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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가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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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가섬은 일본 가나가와현 미우라시에 위치한 섬으로, 다양한 역사적, 지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섬 이름은 1641년에 처음 문헌에 등장하며, 여러 유래 설이 전해진다. 지리적으로는 쿠로시오 해류의 영향으로 온난한 기후를 보이며, 동서로 다른 지질 구조를 갖는다. 잦은 지진으로 융기를 반복하여 독특한 지형을 이루고, 2007년에는 일본의 지질 백선으로 선정되었다.

조가섬은 어업과 관광 산업이 발달했다. 에도 시대부터 어업이 주요 산업이었으며, 현재는 미사키와 함께 원양 어업 기지 역할을 한다. 관광지로서도 유명하며, 특히 1913년 발표된 시 '조가섬의 비'가 널리 알려지면서 낭만적인 섬으로 인기를 얻었다. 섬에는 조가섬 등대와 안방자키 등대가 있으며, 1870년에 건설된 조가섬 등대는 일본에서 다섯 번째로 오래된 서양식 등대이다.

역사적으로는 미우라 10인중의 농성, 막부 말기의 포대 설치 등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요새 지대로 지정되기도 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1960년 조가섬 대교 개통으로 육지와 연결되었다. 섬에는 다양한 명소와 문화재가 있으며, 천연기념물, 유형 민속 문화재, 미우라시 지정 문화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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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가섬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미우라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조가섬
미우라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조가섬
미우라 반도와 조가섬의 위치 관계
미우라 반도와 조가섬의 위치 관계
기본 정보
섬 이름조가섬
로마자 표기Jogashima
위치동아시아
소속 국가일본
소속 행정 구역가나가와현 미우라시
면적0.99 km2
둘레4 km
최고 고도29.9 m
위치한 바다사가미만 (좁은 의미의 동쪽 끝)
추가 정보
교통 정보https://www.cnic.navy.mil/content/dam/cnic/cnrj/cfa_yokosuka/FFSC/2013/PDFs/Maps%20and%20Directions/A-Z/JOGASHIMA%20ISLAND%20BY%20TRAIN%20OR%20CAR%202016.pdf
재정비 계획http://www.pref.kanagawa.jp/docs/d2t/prs/r6163370.html

2. 섬 이름의 유래

"조가섬(城ヶ島, 城个嶋, 城が嶋)"이라는 명칭은 간에이 18년(1641)에 간행된 미우라 조신의 『호조 5대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4] 미우라 조신은 『호조 5대기』에서 미사키 항구 앞에 위치한 조가섬에 대해 언급하며, 섬의 크기와 위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5]

아즈마카가미』의 겐큐 5년(1194) 이후 기사에는 가마쿠라 막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나 미나모토노 요리에가 유흥을 위해 미우라, 미사키를 방문했고, 매년 봄에 조가섬의 벚꽃을 보러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6]

『도칸키코』에는 "와카에의 츠키시마, 미우라의 미사키 등이라고 말하는 포구들을. 가서 보면. 해상의 조망, 슬픔을 불러일으키고. 지나간 곳에 깊이. 재미있는 곳곳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와카에(와카에)의 츠키시마"는 조가섬의 다른 이름으로 추정된다.[7]

호조 소운이 미사키성을 재흥한 후, 조가섬으로 건너가 벚꽃 구경을 했다는 기록도 『호조 5대기』에 남아있다.[8]

고대부터 중세까지는 "조가시마", "조가시마" 등으로 불렸으며, "조가섬"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중세 이후로 추정된다. 섬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설이 있다.


  • 『신편 사가미국 풍토기고』: 상고 시대에 조(섬의 벼슬)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조가시마"라고 불렸다.
  • 『미우라군 신사 절원 민가 및 고성 구적』: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조가섬"으로 고쳤다.
  • 『해회 미사키지』: 미나모토노 요리에가 섬을 유람했을 때, "조"를 "성"으로 고쳤다.
  • 무라이 겐사이의 『벚꽃의 어소』: 전국 시대에 보소 반도의 사토미 요시히로가 이 섬에 요새를 쌓았을 무렵에 "조가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즈반도의 조가자키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미우라 미사키 주변에는 조가자키라는 지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3. 지리

조가섬은 대부분 해발 30m 정도의 평탄한 대지로, 연안부에서 급격하게 바다로 떨어진다. 해안은 섬의 동서 양단에 암초 지대가 펼쳐져 있고, 곳곳에 모래사장이 있다. 태평양 쪽은 험준한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섬의 동쪽과 서쪽은 암석 성질이 다르다. 동부는 약 550만 년 전에서 400만 년 전에 퇴적된 스코리아질 사암으로 이루어진 하쓰세층[9]이며, 서부는 약 1,200만 년 전에서 830만 년 전에 퇴적된 응회질 실트와 스코리아질 응회암이 번갈아 쌓인 미사키층[10]으로 구성되어 있다. 잦은 대지진으로 융기를 반복하면서 암초에는 습곡지질학적으로 귀중한 노두가 많이 나타난다. 2007년 일본의 지질 백선 선정 위원회는 조가섬을 일본의 지질 백선으로 선정하였다.

해풍의 영향으로 남쪽 절벽에는 수목이 거의 자라지 않으며, 섬의 대지 위 수목은 북쪽으로 기울어져 자란다. 수선화, 상사화, 갯패랭이꽃, 순비기나무, 갯국화, 참당귀 등 다양한 해변 식물이 자생한다.[1]

3. 1. 기후

쿠로시오 해류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온난한 태평양 연안 기후를 보이며,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섬의 태평양 쪽 지역에서는 폭풍 시 매우 강한 바람이 분다.[1] 반면 섬의 미사키 쪽 해면은 본섬이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하여 비교적 잔잔하다. 이러한 점이 미사키 어항을 예로부터 피항항, 바람 대기 항구로서 천연의 양항으로 만들어주고 있다.[2]

3. 2. 지질

조가섬은 동쪽과 서쪽의 암석 성질이 다르다. 동부는 약 550만 년 전에서 400만 년 전에 퇴적된 스코리아질 사암으로 이루어진 하쓰세층[9]으로, 서부는 약 1,200만 년 전에서 830만 년 전에 퇴적된 응회질 실트와 스코리아질 응회암이 번갈아 쌓인 미사키층으로 구성되어 있다.[10]

잦은 대지진으로 인해 융기를 반복하면서, 암초에는 습곡지질학적으로 귀중한 노두가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지질학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2007년 일본의 지질 백선 선정 위원회는 조가섬을 일본의 지질 백선으로 선정하였다.

3. 3. 지형

해발 30m 정도의 평탄한 대지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연안부에서 급격하게 바다로 떨어진다. 해안은 섬의 동서 양단부에 암초 지대가 펼쳐져 있으며, 곳곳에 모래사장이 있다. 태평양 쪽은 험준한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3. 3. 1. 토지 이용

북안과 남안에서는 전혀 다른 토지 이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3. 4. 식생

해풍의 영향으로 남안 절벽에는 수목이 거의 자라지 않으며, 섬의 대지 위 수목은 북쪽으로 기울어져 자란다. 수선화, 상사화, 갯패랭이꽃, 순비기나무, 갯국화, 참당귀 등 다양한 해변 식물이 자생한다.[1]

4. 산업

조가섬의 산업은 어업과 관광업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야요이 시대부터 어업이 식량 조달을 위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도 시대에는 에도의 발전에 따라 상업 어업이 시작되었다. 여름에는 해남이라고 불리는 남자들이 전복, 소라 등을 채취하고, 겨울에는 족대질로 물고기를 잡았다. 소규모 그물 어업도 행해졌고, 1649년에는 새우 그물 어업이 시작되었다. 또한, 가다랑어 등의 회유어도 출하했다. 1781년에는 조가섬의 68가구 중, 1가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어부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어업은 조가섬의 주요 생업이었다.[11]

가마쿠라 시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자주 방문하면서 관광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미사키 - 도쿄 사이에 기선이 취항하면서 도시에서 온 피서객으로 붐볐고, 유가사키에 해수욕장이 개설되었다. 다이쇼 시대에는 기타하라 하쿠슈의 '조가섬의 비'가 발표되면서 젊은 남녀의 동경을 모으는 낭만의 섬으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우라 반도는 이와토 경제 시대부터 도쿄와 가까운 관광지로 다시 주목받았다. 1960년 조가섬 대교 개통 후 방문객 수가 크게 증가했다. 1970년~1971년에는 연간 2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여 최성기를 맞이했다. 오일 쇼크 이후 관광객 수는 급감했지만, 요코하마 요코스카 도로 개통 등으로 감소세에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다른 관광지와 레저 시설 등으로 발길이 이동하고 레저 다양화의 영향으로 1989년 이후에도 감소 추세이다.

2018년 11월, 가나가와현과 미우라시, 조가시마구, 게이큐가 재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현은 대교를 무료화하고, 게이큐 그룹이 조가시마 게이큐 호텔 재건축 등을 추진한다.[3]

4. 1. 어업

야요이 시대부터 어업이 식량 조달을 위해 행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에도 시대에는 에도의 발전에 따라 상업 어업이 시작되었다. 여름에는 해남이라고 불리는 남자들이 나잠 어업으로 전복, 소라 등을 채취하고, 겨울에는 족대질로 물고기를 잡았다. 소규모 그물 어업(이소다테아미, 시치메아미 등)도 행해졌고, 1649년에는 새우 그물 어업이 시작되었다. 또한, 가다랑어 등의 회유어도 출하했다. 수확된 어개는 당시 쾌속정인 오시오쿠리 부네로 에도로 운반되었다. 1781년에는 조가섬의 호수 68채 중, 1채가 상가 외에는 모두 어부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어업은 바로 조가섬의 생업이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꽁치의 유자망 어업을 사가미만에서 하게 되었다.[11]

현재, 맞은편의 미사키와 함께 원양 어업 기지의 한 축을 이루고 있지만, 섬을 거점으로 하는 어업은 자망, 채패, 채조 등의 연안 어업이 중심이다. 특히 전복은 '신 가나가와의 명산 100선'에 선정되었다. 섬 안에는 가나가와현 수산 기술 센터가 있다.

4. 2. 관광

가마쿠라 시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자주 방문하면서 관광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요리토모는 섬 안 각지에 말타기를 개최한 "유가사키", 차를 끓이거나 벼루의 물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미즈타레", 요리토모의 시녀가 술에 취한 데서 이름이 유래된 "요이메가하마" 등 유래를 남겼다.

메이지 시대에는 미사키 - 도쿄 사이에 기선이 취항하면서 도시에서 온 피서객으로 붐볐고, 유가사키에 해수욕장이 개설되었다. 다이쇼 시대에는 기타하라 하쿠슈의 '조가섬의 비'가 발표되면서 젊은 남녀의 동경을 모으는 낭만의 섬으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으로 지반이 융기되어 모래 속 암초가 모래사장에 노출되면서 해수욕객은 감소했고, 조가시마 포대가 설치되면서 요새 시대를 맞이한다.

미사키 항과 조가섬을 잇는 뱃길 "산시로", 후방에는 조가시마 대교가 보인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우라 반도는 이와토 경제 시대부터 도쿄와 가까운 관광지로 다시 주목받았다. 미우라시 통계에 따르면, 1956년의 방문객 수는 약 27만 명이었으나, 1960년 조가섬 대교 개통 후 약 147만 명으로 5배 이상 증가했다. 포대 부지는 현립 조가시마 공원으로 정비되었고, 1963년에는 게이큐 그룹의 미사키 관광이 조가시마 - 아부라쓰보 사이에 정기 관광선을 취항시켰다.

1970년~1971년에는 연간 2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여 최성기를 맞이했고, 게이힌 급행 전철은 쾌속 특급 "조가시마・마린파크호", "조가시마호" 등의 임시 열차를 운행하기도 했다. 오일 쇼크 이후 관광객 수는 급감했지만, 요코하마 요코스카 도로 개통 등으로 감소세에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다른 관광지와 레저 시설 등으로 발길이 이동하고 레저 다양화의 영향으로 1989년 이후에도 감소 추세이다.

2018년 11월에는 가나가와현과 미우라시, 조가시마구, 게이큐가 재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현이 대교를 무료화하고, 게이큐 그룹이 조가시마 게이큐 호텔 재건축 등을 추진한다.[3]

조가시마 - 아부라쓰보 사이의 정기 관광선은 2007년 12월 15일 폐지되었지만[12], 2008년 조가시마 대교 개통으로 폐지되었던 미사키 - 조가시마 사이의 작은 뱃길이 반세기 만에 부활했다.

5. 문학, 음악, 영화

기타하라 하쿠슈의 시 『조가섬의 비(조가섬의 비)』는 1913년 시마무라 호게츠의 의뢰로 만들어졌으며, 야나다 사다가 곡을 붙였다. 같은 해 10월 30일 도쿄 유라쿠자에서 초연되었고, 오쿠다 료조의 레코드로 전국적인 인기를 얻어 조가섬을 낭만의 섬으로 알렸다. 야마다 코사쿠, 하시모토 쿠니히코도 이 시에 곡을 붙였으며, 1950년1959년에는 같은 제목의 영화도 제작되었다.[1]

『조가섬의 비』 노래비


『조가섬의 비』 악보비


마쓰모토 다카시는 1938년 초가을 섬의 밤을 읊은 하이쿠를 남겼고, 가도카와 겐요시는 1964년 조가섬에서 바라보는 이즈오시마에 대한 동경을 담은 하이쿠를 남겼다. 이들의 시비는 조가 섬 공원에 있다.[1][2]

기타하라 하쿠슈의 『조가섬의 비』의 영향으로 전쟁 전 조가섬을 소재로 한 유행가가 많이 발표되었다.

제목발표 연도작곡작사노래
조가섬 야곡1934년다케오카 노부유키하마노 코이치도카이린 타로
꿈의 조가섬1936년에구치 야시쿠보타 쇼우지마츠다이라 아키라
꿈의 조가섬1939년오타 반사부로시마다 게이야아오바 쇼코
달의 조가섬1939년쿠라와카 하루오우치다 쓰토무아오바 쇼코
조가섬 모정1972년야마가미 미치오스즈키 구니히코니시키노 아키라
조가섬 우정2005년나카무라 노리마사키노시타 류타로나가호 유키
조가섬 연가2006년타카노 카츠미와카야마 카오루나이토 히로코



조가섬을 소재로 한 영화는 다음과 같다.

제목개봉 연도배급감독배역
조가시마의 비1950년다이에이다나카 시게오하세가와 가즈오, 히다카 스미코
조가시마의 비1959년도호이노마타 가쓰토야마다 신지, 노구치 후미에
나는 바다가 보고 싶어졌어요2009년「나는 바다가 보고 싶어졌어요」제작 실행 위원회후쿠다 코레히사오쓰카 치히로, 이토 유키, 아키노 타이사쿠



마키노 신이치1935년 소설 『조가섬의 봄』을 발표했고, 사이토 사카에는 1994년 『조가섬 살인 여행 정』을 저술하였다.

5. 1. [[기타하라 하쿠슈]]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1910년에 미사키를 처음 방문했고, 1913년에는 조가섬 맞은편 미사키마치 무코가사키(向ヶ崎)의 이인관에서 이듬해까지 거주했다. 미사키 거주 기간에 쓴 시들은 1915년 가집 『운모집』으로 발표되었다.

하쿠슈는 미우라 미사키와 조가섬을 평생 사랑하여, 1937년 미사키 초등학교와 미사키 실과 고등 여학교(후의 현립 미사키 고등학교, 2004년 폐교)의 교가를 작사했다. 하쿠슈가 생전에 노래비 건립을 허락한 곳은 조가섬과 겐토지(見桃寺)뿐이며, 1941년 11월 2일 겐토지 노래비 제막식에는 하쿠슈 본인이 참석했다.

5. 1. 1. 조가섬의 비



『조가섬의 비』는 기타하라 하쿠슈미사키에 머물던 1913년 시마무라 호게츠의 의뢰로 만들어졌다. 시마무라는 자신이 이끄는 예술좌의 음악회에서 발표할 곡을 위해 하쿠슈에게 작사를 의뢰했고, 작사 후 바로 야나다 사다에 의해 곡이 붙여졌다. 1913년 10월 30일, 도쿄 유라쿠자에서 야나다 자신이 독창(피아노: 마츠다이라 노부히로)으로 발표했다. 이는 하쿠슈의 시에 곡이 붙여진 첫 번째 작품이다. 조가섬과 미사키의 풍취를 읊고 있으며, 오쿠다 료조가 녹음한 레코드가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조가섬은 낭만의 섬으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동경심을 품은 젊은 남녀가 많이 방문했다. 곡을 붙인 작곡가로는 야나다 외에 야마다 코사쿠, 하시모토 쿠니히코가 있다. 1950년1959년에는 같은 제목의 영화도 제작되었다.[1]

5. 2. [[마쓰모토 다카시]], [[가도카와 겐요시]]

하이진 마쓰모토 다카시가 초가을 섬의 밤을 읊은 하이쿠(1938년) 시비가 조가 섬 공원에 있다.[1] 전쟁 전의 조가 섬은 뱃사공 외에는 섬을 건너는 수단이 없었고, 요새 지대였기 때문에 섬을 건너는 것 자체가 군의 제약이 있었다. 밤이 되면 인적이 드물고 벌레 소리가 울려 퍼지는 섬이었다.[1] 시비에 새겨진 하이쿠는 벌레 소리가 울리는 초가을 밤, 시원함을 찾아 덧문을 닫지도 않고 잠이 드는 섬의 정경을 묘사한 것이다.[1]

시인 가도카와 겐요시가 조가섬에서 바라보는 이즈오시마에 대한 동경을 읊은 하이쿠(1964년) 시비가 조가섬 공원에 있다.[2] 조가섬에서 바라보는 이즈오시마로 돛단배가 달리는 모습을 읊은 것이다.[2] 이즈오시마와 조가섬 사이에는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눈앞에 보인다.[2] 1986년의 대분화 때는 밤이 되면 하늘이 새빨갛게 물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2]

5. 3. 조가섬을 소재로 한 작품

기타하라 하쿠슈의 『조가섬의 비』의 영향인지, 전쟁 전에 조가섬을 소재로 한 유행가가 많이 발표되었다.

제목발표 연도작곡작사노래
조가섬 야곡1934년 (쇼와 9년)다케오카 노부유키하마노 코이치도카이린 타로
꿈의 조가섬1936년 (쇼와 11년)에구치 야시쿠보타 쇼우지마츠다이라 아키라
꿈의 조가섬1939년 (쇼와 14년)오타 반사부로시마다 게이야아오바 쇼코
달의 조가섬1939년 (쇼와 14년)쿠라와카 하루오우치다 쓰토무아오바 쇼코
조가섬 모정1972년 (쇼와 47년)야마가미 미치오스즈키 구니히코니시키노 아키라
조가섬 우정2005년 (헤이세이 17년)나카무라 노리마사키노시타 류타로나가호 유키
조가섬 연가2006년 (헤이세이 18년)타카노 카츠미와카야마 카오루나이토 히로코



조가섬을 소재로 한 영화는 다음과 같다.

제목개봉 연도배급감독배역
조가시마의 비1950년(쇼와 25년)다이에이다나카 시게오하세가와 가즈오, 히다카 스미코
조가시마의 비1959년(쇼와 34년)도호이노마타 가쓰토야마다 신지, 노구치 후미에
나는 바다가 보고 싶어졌어요2009년(헤이세이 21년)「나는 바다가 보고 싶어졌어요」제작 실행 위원회후쿠다 코레히사오쓰카 치히로, 이토 유키, 아키노 타이사쿠



마키노 신이치1935년 3월 『도쿄 아사히 신문』에 소설 『조가섬의 봄』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하쿠슈의 추억과 봄날 조가섬의 평범한 일상을 그리고 있다.

사이토 사카에는 1994년에 『조가섬 살인 여행 정』을 저술하였다.

6. 등대

조가섬에는 두 개의 등대가 있다. 도쿄 만 입구에 위치하여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1648년(게이안 원년)에 섬 동쪽 끝 아와가사키에 설치된 봉화대(노로시대)가 기원이라고 여겨진다.

6. 1. 조가섬 등대

섬 서쪽 끝의 나가츠로자키 기슭, 표고 약 30m의 절벽 위에 세워진 등대이다.

에도 시대에 현재 위치(니시야마)에 설치된 등명대가 직접적인 기원이다. 이것은 아와가사키의 봉화대를 이전한 것으로, 후에 횃불을 피우는 횃불(횃불집)로 변경되었다. 조가섬을 그린 에도 시대의 그림에서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막말에 서양식 등대 건설이 계획되어 1870년(메이지 3년)에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 일본의 서양식 등대 중 5번째이며, 가장 오래된 시대에 설치된 등대 중 하나이다.[1] 최초의 등대는 관동 대지진으로 붕괴되었고, 현재의 등대는 1927년에 재건된 2대째이다.[1] 전전, 조가섬 부근에서 군사 훈련이 실시될 때에는 명호의 제한도 이루어졌다.[1]

조가섬 등대

6. 2. 안방자키 등대

안방자키 등대


조가섬 공원에 세워진 등대로, 외관은 미우라 다이콘을 본떠 디자인되었다.[13] 높이는 16미터이다.[14]

섬 서쪽 끝으로 봉화대가 이동한 후, 안방자키에는 오랫동안 등대가 설치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지역 주변은 얕은 암초 지대여서 선박 통행에 위험이 따랐기 때문에, 현지 주민들의 요청으로 1962년 섬 동쪽 끝 안방자키의 해발 몇 미터 암반 위에 안방자키 등대가 설치되었다.

이후 등대 노후화, 태풍으로 인한 높은 파도로 전선이 끊어지는 문제 등을 고려하여 2020년 3월 8일 조가섬 공원 내로 이전 신축되어 가동을 시작했다.[14]

초대 안방자키 등대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항목내용
초점1962년
구조탑형 (원형) 콘크리트 구조
등탑 높이11.5m
표고13m
광도2,000 cd
광달 거리약 19km
등질단섬백광 (4초에 1 섬광)
관리해상보안청 제3관구 해상보안본부 조가섬 항로 표지 사무소



7. 해방·군사

에도 시대 말기(막부 말기)에 외국 선박이 자주 드나들면서 도쿄만(에도만) 입구에 있는 조가섬은 해상 방어의 중요한 지점으로 여겨졌다. 1808년 우라가 봉행 이와모토 마사토모가 포대를 만들었다. 1810년 막부로부터 사가미 해방을 명령받은 아이즈번마쓰다이라 가타히로는 조가섬에 원견번소를 설치하고, 아와가사키에서 대포 발사 훈련을 했다.[4] 1821년 아이즈번을 대신하여 가와고에번이 사가미 해방을 맡게 되자 조가섬 포대는 우라가 봉행의 소관이 되었다.[4] 페리 함대는 요코스카 우라가에 도착하여 구리하마에 상륙했는데, 이들이 온 것을 가장 먼저 알린 것은 마쓰와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조가섬의 어부였다고 전해진다.[4] 1854년 미사키의 요시베는 조가섬 앞바다에서 외국 선박 2척을 발견하여 가미미야타의 해방 진영에 보고했다.[4]

메이지 시대 대일본제국 해군은 1894년 임시 도쿄만 수비대 사령부(도쿄만 요새 사령부의 전신)를 설치하고 미사키에 감시 초소를 설치했다.

1898년 칙령 제176호 "요새 근방에서의 수륙 측량 등의 단속에 관한 건"이 공포되었고, 1899년 군기 보호법, 요새 지대법이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조가섬을 포함한 미우라 반도 전역이 요새 지대로 지정되었고, 미우라 반도의 관광 안내서 『미우라 대관』이 판매 금지 처분을 받는 등 관광지로서의 조가섬은 큰 타격을 입었다. 1905년 러일 전쟁 중 해군은 조가섬에 망루를 설치했다. 당시 해군은 발트 함대쓰시마 해협을 통과할지, 태평양을 빠져나와 쓰가루 해협을 통과할지 항로 예측에 고심하고 있었으며, 이는 그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9]

7. 1. [[미우라 10인중]]

호조 5대기에 따르면, 1516년 호조 소운이 신정성과 미사키성을 함락했을 때, 미우라 10인중(오다와라중 소령 역장에는 "미사키 10인중", 6권본 호조기에는 "미우라조 10기"로 나타난다)이라 불린 카메자키, 스즈키, 시모자토, 미토미, 데구치의 5개 성씨의 10명의 수장은 미사키의 배를 모두 조가섬에 묶고 동도에 농성하며 저항했다. 이 때문에 소운은 공격에 어려움을 겪고 겐초사·엔가쿠사에 조정을 의뢰하여 겨우 강화했다.[15]

7. 2. 막부 말기의 포대

페리 함대의 기함 서스퀘해나호


에도 시대 말기(막부 말기)에 외국 선박의 빈번한 방문으로 도쿄만(에도만) 입구에 위치한 조가섬은 해방의 요충지로 중요시되었다. 1808년 우라가 봉행 이와모토 마사토모가 포대를 축조하였다. 1810년 막부로부터 사가미 해방역을 명받은 아이즈번마쓰다이라 가타히로는 조가섬에 원견번소를 설치하고, 아와가사키에서 대포 발사 훈련을 했다.[4] 1821년 아이즈번을 대신하여 가와고에번이 사가미 해방역을 맡게 되자 조가섬 포대는 우라가 봉행의 소관이 되었다.[4] 미국 페리 함대는 요코스카 우라가에 내항, 구리하마에 상륙했지만, 방문을 가장 먼저 알린 것은 마쓰와키에서 어업을 하던 조가섬의 어부였다고 전해진다.[4] 1854년 미사키의 명주 요시베가 조가섬 앞바다에서 이국 선박 2척을 발견하여 가미미야타의 해방 진영에 보고했다.[4]

7. 3. 요새화

메이지 시대 대일본제국 해군은 1894년 임시 도쿄만 수비대 사령부(도쿄만 요새 사령부의 전신)를 설치하고 미사키에 감시 초소를 설치했다.

1898년 칙령 제176호 "요새 근방에 있어서의 수륙 측량 등의 단속에 관한 건"이 공포되었고, 1899년 군기 보호법, 요새 지대법이 성립되었다. 이로 인해 조가섬을 포함한 미우라 반도 전역이 요새 지대로 지정되었고, 미우라 반도의 관광 가이드북 『미우라 대관』이 판매 금지 처분을 받는 등 관광지로서의 조가섬은 큰 타격을 입었다. 1905년 러일 전쟁 중 해군은 조가섬에 망루를 설치했다. 당시 해군은 발트 함대쓰시마 해협을 통과할지, 태평양을 빠져나와 쓰가루 해협을 통과할지 항로 예측에 고심하고 있었으며, 이는 그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9].

7. 3. 1. 조가섬 포대

도쿄만 요새의 일부로 섬 동부 대지 위에 설치된 연안 포대(미사키 제3구 포대)이다. 함포를 전용한 포탑 포대로, 1945년 종전까지 존재했다.[1]

8. 역사

야요이 시대 유적이 발견되어 이때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38] 864년 후지와라노 스케미츠가 미우라에 표착, 가신 사부로를 모신 가지노사부로 신사가 건립되었다.[38]

1516년 호조 소운에 의해 미사키 성이 함락되고 미우라 씨가 멸망, 잔당이 조가섬에 농성했다.[38] 에도 시대에는 막부 직할지가 되었으며, 미사키 부교가 설치되어 통치되었다.[38]

1870년 조가섬 등대가 점등되었고,[38] 1889년 정촌제 시행으로 미사키 마을이 되었다.[38]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지반이 융기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미사키 항은 약 6m 정도 융기하여 바다가 말라붙고 조가섬까지 육지로 연결되어 며칠 동안 건너갈 수 있었다.[38]

1936년 대화재로 섬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당시 풍속 10미터를 넘는 강풍으로 인해 섬 전체 119호 중 106호가 전소되고 591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소방 작업 중 소방대원 2명이 감전으로 순직했다.[42][43]

1960년 조가섬 대교가 개통되어 육지와 연결되었다.[38]

9. 명소


  • 조가섬 등대
  • 아와자키 등대
  • 현립 조가섬 공원
  • 하쿠슈 비원(『조가섬의 비』가비, 하쿠슈 기념관)
  • 우마노세 동문
  • 스노고젠


우마노세 동문은 침식으로 바위가 안경 모양으로 뚫린 아치형 바위(해식동문)로, 아카바네자키의 곶에 있다. 1923년 이전에는 동문 아래를 작은 배로 통과할 수 있었으나,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융기로 육지화되었다. 지진으로 인한 융기 현상을 오늘날까지 전하는 존재이다. 폭이 좁고 이미 균열이 생겨 붕괴 가능성이 있어 상부를 걷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1]

10. 관련 문화재

지정 구분명칭지정 연월일소재지비고
현 지정 천연기념물조가섬의 바다오리, 슴새 및 검은 해오라기의 서식지1960년 5월 31일미우라시 미사키 정 조가섬 아카바네 해안매년 10월 말 ~ 다음 해 4월경에 날아옴.
현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조가섬 어로 도구 컬렉션1982년 2월 9일미우라시 미사키 정 조가섬 411구 조가섬 분교 바다 자료관
시 지정 문화재 (조각)약사여래 입상1967년 3월 28일미우라시 미사키 정 시라이시 19-2 겐토지원래는 조가섬에 있던 진구지(폐사)의 본존.
시 지정 문화재 (건조물)구 미사키 초등학교 조가섬 분교1987년 1월 30일미우라시 미사키 정 조가섬 411쇼와 시대 초기의 학교 건축. 폐교 후에는 조가섬 공민관, 현재는 바다 자료관.


참조

[1] 웹사이트 JOGASHIMA ISLAND by TRAIN or CAR https://www.cnic.nav[...] 2016-04
[2] 간행물 Recently Jogashima and Miura have been linked by the longest box-girder bridge in the Orient. The total length of the bridge is 575 meters; the central span is 90 meters long, the adjoining spans 70.3 meters and the remaining spans 40 meters Kaigai Kensetsu Kyōkai (Japan) 1963
[3] 웹사이트 城ヶ島西部地区再整備方針を決定〜県、三浦市、城ケ島区、京浜急行電鉄(株)の4者が連携して推進〜 神奈川県記者発表資料 http://www.pref.kana[...] 神奈川県 2018-11-13
[4] 서적 三浦三崎の地景すぐれたる事 寛永版 巻10(3)
[5] 서적
[6] 서적 相模宝蔵山旧跡の事 寛永版 巻10(4)
[7] 서적 三浦三崎の地景すぐれたる事 寛永版 巻10(3)
[8] 서적
[9] 웹사이트 神奈川県温泉地学研究所観測だより72号 https://www.onken.od[...] 神奈川県温泉地学研究所 2022-08-03
[10] 웹사이트 神奈川県温泉地学研究所観測だより72号 https://www.onken.od[...] 神奈川県温泉地学研究所 2022-08-03
[11] 웹사이트 新かながわの名産100選 http://www.pref.kana[...] 神奈川県 null
[12] 웹사이트 http://www.kanaloco.[...]
[13] 웹사이트 安房埼灯台 https://www.miura-in[...] 三浦市観光協会 null
[14] 뉴스 安房埼灯台2代目点灯 市民デザイン 三浦・城ケ島 https://www.kanaloco[...] 神奈川新聞社 2020-03-10
[15] 서적 人名題号に。しらるゝ事 巻9(6)
[16] 서적 相模宝蔵山旧跡の事 '北条五代記』寛永版 巻10(4)
[17] 서적 房州里見家の事 '北条五代記』寛永版 巻3(2)
[18] 문서 現在の三浦市役所一帯で、[[掘割]]等の遺構がかろうじて残る。また、城ヶ島から出ている観光船で[[油壺]]まで行くと新井城跡に行くことができる。なお、近年では新井城が三浦氏時代の三崎城であり、現在の三崎城は北条氏によって築かれたとする説もある。
[19] 문서 結果的に対馬海峡を通り、[[日本海海戦]]となった。尚、前年の[[1904年]]にはロシアの[[ウラジオストク艦隊]]が津軽海峡を突破して房総沖、城ヶ島沖を回り、[[遠州灘]]にまで達して引き返すという事件が発生している。
[20] 문서 密大日記 国立公文書館 1924
[21] 문서 密大日記 国立公文書館 1927
[22] 문서 軍用水底電線敷設の件 国立公文書館 1925
[23] 문서 東京湾要塞城ヶ島砲台八八式海岸射撃具電続試験及補修工事實施の件 国立公文書館 1939
[24] 문서 城ヶ島砲台第2砲台試験射撃の件 国立公文書館 1929
[25] 문서 佐世保要塞俵ヶ浦弾薬本庫増改築及東京湾要塞城ヶ島砲台増改築工事実施の件 国立公文書館 1936
[26] 문서 城ヶ島砲台堀井戸工事を陸軍工兵学校へ委託の件 国立公文書館 1928
[27] 문서 東京湾要塞城ヶ島砲塔沈下の件 国立公文書館 1928
[28] 문서 城ヶ島砲台第2砲塔砲床傾斜に関する件 国立公文書館 1940
[29] 문서 東京湾要塞地帯第1区道路構築に関する件 国立公文書館 1936-12
[30] 뉴스 絵はがき地図 時代の軌跡◇明治から昭和初期、市井の暮らしと空気を読み解く◇ 2017-09-04
[31] 문서 要注意米国人要塞地帯徘徊の件 国立公文書館 1926
[32] 웹사이트 지도・공중사진열람서비스 http://mapps.gsi.go.[...] 국토지리원
[33] 웹사이트 지도・공중사진열람서비스 국토지리원
[34] 웹사이트 http://www.pref.kana[...]
[35] 문서 정확하게는 북서 방향으로 보인다.
[36] 문서
[37] 문서
[38] 논문 大正関東地震の際の海底地殻変動 http://www.onken.oda[...] 2017-09-28
[39] 문서
[40] 문서
[41] 문서
[42] 뉴스 保険金目当ての一味が放火を自白 大阪毎日新聞 1936-02-12
[43] 뉴스 城ヶ島で百十戸全焼、消防手二人殉職 東京朝日新聞 193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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