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어 모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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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도어 모렐은 독일의 의사로, 1933년 나치당에 입당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주치의가 되었다. 그는 히틀러에게 여러 약물을 혼합하여 처방했는데, 여기에는 정신 자극제와 상업용 독극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렐은 히틀러의 신임을 얻어 측근으로 활동했지만, 그의 위생 상태와 치료법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연합군에 체포되었지만, 전범으로 기소되지는 않았고,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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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모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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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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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테오도어 카를 루트비히 길베르트 모렐 |
출생일 | 1886년 7월 22일 |
출생지 | 뮌첸베르크 트와이스, 헤센 대공국, 독일 제국 |
사망일 | 1948년 5월 26일 |
사망지 | 테게른제 , 바이에른, 연합군 점령 독일 |
직업 | 내과 의사 |
고용주 | 아돌프 히틀러 |
배우자 | 요한나 "하니" 몰러 (1919년 결혼, 1948년 사망) |
알려진 이유 |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주치의 |
정당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2. 생애
모렐은 종전 후 베를린에서 '구식 치료법에 얽매이지 않는 의사'로 명성을 얻었고, 페르시아의 샤나 루마니아의 국왕이 그를 주치의로 두길 바랐지만 거절했다.[14] 그는 훗날 노벨상 수상자 엘리 메치니코프에게서 배우기도 하고, 여러 대학의 교수로 활동했으며, 규모가 큰 제약회사의 대주주였고, 1936년에는 베를린의 번화가 쿠담 거리에서 잘 나가는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14]
모렐은 나치당이 세력을 확대되자 위협을 느껴 1933년 4월에는 나치당에 입당하여, 베를린의 고급 주택가 쿠르퓌르스텐담으로 이사하여 피부과·성병과로 다시 개업했다. 1936년, 그는 나치당 전속 사진사인 하인리히 호프만의 임질을 치료했다. 또한, 과거 호프만의 조수를 맡았고, 이 당시에는 히틀러의 애인이었던 에바 브라운의 어머니 프란치스카의 병도 치료했다고 한다. 이후 모렐 부부는 호프만과 브라운과 친분을 맺었다.
2. 1. 초기 생애
모렐은 초등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르노블과 파리에서 산부인과를 공부하여 1913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4]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군의관으로 종군했다.[14]1886년 7월 22일, 모렐은 헤센 대공국의 트라이스-뮌첸베르크라는 작은 마을에서 초등학교 교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부터 프랑스의 그르노블과 파리에서 산부인과를, 뮌헨에서 내과를 공부했다. 1913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의사로 인정받았다. 그 후 디첸바흐의 유람선에서 의사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전선 근무 의무관이 되었다.
제대 후, 1919년까지 뮌헨에서 개업했다. 1920년에는 부유한 여배우 요한나 뫼러와 결혼했다. 그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수단으로, 부유층 고객을 확보하려 했다.
2. 2. 개업의 시절
모렐은 초등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르노블과 파리의 산부인과에서 공부해 1913년에 박사 학위를 땄다.[14]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군의관으로 종군했으며, 종전 후 베를린에서 '구식 치료법에 얽매이지 않는 의사'로 명성을 얻었다.[14] 페르시아의 샤나 루마니아의 국왕이 그를 주치의로 두길 바랐지만 거절했다.[14] 그는 훗날 노벨상 수상자 엘리 메치니코프에게서 배우기도 하고, 여러 대학의 교수로 활동했으며, 규모가 큰 제약회사의 대주주였고, 1936년에는 베를린의 번화가 쿠담 거리에서 잘 나가는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14]1886년 7월 22일 헤센 대공국의 트라이스-뮌첸베르크라는 작은 마을에서 초등학교 교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부터 프랑스의 그르노블과 파리에서 산부인과를, 뮌헨에서 내과를 공부했다. 1913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의사로 인정받았다. 그 후 그는 디첸바흐의 유람선에서 의사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전선 근무 의무관이 되었다. 제대 후, 1919년까지 뮌헨에서 개업했다. 1920년에는 부유한 여배우 요한나 뫼러와 결혼했다. 그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수단으로, 부유층 고객을 확보하려 했다.
나치당이 세력을 확대하자, 고객 대부분이 유대인이었고, 또한 풍채가 유대인과 비슷했던 그의 생활은 위협받게 되었다. 때문에 1933년 4월에는 나치당에 입당하여, 베를린의 고급 주택가 쿠르퓌르스텐담으로 이사하여 피부과·성병과로 다시 개업했다. 1936년, 그는 나치당 전속 사진사인 하인리히 호프만의 임질을 치료했다. 또한, 과거 호프만의 조수를 맡았고, 이 당시에는 히틀러의 애인이었던 에바 브라운의 어머니 프란치스카의 병도 치료했다고 한다. 이후 모렐 부부는 호프만과 브라운과 친분을 맺었다.
3. 히틀러의 주치의
모렐은 1933년 나치당에 가입한 후, 하인리히 호프만과 에바 브라운의 소개로 히틀러의 주치의가 되었다. 당시 피부 발진과 위장 가스로 고생하던 히틀러에게 모렐은 여러 의약품을 조합하여 처방했고, 히틀러의 증상은 호전되었다.[4]
히틀러는 1936년 가을 무렵부터 습진, 끊임없는 방귀, 위 경련, 변비, 심장 압박감에 시달렸다. 독일 적십자 병원 원장 에른스트-로베르트 그라비츠 등의 치료를 받았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어려웠다. 에바에 따르면, 히틀러는 이러한 증세를 암이라고 생각하여 "나는 곧 죽을 것이다"와 같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에바는 1936년 12월 24일 베르히테스가덴의 베르크호프에서 모렐을 히틀러에게 소개했다. 진찰 후 약을 처방하자 방귀와 위통이 사라져 히틀러는 즉시 모렐을 주치의로 임명했다. 그러나 모렐의 약에는 스트리크닌 등의 극약이 포함되어 있었고, 의존성이 강했다.[9] 히틀러는 모렐의 처방으로 다리 발진 또한 사라지는 등[4] 의학적 재능을 확신하며, 자신의 사교적 핵심 인물 중 하나로 여겼다.[9]
히틀러가 아침에 몽롱함으로 고통받을 때, 모렐은 "비타민"이라고 부르는 물질을 물에 섞어 주사했다. 1943년, 에른스트-귄터 쉥크는 이 물질에 메스암페타민이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하인리히 힘러에게 알렸지만, 힘러는 이 문제를 덮었다.[6]
헤르만 괴링과 하인리히 힘러는 그를 돌팔이로 여겼고,[5] 알베르트 슈페어는 자서전에서 모렐을 기회주의자로 묘사했다. 모렐은 히틀러 측근들에게 인기가 없었지만, 히틀러는 "나는 그의 향기 때문이 아니라, 내 건강을 돌보기 위해 그를 고용한다"라고 말했다.[7] 헤르만 괴링은 모렐을 ''Der Reichsspritzenmeister'' ("제국의 주사 대가")라고 불렀다.[8]
모렐은 카를 브란트와 주치의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 1944년 브란트가 모렐의 약 처방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냈지만, 히틀러는 오히려 브란트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브란트는 해임되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패혈증으로 중태에 빠졌을 때, 모렐은 술폰아미드 처방을 권고했지만, 카를 게브하르트는 이를 무시했고, 하이드리히는 사망했다.
히틀러는 말년에 병적으로 사람들을 의심했지만, 모렐은 정치적 욕심을 보이지 않아 신뢰받는 사람이었다.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서 모렐은 각종 약으로 히틀러를 회복시켰다. 그러나 1945년 4월 히틀러는 모렐에게 퓌러엄폐호를 떠나게 했다.
3. 1. 주치의가 된 과정
모렐은 1933년 나치당에 가입했다. 1935년, 히틀러의 개인 사진작가인 하인리히 호프만이 모렐의 치료를 받고 완쾌되자, 호프만은 히틀러에게 모렐을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사람이라며 소개했다.[4] 히틀러는 1936년에 모렐을 만났고, 모렐은 히틀러에게 비타민과 대장균의 가수분해된 균주인 Mutaflor(프로바이오틱스 균주, 1917년에 분리됨)를 혼합한 다양한 상업적 제제를 포함한 치료를 시작했다. 이는 히틀러의 심한 위경련을 성공적으로 치료했다.[4] 모렐의 처방을 통해 히틀러가 앓던 다리 발진 또한 사라졌다. 히틀러는 모렐의 의학적 재능을 확신했고, 모렐은 그의 사교적 핵심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9]히틀러는 모렐을 다른 나치 지도자들에게 추천했지만, 헤르만 괴링과 하인리히 힘러를 포함한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모렐을 돌팔이로 치부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5]
> 1936년, 나의 혈액 순환과 위가 말을 듣지 않게 되자... 모렐의 개인 진료실을 찾았다. 간단한 검사 후 모렐은 내게 그의 장내 세균, 포도당, 비타민, 호르몬 알약을 처방했다. 안전을 위해 나는 후에 베르크만 교수에게 정밀 검사를 받았다. 그는 베를린 대학교의 내과 전문의였다. 그는 내가 어떤 유기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로로 인한 신경 증상만 겪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
> 나는 최대한 속도를 늦추었고 증상은 완화되었다. 히틀러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나는 모렐의 지시를 신중하게 따르는 척했고, 건강이 좋아지자 한동안 모렐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 알베르트 슈페어, ''제3제국 안에서''(1969)
히틀러가 아침에 몽롱함으로 고통받을 때, 모렐은 그에게 "비타민"이라고 부르는, 여러 개의 작은 금박 포장재에서 나온 물질과 물을 섞어 주사했다. 1943년, 에른스트-귄터 쉥크는 무장친위대와 국방군의 영양 검사관은 그 물질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그것이 불활성이거나 희석된 성분으로 만들어졌다고 믿고, 그는 검사를 위해 영양 검사관 사무실에 일부를 보냈다. 그가 받은 보고서는 그 물질에 특정 비타민뿐만 아니라 메스암페타민도 포함되어 있음을 나타냈다. 메스암페타민은 당시에도 중독성이 강하고 엄격하게 통제되는 물질로 알려져 있었다. 쉥크는 그 결과를 레오나르도 콘티 박사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하인리히 힘러에게 알렸다. 힘러는 즉시 이 문제를 덮어야 한다고 답했다.[6]
슈페어는 모렐을 히틀러의 주치의가 된 후 극도로 부주의하고 게을러진 기회주의자로 묘사했다. 1934년부터 히틀러를 돌봐온 카를 브란트 박사와 경쟁 관계를 형성했는데, 브란트와 다른 의사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모렐은 항상 "총애를 회복"했다.[8]
모렐은 의사의 거친 식사 예절, 나쁜 위생, 그리고 체취로 불만을 품은 히틀러 측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히틀러는 "나는 그의 향기 때문에 그를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 건강을 돌보기 위해 고용한다"고 말했다고 한다.[7] 헤르만 괴링은 모렐을 ''Der Reichsspritzenmeister'' ("제국의 주사 대가")라고 불렀고, 그 주제에 대한 변형을 사용했다.[8] 이는 모렐이 의료 문제에 직면했을 때 약물 주사에 의존했고 과도하게 사용했음을 시사한다.
1939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인 에밀 하하를 총통 관저로 불러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에 동의하도록 협박했다. 큰 압박을 받은 하하는 심장 발작을 일으켜 쓰러졌지만, 모렐의 주사로 목숨을 건졌다. 소생한 하하는 나치 독일에의 병합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멸하게 되었다.
3. 2. 논란이 된 치료법
모렐은 1933년 나치당에 가입했다. 히틀러의 사진사인 하인리히 호프만을 치료해주면서 인맥을 쌓았고, 호프만과 에바 브라운을 통해 히틀러의 주치의로 소개되었다. 모렐은 피부 발진과 위장 가스로 고생하던 히틀러에게 여러 의약품을 조합하여 증상을 치료했고, 나치 지도자 대다수는 그를 높게 평가했지만, 힘러와 괴링은 돌팔이로 여겼다.[8] 모렐은 친위대 출신 주치의 카를 브란트와 경쟁했는데, 히틀러는 모렐의 편을 자주 들었다. 1944년 10월 5일 브란트가 모렐의 약 처방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냈지만, 히틀러는 오히려 브란트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란트는 해임되었다.[6]히틀러는 말년에 병적으로 사람들을 의심했지만, 정치적 욕심 없이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모렐은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레지스탕스에게 피습당해 패혈증으로 중태에 빠지자, 모렐은 항생제인 술폰아미드 처방을 권고했다. 당시 독일에는 페니실린이 없어 대신 술폰아미드를 택한 것이다. 하지만 하이드리히의 치료를 맡았던 카를 게브하르트는 이 권고를 무시했고, 결국 하이드리히는 사망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모렐을 기회주의자로 묘사하며, 그의 치료에 의문을 제기했다. 슈페어는 모렐에게서 처방받은 약을 베를린 대학교의 베르크만 교수에게 검사받았고, "비과학적이고, 모험적이며 습관성의 위험이 있다"는 권고를 받았다.[5]
헤르만 괴링은 모렐이 의료 문제에 직면했을 때 약물 주사에 의존하고 과도하게 사용했음을 시사하며, 그를 ''Der Reichsspritzenmeister'' ("제국의 주사 대가")라고 불렀다.[8]
모렐은 히틀러에게 투여한 약물, 강장제, 비타민 등을 기록했는데, 대부분 상업용 제제였고, 일부는 직접 조제한 혼합물이었다. 이러한 화합물 중 일부는 독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역사가들은 모렐이 히틀러의 건강 악화에 의도치 않게 기여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히틀러에게 투여된 약물 74종(28가지 혼합물)의 불완전한 목록에는 정신 자극제인 헤로인과 상업용 독극물이 포함되어 있다.[9]
히틀러에게 투여된 약물 (알파벳 순):[9]
약품명 | 성분 및 용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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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롬-네르바시트 | 브롬화물, 디에틸바르비투르산 나트륨, 피라미돈. 메스암페타민의 자극 효과 상쇄 및 수면 유도. |
카르디아졸, 코라민 | 다리 부종 치료. |
치네우린 | 퀴닌 함유 제제. 감기와 독감 치료. |
코카인, 아드레날린 | 점안액. |
코라민 | 니케타미드. 바르비투르산염 과다 진정 시 주사. 다목적 "강장제"의 일부. |
코르티론 | 데옥시코르티코스테론 아세테이트 근육 주사. 근육 약화, 탄수화물 대사에 영향. |
닥터 코스터의 가스 방지 알약 | 벨라돈나 추출물, 스트리크노스 녹스 보미카. 고창증 치료. |
엔바신 | 설폰아미드 5cc 둔부 내 주사. 다양한 감염 치료. |
유플랫 | 담즙 추출물, 당귀, 알로에, 파파베린, 카페인, 판크레아틴, 펠 타우리. 고창증 및 소화 장애 치료용 알약. |
유코달 | 고용량 옥시코돈. 장 경련, 진통. |
유파베린 | 모자베린. 장 경련 및 복통 치료용 이소퀴놀린 유도체. |
포도당 | 1938년부터 1940년까지 3일에 한 번씩 5%와 10% 포도당 주사. 스트로판투스 효과 증강. |
글리코노름 | 메트포르민,[9] 대사 효소(코지마아제 I 및 II), 아미노산, 비타민. 강화 강장제 주사액. |
호마트로핀 | 호마트로핀 HBr 0.1g, NaCl 0.08g; 증류수 10mL 첨가. 오른쪽 눈 문제에 사용되는 점안액. |
인텔란 | 비타민 A, D3 및 B12. 강화 강장제 알약. |
카모밀라 오피시날레 | 캐모마일. 환자 요청에 따른 장 관장. |
루이짐 | 셀룰라아제, 헤미셀룰라아제, 아밀라아제, 프로테아제. 장 문제, 고창증 치료. |
무타플로르 | 대장균 균주의 유제. 장내 환경 개선을 위한 장용 코팅 정제. 1936년 히틀러의 고창증 치료를 위해 처방. |
옴나딘 | 단백질 화합물, 담즙 지질, 동물성 지방 혼합물. 감염 시작 시 복용(비타물틴과 함께). |
옵탈리돈 | 카페인, 프로피펜아존. 감염 시작 시 알약 복용(비타물틴과 함께). |
오르키크린 | 소 테스토스테론 추출물, 뇌하수체, 글리세로인산염. 강장제, 강화제. 최음제로도 판매. |
페니실린-해마 | 페니실린. 분말 국소 항생제. 1944년 7월 20일 암살 시도 후 오른팔 치료. |
페르비틴 | 메스암페타민 주사. 정신적 우울증과 피로 치료.[9] |
프로기논 B-올레움 | 에스트라디올 벤조에이트. 위 점막 혈액 순환 개선. |
프로스타크리넘 | 정낭, 전립선 추출물. 정신적 우울증 치료를 위해 근육 내 주사. |
프로스토판타 | 스트로판틴 0.3mg, 포도당, 비타민 B, 니코틴산. 심장 배당체, 강화제. |
셉토이드 | 3% 요오드(요오드화 칼륨 형태) 10cc와 20% 포도당 10cc 정맥 주사. |
스트로판틴 | 1941–44 – 관상 동맥 경화증 치료를 위해 매일 2주 동안 0.2mg 투여. |
심파톨 | 옥세드린 타르타르산염. 1942년부터 매일 10방울 투여. 심박출량 증가. |
테스토비론 | 테스토스테론 프로피오네이트. 강장제, 강화제. |
토노포스판 | 1942–1944, 인산 제제. 강장제, 강화제. |
울트라셉틸 | 설폰아미드. 호흡기 감염 치료. |
베리톨 | 1944년 3월부터 히드록시페닐-2-메틸아미노-프로판. 왼쪽 눈 치료용 점안액. |
비타물틴-칼슘 | 카페인, 비타민. |
모렐은 일반의로 훈련받았지만, 전문 분야는 피부과나 성병학이 아닌 산부인과였다. 모렐은 히틀러를 아르세노벤졸, 살바르산, 네오살바르산, 비스무트, 요오드 염으로 치료했다.[10]
3. 3. 히틀러의 신임과 몰락
모렐은 1933년 나치당에 가입했다. 이후 히틀러의 사진사인 하인리히 호프만을 치료하면서 인맥을 쌓았고, 호프만과 에바 브라운의 소개로 히틀러의 주치의가 되었다. 당시 피부 발진과 위장 가스로 고생하던 히틀러에게 모렐은 여러 의약품을 조합하여 처방했고, 히틀러의 증상은 호전되었다.히틀러는 1936년 가을 무렵부터 습진, 끊임없는 방귀, 위 경련, 변비, 심장 압박감에 시달렸다. 당시 독일 의학계 최고봉에 있던 독일 적십자 병원 원장 에른스트-로베르트 그라비츠 등의 치료를 받았지만, 피로와 심로로 인한 것이어서 근본적인 치료는 어려웠다. 에바에 따르면, 히틀러는 이러한 증세를 암이라고 생각하여 "나는 곧 죽을 것이다"와 같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되자 에바는 1936년 12월 24일 베르히테스가덴의 베르크호프에서 모렐을 히틀러에게 소개했다. 진찰 후 약을 처방하자 방귀와 위통이 사라져 히틀러는 즉시 모렐을 주치의로 임명했다. 그러나 모렐의 약에는 스트리크닌 등의 극약이 포함되어 있었고, 의존성, 습관성이 강한 것이었다. 처방을 받은 지 2시간 정도 지나면 히틀러는 다시 몸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호소했고, 모렐은 그때마다 약을 처방하는 것을 반복했기 때문에 그의 건강은 점차 쇠약해져 갔다. 모렐의 처방을 통해 히틀러가 앓던 다리 발진 또한 사라졌다.[4] 히틀러는 모렐의 의학적 재능을 확신했고, 모렐은 그의 사교적 핵심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9]
히틀러가 아침에 몽롱함으로 고통받을 때, 모렐은 그에게 "비타민"이라고 부르는 여러 개의 작은 금박 포장재에서 나온 물질과 물을 섞어 주사했다. 1943년, 에른스트-귄터 쉥크는 그 물질에 대해 의심을 품고 검사를 의뢰했는데, 그 결과 특정 비타민뿐만 아니라 메스암페타민도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메스암페타민은 당시에도 중독성이 강하고 엄격하게 통제되는 물질이었다. 쉥크는 이 사실을 하인리히 힘러에게 알렸지만, 힘러는 즉시 이 문제를 덮어야 한다고 답했다.[6]
대다수의 나치 지도자들은 모렐을 높게 평가했으나, 헤르만 괴링과 하인리히 힘러는 그를 돌팔이로 여겼다.[5] 알베르트 슈페어는 자서전에서 모렐을 기회주의자로 묘사하며, 그가 히틀러의 주치의가 된 후 극도로 부주의하고 게을러졌다고 평가했다.
모렐은 의사의 거친 식사 예절, 나쁜 위생, 그리고 체취로 불만을 품은 히틀러 측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나는 그의 향기 때문이 아니라, 내 건강을 돌보기 위해 그를 고용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7] 헤르만 괴링은 모렐을 ''Der Reichsspritzenmeister'' ("제국의 주사 대가")라고 불렀는데,[8] 이는 모렐이 의료 문제에 직면했을 때 약물 주사에 의존했고 과도하게 사용했음을 시사한다.
모렐은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상이나 하인리히 힘러 SS 장관과 같은 고위 관료의 치료도 했지만, 곧 그들은 이변을 느끼고 치료를 중단했다. 슈페어는 그에게서 약을 처방받았지만, 내용이 의심스러워 베를린 대학교 복지 병원의 베르크만 교수에게 성분을 조사해 본 결과, "비과학적이고, 모험적이며 습관성의 위험이 있다"라는 권고를 받았다.
모렐은 히틀러의 주치의 자리를 두고 카를 브란트와 경쟁했다. 1944년까지 모렐은 브란트 박사와 적대적인 경쟁 관계를 형성했다. 브란트와 다른 의사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모렐은 항상 "총애를 회복"했다. 1944년 10월 5일에 카를 브란트가 모렐의 약 처방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내었지만, 히틀러는 이 의견서를 보고 역으로 카를 브란트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란트는 퓌러부 의사직에서 해임당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체코에서 레지스탕스에게 피습당해 심한 패혈증으로 중태에 빠지자, 모렐은 당시 독일에서 개발한 항생제인 술폰아미드의 처방을 권고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의 치료를 맡았던 카를 게브하르트는 이 권고를 무시하였고, 결국 하이드리히는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히틀러는 말년에 병적으로 사람들을 의심했지만, 모렐은 정치적 욕심을 보이지 않고 자신의 일에 충실했기에 히틀러에게 신뢰받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1944년 7월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도 모렐은 각종 약을 써서 히틀러의 기운을 차리게 했다. 그러나 1945년 4월에 히틀러는 그의 도움이 이제 없어도 된다고 하며 그를 퓌러엄폐호에서 떠나게 해주었다.
4. 제2차 세계 대전
1933년 나치당에 가입한 모렐은 하인리히 호프만과 에바 브라운을 통해 히틀러의 주치의로 소개되었다.[11] 히틀러는 피부 발진과 위장 가스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모렐은 여러 의약품을 조합하여 증상을 치료했다.[11] 1944년 10월 5일 카를 브란트가 모렐의 약 처방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냈지만, 히틀러는 오히려 카를 브란트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란트는 해임되었다.[11]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때 모렐은 각종 약을 써서 히틀러의 기운을 차리게 했다.[11] 1945년 4월 히틀러는 그에게 이제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하며 퓌러엄폐호에서 떠나게 했다.[11] 히틀러는 말년에 사람들을 병적으로 의심했지만, 모렐은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지는 임무를 맡고 있었기에 신뢰했다.[12]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레지스탕스에게 피습당해 패혈증으로 중태에 빠졌을 때, 모렐은 독일에서 개발한 항생제인 술폰아미드의 처방을 권고했다.[13] 하지만 하이드리히의 치료를 맡았던 카를 게브하르트는 이 권고를 무시했고, 결국 하이드리히는 사망했다.[13]
1939년, 모렐은 에밀 하차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에게 각성제를 주사하여 히틀러의 요구에 굴복하게 만들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모렐은 히틀러를 페니실린으로 치료했다.[14] 그가 어디서 페니실린을 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모렐은 페니실린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다.[14]
1944년 9월 히틀러가 황달에 걸리자, 이비인후과 전문의 에르빈 기징 박사는 모렐의 치료 방식에 의심을 품었다. 기징은 모렐이 히틀러에게 복용시킨 "닥터 코스터의 방독정"을 분석한 결과, 스트리크닌과 벨라돈나가 들어 있었고, 스트리크닌이 황달의 원인임을 알게 되었다. 기징은 자신의 결과를 히틀러의 다른 의사들에게 보고했고, 히틀러는 격노하여 기징, 브란트, 하셀바흐 세 의사를 모두 해고했다.
1945년 4월까지, 히틀러는 수많은 주사와 함께 매일 많은 알약을 복용하고 있었다.[11] 모렐의 개인적인 메모는 "언제나처럼 주사", "유코달"(오피오이드 옥시코돈의 초기 독일 상품명)과 같은 기록을 포함하여 수년간 그가 히틀러를 어떻게 치료했는지 묘사하고 있다.[11]
모렐은 히틀러와 측근들이 총리 관저 정원에 위치한 ''총통 벙커''로 이주한 후 그곳에 머물렀다. 베를린 전투가 진행되자, 모렐은 에바 브라운과 요제프 괴벨스 부부가 자살할 때 사용한 청산가리 캡슐을 제공했다.
1945년 4월 20일, 히틀러는 모렐 등에게 비행기를 타고 벙커와 베를린을 떠나 오버잘츠베르크로 가라고 명령했다. 히틀러는 모렐에게 더 이상 의료 지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모렐이 처방한 많은 약을 계속 복용했다. 히틀러의 마지막 주 동안, 약물은 베르너 하세 박사와 하인츠 링게에 의해 투여되었다. 모렐은 4월 23일 베를린을 떠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모렐은 히틀러를 수행하며 총통 대본영에서 근무했다. 1940년경부터 히틀러는 건강이 악화되어 호흡 곤란을 호소했다. 모렐은 흉막염을 의심하여 심전도를 보내 진단을 받았는데, 결과는 "향후 항상 협심증이나 색전증의 위험이 따른다"는 것이었다.[13] 모렐은 이 결과를 히틀러에게 알리지 않고, 스트로판틴과 심파솔을 투여하기 시작했다.[13]
모렐은 자신이 개발한 종합 비타민제 "비타말틴"이나 이 구충제 "라스라" 등의 의약품을 개발하여 장병들에게 지급했다. 그러나 비타말틴은 비타민 함유량이 적었고, 라스라는 악취가 심해 병사들이 사용을 꺼렸다고 한다.[13]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때에도 부상당한 히틀러의 치료를 담당했다.[14] 8월 중순경 히틀러는 오른팔 마비와 두통에 시달렸다. 모렐은 설파제를 처방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베를린 대학교의 이비인후과 교수는 IG 파르벤사의 제품을 사용할 것을 권했지만, 모렐은 거부했다.[13]
1944년 9월 26일, 히틀러는 심한 복통에 시달렸다. 모렐은 장 질환의 재발로 진단하고 약을 처방했지만, 더욱 고통스러워졌다. 황달이 의심되었지만, 모렐은 검사 결과를 숨기고 다른 주치의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10월 1일, 기징크는 히틀러에게 처방된 모렐의 약을 복용해 보았다. 약에는 아트로핀이나 스트리키닌과 같은 극약이 포함되어 있었고, 히틀러가 평소 호소하던 건강 악화와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기징크와 브란트는 히틀러에게 모렐의 해임을 건의했지만, 히틀러는 히믈러에게 모렐을 심문하게 하고, 대응을 일임했다. 히믈러는 오히려 기징크와 브란트 등을 해임하고 모렐을 유임시켰다. 히틀러의 건강 관리에는 루트비히 슈툼프에거를 담당하게 하고, 모렐의 투약도 일단 중지시켰다.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위통은 곧 회복되었다.
히틀러의 모렐에 대한 신임은 그 후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베를린 공방전에서 수도가 포위된 1945년 4월 단계까지 그는 주치의를 맡고 있었다. 이때의 히틀러에 대한 처방은, 포도당 주사, 메스암페타민을 포함한 정맥 주사, 그리고 28가지의 다른 정제였다고 한다. 1945년 4월 22일, 히틀러는 더 이상의 치료는 필요 없다며 모렐을 총통 벙커에서 탈출시켰다.
5. 전후 생활
독일에서 마지막 비행기를 타려던 모렐은 미군에게 체포된다. 그러나 히틀러의 최측근이었지만, 카를 브란트나 카를 게프하르트처럼 의학 실험을 핑계로 학살 같은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나치에 열혈 충성했으나 그가 한 일은 히틀러의 건강을 관리한 것뿐이었기에 전범이나 학살자로 취급할 수도 없고, 잡아 가둘 죄도 명분도 없었다. 게다가 당시 모렐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뇌졸중 등 여러 병을 앓던 상황이라 증인으로 법정에 세우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연합군은 모렐을 석방하고 집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3년 뒤에 고향 테게른제에서 뇌졸중으로 별세한다. 이처럼 히틀러 주치의로 역사에 남게 되었지만, 히틀러와 가까이 있던 자들 중 거의 유일하게 어떠한 전쟁 범죄에도 연루되지 않아서, 같이 히틀러와 가까이 있던 자들이 처형당할 때 편히 침대에 누워 숨을 거뒀다. 모렐은 1945년 5월 18일 미군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의 심문관 중 한 명은 그의 비만과 위생 상태에 "혐오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전 다하우 강제 수용소 부지에 있는 미국 억류 캠프에 수감되어 히틀러와의 친분 때문에 심문을 받았지만, 어떤 범죄로도 기소되지 않았다. 심각한 비만과 건강 악화로 고통받던 그는 1948년 5월 26일 테게른제 병원에서 사망했다.[12]
6. 히틀러에게 처방된 약
모렐은 히틀러에게 다양한 약물, 강장제, 비타민 등을 처방했으며, 주로 주사(하루 최대 20회) 또는 알약 형태로 투여했다. 이러한 약물 중 일부는 독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역사학자들은 모렐이 히틀러의 건강 악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히틀러에게 투여된 약물 74종(28가지 혼합물)의 불완전한 목록에는 정신 자극제인 헤로인과 상업용 독극물이 포함되어 있었다.[9]
다음은 히틀러에게 투여된 화합물의 목록이다(알파벳 순).[9]
약품명 | 성분 및 용도 |
---|---|
브롬-네르바시트 | 브롬화물, 디에틸바르비투르산 나트륨, 피라미돈. 1941년 8월부터 매일 밤 복용하여 메스암페타민의 자극 효과를 상쇄하고 수면을 유도.[9] |
카르디아졸과 코라민 | 1941년부터 다리 부종 치료. |
치네우린 | 감기와 독감을 치료하기 위한 퀴닌 함유 제제. |
코카인과 아드레날린 | 점안액으로 투여. |
코라민 | 바르비투르산염으로 과도하게 진정되었을 때 주사되는 니케타미드. 다목적 "강장제"의 일부로도 사용. |
코르티론 | 근육 약화, 탄수화물 대사에 영향을 미치는 데옥시코르티코스테론 아세테이트 근육 주사. |
닥터 코스터의 가스 방지 알약 | 매 식사 전에 2~4알씩, 하루 총 8~16알 복용. 1936년부터 벨라돈나 추출물과 스트리크노스 녹스 보미카를 고용량으로 복용하여 고창증을 치료. |
엔바신 | 설폰아미드 5cc를 둔부 내에 주사하여 다양한 감염을 치료. |
유플랫 | 담즙 추출물, 당귀, 알로에, 파파베린, 카페인, 판크레아틴, 펠 타우리 - 고창증 및 소화 장애 치료용 알약. |
유코달 | 장 경련, 진통에 사용되는 고용량의 옥시코돈.[11] |
유파베린 | 모자베린, 장 경련 및 복통 치료용 이소퀴놀린 유도체. |
포도당 | 1938년부터 1940년까지 3일에 한 번씩 5%와 10% 포도당 주사를 투여하여 스트로판투스 효과를 증강. |
글리코노름 | 메트포르민,[9] 대사 효소(코지마아제 I 및 II), 아미노산, 비타민 - 강화 강장제 주사액. |
호마트로핀 | 호마트로핀 HBr 0.1g, NaCl 0.08g; 증류수 10mL 첨가. 오른쪽 눈 문제에 사용되는 점안액. |
인텔란 | 하루 두 번 비타민 A, D3 및 B12 - 강화 강장제 알약. |
카모밀라 오피시날레 | 캐모마일 - 환자의 개인적 요청에 따라 장 관장. |
루이짐 | 식사 후마다 셀룰라아제, 헤미셀룰라아제, 아밀라아제 및 프로테아제를 포함하는 효소를 사용하여 장 문제, 고창증을 치료. |
무타플로르 | 대장균 균주의 유제 - 장내 환경 개선을 위한 장용 코팅 정제. 1936년 히틀러의 고창증 치료를 위해 처방. 인간의 대변에서 배양한 박테리아, E. coli 참조. |
옴나딘 | 단백질 화합물, 담즙 지질 및 동물성 지방 혼합물, 감염 시작 시 복용(비타물틴과 함께). |
옵탈리돈 | 카페인, 프로피펜아존 - 감염 시작 시 알약 복용(비타물틴과 함께). |
오르키크린 | 소 테스토스테론 추출물, 뇌하수체 및 글리세로인산염 - 강장제, 강화제. 최음제로도 판매. |
페니실린-해마 | 페니실린 - 분말 국소 항생제. 1944년 7월 20일 암살 시도 후 오른팔 치료에 사용. |
페르비틴 | 정신적 우울증과 피로를 치료하기 위한 메스암페타민 주사.[9] |
프로기논 B-올레움 | 에스트라디올 벤조에이트, 난포 호르몬의 벤조산 에스테르, 위 점막의 혈액 순환 개선을 위해 사용. |
프로스타크리넘 | 43년에 짧은 기간 동안 이틀에 한 번씩 두 개의 앰플 투여, 정낭 및 전립선 추출물 - 정신적 우울증 치료를 위해 근육 내 주사. |
프로스토판타 | 스트로판틴 0.3mg, 포도당, 비타민 B, 니코틴산 - IM 심장 배당체, 강화제. |
셉토이드 | 심장 상태와 제2 심음 변화를 개선하기 위해 하루에 두세 번 3% 요오드(요오드화 칼륨 형태) 10cc와 20% 포도당 10cc를 정맥 주사. |
스트로판틴 | 1941–44 – 관상 동맥 경화증 치료를 위해 매일 2주 동안 0.2mg의 스트로판투스 그라투스 배당체 투여. |
심파톨 | 옥세드린 타르타르산염 1942년부터 매일 10방울을 투여하여 심박출량 증가. |
테스토비론 | 테스토스테론 프로피오네이트를 강장제, 강화제로 사용. |
토노포스판 | 1942–1944, 인산 제제 - SC 강장제, 강화제. |
울트라셉틸 | 설폰아미드를 호흡기 감염 치료에 사용. |
베리톨 | 1944년 3월부터 히드록시페닐-2-메틸아미노-프로판 - 왼쪽 눈 치료용 점안액. |
비타물틴-칼슘 | 카페인, 비타민. |
역사가 휴 트레버-로퍼는 모렐이 사용한 약물에 대한 거의 완전한 목록은 전쟁 후 그의 꼼꼼한 일일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과장되었을 가능성은 낮다고 언급했다.
모렐은 일반의로 훈련을 받았지만, 피부과나 성병학이 아닌 산부인과가 전문 분야였다. 그는 히틀러를 아르세노벤졸, "606"으로 지정된 살바르산, 네오살바르산과 비스무트 및 요오드 염으로 치료했다.[10]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모렐은 부상당한 히틀러에게 페니실린을 투여했다. 그가 당시 연합군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페니실린을 어디에서 입수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45년 4월, 베를린 공방전에서 히틀러는 모렐에게 더 이상의 치료는 필요 없다고 말하며 총통 벙커에서 떠나게 했다. 이때 히틀러에게 처방된 약은 수 시간 간격의 포도당 주사, 메스암페타민을 포함한 정맥 주사, 그리고 28가지의 다른 정제였다고 한다.
7. 유산과 평가
독일에서 마지막 비행기를 타려던 모렐은 미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최측근이기는 했지만 카를 브란트와 카를 게프하르트 같이 의학실험을 핑계로 학살 같은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나치에 열혈 충성했으나 그가 한 일은 히틀러의 건강을 관리한 것 뿐이었기에 전범이나 학살자로 취급할 수도 없고, 잡아 가둘 죄도 명분도 없었다. 거기에 당시 모렐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서 뇌졸중 등 여러 병을 앓던 상황이라 증인으로 법정에 세우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연합군은 모렐을 석방하고 집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3년 뒤에 고향 테게른제에서 뇌졸중으로 별세한다. 이처럼 히틀러 주치의로 역사에 남게 되었지만, 히틀러와 가까이 있던 자들 중 거의 유일하게 어떠한 전쟁 범죄에도 연루되지 않아서, 같이 히틀러와 가까이 있던 자들이 처형당할 때 편히 침대에 누워 숨을 거뒀다.[12]
히틀러는 모렐에게 교수 칭호를 수여하고 금색 당 배지와 전공 훈장 기사 십자장을 수여했다.[12] 모렐은 히틀러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자신의 "비타물틴"을 독일 노동 전선에, 살충 제품 "루스라 파우더"를 국방군에 판매할 수 있었다.[12] 연봉 60000RMD 외에도 이러한 사업으로 모렐은 약 의 재산을 모았다.[12]
참조
[1]
문서
Full name in the Charlottenburg marriage register 816/1919 of 7 August 1919
[2]
서적
Blitzed: Drugs in the Third Reich
Houghton Mifflin Harcourt
2017
[3]
서적
The Secret Diaries of Hitler's Doctor
https://archive.org/[...]
Macmillan
1983
[4]
간행물
Escherichia coli Nissle 1917 (Mutaflor): New Insights into an Old Probiotic Bacterium
https://doi.org/10.1[...]
2011-12-12
[5]
서적
Inside the Third Reich
Weidenfeld & Nicolson
1995
[6]
간행물
The Treatment of a Dictator
https://journals.sag[...]
2024-10-03
[7]
뉴스
The Story of Hitler's Health
http://www.neatorama[...]
Bathroom Readers' Institute
[8]
서적
Until the Final Hour: Hitler's Last Secretary
Weidenfeld & Nicolson
2003
[9]
Youtube
Hitler's Hidden Drug Habit: Secret History
[10]
웹사이트
Hitler's Health
https://forum.axishi[...]
[11]
뉴스
A fresh light on the Nazis' wartime drug addiction
http://www.dw.com/en[...]
DW
2015-09-09
[12]
웹사이트
PROZESSE / HITLERS LEIBARZT: Auf Rotglut – DER SPIEGEL 18/1969
https://www.spiegel.[...]
[13]
서적
第二次世界大戦 ヒトラーの戦い
文春文庫
[14]
뉴스
Hitler had split personality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194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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