부포를 장착 증기 엔진을 사용하여 16~18노트의 속도를 냄 다양한 해군 강국에서 건조 및 운용 |
| 용어 | |
| 로마자 표기 | Jeon-nogeup ham |
| 기타 | |
| 관련 용어 | 함포 해전 해군 |
2. 발달


전노급함은 철갑함으로부터 발전되었다. 최초의 철갑함 '라 글루아르'(La Gloire)와 워리어는 1860년대 초에 취역했을 때에는 세 개의 긴 마스트와 배 옆으로 놓인 포대로 함해용 프리깃함처럼 보였다.[5] 1870년대에는 돛대가 없고 포탑에 주포를 장착한 HMS 데버스테이션과 같은 함선이 등장했지만, 건현이 낮아 항해 성능이 좋지 않았다.[5]
1880년대 어드미럴급 전함은 철과 강철 복합 장갑, 후장식 주포를 채택하여 전노급 전함으로의 발전을 보여주었다. 함포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개방형 노출 포탑에 장착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함선들을 전노급함으로 가는 중요한 단계로 보고 있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혼란스럽고 실패한 설계로 간주한다.[67]
1889년 로열 소버린급 전함은 높은 건현을 갖추어 대양 전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7] 개방 포탑은 장갑 커버로 덮여 있지 않아 외양에서는 가차 없이 해수가 바벳의 개구를 통해 함내로 침수되어 배수 펌프로 끊임없이 퍼내지 않으면 침몰의 위험이 있었다.
1895년 마제스틱급 전함은 강철 선체와 장갑, 완전 폐쇄형 포탑, 12인치 주포를 도입하여 전노급 전함 설계를 완성했다.[8][9]
2. 1. 한국의 전노급 전함 도입 시도와 좌절
3. 설계
3. 1. 무장
전노급 전함은 함대함 전투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여러 구경의 함포를 탑재했다. 주 무장은 보통 선수와 선미의 2기의 포탑에 장착된 4문의 거포였으며, 12인치가 가장 일반적인 구경이었다.[10] 주포는 발사 속도가 느리고 정확도가 제한적이었지만,[68] 적함의 두꺼운 장갑을 관통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10] 샤를마뉴호 이후 영국, 프랑스, 일본은 12인치 포를 채택했고, 미국은 1899년 메인급부터 12인치 포를 주력으로 사용했다. 러시아는 12인치 또는 10인치 포를, 독일은 초기에는 9.4인치, 이후 11인치 포를 사용했다.[11] 주포의 성능은 긴 포신의 도입으로 향상되었는데, 니트로셀룰로스와 코다이트 발사화약 덕분에 포구 속도가 빨라져 사거리와 관통력이 증가했다.[12]
부무장은 주로 6인치 속사포로 구성되었으며, 적함의 방호가 약한 부분에 손상을 입히거나 소형 함정에 대항하는 역할을 했다.[10] 부무장은 다양한 혁신 기술을 통해 빠른 발사 속도를 가졌으며,[14] 함교와 같은 장갑이 얇은 부분을 공격하거나 화재를 유발할 수 있었다.[10] 부무장은 포탑, 선체 측면의 포곽, 상갑판 등 다양한 위치에 장착되었다.
일부 전노급 전함은 8~10인치 중형 화력을 탑재하기도 했지만,[15] 드레드노트의 등장으로 구식이 되었다.[16] 미국 해군은 인디애나급, 아이오와, 키어사지급에서 중형 화력 개념을 시도했다.[73]
전노급함은 3차 부포로 다양한 구경의 경량 속사포를 탑재하여 어뢰정에 대한 근거리 방어를 담당했다.[10] 많은 전노급 전함은 어뢰를 장착했지만,[17] 전함 간 전투에서 큰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했다.



3. 2. 방어
전노급 전함은 상당한 무게의 강철 장갑을 갖추고 있었다. 경험상 함선 전체를 균일하게 보호하는 것보다 중요한 부분에 집중적으로 장갑을 배치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19] 8~9.4인치 크기의 '중형' 구경 함포는 일반적으로 가장 두꺼운 갑옷을 관통할 수 없었고, 이 갑판을 관통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당시의 '대형' 함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방어 수단을 제공했다.보일러와 엔진을 수용하는 선체 중앙 부분은 주 장갑대(main belt)로 보호되었으며, 이는 수선 바로 아래에서부터 그 위 일정 거리까지 뻗어 있었다. 이 "중앙 시타델(central citadel)"은 가장 강력한 포탄으로부터 엔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 장갑은 보통 선수와 선미를 향해 선체 측면을 따라 얇아졌으며, 중앙 시타델에서 상부 구조물로 갈수록 얇아지기도 했다. 주요 무장과 탄약고는 주 장갑대에서 돌출된 두꺼운 장갑으로 보호되었다.[19] 갑판은 일반적으로 2~4인치 두께의 강철로 가볍게 장갑 처리되었다.[20]
1880년대 후반의 전함, 예를 들어 로열 소버린급은 철강 복합 장갑으로 무장했다. 이는 곧 미국에서 개발된 하비 공법을 사용하여 제작된 더욱 효과적인 표면 경화 강철 장갑으로 대체되었다. 1891년에 처음 시험된 하비 장갑은 1893년부터 1895년까지 건조된 함선에 널리 사용되었다.[19] 그러나 그 시대는 짧았다. 1895년, 독일의 는 더 우수한 크루프 장갑을 선도했다. 유럽은 5년 이내에 크루프 강판을 채택했고, 미국만이 20세기까지 하비 강철을 계속 사용했다. 장갑판의 품질 향상은 새로운 함선이 더 얇고 가벼운 장갑대로 더 나은 방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2인치(305mm)의 복합 장갑은 7.5인치(190mm)의 하비 장갑 또는 5.75인치(133mm)의 크루프 장갑과 동일한 방어력을 제공했다.[21]
부포를 포함한 근거리 포격전으로도 결착이 나지 않을 경우, 마지막에는 충각에 의한 몸통 박치기 공격으로 결착을 내는 것이 전노급 전함의 전투의 정석이었다. 증기 기관에 의한 동력 추진이 보급되면서 함선의 속도와 항행의 자유도가 비약적으로 높아지자, 충각 공격 전술의 효과에 큰 기대가 걸렸다. 따라서 대부분의 전노급 전함은 함수에 충각을 장비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주포의 위력이 작았던 시절의 전투의 잔재, 및 리사 해전에서의 잘못된 전훈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는 전함끼리의 전투에서 충각이 도움이 되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충돌 사고 시에 아군의 함선을 실수로 격침시켜 버리는 유해한 존재였다.
3. 3. 추진
전노급 전함은 주로 피스톤 기관의 증기 엔진으로 구동되었다.[22][83] 대부분의 함선은 16~18노트(33 km/h)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22] 1880년대 말에는 효율적인 3단 팽창 엔진이 사용되었으며,[22][84] 영국을 제외한 일부 해군은 4단 팽창 증기 엔진을 채택했다.[23][84]
엔진 성능 향상의 주요 요인은 보일러에서 증기 압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해양 보일러는 더 작고 콤팩트한 수관 보일러로 대체되어 연료 소비를 줄이면서 더 높은 압력의 증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24] 수관 보일러는 연관 보일러보다 효율적이고 안전하며 폭발 위험이 적고 유연성이 풍부했다.[82] 벨빌형 수관 보일러는 1879년 프랑스 해군에 처음 도입되었지만, 영국 해군이 장갑 순양함과 전노급함에 이를 채택하는 데는 1894년까지 걸렸다. 이후 다른 수관 보일러가 전 세계 해군에 도입되었다.[24][82]
엔진은 2개 또는 3개의 스크류 프로펠러를 구동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3개의 스크류 방식을 선호했는데, 이를 통해 엔진을 더 짧게 만들어 더 쉽게 보호할 수 있었고, 기동성이 더 뛰어나며, 우발적인 손상에 대한 저항력도 더 좋았다. 그러나 트리플 스크류는 대부분의 다른 해군이 선호하는 트윈 스크류 방식보다 일반적으로 더 크고 무거웠다.[23][84]
석탄이 전노급함 시대의 거의 유일한 연료였지만,[85] 해군은 1890년대 후반에 석유 추진에 대한 실험을 했다.[25][85] '강제 통풍'을 퍼니스에 적용하여 단시간에 1~2노트의 속도를 더 낼 수 있었지만, 장기간 사용하면 보일러가 손상될 위험이 있었다.
4. 전노급 함대의 활동과 전투
전노급 전함은 전성기에 매우 다양한 함종을 보유하며 당시 해군의 중심이었지만, 구식 장갑함도 여전히 운용되었다.[26] 전함은 장갑순양함, 방호순양함, 구축함 등 다양한 함종과 함께 운용되었다.[26] 어뢰정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최초의 구축함이 건조되었으며, 최초의 효과적인 잠수함도 건조되었다.[26]
전노급 시대는 프랑스와 러시아가 거대한 영국 해군에 대항하여 경쟁하던 19세기 해군 세력 균형의 종말을 알렸으며, 독일, 일본, 미국과 같은 "신 해군 강국"의 부상을 시작했다.[26] 일본 제국 해군과 미국 해군의 새로운 함선들은 이들 강국의 식민지 확장을 지원했다.
전노급 전함이 전 세계적으로 채택되었지만, 지배 기간이 끝나기 전까지 전노급 전함 간의 충돌은 없었다. 1894년-1895년의 청일 전쟁은 전노급 전함 개발에 영향을 미쳤지만, 이는 중국 전함과 주로 순양함으로 구성된 일본 함대 간의 충돌이었다.[27][28] 1898년의 미국-스페인 전쟁 역시 불균형한 싸움이었는데, 미국 전노급 함대는 산후안에서 스페인 해안 포대와 산티아고 데 쿠바 해전에서 스페인 장갑 순양함 및 구축함 전대와 교전했다. 1904년-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야 비로소 전노급 전함이 동등한 입장에서 교전했다. 이는 세 번의 전투에서 발생했다. 1904년 2월 8일~9일 뤼순항 해전에서 러시아의 전술적 승리,[29] 1904년 8월 10일 황해 해전에서의 승패 불분명, 그리고 1905년 5월 27일 쓰시마 해전에서의 결정적인 일본의 승리였다. 이 전투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먼 거리에서 함대가 서로를 향해 발포하면서 해전이 어떻게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기존의 이론을 뒤집었다. 해군 설계자들은 강하 사격 (폭발성 포탄이 거의 수평에 가까운 궤적에서가 아닌 위에서부터 표적에 떨어지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위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군함 외교는 일반적으로 순양함이나 소형 군함에 의해 수행되었다. 세 척의 방호 순양함과 두 척의 포함으로 구성된 영국 함대는 1896년 잔지바르의 항복을 이끌어냈으며, 전함은 의화단 운동 당시 서방 열강이 배치한 연합 함대에 참여했지만, 작전의 해군 부분은 포함, 구축함, 슬루프가 수행했다.[30]
전노급함 시대에는 유럽 해군이 우위를 점했다. 영국 해군은 세계 최대의 함대를 유지했지만, 영국의 전통적인 해상 경쟁국과 새로운 유럽 강대국들은 영국의 지배에 점점 더 대항했다.
1889년, 영국은 두 번째로 큰 다른 두 해군의 함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전함을 건조하는 것을 약속하는 "2강 기준"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당시 이것은 1890년대 초에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은 프랑스와 러시아를 의미했다.[31] ''Royal Sovereign''급과 ''Majestic''급에 이어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정기적인 건조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Canopus급, Formidable급, Duncan급, King Edward VII급이 1897년부터 1905년까지 잇따라 등장했다.[32] 칠레가 발주했지만 영국이 인수한 두 척을 포함하여, 영국 해군은 1889년 해군 방위법의 10척부터 시작하여 1904년까지 50척의 전노급함 전함이 준비되었거나 건조 중이었다. 12척 이상의 구형 전함이 현역으로 남아 있었다. 마지막 두 척의 영국 전노급함, "준 드레드노트"급인 ''Lord Nelson''은 ''Dreadnought''보다 늦게 등장했다.
영국의 전통적인 해상 경쟁국이었던 프랑스는 전함보다 어뢰정을 선호하는 청년학파 교리의 영향으로 1880년대에 전함 건조를 중단했다. 청년학파의 영향력이 약해진 후, 프랑스가 처음으로 기공한 전함은 1889년의 Brennus였다. ''Brennus''와 그 뒤를 이은 함선들은 대규모의 영국 함선들과 달리 개별적으로 설계되었으며, 독특한 배열의 중(重)포를 탑재했다. ''Brennus''는 13.4인치 주포 3문을 탑재했으며, 그 뒤를 이은 함선들은 12인치 주포 2문과 10.8인치 주포 2문을 단일 포탑에 장착했다. 1894년~1896년에 기공된 ''Charlemagne''급은 표준 4문의 12인치 주포를 채택한 최초의 함선이었다.[33] 청년학파는 프랑스 해군 전략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19세기 말까지 프랑스는 전함 수에서 영국과의 경쟁을 포기했다.[34] 프랑스는 드레드노트 혁명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Dreadnought''가 진수될 때 Liberté급 4척이 건조 중이었으며, 그 후 ''Danton''급 6척이 추가로 건조되었다.
독일의 첫 번째 전노급함인 Brandenburg급은 1890년에 기공되었다. 1905년까지 1898년 및 1900년 해군법에 의해 정당화된 해군 지출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19척의 전함이 추가로 건조되었거나 건조 중이었다.[35] 이러한 증가는 해군 참모장인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의 결단과 영국과의 국가적 경쟁 의식이 커진 데 기인했다. ''Brandenburg''급 외에도 독일 전노급함에는 Kaiser Friedrich III급, Wittelsbach급, ''Braunschweig''급의 함선이 포함되었으며, 양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Deutschland급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전반적으로 독일 함선은 영국 함선보다 덜 강력했지만 견고함은 동등했다.[36]
러시아 역시 1890년대에 해군 확충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러시아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극동에서 일본의 팽창에 대항하여 자국의 이익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1892년에 시작된 ''Petropavlovsk''급은 영국의 ''Royal Sovereign''급을 모방했다. 이후 함선들은 ''Borodino''급과 같이 설계에 프랑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러시아 조선의 약점은 많은 함선이 러시아를 위해 해외에서 건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최고의 함선인 ''Retvizan''은 대부분 미국에서 건조되었다.[37] 1904년~1905년의 러일 전쟁은 러시아 전노급함에게 재앙이었다. ''Petropavlovsk'' 이후 완성된 15척의 전함 중 11척이 전쟁 중에 격침되거나 나포되었다. 이 중 하나인 유명한 Potemkin은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이 끝날 무렵 루마니아에 의해 잠시 점령되었다. 그러나 곧 회수되어 ''Panteleimon''으로 재취역되었다. 전쟁 후 러시아는 1905년 이후 4척의 전노급함을 추가로 완성했다.
1893년부터 1904년까지 이탈리아는 8척의 전함을 기공했다. 이후 두 함선은 상당히 빠른 속도를 냈지만, Regina Margherita급은 방어력이 형편없었고 Regina Elena급은 무장이 빈약했다. 어떤 면에서 이 함선들은 순양전함의 개념을 예고했다.[38]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1890년대에 해군 부흥을 겪었지만, 주문된 9척의 전노급함 중 ''Habsburg''급 3척만 ''Dreadnought''가 이들을 구식으로 만들기 전에 도착했다.
미국은 1891년에 최초의 전함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이 함선들은 영국 HMS Hood와 유사하지만 8인치 포의 혁신적인 중간 포대를 갖춘 단거리 연안 방어 전함이었다. 미국 해군은 1901년~1902년에 기공된 Virginia급까지 비교적 단거리이고 거친 바다에서 성능이 떨어지는 함선을 계속 건조했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초기 함선들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구식 스페인 함대(전노급 전함 없음)에 대한 미국의 해상 지배력을 확보했으며, 특히 산티아고 데 쿠바 해전에서 두드러졌다. 미국의 마지막 두 종류의 전노급 전함(Connecticut급 및 Mississippi급)은 ''드레드노트''가 완성된 후, 그리고 미국 해군의 자체 드레드노트급 설계를 시작한 후에 완성되었다. 미국 대백색 함대는 16척의 전노급 전함으로 구성되어 1907년 12월 16일부터 1909년 2월 22일까지 세계 일주 항해를 했다.[39]
일본은 전노급 시대의 3대 주요 해전 중 2개에 참여했다. 일본의 첫 번째 전노급 전함인 Fuji급은 1894년~1895년 청일 전쟁 발발 당시 건조 중이었다.[40] 이 전쟁에서 일본의 장갑순양함과 방호순양함은 구식 철갑 전함과 순양함으로 구성된 중국 북양함대를 압록강 해전에서 격파했다. 승리 후, 일본은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압박에 직면하여 전노급 전함 4척을 추가로 주문했다. 이 두 척의 ''Fuji''급 전함과 함께 이 전함들은 황해 해전과 쓰시마 해전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러시아 함대와 두 번 교전한 함대의 핵심을 이루었다. 일본은 러일 전쟁 후 다양한 시기의 러시아 전함 8척을 노획한 후 전노급 전함 여러 척을 더 건조했다.
4. 1. 주요 해전
4. 1. 1. 청일 전쟁 (1894-1895)
일본 함대는 주로 순양함으로 구성되었지만, 청나라 북양 함대는 구식 철갑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황해 해전에서 일본 함대가 승리하여 제해권을 장악했다.4. 1. 2. 미국-스페인 전쟁 (1898)
미국이 전함 건조를 시작한 것은 1891년의 일이다. 그것은 우선 항속거리가 짧은 연안 방비용 전함이었으며, 중간포로 혁신적인 8인치 포를 갖춘 것을 제외하면 영국의 전함 후드와 유사했다. 미국 해군은 1901-02년에 기공된 버지니아급까지 비교적 짧은 항속 거리와 내항성이 부족한 함을 계속 건조했다. 그러나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특히 빛나는 산티아고 해전 등에서 전노급 전함을 갖지 못한 시대에 뒤떨어진 스페인 함대로부터 미국의 해상 우위를 지킨 것은 이러한 구식 함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4. 1. 3. 러일 전쟁 (1904-1905)
일본은 전노급 전함 시대에 일어난 두 번의 큰 해상 전쟁에 모두 관여했다. 일본의 첫 전노급 전함인 후지형은 청일 전쟁 발발 시점에는 아직 건조 중이었다[96]。 청일 전쟁에서는 황해 해전에서 일본의 장갑순양함과 방호순양함이 청나라 북양함대의 구식 장갑전함과 순양함 혼성 함대를 격파했다. 승리 후, 동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압력에 직면하여 일본은 후지형 2척 외에 4척의 전노급 전함을 추가 발주했다. 그것들은 일본 함대의 핵심을 구성하며, 러일 전쟁의 황해 해전과 쓰시마 해전의 두 번의 해전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러시아 함대와 교전했다. 일본 해군은 신구 여러 러시아 전함 8척을 포획한 외에도, 러일 전쟁 후에도 더 몇 개의 전노급 전함을 건조했다.
5. 퇴장

1906년, 영국이 전함 드레드노트를 취역시키면서 기존의 모든 전함이 구식화되었다. 드레드노트는 중간포나 부포를 폐지하고 12인치(305 mm) 주포를 4문이 아닌 10문 장착함으로써 전노급 전함의 4문에 대해 8문의 편현 화력을 갖추었고, 전면에 대한 화력도 2문에서 6문으로 증가시켰다.[97] 이후 8문 이상의 주포를 탑재하고 6문 이상의 포를 동일 방향으로 일제사격할 수 있는 것이 전노급 전함(및 순양전함)의 정의가 되었다. "단일 거포" 방식의 이행은 교전 거리의 증대와 마지막 전노급 전함에서의 중간포 대구경화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종래의 전노급 전함에서는 원거리 포격전에서의 명중은 그다지 기대할 수 없었지만, 주포의 수를 늘림으로써 명중률을 높였다. 더욱이 단순하게 주포의 수를 늘리는 것뿐만 아니라 함교에서 일원적으로 사격 관제를 실시함으로써 원거리 포격전에서의 명중률을 높였다. 일본과 미국은 드레드노트 이전에 유사한 무장을 갖춘 전함 설계를 진행했지만 드레드노트에 선수를 빼앗기는 결과가 되었다.[98]
이 신종 군함의 이점은 그 무장에만 그치지 않았다. 드레드노트는 영국 전함으로서는 처음으로 추진 기관에 증기 터빈을 채용하여 전노급 전함에서 표준적이었던 18노트가 아닌 21노트의 최고 속도를 얻었다. 최대 구경 포만 해전에서 유효하다고 생각했을 경우, 다수의 12인치(305 mm) 포를 탑재하는 이른바 "전노급 전함"은 전투에서 기존의 전함보다 2~3배의 전력을 가졌다.[99] 한편 중간포나 부포가 유효한 경우에는 전노급 전함과 전노급 전함의 포력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기 때문에, 접근하여 포격전이 벌어진다면 전노급 전함의 우세는 소멸된다. 속도 성능에서 전노급 전함에 우세할 경우에는 부포나 중간포의 사정 거리 밖이라는, 전노급 전함에게 유리한 포격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화력과 기동력 모두에서 우위를 점함으로써 "전노급 전함"은 전노급 전함을 앞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면서도 전노급 전함은 현역을 유지하며 중요한 전투에도 참가했다. 전노급 전함과 순양전함은 함대 결전에 불가결하다고 모든 국가가 생각했기 때문에 기뢰와 잠수함의 위협으로부터 엄중하게 보호받았고, 가능한 본국 근처에 유지되었다. 전노급 전함은 구식화되어 그만큼 가치가 낮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더 위험한 상황에 투입되거나, 더 먼 지역에 전개되었다.[100]
현존하는 유일한 전노급 전함은 러일 전쟁 등에 참전한 일본 제국 해군의 전함 미카사이며, 1925년 이후 현재까지 요코스카에서 박물관 배가 되어 있다. (미카사 공원)
== 제1차 세계 대전 ==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많은 수의 전노급함이 현역으로 남아 있었다. 기계와 무기의 발전은 전노급함이 최신 장갑 순양함과 동등하지 않을 수 있으며, 최신 드레드노트 전함 또는 순양전함에 비해 완전히 뒤쳐진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노급함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45]
이는 1914년 남아메리카 주변에서 벌어진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 사이의 작은 교전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영국은 1896년형 전노급함 카노푸스를 파견했다. 이 함선은 해당 지역의 영국 순양함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느린 속도 때문에 재앙적인 코로넬 해전에서 뒤쳐지게 되었다. 포클랜드 해전에서 ''카노푸스''는 항구 방어선으로 활동하기 위해 좌초되었을 때 극심한 사거리(12,300 m)에서 독일 순양함 그나이제나우를 향해 발포했으며, 유일한 명중탄은 불활성 훈련탄이었다.[45] 그 후의 전투는 코로넬 이후 파견된 두 척의 인빈시블급 순양전함에 의해 결정되었다.[45]
흑해에서는 5척의 러시아 전노급함이 1914년 11월 사리치 곶 해전에서 오스만 순양전함 야부즈 술탄 셀림과 잠시 교전했다.[46]
쓸모없는 전노급함을 최신 함선을 투입할 수 없는 곳에 사용할 수 있다는 원칙은 영국, 프랑스, 독일 해군에 의해 전쟁의 보조 전선에서 확인되었다. 독일 해군은 발트해 작전에서 전노급함을 자주 사용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수의 전노급함이 갈리폴리 작전에 투입되었다. 12척의 영국 및 프랑스 전노급함은 1915년 3월에 다르다넬스 해협 해상 작전을 시도한 주력 부대를 형성했다. 전노급함의 역할은 터키 해안 방어와 교전하는 최신 드레드노트 퀸 엘리자베스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3척의 전노급함이 기뢰에 의해 격침되었고, 몇 척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그러나 작전이 중단된 것은 전노급함의 피해 때문이 아니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골리앗, 트라이엄프 및 마제스틱 3척이 손실되었다.[49]
1916년 유틀란트 해전에는 독일 전노급함 편대가 있었다. 독일 해군은 그들을 "5분 함선"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격렬한 전투에서 그들이 살아남을 것으로 예상되는 시간이었다.[51] 제한에도 불구하고, 전노급함 편대는 유용한 역할을 했다. 독일 함대가 전투에서 이탈하면서 전노급함은 어둠이 내리자 영국 전함대에 맞서면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다.[5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노급함 중 한 척(폼메른)만 침몰했다.[53]
1918년 11월 휴전 이후, 미국 해군은 15척의 구형 전함, 8척의 장갑 순양함 및 2척의 대형 방호 순양함을 수송선으로 임시 전환했다.
이 함선들은 각각 1~6번의 대서양 횡단을 하며 총 145,000명 이상의 승객을 본국으로 데려왔다.[54]
== 제2차 세계 대전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대부분의 전노급 전함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무장 해제되었다. 대부분 스크랩 처리되거나 훈련 및 지원함으로 사용되었고, 일본 해군의 미카사는 특별 면제를 받아 박물관선으로 보존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함대의 대부분을 잃은 독일은 8척의 전노급 전함을 보유할 수 있었는데, 그중 2척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56]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폴란드 침공 당시 베스테르플라테를 포격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의 첫 포격을 가했다.[57] 슐레지엔은 1945년 5월 기뢰에 의해 파괴된 후 자침되었다.[59]

그리스 해군의 킬키스와 렘노스는 1941년 독일 침공 이후 독일 급강하 폭격기에 의해 침몰했다.[109] 미국 해군 잠수함 서먼은 1942년 5월 무장 해제된 일본의 전노급 전함 아사히를 침몰시켰다.[110]
5. 1.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많은 수의 전노급함이 현역으로 남아 있었다. 기계와 무기의 발전은 전노급함이 최신 장갑 순양함과 동등하지 않을 수 있으며, 최신 드레드노트 전함 또는 순양전함에 비해 완전히 뒤쳐진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노급함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45]이는 1914년 남아메리카 주변에서 벌어진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 사이의 작은 교전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영국은 1896년형 전노급함 카노푸스를 파견했다. 이 함선은 해당 지역의 영국 순양함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느린 속도 때문에 재앙적인 코로넬 해전에서 뒤쳐지게 되었다. 포클랜드 해전에서 ''카노푸스''는 항구 방어선으로 활동하기 위해 좌초되었을 때 극심한 사거리(12,300 m)에서 독일 순양함 그나이제나우를 향해 발포했으며, 유일한 명중탄은 불활성 훈련탄이었다.[45] 그 후의 전투는 코로넬 이후 파견된 두 척의 인빈시블급 순양전함에 의해 결정되었다.[45]
흑해에서는 5척의 러시아 전노급함이 1914년 11월 사리치 곶 해전에서 오스만 순양전함 야부즈 술탄 셀림과 잠시 교전했다.[46]
쓸모없는 전노급함을 최신 함선을 투입할 수 없는 곳에 사용할 수 있다는 원칙은 영국, 프랑스, 독일 해군에 의해 전쟁의 보조 전선에서 확인되었다. 독일 해군은 발트해 작전에서 전노급함을 자주 사용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수의 전노급함이 갈리폴리 작전에 투입되었다. 12척의 영국 및 프랑스 전노급함은 1915년 3월에 다르다넬스 해협 해상 작전을 시도한 주력 부대를 형성했다. 전노급함의 역할은 터키 해안 방어와 교전하는 최신 드레드노트 퀸 엘리자베스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3척의 전노급함이 기뢰에 의해 격침되었고, 몇 척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그러나 작전이 중단된 것은 전노급함의 피해 때문이 아니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골리앗, 트라이엄프 및 마제스틱 3척이 손실되었다.[49]
1916년 유틀란트 해전에는 독일 전노급함 편대가 있었다. 독일 해군은 그들을 "5분 함선"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격렬한 전투에서 그들이 살아남을 것으로 예상되는 시간이었다.[51] 제한에도 불구하고, 전노급함 편대는 유용한 역할을 했다. 독일 함대가 전투에서 이탈하면서 전노급함은 어둠이 내리자 영국 전함대에 맞서면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다.[5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노급함 중 한 척(폼메른)만 침몰했다.[53]
1918년 11월 휴전 이후, 미국 해군은 15척의 구형 전함, 8척의 장갑 순양함 및 2척의 대형 방호 순양함을 수송선으로 임시 전환했다.
이 함선들은 각각 1~6번의 대서양 횡단을 하며 총 145,000명 이상의 승객을 본국으로 데려왔다.[54]
5. 2. 제2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대부분의 전노급 전함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무장 해제되었다. 대부분 스크랩 처리되거나 훈련 및 지원함으로 사용되었고, 일본 해군의 미카사는 특별 면제를 받아 박물관선으로 보존되었다.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함대의 대부분을 잃은 독일은 8척의 전노급 전함을 보유할 수 있었는데, 그중 2척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56]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폴란드 침공 당시 베스테르플라테를 포격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의 첫 포격을 가했다.[57] 슐레지엔은 1945년 5월 기뢰에 의해 파괴된 후 자침되었다.[59]
그리스 해군의 킬키스와 렘노스는 1941년 독일 침공 이후 독일 급강하 폭격기에 의해 침몰했다.[109] 미국 해군 잠수함 서먼은 1942년 5월 무장 해제된 일본의 전노급 전함 아사히를 침몰시켰다.[110]
6. 보존

오늘날 보존되어 있는 전노급함은 단 한 척뿐인데, 바로 러일 전쟁의 쓰시마 해전에서 기함으로 활약했던 일본 제국 해군의 미카사로, 1925년부터 박물관선으로 요코스카에 보존되어 있다.[6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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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The name is also spelled with a capital ''D'': "pre-Dreadnought" (see Bergantín, pp. 267, 273; Beeler, p. 10), and occasionally "pre-Dreadnaught" or some other var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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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dn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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