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팽성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팽성 전투는 기원전 205년, 초한 쟁패 시기 유방과 항우 간에 벌어진 전투로, 항우의 기습으로 유방의 연합군이 대패한 사건이다. 유방은 초나라의 수도 팽성을 기습 점령했으나, 항우의 반격에 60만 대군이 궤멸되고 가족을 인질로 잡히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로 유방은 일시적으로 위기에 몰렸지만, 한신의 활약과 전략 재정비를 통해 세력을 회복하고, 결국 항우에게 복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팽성 전투는 항우의 자만과 전략적 실책, 그리고 유방의 끈질긴 생존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205년 - 포이니케 조약
    포이니케 조약은 기원전 205년 로마 공화국과 마케도니아 왕국 간에 체결된 강화 조약으로,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종결짓고 로마와 마케도니아의 특정 지역 통제를 인정했으며, 여러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 세력들이 참여하여 로마의 그리스 지역 영향력 확대의 배경이 되었다.
  • 초한전쟁 - 해하 전투
    해하 전투는 기원전 202년 초한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한신의 한나라 연합군이 항우의 초나라 군대를 포위 섬멸하여 유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한나라를 건국하게 된 전투이며, 항우는 오강에서 자결했고 사면초가의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 초한전쟁 - 항장
    항장은 초한쟁패기 항우의 사촌 동생이자 항량의 조카로, 홍문연에서 유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검술 실력 뛰어난 인물이며, 그의 행적은 "항장무검, 의재패공" 고사의 기원이 된 후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 한나라가 참가한 전투 - 해하 전투
    해하 전투는 기원전 202년 초한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한신의 한나라 연합군이 항우의 초나라 군대를 포위 섬멸하여 유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한나라를 건국하게 된 전투이며, 항우는 오강에서 자결했고 사면초가의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 한나라가 참가한 전투 - 곤양 전투
    곤양 전투는 23년 왕망의 신나라와 유현의 한나라 재건 세력 간의 전투로, 유수가 이끄는 소수 군대가 신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후한 건국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고 왕망의 신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팽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부분전초한전쟁
시기기원전 205년 4월
장소팽성
결과초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서초
교전국 2한 연합군
지휘관 및 지도자
서초항우
한 연합군유방
병력
서초30,000명
한 연합군560,000명
피해 규모
서초알 수 없음
한 연합군200,000명 이상

2. 배경

기원전 205년 봄, 서초의 항우제나라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기원전 206년 말부터 시작된 제나라 원정은 항우의 강경책으로 인해 오히려 저항이 거세져 성양 공략에 실패하는 등 교착 상태에 빠졌다.[1]

이 시기 한왕 유방한신 등 유능한 인재들의 도움으로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기원전 206년 관중 지방을 평정한 유방은 동쪽으로 진출하여 하남, , , 은 등을 차례로 복속시키며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2]

결정적으로 항우가 기원전 206년 10월, 명목상의 군주였던 초 의제를 암살한 사건[3]은 유방에게 항우를 공격할 수 있는 중요한 명분을 주었다. 기원전 205년 4월, 유방은 의제의 죽음을 애도하며 항우 토벌을 공식 선언하고 여러 제후들에게 동참을 촉구하는 격문을 보냈다.[4] 이에 조나라를 비롯한 여러 제후들이 호응하여[5] 약 56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유방은 이 연합군을 이끌고 항우의 수도인 팽성으로 진격할 준비를 마쳤다. 당시 한나라의 대원수 한신관중에 남아 옹왕 장한의 잔존 세력을 소탕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6]

2. 1. 항우의 제나라 원정과 유방의 세력 확장

기원전 207년, 을 제압한 항우는 스스로 패왕을 칭하며 여러 장수에게 봉토를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 봉토 분배는 항우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따라 이루어져 많은 불만을 샀다. 또한 항우는 반진 세력의 명목상 지도자이자 자신의 주군이기도 했던 초 의제를 변방으로 쫓아낸 뒤 살해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봉건 이후 항우에게 불만을 품은 여러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항우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특히 제나라에서는 전영이 항우의 분봉에 반발하여 독자적으로 제나라를 통일하려 했다. 이에 항우는 기원전 206년 12월, 제나라를 침공하여 기원전 205년 1월에는 성양 부근에서 전영을 격파했다. 전영은 평원으로 도망쳤으나 그곳 주민들에게 살해당했다. 항우는 왕족인 전가를 새로운 제나라 왕으로 세웠지만, 저항은 계속되었다. 전영의 동생 전횡이 흩어진 제나라 군사 수만 명을 모아 항전했다. 항우는 산둥반도 북부 해안까지 진격하며 마을을 불태우고 포로를 생매장하며, 여성과 노약자를 납치하는 등 잔혹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이러한 잔혹 행위는 오히려 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전횡은 성양에서 전가를 격파하고 살해했다. 기원전 205년 3월, 전횡은 전영의 아들 전광을 새로운 제나라 왕으로 옹립했다.[1] 항우는 성양을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제나라에서 발이 묶였다.

항우가 제나라 문제에 몰두하는 사이, 유방은 세력을 크게 확장할 기회를 잡았다. 한신의 활약으로 관중 지방의 삼진(장한, 사마흔, 동예)을 격파하고 기원전 206년 9월까지 관중을 확보한 유방은[6] 이를 발판 삼아 중원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원전 206년 10월 하남을 병합하고, 11월에는 한나라를 복속시켰으며, 기원전 205년 3월에는 위나라와 음나라까지 세력권에 넣었다.[2]

결정적으로 유방은 항우가 초 의제를 암살한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항우는 기원전 206년 1월 스스로 서초패왕이 되면서 의제에게 황제(의제) 칭호를 부여했지만, 이는 명목상의 칭호일 뿐 실권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같은 해 4월, 항우는 의제를 수도 팽성에서 양쯔강 남쪽의 외딴 현인 진(郴)으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10월에는 의제가 여전히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부하인 구강왕 영포, 형산왕 오예, 임강왕 공오에게 명령하여 의제를 암살하게 했다.[3]

기원전 205년 4월, 유방은 이 사건을 명분 삼아 항우 토벌을 선언했다. 그는 흰 옷을 입고 3일간 의제를 위해 상을 치르는 의식을 거행하며 다른 제후왕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천하의 의제는 모든 백성의 군주이시며, 우리 모두는 그분을 섬겨야 할 신하이다. 그런데 항우가 의제를 양쯔강 남쪽으로 옮겨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렀다. 나는 관중의 모든 군대와 하내, 하동, 하남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의제를 시해한 역적 항우를 치고자 하니, 모든 제후들은 군대를 이끌고 동참하라."[4] 이 선언에 호응하여 여러 제후들이 유방에게 합류했다. 조나라의 실권자 진여는 과거 유방의 부하였던 장이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유방이 장이와 닮은 죄인의 목을 보내 장이를 처형한 것처럼 속이자 군대를 보내 지원했다.[5] 또한 한, 위(서위), 조, 은, 하남, 새, 적의 여러 제후들도 유방과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유방은 약 56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연합군을 형성하여 항우의 수도 팽성을 향해 진격할 준비를 마쳤다. 한편, 대원수 한신은 옹왕 장한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관중에 남아 있었다.[6]

2. 2. 초 의제 암살과 유방의 명분

기원전 207년, 을 제압한 항우가 패왕을 칭하며 여러 장수들에게 봉건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봉건은 항우와의 관계에 따라 일방적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많은 제후들의 불만을 샀다. 특히 반진 세력의 명목상 맹주이자 항우의 주군이기도 했던 의제를 기원전 206년 1월 황제(실제로는 섭정 황제에 가까움)로 추대하면서도[3] 실권을 빼앗고, 같은 해 4월에는 수도 팽성에서 양쯔강 남쪽의 외딴 현인 진현(郴縣)으로 강제로 추방하였다.[3] 의제의 신하 대부분은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결국 10월, 항우는 의제가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부하 장수들인 구강왕 영포, 형산왕 오예, 임강왕 공오에게 명령하여 의제를 암살하게 했다.[3]

한편, 봉건 이후 항우에게 불만을 품은 제나라전영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항우는 기원전 206년 12월부터 제나라 정벌에 나섰다. 항우는 성양 부근에서 전영을 격파하고 산둥반도 북부까지 진격했으나, 그의 잔혹한 통치 방식은 오히려 저항을 키웠다. 전영의 동생 전횡이 반격을 이끌었고, 기원전 205년 3월에는 전영의 아들 전광을 새로운 제나라 왕으로 세우며 항우에게 계속 저항했다.[1]

항우가 이처럼 제나라와의 전쟁에 발이 묶인 사이, 진나라를 가장 먼저 제압했음에도 변방인 한중으로 밀려났던 유방한신 등 유능한 인재를 얻어 세력을 키웠다. 그는 항우가 임명한 관중의 감시역인 옛 진나라의 세 장수(장한, 사마흔, 동예, 이들을 삼진이라 부른다)를 격파하고 기원전 206년 9월까지 관중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2] 이후 유방은 동쪽으로 진출하여 10월에 하남을 병합하고, 11월에 한나라, 기원전 205년 3월에 위나라와 음나라를 차례로 병합하며 세력을 급격히 확장했다.[2] 또한 여러 제후들과 동맹을 맺었는데, 특히 조나라의 실권자 진여는 유방의 부하 장이에게 원한이 있어 그의 목을 동맹 조건으로 요구했으나, 유방은 장이와 닮은 죄인의 목을 대신 보내는 기지를 발휘하여 조나라의 지원을 얻어냈다.[5]

기원전 205년 4월, 유방은 초 의제의 암살 소식을 항우를 공격할 절호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는 흰 옷을 입고 3일 동안 상을 치르는 의식을 거행하며 의제의 죽음을 애도하고, 여러 제후왕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문을 보내 항우 토벌을 선언했다.[4]

"천하의 공동 군주이신 의제를 우리 모두 신하로서 섬겨야 마땅하다. 그런데 항우가 의제를 양쯔강 남쪽으로 내쫓아 시해하는 심각한 죄를 저질렀다. 이에 나는 관중의 모든 군사와 하내, 하동, 하남의 병력을 동원하여 제후들과 함께 의제를 시해한 자를 토벌하고자 한다."


이로써 유방은 명분을 확보하고 제후들의 군대와 연합하여 항우의 수도 팽성으로 진격할 준비를 마쳤다. 이때 한나라의 대원수 한신관중에 남아 삼진의 잔당인 옹왕 장한을 폐구(廢丘)에서 계속 포위하고 있었다.[6]

2. 3. 제후들의 이해관계와 연합군의 결성

기원전 207년 진나라가 멸망한 후, 패왕을 자처한 항우는 여러 장수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 봉건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봉건은 항우와의 개인적인 관계나 공적보다는 힘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져 많은 제후들의 불만을 샀다. 특히 항우는 반진(反秦) 세력의 명목상 지도자이자 자신의 주군이기도 했던 초 의제를 명목상의 황제로 추대했으나, 실권을 빼앗고 변방으로 쫓아낸 뒤 결국 살해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이는 제후들에게 큰 충격과 반감을 안겨주었다.

봉건 이후 항우에게 불만을 품은 제후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기원전 206년, 제나라의 실권자였던 전영은 항우의 봉건 조치에 반발하여 독자적으로 제나라를 통일했다. 이에 항우는 기원전 206년 12월 제나라를 침공하여 이듬해 1월 성양 부근에서 전영을 격파했다. 전영은 도주 중 살해되었고 항우는 전가를 새 왕으로 세웠으나, 전영의 동생 전횡이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저항을 계속했다. 항우는 산둥반도 북부까지 진격하며 가옥을 불태우고 포로를 생매장하는 등 잔혹한 방식으로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제나라 사람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전횡은 성양에서 전가를 격파하고 죽인 뒤, 3월에는 전영의 아들 전광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1] 항우는 성양을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제나라 전선에 발이 묶였다.

항우가 제나라 문제에 몰두하는 사이, 변방인 한중으로 밀려났던 유방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유방은 한신과 같은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기원전 206년 8월 관중을 기습 공격하여 9월까지 옛 진나라의 중심지를 확보했다(삼진). 이후 유방은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10월에는 하남, 11월에는 , 기원전 205년 3월에는 와 은을 차례로 복속시켰다.[2]

기원전 205년 4월, 유방은 항우가 초 의제를 살해한 사건을 초한 쟁패의 결정적인 명분으로 삼았다. 항우는 기원전 206년 4월 의제를 수도 팽성에서 양쯔강 남쪽의 외딴 현인 진(郴)으로 강제 이주시켰고, 10월에는 구강왕 영포, 형산왕 오예, 임강왕 공오에게 명령하여 의제를 살해했다.[3] 유방은 이 소식을 듣고 흰 상복을 입고 3일간 애도 의식을 치른 뒤, 모든 제후들에게 항우를 토벌하자는 격문을 보냈다. 격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천하의 공동 군주이신 의제를 항우가 강남으로 내쫓아 시해하는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렀다. 나는 관중의 모든 군대와 하(河) 지역의 군사를 동원하여 의제를 시해한 역적 항우를 토벌하고자 하니, 모든 제후들은 군대를 이끌고 동참하라."[4]

유방의 명분 있는 선언에 호응하여 한, 위, 은, 하남 등 여러 제후들이 연합군에 참여했다. 조나라의 실권자 진여는 과거 유방의 부하였던 장이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 장이의 목을 보내는 조건으로 동맹을 제안했다. 유방은 장이와 닮은 죄인의 목을 보내 진여를 속이고 조나라 군대의 합류를 이끌어냈다. 이렇게 하여 56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유방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항우의 수도 팽성을 향해 진격했다. 한편, 대원수 한신관중에 남아 아직 항복하지 않은 옹왕 장한을 비구에서 포위하는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5][6] 항우의 불공정한 봉건과 의제 살해, 그리고 제나라에서의 잔혹 행위는 제후들의 반발을 샀고, 유방은 이를 명분 삼아 세력을 규합하여 항우에 대항하는 거대한 연합 전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3. 전투 과정

초한전쟁 중이던 기원전 205년, 항우제나라의 반란을 진압하러 간 사이 유방은 제후들과 연합하여 약 56만 명의 대군으로[7] 초나라 수도 팽성을 기습했다. 팽성은 소수의 병력만 남아 있어 별다른 저항 없이 함락되었다.

팽성을 점령한 유방과 제후들이 승리에 도취해 방심한 사이, 제나라에서 급히 돌아온 항우는 정예병 3만 명을 이끌고 신속하게 이동하여 팽성을 기습했다.[8][9] 항우군은 방심하고 있던 연합군을 새벽에 공격하여 큰 혼란에 빠뜨리고 팽성 외곽의 군대까지 신속히 격파하며 팽성을 탈환했다.

퇴로가 막힌 연합군은 사수(泗水)와 수수(睢水) 강변으로 밀려났고, 항우군의 추격으로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참패를 당했다. 사마천은 이때 강물이 시체로 막힐 정도였다고 기록했다.[8][9] 이 전투로 유방의 연합군은 궤멸되었고, 유방 자신은 소수의 병력과 함께 겨우 탈출했으나 아버지 유태공과 아내 여치는 초군에게 사로잡혀 인질이 되었다.[10] 팽성에서의 패배로 유방은 큰 위기에 몰렸다.

3. 1. 팽성 함락과 유방의 자만

유방이 군사를 일으킬 무렵, 초나라항우는 제나라를 공격하고 있었다. 이 틈을 타 유방은 여러 제후들과 연합하여 약 56만 명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의 수도 팽성을 기습 공격했다.[7] 유방은 의제 살해 등을 명분으로 내세워 (漢), 한(韓), 서위(西魏), (趙), 은(殷), 하남(河南), 새(塞), 적(翟) 등 여러 나라의 군대를 규합했다.

연합군은 세 방향에서 팽성으로 진격했다.[7]

  • '''북부군''': 조참, 번쾌, 주발, 관영이 지휘했으며, 하내에서 출발하여 수무를 거쳐 백마진에서 황하를 건넜다. 이후 동남쪽으로 진군하여 정도(定陶)에서 용저와 항타가 이끄는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당과 소 지역으로 나아갔다.
  • '''남부군''': 왕릉, 설오, 왕희가 지휘했으며, 양하의 주둔지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 '''중부군''': 유방이 직접 지휘했으며, 장량, 진평, 하후영, 진희, 노관 등이 함께했다. 또한 한신(한왕), 위표(서위왕), 장이(전 상산왕) 등 제후왕들과 항복한 사마흔(새왕), 동예(적왕), 심양(하남왕), 사마앙(은왕) 등도 합류했다. 이들은 거유를 점령하고 외황을 거쳐 팽성으로 진군했다.


유방은 진군 도중 팽월과 합류하여 그를 위나라 승상으로 삼고, 옛 위나라 땅인 양 지역의 도시들을 탈환하도록 북쪽으로 보냈다.[7]

팽성의 위기를 감지한 항우는 구강영포에게 팽성 방어를 명령했으나, 영포는 병을 핑계로 이를 거절했다. 결국 팽성에는 소수의 수비 병력만 남아 있었고, 외부 지원도 없는 상태에서 56만 대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팽성을 지키던 초나라 장수들은 성 안의 재물과 항씨 일족, 미녀 등을 데리고 제나라 방면으로 도주했고, 팽성은 별다른 저항 없이 유방의 연합군에게 함락되었다.

팽성을 쉽게 점령한 유방은 자만심에 빠졌다. 과거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점령했을 때와는 달리, 그의 행동을 간언하는 신하도 없었다. 유방과 연합군 제후들은 팽성 내의 재물을 약탈하고 성 안의 여성들을 겁탈했으며, 매일같이 술잔치를 벌이며 기강이 해이해진 모습을 보였다. 연합군은 유방의 통일된 지휘 아래 움직이지 않고 각국 군대가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등 오합지졸의 면모를 드러냈다.

한편, 제나라에서 팽성 함락 소식과 부하들의 도주 소식을 들은 항우는 크게 분노하여 용저와 항타를 불러 유방을 공격할 준비를 시작했다.

3. 2. 항우의 기습과 연합군의 궤멸

제나라와의 전투를 중단하고 급히 돌아온 항우는 단 3만의 정예 병력으로 60만 대군을 이끌고 팽성을 점령한 유방의 연합군에 맞섰다.[8][9] 당시 유방과 제후들은 항우의 궁궐에서 얻은 보물과 미녀들에 취해 연회를 벌이며 방심하고 있었다. 항우는 제나라에 주력 부대는 남겨둔 채, 정예병 3만 명을 이끌고 수도 팽성을 되찾기 위해 직접 나섰다. 항우군은 몰래 (魯)와 호릉(胡陵)을 거쳐 남쪽으로 빠르게 진군하여 팽성 서쪽에 진을 치고 연합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연합군은 항우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새벽이 되자 항우의 군대는 방심하고 있던 연합군 진영을 기습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연합군은 큰 혼란에 빠져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항우군은 그날 안으로 팽성을 탈환했다. 이미 팽성 외곽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는데, 항우는 먼저 호릉에 주둔하던 번쾌의 군사 3만 명을 격파하고, 팽성 외성인 소성을 지키던 조참, 관영, 위표의 10만 군사마저 궤멸시켰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팽성 안으로 도망쳤다.

퇴로가 막힌 연합군은 큰 피해를 입으며 서쪽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항우군은 이들을 사수(泗水)와 곡수(穀水)까지 맹렬히 추격하여 10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많은 병사들이 남쪽으로 도망쳤지만, 초군은 다시 수수(睢水) 강변에서 이들을 따라잡아 공격했고, 강물에 빠져 죽은 병사가 10만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사마천은 이때 죽은 시체들이 너무 많아 강의 흐름이 막힐 정도였다고 기록했다.[8][9]

한편, 한신은 영벽에서 패잔병 25만을 모아 항우에게 맞서려 했으나, 항우의 맹렬한 돌격 앞에 수수에서 또다시 10만 명의 병사를 잃었다. 한신은 남은 병사들과 함께 강을 등지고 싸우는 배수진을 펼쳐 겨우 목숨을 건져 탈출했다. 이는 훗날 한신이 조나라를 정벌할 때 사용한 전술의 바탕이 되었다.

유방은 격전 중에 항우군에게 포위되었으나, 갑자기 불어온 거센 바람 덕분에 혼란을 틈타 소수의 기병과 함께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주하던 유방은 고향인 패 근처에서 자신의 딸(노원공주)과 아들 유영을 발견하여 마차에 태웠다. 그러나 아버지 유태공과 아내 여치는 이미 초군에게 사로잡혀 항우의 인질이 되었다.[10] 극도의 공포에 질린 유방은 마차가 느려질 것을 염려하여 세 번이나 아이들을 마차 밖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마부였던 하후영이 그때마다 아이들을 다시 태워 위기를 넘겼다.[11] 또한, 유방은 자신을 추격해 온 초나라 장수 정고에게 "어찌 두 호걸이 서로를 해치려 하는가?"라고 설득하여 포위를 풀게 하고 목숨을 건졌다. 훗날 초한 전쟁이 끝난 뒤 유방은 정고를 처형하며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놓아준 정고의 행동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3. 3. 유방의 도주와 가족의 희생

팽성 전투에서 대패한 유방의 연합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항우는 새벽에 팽성 서쪽을 기습 공격하여 수많은 한나라 군사를 죽였다. 패주하는 연합군을 추격하여 수수(睢水) 강가에서 다시 10만여 명을 학살했는데, 사마천은 이때 강물이 시체로 막힐 정도였다고 기록했다.[8][9]

이 아수라장 속에서 유방은 겨우 수십 기의 기병과 함께 탈출했다. 사마천은 갑자기 불어온 거센 바람 덕분에 유방이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도주하던 유방은 고향인 패 근처에서 가족을 찾으려 했으나, 아버지 유태공과 아내 여치는 이미 초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혀 인질이 된 후였다.[10] 다행히 아들 유영과 딸 노원공주를 찾아 함께 마차에 태우고 도망쳤다.

그러나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 유방은 마차가 빨리 달리지 못한다며 아이들을 세 번이나 마차 밖으로 밀어 떨어뜨리려 했다. 그때마다 마부였던 하후영이 아이들을 다시 태워 목숨을 구했다.[11] 이 일화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 유방의 인간적인 나약함과 하후영의 충성심을 동시에 보여준다.

도주 과정에서 유방은 정고가 이끄는 초나라 추격군에게 따라잡히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유방은 정고에게 "호걸끼리 서로 해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설득하여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훗날 초한 전쟁에서 승리한 유방은 정고를 처형하며 "신하로서 주군을 배신한 자의 말로"라며 그의 행동을 비판하고, 다른 신하들에게 경고하는 냉혹한 모습을 보였다.

4. 결과

팽성 전투의 패배로 유방은 일시적인 위기에 몰렸고, 아버지와 아내가 인질로 잡히는 등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12] 동맹을 맺었던 제왕 전광, 조왕 헐, 서위왕 위표 등 많은 제후들이 유방에게 등을 돌리고 항우에게 투항했다.[12] 위나라, 대나라, 조나라가 항우에게 넘어갔고, 사이 왕 사마흔과 채 왕 동예도 투항했으며, 전 음왕이었던 사마앙은 전투 중 실종되었다.[12]

항우는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점령한 한나라 군대에게 약탈당한 수도 팽성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직접 돌아감으로써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다는 평가를 받는다.[13][14] 항우가 보낸 추격군은 관중에서 증원군을 이끌고 온 한신에게 격파당했다.[13][14]

유방은 하읍, 우현 등을 거쳐 피신한 뒤 형양에 도착하여 한신과 함께 군대를 재정비했다.[15] 장량의 조언에 따라 구강왕 영포를 설득하는 한편, 형양과 인근의 성고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오창의 곡창과 연결되는 보급로를 확보하며 장기전에 대비했다.[15][16] 또한 관영에게 기병대를 맡겨 항우의 기병에 맞서게 하고, 팽월에게는 초나라의 보급선을 교란하도록 지시했다.[18][19]

항우의 주력이 형양과 성고로 집중되면서 이 지역은 치열한 공방전의 중심지가 되었고, 전쟁은 기원전 203년까지 이어지는 소모전 양상으로 변모했다.[20][21] 팽성 전투는 초한전쟁의 중요한 분기점이었지만, 항우의 결정적인 승리로 이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유방에게 재정비할 시간을 주었고, 전쟁의 주도권은 한신이 북중국을 공략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다음 결정적인 전투는 기원전 205년 8월, 북쪽에서 벌어진 한신의 위나라 정복이었다.[22]

4. 1. 한나라 연합군의 와해와 제후들의 이탈

팽성 전투의 패배는 유방에게 큰 위기를 가져왔다. 동맹을 맺었던 제왕 전광, 조왕 헐, 서위왕 위표 등이 유방에게 등을 돌렸고,[12] 위나라, 대나라, 조나라 역시 항우에게 투항했다. 사이 왕 사마흔과 채 왕 동예도 항우에게 넘어갔으며, 전 음왕이었던 사마앙은 전투 중 행방불명이 되었다.[12] 진여는 도망치는 과정에서 장이를 보았다는 병사들의 보고를 듣고 분노하여 유방과 적대하게 되었다.

항우는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점령한 한나라 군대에게 약탈당한 수도 팽성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직접 돌아가는 실수를 범했다. 이로 인해 승세를 몰아 유방군을 완전히 섬멸할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13][14] 항우가 보낸 초나라 추격군은 한신관중에서 이끌고 온 증원군에게 현재의 허난성 경현과 삭촌 사이에서 격파당했다.[13][14]

한편, 유방은 하이와 우를 거쳐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다. 장량의 조언에 따라 사신 수하를 구강왕 영포에게 보내 투항을 권유했다. 수하는 한신이 정형에서 승리한 후인 그해 11월에야 영포의 투항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15] 5월, 유방은 형양에 도착하여 한신과 함께 군대를 재정비하고, 형양과 인근의 성고에 강력한 수비 진영을 구축했다. 또한 성고 근처의 오창(敖倉)이라는 큰 창고를 확보하고, 황하 강둑을 따라 형양까지 이어지는 보급로를 건설했다.[15][16] 유방과 한신은 왕무, 정추, 위나라 태수 심이 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외황성을 점령하여 후방을 안정시켰다.[17]

항우의 주력 부대가 형양으로 접근하자, 유방은 관영에게 기병대를 지휘하게 하여 항우의 강력한 기병에 맞섰다. 전 진나라 기병 지휘관이었던 이필과 낙갑의 도움을 받은 관영은 형양 동쪽에서 초나라 기병을 격파하고, 이후 초나라의 보급선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8] 유방은 군벌 팽월에게도 항우의 보급선을 교란하도록 지시했고, 팽월은 기원전 203년까지 이 임무를 수행하며 항우를 괴롭혔다.[19]

6월, 한신은 폐구를 함락시키고 장한의 항복을 받아내 자결하게 만들었다. 이후 한신은 북중국 평정 계획을 세웠다. 이는 항우의 시선을 유방과의 주 전장인 형양과 성고에 집중시켜 북쪽에서의 군사 활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20][21] 항우는 형양과 성고를 점령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했고, 이 두 도시는 여러 번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공방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소모전은 기원전 203년 해하 전투까지 이어졌다.[20][21] 따라서 팽성 전투 이후 다음의 결정적인 전장은 형양-성고 라인이 아닌, 기원전 205년 8월 북쪽에서 한신이 벌인 위나라 정복이었다.[22]

유방은 한신에게 흩어진 제후들을 다시 규합하거나 제압하도록 명령했고, 진평의 건의를 받아들여 항우 진영에 이간계를 사용하여 내부 분열을 유도했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유방은 팽성에서의 참패를 딛고 점차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4. 2. 항우의 자만과 전략적 실패

팽성 전투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항우는 결정적인 실책을 범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지나친 자만심에 빠진 항우는 유방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12] 항우는 점령군에게 약탈당한 수도 팽성의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직접 돌아갔는데, 이는 전쟁 전체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최고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결정이었다.[13][14] 그는 초나라 군대에 유방군 추격을 명령했지만, 한신이 이끄는 한나라 증원군에게 허난성 경현과 삭촌 사이에서 격파당하며 추격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3][14]

반면, 큰 타격을 입고 아버지와 아내까지 인질로 잡힌 유방은[12] 하읍과 우 지역으로 피신하여 빠르게 전열을 가다듬었다. 장량의 조언에 따라 사신 수하를 보내 구강왕 영포를 설득하여 항우에게서 돌아서게 하려 시도했다. 비록 영포의 투항은 정형 전투 이후인 그해 11월에야 성공했지만, 유방은 위기 속에서도 전략적인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15][16] 5월에는 견고한 도시인 성양에 도착하여 한신과 함께 군대를 재편성하고, 성고와 함께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또한, 오창의 곡창과 성양을 잇는 보급로를 황하 강변에 건설하여 장기전에 대비하는 치밀함을 보였다.[15][16] 동시에 왕무, 정추, 심도 등의 반란을 진압하며 내부를 안정시켰다.[17]

항우의 주력이 성양으로 접근하자, 유방은 관영에게 기병대를 맡겨 항우의 강력한 기병에 맞서게 했다. 관영은 전 진나라 기병 지휘관이었던 이필과 낙가의 도움을 받아 성양 동쪽에서 초나라 기병을 격파하고, 초나라의 보급선을 교란하는 임무를 받았다.[18] 유방은 군벌 팽월에게도 항우의 보급선을 공격하도록 지시했고, 팽월은 기원전 203년까지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항우의 후방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19]

결과적으로 항우는 팽성에서의 압도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인 판단 착오로 유방에게 재기할 시간을 허용했다. 그는 유방과의 대결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한신이 북중국을 정복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는 실책을 범했다.[20][21] 항우는 성양과 성고를 점령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는 기원전 203년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소모전으로 변질되었고, 두 도시는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해하 전투 참조).[20][21] 결국 항우는 팽성 전투의 승리를 결정적인 우위로 연결시키지 못했고, 전쟁의 주도권은 점차 유방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다음 결정적인 전투는 성양-성고 전선이 아닌, 기원전 205년 8월 한신이 안읍 전투에서 위나라를 정복하면서 북쪽에서 일어나게 된다.[22]

4. 3. 한신의 활약과 전세 역전

팽성에서의 예상치 못한 대패로 유방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아버지와 아내가 항우에게 인질로 잡혔고, 위나라, 대나라, 조나라는 항우에게 투항했으며, 사이 왕 사마흔과 채 왕 동예 역시 초나라 편으로 돌아섰다. 전 음왕이었던 사마앙은 전투 중 행방불명되었다.[12] 진여는 도망칠 때 장이를 보았다는 병사들의 보고에 분노하여 한나라와 적대하게 되었다.

항우는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점령한 한나라 군대에게 약탈당한 수도 팽성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직접 돌아가야 했다. 이로 인해 항우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을 가능성이 있다. 항우는 초나라 군대를 보내 승리의 기세를 몰아 서쪽으로 한나라 군대를 추격하게 했지만, 한나라 대원수 한신관중에서 증원군을 이끌고 와 현재의 허난성에 위치한 경현과 삭촌 사이에서 초나라 추격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했다.[13][14]

한편, 유방은 하읍, 우현 등으로 피신하며 안전을 도모했다. 그는 장량의 조언에 따라 사신 수하를 구강왕 영포에게 보내 항우에게서 돌아서도록 설득했다. 수하는 한신이 정형 전투에서 승리한 후인 기원전 205년 11월에야 영포의 투항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205년 5월, 유방은 중원의 견고한 도시인 형양에 도착하여 한신과 함께 군대를 재정비했다. 형양과 인근의 성고에 강력한 수비 진영을 구축하고, 성고 근처의 오창(敖倉)이라는 대규모 곡창과 형양을 연결하는 황하 강변에 보급로를 건설하여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15][16] 또한 유방과 한신은 전 진나라 장수였던 왕무와 정추, 그리고 위나라 태수 심도 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그들의 근거지인 외황성을 점령했다.[17]

항우의 주력 부대가 형양으로 접근하자, 유방은 관영에게 기병대를 지휘하게 하여 항우의 강력한 기병 전력에 맞섰다. 전 진나라 기병 지휘관이었던 이필과 낙갑의 도움을 받은 관영은 형양 동쪽에서 초나라 기병 부대를 격파하고, 이후 초나라의 보급선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8] 유방은 군벌 팽월에게도 항우의 보급선을 공격하도록 지시했고, 팽월은 기원전 203년까지 이 임무를 수행하며 초나라를 괴롭혔다.[19]

기원전 205년 6월, 한신은 폐구 포위를 완료했고, 장한은 자결했다. 한신은 이어서 북중국을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이는 항우가 유방과의 형양, 성고 공방전에 집중하느라 북쪽 전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항우는 형양과 성고를 점령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했지만, 두 도시는 여러 번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소모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공방전은 기원전 203년까지 이어졌다(해하 전투 참조).[20][21]

이처럼 팽성 전투의 패배 이후 한나라는 큰 위기에 처했으나, 한신의 군사적 활약과 진평의 이간계 등 다양한 노력을 통해 전세를 점차 역전시키고 세력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초한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다음 주요 전투는 형양과 성고가 아닌, 기원전 205년 8월 북쪽에서 벌어진 한신의 위나라 정복이었다.[22]

5. 역사적 평가 및 영향

(작성할 내용 없음)

참조

[1] 서적 The Road to the Throne: How Liu Bang Founded China's Han Dynasty Algora
[2] 서적 The Road to the Throne: How Liu Bang Founded China's Han Dynasty Algora
[3] 서적 The Road to the Throne: How Liu Bang Founded China's Han Dynasty Algora
[4] 서적 The Road to the Throne: How Liu Bang Founded China's Han Dynasty Algora
[5] 서적 The Road to the Throne: How Liu Bang Founded China's Han Dynasty Algora
[6] 서적 The Road to the Throne: How Liu Bang Founded China's Han Dynasty Algora
[7] 서적 The Road to the Throne: How Liu Bang Founded China's Han Dynasty Algora
[8]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s: Emperor Gaozu of Han, Xiang Yu
[9] 서적 The Road to the Throne: How Liu Bang Founded China's Han Dynasty Algora
[10]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s: Emperor Gaozu of Han, Xiang Yu
[11]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 Emperor Gaozu of Han
[12]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s: Emperor Gaozu of Han, Xiang Yu, Zhang Er & Chen Yu, Wei Bao
[13]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s: Emperor Gaozu of Han, Xiang Yu, The Marquis of Huaiyin
[14] 서적 The Road to the Throne: How Liu Bang Founded China's Han Dynasty Algora
[15]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s: Emperor Gaozu of Han, Xiang Yu
[16] 서적 The Road to the Throne: How Liu Bang Founded China's Han Dynasty Algora
[17]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s: Cao Shen, Fan Kuai, Guan Ying, Jin Xi
[18]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s: Emperor Gaozu of Han, Guan Ying
[19] 서적 The Road to the Throne: How Liu Bang Founded China's Han Dynasty Algora
[20]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s: Emperor Gaozu of Han, Xiang Yu
[21] 서적 The Road to the Throne: How Liu Bang Founded China's Han Dynasty Algora
[22]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s: The Marquis of Huaiyin, Wei Bao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