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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카와 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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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루카와 로파는 1863년 가토 데루마로 남작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난 일본의 희극 배우, 영화 평론가, 작가이다.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고 필명 '로파'로 활동하며, 1933년 도쿠가와 무세이와 희극단 '와라이노텐고쿠'를 결성하여 코미디언으로 성공했다. 도호에 합류하여 에노모토 켄이치와 함께 인기를 얻었으며, 다양한 코미디, 뮤지컬 영화에 출연했다. 전쟁 후 질병으로 활동이 뜸해졌지만, 라디오 방송과 일기를 통해 대중에게 사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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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카와 로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후루카와 롯파
후루카와 롯파
본명후루카와 이쿠로 (古川 郁郎, Furukawa Ikurō)
별칭후루카와 롯파 (古川 緑波, Furukawa Roppa)
출생지일본 도쿄부도쿄시고지마치구
사망지불명
국적일본
직업배우, 코미디언, 수필가, 영화 평론가
가족
실부가토 테루마로
조부가토 히로유키
조부후루카와 노부요
양부후루카와 다케타로
장남후루카와 기요시
차남후루카와 록
친형가토 시게유키
친형하마오 시로
친형교고쿠 다카카네
종형야마가타 아리미치
활동 정보
활동 기간불명
활동 내용불명
장르무대, 영화
기타 정보
관련 인물불명

2. 생애

후루카와는 가토 데루마로 남작(1863년 ~ 1925년)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가토 히로유키 남작의 손자이다.[63] 후라카와 가문은 장남을 제외한 아들들을 친족이 양자로 들이는 것이 관례였기에 그는 아버지의 누이와 누이의 남편 후루카와 다케타로에게 입양되었다. 본명은 후루카와 이쿠로("이쿠오"로 표기되는 경우도 있음)가 되었다.[63] 후루카와는 와세다 대학에 재학하였지만 영화 평론가와 잡지 편집자가 되어 문필 활동에 집중하고자 중퇴하였다.[64] 글을 쓸 때의 필명은 "로파"(Roppa)였다. 성대모사에 능통하였던 그는 전문 코미디언이 되기로 결심하여 1933년 도쿠가와 무세이와 함께 희극단 "와라이노텐고쿠"(笑の王国; 웃음 천국)를 결성하였다.[63] 1935년에는 도호에 합류하여 연극 무대와 영화에 출연하며 전쟁 전 코미디의 거장 에노모토 켄이치 못지않은 인기를 얻었다.[63] 그의 영화 작품에는 다양한 코미디와 뮤지컬, 하세가와 카즈오와 공동 주연을 맡은 인기 영화 시리즈 등이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여러 질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활동이 뜸해졌지만 라디오 방송에서는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였다.[64] 숙련된 작가였던 그의 일기가 죽기 전 출간되며 많은 찬사를 받았다.

2. 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후루카와 로파는 1863년생 가토 데루마로 남작의 여섯 번째 아들이자 가토 히로유키 남작의 손자로 태어났다.[63] 후루카와 가문의 관례에 따라 아버지의 누이 부부에게 입양되어 후루카와 이쿠로(혹은 이쿠오)라는 이름을 얻었다.[63] 와세다 대학 재학 중 영화 평론가 및 잡지 편집자로 활동하며 문필에 집중하고자 중퇴하였다.[64] 필명은 "로파"(Roppa)였다.[63]

도쿄시 고지마치구에서 태어났으며, 도쿄 제국 대학 총장을 역임한 가토 히로유키 남작의 장남 가토 테루마로 남작의 여섯째 아들이었다.[3] 가문의 전통에 따라 만철 임원이었던 의붓 삼촌 후루카와 무타로의 양자가 되었다.[4] 어릴 적부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심상 소학교 3학년 때 이와야 사자나미를 본떠 "롯파"(처음에는 "료쿠하")라는 필명을 스스로 지었다.[5] 연예계 입문 후에는 무대 활동에서 "롯파", 문필 활동에서 "료쿠하"로 구분하여 사용했다.[6]

1911년 모지시로 이주, 1916년 구제 고쿠라 중학교에 입학했다. 1917년 도쿄로 돌아와 와세다 중학교로 전학, 1918년 영화 잡지 『영화세계』를 발행하고 영화 평론을 집필했다. 『키네마 준보』 등 영화 잡지에 료쿠하라는 이름으로 투고를 시작, 1921년 와세다 제1고등학원에 진학하여 키네마 준보 편집 동인이 되었다.[7] 1922년 오가사와라 메이호 감독의 『사랑의 인도』로 영화에 처음 출연했다. 구제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학과 재학 중 기쿠치 칸의 초청으로 분게이슌주사에 입사, 『영화시대』 편집자로 활동했다.[8]

2. 2. 희극 배우로서의 성공

후루카와 로파는 가토 데루마로 남작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나 가토 히로유키 남작의 손자이다.[63] 집안 관습에 따라 친족인 후루카와 다케타로에게 입양되었고, 본명은 후루카와 이쿠로가 되었다.[63]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고 문필 활동을 시작, 필명 "로파"(Roppa)로 활동하며 영화 평론가와 잡지 편집자로 일했다.[64][2]

1930년, 키쿠치의 후원으로 『영화시대』의 독자 경영에 나섰지만 실패하여, 막대한 부채를 떠안게 된다. 1931년에는 배우로서 고쇼 헤이노스케 감독의 『젊은 날의 감격』이나 다나카 에이조 감독의 『나미코』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성대모사에 능통했던 그는 1933년 도쿠가와 무세이와 함께 희극단 "와라이노텐고쿠"(笑の王国; 웃음 천국)를 결성하였다.[63] 이 극단은 아차라카라고 불리는 가벼운 넌센스 희극을 중심으로 공연했다.[13] 1935년에는 도호에 합류하여 연극 무대와 영화에 출연하며 에노모토 켄이치와 함께 "에노켄・롯파"로 불리며 인기를 얻었다.[63][17] 둥근 얼굴에 로이드 안경, 뚱뚱한 체형이 트레이드마크였던 롯파는 화족 출신의 인텔리답게 품위 있는 지적인 재주를 특징으로 했다.

300px, 아키타 미노루, 후루카와 롯파(1935년 촬영)]]

1932년, 고바야시 이치조는 도쿄 타카라즈카 극장(도호)을 설립하고, 롯파는 즉시 스카우트되어, 1935년 5월, 도호의 전신 PCL로 스카우트된다[22]. 7월 요코하마 타카라즈카 극장에서 일좌의 공연이 시작되었고, 롯파 일좌는 뮤지컬을 의식하여 음악을 듬뿍 사용한 참신한 공연으로 화이트칼라층의 지지를 얻었다.

그의 영화 작품에는 다양한 코미디와 뮤지컬, 하세가와 카즈오와 공동 주연을 맡은 인기 영화 시리즈 등이 있다. 특히 하세가와 가즈오와 공동 출연한 『남자의 꽃길』(1941년 도호 작품)에서의 게이슈 아사노가 가신인 토하부 겐세키 역은 널리 알려져 있다.[26]

1931년경부터는 가수로도 수많은 레코드 녹음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경쾌한 코믹송을 특기로 했다. 대표작인 '넥타이 가게 딸'은 작사가가 사이조 야소, 작곡가가 고가 마사오라는 거물에 의한 작품이다.

무대에서는 노래와 만담, 성대 모사 등 폭넓은 재주를 선보였지만, 그중에서도 주특기로 한 성대 모사의 솜씨는 초일류였다. 1931년 8월 8일[19], 도쿠가와 무세이의 대역으로 라디오 생방송을 진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전쟁이 끝난 뒤 여러 질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활동이 뜸해졌지만 라디오 방송에서는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였다.[64] 숙련된 작가였던 그의 일기가 죽기 전 출간되며 많은 찬사를 받았다.

2. 3. 전시의 활동

후루카와는 필명 "롯파"로 활동하며 성대모사에 능하여 1933년 도쿠가와 무세이와 함께 코미디 극단 "와라이노 텐고쿠"(웃음의 천국)를 결성하였다.[63][1] 1935년 도호에 입사하여 무대와 영화에 출연하며 에노모토 켄이치 못지않은 인기를 얻었다.[63][1] 그의 영화 작품에는 많은 코미디, 뮤지컬이 있었고, 하세가와 카즈오와 공동 주연을 맡은 인기 영화 시리즈도 포함되었다.

1940년 10월 1일, 도호는 산하의 모든 극단을 도호 국민원극단 이동대에 통합하여, 롯파도 이동 연극반을 이끌고 지방 순회 공연을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27] 1941년 1월, 도쿄 유라쿠좌에서 '롯파와 개척자', '일본의 모습'으로 다시 무대에 복귀, 대동아 전쟁 중에는 '꽃 피는 항구', '노래와 병사', '수라바야의 북', '레이테 만', '노래와 보물선' 등의 무대와 '돌격 역장', '승리의 날까지' 등의 영화 출연, 지방 위문 순회 공연 등을 정력적으로 소화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방침의 차이로 인해 키쿠타 카즈오와 대립하고, 키쿠타에 동조하는 단원과의 갈등, 당국에 의한 잦은 검열과 통제, 게다가 1944년 2월에는 전황 악화로 인해 각의 결정된 결전 비상 조치 요강에 의해 유라쿠좌 제극이 폐쇄되는 등, 많은 난제에 시달렸다.

전시 중의 롯파는 애국적이었으며, "나는, 어디까지나, 오락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해야 한다"[28]라고 자신의 일기에 썼듯이, 연예 활동을 통해 국민들을 격려하는 입장을 계속 유지했지만, 부당한 탄압과 규제에는 정면으로 반발했다. 1943년 7월에는 당국으로부터 예명을 "롯파"의 가나 문자 사용에서 "녹파"로 바꾸도록 요청받고, 분개한 나머지 "열 받는다. 별명이라면 그렇다 치더라도, 롯파라는 것은 내 이름이다. 그걸 가타카나로 쓰면 왜 안 돼? 조금만 더 있으면 경시청에 쳐들어가 날뛰어 버릴까 생각했다"라고 그 마음을 일기에 적어 두었다.[29] 그리고 경찰 당국에 대한 비꼬는 의미로 "후루카와 녹파 공연"이라고 쓴 신문 광고를 게재하려 하는 등, 반골 정신은 쇠퇴하지 않았다.

전쟁 말기의 1945년, 당국은 국민의 사기 진작을 위해 종래의 방침을 개정하고, 희극에 대한 검열을 폐지했다. 롯파는 시부야의 도요코 영화 극장을 본거지로 하는 공연 외에, 공습 하의 게이힌 지역에서 공장에 대한 위문 활동을 하고 있다. 그 해 4월 2일 자 '도쿄 신문'에는 '우리들은 찐돈야'라는 제목의 수기를 기고하여 "그리하여, 우리들은, 아차라카 연극이라고 멸칭되어, 저급 희극(물론 고급이라고 불린 적도 한 번 있다. 이것은 고급 오락 추방의 날이었다.)이라고 조소받았던 우리들의 퐁치 그림책은, 지금이야말로, 본래의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헌신하여, 도민에게 오랫동안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 ……우스꽝스러운 연극의 몸통 박치기다. 우리들은 이 시대의 찐돈야, 세기의 진타야여야 한다"라고 비장한 각오를 말하고 있다.[30] 또한, 도호에 월급을 갤러로 하는 라디오 출연을 제안하는 등, 어려운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5년 5월 25일에는 공습으로 시모오치아이의 자택이 소실된다. 다행히 롯파 자신은 도호쿠 방면으로 순회 공연 중이었고, 가족도 피난해서 화를 면했지만, 많은 귀중한 문헌(일기는 방공호에 묻어 두었으므로 무사)을 잃었다. 당시의 일기에서도 "책이 아까웠다. 한 권도 피난시키지 못한 것이 분하다"라고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31] 7월에 일단 귀경, 덴엔초후의 지인 집에 몸을 의탁하여, 공습 하의 최악의 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라디오 출연과 위문 활동을 계속하면서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2. 4. 전후의 쇠퇴와 부활

후루카와 로파는 전쟁 후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기 시작하면서 그의 경력은 쇠퇴했지만, 라디오에서는 여전히 인기가 있었다.[2] 1945년 말, 종전 직후 영화 『도쿄 오인남』으로 활동을 재개했고, 섣달 그믐날에는 NHK 『홍백음악경기』(『NHK 홍백가합전』의 전신)의 백조 사회를 맡았다.[32]

1945년 12월, 전쟁 전부터 롯파의 사적 문제의 상담 상대였던 우에모리 코테츠[33]를 경영자로 하여 극단은 토호로부터 독립했다.[34] 적극적으로 무대 활동을 했지만,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이 점령군에 접수되어 활동 범위가 좁아지고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제반 경비 상승까지 겹쳐, 전쟁 전만큼의 수익을 올리지 못해 극단의 경영은 곤경에 처하게 된다. 같은 해 4월 도쿄 유라쿠좌에서 에노모토 켄이치 극단과 합동 공연을 했다. 『야지키타 도중 무릎 굽기』는 롯파 극단의 전쟁 전 히트 코미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지만, 롯파・에노켄이라는 희극의 양웅의 첫 공동 출연으로 웃음에 굶주렸던 팬들의 지지를 받아 대성공을 거두며 2개월의 롱런을 기록한다. 이후 두 사람의 공동 출연 기회가 늘어났지만, 에노모토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인기가 쇠퇴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롯파는 가와구치 마쓰타로 등 친구들과 관계자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한 예능 스타일과 거만한 태도를 완고하게 지켜나갔다. 1948년에는 우에모리의 거액 횡령이 발각되어 극단에서 우에모리를 추방하지만, 이미 라디오 등에 인기를 빼앗긴 극단의 존속은 어려워져, 1949년에 극단은 해산했다.

전시 중부터 두각을 나타낸 시미즈 킨이치나, 전 단원인 모리시게 히사야, 후배인 반준 사부로・토니 타니 등의 새로운 스타들에게 인기를 빼앗겼고, 전쟁 전의 횡포도 화가 되어 주변 사람들도 롯파로부터 떠나갔다. 1948년, 롯파는 고바야시 이치조를 찾아 유라쿠좌 출연을 호소하지만 "롯파의 인기는 살찐 둥근 얼굴에 로이드 안경이지만, 지금은 그 로이드 안경이 드물지 않게 되었다. 실력으로 해라. 인정에 기대지 마라"고 설교를 들었다.[35] 후원자에게도 버림받은 롯파는 새로운 경지를 열려고 노력했지만, 영화는 삼류 작품의 조역이 많아지고, 무대도 지방 순회가 늘어갔다. 1949년에는 미국 영화 'Three Came Home영어' ('Agnes Newton Keith영어'의 논픽션 :en:Three Came Home (book) 영화화)에서 '양심적인 일본 군인' 역의 스크린 테스트 최종 후보에 올랐으나, 결국 그 역할은 하야카와 셋슈가 맡게 되었다[36]

1954년에는 사단법인 일본 희극인 협회 설립 시 야나기야 킨고로와 함께 부회장에 취임(회장은 에노모토 켄이치)하여 중진으로서의 존재감을 나타냈다. 조연 중심이면서도 라디오와 영화 출연은 여전히 많았으며, 니혼 TV 개국 시부터 방영된 연속 TV 드라마 『토도로키 선생님』의 주인공을 맡아 안방극장의 인기를 얻었으며, 여명기의 TV 방송의 선구자적인 존재가 된 공적이 크다[37]

무대에서도 1953년 3월, 도쿄 유라쿠좌의 제1회 희극인 협회 도쿄 희극제에서 킨고로, 에노모토 등과 공연한 『긴자 3대』, 1958년 7월 예술좌 공연 키쿠타 작의 『개미 마을의 마리아』, 이듬해 8월 우노 시노부 작 『달 높이 사람이 죽는다』 등의 연기가 높이 평가되었다.

1954년,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덤보』에서 처음으로 일본어 더빙판을 제작했을 때 성우 (단장 역)를 맡았다[38]

2. 5. 만년과 죽음

후루카와 롯파는 만년에 오랜 미식, 과식, 과음으로 인한 지병인 당뇨병과 재발한 결핵에 시달렸다.[39] 날마다 객혈과 호흡 곤란에 시달렸으며, 은행을 신용하지 않아 항상 가지고 다니던 금전도 도난당해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39]

1960년대가 되자 무대나 영화에서도 단역이 많아졌다. 50대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떨어져 활기 없는 연기를 비판받거나, 제자 격인 모리시게 히사야로부터 은퇴 권고를 받는 등 완전히 과거의 인물이 되었다. 1960년 11월 오사카 우메다 코마 극장 공연 『웃기는 충신장』 출연 중 쓰러졌지만, 간신히 마지막 날을 맞이하고 귀경했다.

1961년 1월 3일, 도쿄 순천당병원에 입원했으나, 16일 오전 11시 55분에 폐렴과 전신 쇠약으로 사망했다.[40] 향년 57세. 장례는 1월 21일 도쿄도 미나토구의 아오야마 장례식장에서 거행되었으며, 묘소는 조시가야 영원에 있다. 롯파 사망 소식을 전하는 신문 기사는 작았으며, 한때의 인기를 알던 사람들에게는 쓸쓸하고 안타까운 최후였다.

3. 주요 출연 작품

후루카와 롯파는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1933년에는 《힘과 여자의 세상》(力と女の世の中)에 목소리 출연했다. 같은 해 《음악 희극 호로요이 인생》에 롯파 역으로 출연했다. 1937년에는 《하리키리 보이》(ハリキリ・ボーイ)에 출연했다. 1941년에는 《남자의 꽃길》(男の花道)에서 하부 겐세키 역을 맡았다.

1950년대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50년 《어머니의 사랑》, 1951년 《무숙 고양이》, 1952년 《하늘색 왈츠》, 1953년 《아차코 청춘 수첩》, 1954년 《여름 축제 낙어 장옥》, 1955년 《쾌활한 천국》, 1956년 《비자금 사장》, 1957년 《쇼군 이에미츠와 천하의 히코자》, 1958년 《천하의 부장군 미토 만유기》, 1959년 《대학의 영애》, 1960년 《낙어 천국 신사록》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다.


  • 힘과 여자의 세상(力と女の世の中, 1933년)
  • 《하리키리 보이》(ハリキリ・ボーイ, 1937년)
  • 《남자의 꽃길》(男の花道, 1941년)
  • 굉 선생님(일본 TV, 1955년 - 1960년)
  • 가라마사 돈(NHK, 1957년)
  • 인정 왕진 가방(NET, 1959년)
  • 진판 태합기(KR, 1960년 - 1961년)
  • 롯파의 미토 고몬(MBS, 1960년 - 1961년)

3. 1. 영화

후루카와 롯파는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1933년에는 《힘과 여자의 세상》(力と女の世の中)에 목소리 출연했다. 같은 해 《음악 희극 호로요이 인생》에 롯파 역으로 출연했다. 1937년에는 《하리키리 보이》(ハリキリ・ボーイ)에 출연했다. 1941년에는 《남자의 꽃길》(男の花道)에서 하부 겐세키 역을 맡았다.

1950년대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50년 《어머니의 사랑》, 1951년 《무숙 고양이》, 1952년 《하늘색 왈츠》, 1953년 《아차코 청춘 수첩》, 1954년 《여름 축제 낙어 장옥》, 1955년 《쾌활한 천국》, 1956년 《비자금 사장》, 1957년 《쇼군 이에미츠와 천하의 히코자》, 1958년 《천하의 부장군 미토 만유기》, 1959년 《대학의 영애》, 1960년 《낙어 천국 신사록》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다.

3. 2. TV 드라마


  • 힘과 여자의 세상(力と女の世の中, 1933년)
  • 《하리키리 보이》(ハリキリ・ボーイ, 1937년)
  • 《남자의 꽃길》(男の花道, 1941년)
  • 굉 선생님(일본 TV, 1955년 - 1960년)
  • 가라마사 돈(NHK, 1957년)
  • 인정 왕진 가방(NET, 1959년)
  • 진판 태합기(KR, 1960년 - 1961년)
  • 롯파의 미토 고몬(MBS, 1960년 - 1961년)

4. 저서


  • 후루카와 롯파 쇼와 일기/후루카와 롯파 쇼와 일기일본어』 (쇼분샤, 1987–1988년)
  • 『만담 레뷰』 (도쿠가와 무세이・오카다 도키히코 공저, 현대 유머 전집 간행회, 1929년)
  • 『영화의 ABC』 (세이분도, 1930년)
  • 『영화와 레뷰』 (가와구치 마쓰타로 공저, 세이분도, 1932년)
  • 『롯파 자서전』 (슌요도, 1938년)
  • 『고소(苦笑) 목욕탕 수필』 (웅계사, 1948년)
  • * 『롯파 수필 고소(苦笑) 목욕탕』 (가와이데쇼보신샤〈가와이데 문고〉, 2015년 3월)
  • 『센류의 맛과 만드는 법』 (도쿠가와 무세이・마사오카 요시루・요시다 키지 공저, 센류 축제사, 1948년)
  • 『극서 노트』 (가쿠후샤, 1953년 / 지쿠마 서방〈지쿠마 총서〉, 1985년)
  • 『롯파 식담』 (소겐샤, 1955년)
  • * 『롯파 식담 완전판』 (가와이데쇼보신샤〈가와이데 문고〉, 2014년 9월, 신장판 2023년 5월) ISBN 978-4309419664
  • 『아차라카 인생 희극 30년』 (아소카 서방, 1956년 / 복각: 오조라사 전기총서, 1998년)
  • * 『후루카와 롯파 아차라카 인생』 일본도서센터 '인간의 기록', 1997년. ISBN 978-482054298-8
  • 『비식기 일본의 백인 전집 제3』 (가쿠후샤, 1959년)
  • * 『롯파의 비식기』 (롯코 출판, 1983년 / 지쿠마 서방〈지쿠마 문고〉, 1995년)
  • 『후루카와 롯파 쇼와 일기』 쇼분샤 (1987-1989년, 신장 복간 2007년). 방송 작가 타키 다이사쿠의 감수.
  • * '전전편 쇼와 9년-쇼와 15년' ISBN 978-4-7949-3016-3
  • * '전중편 쇼와 16년-쇼와 20년' ISBN 978-4-7949-3017-0
  • * '전후편 쇼와 20년-쇼와 27년' ISBN 978-4-7949-3018-7
  • * '만년편 쇼와 28년-쇼와 35년' ISBN 978-4-7949-3019-4
  • 『후루카와 롯파』 (가와이데쇼보신샤 편, 2015년 2월) ISBN 978-4-309-02363-2
  • : 부제는 '먹고, 쓰고, 웃겼다! 쇼와를 일기로 만든 희극왕'. 대담・에세이・작가론을 수록.
  • 『롯파 일기 대신 되는 대로』 (가와이데쇼보신샤, 2015년 4월)

5. 평가 및 영향

미식가이자 대식가였으며, 독서가이자 일기광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학생 시절부터 문예춘추에 출입하며 영화 관련 잡지를 편집할 정도의 문재가 있었고, 네이밍 센스도 뛰어났다.[43]

그에 반해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제멋대로인 면도 많았고, 평생 대인 관계 및 금전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애연가였으며, 결핵을 앓고서도 흡연을 끊지 못했다. 객혈을 반복할 때마다 금연을 시도했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가족에게 그 의지 박약함을 심하게 책망받을 정도였다.

일기에 관해서는 아사쿠사에서 데뷔한 시절부터 죽기 직전까지 쉬지 않고 기록되었으며, 한 배우의 일대기뿐만 아니라 일본 희극사·일본 쇼와 풍속사에서도 귀중하고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러한 일기에 대해서는, 일부 산일된 것을 제외하고 『후루카와 롯파 쇼와 일기』로 출판되었다[41]

연극 비평 분야에서는 『극서 노트』라는 책을 쓰거나 『연극계』등에도 기고했다. 또한, 바쁜 틈을 타 에노모토 겐이치 등 라이벌의 무대나 리뷰·가부키·신파·소극·영화를 보러 다니며, 나쓰메 소세키·나가이 가후·체호프 등의 문학서나 쓰루야 난보쿠·가와타케 모쿠아미 등의 각본, 가부키 배우의 예담, 스트린드베리 등의 연극 관계 전문서를 자신의 창작의 참고로 삼았다. 그 자세는 만년까지 이어져, 이시하라 신타로의 『태양의 계절』이나 이시하라 유지로의 영화도 평가하고 있다.

무대에서의 연기도 끊임없이 연구하는 것을 잊지 않고 사투리도 본격적으로 배우고 있으며, 특히 도호쿠 사투리의 구사가 일품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영국군과 미국군의 점령의 영향 때문인지, 영어 회화를 배우려고 영일 사전을 통째로 암기하려 했다[42]。암기한 페이지는 말아서 먹었다는 일화가 있다.

롯파의 네이밍 센스는, 요세 연예의 "형태 모사"를 바꿔 말한 "성대 모사"(세이타이 모샤)라는 신조어와 "기운내다", "멋지다" 등, 후에 일본어 구어 회화에 정착한 조어에서 엿볼 수 있다.

6. 기타

후루카와 롯파는 미식가이자 대식가였으며, 독서가이자 일기광으로도 알려져 있었다.[47] 학생 시절부터 문예춘추에 출입하며 영화 관련 잡지를 편집할 정도의 문재와 네이밍 센스를 지녔다.[47] 기쿠치 칸에게서 니시긴자의 일류 레스토랑에서 서양 요리를 대접받고 그 맛에 감동하여, 매일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신분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47]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제멋대로인 면도 많았고, 평생 대인 관계 및 금전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47] 화족 출신으로 밑바닥 경험 없이 스타가 된 탓에 오만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47] 어느 연회 자리에서 좌석 순서를 신경 쓰는 젊은 배우에게 "네가 앉으면 어디든 하석이야"라고 냉정하게 말한 일화가 있다.[47]

애연가였으며, 결핵을 앓고서도 흡연을 끊지 못했다.[47] 객혈을 반복할 때마다 금연을 시도했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가족에게 그 의지 박약함을 심하게 책망받을 정도였다.[47]

식생활에 관해서는 『아마카라』지에 연재를 싣는 등, 일기에도 자주 기록했다.[47] 이는 『롯파 식담』, 『비식기』 등의 저서로 묶여 있다.[47] 전쟁 말기에도 온갖 수단을 이용하여 맛을 추구했으며, 당시의 일기에는 "먹을 것이 없다고 자살한 놈은 없었나"라고 심각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47] 생선이나 조개, 소바는 먹지 못했으며, 스시 재료 중 붉은 살 생선을 먹으면 두드러기가 났다.[47]

다니자키 준이치로, 우노 코지, 기쿠치 칸, 가와구치 마쓰타로 등 작가, 가부키, 신파, 연극 관계자, 고바야시 이치조, 모리 이와오 등 흥행 관계자, 스즈키 분시로 등 언론 관계자, 가노 겐지 등 협객과 폭넓은 교우 관계를 가졌다.[47]

문예춘추사에서 독립한 후, 발행한 잡지 실패와 더불어 금전 감각에 예민하여 출연료 문제로 종종 흥행주와 마찰을 빚었다.[47] 일기에는 영업 기록 뒤에 갤런 액수가 적혀 있었다.[47] 금전 감각이 부족하여 식사와 유흥에 돈을 낭비하고 극단의 문란한 경영까지 겹쳐 절세에도 무관심했다.[47] 오자와 쇼이치에 따르면, 롯파는 친구 마사오카 요시미의 장례식에서 로큐쿠시 사가미 타로에게 "이 부의금은 뭐냐!"라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54]

존경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로부터 에노모토 겐이치와의 공연을 권유받았지만, 롯파는 대항심을 드러내며 거절했다.[55] 소가노야 고로를 존경하는 두 사람은 1940년경부터 정기적으로 "부자회"라는 모임을 가졌다.[56] 만년의 롯파의 일기에는 에노켄의 테아토론상 수상에 대한 질투심과 시기심이 드러나 있다.[58]

하야시야 산페이는 롯파가 평가한 몇 안 되는 전후의 예능인 중 한 명이다.[59] 반대로 4대 류테이 치라쿠와 간사이의 예능인들에 대해서는 평가가 낮았다.[59]

마작을 좋아하여, 일기에는 바쁜 와중에도, 공습 중에도, 병고에 시달릴 때도 마작을 즐겼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47] 일본 마작 연맹이 개최한 회합에서 롯파의 주장으로 마작 룰에서 만관이 자녀가 올라서 8000점이 되었다.[47] 포커도 종종 했다.[47] 1934년 3월에는 마작 도박 혐의로 경시청에 검거되기도 했다.[60] 만년필 수집가이기도 했으며, 롯파의 사후 그의 만년필 컬렉션은 우메다 하루오가 손에 넣었다.[47]

만년에는 결핵이 재발했지만, 경제 상태가 좋지 않아 친족 외에는 숨겼다.[61] 체격도 병으로 쇠약해져 외부 사람들에게는 방석을 배에 감아 속였다.[61] 일기에는 연일 객혈을 나타내는 "SH"가 보이며, 병으로 고통받는 모습이 엿보인다.[61]

실형제는 변호사, 추리 작가, 귀족원 의원인 하마오 시로, 음악 평론가이자 자작인 교고쿠 다카아키가 있다.[47] 조카로는 도구 시지주인 하마오 미노루, 가톨릭교회의 대주교, 추기경인 하마오 후미오가 있다.[47] 장남은 연극 프로듀서 후루카와 키요시, 차남은 후루카와 록이라는 예명으로 배우가 되었다.[47] 장녀 요코와는 단 한 번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공동 출연한 적이 있다.[6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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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문서 星を喰った男
[51] 문서 星を喰った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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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서적 エノケンと呼ばれた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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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문서 古川ロッパ昭和日記 晩年編
[59] 문서 古川ロッパ日記 晩年編
[60] 뉴스 蒲田の俳優ら検挙者は三十五人に 東京朝日新聞 1934-03-18
[61] 서적 日本の喜劇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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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웹인용 Furukawa Roppa http://kotobank.jp/w[...] Kōdansha 2012-04-28
[64] 웹인용 Furukawa Roppa http://kotobank.jp/w[...] Hitachi Soryūshonzu 201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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