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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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후작은 호엔로에 가문의 방계 차남으로 태어나 프로이센 외교관이 되었으며, 코블렌츠 법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외교관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독일 통일을 지지했지만 프로이센화에는 반대했다. 바이에른 총리로서 북독일 연방과의 연합을 추진했으며,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후 독일 제국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제국 자유당 창설에 기여했고, 파리 주재 독일 대사, 알자스-로렌 총독을 거쳐 1894년부터 1900년까지 독일 제국 재상을 역임했다. 1901년 사망했으며, 그의 회고록과 관련된 연구를 통해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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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후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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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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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 각하 |
이름 | 클로트비히 카를 빅토어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
작위 | 후작 라티보르 및 코르바이의 왕자 |
출생일 | 1819년 3월 31일 |
출생지 | 로텐부르크안데어풀다, 헤센 선제후국, 독일 연방 |
사망일 | 1901년 7월 6일 |
사망지 | 바트라가츠, 스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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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마리 폰 자인-비트겐슈타인-자인 공주 (1847년 2월 16일 결혼, 1897년 12월 11일 사별) |
자녀 | 필리프 에른스트 엘리자베트 콘스탄체 레오닐레 스테파니 마리 안토니에 알베르트 알렉산더 모리츠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무소속 |
이전 소속 정당 | 제국 자유당 (1871년–1874년) |
독일 제국 총리 | |
임기 시작 | 1894년 10월 29일 |
임기 종료 | 1900년 10월 17일 |
군주 | 빌헬름 2세 |
부총리 | 카를 하인리히 폰 뵈티허 아르투어 폰 포자도프스키-베너 |
이전 총리 | 레오 폰 카프리비 |
다음 총리 | 베른하르트 폰 뷜로 |
프로이센 왕국 수상 | |
임기 시작 | 1894년 10월 29일 |
임기 종료 | 1900년 10월 17일 |
군주 | 빌헬름 2세 |
이전 수상 | 보토 추 오일렌부르크 |
다음 수상 | 베른하르트 폰 뷜로 |
독일 제국 외무부 장관 | |
임기 시작 | 1880년 4월 20일 |
임기 종료 | 1880년 9월 1일 |
군주 | 빌헬름 1세 |
총리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이전 장관 | 요제프 마리아 폰 라도비츠 |
다음 장관 | 프리드리히 추 림부르크-슈티룸 |
바이에른 왕국 수상 | |
임기 시작 | 1866년 12월 31일 |
임기 종료 | 1870년 3월 8일 |
군주 | 루트비히 2세 |
이전 수상 | 루트비히 폰 데어 포르텐 |
다음 수상 | 오토 폰 브라이-슈타인부르크 |
독일 제국 의회 의원 | |
임기 시작 | 1871년 |
임기 종료 | 1881년 |
선거구 | 오버프랑켄 3 |
기타 직책 | |
임기 시작 | 1885년 11월 5일 |
임기 종료 | 1894년 10월 31일 |
임기 시작 | 1871년 3월 23일 |
임기 종료 | 1874년 10월 29일 |
임기 시작 | 1871년 3월 23일 |
임기 종료 | 1881년 |
임기 시작 | 1866년 12월 31일 |
임기 종료 | 1870년 3월 8일 |
2. 생애
클로트비히는 헤센 로텐부르크 안 데어 풀다의 호엔로에 공작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공작은 가톨릭 신자였고, 어머니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콘스탄체 공주는 루터교 신자였다. 당시 관례에 따라 클로트비히와 형제들은 아버지의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양육되었다.
청일 전쟁 이후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간섭 당시 독일 제국 재상을 지냈다.
호엔로에 제후가 출신으로, 장남은 프로이센 귀족원 의장 라티보르 공빅토르 1세, 차남은 바이에른 총리이자 독일 제국 재상 클로트비히, 넷째 아들은 로마 가톨릭 추기경구스타프 아돌프, 여섯째 아들은 오스트리아 궁내 장관 콘스탄틴이었다. 요절한 동생을 제외한 네 명이 각각 출세했기 때문에, 친족들은 12세기 프랑스의 무훈시 『에몽 공의 네 아들(Quatre Fils Aymon)』에 비유하기도 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클로트비히는 바이에른 의회에서 개신교를 신봉하는 프로이센과의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는 권력 약화를 우려하여 반대했지만, 프로이센 총리 비스마르크가 거액의 빚을 갚기 위해 벨페른 기금(프로이센의 하노버 병합 후 하노버 왕가 재산의 대부분)을 은밀히 제공하면서 바이에른은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제국 구성국이 되었다.[1]
1866년 12월 31일 바이에른 총리 겸 외무 장관에 임명된 클로트비히는 바이에른 중심의 남독일 제후국과 프로이센 중심의 북독일 연방 간 효과적인 통합을 추진했다. 그는 비스마르크 다음으로 중요한 정치가로서 바이에른 군 재편, 남독일 군사 동맹 실현, 1868년 4월 28일 부의장으로 선출된 관세 의회(Zollparlament) 창설을 주도했다.[1]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과 관련, 클로트비히는 교황 비오 9세의 초교파적 입장에 반대하며, 형제인 라티보르 공작 및 구스타프 아돌프 츠 호엔로에-실링스퓌르스트 추기경과 함께 바티칸을 근대 국가와 대립시키는 교황의 방침이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1]
1871년 3월 23일 제국 의회 의원 및 부의장으로 선출된 클로트비히는 자유주의 라이히당(Liberale Reichspartei) 결성에 기여했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반교황주의 정책(문화 투쟁)을 지지했으며, 1872년 비스마르크는 그의 동생 구스타프 아돌프 추기경을 프로이센 특사로 임명하려 했으나 교황 비오 9세가 거부했다. 1874년 클로트비히는 파리 주재 독일 대사로 임명되었고, 1878년 베를린 회의에 독일 대표로 참석했다. 1880년 베른하르트 에른스트 폰 뷔로 외무 장관 사망 후 비스마르크 부재 시 프로이센 및 독일 외무 장관 대행을 맡았다.
1885년 알자스-로렌 총독으로 발탁된 클로트비히는 비스마르크의 강제 조치에 부정적이었지만, 융화적인 성격으로 알자스-로렌 주민들을 독일 지배에 순응시키는 데 기여했다.
1894년 10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요청으로 레오 폰 카프리비 후임 프로이센 총리 겸 독일 제국 재상에 취임했다. 빌헬름 2세의 측근 오이렌부르크 공작 필리프는 보토 즈 오이렌부르크를 후임으로 추천했으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홀슈타인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후 오이렌부르크 공작은 클로트비히를 추천했다. 그러나 재상 취임 후에도 오이렌부르크 공작은 빌헬름 2세에게 베른하르트 폰 뷔로가 진정한 재상감이라고 말했다.[1]
클로트비히는 내각 각료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의회나 공식 석상에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외무장관 아돌프 마르샬 폰 비버슈타인을 프로이센 국무장관에 임명하여 프로이센 내각과 제국 의회에서 대변인 역할을 맡겼으나, 비버슈타인은 황제의 외교 정책 간섭과 농민 반대로 1897년 해임되고 베른하르트 폰 뷔로가 취임했다. 같은 해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해군 장관 임명 등 인사 개편으로 클로트비히의 권한은 약화되었고, 제국주의적 세계 정책과 해군력 증강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 정치적 무력화를 인식했지만, 불명예스러운 퇴진을 원치 않아 자신의 존재가 황제 활동에 제약이 되기를 원했다. 이러한 소극적 태도로 '그림자 재상(Schattenkanzler)'이라고 불렸다.[1]
1900년 10월 17일 제국 재상직을 사임한 클로트비히는 1901년 7월 6일 스위스 바트 라가츠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클로트비히는 헤센 로텐부르크 안 데어 풀다의 호엔로에 공작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는 가톨릭 신자였고, 어머니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콘스탄체 공주는 루터교 신자였다. 당시 관례에 따라 클로트비히와 그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양육되었다.클로트비히는 가문의 방계 차남이었기에 직업을 가져야 했다. 그는 고모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페오도라 공주(빅토리아 여왕의 이복 여동생)의 영향으로 잠시 영국 육군 장교 임관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이센 외교관으로 진출하기로 결정했다.
클로트비히는 프로이센 공무원 하위 직책에서 수년간 근무해야 하는 예비 단계를 면제해 달라고 신청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국왕은 이를 거절했다. 그는 코블렌츠 법원에서 청강생으로 법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843년 9월 레페렌다르가 되었고,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에서 몇 달간 여행한 후 1844년 5월 13일 포츠담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이 시기는 그에게 실무 경험뿐만 아니라 프로이센 체제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며 자유주의를 확고히 하는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다. 몽둥이로 계몽을 전파하려는 프로이센의 원칙은 그에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는 최고위층의 혼란과 명확한 아이디어의 결핍, 정부 견해에 동의하는 것을 국가에 대한 충성 시험으로 삼으려는 경향을 인식했다. 그는 1848년 혁명 4년 전인 1844년 6월 25일 일기에 "사소한 원인만 있어도 우리는 봉기를 겪게 될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또 다른 기회에 "자유 언론은 필수적이며, 진보는 국가 존재의 조건이다"라고 적었다. 그는 열렬한 독일 통일 옹호자였고 프로이센을 그 목표 달성을 위한 도구로 여겼지만, 전반적으로 독일의 "프로이센화"에는 반대했다.
클로트비히는 여섯 아들 중 둘째였다. 1834년 외삼촌이자 헤센-로텐부르크의 영지백인 빅토르 아르마데우스가 사망하면서 그의 영지를 조카들에게 물려주었다. 1840년이 되어서야 이 영지 분배가 결정되었다. 1840년 10월 15일, 클로트비히의 형 빅토르 모리츠 카를이 호엔로에-실링스퓌르스트 영주 권리를 포기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 의해 라티보르 공작이자 코르베이 공이 되었다. 동시에 클로트비히는 라티보르와 코르베이 공작 칭호를 추가로 받았다. 또한 에르푸르트의 프로이센 행정 구역에 있는 트레푸르트 영주직도 받았다.
1841년 1월 14일,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공이 사망했다. 차남이었던 그는 호엔로에-실링스퓌르스트 공(Fürst)으로 계승했어야 했지만, 셋째 형 필리프 에른스트(1820년 5월 24일 ~ 1845년 5월 3일)에게 권리를 포기했고, 형이 사망할 경우 그에게 다시 돌아오는 조건이었다. 1845년 5월 3일, 필리프 에른스트가 사망했고, 클로트비히는 호엔로에-실링스퓌르스트의 7대 공작으로 계승했다. 그는 바이에른 제국 의회 상원 의원이었다. 이 지위는 프로이센에서의 정치 경력과 양립할 수 없었다. 1846년 4월 18일, 바이에른 제국 의회 의원 자리에 앉았고, 그해 6월 26일 프로이센에서 공식적으로 면직되었다.
2. 2. 가문의 작위 및 영지 상속
클로트비히는 헤세 로텐부르크 안 데어 풀다의 호엔로에 공작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공작은 가톨릭 신자였고, 어머니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콘스탄체 공주는 루터교 신자였다. 당시 관례에 따라 클로트비히와 형제들은 아버지의 신앙으로 양육되었다.1834년 외삼촌이자 헤센-로텐부르크의 영지백인 빅토르 아르마데우스가 사망하면서 그의 영지를 조카들에게 물려주었다. 1840년 10월 15일, 클로트비히의 형인 호엔로에-실링스퓌르스트의 빅토르 모리츠 카를은 호엔로에-실링스퓌르스트 영주로서의 권리를 포기했고,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 의해 라티보르 공작이자 코르베이 공이 되었다. 동시에 클로트비히는 라티보르와 코르베이 공작 칭호를 추가로 받았으며, 에르푸르트의 프로이센 행정 구역에 있는 트레푸르트의 영주직도 받았다.
1841년 1월 14일,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공이 사망했다. 차남이었던 클로트비히는 호엔로에-실링스퓌르스트 공(Fürst)을 계승해야 했지만, 셋째 형인 필리프 에른스트(1820년 5월 24일 ~ 1845년 5월 3일)에게 권리를 포기했다. 단, 형이 사망할 경우 그에게 다시 돌아오는 조건이었다. 1845년 5월 3일, 필리프 에른스트가 사망했고, 클로트비히는 호엔로에-실링스퓌르스트의 7대 공작으로 계승했다. 그는 바이에른 제국 의회의 상원 의원이었다. 1846년 4월 18일, 바이에른 제국 의회 의원 자리에 앉았고, 그해 6월 26일 프로이센에서 공식적으로 면직되었다.
2. 3. 바이에른 총리 시절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클로트비히는 바이에른 제국 의회에서 주로 개신교를 믿는 프로이센과의 더 긴밀한 연합을 주장했다.[1]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 국왕은 자신의 권력 약화에 반대했지만, 결국 비스마르크가 그의 막대한 부채를 갚도록 하기 위해 ''벨펜 기금''(프로이센이 하노버를 병합한 후 하노버 충성파와 싸우기 위해 사용된 왕족 하노버 왕가의 막대한 재산)에서 거액을 비밀리에 그에게 증여한 후 설득되었다.[1]1866년 12월 31일, 클로트비히는 왕실 및 외교부 장관이자 장관 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1] 클로트비히의 아들 알렉산더에 따르면(Denkwurdigkeiten, i. 178, 211) 클로트비히의 장관 임명은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선동으로 이루어졌다.[1]
클로트비히는 바이에른 정부 수장으로서 남부 독일 국가와 북독일 연방의 효과적인 연합을 위한 기반을 찾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1] 그는 재임 기간 중 3년 동안 비스마르크 다음으로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가였다.[1] 그는 프로이센 모델에 따라 바이에른 군대를 재편하고, 남부 국가들의 군사적 연합을 이루었으며, 1868년 4월 28일 부의장으로 선출된 관세 의회(Zollparlament)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과 관련하여 발생한 혼란 속에서 클로트비히는 울트라몬타니즘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1] 그는 그의 형제인 라티보르 공작과 구스타프 아돌프 추기경 공작과 함께 교황 비오 9세가 교회를 현대 국가에 반대하는 정책은 둘 다 파멸로 이어질 것이며, 교황 무류성 교리의 정의는 교회를 오류 목록 (1864)의 선언에 돌이킬 수 없이 얽매이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1]
그는 이러한 견해를 요한 요제프 이그나츠 폰 델린거가 작성한 로마 가톨릭 강대국에 보내는 회람 서한(1869년 4월 9일)에 담아 공의회에 대사를 파견하고 교리의 정의를 막기 위해 연합할 권리를 행사하도록 요청했다.[1] 그러나 주요 강대국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개입을 꺼렸고, 클로트비히의 행동의 유일한 실질적인 결과는 바이에른에서 강력한 울트라몬타니즘 정당이 그를 반대하여 바이에른의 독립을 프로이센에 팔아넘겼다고 비난하는 바이에른 애국자들과 연합했다는 것이다.[1] 이 연합은 그에게 너무 강력했다. 그가 교육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제출한 법안이 부결되었고, 1869년 선거에서 그에게 불리하게 되었으며, 국왕의 지속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1870년 3월 7일).[1]
2. 4. 독일 제국에서의 활동
클로트비히는 공직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뮌헨과 베를린에서 그의 개인적인 영향력은 매우 컸다. 이는 그의 견해를 담고 바이에른 의회에서 수용된 북독일 연방과 바이에른 간의 유리한 조약 조건에 상당 부분 기인했다. 그는 독일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71년 3월 23일에는 국회 부의장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새로운 제국을 지지하고, 자유주의 노선에 따라 내부 발전을 보장하며, 가톨릭 중앙당에 반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제국 자유당(Liberale Reichspartei)이라는 새로운 그룹을 창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클로트비히는 처음부터 비스마르크의 반교황 정책(소위 '문화 투쟁')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그가 직접 주요 노선(예수회 금지 등)을 제안했다. 구 가톨릭의 동기에 공감했지만, 교회 개혁의 유일한 희망은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들과 합류하지 않았다. 1872년 비스마르크는 클로트비히의 동생인 추기경 구스타프 아돌프 폰 호엔로에실링스퓌르스트를 교황청 주재 프로이센 특사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지만, 교황 비오 9세는 이를 거부했다.
1873년, 비스마르크는 클로트비히를 해리 폰 아르님 백작의 후임으로 파리 주재 독일 대사로 선택했고, 그는 그곳에서 7년 동안 머물렀다. 1878년에는 독일 대표 3인 중 한 명으로 베를린 회의에 참석했다. 1880년, 독일 외무부 장관 베른하르트 에른스트 폰 뷜로 (1879년 10월 20일 사망)가 사망한 후, 클로트비히는 질병으로 부재 중인 비스마르크를 대신하여 외무부의 임시 수장이자 대표로 베를린으로 소환되었다.
1885년, 클로트비히는 에드윈 프라이헤르 폰 만토이펠의 후임으로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 이후 합병된 알자스-로렌 총독으로 선출되었다. 이 직무에서 그는 1887년과 1888년에 비스마르크가 도입한 강압적인 조치를 수행해야 했지만, 대체로 그것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의 타협적인 성향은 알자스-로렌 주민들이 독일 통치에 순응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 5. 독일 제국 총리 시절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는 1894년 10월, 빌헬름 2세의 요청으로 레오 폰 카프리비의 뒤를 이어 독일 제국 총리에 취임했다.[1] 황제의 측근 필리프 추 오이렌부르크 공은 사촌 보토 추 오이렌부르크를 후임으로 추천했으나, 독일 외무부 정치국장 프리드리히 폰 홀슈타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오이렌부르크 공은 과거 자신의 상관이었던 클로트비히를 총리로 추천했고, 빌헬름 2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오이렌부르크 공은 클로트비히가 총리가 된 후에도 빌헬름 2세에게 베른하르트 폰 뷜로가 진정한 총리감이라고 계속해서 말했다.[1]클로트비히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내각 각료들에게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했으며, 의회나 공식 석상에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1] 그는 외무장관 아돌프 마르샬 폰 비버슈타인을 프로이센 국무장관에 임명하여 프로이센 내각과 제국 의회에서 자신의 대변인 역할을 맡겼다. 그러나 비버슈타인은 외교 정책에 대한 황제의 간섭과 옥수수 관세 인하 문제로 농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1897년 해임되고, 베른하르트 폰 뷜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1]
같은 해, 빌헬름 2세는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를 해군 장관에 임명하는 등 대대적인 인사 개편을 단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인사 조치는 클로트비히의 권한을 약화시켰고, 그는 제국주의적 세계 정책과 해군력 증강 경쟁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1] 그는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과 영국과의 관계 악화 (1896년 크루거 전보, 1899년 사모아 위기) , 의화단 운동 진압 등 주요 외교 현안에서도 소외되었다.[1]
클로트비히는 황제의 국정 개입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며, 프로이센 군사법 개혁(1898년)과 협회법 개정(1899년)을 추진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독일 민법(1896년)이 제정되기도 했다.[1]
1900년 10월 17일, 클로트비히는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베른하르트 폰 뷜로가 그의 뒤를 이었다.[1]
직책 | 재임자 | 재임 기간 | 정당 |
---|---|---|---|
총리 |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 1894년 10월 29일 – 1900년 10월 17일 | 무소속 |
부총리 겸 내무부 장관 | 카를 폰 뵈티허 | 1890년 3월 20일 – 1897년 7월 1일 | 무소속 |
아르투어 폰 포사도프스키-베흐너 | 1897년 7월 1일 – 1907년 6월 24일 | 무소속 | |
외무부 장관 | 아돌프 폰 비에버슈타인 | 1890년 3월 26일 – 1897년 10월 20일 | 무소속 |
베른하르트 폰 뷜로 | 1897년 10월 20일 – 1900년 10월 16일 | 무소속 | |
법무부 장관 | 루돌프 아르놀트 니에베르딩 | 1893년 7월 10일 – 1909년 10월 25일 | 무소속 |
해군 장관 | 프리드리히 폰 홀만 | 1890년 4월 22일 – 1897년 6월 18일 | 무소속 |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 1897년 6월 18일 – 1916년 3월 15일 | 무소속 | |
우편부 장관 | 하인리히 폰 슈테판 | 1890년 3월 20일 – 1897년 7월 1일 | 무소속 |
빅토르 폰 포드비엘스키 | 1897년 7월 1일 – 1901년 5월 6일 | 무소속 | |
재무부 장관 | 아르투어 폰 포사도프스키-베흐너 | 1893년 9월 1일 – 1897년 7월 1일 | 무소속 |
막스 폰 틸만 | 1897년 7월 1일 – 1903년 8월 23일 | 무소속 |
2. 6. 사망
1901년 7월 6일 바트 라가츠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가족
1847년 2월 16일, 프랑크푸르트의 뢰델하임에서 루트비히 추 자인-비트겐슈타인-자인 후작의 장녀 마리Marie zu Sayn-Wittgenstein|마리 추 자인-비트겐슈타인de(1829–1897)와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일대의 광대한 영지를 상속받은 마리는 클로트비히와 결혼한 후에도 종종 이곳을 방문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러시아 국내법에 의해 외국인의 토지 소유가 허용되지 않게 되자 이 영지는 매각되었다.
클로트비히와 마리의 여섯 자녀는 다음과 같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엘리자베트Elisabeth|엘리자베트de | 1847년 11월 30일 실링스퓌르스트 | 1915년 10월 26일 알트아우스제 | |
슈테파니Stephanie|슈테파니de | 1851년 7월 6일 실링스퓌르스트 | 1882년 3월 18일 뮌헨 | 1871년 4월 12일 실링스퓌르스트에서 쇤보른-비젠트하이트 백작 아르투어 폰과 결혼 |
필리프 에른스트 | 1853년 6월 5일 실링스퓌르스트 | 1915년 12월 26일 바트 라이헨할 | 1882년 1월 10일 빈에서 카리클레아 입실란티스Χαρίκλεια Υψηλάντη|카리클레아 입실란티el(1863년 10월 8일 파리 출생 – 1912년 6월 22일 실링스퓌르스트 사망)와 결혼. 이후 1913년 8월 6일 에든버러에서 헨리에테 긴드라Henriette Gindra|헨리에테 긴드라de(1884년 10월 7일 빈 출생 – 1952년 5월 15일 인스브루크 사망)와 비정상 결혼. 헨리에테 긴드라는 1914년 7월 10일 폰 헬베르크 부인으로 작위 수여. |
알베르트Albert|알베르트de | 1857년 10월 14일 실링스퓌르스트 | 1866년 4월 13일 뮌헨 | |
모리츠 | 1862년 8월 6일 린다우 | 1940년 2월 27일 실링스퓌르스트 | 1893년 8월 19일 딕에서 로자 추 잘름-라이퍼샤이트-크라우트하임 운트 딕Rosa Altgräfin zu Salm-Reifferscheidt-Krautheim und Dyck|로자 알트그레핀 추 잘름-라이퍼샤이트-크라우트하임 운트 디크de (1868년 4월 12일 보덴호 근처 헤르슈베르크 출생 – 1942년 12월 1일 뮌헨 사망)와 결혼 |
알렉산더 | 1862년 8월 6일 린다우 | 1924년 5월 16일 바덴바일러 | 1895년 5월 16일 쾰른에서 에마누엘라 갈로네 데이 프린치피 디 트리세 몰리테르노Emanuela Gallone dei principi di Tricase Moliterno|에마누엘라 갈로네 데이 프린치피 디 트리카세 몰리테르노it (1854년 2월 19일 나폴리 출생 – 1936년 3월 26일 나폴리 사망)와 결혼 |
4. 유산 및 평가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후작에 대한 평가는 그의 회고록과 관련 자료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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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Prince Hohenlohe Dead. Ex-Chancellor of Germany Expires in Switzerland. Was Eighty-two Years Old. Kaiser Likely to Postpone Trip to Norway in Order to Attend the Fune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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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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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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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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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Königlich Preussische Ordenslis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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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Hof- und Staatshandbuch der Österreichisch-Ungarischen Monarchie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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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of- und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s Bayern: 1877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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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f- und Staats-Handbuch des Großherzogtum Ba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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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f- und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s Bayern: 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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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es Grand'Croix de la Légion d'honneur de 1805 à nos jours. Titulaires français et étrangers
Archives &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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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Calendario generale del Regno d'Italia
https://books.google[...]
Unione tipografico-edit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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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Almanach de Got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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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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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taatshandbuch für den Königreich Sachsen: 1901
Hein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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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Guía Oficial de Españ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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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of- und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 Württem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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