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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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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갈량의 남정은 225년 촉한 승상 제갈량이 남부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벌인 원정이다. 유비 사후 익주 지역에서 옹개, 고정, 주포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제갈량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그는 마속의 조언에 따라 심리전을 활용하여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고 풀어주는 칠종칠금(七縱七擒) 전략을 구사, 남만 지역을 평정했다. 제갈량은 행정 구역을 개편하고 현지 지도자를 등용하여 자치를 허용하는 등 안정적인 통치를 시도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촉한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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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남정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이름제갈량의 남정
일부삼국 시대의 전쟁
다른 이름남중 평정전 (南中平定戰), 남중 평정 (南中平定)
시기225년 봄 – 가을
장소남중 (현재의 윈난성, 구이저우성, 쓰촨성 남부)
결과촉한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촉한
교전 2남중 반군, 남만
지휘관 및 지도자
촉한제갈량
남만 반군옹개
규모
촉한약 100,000명 (출처 필요)
남만약 250,000명 (출처 필요)
피해 규모
촉한불명
남만불명
이미지
화희루 목조 제갈량 정남만
제갈량의 남만 정벌을 묘사한 화희루의 나무 조각

2. 역사적 배경

남중 지역은 한나라 때부터 익주자사부의 관할이었으나, 촉한 건국 이전부터 반란의 조짐이 있었다.

2. 1. 한나라 시기

218년, 월수군의 고정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건위 태수 이엄의 공격을 받아 진압되었다.[24]

2. 2. 촉한 건국 이후

223년, 유비가 이릉 전투에서 패배하고 백제성에서 사망한 후, 촉한은 큰 혼란에 빠졌다. 유비의 죽음을 틈타 남중 지역에서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건안 말기, 익주군의 호족 옹개손권 측 교지태수 사섭의 유도를 받아 익주태수 정앙(正昻)을 살해하고, 후임 장예는 사로잡아 손권에게 압송했다.[25][26][27] 손권은 옹개를 영창태수로 임명했으며,[28] 이미 죽은 옛 익주목 유장의 아들 유천(劉闡)을 익주자사로 삼아 교주와 익주의 경계에 두었다.[29][30]

장무 3년(223년), 유비가 죽자 월수태수 초황(焦璜)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모반했다.[30] 제갈량은 남쪽으로 병사를 더 보낼 수 없어 공록(龔祿)을 월수태수로 파견하여 안상현에서 통치하게 했고, 익주종사 상기(常頎)를 부남으로 들여보냈다.[30]

옹개는 이엄이 화해를 위해 보낸 편지에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다고 들었는데,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정월이 셋이니, 먼 곳에 있는 사람으로써는 두렵고 당혹하여 어디로 돌아갈지 알지 못합니다."[28][30]라는 거만한 답장을 보냈다. 이는 사실상 촉한에 대한 반기를 든 것이었다.

옹개는 익주군 사람 맹획을 시켜 이민족들을 회유하게 했다. 맹획은 촉한이 이민족들에게 터무니없는 공물을 요구한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에 많은 이민족들이 옹개를 따르게 되었다.[30]

영창군의 오관연공조 여개와 군승 왕항은 옹개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군의 경계를 닫아걸고 저항했다. 영창군의 백성들은 여개를 신임하여 옹개는 영창군을 핍박했으나 태수로 부임할 수 없었다.[28]

한편, 상기장가군에 이르러 주부를 조사하려 하자, 장가군승으로 장가태수를 대리하는 주포가 이 틈을 타 상기를 죽이고 모반했다.[30] 건흥 3년(225년), 장가태수 주포가 모반했다.[31] 주포의 모반에 대해서 《위씨춘추》에서는 익주종사 상방(常房)이 소속 부를 순행하다 주포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주포의 주부를 심문하여 죽이자, 주포가 분노하여 상방을 죽이고 상방이 모반했다고 무고하였으며, 제갈량은 상방의 일족들을 처벌하여 주포를 회유하려 했으나 주포가 잘못을 뉘우키기는커녕 도리어 모반하여 옹개에 붙었다고 서술했으나,[32] 배송지는 주포가 무고한 것인데 무죄한 자(상방의 일족들)를 죽여 간특한 자(주포)를 기쁘게 했을 리 없다고 이 기록을 비난했다.[33]

이처럼 남중 지역은 옹개, 고정, 주포 등의 반란으로 인해 촉한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오나라손권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옹개를 영창태수로 임명하고, 유찬을 익주자사로 삼아 교주와 익주의 경계에 두는 등 남방 지배를 강화하려 했다.

3. 반란의 전개

남중 4군은 한나라 익주자사부 관할 아래에 있던 월수, 장가, 익주, 영창(永昌) 4군을 가리킨다. 이 지역에서 촉한과 그 전신인 유비 정권에 반기를 든 사례는 건안 23년(218년)부터 나타났다. 월수군의 비한족계 민족 수장 고정광한군 최남단 신도현을 포위했으나, 건위태수 이엄에게 격파당했다.[24]

3. 1. 옹개, 고정, 주포의 반란

건안 말기, 익주군의 호족 옹개손권 측의 교지태수 사섭의 유도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25][26][27] 옹개는 익주태수 정앙(正昻)을 살해하고, 후임 태수인 장예를 사로잡아 손권에게 압송했다.[25][26][27] 손권은 옹개를 영창태수로 임명하고,[28] 옛 익주목 유장의 아들 유천(劉闡)을 익주자사로 삼아 교주와 익주의 경계에 두었다.[29][30]

장무 3년(223년), 유비가 죽자 고정은 월수태수 초황(焦璜)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30] 제갈량은 공록을 월수태수로 파견하여 안상현에서 통치하게 했고, 익주종사 상기를 부남으로 들여보냈다.[30] 유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옹개는 이엄이 보낸 회유 편지에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는데,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정월이 셋이니, 먼 곳에 있는 사람으로써는 두렵고 당혹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라는 답장을 보냈다.[28][30] 옹개는 맹획을 시켜 이민족들을 회유하게 했고, 맹획은 촉한이 이민족들에게 터무니없는 공물을 요구한다는 말을 퍼뜨려 이민족들이 옹개를 따르게 만들었다.[30]

영창태수가 된 옹개를 영창군의 오관연공조 여개와 군승 왕항이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자, 옹개는 격문을 보내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28] 영창군 백성들은 여개를 신임하여 옹개는 영창군을 핍박했으나 태수로 부임할 수 없었다.[28]

한편, 상기가 장가군에 이르러 주부를 조사하려 하자, 장가군승으로 장가태수를 대리하는 주포가 상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30] 《위씨춘추》에서는 익주종사 상방(常房)이 주포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주부를 심문하여 죽이자, 주포가 상방을 죽이고 모반했다고 무고하였으며, 제갈량은 상방의 일족들을 처벌하여 주포를 회유하려 했으나 주포가 옹개에게 붙었다고 서술했다.[32] 그러나 배송지는 주포가 무고한 것인데 무죄한 자(상방의 일족들)를 죽여 간특한 자(주포)를 기쁘게 했을 리 없다고 이 기록을 비판했다.[33]

3. 2. 맹획의 등장

옹개남만 부족의 지지를 얻으려고 맹획을 끌어들였다. 맹획은 남만 부족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옹개는 맹획에게 촉한 정부가 남만에게 터무니없는 공물을 요구한다고 거짓말을 퍼뜨렸고, 이에 남만 부족들은 옹개를 따르게 되었다.[30]

4. 제갈량의 남정

223년 유비가 사망한 직후, 제갈량은 민심을 안정시키고 군량을 확보하는 데 힘썼다. 등지를 파견하여 손권과 우호를 맺었고, 옹개가 사로잡아 보낸 옛 익주태수 장예를 석방시켜 촉한으로 돌려보내는 교섭에도 성공했다.[34]

225년 3월, 제갈량은 남쪽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출진했다.[31][30] 월수군에 진입한 후, 마충에게는 장가군을, 이회에게는 익주군을 공격하게 했다.[28][30] 고정은 많은 보루를 쌓고 지키려 했으나, 제갈량은 고정의 무리를 토벌했다.[30] 이회는 익주군에서 적에게 포위당했지만, 거짓으로 모반을 일으키는 척하여 포위를 풀고 크게 승리했다.[28] 마충은 장가를 토벌했고, 남쪽 반란군 사이에서는 동요가 일어나 고정의 부하가 옹개를 살해했다.[31][30] 제갈량은 주포를 베었다.[30]

옹개를 대신하여 맹획이 왕이 되었다.[30] 제갈량은 노수(瀘水)를 건너 맹획을 생포했다.[30] 맹획은 처음에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제갈량은 맹획을 일곱 번 풀어주고 일곱 번 사로잡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을 통해 맹획의 완전한 항복을 받아냈다.[30][35]

제갈량의 남정 과정에서 만터우가 발명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원정 후 돌아오는 길에 제갈량과 촉 군대는 급류가 흐르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지역 주민들은 강을 건너기 위해 사람을 희생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제갈량은 사람의 머리 모양과 비슷한 빵을 만들어 강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무사히 강을 건넌 후, 제갈량은 이 빵을 "야만인의 머리"라고 불렀고, 이것이 오늘날의 ''만터우''로 발전했다.

4. 1. 출병과 초기 진압

223년 중반, 제갈량유비가 사망한 직후였기에 민심 안정과 군량 확보를 실시했다.[23] 오나라와는 화평을 맺기 위해 등지와 진진을 파견했다.[34] 또한, 익주 월수태수 공록을 남중과의 경계에 있는 안상현에 파견하여 사태에 대비하게 하고, 촉군 종사 기행을 직접 남중으로 파견하여 조사를 시켰다.

이엄옹개에게 6통의 서신을 보내 설득했으나, 옹개는 단 1통만 회신하며 매우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기행은 장가군에 도착한 후 즉시 현지 관리를 구속하고 사실 관계를 확인했다. 주포는 기행을 살해하고 반란군에 가담했고, 공록 또한 고정에게 살해되었다.[22]

225년 봄, 제갈량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향했다.[3] 출병에 앞서 참군 마속은 제갈량에게 "마음을 공격하는 것을 상책으로 하고, 성을 공격하는 것을 하책으로 합니다. 또한 마음을 굴복시키는 싸움을 상책으로 하고, 병사로 싸우는 것을 하책으로 합니다."라고 조언했고, 제갈량은 이를 받아들였다.[23]

제갈량은 안상현에서 수로를 따라 월수군으로 들어갔다. 마충을 파견하여 장가군을 공격하게 하고, 이회를 파견하여 건녕군을 공격하게 했다. 이회는 쿤밍에서 반란군에게 포위되었으나, 거짓 항복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반격하여 크게 승리했다. 한편, 마충은 주포를 격파하고, 이회와 합류했다.

옹개는 제갈량이 남진하는 도중에 이미 고정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31][30] 제갈량의 본대는 여러 차례 싸워 승리하고, 고정을 참살했다.[30]

적색 실선은 제갈량의 남정 주력군, 파선은 별동대이다. 제갈량은 고정, 옹개, 맹획 등의 반란군을 평정했고, 마충은 주포를 평정했다.

4. 2. 칠종칠금(七縱七擒)

제갈량은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고 풀어주는 전략을 사용했다.[30][35][9] 맹획은 지난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가 촉군의 허실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제갈량은 맹획을 풀어주고 다시 싸우게 하는 과정을 반복했다.[35] 이러한 과정은 총 일곱 번 반복되었고, 결국 맹획은 제갈량에게 완전히 심복하여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30][35] 맹획은 제갈량에게 "당신은 저에게 하늘의 위엄을 보여주셨습니다. 남쪽 백성들은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9]

이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남만족의 마음을 얻고자 한 제갈량의 정치적 지략이었다. 마속은 제갈량에게 심리전을 통해 남중 지역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고 제안했고, 제갈량은 이 조언을 받아들였다.[4] 제갈량은 맹획이 남중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는 것을 알고 그를 살려두고자 했다.[9]

이러한 제갈량의 통합과 포용의 리더십은, 특히 맹획과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맹획을 일곱 번이나 사로잡았다가 풀어준 것은, 단순한 군사적 행동이 아니라, 맹획의 진정한 복종을 얻어내기 위한 깊은 심리전이었다. 이를 통해 제갈량은 남만족의 마음을 얻고, 남중 지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다만, 맹획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지』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칠종칠금(七縱七擒)"이라는 말은 『한진춘추』와 『화양국지』에 처음 등장한다.

5. 평정 이후

제갈량은 남중 지역을 평정한 후, 행정 구역을 개편하고 현지 지도자들을 등용하여 자치를 허용하는 정책을 펼쳤다.[30] 익주군을 건녕군으로 바꾸고 이회를 태수로 삼았으며, 건녕군과 월수군의 일부를 나누어 운남군을 설치하고 여개를 태수로 임명했다.[30][28] 또한 건녕군과 장가군의 일부를 나누어 흥고군을 설치하고 마충을 장가태수로 임명했다.[30]

제갈량은 현지인이 아닌 사람을 통치자로 임명하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현지인들에게 자치를 허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11][12] 그는 남중 사람들에게 금, 은, 소, 군마 등을 조공으로 바치게 하고, 이회여개 등 현지 출신 인물들을 군 관리자로 임명하여 각 지역의 지도자와 부족장이 통치하도록 했다.[13]

촉한은 정예병과 청강족을 촉 땅으로 이주시켜 "무당비군"이라는 용맹한 부대를 만들었다.[14] 또한, 남중의 유력 가문들에게 이민족들을 분배하여 부곡으로 삼고, "오부도위"를 설치하여 "오자"라고 칭했다.[14] 이민족과 한족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해 호족들을 설득하여 금품을 지출하게 하고, 이민족을 초빙하여 부곡을 설치하게 하여 세습 관직을 주었다.[15]

남중 지역의 풍부한 자원(금, 은, 단칠, 경우, 전마 등)은 촉한의 군비를 지원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제갈량의 북벌에 필요한 물자를 제공했다.[17]

제갈량이 살아있는 동안 남중 사람들은 촉한의 통치에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18] 제갈량 사후에도 소규모 반란이 일어났지만, 제갈량이 임명한 지방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19] 예를 들어, 건흥 11년(233년) 유주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마충이 파견되어 진압했다.[19] 월수군에서는 수족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으나, 연희 3년(240년) 장의가 월수태수로 임명되어 군의 기능을 회복시키고 15년간 평화롭게 다스렸다.[19]

6. 역사적 평가 및 의의

말부터 대에 걸쳐 이정의 사적을 아는 사람의 손으로 편찬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위공문대』에는 이정이 제갈량의 남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제갈량이 일곱 번에 걸쳐 맹획을 사로잡은 것은, 그 외에 방법이 없었고, 이로 인해 전화를 멈추게 한 것이다"[1]

제갈량이 남정 원정 중에 ''만터우''를 발명했다는 유명한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은 '만터우'(饅頭|mántóu중국어)라는 이름이 '만터우'(蠻頭|mántóu|야만인의 머리중국어)와 동음이의어라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 따르면,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제갈량과 촉 군대는 급류가 흐르는 강에 이르렀고, 강을 건너기 위한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 지역 주민들은 강신을 달래려면 50명의 사람을 희생시키고 그들의 머리를 강에 던져야 한다고 말했다. 제갈량은 더 이상의 희생을 원치 않아 사람의 머리 모양과 비슷한, 둥글고 밑면이 평평한 빵을 만들어 강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무사히 강을 건넌 후, 제갈량은 이 빵을 "야만인의 머리"라고 불렀고, 이것이 오늘날의 ''만터우''로 발전했다.[2]

촉한은 남중 통치를 확립하고 남중의 폐쇄 상태를 타개했다. 또한 각 소수 민족과 한족 간의 관계 강화는 남중 발전에 있어 유의미했다.[3]

7. 대중문화 속 남중 반란

225년 맹획이 10만 대군을 일으켜 국경을 침범하고, 옹개, 주포, 고정 등이 가담하면서 남중 지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1] 제갈량은 왕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남만을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장완, 비의 등을 참모로, 조운, 위연 등을 장수로 삼아 50만 대군(실제로는 4만 명 정도로 추정)을 이끌고 남정길에 올랐다.[1] 이 과정에서 관우의 셋째 아들 관색이 합류했다.

옹개, 고정, 주포 등이 이끄는 반란군은 제갈량의 계략과 위연, 왕평 등의 활약으로 진압되었다.[1] 이후 제갈량은 마속의 지원군과 합류하여 남만 영내로 진격, 금환삼결, 동도나, 아회남 등을 격파하고 맹획과 직접 대결하게 된다.

맹획은 여러 차례 패배하고 사로잡혔지만, 제갈량은 매번 그를 풀어주며 진심으로 항복하기를 기다렸다.[1] 맹획은 타사대왕, 목록대왕, 오과국의 올돌골 등 다양한 세력의 도움을 받아 저항했지만, 결국 제갈량의 지략과 조운, 위연 등의 활약에 패배하고 항복했다.

제갈량은 남만을 평정한 후 성도로 돌아왔으며, 이후 남방 지역에서 200여 곳에 이르는 조공을 받게 되었다.[1]

북송 고승의 『事物紀原|사물기원중국어』에 따르면, 남정 당시 강을 건널 때 맹획이 사람 머리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자, 제갈량은 밀가루로 사람 머리 모양을 만들어 만두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1]

7. 1. 소설 《삼국지연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맹획의 대결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축융 부인, 목록대왕 등 허구적인 인물들이 등장하여 흥미를 더한다.

역사 기록에는 제갈량이 남정 기간 동안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아 풀어주었다고 언급되어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제공되지 않았다. 삼국지연의는 일곱 번의 전투 각각의 세부 사항을 설명하는 데 총 4장 반 정도(87장~91장)를 할애한다.

소설에서 묘사된 7번의 전투는 다음과 같다.

순서내용
첫 번째조운이 군대를 이끌고 맹획을 공격하여 그의 군대를 격파한다. 위연은 맹획을 사로잡아 제갈량 앞에 데려온다. 맹획은 속임수로 사로잡혔다고 불평하자 제갈량은 그를 풀어주고 다시 싸울 수 있도록 한다.
두 번째맹획은 강을 가로질러 요새를 건설하고 촉 군에게 공격하도록 조롱한다. 마대는 그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강 요새를 지키던 맹획의 부하 금환삼결을 죽인다. 맹획의 부하 아회남과 동토나는 주인을 배신하고 그를 사로잡아 제갈량에게 넘긴다. 맹획은 공정하게 싸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불평하고, 제갈량은 그를 촉 군영으로 안내한 후 풀어준다.
세 번째맹획의 동생 맹우는 제갈량에게 항복하는 척하며 맹획을 함정에 빠뜨리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것이 계략임을 알고 함께 연기하여 둘 다 함정에 가두고 다시 풀어준다.
네 번째맹획은 촉 군이 퇴각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고 모든 군대를 모아 촉 군영을 공격한다. 그는 군영의 함정에 빠져 다시 사로잡히고, 제갈량은 그를 다시 풀어준다.
다섯 번째맹획은 이전 패배에서 교훈을 얻어 더욱 방어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는 촉 군을 그의 동맹인 뇌서의 동굴 주변의 유독한 늪으로 유인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맹획의 형인 맹절의 도움으로 늪의 위험을 피한다. 맹절은 맹획이 촉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데 참여하지 않는다. 촉 군은 뇌서를 격파하고 죽이고 맹획을 다시 사로잡는다. 제갈량은 맹획을 다시 풀어준다.
여섯 번째맹획의 아내 축융 부인이 전투에 참여하여 촉 장수 마충, 장익을 사로잡는다. 마대는 나중에 축융 부인을 격파하고 그녀를 사로잡는다. 제갈량은 마충과 장익을 풀어주는 대가로 축융 부인을 풀어준다. 맹획은 그의 동맹인 목록대왕에게 도움을 청한다. 목록대왕은 야생 동물을 조종하여 전투에 투입할 수 있다. 그러나 촉 군은 이에 대비하여 화염 방사 장치(일부 번역에서는 거대한 병거)를 사용하여 동물을 겁에 질려 도망치게 한다. 목록대왕은 전투에서 사망하고 맹획은 다시 사로잡히지만 제갈량은 그를 다시 풀어준다.
일곱 번째맹획은 또 다른 동맹인 오돌골에게 도움을 청한다. 오돌골의 군인들은 칼날과 화살을 막을 수 있는 등나무로 만든 특수한 갑옷을 착용한다. 제갈량은 위연이 오돌골과 그의 군대를 협곡의 함정으로 유인하는 계획을 세운다. 협곡에는 폭발물과 화염 함정이 설치되어 있다. 가연성 등나무 갑옷은 쉽게 불이 붙어 오돌골과 그의 군대는 협곡에서 완전히 전멸한다. 맹획은 다시 사로잡힌다. 이번에는 그는 부끄러움을 느껴 제갈량에게 항복하고 평생 촉에 충성을 맹세하기로 결심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87회 「정남구 승상 대흥사, 항천병 만왕 초수집」부터 제90회 「구거수 육파 만병, 소등갑 칠금 맹획」까지 이 전투가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개성적인 인물이나 고사 중에는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창작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맹획은 이민족의 왕으로 추대된 것, 옹개, 주포, 고정 3인은 맹획의 부하로 설정된 것, 악환, 축융 부인, 맹우, 목록대왕 등 남중의 다수 인물이 등장하는 것 등이다.

이 외에도 조운, 위연의 참전은 정사 『삼국지』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7. 2. 기타

북송 고승의 『事物紀原|사물기원중국어』에 따르면, 제갈량의 남정 때 바람이 강해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맹획은 맹렬한 신의 저주라며 사람의 머리와 동물을 제물로 바쳐야만 바람을 잠재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사람의 머리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잔인하다며 밀가루를 사람 머리 모양으로 빚어 그 안에 소고기나 양고기를 넣은 것을 만들어 만두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일설에는 만두는 장비의 입촉 때 발명되었다고도 한다).[1]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3
[2] 서적 Sanguozhi vol. 43
[3] 서적 Sanguozhi vol. 41
[4] 서적 Zizhi Tongjian vol. 70
[5] 서적 Zhuge Li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5
[6] 서적 Sanguozhi vol. 43
[7] 서적 Sanguozhi vol. 43
[8] 서적 Zizhi Tongjian vol. 70
[9]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5
[10] 서적 Zizhi Tongjian vol. 70
[11]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5
[12] 서적 Zizhi Tongjian vol. 70
[13] 서적 Zizhi Tongjian vol. 70
[14] 서적 Huayang Guo Zhi vol. 4
[15] 서적 Huayang Guo Zhi vol. 4
[16] 서적 Huayang Guo Zhi vol. 4
[17] 서적 Huayang Guo Zhi vol. 4
[18] 서적 Zizhi Tongjian vol. 70
[19] 서적 Sanguozhi vol. 43
[20] 서적 Huayang Guo Zhi Vol. 4
[21] 서적 『三国志』蜀志・後主伝
[22] 서적 『華陽国志』南中志
[23] 웹사이트 三國志/卷39#馬良
[24] 서적 삼국지
[25] 서적 유요태사자사섭전
[26] 서적 장고제갈보전
[27] 서적 곽왕상장양비전
[28] 서적 황이여마왕장전
[29] 서적 유2목전
[30] 서적 화양국지
[31] 서적 후주전
[32] 서적 위씨춘추
[33] 서적 삼국지주
[34] 서적 등장종양전
[35] 서적 한진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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