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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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양업 토마스는 1821년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 천주교의 사제이다. 그는 어린 시절 박해를 피해 유랑 생활을 하다가 1836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에서 유학했다. 1849년 상하이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조선으로 돌아와 12년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사목 활동을 펼쳤다. 그는 평신도 중심의 사목과 사회 개혁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1861년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2016년 가경자로 선포되었으며, '땀의 순교자'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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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최양업 토마스 |
존경 대상 | 로마 가톨릭교회 |
직함 | 사제 |
수호 | 선교사 박해받는 기독교인 여행자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821년 3월 1일 |
출생지 | 충청남도 청양군 |
사망일 | 1861년 6월 15일 (40세) |
사망지 | 충청북도 진천군 |
부모 | 최경환 프란치스코 (부) 이성례 마리아 (모) |
사제 정보 | |
소속 교구 | 천주교 조선대목구 |
서품일 | 1849년 |
한국어 이름 | |
한글 | 최양업 |
한자 | 崔良業 |
로마자 표기 | Choe Yangeop |
매큔-라이샤워 표기 | Ch'oe Yang'ŏp |
2. 일생
최양업 토마스는 1821년 3월 1일 한국에서 성 프란치스코 최경환과 복녀 이성례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는 어린 시절, 박해를 피해 아버지와 함께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3]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 신부는 1825년 말 한국에 들어와 최양업을 만났고, 1836년에 그를 신학생으로 데려갔다. 최양업은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다.[2]
1836년 12월 3일, 최양업과 동료 신학생들은 마카오에서 더 공부하기 위해 순종을 서약하고 출발하여, 1837년 6월 7일에 도착했다.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란으로 인해 마닐라로 떠났지만, 1839년 말에 그곳으로 돌아왔다.[3] 1842년 4월, 프랑스가 한국과의 통상 조약을 맺을 의사를 밝히자 그는 다시 마카오를 떠났다. 프랑스 함대를 위한 통역관으로 최양업과 김대건이 선정되었으나, 프랑스인들은 난징에서 더 이상 항해하기를 원치 않아, 두 신학생은 하선하여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했다.[2]
최양업은 귀국길을 찾던 중, 1845년 그의 친구 김대건이 참수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절들은 최양업에게 귀국이 헛된 일이라고 설득했고, 그는 홍콩으로 옮겨진 극동 본부로 가서 "한국 순교자들의 업적"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1847년 8월, 프랑스 군함에 올라 조국에 있는 비밀 사절들을 만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당분간 귀국하려는 생각을 포기했다.[2]
상하이로 이주한 그는 1849년 4월 15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의 서품 주례자는 프란치스코회의 프란체스코 하비에르 마레스카 주교였다. 그는 다음 달 상하이를 떠나 랴오둥으로 가서 시메온-프랑수아 베르뇌 주교의 지휘 아래 사목 활동을 시작했고, 1849년 12월 3일에 고국으로 돌아갔다.[2][3]
1850년부터 1861년까지 최양업 신부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4] 그는 때때로 외국인으로 오인받아 마을에서 쫓겨났고, 1859년에는 지방 당국과 비신자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했으며, 반나체 상태로 여관에서 쫓겨나기도 했다.[2]
최양업은 1861년 6월 15일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5개월 후에 거행되었고, 그의 유해는 제천시 배론 신학교 뒤 언덕에 안장되었다.[2]
2. 1. 어린 시절과 순교한 가족
1821년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다락골)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791년 신해박해를 피해 최양업의 조부 최인주가 다락골에 정착했고, 이후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들어 교우촌이 형성되었다.[2]최양업의 집안은 증조부 최한일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자주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최양업의 가족은 한양을 거쳐 경기도 과천군 수리산 자락에 자리 잡았다.[2]
1839년 기해박해 때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하였다.[2] 최경환은 수리산에서 체포되어 옥사하였고, 이성례는 아들 스테파노가 감옥에서 굶주림으로 죽은 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성례는 참수형 전날 동냥으로 번 돈을 사형 집행인에게 주며 고통 없이 단칼에 자신의 목을 베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2]
최양업의 아버지 최경환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고,[3] 어머니 이성례는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가 되었다.[3]
2. 2. 유학과 사제 서품
1836년 모방 신부의 추천으로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이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7] 1837년 11월 26일 친구 최방제가 풍토병으로 사망하자, 최양업은 김대건과 함께 신학 공부에 더욱 매진하였다.두 사람은 만주 셔바지아즈(小八家子중국어)[1]에서 장-조제프-장-밥티스트 페레올 주교의 지도 아래 사제직을 위한 교육을 계속 받았다. 1844년 12월 10일 최양업은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 주교에게서 부제 서품을 받았다.[4] 이후 김대건은 한국 최초의 사제로 서품을 받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2]
최양업은 상하이로 이동하여 1849년 4월 15일 프란치스코회 소속 프란체스코 하비에르 마레스카 주교에게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로써 최양업은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사제가 되었다.[2]
2. 3. 조선에서의 헌신적인 사목 활동
1849년 청나라 천주교회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에게서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천주교 사제 서품을 받은 최양업은, 그해 12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왔다. 천주교 조선대목구장(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후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9]최양업은 6개월 동안 삼남지방 5천 리를 돌면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후에도 매년 129개의 공소를 돌며 11년 6개월간 사목하며 헌신하였다. 조선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이 파견 전에 조선의 실정과 풍습을 익혀야 한다고 파리 외방전교회 홍콩 극동대표부장인 리브와 신부에게 건의했는데, 이는 천주교 신앙이 한민족의 자주적인 신앙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9]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가 천주교 공동체에서 영향력이 있는 양반 신자들을 감싸고 도는 탓에 민중 신자들이 소외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페레올 주교를 비판하다가 갈등을 겪기도 했다. 최양업은 신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지만, 학식이 없는 평신도들을 위해 한글로 교리를 가르치는 세심함도 보였다.[10]
최양업은 사회개혁가이기도 했다. 민중들의 소외, 양반 계급의 무위도식 등을 비판하며 신분제도 폐지를 주장했다.[10] 1850년부터 1861년까지 최양업 신부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4] 1860년 초에는 약 3815명의 신자를 방문했다. 그는 중국어 교리서를 번역하고 가톨릭 교리를 운율에 맞춰 학습을 돕기도 했다.[5]
2. 4. 선종과 시복 청원
1861년 6월 15일 영남 지방 사목 활동을 마치고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 과로와 장티푸스로 40세 나이에 문경에서 선종하였다. 그 후 제천시 배론성지에 안장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비석과 묘비를 세우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이루지 못하다가 1945년 광복 이후 세웠다.[11]김대건 신부가 '피의 순교자'로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된 것과 달리, 최양업 신부는 순직이었기 때문에 시성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땀의 순교자'라는 호칭이 붙여졌으며, 2001년부터 한국 천주교회에서 시작된 한국 시복시성운동의 일환으로 2004년 최양업 신부와 124명의 순교자들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교황청에 시복 청원하였다. 2016년 5월 8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인준을 받아 가경자로 선포되었다.[11]
3. 저술 활동
최양업은 1849년 사제 서품을 받기 전후로 조선 천주교회와 신자들을 위해 여러 저술 및 번역 활동을 했다. 1846년에는 홍콩으로 이전한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기해박해 순교자 현석문의 일기를 편집하고 번역했다.[2] 또한 중국어 교리서를 번역하고, 가톨릭 교리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운율에 맞춰 읊는 자료를 만들었다.[5]
3. 1. 기해일기 편집 및 번역
1846년 최양업은 홍콩으로 이전한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돌아가 조선 기해박해 때 순교한 현석문의 일기를 편집하여 《기해일기》를 저술하고 이를 라틴어로 번역했다.[8]3. 2. 교리서 번역 및 저술
최양업은 중국어 교리서를 번역하고, 가톨릭 교리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운율에 맞춰 읊는 자료를 만들었다.[5]4. 신학적 관점과 사목적 지향
최양업 토마스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과 함께 공부하며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844년 12월 10일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에게서 부제 서품을 받았고,[4] 1849년 4월 15일 상하이에서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프란체스코 하비에르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았다.[2]
그는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천주교 사제가 되었으며, 귀국 후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을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펼쳤다. 특히, 학식이 없는 평신도들을 위해 한글로 교리를 가르치고, 중국어 교리서를 번역하는 등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4. 1. 평신도 중심의 사목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가 조선 천주교 공동체에서 영향력이 있는 양반 신자들을 감싸고 도는 바람에 민중 신자들이 소외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를 비판했다가 갈등이 생겼다.[10] 최양업 신부는 신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지만, 학문이 없는 평신도들을 위해 한글로 교리를 가르치는 세심함을 보였다.[10]4. 2. 사회 개혁적 면모
최양업은 사회개혁가이기도 했다. 그는 민중들의 소외, 양반 계급의 무위도식 등을 비판함으로써 신분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10]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가 천주교 공동체에서 영향력이 있는 양반 신자들을 감싸고 도는 바람에 민중 신자들이 소외되고 있었음을 비판하다가 페레올 주교와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10]4. 3.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기여
1849년 청나라 천주교회의 강남교구장인 마레스카 주교에게서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천주교 사제 서품을 받은 최양업은, 조선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이 파견되기 전에 조선의 실정과 풍습을 익힐 것을 마카오 신학교 선생이자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극동대표부장인 리브와 신부에게 주장하였다. 이는 천주교 신앙이 한민족의 자주적인 신앙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9]최양업은 신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지만, 학문이 없는 평신도들을 한글로 교리를 가르치는 등 세심하게 배려했다.[10] 또한 민중들의 소외, 양반 계급의 무위도식 등을 비판하며 신분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등 사회개혁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1849년 12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와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나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한 최양업은, 6개월 동안 삼남지방 5천 리를 돌면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 이후에도 매년 129개의 공소를 돌며 11년 6개월간 사목하였다.[9] 1850년부터 1861년까지 최양업 신부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4] 1860년 초, 그는 약 3815명의 신자를 방문했다.[5] 그는 중국어 교리서를 번역하고 가톨릭 교리를 운율에 맞춰 학습을 돕기도 했다.[5]
5. 기념과 유산
최양업 신부는 과로와 장티푸스로 40세에 선종한 후 제천시 배론에 안장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비석과 묘비를 세우지 못하다가 1945년 광복 이후에 세워졌다.[1]
2008년 가톨릭평화방송에서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가 제작되었다. 최양업 신부 역은 원기준이, 어머니 이성례 역은 박순천이 맡았다. 드라마는 최양업의 헌신적인 사목 활동과 인간적인 고뇌를 다루었다.[12] 원기준은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하는 장면이 가장 힘들었지만, 천주교 신자로서 자부심을 느꼈다고 밝혔다. 평화방송 드라마 '성 김대건'에서는 차광수가 최양업 신부 및 신학생 역할을 맡았다.
5. 1. 배론성지
최양업은 1861년 6월 15일 영남 지방 사목 활동을 마치고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에 과로와 장티푸스로 40세에 문경에서 병으로 선종하였다. 그 후 제천시 배론에 안장되었으며, 일제강점기 때 비석과 묘비를 세우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이루지 못하다가 1945년 광복 이후 비석과 묘비를 세웠다.[1]5. 2. 드라마 제작
2008년 가톨릭평화방송에서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가 제작되었다. 주인공 최양업 신부 역은 원기준이 맡았고,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역은 박순천이 맡았다. 드라마는 최양업의 헌신적인 사목 활동과, 천주교 박해로 인해 부모를 잃은 인간적인 고뇌를 주로 다루었다.[12] 원기준은 드라마 출연을 계기로 천주교 잡지 '생활성서'와의 인터뷰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이라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하는 장면이 가장 힘들었지만, 천주교 신자로서 자부심을 느꼈다고 밝혔다. 평화방송 드라마 '성 김대건'에서는 차광수가 최양업 신부 및 신학생 역할을 맡아, 라틴어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대화하는 장면 등에 출연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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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eron Shrine
2016-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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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ical Sketch of Father Thomas Choe Yang-e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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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ti e Be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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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Thomas Choe, the second Korean priest, toward beat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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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E Asia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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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olics pray for canonization of 'St. Paul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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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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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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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시선 주교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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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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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평화방송 케이블 TV 드라마-최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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