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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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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국영은 1748년 한성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정조의 측근이자 왕세자 시절의 스승이었다. 정조 즉위 후 요직을 두루 거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나, 여동생 원빈 홍씨의 죽음과 효의왕후 독살 미수 사건 등으로 인해 몰락했다. 그는 1779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유배를 거쳐 178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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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홍국영
한자洪國榮
로마자 표기Hong Gukyeong
자 (이름)덕로(德老)
출생과 사망
출생일1748년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일1781년 4월 28일 (34세)
사망지조선 강원도 강릉에서 병사
신상 정보
본관풍산(豊山)
형제원빈 홍씨(누이동생)
친인척홍낙순(백부)
경주 김씨 부인(백모)
상계군 이담(양외조카)
배우자덕수 이씨 부인
부모홍낙춘(부), 우봉 이씨 부인(모)
경력
임기1776년 3월 ~ 1779년 음력 9월 26일
학력1772년 정시 문과 급제
종교
종교유교(성리학)

2. 생애 초반

홍국영(洪國榮)은 1748년 한성(漢城)에서 풍산 홍씨(豊山洪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홍낙춘(洪樂淳)이고, 어머니는 우봉 이씨로 이유(李維)의 딸이었다. 그는 홍낙춘(洪樂淳)과 그의 부인인 우봉 이씨(牛峰李氏)의 외아들이었다.[3]

그는 서울 풍산 홍씨들의 비조격인 홍이상의 8대손,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6대손으로서, 역시 영안위 후손인 혜경궁 홍씨와 11촌 지간이었다.[3] 영안위 홍주원과 정명공주의 장남 홍만용은 홍봉한, 홍인한, 홍용한, 홍준한 형제와 홍상한의 증조부였고, 홍주원의 차남 홍만형은 홍국영의 5대조가 된다. 그러나 그는 조선왕조 기준 멀지 않은 친척이었던 홍인한과 상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그의 아버지 홍낙춘에 대해 "광증이 있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는 대개 홍낙춘이 주류에 속하지 못한 인물이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로 조부 홍창한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고 백부인 홍낙순은 대과에 급제했고 숙부인 홍낙빈도 진사였으나, 홍낙춘은 원빈 홍씨가 후궁이 되기 전에는 관직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홍국영은 도성의 경화사족 집단의 일부로서 그의 고조 홍중해는 인현왕후의 고종사촌이었고, 당대에도 정순왕후 김씨[9] 외 이익보, 이정보, 홍계능, 조중회, 김이도 등과도 인척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이 예쁘장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며 시문을 잘 짓고 창을 부르기 좋아하였다 한다.

혜경궁 홍씨는 그가 예쁘장한 외모였다며 동궁(세손 산)이 그를 얼굴도 어여쁘고 슬기롭고 민첩하다 여겼다 한다. 심낙수의 《은파산고 (恩坡散稿)》에는 얼굴 생김새가 준수했다 한다. 심낙수는 은파산고에 그가 눈치가 빠르고, 행동이 민첩했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세손이 그를 총애하면서 다른 동궁 관료들을 멀리했다며, 사나이가 첩에게 혹한 모양이라고 품평했다.

그는 친척인 홍인한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혜경궁에 의하면 홍국영의 백부 홍낙순과 자신의 숙부 홍인한이 서로 원수처럼 여긴 것, 홍인한이 홍국영을 어떤 이유였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홍인한이 홍국영을 꾸짖은 일, 홍국영이 아버지 홍낙춘의 관직을 홍봉한에게 여러번 청탁하자, 홍봉한은 상중이라서 거절하다가 홍인한에게 사람을 보냈는데, 홍인한이 편지에 홍국영을 미쳤다고 적은 것을 홍국영이 보게 된 것을 이유로 들었다. 한중록에 의하면 홍인한은 홍국영에게 영안위 후손에 이런 물건이 나왔느냐며 혹평했고, 이를 듣고 홍국영은 앙심을 품었다 한다. 홍인한이 세손을 반대하면서, 세손을 보호하던 홍국영은 홍인한 역시 공격했다.

1769년 세손 산은 흥은부위 정재화 등과 함께 기방에 출입했다가 화완옹주, 홍국영 등이 각각 목격했다. 홍국영, 화완옹주 등이 각각 혜경궁 홍씨에게 알렸고, 혜경궁은 친정아버지 홍봉한을 찾아가 어린 세손이 사도세자와 같이 될까봐 염려된다며 사건 수습을 요청했다. 홍봉한은 개입하기를 거절했고, 혜경궁은 단식농성을 했다. 홍봉한이 나서서 기생들을 유배보내고 세손에게 후보고를 한 후 사건을 수습했다. 이는 왕조실록, 승정원일기에는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언급되었다.

그는 정조가 왕세자 이산(李祘)이었을 때 가장 신임하는 조력자이자 측근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4] 그는 또한 왕세자 이산의 주요 스승이기도 했다.

3. 집권기

홍국영은 1772년(영조 48년) 9월 정시(庭試: 별시의 일종) 문과에 병과 11위[10]로 급제하였다. 대과에 급제하고도 6개월간 보직을 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2월부터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이 해 4월 정민시와 함께 한림소시에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영조를 보좌하는 사관으로 봉직하기 시작했다. 한중록에서는 영조가 홍국영을 "내 손자"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774년(영조 50년) 3월, 동궁시강원 설서(說書)로 임명되었다. 세간에는 홍국영이 과거 급제와 동시에 설서에 임명되었다는 설이 퍼져있는데,[11]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정조와는 동궁시강원 설서가 되면서부터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이 당시 궁료들이 서연에서 아뢴 말들을 모아 《현각법어》(賢閣法語)[12]라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의 대부분은 홍국영의 언행이라고 한다. 《명의록》 등은 이 시기 홍국영이 "세손의 오른날개(右翼)"라고 불렸다고 적고 있다.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정조는 즉위 3일 만에 홍국영을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했고, 7월에는 승정원 최고직인 도승지로 승진시켰다. 이후 그는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거의 줄곧 도승지직을 맡았으며, 당시 도승지의 별칭인 "지신사"는 곧 홍국영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사용되었다.

1777년(정조 1년) 7월, 홍상간, 홍계능의 궁궐 자객 침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건 연루자에 호위청 무사가 포함되어 있어 호위청을 축소하고,[13]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여 홍국영을 대장에 임명하였다. 정조는 숙위대장에게 특별히 대장패와 전령패를 차게 하고, 궁궐 안팎의 경비를 모두 숙위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정조 초기의 주요 사업 중 하나는 규장각 설치인데, 홍국영은 최초로 규장각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으며, 서얼 출신 사검서관의 등용도 그의 천거로 이루어졌다.

1778년(정조 2년),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정조의 후궁이 되었으나,[15] 1년이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3. 1. 정조 즉위와 권력 장악

1776년 3월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정적이었던 홍인한, 정후겸 일당을 공격하여 숙청했다. 이어서 당론서인 《명의록》을 펴내 이 조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홍보했다. 흔히 홍인한-정후겸이 정조의 즉위를 막았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으나 이는 와전된 내용이고, 이 책에서 밝힌 공식적인 죄명은 첫째,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은 것과 둘째, 세손의 오른날개, 즉 홍국영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책에서 정조는 홍국영을 '의리의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가 자신의 즉위 과정을 도운 1등 공신(소위 동덕회원同德會員)이자 최측근임을 대내외에 천명했다.[3]

정조 1년 홍상간, 홍계능 등이 모의하여 경희궁에 자객을 침투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들을 처분하면서 다시 공초 내용을 《속명의록》에 수록하여 편찬하였다. 속명의록의 죄인들 역시 홍국영을 주된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집안의 여인들까지도 홍국영의 저주에 동원되었을 정도였다.[3]

홍국영은 정조가 왕세손 시절일 때 가장 신임하는 조력자이자 측근 중 한 명이었고, 또한 왕세손 이산의 주요 스승이기도 했다.[4] 정조 즉위 후, 홍국영은 정치와 수사 능력으로 인해 대사헌(大司憲), 금위영(禁衛營) 대장,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등으로 승진했다.[5]

홍국영은 정조 즉위 후 다음과 같은 주요 관직들을 역임하였다.

취임일관직명
1776년 3월 13일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 정3품 당상)
1776년 4월 13일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 정3품 당상)
1776년 6월 1일이조 참의(吏曹 參議, 정3품 당상)
1776년 7월 6일승정원 도승지(承政院 都承旨, 정3품 당상)
1776년 8월 8일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 정3품 당상)과 승문원 부제조(承文院 副提調, 정3품 당상) 겸임
1776년 8월 24일찬집당상(纂輯堂上) 겸임
1776년 9월 19일약원 부제조(藥院 副提調, 정3품 당상) 겸임
1776년 9월 25일규장각 직제학(奎章閣 直提學, 정3품 당상) 겸임
1776년 10월 19일겸찰리사(兼察理使) 겸임
1776년 11월 19일수어청사(守御廳使, 정2품) 겸임
1776년 11월 20일비변사 제조(備邊司 提調, 종1품) 겸임
1776년 12월 10일선혜청 제조(宣惠廳 提調, 종1품) 겸임
1777년 1월 10일경연청 참찬관(經筵廳 參贊官, 정3품 당상) 겸임
1777년 5월 27일총융청사(摠戎廳使, 종2품) 겸임
1777년 5월 28일금위영 대장(禁衛營 大將, 종2품) 겸임
1777년 10월 17일홍문관 제학(弘文館 提學, 종2품) 겸임
1777년 11월 15일금위영 대장에서 숙위소 대장(宿衛所 大將, 종2품)으로 겸임 변경
1777년 12월 2일홍문관 제학(弘文館 提學, 종2품) 겸임
1778년 3월 15일훈련도감 대장(訓鍊都監 大將, 종2품) 겸임
1778년 3월 22일훈련도감 대장에서 금위영 대장으로 겸임 변경
1778년 3월 25일규장각 제학(奎章閣 提學, 종2품) 겸임
1778년 9월 1일숙위소 대장에서 중영 대장(中營 大將, 종2품)으로 겸임 변경
1778년 9월 4일숙위소 대장과 중영 대장을 겸임
1778년 9월 8일홍문관 제학(弘文館 提學, 종2품) 겸임
1778년 11월 20일선혜청 제조 겸임
1779년 4월 22일금위영 대장에서 훈련도감 대장으로 겸임 변경
1779년 6월 5일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종2품) 겸임
1779년 9월 1일홍문관 제학(弘文館 提學, 종2품) 겸임


3. 2. 주요 활동

1772년 9월 정시(庭試: 별시의 일종) 문과에 병과 11위[10]로 급제하였다. 대과에 급제하고도 6개월간 보직을 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2월부터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이 해 4월 정민시와 함께 한림소시에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영조를 보좌하는 사관으로 봉직하기 시작했다. 한중록에서는 그가 사관으로 봉직할 당시 영조가 홍국영을 "내 손자"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쓰고 있다. 1774년 3월에는 동궁시강원 설서(說書)로 임명된다. 세간에는 홍국영이 과거 급제와 동시에 설서에 임명되었다는 설이 퍼져있는데,[11]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정조와는 동궁시강원 설서가 되면서부터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이 당시 궁료들이 서연에서 아뢴 말들을 모아 《현각법어》(賢閣法語)[12]라는 책을 펴냈는데, 실제로 이 책의 대부분은 홍국영의 언행이라고 한다. 《명의록》 등은 이 시기 홍국영이 "세손의 오른날개(右翼)"라고 불렸다고 적고 있다.

1776년 3월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정적이었던 홍인한, 정후겸 일당을 공격, 숙청했다. 이어 당론서인 《명의록》을 펴내 이 조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홍보했다. 흔히 홍인한-정후겸이 정조의 즉위를 막았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으나 이는 와전된 내용이고, 이 책에서 밝힌 공식적인 죄명은 첫째,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은 것과 둘째, 세손의 오른날개, 즉 홍국영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책에서 정조는 홍국영을 '의리의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가 자신의 즉위 과정을 도운 1등 공신(소위 동덕회원同德會員)이자 최측근임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1777년 홍상간, 홍계능 등이 모의하여 경희궁에 자객을 침투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들을 처분하면서 다시 공초 내용을 《속명의록》에 수록하여 편찬하였다. 속명의록의 죄인들 역시 홍국영을 주된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집안의 여인들까지도 홍국영의 저주에 동원되었을 정도였다.

1776년 3월 정조는 즉위 3일 만에 그를 전격적으로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했다. 이어 7월에는 승정원 최고직인 도승지로 승진시킨다. 이후 그는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거의 줄곧 도승지직을 맡았으며(원빈 사후 약 2개월 동안 물러났던 적이 있었음) 이 당시 도승지의 별칭인 "지신사"는 곧 홍국영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 문관으로는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홍문관 제학, 규장각 직제학,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군문의 장으로는 정조 즉위년 11월 수어사에 임명되었던 것을 시작으로 잠시 총융사를 거쳐 1777년 5월에는 금위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개 금위대장과 훈련대장을 돌아가며 맡았다. (그러나 훈척만이 맡을 수 있는 호위대장에 임명된 적은 없다.) 1777년 7월, 전술한 홍상간, 홍계능의 궁궐 자객 침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사건 연루자에 호위청의 무사가 포함되어 있었던 이유로 호위청을 축소하였는데,[13] 대신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고 홍국영을 그 대장에 임명하였다. 정조는 숙위대장에게 특별히 대장패와 전령패를 차게 하며, 안으로 위장, 부장, 금군과 도감의 군병, 각 문의 수문장ㆍ국별장과 밖으로 궁궐 담장 바깥에 삼군영의 입직하는 순라까지 매일 숙위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이런 보직들은 대개 겸직이었으며 그의 대표적인 보직은 도승지와 훈련대장, 숙위대장, 약원부제조였다.[14] 그 외 각종 관청에서 평정, 관리를 담당하는 제거(提擧)를 다수 겸직하였으며 잡다한 제거 겸직으로 인한 격무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기록도 종종 보인다.

정조 초기의 가장 주요한 사업이라면 규장각 설치가 꼽히는데, 정조의 최측근이었던 홍국영 역시 규장각과 관련이 깊다. 그는 제일 처음으로 규장각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된 관료였으며, 유명한 규장각 서얼 사검서관의 서용 역시 홍국영의 천거와 설득으로 이뤄졌다. 다만 홍국영 축출 후 규장각 내각일기에서 그에 관한 기록을 삭제하여 새로 작성하게 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 홍국영이 규장각에서 실제 이행했던 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홍국영은 정조가 왕세자 이산(李祘)이었을 때 가장 신임하는 조력자이자 측근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4] 그는 또한 왕세자 이산의 주요 스승이기도 했다. 이산이 정조로 즉위한 후, 홍국영은 정치와 수사 능력으로 인해 대사헌, 금위영 대장, 승정원 좌승지 등으로 승진했다.[5]

홍국영의 주요 관직은 다음과 같다.

임명일직위
1773년 2월승문원 부정자(종9품)
1774년 3월세자시강원 설서(정7품)
1775년 12월 3일세자시강원 겸 사서(정6품)
1775년 12월 25일홍문관 부응교(종4품)
1776년 2월 24일의정부 사인(정4품)
1776년 3월 1일랑청(종6품) 겸임
1776년 3월 13일승정원 동부승지(정3품 당상)
1776년 4월 13일승정원 좌승지(정3품 당상)
1776년 6월 1일이조 참의(정3품 당상)
1776년 7월 6일승정원 도승지(정3품 당상)
1776년 8월 8일홍문관 부제학(정3품 당상), 승문원 부제조(정3품 당상) 겸임
1776년 8월 24일찬집당상 겸임
1776년 9월 19일약원 부제조(정3품 당상) 겸임
1776년 9월 25일규장각 직제학(정3품 당상) 겸임
1776년 10월 19일겸찰리사 겸임
1776년 11월 19일수어청사(정2품) 겸임
1776년 11월 20일비변사 제조(종1품) 겸임
1776년 12월 10일선혜청 제조(종1품) 겸임
1777년 1월 10일경연청 참찬관(정3품 당상) 겸임
1777년 5월 27일총융청사(종2품) 겸임
1777년 5월 28일금위영 대장(종2품) 겸임
1777년 10월 17일홍문관 제학(종2품) 겸임
1777년 11월 15일숙위소 대장(종2품) 겸임
1777년 12월 2일홍문관 제학(종2품) 겸임
1778년 3월 15일훈련도감 대장(종2품) 겸임
1778년 3월 22일금위영 대장(종2품) 겸임
1778년 3월 25일규장각 제학(종2품) 겸임
1778년 9월 1일중영 대장(종2품) 겸임
1778년 9월 8일홍문관 제학(종2품) 겸임
1778년 11월 20일선혜청 제조 겸임
1779년 4월 22일훈련도감 대장(종2품) 겸임
1779년 6월 5일사헌부 대사헌(종2품) 겸임
1779년 9월 1일홍문관 제학(종2품) 겸임
1779년 9월 28일모든 관직 사임


3. 3. 외척 세력 형성

1778년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정조의 후궁이 되었다.[15]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홍국영이 후궁 간택령을 내리게 했다"라고 쓰고 있으며, 원빈의 입궁을 홍국영이 세도를 탐내어 제 누이를 들여보낸 것으로 묘사하며 자신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정조가 원빈 사후 작성한 《어제인숙원빈행장》에서는 혜경궁 자신의 진술과는 반대로 혜경궁이 원빈에 대해 각별한 정을 나타냈다고 한다.[15]순조실록 혜경궁 행장(김조순 저)》에서도 혜경궁이 원빈에게 각별한 정을 주었다는 혐의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한 대목이 있다.[16]

원빈 홍씨는 가례를 올린 지 1년이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한중록》에는 홍국영이 원빈의 죽음을 독살로 여기고 그 배후로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왕비의 나인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다는 내용을 전하며 그 죄를 성토하는 대목이 있다.[18] 원빈 사망 당일 정조는 자신의 서제 은언군 아들 완풍군을 원빈의 수원관으로 삼았다. 후일 홍국영이 이 완풍군을 "내 조카"라고 부르며 그를 통해 대계를 저지하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기록에 일관성이 없어 완전히 신뢰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4. 몰락과 죽음

홍국영은 정조가 왕세손 시절 가장 신임하는 측근이자 스승이었다.[4] 정조 즉위 후, 대사헌, 금위영 대장, 승정원 좌승지 등 요직에 올랐다.[5] 여동생 원빈 홍씨가 정조의 후궁이 되었으나, 가짜 임신 은폐 시도 실패 후 사망하였다.[6] 이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다 발각되었으나, 정조에게 눈물로 고백하고 용서받았다. 건강 문제로 1781년 4월 28일 사망했다.[7]

4. 1. 권력 남용과 실각

1779년 음력 9월 26일 홍국영은 자신이 맡고 있던 모든 조정의 실직(實職)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담은 은퇴 상소를 올렸으며, 정조는 당일 이를 수락한다.[19][20] 이때 정조는 불과 32세의 홍국영에게 봉조하 직함을 내려주는데,[21] 일찍이 백발의 봉조하는 있어도 흑발의 봉조하는 없었는데, 이제 있게 되었다고 하여 그는 “흑두봉조하”라고 불리게 된다.[22] 《한중록》과 《정종대왕행장》 등 사후적인 기록에서는 공통적으로 홍국영이 자진 사퇴의 형식으로 물러난 것 자체가 정조의 뜻이었다고 전하고 있어 정설로 통하나, 이와 같이 사퇴시킨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정조는 홍국영을 퇴진시키고 숙위소를 혁파시켰으나 동시에 그의 백부 홍낙순(洪樂純)을 정승에 임명했다. 따라서 한동안 그의 세력은 조정에 계속 건재했으며 그 자신도 계속 궁중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월에 홍국영의 당여들이 서명응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다가 반대로 조정에서 축출 당한다. 1780년 1월에는 홍낙순이 파직과 문외출송되고, 다음달 26일 김종수의 탄핵상소가 올라오는 것과 동시에 그는 방출 처분을 받았다. 김종수의 탄핵 상소를 시작으로 하여 홍국영에 관한 탄핵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 《한중록》은 김종수의 상소 역시 정조의 뜻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처음에는 1780년 2월 강원도 횡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다음에는 강릉으로 유배되었던 홍국영은 결국 이듬해인 1781년 4월 5일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4. 2. 유배와 죽음

1779년 음력 9월 26일 홍국영은 자신이 맡고 있던 모든 조정의 실직(實職)에서 물러난다는 은퇴 상소를 올렸고, 정조는 당일 이를 수락한다.[19][20] 정조는 32세에 불과한 홍국영에게 봉조하 직함을 내려주었는데,[21] 그는 "흑두봉조하"라고 불리게 된다.[22] 《한중록》과 《정종대왕행장》 등에서는 홍국영의 자진 사퇴가 정조의 뜻이었다고 전하고 있어 정설로 통하나, 정확한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다.

정조는 홍국영을 퇴진시키고 숙위소를 혁파했으나, 그의 백부 홍낙순을 정승에 임명했다. 한동안 그의 세력은 조정에 건재했고 그 자신도 궁중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월에 홍국영의 당여들이 서명응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다가 반대로 조정에서 축출 당한다. 1780년 1월에는 홍낙순이 파직, 문외출송되고, 2월 26일 김종수의 탄핵 상소와 동시에 방출 처분을 받았다. 이때부터 홍국영에 대한 탄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중록》은 김종수의 상소 역시 정조의 뜻이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1780년 2월 강원도 횡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강릉으로 유배되었던 홍국영은 1781년 4월 5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홍국영의 몰락에 대해서는 각종 설만 난무할 뿐,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공식적인 탄핵 사유는 '후궁 간택을 막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원빈의 수원관인) 완풍군을 정조의 양자로 들여 동궁으로 삼으려 했다는 가동궁 사건설도 언급된다. 정조 7년 문양해 반란사건 당시 '왕비의 목숨을 위협했다'는 기록도 있고, 《정종대왕묘지문》에는 홍국영이 은전군 이찬(정조의 이복 아우)을 죽게 해서 몰락했다고 정조가 원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완풍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거나, 효의왕후 김씨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던 것이 발각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는 19~20세기에나 등장한 야사로 짐작된다.

5. 가족 관계

6. 관련 작품

6. 1. 드라마

6. 2. 영화

참조

[1] 서적 Korea Focus - June 2012 https://books.google[...] 한국국제교류재단 2013-03-30
[2] 서적 https://books.google[...] Kumsung Publishing 2007-10-31
[3] 서적 https://books.google[...] 아름다운날 2014-01-05
[4] 서적 Kyujanggak: Rediscovering Its History and Culture https://books.google[...] Acanet 2010
[5] 서적 Korean Literature: Its Classical Heritage and Modern Breakthroughs https://books.google[...] Hollym 2003
[6] 서적 https://books.google[...] 해냄출판사 2013-09-30
[7] 서적 https://books.google[...] 문학동네 2019-10-29
[8] 문서 정조실록 11권, 정조 5년 4월 5일 세 번째 기사
[9] 문서 홍국영의 대고모가 정순왕후의 6촌 김면주의 생모(김한희 처)였다.
[10] 문서 15명 중에 15위였다. 출처 조선문과방목 영조48년 정시
[11] 서적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1998
[12] 문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규6836
[13] 문서 이 때문에 호위청은 3청에서 1청으로, 인원은 1000명에서 350명 가량으로 축소되었다.
[14] 문서 홍국영은 (원빈 사후 2개월 가량을 제외한) 집권 기간 대부분 동안 약원부제조직을 맡았다. 이는 임금의 최측근인 그가 임금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고 보살핀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하루동안 임금과의 공식적인 면대를 2회 이상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도 해석된다.
[15] 웹사이트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 http://yoksa.aks.ac.[...]
[16] 웹사이트 순조실록 19권, 순조 16년 1월 21일 신축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7] 웹인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숙창궁입궐일기 http://100.daum.net/[...]
[18] 문서 순조실록에서 같은 건으로 탄핵당하는 대상자는 정민시이다.
[19] 서적 왕의 하루 김영사 2012
[20] 문서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9월 26일 정미 1번째기사
[21] 문서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9월 28일 기유 1번째기사
[22] 서적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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