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파우스토 소치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파우스토 소치니는 1539년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태어난 반 삼위일체론적 신학자이다. 그는 삼위일체, 원죄, 예정설 등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과 자유 의지를 강조하는 독자적인 신학 체계를 발전시켰다. 소치니는 폴란드에서 폴란드 형제단(소치니파)을 이끌며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고, 그의 사상은 유니테리언주의와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전쟁과 사형을 반대하고 평화주의와 관용을 강조했으며, 종교 개혁 시대의 급진적인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2. 생애

파우스토 소치니는 시에나 공화국의 수도 시에나에서 태어나 주로 가정 교육을 통해 성장했으며, 삼촌 첼소 소치니에게 지적인 영향을 받았다. 젊은 시절 아카데미아 델리 인트로나티에 참여했으나 법학보다는 문학에 더 관심을 보였다.[7][8]

성년이 된 후 리옹제네바 등지를 오가며 활동했고, 이 시기 반삼위일체론적 입장을 보이며 영혼 수면설을 주장하는 등 독자적인 신학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와 약 12년간 토스카나의 이사벨라 데 메디치를 섬기며 가톨릭 교회에 잠시 복귀하기도 했으나,[9] 1575년 이탈리아를 떠나 바젤에 정착하여 성경 연구와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그의 저작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는 폴란드트란실바니아의 조르지오 비안드라타의 주목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1]

1578년, 비안드라타의 초청으로 트란실바니아로 가서 반삼위일체론 주교 페렌츠 다비드와 그리스도 숭배 문제를 놓고 논쟁했으나 설득에 실패했다. 이 사건 이후 소치니는 폴란드로 이주하여 남은 생애를 보냈다. 처음에는 세례에 대한 견해 차이로 폴란드의 반삼위일체 교회인 '에클레시아 마이너'에서 배척받기도 했지만,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여 교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양심적 병역 거부를 옹호하고, 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자신의 견해에 가깝게 이끌었으며, 트란실바니아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폴란드 귀족 크리스토프 모르슈틴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딸 아그네스를 두었으나 아내는 일찍 사망했다. 이탈리아에서의 재산 지원이 끊기자 자신의 이름으로 저술을 출판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1598년 크라쿠프에서 폭도들에게 습격당하고 추방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친구들의 도움으로 루스워비체에 정착하여 지내다가 1604년 사망했다. 그의 사상은 이후 소치니주의로 발전하여 유럽 유니테리언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1. 초기 생애 (1539-1561)

파우스토 소치니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시에나 공화국의 수도 시에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알레산드로 소치니이고 어머니는 아그네세 페트루치로, 그녀는 보르게세 페트루치(1490년 출생)의 딸이자 판돌포 페트루치의 손녀였다. 그는 외아들이었다.

아버지 알레산드로는 1509년에 태어나 1541년에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파우스토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누이 필리데와 함께 집에서 자랐으며, 가족 별장인 [https://web.archive.org/web/20100609185710/http://www.borgoscopetorelais.it/en/relais.html 보르고 스코페토]에서 독서를 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평생 강한 도덕성을 지녔는데, 이는 집안의 여성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초기 지적 자극은 삼촌 첼소 소치니에게서 비롯되었다. 첼소는 명목상 로마 가톨릭 신자였지만 자유로운 사상가였고, '아카데미아 델 시치엔티'(1554년)라는 단체를 잠시 운영했는데, 젊은 파우스토도 이 단체의 일원이었다.

1556년, 할아버지 마리아노 소치니(젊은이)의 유언에 따라 파우스토는 장남의 외아들로서 가문 재산의 4분의 1을 상속받아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다음 해인 1557년에는 시에나 지성계의 중심이었던 ''아카데미아 델리 인트로나티''에 들어갔다.[7] 그는 '프라스탈리아토'라는 이름으로, 삼촌 첼소는 '손나키오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7] 이 시기 법학자 구이도 판치롤리[8]는 그를 법조계에서 성공할 만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이로 평가했지만, 정작 파우스토는 법률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소네트를 쓰는 것을 더 즐겼다.

1558년부터 1559년 사이에는 삼촌 첼소 및 카밀로와 함께 루터교 신자라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2. 2. 리옹과 제네바 시절 (1561-1563)

1561년 성년이 된 소치니는 리옹으로 이주했으며, 이곳에서 상업에 종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삼촌 렐리오 소치니가 사망한 후 이탈리아를 다시 방문했다. 1562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이탈리아 교회의 명부에 그의 이름이 등재되었으나, 칼뱅과의 직접적인 교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소치니는 다음 해인 1563년에 다시 리옹으로 돌아왔다.

당시 개신교의 일반적인 복음주의 신학은 그에게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는 성경 연구를 통해 독자적인 신학 사상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는데, 1562년 리옹에서 저술한 성 요한 복음서 서문에 대한 주석서 ''Brevis explicatio''에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도가 본질적인 신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공식적인 신성만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이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반삼위일체론적 입장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1563년에 작성된 편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즉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 때까지 잠든 상태에 있다는 영혼 수면설을 옹호하며, 전통적인 영혼 불멸 사상을 거부했다. 이러한 입장은 그가 인문주의자 프란체스코 푸치와 벌인 논쟁 과정에서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

2. 3. 피렌체 시절 (1563-1575)

1563년 말,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가톨릭 교회에 복귀했다. 그의 미공개 서신에 따르면, 12년 동안 그는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의 딸인 이사벨라 데 메디치를 섬겼다. 이는 사무엘 프시프코프스키가 주장한 것처럼 대공 자신을 직접 섬긴 것은 아니었다.[9] 1565년에서 1568년 사이에는 에세이 ''Il Frastagliato Intronato''를 썼다.[10] 소치니는 이 시기를 다소 낭비했다고 생각했지만, 1567년까지는 법률 관련 업무에도 관여했으며, 1570년에는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담은 논문 ''De auctoritate s. scripturae''를 저술했다.

1571년에는 후원자인 이사벨라와 함께 로마를 방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575년 말 이탈리아를 떠났다. 이후 후원자였던 이사벨라가 1576년 사망하자(그녀의 남편에게 살해당했다는 설이 있다), 그녀의 오빠인 프란체스코 대공은 소치니에게 돌아올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프란체스코 대공은 소치니가 이탈리아를 떠난 진짜 이유에 대해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무엘 프시프코프스키는 프란체스코 대공이 소치니에게 그의 이름으로 어떤 것도 출판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재산 수입을 보장해주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상당히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여겨진다.

2. 4. 바젤 시절 (1575-1578)

소치니는 바젤에 정착하여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시편을 이탈리아어 운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점점 청력이 나빠졌지만, 신학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자크 쿠에와 구원 교리를 두고 벌인 논쟁은 1578년 7월 12일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라는 논문을 완성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논문은 필사본 형태로 퍼져나갔고, 이를 통해 폴란드트란실바니아 궁정 의사이자 이단으로 지목된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던 조르지오 비안드라타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11]

2. 5. 트란실바니아 시절 (1578-1579)

트란실바니아는 잠시 동안(1559–1571) 초대 유니테리언 군주 존 지그문트 치하에서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누렸으나, 소치니가 도착할 당시의 통치자 크리스토퍼 바토리는 예수회를 선호했다. 당시 폴란드와 트란실바니아 궁정 의사이자 종교계의 배후 인물이었던 조르지오 비안드라타는 뛰어난 반삼위일체론 주교 페렌츠 다비드 (1510–1579)의 유대교적 경향을 제한하고자 했다. 이전에는 다비드와 협력했던 비안드라타였으나, 관계가 악화되자 그리스도 숭배를 포기한 다비드와 논쟁하기 위해 소치니를 초청했다.

소치니는 예배 문제에 있어, 모든 기독교인에게 필수적인 마음의 존경인 ''adoratio Christi''(그리스도에 대한 숭배)와 단순히 허용되는 ''invocatio Christi''(기도에서의 직접적인 호소)를 구분했다. 비안드라타는 후자를 의무화하려 했으나, 소치니의 견해로는 누구에게 드리든 기도는 중재자로서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전달되는 것이었다.

1578년 11월, 소치니는 폴란드를 떠나 콜로즈바르에 도착하여 다비드의 집에서 4개월 반 동안 머물렀다. 그는 이 수정된 기도 교리로 다비드를 설득하려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다. 오히려 다비드는 설교단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형태의 '예배'를 비난하는 데 더욱 힘을 쏟았다. 결국 다비드는 혁신 혐의로 민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소치니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폴란드로 돌아갔으며, 비안드라타의 행동에 직접 공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다비드가 데바 요새에 투옥되어 3개월도 채 안 되어 사망한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치니는 일반 종교 회의의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다비드의 설교를 금지하는 데 동의했으며, 이 사건에 대한 그의 언급들은 신학적 혐오감이 그의 타고난 친절함을 무디게 하고 인물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의 평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 6. 폴란드 시절 (1579-1604)

파우스토 소치니는 1579년부터 사망하는 1604년까지 남은 생애를 폴란드에서 보냈다. 폴란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는 세례에 대한 독특한 견해 때문에 '에클레시아 마이너'(Latin: Ecclesia Minor, 소규모 교회) 또는 주로 재세례파 성향의 반 삼위일체 교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세례가 오직 이방인 개종자에게만 필요한 의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차 영향력을 키워 해당 교회의 시노드(종교회의)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파우스토 소치니의 루스워비체 묘소


폴란드 형제단은 건강이 악화된 브제진의 그레고리 파울리를 대신하여 소치니에게 양심적 병역 거부 입장을 옹호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벨라루스 출신의 시몬 부드니와 그리스 출신의 유니테리언 야코부스 팔레올로구스 등 다른 사상가들과의 논쟁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활동을 통해 소치니는 폴란드인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존경을 받게 되었다.

소치니는 '에클레시아 마이너' 내 아리우스파적 경향을 가진 이들을 설득하여 그리스도의 선재(예수가 세상 창조 이전에 존재했다는 믿음)를 부정하는 초기 유니테리언 입장으로 이끌었다.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기도'(invocation)를 거부했던 입장에서 돌아서도록 설득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에 굴복하지 않는 준(semi)아리우스파를 억압하기도 했다. 그의 영향력은 폴란드를 넘어,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트란실바니아의 반 삼위일체 교회 정책에도 미쳤다.

1583년, 소치니는 크라쿠프를 떠나야 했고, 폴란드 귀족 크리스토프 모르슈틴의 후원을 받으며 그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1586년에는 모르슈틴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1587년, 딸 아그네스(1587-1654)가 태어났으나 안타깝게도 아내 엘리자베스는 출산 몇 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 딸 아그네스는 훗날 안드레아스 비쇼와티의 아버지인 스타니스와프 비쇼와티와 결혼하여 많은 후손을 두었다.

같은 해(1587년)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가 사망하자, 일부 전기 작가들은 이 사건으로 소치니가 이탈리아 재산을 잃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그의 미발표 서신에 따르면, 그는 새로운 대공 페르디난도 1세 데 메디치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재산 문제는 오히려 그의 할아버지 유언 해석을 둘러싼 가족 간의 분쟁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1590년 10월, 시에나의 성무 심문소는 그를 상속에서 제외하고 대신 연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으나, 실제로 연금이 지급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로부터의 재정 지원이 끊기자, 자신의 저작물을 익명으로 출판하기로 했던 약속은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소치니는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바로 반발을 불러일으켜, 1598년 크라쿠프에서 폭도들이 그의 집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그를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크라쿠프에서 추방되었다. 다행히 친구들이 그를 기꺼이 도와 크라쿠프에서 동쪽으로 약 약 48.28km 떨어진 루스워비체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소치니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결장과 요로 결석으로 고통받다가 1604년 3월 4일에 사망했다. 그의 무덤에는 비문이 새겨진 석회암 덩어리가 놓여 있으나, 현재는 글자를 판독하기 어렵다. 그의 판화 초상화는 그의 저작물 서두에 실려 전해지지만 원본은 남아있지 않으며, 과거 시에나에 있었다고 알려진 유화 초상화는 진품으로 보기 어렵다.

3. 사상

소치니 사상의 핵심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에 대한 비판과 인간 이성자유의지에 대한 강조에 있다. 그는 삼위일체, 원죄, 예정설과 같은 핵심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신성을 부정하고, 신이 임명한 통치자이자 도덕적 모범으로서 공식적인 신성을 지닌 인물로 보았다. 이는 그의 초기 저작에서부터 드러나는 반삼위일체론적 입장이었다. 그는 예배 문제에 있어서 모든 기독교인에게 필수적인 마음의 존경인 ''adoratio Christi''(그리스도에 대한 숭배)와, 단순히 허용될 뿐인 ''invocatio Christi''(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기도)를 구분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문자적 해석보다는 이성적 판단을 통한 해석을 중시했다. 그는 성경 연구를 통해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고자 했다.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을 미리 안다는 예정설의 개념을 부정했다. 그는 인간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고 영혼 수면설을 지지하기도 했다. 세례에 대해서는 이방인 개종자에게만 해당한다고 보아,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평화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하여, 전쟁사형을 포함한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비기독교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이러한 신념은 폴란드 형제단 내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이어졌다. 더 나아가 그는 기독교인이 치안 판사와 같은 공직을 맡는 것 역시 부적절하다고 보았다.

소치니의 이러한 사상은 폴란드 형제단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소치니주의라는 독자적인 신학 흐름을 형성했으며, 후대 계몽주의 사상과 유니테리언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3. 1. 주요 저작

소치니는 여러 중요한 신학 저작을 남겼다.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친 초기 작품으로는 성 요한 복음서 서문에 대한 주해인 ''Brevis explicatio''(1562)가 있는데, 여기서 그는 이미 그리스도에게 본질적인 신성이 아닌 공식적인 신성을 부여하며 반삼위일체론적 입장을 보였다. 또한 1563년 편지에서는 영혼 불멸을 거부하고 영혼 수면을 선호했는데, 이는 인문주의자 프란체스코 푸치와의 논쟁에서 발전시킨 입장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이사벨라 데 메디치를 섬기던 시기(1563-1575)에는 에세이 ''Il Frastagliato Intronato''(1565-1568)를 썼고[10], 1570년에는 그의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인 ''De auctoritate s. scripturae''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를 집필했다. 이 책은 로페스라는 인물이 1588년 자신의 저작이라 주장하며 출판하기도 했으나[9], 소치니의 근본적인 입장과는 반대로 인간이 본성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서문을 덧붙였다. 프랑스어 번역본(1592)은 바젤의 목사들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에드워드 쿰 신부의 영어 번역본(서머싯 1731)은 리처드 스몰브로크 주교가 후고 그로티우스가 그의 저서 ''De veritate Christ. rel.''에서 이 책을 참고했다고 칭찬한(1728) 결과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작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신뢰할 만한 저자들의 글에 기반한 역사적 논증을 선구적으로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소치니 자신은 기독교 증거의 핵심적인 어려움에 대해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고 보고(1581), 나중에 ''Lectiones sacrae'' (미완성)에서 그 입장을 재구성하려 했다.

바젤 망명 시기(1575년 이후)에는 성경 연구에 몰두하며 시편을 이탈리아어 운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또한 자크 쿠에와의 구원 교리 논쟁 끝에 1578년 7월 12일 또 다른 주요 저작인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 (De Jesu Christo servatore)를 완성했다. 이 책은 필사본으로 유통되며 폴란드트란실바니아의 조르지오 비안드라타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11] 이 책은 신학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으며, 정통과 이단을 근본적인 대립 관계에 놓이게 하고, 종교의 주요 개인적 이점에 대한 갈등을 좁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치니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인격보다는 그의 직무(office)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리스도가 이룬 구원을 윤리적인 개념으로 다루었다.

1584년에는 칼뱅주의자 앤드루 윌런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De Jesu Christi natura''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하여)를 저술하여 비안드라타에게 헌정했으나, 비안드라타가 가톨릭 교회로 복귀하면서 출판되지 못했다.

소치니는 자신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무신론을 반박하는 ''Contra atheos''를 꼽았지만, 안타깝게도 1598년 크라쿠프 폭동 때 소실되었다. 이후 자신의 체계를 전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여러 작품을 시작했지만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의 저작들은 사후 손자인 안제이 비쇼바티와 인쇄업자 프란스 퀴퍼가 편집하여 두 권의 책으로 묶어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다. 이는 ''폴란드 형제단 서고''(Bibliotheca Fratrum Polonorum)의 처음 두 권으로 간주되지만, 실제로는 요한 크렐과 요나스 슐링트의 저작이 먼저 인쇄되었다. 이 모음집에는 예정론에 관한 논문(여기서는 하나님이 자유 의지의 행동을 미리 아신다고 부정함)과 학교 교재 개정본인 ''Instrumentum doctrinarum aristotelium''(1586)을 제외한 그의 현존하는 모든 신학 저술이 포함되어 있다.

소치니는 여러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펠릭스 투르피오 우르헤베타누스(Felix Turpio Urhevetanus), 프로스페르 디시데우스(Prosper Dysidaeus), 그라티아누스 프로스페르(Gratianus Prosper), 그리고 그라티아누스 투르피오 게라폴렌시스(세넨시스)(Gratianus Turpio Gerapolensis (Senensis)) 등이 있다. 그의 초기 시 중 일부는 ''Ferentillis Scielta di stanze di diversi autori toscani''(1579, 1594)에 수록되어 있으며, 다른 작품들은 Cant와 Athenaeum(1877년 8월 2일)에 실려 있고, 더 많은 작품들이 시에나에 보존되어 있다.

4. 유산 및 영향

파우스토 소치니는 1579년부터 사망하는 1604년까지 남은 생애를 폴란드에서 보내며 중요한 영향을 남겼다. 처음에는 세례에 대한 그의 견해(이방인 개종자에게만 적용 가능하다고 봄) 때문에 '에클레시아 마이너'(Ecclesia Minor) 또는 반 삼위일체 교회(주로 재세례파)에서 배제되었으나, 점차 그 교회의 시노드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폴란드 형제단의 요청을 받아, 브제진의 그레고리 파울리가 병약해진 후 시몬 부드니와 야코부스 팔레올로구스 등에 맞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옹호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폴란드인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존경을 받았다.

신학적으로 소치니는 '에클레시아 마이너'의 아리우스파 분파를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믿음에서 초기 유니테리언의 입장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호출'(invocatio Christi) 거부에서 개종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설득에 실패한 반유대주의자들을 억압하기도 했다. 또한 친구들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 트란실바니아의 반 삼위일체 교회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1583년 크라쿠프를 떠나 폴란드 귀족 크리스토프 모르슈틴의 집에서 지내며 그의 딸 엘리자베스와 1586년 결혼했다. 그러나 아내 엘리자베스는 딸 아그네스(1587-1654)를 낳은 지 몇 달 만에 사망했다. 아그네스는 훗날 안드레아스 비쇼와티의 아버지인 스타니스와프 비쇼와티와 결혼하여 많은 후손을 남겼다. 1587년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가 사망하면서 소치니는 이탈리아 재산 상속에 어려움을 겪었다. 가족 간의 분쟁과 1590년 시에나의 성무 심문소 결정으로 상속에서 제외되었고, 약속된 연금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로부터의 재정 지원이 끊기자 익명으로 저술 활동을 하던 합의가 깨졌고, 소치니는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을 시작했다. 그 결과 1598년 크라쿠프에서 폭도들에게 집이 파괴되고 폭행을 당한 뒤 추방되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크라쿠프 동쪽의 루스워비체에 정착했으나, 오랫동안 지병으로 고통받다가 1604년 3월 4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루스워비체에 있으며, 비문이 새겨진 석회암 덩어리로 표시되어 있다.

5. 평가



파우스토 소치니는 종교개혁 시대의 급진적인 사상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신학은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선재를 믿지 않는 등 당시 주류 기독교 신학과 큰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입장은 그가 활동했던 폴란드의 '에클레시아 마이너'(소교회) 내에서도 초기에는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세례는 이방인 개종자에게만 해당한다고 본 그의 견해는 재세례파가 다수였던 '에클레시아 마이너'에서 처음에는 배척받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소치니는 점차 폴란드 내 반 삼위일체 진영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는 '에클레시아 마이너'의 아리우스파 분파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초기 유니테리언의 입장으로 돌아서게 했으며, 그리스도를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거부하는 이들도 개종시켰다. 또한, 양심적 병역 거부를 강력히 옹호하며 실천적인 신앙을 강조했는데, 이는 당시 폴란드 사회에서 어느 정도 존경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영향력은 트란실바니아의 반 삼위일체 교회에까지 미쳤다.

소치니의 급진적인 사상은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결국 박해로 이어졌다. 1598년 크라쿠프에서는 그의 저작 출판을 문제 삼은 폭도들에 의해 집이 파괴되고 폭행을 당한 뒤 도시에서 추방당했다. 이후 친구들의 도움으로 루스워비체에 정착했으나, 1604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현대적 관점에서 소치니는 이성자유의지를 중시하고 교리보다는 윤리적 실천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인문주의적 전통을 계승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종교적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며 양심적 병역 거부와 같은 실천적 주장을 펼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그의 반삼위일체론적 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학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참조

[1] 백과사전 SOZZINI (Socini), Fausto https://www.treccani[...] Treccani 2023-01-18
[2] 서적 Reason and Religion in the English Revolution: The Challenge of Socinian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Radical Reformation Penn State University Press
[4] 논문 "Poland's Contribution to the Reformation: Socinians/Polish Brethren and Their Ideas on the Religious Freedom," The Polish Review, Vol. XXXVIII, No.4, pp. 447–468, 1993. M. Hillar, "From the Polish Socinians to the American Constitution," in A Journal from the Radical Reformation. A Testimony to Biblical Unitarianism, Vol. 4, No. 3, pp. 22–57, 1994. M. Hillar, "The Philosophical Legacy of the XVIth and XVIIth Century Socinians: Their Rationality." in the book "The Philosophy of Humanism and the Issues of Today," eds. M. Hillar and F. Prahl, pp. 117–126, American Humanist Association, Houston, 1995. Marian Hillar, "The Philosophical Legacy of the 16th and 17th Century Socinians: Their Rationality." In The Proceedings of the Twentieth World Congress of Philosophy, Alan M. Olson, Executive Editor, Vol 4. Philosophies of religion, Art, and Creativity, Kevin Stoehr (ed.), (Charlottesville, Virginia: Philosophy Documentation Center, 1999) Marian Hillar, "The XVIth and XVIIth Century Socinians: Precursors of Freedom of Conscience, of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and of the Enlightenment." In Essays in the Philosophy of Humanism, Vol. 9, pp. 35–60, 2001, eds. Robert D. Finch, Marian Hillar, American Humanist Association, Houston, TX 2001. Marian Hillar, "Laelius and Faustus Socinus Founders of Socinianism: Their Lives and Theology." Part 1. Journal from the Radical Reformation. Testimony to Biblical Unitarianism, Vol. 10, No. 2. Winter 2002. pp. 18–38. Marian Hillar, "Laelius and Faustus Socinus Founders of Socinianism: Their Lives and Theology." Part 2. Journal from the Radical Reformation. Testimony to Biblical Unitarianism, Vol. 10, No. 3. Spring 2002. pp. 11–24.
[5] 서적 A History of Unitarianism: In Transylvania, England, and America Harvard University Press
[6] 간행물 The Biblical Hermeneutics Of Socinians And Remonstrants In The Seventeenth Century https://brill.com/vi[...] 2009
[7] 웹사이트 (o Socini, Sozini, Sozzino, Socino o Socinus), Fausto Paolo (1539–1604) e Socinianesimo in Polonia in Dizionario Del Pensiero Cristiano Alternativo http://www.eresie.it[...]
[8] 문서 De claris legum interpretibus J.F. Gleditsch 1637
[9] 서적 Faustus Socinus
[10] 서적 Italian reformation studies in honor of Laelius Socinus https://books.google[...] Felice Le Monnier 1965
[11] 서적 A demonstration of the truth of the Christian religion... 1732
[12] 문서 "Il vendicatore dell'umana ragione contro il supernaturale" in Piero Chiminelli ''Il contributo dell'Italia alla riforma religiosa in Europa''
[13] 웹사이트 ファウスト・ソッツィーニ http://homepage3.nif[...]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