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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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캐서린 파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왕비이자 아일랜드의 여왕이었다. 웨스트모어랜드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두 번의 결혼을 거쳐 헨리 8세와 결혼했다. 헨리 8세 사후에는 과거 연인이었던 토마스 시모어와 재혼했으나, 임신 중 산욕열로 사망했다. 종교 개혁에 관심을 가졌으며, 섭정으로 활동하며 잉글랜드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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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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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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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잉글랜드 왕비 겸 아일랜드 왕비 |
재위 기간 | 1543년 7월 12일 – 1547년 1월 28일 |
종교 | 개신교 |
인물 정보 | |
출생 | 1512년 8월 경 |
출생지 | 블랙프라이어스, 런던, 잉글랜드 |
사망 | 1548년 9월 5일 (36세) |
사망지 | 슈들리 성, 글로스터셔, 잉글랜드 |
매장일 | 1548년 9월 7일 |
매장지 | 슈들리 성 내 성 메리 예배당, 글로스터셔, 잉글랜드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토머스 파 경 |
어머니 | 모드 그린 |
배우자 | 에드워드 버 경 (1529년 결혼, 1533년 사망) 존 네빌, 제3대 래티머 남작 (1534년 결혼, 1543년 3월 2일 사망) 헨리 8세 (1543년 7월 12일 결혼, 1547년 1월 28일 사망) 토머스 시모어, 초대 서들리 남작 (1547년 결혼) |
자녀 | 메리 시모어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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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와 교육
캐서린 파는 1512년경 잉글랜드 북부의 귀족 가문인 파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토마스 파 경이며, 어머니는 모드 그린이다. 어머니 모드 그린은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의 시녀였으며, 캐서린 파의 이름은 대모이기도 했던 캐서린 왕비에게서 따온 것으로 여겨진다.
어머니의 세심한 관심 아래 캐서린은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대한 깊은 열정을 보였다. 그녀는 프랑스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으며, 이러한 학문적 소양은 훗날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초기에는 가톨릭 신앙 안에서 자랐으나, 점차 개신교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 1. 가문 배경
캐서린 파는 웨스트모어랜드 (현재 웨스트모어랜드와 퍼니스에 속함)의 켄달 영주였던 토마스 파 경과, 노샘프턴셔의 그린스 노턴 영주인 토마스 그린 경과 조앤 포지의 딸이자 공동 상속녀였던 모드 그린의 장녀로 태어났다. 초기에는 가톨릭교 신자로 자랐으나, 후에 개신교로 개종했다. 아버지 토마스 파 경은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었으며, 파 가문은 많은 기사를 배출한 잉글랜드 북부의 유력한 귀족 가문이었다. 캐서린에게는 훗날 초대 노샘프턴 후작이 되는 동생 윌리엄 파와 펨브로크 백작 부인이 되는 여동생 앤 파가 있었다. 아버지 토마스 경은 헨리 8세의 측근으로, 켄달 영주이자 노샘프턴셔 보안관, 보호구역 관리자, 가정 지출 감독관 등의 직책을 맡았다. 어머니 모드 그린은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의 가까운 친구이자 시녀였고, 캐서린 파의 이름은 대모이기도 했던 캐서린 왕비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캐서린은 1512년 8월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웨스트모어랜드의 켄달 성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졌으나, 당시 성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고[3] 어머니 모드 파가 임신 중 궁정에 머물렀던 점, 파 가문이 블랙프라이어스의 타운하우스에 거주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런던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겨진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며, 어머니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캐서린은 당대 다른 명문가 여성들처럼 교육을 받았으며, 학문에 대한 깊은 열정을 가졌다. 프랑스어, 라틴어 (직접 작문이 가능할 정도),[4] 이탈리아어에 능통했고, 왕비가 된 후에는 스페인어도 배웠다. 어린 시절 바느질보다 왕관과 홀을 잡고 싶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2. 2. 유년 시절
캐서린 파는 웨스트모어랜드 (현재 웨스트모어랜드와 퍼니스에 속함)의 켄달 영주인 토마스 파 경과, 노샘프턴셔의 그린스 노턴 영주인 토마스 그린 경과 조앤 포지의 딸이자 공동 상속녀인 모드 그린의 장녀였다.[3] 앤 불린처럼 캐서린도 가톨릭 신자로 자랐지만, 어느 시점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토마스 파 경은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었고, 파 가문은 많은 기사들을 배출한 유력한 북부 가문이었다. 캐서린에게는 동생 윌리엄과 여동생 앤이 있었다. 토마스 경은 헨리 8세의 측근이었으며, 여러 직책을 맡아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 캐서린의 어머니 모드 그린은 아라곤의 캐서린의 가까운 친구이자 시녀였으며, 캐서린 파는 그녀의 대모였던 캐서린 여왕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그녀는 1512년 8월경에 태어났다. 한때 캐서린 파가 웨스트모어랜드의 켄달 성에서 태어났다고 여겨졌으나, 당시 켄달 성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고[3] 어머니 모드 파가 임신 기간 동안 궁정에 머물렀기 때문에, 파 가문이 거주하던 블랙프라이어스의 타운하우스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캐서린의 아버지는 그녀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고, 그녀는 성장하면서 어머니와 가까이 지냈다.
캐서린의 초기 교육은 다른 명문가 여성들과 비슷했지만, 그녀는 평생 지속될 학문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그녀는 프랑스어, 라틴어 (직접 작문할 정도),[4] 이탈리아어에 능통했고, 여왕이 된 후에는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캐서린이 바느질을 싫어하며 "내 손은 실과 바늘이 아니라 왕관과 홀을 만지도록 정해져 있어요"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3. 첫 번째와 두 번째 결혼
캐서린 파는 1529년 에드워드 버그 경(Edward Burgh)과 처음 결혼했으나, 남편은 1533년 봄에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캐서린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이후 1534년 여름, 캐서린은 요크셔에 영지를 소유한 부유한 귀족인 존 네빌, 제3대 라티머 남작(John Neville, 3rd Baron Latimer)과 두 번째로 결혼했다.[28] 그러나 두 번째 남편 존 네빌 경 역시 1543년에 사망하면서, 캐서린 파는 다시 한번 과부가 되었다.
3. 1. 에드워드 버그 경과의 결혼 (1529-1533)
1529년, 캐서린은 17세의 나이로 에드워드 버그 경(Edward Burgh)과 결혼했다. 그는 에드워드 버그, 제2대 버그 남작의 손자였다. 일부 초기 전기에서는 캐서린이 더 나이가 많은 버그 경과 결혼했다고 잘못 기록하기도 했다. 1528년 12월 제2대 버그 남작이 사망한 후, 캐서린의 시아버지인 토마스 버그 경은 1529년 잉글랜드 의회에 버그 남작으로 소환되었다.캐서린의 첫 남편 에드워드 버그 경은 당시 20대였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토마스 키델의 봉토 수탁자로 일했고 치안 판사로도 활동했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 버그 경은 아들과 함께 린지 내 키턴 영지의 소크 관리인 직에 대한 생존자 공동 특허를 확보하기도 했다. 젊은 에드워드 버그 경은 1533년 봄에 사망했으며,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버그 남작 작위를 상속받지는 못했다.
3. 2. 존 네빌 경과의 결혼 (1534-1543)
1533년 봄, 첫 남편 에드워드 버로우 경과 사별한 캐서린 파는 1534년 여름, 아버지의 사촌인 존 네빌, 제3대 라티머 남작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 결혼으로 캐서린은 파 가문 출신으로 귀족 가문에 시집간 두 번째 여성이 되었다.존 네빌 경은 캐서린보다 나이가 거의 두 배 많았고, 이미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존과 마거렛이라는 두 자녀를 둔 상태였다. 그는 요크셔에 영지를 소유한 부유한 귀족이었지만, 워릭 백작 작위 계승 문제로 소송을 벌이며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캐서린은 이 결혼으로 자신만의 집과 작위, 그리고 남편을 통해 북부 지역에서의 지위와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라티머 경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했으며, 헨리 8세의 첫 혼인 무효와 앤 불린과의 재혼, 그리고 이에 따른 종교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그의 종교적 입장은 1536년 10월 링컨셔 봉기 때 위기를 초래했다. 가톨릭 반란군이 라티머 부부의 집 앞에 나타나 봉기에 동참하지 않으면 폭력을 가하겠다고 위협했고, 캐서린은 남편이 그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이후 1537년 1월, 은총의 순례로 알려진 봉기 동안 캐서린과 그녀의 계자녀들은 노스요크셔의 스네이프 성에 인질로 잡히는 고초를 겪었다. 반란군은 집을 약탈하고 런던에서 돌아오던 라티머 경에게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협박했다. 라티머 경은 성으로 돌아와 반란군을 설득하여 가족을 구출했지만, 이 사건은 가족 모두에게 큰 정신적 고통을 남겼다. 이 불안정한 시기를 겪으며 반란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게 된 것이 캐서린이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을 지지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봉기 이후, 국왕 헨리 8세와 토머스 크롬웰은 라티머 경이 반란군의 포로였는지 공모자였는지 의심했다. 만약 공모자로 간주되었다면 반역죄로 처형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할 위기였으며, 이는 캐서린과 계자녀들을 빈곤에 빠뜨릴 수 있었다. 국왕은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에게 편지를 보내 라티머 경이 반란 주동자 로버트 애스크를 비난하고 국왕에게 자비를 구하도록 압박했다. 라티머 경은 이에 따랐다. 반란 진압에 참여했던 캐서린의 오빠 윌리엄 파, 제1대 노샘프턴 후작와 삼촌 제1대 호턴 남작 윌리엄 파가 그의 구명을 도왔을 가능성이 높다. 처벌은 면했지만, 이 사건으로 라티머 경의 평판은 크게 훼손되었다.
이후 7년 동안 가족은 주로 남부에서 지냈다. 1542년, 라티머 경이 의회에 참석하면서 가족은 런던에서 시간을 보냈다. 캐서린은 궁정에서 오빠 윌리엄 파, 제1대 노샘프턴 후작와 언니 앤 파, 펨브로크 백작부인를 만났으며, 이곳에서 훗날 네 번째 남편이 되는 서들리 남작 제1대 토머스 시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궁정 생활을 통해 캐서린은 시골 영지와는 다른 분위기를 경험하며 패션, 보석 등 세속적인 유행과 더불어 새로운 종교적 흐름에도 눈뜨게 되었다.
1542년 겨울부터 라티머 경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캐서린은 1543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곁에서 간호했다. 라티머 경은 유언으로 캐서린을 딸 마거릿의 후견인으로 지정하고, 딸이 성년이 될 때까지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했다. 또한 캐서린에게 노샘프턴셔의 스토우 영지를 포함한 여러 재산에 대한 종신 권리를 유증했다. 캐서린은 남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으며, 그가 남긴 이름이 새겨진 신약성경을 평생 간직했다고 전해진다.
부유한 미망인이 된 캐서린은 남편 사후 북쪽 영지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새로운 기회를 모색했다. 그녀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헨리 8세의 첫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친구였던 인연을 활용하여, 아라곤의 캐서린의 딸인 레이디 메리와 관계를 다졌다. 1543년 2월, 캐서린은 메리의 가신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국왕 헨리 8세의 눈에 띄게 되었다. 비록 서들리 남작 제1대 토머스 시모어와 감정을 키워가고 있었지만, 국왕의 청혼을 받자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여겼다. 시모어는 국왕의 명으로 브뤼셀로 파견되었다.[5]
4. 잉글랜드 왕비 (1543-1547)
1543년 7월 12일, 캐서린 파는 햄프턴 궁전에서 헨리 8세와 결혼하여 그의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헨리 8세가 아일랜드 왕위 계승법 1542에 따라 아일랜드 왕 칭호를 채택한 이후 잉글랜드의 여왕이자 최초의 아일랜드 여왕이 된 인물이다. 캐서린은 서명 시 자신의 이름을 "Kateryn"으로 표기했다.[6]
왕비로서 캐서린 파는 노쇠해 가는 헨리 8세를 보살피는 한편, 그의 이전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들인 메리, 엘리자베스, 에드워드와 원만한 관계를 구축하고 그들의 교육 환경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그녀는 헨리 8세가 오랫동안 소원했던 두 딸과 화해하는 데 기여했으며, 자녀들이 궁정에서 함께 지내며 학문적 소양을 쌓도록 도왔다.
캐서린 파는 개신교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학문과 종교 개혁을 후원하는 등 지적인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 등 개혁 성향의 인물들과 교류했으며, 직접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신앙과 사상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녀의 저서 ''성경에서 발췌한 시편 또는 기도문''(1544)과 ''기도 또는 묵상''(1545)은 당대에 널리 읽혔으며, 특히 "국왕을 위한 기도"는 후대에 공동 기도문에 수록되어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11][12]
1544년 헨리 8세가 프랑스 원정을 떠났을 때에는 섭정으로 임명되어 국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군수품 조달, 재정 관리, 왕실 포고령 서명 등 국정 운영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스코틀랜드와의 외교 문제에도 관여했다. 이러한 경험과 그녀의 신념은 훗날 여왕이 되는 의붓딸 엘리자베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때때로 그녀의 개신교적 성향 때문에 보수 세력으로부터 이단으로 몰리는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기지를 발휘하여 이를 극복했다. 캐서린 파는 단순히 왕의 병간호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왕비로서 정치, 종교, 학문 등 다방면에 걸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당대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4. 1. 헨리 8세와의 만남과 결혼
캐서린 하워드가 처형된 지 1년 만인 1543년, 헨리 8세는 두 번의 결혼을 거쳐 과부가 된 캐서린 파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캐서린 파는 제인 시모어의 오빠인 토머스 시모어를 사랑하고 있었으나, 절대 권력자인 왕의 구애를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캐서린 파는 1543년 7월 12일 햄프턴 궁전에서 헨리 8세와 결혼식을 올렸다.[6] 그녀는 헨리가 아일랜드 왕위 계승법 1542에 따라 아일랜드 왕 칭호를 채택한 후 잉글랜드의 여왕이자 아일랜드 여왕이 된 첫 번째 왕비였다. 서명은 "Kateryn"으로 표기했다. 캐서린과 헨리 8세는 여러 공통 조상을 공유하는 먼 친척 관계이기도 했다.[6]
헨리 8세와 캐서린 파는 비교적 원만한 부부 관계를 유지했다. 두 사람 모두 음악과 춤, 화려한 옷차림을 즐겼고 서로에게 자주 선물을 주었다. 특히 캐서린 파는 헨리 8세가 다리의 염증으로 고통스러워할 때 무릎베개를 해주고 간호하는 등, 노쇠해 가는 왕을 보살폈다.
캐서린 파는 이해심 많고 인내심 강한 성품으로, 헨리 8세의 이전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들, 즉 메리와 엘리자베스 두 왕녀 및 왕세자 에드워드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떨어져 살던 왕녀들과 왕자를 궁정으로 불러들여 함께 살도록 주선했고, 그들의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캐서린 파 덕분에 아이들은 뛰어난 학자들 밑에서 공부할 수 있었으며, 특히 그녀가 고용한 개신교 학자 로저 아샴과 존 체크는 에드워드와 엘리자베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캐서린 파 자신도 학구열이 높아 왕비가 된 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캐서린 파는 개신교 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태도였다. 그녀는 성공회의 전례 개혁을 이끈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와 친분을 쌓았고, 개신교 학자들을 후원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성서를 직접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녀의 종교적 입장은 보수적인 가톨릭 세력, 특히 스티븐 가디너 주교와 대법관 라이오드슬리 등의 반발을 샀다. 그들은 캐서린 파를 이단으로 몰아 제거하려 했고, 한때 체포 영장이 발부되기도 했다.[15] 분노한 헨리 8세의 추궁 앞에서 캐서린 파는 종교 토론은 단지 왕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명하며 절대적인 복종을 약속했다. 왕의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캐서린 파는 앤 불린이나 캐서린 하워드와 같은 비극적인 최후를 피할 수 있었다.[15]
1544년 헨리 8세가 프랑스 원정을 떠난 동안(7월~9월), 캐서린 파는 섭정으로 임명되어 국정을 책임졌다. 그녀의 섭정 위원회에는 토마스 크랜머, 허트포드 백작, 그리고 그녀의 삼촌인 윌리엄 파 등 개혁 성향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어, 캐서린은 실질적인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 원정을 위한 군수품 조달과 재정 관리, 징집 업무를 처리했으며, 다섯 개의 왕실 포고령에 서명했다. 또한 북부 국경 지역의 사령관과 긴밀히 소통하며 스코틀랜드와의 복잡한 관계를 관리했다. 섭정으로서 보여준 그녀의 능력과 위엄, 그리고 종교적 신념은 훗날 엘리자베스 1세가 되는 의붓딸 엘리자베스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캐서린 파는 두 권의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1544년에 출판된 ''성경에서 발췌한 시편 또는 기도문''은 존 피셔 주교의 라틴어 작품을 번역한 것으로, 전쟁 중인 국가를 위한 기도와 왕을 위한 기도를 담고 있었다.[7][8] 이 책에 실린 "국왕을 위한 기도"는 나중에 ''공동 기도문''에 포함되어 현재까지도 영국 군주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11][12] 1545년에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바탕으로 한 ''기도 또는 묵상''을 출판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13][14] 엘리자베스 공주는 이 책을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헨리 8세에게 새해 선물로 바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캐서린 파를 단순히 헨리 8세의 병간호 역할에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19세기 역사가 애그니스 스트릭랜드로부터 시작된 편견에 가깝다. 데이비드 스타키와 같은 현대 역사가들은 캐서린 파가 왕비로서의 위엄을 지키며 정치, 종교, 학문 등 다방면에 걸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을 강조한다. 그녀는 분별력, 도덕성, 강한 종교적 신념을 지닌 인물이었으며, 의붓자녀들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이자 유능한 섭정, 그리고 당대의 지성인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4. 2. 왕실 가족과의 관계
캐서린 파는 이해심과 인내심을 바탕으로 헨리 8세의 자녀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노쇠해 가는 왕을 보살피는 동시에, 의붓자식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 공주, 그리고 왕세자 에드워드의 교육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버지 헨리 8세와 떨어져 지내던 자녀들은 캐서린 파 덕분에 다시 모여 살게 되었으며, 그녀는 자녀들이 뛰어난 학자들에게 교육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캐서린은 헨리 8세가 첫 두 결혼에서 얻은 딸들, 즉 메리 및 엘리자베스와 화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에드워드와도 원만한 관계를 발전시켰다.특히 캐서린 파는 개신교 학자 로저 애스컴(Roger Ascham)과 존 체크(John Cheke)를 직접 고용하여 에드워드와 엘리자베스의 학문적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캐서린 파 자신의 학구열도 높아 왕비가 된 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녀의 성품과 위엄, 종교적 신념 등은 훗날 엘리자베스 1세가 되는 의붓딸 엘리자베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자, 캐서린 파는 이전에 사랑했던 토머스 시모어와 결혼했다. 그녀는 엘리자베스 공주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함께 살며 가족을 이루었다. 그러나 남편 토머스 시모어는 왕위에 대한 야심을 품고 엘리자베스에게 부적절하게 접근했다. 캐서린 파가 시모어가 엘리자베스를 끌어안는 장면을 목격한 후, 엘리자베스는 다른 거처로 옮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서린 파와 엘리자베스는 이후에도 서신을 교환하며 관계를 이어갔다.
4. 3. 종교적 신념과 활동
캐서린 파는 가톨릭 신자로 자랐으나 점차 '새로운 신앙', 즉 개신교 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540년대 중반에는 개신교 신자라는 의심을 받을 정도였다. 그녀는 성공회의 전례를 성공회 기도서 제정으로 개혁한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와 가까이 지냈으며, 당시로서는 급진적으로 여겨지던 개신교 학자들을 후원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성서를 직접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그녀가 고용한 로저 아샴과 존 체크 같은 신교 학자들은 의붓자녀인 에드워드와 엘리자베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캐서린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저술 활동을 통해 드러내기도 했다. 1544년 4월에는 존 피셔 주교의 라틴어 저작을 번역한 ''성경에서 발췌한 시편 또는 기도문''을 익명으로 출판했다.[7]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 스코틀랜드와 전쟁 중이었는데, 이 책은 국민들의 기도를 통해 왕의 승리를 기원하는 강력한 선전물 역할을 했다.[7] 특히 책에 포함된 "국왕을 위한 기도"는 게오르크 비첼의 신성 로마 황제를 위한 기도와 에라스무스의 기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7][8] 1559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 의해 편집되어 공동 기도문에 포함되었다.[11] 이 기도는 오늘날에도 전 세계 성공회 공동체에서 영국 군주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12]
1545년 6월에는 두 번째 저서인 ''기도 또는 묵상''을 출판했다.[13] 이 책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 유명한 저작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바탕으로 일반 신자의 독백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으로,[14]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어린 엘리자베스 공주는 이 책을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로 직접 번역하여 손수 수놓은 표지를 씌워 새해 선물로 헨리 8세에게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캐서린의 개신교적 성향은 보수적인 가톨릭 세력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윈체스터 주교 스티븐 가디너와 대법관 토머스 리슬리 등 반-프로테스탄트 성향의 관료들은 그녀를 이단으로 몰아 제거하려 했다. 1546년, 이들은 왕을 설득하여 캐서린 파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받는 데 성공했다. 당시 유럽에는 헨리 8세가 캐서린의 친구인 서퍽 공작 부인 캐서린 브랜든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위기를 감지한 캐서린 파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녀는 헨리 8세를 찾아가 종교 문제에 대해 논쟁했던 것은 오직 왕의 지병인 다리 궤양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함이었을 뿐이라며 절대적인 복종을 맹세했다.[15] 이에 왕의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캐서린은 앤 불린이나 캐서린 하워드와 같은 비극적인 최후를 피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이 사실을 몰랐던 리슬리 대법관이 근위병을 이끌고 캐서린을 체포하려 하자, 오히려 헨리 8세의 분노를 사 파면당했다.
헨리 8세 사후인 1547년 말, 캐서린 파는 세 번째 책인 ''죄인의 애가''를 출판했다. 이 책에는 그녀의 강력한 개혁 사상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4. 4. 섭정으로서의 역할 (1544)
헨리 8세는 1544년 7월부터 9월까지 프랑스로 마지막 원정을 떠나면서, 캐서린 파를 섭정으로 임명하여 잉글랜드를 맡겼다. 캐서린의 섭정 위원회는 토마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 허트포드 백작, 그리고 캐서린의 특별한 요청으로 포함된 그녀의 삼촌 호턴 파 남작 윌리엄 파 등 그녀에게 우호적인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덕분에 캐서린은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며 자신의 판단에 따라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그녀는 헨리 8세의 프랑스 원정에 필요한 물품 조달, 재정 관리, 군대 소집 등을 책임졌으며, 다섯 건의 왕실 포고령에 직접 서명하기도 했다. 또한 스코틀랜드와의 복잡하고 불안정한 국경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북부 변경 지역의 책임자인 슈루즈베리 백작 프랜시스 탤벗과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상황을 관리했다. 섭정으로서 보여준 캐서린의 능력, 인품, 위엄, 그리고 그녀의 종교적 신념은 훗날 엘리자베스 1세가 되는 의붓딸 레이디 엘리자베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5. 헨리 8세 사후와 죽음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캐서린 파는 다시 과부가 되었다. 이후 그녀는 과거에 사랑했던 토머스 시모어와 재혼했다. 재혼 후 의붓딸 엘리자베스 왕녀를 잠시 맡아 길렀으나, 남편과의 문제로 엘리자베스는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 1548년 캐서린 파는 딸 메리 시모어(Mary Seymour)를 낳았으나, 출산 후 산욕열로 인해 그해 9월 5일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1. 토머스 시모어와의 재혼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과부가 된 캐서린 파는 마침내 과거에 사랑했던 토머스 시모어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캐서린 파는 의붓딸인 엘리자베스 왕녀를 불러들여 함께 살며 가족을 이루었다.그러나 토머스 시모어는 왕위를 넘보는 야심을 품고 엘리자베스 왕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캐서린 파는 토머스 시모어가 엘리자베스 왕녀를 부적절하게 끌어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 사건 이후 엘리자베스 왕녀는 다른 거처로 보내졌지만, 캐서린 파와 엘리자베스 왕녀는 이후에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갔다.
1548년 9월 5일, 캐서린 파는 딸 메리 시모어를 낳은 뒤 산욕열로 인해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5. 2. 엘리자베스 1세와의 관계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르자, 캐서린 파는 다시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이전에 사랑했던 토머스 시모어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캐서린 파는 의붓딸이었던 엘리자베스 왕녀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함께 살며 가족처럼 지냈다.그러나 남편 토머스 시모어는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어린 엘리자베스 왕녀에게 부적절하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캐서린 파는 결국 토머스 시모어가 엘리자베스 왕녀를 끌어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엘리자베스 왕녀는 캐서린 파의 집을 떠나 다른 거처로 보내졌다. 비록 함께 살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캐서린 파와 엘리자베스는 그 후로도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갔다.
5. 3. 임신과 죽음
헨리 8세 사후 캐서린 파는 1547년 이전에 사랑했던 토머스 시모어와 결혼하고 엘리자베스 왕녀를 불러들여 함께 살았다. 그러나 토머스 시모어가 엘리자베스 왕녀에게 부적절하게 접근하는 일이 발생하자, 캐서린 파는 엘리자베스 왕녀를 다른 거처로 보냈다. 이후 1548년 캐서린 파는 첫 아이인 딸 메리 시모어(Mary Seymour)를 낳았으나, 출산 후 산욕열로 인해 그해 9월 5일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 저술 활동
캐서린 파는 잉글랜드 왕비 중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출판한 인물이다.
7. 평가와 유산
캐서린 파가 남편 헨리 8세의 간호사 역할 이상을 하지 못했다는 대중적인 통념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주의자이자 초기 페미니스트였던 애그니스 스트릭랜드의 저술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역사학자 데이비드 스타키는 그의 저서 『여섯 명의 아내』에서 이러한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헨리 8세에게는 이미 수많은 의사가 있었으며, 왕비로서 막중한 기대를 받고 있던 캐서린 파가 직접 간호에 전념하는 것은 당시 튜더 시대의 관념에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캐서린의 분별력, 도덕적 정당성, 연민, 확고한 종교적 헌신, 강한 충성심과 헌신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찬사를 받게 했다. 여기에는 스타키, 페미니스트 운동가 캐런 린지, 안토니아 프레이저 여사, 앨리슨 웨어, 캐럴리 에릭슨, 앨리슨 플로든, 수잔 제임스, 린다 포터가 포함된다. 전기 작가들은 그녀를 의지가 강하고 솔직하며, 육체적으로 매력적이며, 심지어 상황에 따라 외설적인 언어를 사용하기도 했다고 묘사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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ラルフ・ネヴィル (初代ウェストモーランド伯)|初代ウェストモーランド伯爵ラルフ・ネヴィル]]の五男の曾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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