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현석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현석문은 1797년 한양에서 중인 신분으로 태어난 천주교 신자이다. 그는 아버지의 순교와 누나의 순교를 겪었으며, 선교사와 교우들을 돕는 데 헌신했다. 앵베르 주교를 조선으로 맞아들이고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선교 활동에 참여했으며, 기해박해 당시에는 교회를 이끌었다. 그는 《기해일기》를 편찬하고 상하이를 왕래하며 선교사들과 연락을 취했으며, 김대건 신부의 체포 이후 교회 재산을 보호하려다 체포되어 1846년 참수형을 받았다. 현석문은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46년 사망 - 김대건
    김대건 안드레아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이자 순교자로, 천주교 신앙을 가진 가문에서 태어나 사제의 길을 걸으며 마카오와 필리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26세에 순교하였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846년 사망 - 김임이
    김임이는 조선 시대 천주교 신자이자 순교자로, 평생을 처녀로 살며 이웃을 돕고 김대건 신부의 가사도우미로 활동하다 병오박해 때 순교하여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797년 출생 - 메리 셸리
    메리 셸리는 1797년 런던에서 태어난 영국의 소설가이자 《프랑켄슈타인》으로 유명하며, 페미니즘 철학자의 딸이자 시인 퍼시 비시 셸리의 아내로서 낭만주의 시대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 1797년 출생 - 찰스 라이엘
    영국의 지질학자이자 변호사였던 찰스 라이엘은 제임스 허턴의 동일과정설을 발전시키고 대중화했으며, 대표 저서 《지질학 원리》를 통해 지구가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변화했다는 이론을 제시하여 지질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층서학, 고생물학, 빙하학 등 다양한 지질학 분야에 기여했다.
  • 연주 현씨 - 현진건
    현진건은 일제강점기의 사실주의 소설가로, 대표작으로는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등이 있으며,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을 받기도 했다.
  • 연주 현씨 - 현오석
    현오석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경제기획원, 재정경제부, 세계은행, 대통령비서실, 한국개발연구원, 기획재정부 등 주요 기관을 거치며 대한민국 경제 정책 수립에 기여한 경제관료이자 학자이며, 녹조근정훈장을 수훈받았으나 개인정보 유출 관련 발언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현석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현석문 가롤로의 순교 장면
현석문 가롤로의 순교 장면
이름현석문 가롤로
출생일1797년
사망일1846년 9월 19일
축일9월 20일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출생지서울
사망지서울 새남터
직업순교자
시복일1925년 7월 5일
시복인교황 비오 11세
시성일1984년 5월 6일
시성인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매장지알려지지 않음
상징알려지지 않음
수호알려지지 않음
성당알려지지 않음
기도알려지지 않음

2. 생애

2. 1. 출생과 가문

현석문은 1797년에 한양에서 중인 신분의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5살 되던 1801년신유박해순교하였고, 그의 누나 현경련 또한 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하였다.

2. 2. 독실한 신앙생활

현석문은 온 생애를 선교사들과 교우들을 돕는 데 바쳤다. 교황청 문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기린다.:

"그는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는 고덕과 온화하고 친절하며 순박한 성품을 지녔다."

현석문은 순교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독실한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는 헌종 2년(1836년)에 의주로 가서 앵베르 주교를 조선으로 맞아들였다. 1837년에 샤스탕 신부가 입국하자, 현석문은 그의 복사가 되어 신부와 함께 선교 여행에 동참하는 한편, 교인들의 신앙지도에 힘썼다.

1839년기해박해가 시작될 때에, 현석문은 관아자수하기를 원했지만, 선교사들이 그를 말렸고 살아남아서 교우들을 돌보라고 말했다.

앵베르 주교선교사들이 체포될 때, 현석문은 한양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주교는 순교 전에 조선교회를 맡겼다. 이 사실은 주교와 교우들이 그를 얼마나 크게 존경했는지를 보여준다. 현석문은 체포를 피하기 위해 이재영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새로 입교한 교우들을 격려했고 여러 선교지들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부금을 모아서 그들의 신앙생활을 뒷바라지 하였다.

2. 2. 1. 기해일기의 편찬

그는 아내와 누이가 순교한 후에 《조선 천주교 순교자 열전》을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기해박해가 끝나자, 그것의 편찬을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상하이까지 피해다니기도 하면서 살아남은 최희원과 모방 신부복사 최형 베드로, 이승훈 베드로의 손자 이재의 토마스 등의 협조를 받아 순교 자료를 모아서 확인 및 보충 정리하여 3년 만에 단편의 《기해일기》를 완성하였고 교우들에게 배포하였다.

2. 2. 2. 상하이 왕래

그는 빈번히 베이징으로 전령을 보내 선교사들과 연락하였다. 1845년 그는 부제 김대건과 함께 작은 나무배를 타고 상하이로 가는 험란한 항해에 동참하였고,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를 맞아들였다. 현석문은 한양으로 돌아온 뒤, 위험을 무릅쓰고 김대건 신부의 집을 자신의 명의로 등기하였다. 1846년에는 병오박해가 일어났다. 현석문은 김대건 신부의 체포 소식을 듣고 새로운 집을 구입하여 교회의 모든 재산을 그곳으로 옮겼으며, 김 신부의 처소에 남아 있던 여성 교우들을 새 집으로 피신시켰다.

2. 2. 3. 체포 및 투옥

며칠 후 그의 새 집에서 포졸들이 손쉽게 그를 체포하였는데, 이삿짐을 나르던 인부들이 고발하였기 때문이었다. 7월 11일 포졸들이 그 집을 급습할 때, 김임이 테레사와 이간난 아가타, 정철염 카타리나 그리고 우술임 수산나 등 몇 명의 여성 신도도 있었으므로, 그들도 모두 함께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현석문은 교우 수감자들을 격려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현석문이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고문을 면제 받았다고 하였다. 어쨌든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관찬 기록(《헌종실록》)에 따르면, 현석문은 1846년 9월 19일(음력 7월 29일)에 참수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또 다른 관찬 기록(《승정원일기》)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는 군문효수형도 선고받았다고 전한다.

2. 3. 순교

현석문은 1846년 9월 19일에 한양의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받았고 군문효수되었다. 김 카타리나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평온하고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가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52세였다.

3. 시복 · 시성

현석문 가롤로는 1925년 7월 5일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3] 1984년 5월 6일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2]

참조

[1] 웹사이트 http://newsaints.fai[...]
[2]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4-12-25
[3] 뉴스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https://web.archive.[...] 평화방송 2014-12-2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