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키루스의 교육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키루스의 교육》은 크세노폰이 이상적인 군주로 묘사하기 위해 키루스 2세의 일대기를 재구성한 작품이다. 초기 소설, 전기, 리더십 선언문 등으로 해석되며, 아테네 엘리트층에게 정치적,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고자 쓰였다. 본서는 키루스의 생애를 다루지만,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묘사되거나 저자의 정치 철학적 견해가 반영되어 있다. 이 작품은 고대 시대에 널리 존경받았으며, 군주론 장르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고대 그리스의 군사 책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전쟁을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서술하여 서양 역사 서술과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 큰 영향을 미친 미완의 역사서이다.
  • 고대 그리스의 군사 책 - 아나바시스 (크세노폰)
    《아나바시스》는 크세노폰이 키루스 2세의 왕위 찬탈 원정과 쿠낙사 전투 후 그리스 용병 만 명의 귀환 여정을 기록한 작품으로, 고대 그리스 군사와 소아시아에 대한 사료이며, 명료한 문체로 학습 교재 및 다양한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 크세노폰의 작품 - 헬레니카
    헬레니카는 크세노폰이 저술한 고대 그리스 역사서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의 역사를 다루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종결, 스파르타의 패권, 테베의 부상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 크세노폰의 작품 - 아나바시스 (크세노폰)
    《아나바시스》는 크세노폰이 키루스 2세의 왕위 찬탈 원정과 쿠낙사 전투 후 그리스 용병 만 명의 귀환 여정을 기록한 작품으로, 고대 그리스 군사와 소아시아에 대한 사료이며, 명료한 문체로 학습 교재 및 다양한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 키루스 2세 - 제2성전
    제2성전은 키루스 2세의 칙령으로 재건되어 헤로데 대왕 때 확장된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전이었으나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고, 이후 유대교와 아브라함계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키루스 2세 - 캄비세스 2세
    캄비세스 2세는 키루스 2세의 뒤를 이어 아케메네스 제국의 두 번째 왕으로 즉위하여 이집트를 정복했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 원정과 종교 정책에 대한 논란, 그리고 사망 원인에 대한 여러 학설이 있다.
키루스의 교육
개요
크세노폰 흉상
크세노폰 흉상
저자크세노폰
그리스어 명칭Κύρου Παιδεία
로마자 표기Kýrou Paideía
라틴어 명칭Cyropaedia
주제키루스 2세의 생애와 교육
장르전기, 역사, 철학
내용
구성8권
내용 설명키루스 2세의 어린 시절부터 통치, 죽음까지를 다룬 가상의 전기
특징
성격역사적 정확성보다는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을 제시하는 데 중점
영향후대 정치철학 및 교육 사상에 큰 영향
참고군주론, 통치론 등 후대 정치 이론에 영향

2. 체제와 내용

크세노폰키루스 대왕의 일대기를 재구성하여 이상적인 군주상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키루스의 교육》이다. 이 책은 총 8권으로, 크세노폰의 저작 중 가장 방대하다.[3] 《키루스의 교육》은 이상적인 통치자의 교육을 묘사하는 이야기이며,[3] 초기 소설, 전기, 리더십 지침서 등으로 해석된다.[4] 이 작품은 아테네 엘리트층 독자들에게 정치적,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쓰였다.[5]

대부분의 학자들은 크세노폰이 이 작품을 역사적 텍스트로 쓰지 않았다고 본다.[6] 《키루스의 교육》은 고전 장르에 속하지 않으며, 초기 소설과 약간 유사할 뿐이다.[5] 아케메네스 왕조 역사의 자료로서 타당성은 여러 차례 의심받았으며,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묘사가 부정확한 것으로 밝혀졌다.[6] 예를 들어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키루스가 전사했다고 나오지만, 이 책에서는 병사했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키루스의 교육》이 키루스 대왕의 성격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주장도 있다.[7] 이 작품은 키루스를 예술적으로 묘사하는데, 일부 학자들은 훌륭한 리더십에 대한 역사적 기억 없이는 이렇게 긍정적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7] 크세노폰(기원전 431년 – 기원전 355년)은 키루스(기원전 580년 – 기원전 530년)와 동시대인이 아니었으며, 페르시아에 대한 정보 중 일부는 후기 아케메네스 궁정에서 일어난 사건에 기반했을 가능성이 있다. 크세노폰은 《만 명》 중 한 명으로 페르시아 내전에 참전했고, 《아나바시스》에서 이를 회고했다.

본서의 키루스는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 2세이며,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에 나오는 키루스와는 다른 인물이다.

키루스 대왕의 부조, 파사르가데에서 찍은 ''키루스의 교육''의 주제.


본서에서 키루스는 크세노폰에 의해 이상화된 인물로, 저자 특유의 정치 철학적 견해가 나타난다. 따라서 저자의 창작이나 역사적 사실 개변이 있으며, 아나바시스나 헬라스사 같은 역사서와는 다르다.

2. 1. 각 권별 내용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교육》에서 키루스 대왕의 일대기를 재구성하여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 책은 8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세노폰의 저술 중 가장 긴 부분을 차지한다. 고대 그리스 저술의 특성상 각 권의 분량은 현대의 책보다 짧은 편이다. 한국어판에서는 각 권이 약 50~60쪽 분량이다.

2. 1. 1. 1권: 키루스의 어린 시절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교육》 서문에서 "그의 출신이 어떠하며 본성적 자질이 어떤지, 그리고 어떤 종류의 교육을 받아서 사람을 다스리는 데 그토록 탁월했는지 조사했다(1.6)."라고 밝히며, 훌륭한 통치자가 갖춰야 할 덕목을 탐구하고자 하는 동기를 드러낸다.[3] 이 작품은 키루스 대왕의 일대기를 통해 이상적인 통치자의 교육을 묘사하며, 초기 소설, 전기, 리더십 지침서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된다.[4] 특히 아테네 엘리트층 독자들에게 정치적,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고자 했다.[5]

1권에서는 키루스가 페르시아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활동을 하는지 다룬다. 페르시아의 청년 귀족 남성들은 밤에 공공건물을 지키는 등 절제와 의무를 강조하는 교육을 받았다. 이는 스파르타의 엄격한 교육과 유사하지만, 그만큼 잔혹하지는 않았다. 크세노폰은 이를 이상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키루스는 12세부터 외가인 메디아아스티아게스 왕 밑에서 자랐다. 16세 무렵, 아시리아 왕이 메디아 국경을 넘어 군사행동을 일으키자, 키루스는 처음으로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전투 후 페르시아로 돌아온 키루스는 청년반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후 아시리아가 메디아를 침공하려 하자, 아스티아게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키루스의 외삼촌 키악사레스는 페르시아에 원군을 요청한다. 키루스는 원군의 사령관이 되어 아버지로부터 전쟁에 대한 조언을 듣는다.[8]

학자들은 크세노폰이 묘사한 제국 이전 페르시아의 교육이 스파르타의 전통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한다. 비록 《키루스의 교육》이 역사적 사료로서의 한계는 있지만,[6] 키루스 대왕의 긍정적인 묘사는 훌륭한 리더십에 대한 역사적 기억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7] 크세노폰은 《아나바시스》에서 페르시아 내전에 참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키루스의 교육》에서 키루스 대왕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묘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1594년 판

2. 1. 2. 2권: 군대의 재조직

메디아에 도착한 키루스는 평민 병사들에게 귀족 병사들과 동일한 무장을 지급하고 포상 경쟁을 붙였으며, 5와 10의 배수로 병졸들을 묶어 편제를 만드는 등 군사 개혁을 실시한다.[9] 이때 지급된 무장은 페르시아의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의 것에 가깝다고 한다.[9] 인도의 사신이 등장하기도 한다.[9] 키루스는 전공 보상에 있어서 비효율이나 평민 병사가 부당하게 취급되는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한다.[9]

키루스는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소모전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언급하며, 더 질 좋은 군대로 승리하기 위해 경무장 원거리 부대 중심의 일반적인 전술 대신 강력한 근접전 부대 중심으로 군대를 개편하기로 결정한다.[9] 병사들은 가슴에 흉갑, 왼팔에 방패, 오른손에 검 또는 전투 도끼를 지급받는다.[9]

페르시아 군대는 키루스에 의해 근접전 전투 훈련을 받는다.[9] 그는 부대 병사들이 함께 생활하며 유대감을 형성하도록 명령하고, 모든 훈련을 마칠 때까지 병사들에게 음식을 주지 않는 등 군사 개혁을 실시한다.[9] 병사의 노력 정도에 따라 보상이 결정되며, 군대의 진척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장교들과 회의가 열린다.[9] 키루스는 군대가 새로운 전술을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9]

2. 1. 3. 3권: 아르메니아와 스키타이 정복: 첫 번째 위대한 전투

키루스는 아르메니아를 진압하고 아르메니아 왕을 재판정에 세운다. 이때 아르메니아 왕의 아들 티그라네스는 키루스에게 아버지를 처벌하는 것보다 동맹으로 삼는 것이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설득한다. 그는 힘에 의한 굴복보다 실질적인 이익을 강조하며, 아르메니아가 키루스의 동맹국이 되도록 이끈다.[10]

키루스는 아르메니아와 갈등 관계에 있던 칼데아와도 중재에 나선다. 양측을 설득하여 동맹을 맺음으로써, 칼데아 역시 키루스의 세력으로 편입시킨다. 이는 갈등을 중재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키루스의 외교적 역량을 보여준다.[10]

이후, 페르시아 군대는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가서 메디아에 빚진 조공을 징수하려 한다. 아르메니아 왕은 페르시아에 맞서 군대를 소집하지만, 키루스가 온다는 소식에 도망쳐 산속에 숨는다. 키루스는 군대로 출구를 포위하고 왕의 가족과 보물을 생포한다. 키루스는 왕에게 메디아와의 약속을 어긴 죄를 묻지만, 왕은 백성의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고 항변한다. 티그라네스는 키루스에게 아버지가 동맹으로서 가치가 있으며, 어리석음에서 교훈을 얻을 것이라고 설득한다. 키루스는 티그라네스의 소원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를 동맹으로 얻게 된 것을 기뻐한다.[10]

키루스는 왕에게 부와 권력에 대해 묻고, 왕은 기병 8,000명, 궁수 및 조준병 40,000명, 은 3,000탈렌트 이상을 가지고 있다고 답한다. 키루스는 아르메니아 군대의 절반을 자신의 군대에 합류시키고, 왕은 키루스와 메디아에 각각 은 100탈렌트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거래를 제안한다. 페르시아 군대는 티그라네스가 이끄는 아르메니아 병력과 함께 칼데아인을 상대하기 위해 출발한다.[10]

두 국가의 국경에서 키루스는 요새를 건설할 장소를 찾다가 칼데아인들이 정찰 지점으로 사용하는 산맥을 발견한다. 키루스는 아르메니아인과 칼데아인 간의 분쟁을 끝내고 싶어 하지만, 평화 회담을 기다리지 않고 언덕을 공격하여 고지를 점령한다. 칼데아인 정찰병들이 공격해 오지만, 키루스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후퇴하는 척하여 칼데아인 병사들을 유인하는 계략을 써서 승리한다. 아르메니아 왕에게 요새 건설을 돕도록 요청하고, 칼데아인 포로들에게 의료 지원을 제공하며 평화를 제안한다. 칼데아인들이 평화 제안을 받아들이자, 키루스는 양측이 서로의 토지를 사용하여 부족한 자원을 보충할 수 있도록 조건을 제시한다. 칼데아인들은 아르메니아의 평지를 농작물 재배에, 아르메니아인들은 칼데아의 언덕을 목초지로 사용하며, 양국은 시민 간의 결혼을 허용하고 전쟁 시 서로 돕기로 합의한다.[10]

키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메디아에서 키아크사레스와 만나 전리품을 건넨다. 키아크사레스에게 먼저 적을 공격하자고 제안하며, 적의 영토에서 적과 마주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키아크사레스는 동의하고 키루스와 함께 진격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한다. 페르시아인, 메디아인, 아르메니아인들은 아시리아 영토를 침공한다. 아시리아 왕은 군대를 소집하고 키루스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 나서지만, 두 군대는 서로 가까워지자 어느 쪽도 먼저 진격하려 하지 않는다. 아시리아 군대는 진영 주변에 방어적인 참호를 설치한다. 키아크사레스는 공격을 원하지만, 키루스는 적이 더 적은 병력을 보면 아시리아인들이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알린다. 키루스는 공격 명령에 따라 병사들에게 "용감한 자들이여, 앞으로! 누가 나를 따르겠는가? 누가 첫 번째 아시리아인을 쓰러뜨릴 것인가?"라고 외치며 공격을 감행한다.[11] 키루스의 병사들은 아시리아인과 격돌하여 그들을 후퇴시키지만, 키루스는 증원군을 우려하여 병사들에게 물러나라고 명령한다.[11]

2. 1. 4. 4권: 아시리아군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진지 점령

패배한 아시리아군은 퇴각하였다. 키루스는 지원자들을 이끌고 추가적인 원정에 나섰다. 아시리아 주변에 있던 기마 민족인 히르카니아인들이 페르시아에 투항하였다. 그들의 도움으로 아시리아군을 적의 영토에서 또다시 격파하였다. 이전까지 대부분 보병이었던 페르시아군을 키루스는 이 승리로 얻은 수많은 기병에 익숙한 히르카니아인 및 메디아인을 활용하여 기병 부대로 변화시켰다. 기병 부대 창설에 관한 논의는 보병에 비하여 기병의 우월함을 지적하는 글로 유명하다. 한편, 키악사레스는 메디아인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키루스를 따라 나서자 메디아인들에게 복귀 명령을 내렸는데, 키루스는 여전히 키악사레스가 자신의 동맹이며 필요한 전력에서 메디아인의 비중이 크다며 이를 취소하길 요청하였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시리아의 장군 고브리아스가 현재 아시리아 군주의 전횡에 의해 살해당한 아들의 복수를 위해 아시리아를 배신하고 페르시아군에 투항하였다.

2. 1. 5. 5권: 고브리아스와 가타다스

키루스는 지원병들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고브리아스의 제안에 따라 환관 가타다스를 포섭한다. 가타다스는 계략으로 고브리아스가 동맹을 맺을 것을 이야기했던 사키아 방면의 요새를 함락하여 투항 선물로 삼았다.[1] 이후 가타다스는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아시리아 왕의 공격을 받아 위기를 맞지만, 키루스의 군대가 때마침 도착해 아시리아 왕의 군대는 퇴각하였다.[1] 이후 키루스와 아시리아 왕은 농민들에게 평화를 보장하는 부분적인 평화 조약을 맺었다.[1]

2. 1. 6. 6권: 대전투를 앞두고

회의를 통해 겨울과 적진 너무 깊숙이 들어온 것 때문에 나타나는 위협으로 인해 제기되었던 군대 해산안은 기각되었다. 한편 아시리아 왕이 바빌론을 버리고 리디아 방면으로 도주하였다고 전해져 왔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와의 결전을 위해 군사장비와 동맹국들의 결속이 강화되었다. 인도는 여기서 다시 등장하여 키루스와 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크로이소스가 키루스의 군대를 압도하는 규모의 군대를 이집트를 비롯한 수많은 동맹국에서 징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군에는 공포 분위기가 퍼진다. 키루스는 연설을 통해 그에 대한 대비책을 제시한다. 양 군은 서로 진격하였고, 크로이소스는 키루스의 군대를 포위하는 방식으로 포진하였다.

2. 1. 7. 7권: 대전투: 사르디스와 바빌론의 함락

키루스는 크로이소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리디아수도사르디스를 함락한다. 이때 키루스는 약탈을 중지하라는 크로이소스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이후 키루스는 바빌론으로 향하면서 여러 민족을 복속시켰고, 내전 중인 곳에서는 판관이 되어 내전을 진정시켰다. 키루스는 바빌론을 포위하여 유프라테스강 물을 돌릴 준비를 했고, 바빌론의 축제일에 맞춰 물을 돌려 하도를 통해 성 안으로 잠입, 바빌론을 장악하였다. 헤로도토스 (1.191) 역시 바빌론이 축제 밤에 유프라테스강의 물길을 돌려 정복되었다고 주장한다.[1]

2. 1. 8. 8권: 제국의 건설: 키루스의 죽음

키루스는 거대한 제국의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귀족들을 자신의 친구로 삼아 그들끼리도 친구가 되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키루스는 영향력이 큰 시민들에게 자기들끼리 사랑을 나누게 하기보다 키루스 자신을 더 사랑하도록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며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났음을 지적한다.[13]

키루스는 페르시아로 다시 여행을 떠나 메디아에서 키악사레스의 딸과 혼인하여 메디아 전체를 상속받는다. 이는 헤로도토스의 기록과 매우 다른데, 메디아의 군주로서도 키루스가 정통성을 얻게 하기 위한 장치이다.[13] 키루스는 각 지역에 총독을 파견하여 통치하게 하였으나, 성채 주둔군과 수비대의 지휘관은 직접 통제하였다.[13] 이후 원정을 통해 문명세계 전체를 장악하고, 맏아들 캄비세스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13] 유언에서는 영혼과 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인류의 지속적인 평가를 언급하는데, 이는 플라톤과 대립되는 크세노폰의 사상을 보여준다.[13]

8장에서는 키루스 사후 페르시아인들의 부패를 다루는데, 이 장은 후대에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3]

3. 번역


  • 영어판은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 관리하는 판본이 있다.[1]
  • 한국어판은 이동수 옮김의 《키루스의 교육》(한길사, 2015년 개정판)과 이은종 옮김의 《키로파에디아: 키루스의 교육》(주영사, 2012)이 있다.
  • 일본어판은 마쓰모토 진스케 역의 교토 대학 학술 출판회 판본(2004년)과 나카츠카 테츠로 역의 이와나미 문고 판본(2004년)이 있다. 이와나미 문고 판본에는 판테이아와 아브라다타스의 이야기가 발췌 수록되어 있다.

3. 1. 한국어 번역

3. 2. 일본어 번역


  • 마쓰모토 진스케 역, 교토 대학 학술 출판회 〈서양 고전 총서〉, 2004년
  • 나카츠카 테츠로 역, 이와나미 문고, 2004년 (판테이아와 아브라다타스의 이야기가 이 책에서 발췌 수록됨)

4. 유산

《키루스의 교육》은 정치적 미덕과 사회 조직에 관한 작품으로 서유럽에서 중세 후기에 재발견되었다.[20] 이는 미래의 통치자를 교육하기 위해 지도력 행동의 예시를 제공하는 군주론이라고 알려진 중세 후기 및 르네상스 장르에 큰 영향을 미쳤다.[22] 조반니 폰타노, 바르톨로메오 사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키루스를 그러한 예시로 다루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군주론과는 달리, 《키루스의 교육》이 실제로 이상적인 통치자를 묘사하기 위한 의도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키루스의 교육》은 근대 초와 계몽주의 시대에도 널리 읽혔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현대 정치 사상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며, 특히 《키루스의 교육》에 영향을 받았으며, 크세노폰에 대한 보다 정교한 해석을 제시한다. 이는 키루스에 대한 그의 이상주의적 접근 방식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키루스의 기만과 기만적인 지도자의 위험을 《키루스의 교육》의 메시지의 일부로 간주한다.[25] 몽테뉴, 몽테스키외, 루소, 베이컨, 조너선 스위프트, 볼링브로크, 샤프츠베리, 에드워드 기번, 벤자민 프랭클린을 포함한 마키아벨리 이후의 많은 근대 초기 작가들 또한 철학자이자 역사가로서 크세노폰을 존경했다. 《키루스의 교육》은 18세기에 유럽과 미국의 신사들의 교육의 일부였던 고전 아테네 그리스어의 정확한 산문을 모델링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그의 서재에 이 책의 두 권을 가지고 있었다.

참조

[1] 서적 Cyropædia; or, The institution of Cyrus, .. https://archive.org/[...] London. Printed by J. Swan for Vernor and Hood [etc.] 1803
[2] 간행물 Encyclopaedia Iranica Mazda
[3] 간행물 Introduction: Xenophon's Education of Cyrus http://dx.doi.org/10[...] Cornell University Press 2019-12-31
[4] 학술지 Xenophon's Cyropaedia and military reform in Sparta http://dx.doi.org/10[...] 2006-11
[5] 간행물 2. The Genre: Novels Proper and the Fringe http://dx.doi.org/10[...] BRILL 2021-12-04
[6] 웹사이트 Cyropaedia https://www.iranicao[...]
[7]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University Press 1968–1991
[8] 웹사이트 Cyropaedia, by Xenophon https://www.gutenber[...] 2023-04-24
[9] 웹사이트 Cyropaedia, by Xenophon https://www.gutenber[...] 2023-04-24
[10] 웹사이트 Cyropaedia, by Xenophon https://www.gutenber[...] 2023-04-24
[11] 웹사이트 Cyropaedia, by Xenophon https://www.gutenber[...]
[12] 간행물 Cyropaedia: The Education of Cyrus https://www.perseus.[...] William Heinemann Ltd.
[13] 뉴스 Xenophon's Prince: Republic and Empire in the Cyropaedia Wiley Online Library 2003-06-27
[14] 간행물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2007-09-07
[17] 웹사이트 LacusCurtius • Diogenes Laërtius: Plato#34 https://penelope.uch[...]
[18] 간행물 The Persian Expedition (introduction) Penguin Classics
[20] 간행물 Xenophon's Prince: Republic and Empire in the Cyropaedia UC Press
[22] 간행물 Machiavelli's Prince and Its Forerunners Duke University Press
[25] 문서 "Thoughts on Machiavelli. By Leo Strauss. (Glencoe, Ill.: Free Press. 1958. Pp. 348.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1959-07."
[26] 웹사이트 "Xenophon - Legacy | Britannica" 2021-11-15
[27] 문서 Steve W. Hirsch, The Friendship of the Barbarians: Xenophon and the Persian Empire University Press of New England
[28] 문서 Steven D. Anderson, Darius the Mede: A Reappraisal Amazon/CreateSpac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