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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급 철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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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원급 철갑함은 1880년대 독일에서 설계 및 건조된 철갑함으로, 딩위안과 진원 두 척이 존재했다. 이 함선들은 당시 독일 해군의 최신 기술을 적용하여 건조되었으며, 30.5cm 주포 4문과 15cm 부포 2문을 장착했다. 청나라 해군에서 운용되었으며, 청일 전쟁에 참전하여 활약했다. 정원함은 자침, 진원함은 일본 해군에 노획되어 사용되다 해체되었다. 현재 중국과 일본에서 복원 및 기념 시설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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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급 철갑함 - [배(Ship)]에 관한 문서
함선 정보
웨이하이웨이에서 일본 제국 해군에 포획된 후의 진원
웨이하이웨이에서 일본 제국 해군에 포획된 후의 진원
함급정원급 철갑함
함종철갑함 포탑함
건조슈테티너 불칸 AG, 슈체친, 독일
운용청나라 해군
일본 제국 해군
이전 함급없음
이후 함급없음
척당 건조 비용1,000,000 은 냥
건조 기간1881년–1884년
취역 기간1885년–1912년
총 건조 함선 수2척
총 손실 함선 수1척
총 폐기 함선 수1척
특징
배수량(만재 배수량)
추진2축
2 x 트렁크 증기 엔진
동력
8 x 원통형 보일러
항속 거리에서
승무원363명
무장 (건조 당시)
주포2 × 연장 L/25 크루프 포
부포2 × 단장 크루프 포
기타 무장8 x 호치키스 회전포
2 × 어뢰 발사관
해군 충각
무장 (진원 현대화 이후)
주포2 × 연장 L/25 크루프 포
부포2 x 15 cm L/40 엘스윅 포
기타 무장2 x QF 6파운드 호치키스
8 x QF 3파운드 호치키스
3 × 어뢰 발사관
장갑

2. 설계

정원급은 독일 '불칸 슈테틴' 조선소에서 설계 및 건조되었으며, 당시 독일 해군의 최신 기술이 적용되었다.

== 설계 ==

=== 기본 형태 ===

정원급의 기본 형태는 수면 아래에 날카로운 충각을 가지고, 건현이 높은 선체를 가진 점은 동시기의 독일 해군 장갑함과 같지만, 정원급의 선체 형상은 중앙부만 높은 긴 선수루형 선체를 채용하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설계 단계에서는 순항 시 돛을 이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함의 전후에 굵은 돛용 마스트를 1개씩 가지고 있었지만, 건조 중에 기관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에 돛 장비는 전부 폐지하고 대신 전후에 밀리터리 마스트를 장비했다.

준공 당시의 정원급을 상세히 그린 일러스트.


정원급의 무장·장갑 배치를 나타낸 그림.


정원급은 함체 중앙부에 냄비를 엎어놓은 듯한 형상의 연장식 주포를 전후로 서로 어긋나게 2기를 병렬 배치했다. 주포탑의 후부에 2개 연돌을 세웠다. 이로 인해 정원급의 주포탑은 상부 구조물에 사계가 제한되지 않고 함수 방향으로 주포 4문을 모두 지향할 수 있었다. 이것은 리사 해전의 "장갑함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충각 전술이 유효하다"는 전훈에 의해 편현 화력보다 함수 방향으로의 화력 집중이 우선되었기 때문이다.

|thumb|right|200px|동시기의 일본 해군의 현측 포곽함 "후소". 근대화 개장을 했지만 주포 배치는 여전히 포곽(케이스메이트) 배치였다.]]

정원급의 주포 문수는 일본 해군의 현측 포곽함 "후소"와 같은 4문이지만, "후소"는 선수미 방향으로는 주포를 지향할 수 없지만, 정원급은 주포 4문을 지향할 수 있는 등 사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어 유리했다.

선체 중앙부에 주노출 포탑 2기와 2개의 연돌을 집중 배치한 것으로 인해, 주포 제사 시의 폭풍을 피하기 위해 함교를 갑판 위에 배치할 수 없게 되었다. 정원급은 노출 포탑 위에 "'''공중 갑판(플라잉 데크)'''"을 설치함으로써 해결했다. 공중 갑판은 장갑함 시대부터 전함 시대까지 널리 사용된 상부 구조물의 양식으로, 좁은 갑판을 유효하게 사용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다. 공중 갑판의 후부에 상자형 조타 함교가 배치되었고, 전후 갑판으로의 교통을 돕기 위해 설치된 총 4곳의 계단으로 지지되었다. 2번 연돌에서 후부 마스트 사이의 갑판 위에 함재 어뢰정과 함재정이 늘어서 있었고, 전후의 마스트 기부에 1개씩 붙은 지브 크레인에 의해 운용되었다.

=== 밀리터리 마스트 ===

정원급은 돛 장비를 폐지하고 밀리터리 마스트를 장착하여 대어뢰 방어 능력을 강화했다. 밀리터리 마스트는 마스트 상부 또는 중간에 경방어 전망대를 설치하고, 37mm~47mm급 기관포(속사포)를 배치한 것이다. 정원급의 밀리터리 마스트에는 오치키스사의 "47mm(43구경) 단장기포" 2기와 "37mm(23구경) 5연장 개틀링포" 8기가 장착되었다. 전방 마스트에는 2단의 전망대가, 후방 마스트에는 상부에만 1단의 전망대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밀리터리 마스트는 프랑스 해군에서 개발된 어뢰정의 기습 공격을 요격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멀리까지 감시하고 차폐물이 적은 높은 곳에 대어뢰 격퇴용 속사포 또는 기관포를 배치한 것이다. 당시 열강 각국의 대형함에는 필수 장비였다.

=== 주포 배치 ===

정원급의 주포는 함체 중앙부에 냄비를 엎어놓은 듯한 형상의 연장식 포탑 2기를 전후로 서로 어긋나게 배치했다. 이 배치는 리사 해전의 전훈에 따라 함수 방향으로 주포 4문을 모두 지향할 수 있도록 하여, 충각 전술에 유리하도록 설계되었다. 탄약고와 기관실을 인접시켜 방어 구획을 좁히고 방어 장갑을 두껍게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주포 배치는 전방 및 후방에는 모든 주포를 향할 수 있지만, 양현 방향에는 좌우 주포탑이 간섭하여 2문 밖에 향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해군의 후소와 비교했을 때, 정원급은 주포 4문을 선수 방향으로 지향할 수 있어 사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주포탑 위에 "공중 갑판(플라잉 데크)"을 설치하여 좁은 갑판을 유효하게 사용하고, 함교를 갑판 위에 배치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였다. 공중 갑판의 후부에는 상자형 조타 함교가 배치되었고, 전후 갑판으로의 교통을 돕기 위해 총 4곳의 계단이 설치되었다.

1883년 딩위안(Ting-Yuen) 설계 도면


정원급은 2개의 포탑에 4문의 30.5cm 주포를 장착했다. 정확한 주포 모델에 대해서는 혼란이 있었으나,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30.5 cm MRK L/25로 추정된다.

=== 공중 갑판 ===

정원급은 주포 사격 시 폭풍을 피하고 함상에서의 이동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공중 갑판(플라잉 데크)을 설치했다. 공중 갑판은 장갑함 시대부터 전함 시대까지 널리 사용된 상부 구조물의 양식으로, 좁은 갑판을 유효하게 사용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선체 중앙부에 주노출 포탑 2기와 2개의 연돌을 집중 배치한 결과, 주포 사격 시 발생하는 폭풍을 피하기 위해 함교를 갑판 위에 배치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선상에서 전후로 이동할 때 함내를 거쳐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원급은 노출 포탑 위에 공중 갑판을 설치했다.

공중 갑판 후부에는 상자형 조타 함교가 배치되었고, 전후 갑판으로의 이동을 돕기 위해 총 4곳의 계단으로 지지되었다. 공중 갑판의 형상은 단순한 십자형이 아니라, 좌우의 선교 (브리지) 부분은 주포 폭풍을 피하기 위해 주포탑 배치에 맞춰 전후로 서로 어긋나게 배치되었다. 2번 연돌에서 후부 마스트 사이의 갑판 위에는 함재 어뢰정과 함재정이 배치되었고, 전후의 마스트 기부에 1개씩 설치된 지브 크레인으로 운용되었다.

선루 측면에는 선체 높이 절반의 현측 갑판이 함수 측면에서 시작되었고, 함수 측면에 우현 갑판에 주묘 1개, 좌현 측에 부묘 2개가 현측 갑판 위에 직접 놓여져 전용 크레인으로 운용되었다(앵커 베드 방식). 선체 전부에서 후부로 이동할 때는 주포 바벳을 우회하기 위해 바벳 곡선에 맞춰 난간이 달린 통로를 설치했다.

=== 주포 ===

크루프사가 딩위안급을 위해 제조한 "크루프 30.5cm(25구경) 후장식"[2]강선포"를 채용했다. 이 포는 당시 영국 전함이 전장식 포[3]를 장비하고 있던 것에 비해 취급성이 좋았고, 발사 속도는 3분당 1발로 최대 사거리는 약 7,800m였다.

=== 부포 ===

부포로는 '크루프 15cm(35구경) 단장포'를 채용했다. 이 포는 정원급 철갑함 외에도 북양수사의 방호순양함 '제원', 치원형 방호순양함 '치원', '정원', 장갑포함 '평원'에도 탑재된 우수한 포였다. 그 성능은 최대 앙각에서 사정거리 11,000m, 발사 속도는 분당 1발이었다.

특기할 만한 점은 부포도 주포와 같은 노포탑 형식을 채택한 것이다. 이를 선루 상부에 1기, 함미 쪽에 1기, 총 2기를 배치하여, 최상 갑판에 장애물이 적은 본급에서는 적은 부포 문수로, 당시 주류였던 현측 케이스메이트 배치 방식보다 넓은 사계를 얻었다. 또한, 부포의 위치를 고소에 배치한 덕분에 파랑의 영향을 받기 어려워, 외양 항해 시의 전투 능력상 유리했다.

일본 해군 시절의 '진원' 사진. 노획 후 수리 시 부포가 증설되어 15.2cm 속사포 4기가 되었다.


=== 수뢰병장 ===

함재 어뢰정 2척을 후부 갑판에 탑재했다. 배수량 28톤에 석탄 전소 보일러 1기로 왕복 기관 1기 1축 추진으로 650마력, 13.2노트를 발휘하며 45cm 어뢰 발사관을 장비했다. 운용에는 16명이 필요했다. 「딩위안」의 어뢰정은 「딩 1호(定1号)」「딩 2호(定2号)」, 「전위안」의 어뢰정은 「전 1호(鎮1号)」「전 2호(鎮2号)」로 불렸다.

=== 기관 ===

정원급은 수평형 2단 팽창식 3기통 트렁크 엔진 한 쌍을 갖추고, 각 엔진은 단일 스크류 프로펠러를 구동했다. 증기는 8개의 석탄 전소 원통 보일러에서 나왔으며, 이 보일러는 선체 중앙부에 위치한 두 개의 굴뚝으로 연결되었다. 보일러는 4개의 보일러실로 나뉘어 선수미선 방향에 직각으로 좌우 현측에 각각 4기씩 배치되었다. 여기에 수평형 2단 팽창식 3기통 왕복 기관을 좌우 각각 1기씩 총 2기를 조합한 2축 추진 방식이었다. 엔진은 6,000ihp의 출력을 냈으며, 최대 속도는 14.5kn였지만, 두 함선 모두 시험에서 이 수치를 초과했다. 2번함 전원은 7,200ihp의 출력과 15.4kn의 속도를 기록했다. 일반적으로 700톤의 석탄을 탑재했고, 최대 1,000톤까지 탑재할 수 있었다. 이는 10kn의 속도로 항해 시 4,500해리(nmi)의 항속 거리를 가능하게 했다.

2. 1. 기본 형태

정원급의 기본 형태는 수면 아래에 날카로운 충각을 가지고, 건현이 높은 선체를 가진 점은 동시기의 독일 해군 장갑함과 같지만, 정원급의 선체 형상은 중앙부만 높은 긴 선수루형 선체를 채용하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설계 단계에서는 순항 시 돛을 이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함의 전후에 굵은 돛용 마스트를 1개씩 가지고 있었지만, 건조 중에 기관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에 돛 장비는 전부 폐지하고 대신 전후에 밀리터리 마스트를 장비했다. 밀리터리 마스트는 마스트의 상부 또는 중간에 경방어의 전망대를 설치하고, 거기에 37mm~47mm 클래스의 기관포(속사포) 수 기를 배치한 마스트를 말한다. 프랑스 해군에서 개발된 어뢰정에 의한 기습 공격을 요격하기 위해, 멀리까지 감시할 수 있고 차폐물이 적은 고소에 대어뢰 격퇴용 속사포 또는 기관포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 형상의 차이는 있지만 이 시대 열강 각국의 대형함에는 필수적인 장비였다.

정원급은 함체 중앙부에 냄비를 엎어놓은 듯한 형상의 연장식 주포를 전후로 서로 어긋나게 2기를 병렬 배치했다. 주포탑의 후부에 2개 연돌을 세웠다. 이로 인해 정원급의 주포탑은 상부 구조물에 사계가 제한되지 않고 함수 방향으로 주포 4문을 모두 지향할 수 있었다. 이것은 리사 해전의 "장갑함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충각 전술이 유효하다"는 전훈에 의해 편현 화력보다 함수 방향으로의 화력 집중이 우선되었기 때문이다.

|thumb|right|200px|동시기의 일본 해군의 현측 포곽함 "후소". 근대화 개장을 했지만 주포 배치는 여전히 포곽(케이스메이트) 배치였다.]]

정원급의 주포 문수는 일본 해군의 현측 포곽함 "후소"와 같은 4문이지만, "후소"는 선수미 방향으로는 주포를 지향할 수 없지만, 정원급은 주포 4문을 지향할 수 있는 등 사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어 유리했다.

선체 중앙부에 주노출 포탑 2기와 2개의 연돌을 집중 배치한 것으로 인해, 주포 제사 시의 폭풍을 피하기 위해 함교를 갑판 위에 배치할 수 없게 되었다. 정원급은 노출 포탑 위에 "'''공중 갑판(플라잉 데크)'''"을 설치함으로써 해결했다. 공중 갑판은 장갑함 시대부터 전함 시대까지 널리 사용된 상부 구조물의 양식으로, 좁은 갑판을 유효하게 사용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다. 공중 갑판의 후부에 상자형 조타 함교가 배치되었고, 전후 갑판으로의 교통을 돕기 위해 설치된 총 4곳의 계단으로 지지되었다. 2번 연돌에서 후부 마스트 사이의 갑판 위에 함재 어뢰정과 함재정이 늘어서 있었고, 전후의 마스트 기부에 1개씩 붙은 지브 크레인에 의해 운용되었다.

2. 2. 밀리터리 마스트

정원급은 돛 장비를 폐지하고 밀리터리 마스트를 장착하여 대어뢰 방어 능력을 강화했다. 밀리터리 마스트는 마스트 상부 또는 중간에 경방어 전망대를 설치하고, 37mm~47mm급 기관포(속사포)를 배치한 것이다. 정원급의 밀리터리 마스트에는 오치키스사의 "47mm(43구경) 단장기포" 2기와 "37mm(23구경) 5연장 개틀링포" 8기가 장착되었다. 전방 마스트에는 2단의 전망대가, 후방 마스트에는 상부에만 1단의 전망대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밀리터리 마스트는 프랑스 해군에서 개발된 어뢰정의 기습 공격을 요격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멀리까지 감시하고 차폐물이 적은 높은 곳에 대어뢰 격퇴용 속사포 또는 기관포를 배치한 것이다. 당시 열강 각국의 대형함에는 필수 장비였다. 두 개의 무거운 군용 마스트가 주포 바로 앞과 뒤에 설치되었고, 포탑을 덮고 앞 마스트에서 굴뚝까지 허리케인 데크(hurricane deck)가 이어졌다.

2. 3. 주포 배치

정원급의 주포는 함체 중앙부에 냄비를 엎어놓은 듯한 형상의 연장식 포탑 2기를 전후로 서로 어긋나게 배치했다. 이 배치는 리사 해전의 전훈에 따라 함수 방향으로 주포 4문을 모두 지향할 수 있도록 하여, 충각 전술에 유리하도록 설계되었다. 탄약고와 기관실을 인접시켜 방어 구획을 좁히고 방어 장갑을 두껍게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주포 배치는 전방 및 후방에는 모든 주포를 향할 수 있지만, 양현 방향에는 좌우 주포탑이 간섭하여 2문 밖에 향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해군의 후소와 비교했을 때, 정원급은 주포 4문을 선수 방향으로 지향할 수 있어 사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주포탑 위에 "공중 갑판(플라잉 데크)"을 설치하여 좁은 갑판을 유효하게 사용하고, 함교를 갑판 위에 배치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였다. 공중 갑판의 후부에는 상자형 조타 함교가 배치되었고, 전후 갑판으로의 교통을 돕기 위해 총 4곳의 계단이 설치되었다.

정원급은 2개의 포탑에 4문의 30.5cm 주포를 장착했다. 주포는 우현 포탑이 좌현 포탑보다 앞에 배치되어, 트림 문제를 야기하여 함선의 전방이 젖게 되었다. 정확한 주포 모델에 대해서는 혼란이 있었으나,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30.5 cm MRK L/25로 추정된다.

2. 4. 공중 갑판

정원급은 주포 사격 시 폭풍을 피하고 함상에서의 이동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공중 갑판(플라잉 데크)을 설치했다. 공중 갑판은 장갑함 시대부터 전함 시대까지 널리 사용된 상부 구조물의 양식으로, 좁은 갑판을 유효하게 사용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선체 중앙부에 주노출 포탑 2기와 2개의 연돌을 집중 배치한 결과, 주포 사격 시 발생하는 폭풍을 피하기 위해 함교를 갑판 위에 배치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선상에서 전후로 이동할 때 함내를 거쳐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원급은 노출 포탑 위에 공중 갑판을 설치했다.

공중 갑판 후부에는 상자형 조타 함교가 배치되었고, 전후 갑판으로의 이동을 돕기 위해 총 4곳의 계단으로 지지되었다. 공중 갑판의 형상은 단순한 십자형이 아니라, 좌우의 선교 (브리지) 부분은 주포 폭풍을 피하기 위해 주포탑 배치에 맞춰 전후로 서로 어긋나게 배치되었다. 2번 연돌에서 후부 마스트 사이의 갑판 위에는 함재 어뢰정과 함재정이 배치되었고, 전후의 마스트 기부에 1개씩 설치된 지브 크레인으로 운용되었다.

선루 측면에는 선체 높이 절반의 현측 갑판이 함수 측면에서 시작되었고, 함수 측면에 우현 갑판에 주묘 1개, 좌현 측에 부묘 2개가 현측 갑판 위에 직접 놓여져 전용 크레인으로 운용되었다(앵커 베드 방식). 선체 전부에서 후부로 이동할 때는 주포 바벳을 우회하기 위해 바벳 곡선에 맞춰 난간이 달린 통로를 설치했다.

2. 5. 무장

크루프사가 제조한 30.5cm 후장식 강선포를 주포로 채용했으며,15cm 단장포를 부포로 장착했다.[2] 주포는 25구경장 30.5cm포 였으며, 32톤의 무게가 나갔다. 함선의 주포는 30.5 cm MRK L/25이다. 부포는 2문의 15 cm MRK L/35 포로 구성되었으며, 함수에 1문, 선미에 1문이 장착되었다.

|thumb|1883년에 출판된 딩위안(Ting-Yuen)의 설계 도면]]

|left|thumb|200px|독에 있는 딩위안의 사진. 함수에는 청나라의 상징인 용 문장이 장식되어 있다.

수선 아래의 날카로운 衝角에 주목. 주포 커버는 정비를 위해 제거되었으며, 주포신에는 천이 덮여 있다. 이때 부포는 함수와 함미의 2기뿐이었으며 모두 후드가 달린 노포탑이었다.]]

2. 5. 1. 주포

크루프사가 딩위안급을 위해 제조한 "크루프 30.5cm(25구경) 후장식"[2]강선포"를 채용했다. 이 포는 당시 영국 전함이 전장식 포[3]를 장비하고 있던 것에 비해 취급성이 좋았고, 발사 속도는 3분당 1발로 최대 사거리는 약 7,800m였다. 포신의 1문당 무게는 31.5톤, 포신 길이는 약 6.7m로, 이것을 연장식 포가에 장착했으며, 포신은 좌우 개별적으로 상하가 가능했다. 이 포를 장갑 후드 부착 노포탑에 수납했다.

일본에서 딩위안급의 주포에는 본격적인 장갑이 施されてると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방어력은 없다고 봐도 무방한(스플린터, 파편 방어만 고려한) 후드를 씌운 것에 불과했다. 실제로 운용한 결과, 후드 내부에 갇히는 발사 연기로 인해 포원의 포탄 장전 및 조준에 지장을 초래했기 때문에, 황해 해전 때에는 후드를 제거하고 전투에 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어력이 없는 후드에 유탄이 접촉할 가능성을 고려하여 피탄율을 줄이기 위해 투영 면적을 줄이는 의미도 있었다. 이 장갑 두께에 대한 오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잡상 노트』등에서도 나타나며, 정보의 혼란이 보인다. 포탑의 동력은 증기 펌프에 의해 구동되는 수압식으로, 포탑의 선회와 포신의 앙각(상하)을 조작했다.

2. 5. 2. 부포

부포로는 '크루프 15cm(35구경) 단장포'를 채용했다. 이 포는 정원급 철갑함 외에도 북양수사의 방호순양함 '제원', 치원형 방호순양함 '치원', '정원', 장갑포함 '평원'에도 탑재된 우수한 포였다. 그 성능은 최대 앙각에서 사정거리 11,000m, 발사 속도는 분당 1발이었다.

특기할 만한 점은 부포도 주포와 같은 노포탑 형식을 채택한 것이다. 이를 선루 상부에 1기, 함미 쪽에 1기, 총 2기를 배치하여, 최상 갑판에 장애물이 적은 본급에서는 적은 부포 문수로, 당시 주류였던 현측 케이스메이트 배치 방식보다 넓은 사계를 얻었다. 또한, 부포의 위치를 고소에 배치한 덕분에 파랑의 영향을 받기 어려워, 외양 항해 시의 전투 능력상 유리했다.

덧붙여, 일본 해군에 노획되었을 때 부포 이하의 무장이 갱신되었다. 일본 해군은 무장·탄약을 영국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에 대부분이 영국식으로 변경되었다. 이 때문에 부포는 더욱 장포신의 '암스트롱 15.2cm(40구경) 속사포'로 교체되었다. 이때 현측과 함미 방향의 화력을 늘리기 위해 선체 후부에 주포 바벳과 유사한 반원형 돌출부를 설치하고, 거기에 새로 편현 1기씩 추가하여 부포 문수는 총 4기가 되었다. 부포 배치는 적탄을 받기 쉬운 선수만 준공 당시와 마찬가지로 방호용 후드를 얹은 노포탑이었지만, 그 외 좌우와 함미는 방패가 달린 단장 포가로 탑재되었다.

2. 5. 3. 수뢰병장

함재 어뢰정 2척을 후부 갑판에 탑재했다. 배수량 28톤에 석탄 전소 보일러 1기로 왕복 기관 1기 1축 추진으로 650마력, 13.2노트를 발휘하며 45cm 어뢰 발사관을 장비했다. 운용에는 16명이 필요했다. 「딩위안」의 어뢰정은 「딩 1호(定1号)」「딩 2호(定2号)」, 「전위안」의 어뢰정은 「전 1호(鎮1号)」「전 2호(鎮2号)」로 불렸다.

2. 6. 기관

정원급은 수평형 2단 팽창식 3기통 트렁크 엔진 한 쌍을 갖추고, 각 엔진은 단일 스크류 프로펠러를 구동했다. 증기는 8개의 석탄 전소 원통 보일러에서 나왔으며, 이 보일러는 선체 중앙부에 위치한 두 개의 굴뚝으로 연결되었다. 보일러는 4개의 보일러실로 나뉘어 선수미선 방향에 직각으로 좌우 현측에 각각 4기씩 배치되었다. 여기에 수평형 2단 팽창식 3기통 왕복 기관을 좌우 각각 1기씩 총 2기를 조합한 2축 추진 방식이었다. 엔진은 6,000ihp의 출력을 냈으며, 최대 속도는 14.5kn였지만, 두 함선 모두 시험에서 이 수치를 초과했다. 2번함 전원은 7,200ihp의 출력과 15.4kn의 속도를 기록했다. 일반적으로 700톤의 석탄을 탑재했고, 최대 1,000톤까지 탑재할 수 있었다. 이는 10kn의 속도로 항해 시 4,500해리(nmi)의 항속 거리를 가능하게 했다.

3. 함선 목록

wikitable

건조 정보
함명건조자기공진수취역최후
정원AG 불칸 슈테틴1881년 5월 31일1881년 12월 28일1883년 5월 2일1895년 2월 10일 자침
진원1882년 3월1882년 11월 28일1884년 3월1912년 4월 6일에 해체


4. 함력

일본:1898년 3월 21일~ 1911년 4월 1일1912년 4월 6일에 해체



각각 1883년과 1884년 초에 완공된 ''정원''과 ''진원''은 독일 승무원에 의해 중국으로 항해될 예정이었지만, 1884년 청불 전쟁 발발로 인한 프랑스의 지연으로 인해 배는 독일에 묶여 있었다. 독일 승무원은 ''정원''을 해상 사격 시험에 투입했는데, 이로 인해 배 주변의 유리가 깨지고 굴뚝이 손상되었다. 1885년 4월 전쟁이 끝난 후 두 2급 철갑선은 ''제원''과 함께 중국으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세 척의 배는 10월에 중국에 도착했고, 북양 함대에 정식으로 배치되었다. ''정원''은 새로운 함대의 기함이었고, 청일 전쟁 당시에는 준장 유보첨의 지휘를 받았으며, 정여창 제독도 탑승하고 있었다. ''진원''은 대위 임태증의 지휘를 받았다.

정원급이 청나라 해군에서 취역했을 때는 '''동양 제일의 굳건한 군함'''이라고 불렸으며, 이듬해 2척 모두 일본을 방문했는데, 나가사키에서 만취한 수병에 의한 소동(진원 소동)이 발생했다.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원''급 두 척은 9월 17일 압록강 해전에서 처음으로 전투에 참전했다.[1] 두 배는 중국 전투 대형의 중앙을 형성했으며, 서로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본으로부터 6000m 떨어진 ''정원''의 포탄은 중국 함대의 첫 번째 공격이었으며, 자체 플라잉 브리지를 파괴하고 제독과 그의 참모를 부상시켰다. 신호 마스트도 손상되어 중국 함대는 전투 내내 미리 할당된 쌍으로만 작전을 수행했다.[1] 전투 과정에서 일본 함대의 주요 부분은 두 철갑선에 집중 포격을 가했지만, 어둠이 다가오면서 일본이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척의 배는 물에 떠 있었다. 각 배는 수백 발의 포탄을 맞았지만,[1] 주요 장갑대는 관통되지 않았다.[1] 황해 해전에서 다수의 명중탄을 받았지만, 피해의 대부분은 중소 구경탄에 의한 화재로, 높은 방어력을 가진 정원급은 전투력과 항행 능력이 모두 건재한 채 철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공업 능력이 낮은 청나라에서는 손상된 정원급의 복귀는 어려웠다.

일본 해군에서 ''친엔''으로 운용된 ''진원''


''진원''은 11월 7일 표시되지 않은 암초에 부딪혀 손상되어 다음 해 1월까지 현역에서 물러났다.[1] ''진원''이 조작 미숙으로 좌초되어 수선 아래에 균열이 10m 정도 생겼으며, 응급 처치로 침몰은 면했지만 본격적인 수리를 하려고 해도 여순의 도크는 이미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고, 북양 함대의 전력은 대폭 감소했으며, 이 책임을 지기 위해 임태증은 자결했다.

두 배는 1895년 초 웨이하이웨이 해전에서 항구에 갇혔고, ''진원''은 부분적으로만 항해가 가능했다. 그들은 일본군이 항구의 요새를 점령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야간에는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1] ''정원''은 어뢰에 맞아 침몰하기 시작했다. ''정원''은 1895년2월 5일에 일본 해군의 9호 어뢰정의 뇌격에 의해 좌현 수선 아래에 큰 파공이 생겨 항행 불능이 되었다. 함장 유보첨은 부하 전 승무원을 탈출시킨 후 탄약고에 불을 지르고 자침하도록 지시한 후 자결했다. 재빨리 해안에 좌초되었고, 진흙 속에 가라앉아 방어 요새로 계속 사용되었다. 정여창 제독의 기함은 이후 ''진원''으로 옮겨졌다.[1] 정여창의 자살, 항구와 함대의 항복 이후, 항복이 이루어졌다.[1] ''정원''은 그 당시 폭파되었지만, 폭발의 정확한 성격은 불분명하다.[1] 주포가 날아가 폭염과 함께 "정원"은 대파되어 바닥에 닿았다 (위해위 전투). 이를 받아 "진원"이 북양 수사 기함이 되었고, 제독 정여창, 함장이 2월 12일에 자결한 후 2월 17일 위해위에서 노획되었다.

청일 전쟁에서 노획한 진원은 일본 해군에 편입되어 '친엔'으로 개명되었다. 친엔은 전노급 전함 "후지형"이 취역할 때까지 일본 해군 유일의 전함으로 활약했으며, 1904년 러일 전쟁에서는 옛 적이었던 방호순양함 "마쓰시마형"과 함께 황해 해전, 여순 공략전, 일본해 해전에 참가하여 일본 해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1905년12월 11일1등 해방함으로 분류가 변경되었지만, 노후화로 인해 1908년5월 1일에는 운용 연습함으로 분류되었고, 1911년4월 1일에 제적되었다.

4. 1. 청나라 해군

일본:1898년 3월 21일~ 1911년 4월 1일1912년 4월 6일에 해체



각각 1883년과 1884년 초에 완공된 ''정원''과 ''진원''은 독일 승무원에 의해 중국으로 항해될 예정이었지만, 1884년 청불 전쟁 발발로 인한 프랑스의 지연으로 인해 배는 독일에 묶여 있었다. 독일 승무원은 ''정원''을 해상 사격 시험에 투입했는데, 이로 인해 배 주변의 유리가 깨지고 굴뚝이 손상되었다. 1885년 4월 전쟁이 끝난 후 두 2급 철갑선은 ''제원''과 함께 중국으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세 척의 배는 10월에 중국에 도착했고, 북양 함대에 정식으로 배치되었다. ''정원''은 새로운 함대의 기함이었고, 청일 전쟁 당시에는 준장 유보첨의 지휘를 받았으며, 정여창 제독도 탑승하고 있었다. ''진원''은 대위 임태증의 지휘를 받았다.

정원급이 청나라 해군에서 취역했을 때는 '''동양 제일의 굳건한 군함'''이라고 불렸으며, 이듬해 2척 모두 일본을 방문했는데, 나가사키에서 만취한 수병에 의한 소동(진원 소동)이 발생했다.

== 청일전쟁 ==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원''급 두 척은 9월 17일 압록강 해전에서 처음으로 전투에 참전했다.[1] 두 배는 중국 전투 대형의 중앙을 형성했으며, 서로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본으로부터 6000m 떨어진 ''정원''의 포탄은 중국 함대의 첫 번째 공격이었으며, 자체 플라잉 브리지를 파괴하고 제독과 그의 참모를 부상시켰다. 신호 마스트도 손상되어 중국 함대는 전투 내내 미리 할당된 쌍으로만 작전을 수행했다.[1] 전투 과정에서 일본 함대의 주요 부분은 두 철갑선에 집중 포격을 가했지만, 어둠이 다가오면서 일본이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척의 배는 물에 떠 있었다. 각 배는 수백 발의 포탄을 맞았지만,[1] 주요 장갑대는 관통되지 않았다.[1] 황해 해전에서 다수의 명중탄을 받았지만, 피해의 대부분은 중소 구경탄에 의한 화재로, 높은 방어력을 가진 정원급은 전투력과 항행 능력이 모두 건재한 채 철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공업 능력이 낮은 청나라에서는 손상된 정원급의 복귀는 어려웠다.

''진원''은 11월 7일 표시되지 않은 암초에 부딪혀 손상되어 다음 해 1월까지 현역에서 물러났다.[1] ''진원''이 조작 미숙으로 좌초되어 수선 아래에 균열이 10m 정도 생겼으며, 응급 처치로 침몰은 면했지만 본격적인 수리를 하려고 해도 여순의 도크는 이미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고, 북양 함대의 전력은 대폭 감소했으며, 이 책임을 지기 위해 임태증은 자결했다.

두 배는 1895년 초 웨이하이웨이 해전에서 항구에 갇혔고, ''진원''은 부분적으로만 항해가 가능했다. 그들은 일본군이 항구의 요새를 점령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야간에는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1] ''정원''은 어뢰에 맞아 침몰하기 시작했다. ''정원''은 1895년2월 5일에 일본 해군의 9호 어뢰정의 뇌격에 의해 좌현 수선 아래에 큰 파공이 생겨 항행 불능이 되었다. 함장 유보첨은 부하 전 승무원을 탈출시킨 후 탄약고에 불을 지르고 자침하도록 지시한 후 자결했다. 재빨리 해안에 좌초되었고, 진흙 속에 가라앉아 방어 요새로 계속 사용되었다. 정여창 제독의 기함은 이후 ''진원''으로 옮겨졌다.[1] 정여창의 자살, 항구와 함대의 항복 이후, 항복이 이루어졌다.[1] ''정원''은 그 당시 폭파되었지만, 폭발의 정확한 성격은 불분명하다.[1] 주포가 날아가 폭염과 함께 "정원"은 대파되어 바닥에 닿았다 (위해위 전투). 이를 받아 "진원"이 북양 수사 기함이 되었고, 제독 정여창, 함장이 2월 12일에 자결한 후 2월 17일 위해위에서 노획되었다.

4. 1. 1. 나가사키 사건

1886년 8월, 정원과 진원을 포함한 북양함대 소속 군함들이 수리를 위해 나가사키에 입항했다. 8월 13일, 일부 청나라 수병들이 상륙 허가를 받아 시내로 나갔다. 이들은 기생집에서 난동을 부리고, 지역 주민들과 충돌하여 여러 명의 사상자를 냈다.

8월 15일, 약 500명의 청나라 수병들이 다시 상륙하여 시내를 돌아다니며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일본 경찰과 충돌했고,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 청나라 수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난동을 부렸고, 일본 민간인들도 다수가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나가사키 사건으로 불리며, 청나라일본 제국 사이의 외교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당시 일본 제국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와 군사력 증강에 힘쓰고 있었고, 청나라는 양무운동을 통해 서구 열강에 대항하려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 사건을 일본 제국의 침략 야욕과 제국주의적 폭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일본 정부에 대해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책임 있는 사과,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합당한 배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는 일본 제국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에 저지른 만행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며, 역사 정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촉구하고 있다.

4. 1. 2. 청일전쟁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원''급 두 척은 9월 17일 압록강 해전에서 처음으로 전투에 참전했다.[1] 두 배는 중국 전투 대형의 중앙을 형성했으며, 서로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본으로부터 6000m 떨어진 ''정원''의 포탄은 중국 함대의 첫 번째 공격이었으며, 자체 플라잉 브리지를 파괴하고 제독과 그의 참모를 부상시켰다. 신호 마스트도 손상되어 중국 함대는 전투 내내 미리 할당된 쌍으로만 작전을 수행했다.[1] 전투 과정에서 일본 함대의 주요 부분은 두 철갑선에 집중 포격을 가했지만, 어둠이 다가오면서 일본이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척의 배는 물에 떠 있었다. 각 배는 수백 발의 포탄을 맞았지만,[1] 주요 장갑대는 관통되지 않았다.[1] 황해 해전에서 다수의 명중탄을 받았지만, 피해의 대부분은 중소 구경탄에 의한 화재로, 높은 방어력을 가진 정원급은 전투력과 항행 능력이 모두 건재한 채 철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공업 능력이 낮은 청나라에서는 손상된 정원급의 복귀는 어려웠다.

''진원''은 11월 7일 표시되지 않은 암초에 부딪혀 손상되어 다음 해 1월까지 현역에서 물러났다.[1] ''진원''이 조작 미숙으로 좌초되어 수선 아래에 균열이 10m 정도 생겼으며, 응급 처치로 침몰은 면했지만 본격적인 수리를 하려고 해도 여순의 도크는 이미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고, 북양 함대의 전력은 대폭 감소했으며, 이 책임을 지기 위해 임태증은 자결했다.

두 배는 1895년 초 웨이하이웨이 해전에서 항구에 갇혔고, ''진원''은 부분적으로만 항해가 가능했다. 그들은 일본군이 항구의 요새를 점령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야간에는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1] ''정원''은 어뢰에 맞아 침몰하기 시작했다. ''정원''은 1895년2월 5일에 일본 해군의 9호 어뢰정의 뇌격에 의해 좌현 수선 아래에 큰 파공이 생겨 항행 불능이 되었다. 함장 유보첨은 부하 전 승무원을 탈출시킨 후 탄약고에 불을 지르고 자침하도록 지시한 후 자결했다. 재빨리 해안에 좌초되었고, 진흙 속에 가라앉아 방어 요새로 계속 사용되었다. 정여창 제독의 기함은 이후 ''진원''으로 옮겨졌다.[1] 정여창의 자살, 항구와 함대의 항복 이후, 항복이 이루어졌다.[1] ''정원''은 그 당시 폭파되었지만, 폭발의 정확한 성격은 불분명하다.[1] 주포가 날아가 폭염과 함께 "정원"은 대파되어 바닥에 닿았다 (위해위 전투). 이를 받아 "진원"이 북양 수사 기함이 되었고, 제독 정여창, 함장이 2월 12일에 자결한 후 2월 17일 위해위에서 노획되었다.

4. 2. 일본 제국 해군

청일 전쟁에서 노획한 진원은 일본 해군에 편입되어 '친엔'으로 개명되었다. 친엔은 전노급 전함 "후지형"이 취역할 때까지 일본 해군 유일의 전함으로 활약했으며, 1904년 러일 전쟁에서는 옛 적이었던 방호순양함 "마쓰시마형"과 함께 황해 해전, 여순 공략전, 일본해 해전에 참가하여 일본 해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1905년12월 11일1등 해방함으로 분류가 변경되었지만, 노후화로 인해 1908년5월 1일에는 운용 연습함으로 분류되었고, 1911년4월 1일에 제적되었다.

4. 2. 1. 러일전쟁

청일 전쟁에서 황해 해전, 뤼순항 포위전, 일본해 해전에 참가하여 일본 해군의 승리에 기여했다.[1] 1905년 12월 11일1등 해방함으로 분류가 변경되었지만, 노후화로 인해 1908년 5월 1일에는 운용 연습함으로 분류되었고, 1911년 4월 1일에 제적되었다.

5. 역사적 유산

진원은 제적 후 11월에 장갑순양함 구라마의 포격 훈련 시 표적함으로 사용되었고, 1912년 4월 6일요코하마의 해체업자에게 매각되어 해체 처분되었다.[4] 닻이나 닻줄, 포탄 등의 일부 부품은 일본 국내에서 보관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7년에 중화민국의 요구에 따라 상하이로 보내졌고, 더 나아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손에 넘어가 베이징의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서 전시되게 되었다.[4]

1895년 2월 10일 자침한 정원의 함체 일부는 이듬해 인양되었다.[4] 일본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에는 인양된 정원의 함재를 사용한 '정원관'이라는 기념관이 있다.[4] 문의 문짝은 정원의 철판을 사용하고 있으며, 관의 현관에는 함내의 손잡이로 보이는 것, 정면의 들보에 장식을 한 부재(나무), 왼편의 툇마루 아래에는 보트의 노를 볼 수 있다.[4] 원래, 다자이후 텐만구의 신관 중 한 명인 오노(미키) 류스케의 저택이었으나, 그곳에 사재를 털어 세워졌다.[4] 다자이후 텐만 참도를 따라 올라가 오른편 안내소 옆에 정원관이 있는데, 앞마당은 주차장으로 되어 있다.[4]

2004년 9월에 중국의 웨이하이 항에서 "정원"의 복원함이 진수되어[5], 전시되고 있다.[6]

5. 1. 진원

진원은 제적 후 11월에 장갑순양함 구라마의 포격 훈련 시 표적함으로 사용되었고, 1912년 4월 6일요코하마의 해체업자에게 매각되어 해체 처분되었다.[4] 닻이나 닻줄, 포탄 등의 일부 부품은 일본 국내에서 보관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7년에 중화민국의 요구에 따라 상하이로 보내졌고, 더 나아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손에 넘어가 베이징의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서 전시되게 되었다.[4]

이름제조건조시간복역일최후
진원불칸 슈테틴1882년 3월 1일 ~1882년 11월 28일청나라:1885년 3월 1일 ~1895년 2월 17일
일본:1898년 3월 21일~ 1911년 4월 1일
1912년 4월 6일에 해체



2004년 9월에 중국의 웨이하이 항에서 "정원"의 복원함이 진수되어[5], 전시되고 있다.[6]

5. 2. 정원

1895년 2월 10일 자침한 정원의 함체 일부는 이듬해 인양되었다.[4] 일본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에는 인양된 정원의 함재를 사용한 '정원관'이라는 기념관이 있다.[4] 문의 문짝은 정원의 철판을 사용하고 있으며, 관의 현관에는 함내의 손잡이로 보이는 것, 정면의 들보에 장식을 한 부재(나무), 왼편의 툇마루 아래에는 보트의 노를 볼 수 있다.[4] 원래, 다자이후 텐만구의 신관 중 한 명인 오노(미키) 류스케의 저택이었으나, 그곳에 사재를 털어 세워졌다.[4] 다자이후 텐만 참도를 따라 올라가 오른편 안내소 옆에 정원관이 있는데, 앞마당은 주차장으로 되어 있다.[4]

2004년 9월에 중국의 웨이하이 항에서 "정원"의 복원함이 진수되어[5], 전시되고 있다[6]

6. 같이 보기

참조

[1] 뉴스 China confirms wreck site of battleship from First Sino-Japanese War https://web.archive.[...] 2019-09-02
[2] 문서 発射薬と砲弾を砲尾を開いて装てんする方式
[3] 문서 発射薬と砲弾を大砲の発射口から装てんする方式
[4] 간행물 尋找北洋海軍遺踪 中國國家地理 2010-10
[5] 뉴스 日清戦争で沈没 清朝の主力艦「定遠」を再現 山東 http://j.people.com.[...] 인민망 2004-09-17
[6] 뉴스 山东威海将复制北洋水师“定远”号铁甲舰 http://mil.news.sina[...] 신랑 200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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