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다 노리히로
1. 개요
고마다 노리히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해설가, 지도자, 배우로 활동했다. 고등학교 시절 4번 타자로 활약하며 프로 지명을 받았으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서 은퇴했다.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첫 타석 만루 홈런을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1989년 일본 시리즈 MVP, 10번의 골든 글러브상 수상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 지도자, 방송 활동을 병행하며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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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 1루수 / 코치 |
|---|---|
| 소속 구단 (선수)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1년~1993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994년~2000년) |
| 소속 구단 (코치)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005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200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2022년~) |
| 소속 구단 (감독) | 고치 파이팅독스 (2016년~2019년) |
| 등번호 | 70 |
| 투구 | 좌투 |
| 타석 | 좌타 |
| 출생지 | 나라현 시키군, 일본 |
| 데뷔 리그 | NPB |
|---|---|
| 데뷔 일자 | 1983년 4월 10일 |
| 데뷔 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최종 리그 | NPB |
| 최종 일자 | 2000년 10월 10일 |
| 최종 팀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
| 리그 | NPB |
|---|---|
| 타율 | 0.289 |
| 홈런 | 195 |
| 안타 | 2006 |
| 올스타 선정 | 6회 (1990년~1992년, 1995년, 1997년~1998년) |
|---|---|
| 베스트 나인 | 1회 (1998년) |
| 골든 글러브 | 10회 (1989년~1991년, 1993년~1999년) |
| 올스타전 MVP | 2회 (1992년 3차전) |
| 일본 시리즈 우승 | 2회 (1989년, 1998년) |
| 일본 시리즈 MVP | 1989년 |
| 신장 | 191cm |
|---|---|
| 체중 | 90kg |
| 출신 고등학교 | 나라현립 사쿠라이 상업고등학교 |
|---|---|
| 드래프트 순위 | 1980년 드래프트 2위 |
-
나라현 출신 야구 선수 -
마이클 나카무라
마이클 나카무라는 호주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메이저 리그와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동했으며, 2006년 퍼시픽 리그 최다 세이브 투수를 기록하고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으며, 이후 호주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동했다. -
나라현 출신 야구 선수 -
에나쓰 유타카
에나쓰 유타카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약한 좌완 투수로, 한신 타이거스, 난카이 호크스 등 여러 팀에서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활약하며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 은퇴 후에는 다양한 활동을 했으나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기도 했다. -
일본 프로 야구 외야수 -
다케우치 신이치
다케우치 신이치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2006년부터 2018년까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내야수와 외야수로 활약했으며, 2018년 은퇴 후에는 야쿠르트 구단 직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일본 프로 야구 외야수 -
오타니 쇼헤이
오타니 쇼헤이는 일본 프로야구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투수와 타자 모두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며 MVP를 수상하고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이도류 야구 선수이다. -
살아있는 사람 -
릴 테르셀리우스
릴 테르셀리우스는 위키백과 문서에서 관련 문서와 추가 자료를 제시하는 데 사용되는 구성 요소이다. -
살아있는 사람 -
마그달레나 툴
폴란드의 가수 마그달레나 툴은 2007년 데뷔 앨범 발매 후 2011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폴란드 대표로 참가했으며, 이후에도 앨범 발매와 유로비전 관련 활동, 방송 출연 등 다양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2.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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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프로 입단 전
어린 시절부터 고교 야구를 보며 야구에 대한 동경이 강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신체 능력과 운동 신경이 뛰어나 야구 외에도 수영 등에서 현(県) 대회 상위권 성적을 기록했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으며, 타고난 왼손잡이였지만 1학년 때는 우타자로 활동하다 코치의 지시로 2학년 때부터 좌타자로 전향했다. 중학생 시절에는 키는 컸지만 힘이 부족하여 주로 2번 타자로서 3루와 유격수 사이를 빠져나가는 땅볼 안타를 많이 쳤다고 한다.
나라 현립 사쿠라이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체격이 좋아졌고, 에이스 투수이자 4번 타자로 활약했다. 1978년 여름 고시엔 나라현 예선에서는 2년 선배인 히가시 토시오와 배터리를 이루어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코리야마 고교에 패했다. 1979년 가을 나라 대회에서도 준결승에 올랐으나 지벤 학원에 패했고, 패자 부활 2위 결정전에서도 타카다 상업고에 져 긴키 대회 진출에는 실패했다.
1980년 봄 나라 대회 결승에서는 강호 텐리 고교와 맞붙었다. 카와모토 카즈히로와 투수전을 벌였고, 무사 만루 상황에서 고의 사구를 얻는 이례적인 경험을 했다.(같은 시합의 다음 타석에서도 만루를 맞이하여 만루 홈런을 쳤다. 하지만 투수 고마다는 후지모토 히로시에게 만루 홈런을 맞아 팀은 8-13으로 패했다.) 난타전 끝에 패배했다. 또한 이닝의 선두 타자로 고의 사구를 받은 적도 있었다. 같은 해 여름 현 예선에서도 패배하여 결국 고시엔 무대는 밟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통산 43개의 홈런과 타율 .490을 기록했다. 그의 타격 연습 전에는 타구에 주의하라는 교내 방송이 나올 정도로 비거리가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지역 언론에서는 그를 "나라의 [[찰리 매뉴얼|매뉴얼]]"이라고 불렀다. 당시 담당 스카우트는 이토 키쿠오였다.
2.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81년 ~ 1993년)
1980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2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당시에는 투수였으나, 본인이 투수로서 한계를 느껴 후지타 모토시 감독에게 직접 타자 전향을 요청하여 인정받았다. 입단 동기로는 하라 다쓰노리가 있다. 입단 후 2년간(1981년~1982년)은 2군에서 활동했다.
1983년 4월 10일, 개막 2차전인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전(고라쿠엔 구장)에서 1군 데뷔전을 가졌다. 경기 전 부상당한 나카하타 기요시를 대신해 7번 타자 겸 1루수로 선발 출전하여, 1회 첫 타석에서 미기타 가즈히코를 상대로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첫 타석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 당시 후지타 모토시 감독은 베테랑 야마모토 고지 기용을 고려했으나, 수석 코치였던 오 사다하루의 추천으로 고마다가 선발 출전하게 되었다.
이 해 고마다는 규정 타석에는 미달했지만 1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등번호 50번의 고마다, 12승을 거두며 센트럴 리그 신인왕을 수상한 등번호 54번의 마키하라 히로미, 타율 .326을 기록한 등번호 55번의 요시무라 사다아키는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기여하며 '50번 트리오'로 불리며 주목받았다. 게리 토마슨을 흉내 낸 '코마손'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1983년 일본 시리즈에도 출전했다.
1984년 감독으로 취임한 오 사다하루의 권유로 한 발 타법( 一本足打法일본어 ) 습득을 시도했다. 오 감독의 스승인 아라카와 히로시의 지도를 받으며 합기도 수련과 진검 휘두르기 등 강도 높은 훈련을 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타격에 대한 깊은 고민으로 동료들로부터 '로댕'(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85년 초 한 발 타법을 포기했고, 1986년 후반 당시 2군 타격 코치였던 마쓰바라 마코토의 지도를 받아 그립을 낮추고 레벨 스윙을 하는 자신만의 타격 스타일을 확립했다. 외야수와 1루수를 겸하며 주전 선수들의 부상 공백을 메우면서 출전 기회를 늘려갔다.
1987년 시즌 후반 마쓰모토 마사시로부터 외야수 자리를 확보했고, 1988년에는 등번호를 10번으로 변경하며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웠다. 시즌 막판 10경기에서 24타수 14안타(타율 .583)를 기록하며 최종 타율 .307로 리그 4위에 올랐다. 이 해 처음으로 4번 타자로 선발 출전하기도 했다. 팀 사정상 1987년 후반부터 1988년 전반까지 1번 타자로 기용되기도 했다.
1989년 후지타 모토시 감독이 복귀한 후, 나카하타 기요시의 부상과 오카자키 이쿠의 3루수 전환으로 1루수 자리를 확고히 했다. 시즌 마지막 15경기에서 47타수 21안타(.447)를 치며 타율을 .284에서 .303으로 끌어올려 2년 연속 3할을 달성했고, 처음으로 골든 글러브상(1루수 부문)을 수상했다. 이 무렵부터 '공포의 7번 타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 7차전(후지이데라 구장)에서 긴테쓰 버펄로스의 가토 데쓰로에게 선제 홈런을 친 후 3루를 돌며 "바~카!!!"라고 외친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 이는 3차전 패배 후 가토가 "시즌 중 상대가 더 강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되었으나, 고마다 본인은 흥분해서 나온 말이라고 후일 해명했다. 팀은 3연패 후 4연승으로 우승했으며, 고마다는 7경기 시리즈에서 타율 .522를 기록하며 MVP에 선정되었다.
1990년에는 7번 타순에서 팀 내 최다인 22홈런, 83타점을 기록하며 리그 2연패에 기여했고, 팬 투표로 올스타전에도 처음 출전했다. 하지만 세이부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14타수 2안타로 부진했고 팀도 4연패했다.
1991년에는 주로 3번 타자로 출전하여 개인 최고 타율이자 팀 최고 타율인 .314를 기록하며 팀의 주축 타자로 자리매김했다. 8월 19일 주니치전(도쿄 돔)에서는 우에하라 아키라를 상대로 개인 유일의 사요나라 홈런을 치기도 했다.
1992년에는 하라 다쓰노리가 아킬레스건 통증으로 1루로 이동하면서 우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수비 범위는 넓지 않았지만 강한 어깨(9보살)로 기여했다. 나카니시 후토시 타격 코치의 지도 아래 개인 최다인 27홈런을 기록했으나, 득점권 타율(.231)은 낮았다. 시즌 전반에는 부진했던 하라를 대신해 4번 타자로 29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4월 21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는 한 경기 3홈런을 기록했고, 8월 17일 야쿠르트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는 다카노 히카루를 상대로 요미우리 팀 통산 6000호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후 하라, 사이토 마사키와 함께 요미우리 일본인 선수 최초로 연봉 100을 돌파했다.
1993년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부임하면서 하라가 3루로 복귀함에 따라 다시 1루수로 돌아왔으나, 고관절 통증 등으로 개막부터 타격 부진을 겪었다. 5월 22일 한신 타이거스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선발 제외되며 1990년 9월 11일부터 이어온 307경기 연속 풀 이닝 출장 기록과 1989년 5월 27일부터 이어온 45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이 모두 중단되었다. 이 해 타격 코치 나카하타 기요시와 타격 이론 차이로 불화를 겪었고,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과의 소통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시즌 종료 후 주니치의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FA를 선언하고 요미우리 입단이 유력해지자, 출전 기회 감소와 트레이드 가능성을 우려한 고마다는 마찬가지로 FA를 선언했다. 간토 지방 연고팀을 원했던 고마다의 희망과 곤도 아키히토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감독(전 요미우리 코치)의 영입 의사가 맞아떨어져 요코하마로 이적하게 되었다. 2024년 현재, 고마다는 요미우리에서 성장하여 FA를 통해 일본 내 다른 구단으로 이적한 유일한 선수이다. 한신, 다이에, 롯데, 세이부 등 다른 구단에서도 영입 제의가 있었으나, 은사인 후지타 모토시 전 감독의 조언 등을 고려해 요코하마를 선택했다고 후일 밝혔다.
2.3.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시절 (1994년 ~ 2000년)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시절 (1994년 ~ 2000년)'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해당 섹션의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
3. 지도자 경력
2001년 현역 은퇴 후 닛폰 방송 야구 해설자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그 해 가을부터 시작된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의 도쿄 드림스에서 4번 타자로 활약했다. 2002년부터는 TV 도쿄 해설도 겸임했다.
2005년, 신생 구단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초대 감독 타오 야스시의 요청으로 1군 타격 코치로 부임했다. 하지만 팀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같은 해 4월 30일부로 2군 타격 코치로 강등되었고, 시즌 종료 후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2006년부터 다시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며 TV 도쿄를 중심으로 tvk, 도호쿠 방송, TV 홋카이도, STV 라디오 등에 출연했다. 같은 해 요미우리 자이언츠 춘계 캠프에서는 이승엽의 임시 1루 수비 코치를 맡기도 했다.
2009년에는 친정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1군 타격 코치로 복귀하여, 당시 부족했던 좌타자 육성을 담당했다. 그러나 팀 타율이 리그 최하위인 .239에 그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시즌 종료 후 퇴단했다.
2010년부터 tvk, 분카 방송, 스카이 A sports+ (2012년부터 J 스포츠로 이관) 등에서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또한 사단법인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의 감사를 맡았고, 같은 해 제17회 IBAF 인터컨티넨탈컵에서는 일본 대표팀 타격 코치를 역임했다. 2011년부터는 TBS 뉴스 버드의 야구 해설자도 겸임했다.
2012년에는 지바 롯데 마린스 춘계 캠프에서 오마츠 나오히사의 임시 1루 수비 코치를 맡았고, 같은 해 9월부터는 도키와 대학 경식 야구부의 임시 코치로 활동하며 팀의 관동·고신에쓰 대학 야구 연맹 1부 리그 승격에 기여했다.
2016년, 총감독 에모토 타케노리의 요청으로 독립 리그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plus의 고치 파이팅 독스 감독으로 취임했다. 첫해인 2016년에는 전기 리그에서 최하위에 머물렀으나, 후기 리그에서는 3위를 기록하며 4시즌 만에 팀을 최하위에서 벗어나게 했다. 2017년에는 전 메이저리거 매니 라미레즈의 합류에도 불구하고 전기 2위, 후기 3위에 그쳤지만, 연간 승률 2위를 기록하며 7년 만에 팀의 5할 승률 돌파를 이끌었다. 2018년에도 전기 2위, 후기 3위를 기록한 후 유임되었다. 2019년 전기 리그에서는 도쿠시마 인디고 삭스와 우승 경쟁을 벌였으나 2위에 머물렀다. 같은 해 7월 12일, 우승 실패와 NPB 선수 배출 부진 등을 이유로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사임할 것을 발표했다. 후기 리그에서는 팀이 최하위(4위)를 기록했고, 9월 10일 홈 최종전 후 팬 및 선수들과 기념 촬영을 가졌다. 고치 감독 시절에는 고치시에서 'KOMA'S HOUSE'라는 바 운영을 돕기도 했으나, 감독 퇴임과 함께 2019년 10월 폐점했다.
2020년부터는 다시 TV 도쿄(BS TV 도쿄), tvk, TBS 채널 등에서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2021년 11월 13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3군 감독으로 선임되어, 1993년 FA로 팀을 떠난 지 29년 만에 요미우리로 복귀하게 되었다. 2022년 7월 마이나비 올스타 게임에서는 하라 다쓰노리 감독이 코로나19 감염으로 불참하게 되자, 센트럴 리그 코치 대행으로 참가했다. 2023년 11월부터 12월까지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 윈터 베이스볼 리그에서는 NPB WHITE 팀(DeNA, 주니치, 라쿠텐, 세이부 연합)의 감독으로 파견되었다.
4. 해설자 및 기타 경력
2001년 1월 18일 현역 은퇴를 선언한 후, 그 해부터 닛폰 방송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가을에 시작된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에서는 도쿄 드림스의 4번 타자로 활약했다. 2002년부터는 TV 도쿄의 해설도 겸임하며 평론가로서 활동 영역을 넓혔다.
2005년, 신생 구단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신임 감독 타오 야스시의 요청으로 1군 타격 코치로 부임했으나, 팀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같은 해 4월 30일 2군 타격 코치로 강등되었고 시즌 종료 후 해임되었다.
2006년부터 다시 야구 평론가로 복귀하여 TV 도쿄를 중심으로 TV 가나가와, 도호쿠 방송, TV 홋카이도, STV 라디오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하며 해설가로 활동했다. 같은 해, 친정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춘계 캠프에서 이승엽의 임시 1루 수비 코치를 맡기도 했다.
2009년에는 현역 시절 두 번째 팀이었던 요코하마의 1군 타격 코치로 부임했다. 당시 선발 라인업에 좌타자가 부족했던 팀 상황에서 좌타자 육성을 기대받았으나, 팀 타율이 리그 최하위인 .239에 그치는 등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시즌 종료 후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2010년부터는 TV 가나가와, 분카 방송, 스카이 에이 (주로 라쿠텐 경기, 2012년부터 J 스포츠로 이관)의 야구 해설위원을 맡았다. 또한, 사단법인화된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의 감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 제17회 IBAF 인터컨티넨탈컵에서는 일본 대표팀의 타격 코치를 역임했다. 2011년부터는 TBS 뉴스 버드의 야구 해설자로도 활동했다.
2012년에는 지바 롯데 마린스 춘계 캠프에서 오마쓰 쇼이쓰의 임시 1루 수비 코치를 맡았고, 9월 1일부터는 도키와 대학 경식 야구부의 임시 코치로 활동하며 팀의 1부 리그 승격에 기여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마스터스 갑자원 2012에 모교 OB팀의 일원으로 출전하여 선수 선서를 하기도 했다.
2016년, 독립 리그인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plus의 고치 파이팅 독스 감독으로 취임했다. 첫해 후기 리그에서 팀을 3위로 끌어올리며 4년 만에 최하위에서 벗어났고, 2017년에는 매니 라미레즈의 합류 속에 연간 승률 2위를 기록했다. 2018년 시즌 종료 후 유임되었으나, 2019년 7월 12일, NPB 선수 배출 실패 등을 이유로 시즌 종료 후 감독직 사임을 발표했다. 고치 감독 시절에는 시내에서 "KOMA'S HOUSE"라는 바 운영을 돕기도 했으나, 감독 퇴임과 함께 2019년 10월 25일 폐점했다.
2020년부터는 다시 TV 도쿄(BS TV 도쿄), TV 가나가와, TBS 채널의 야구 해설자 및 탤런트로 활동을 재개했다. 2021년 11월 13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3군 감독으로 선임되어 1993년 FA 이적 이후 29년 만에 요미우리로 복귀했다. 2022년 마이 내비 올스타 게임에서는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해 대리로 센트럴 리그 코치를 맡았다. 2023년에는 아시아 윈터 리그에 파견되는 NPB 혼성팀 "NPB WHITE"의 감독을 맡았다.
=== 주요 출연 프로그램 ===
==== 해설 ====
* tvk 프로 야구 중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열렬 LIVE (TV 가나가와)
* 분카 방송 홈런 나이터
* 분카 방송 라이온즈 나이터
* 스카이 A 스타디움
* TwellV 프로 야구 중계
* MX 스타디움
* 사무라이 프로 야구 (TBS 뉴스 버드 제작, 2011년 - )
* STV 어택 나이터 (STV 라디오, 2006년 - 2008년, 2011년 - )
* 닛폰 방송 쇼업 나이터 (닛폰 방송, 2001년 - 2004년)
* 전력 투구 (TV 도쿄 계열, 2002년 - 2004년, 2006년 - 2008년)
* SAMURAI BASEBALL (TBC 텔레비전, 2008년)
* TBC 이글스 나이터 (TBC 라디오)
* TVh 파이터스 중계
* 이제부터는 퍼시픽 리그다! (2011년, TOKYO MX)
==== 기타 ====
* 격생! 스포츠 TODAY (TV 도쿄)
* 스포츠 혼 (TV 도쿄)
* 메가 스포츠! (TV 도쿄)
* 선데이 모닝 (TBS)
* FNS 다큐멘터리 대상 짖어라 투견 구단 만루남과 마지막으로 도전하다 (2016년, 고치 산산 TV 제작, 후지 TV)
* 뮤직 불펜 (2012년 - )
* 아저씨 가요 쇼 표주박에서 고마다! (2012년 - )
* 열혈 코마 스포츠 (2015년 - )
* 고마다 노리히로 만루 나이트 (2013년 - , 분카 방송 발 NRN 넷)
5. 논란 및 사건
1998년 시즌, 이시이 타쿠로의 요청으로 팀의 캡틴을 맡아 머신건 타선의 5번 타자로서 활약하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시즌 초반에는 타점왕 경쟁에 참여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후반기에는 극심한 타격 부진에 빠져 응원단으로부터 응원 보이콧을 당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부진에도 불구하고 시즌 81타점을 기록하며 생애 첫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부진을 딛고 5차전 4안타 5타점, 6차전 결승타 등의 활약으로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2000년에는 시즌 중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 대타 교체에 불만을 품고 경기 도중 무단으로 이탈하는 사건을 일으켜 구단으로부터 벌금 및 2군 강등 징계를 받았다.
5.1. 경기 중 무단이탈 사건 (2000년)
2000년 시즌, 고마다는 리그 최고령 야수였고 통산 2000안타 달성을 73개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압박감 때문인지 개막부터 타격 부진에 시달렸다. 가족들도 경기장에서 지켜보던 6월 18일(아버지의 날)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 6회에 대타로 교체되자 격분했다. 그는 배트와 헬멧을 던지고 벤치 뒤로 물러났으며, 야마시타 다이스케 헤드코치의 허가를 받고 경기 도중에 귀가했다.
구장을 떠나면서 취재진에게 "(감독 곤도 히로시와) 야구관이 다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구단 수뇌부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구단으로부터 벌금 300와 2군 강등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상대 투수는 우완 네이선 민치였는데, 좌타자인 자신(이날 경기에서 2타수 2삼진을 기록 중이었다)을 빼고 우타자 나카네 히토시를 대타로 기용한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또한, 당시 팀 성적이 최하위에 머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번트 지시나 별도의 미팅 없이 소극적인 공격 운영을 하는 곤도 히로시 감독의 지휘 방식에 대한 불만도 누적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6. 수상 및 기록
고마다 노리히로는 선수 생활 동안 여러 상을 받았고 주목할 만한 기록들을 남겼다. 특히 수비 능력과 만루 상황에서의 강한 모습으로 알려졌다.
주요 수상으로는 베스트 나인 1회(1998년), 골든 글러브상 10회(1989년~1991년, 1993년~1999년)가 있다. 골든 글러브 10회 수상은 1루수 부문 역대 최다 기록이며, 7년 연속 수상은 오 사다하루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한다. 또한, 1989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MVP를, 199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우수 선수상을 수상하며 큰 경기에서도 활약했다. 1992년 올스타전 제3차전에서는 MVP로 선정되기도 했다.
주요 기록으로는 만루 사나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만루 상황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점이 꼽힌다. 통산 홈런은 195개이지만, 만루 홈런은 역대 5위에 해당하는 13개를 기록했다. 이는 홈런 약 15개당 1개꼴로 만루 홈런을 친 높은 비율이며, 특히 요코하마 시절에는 8개를 기록하여 홈런 약 8개당 1개가 만루 홈런이었다. 1994년부터 1999년까지 6년 연속 만루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이치로와 함께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 1996년 8월 22일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만루 홈런을 쳐내며 센트럴 리그 모든 구단을 상대로 만루 홈런을 기록하는 진기록도 세웠다. 2000년 9월 6일에는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여 명구회에 가입했다.
한편, 병살타가 많은 선수이기도 했다. 통산 229개의 병살타는 일본 프로 야구 좌타자 역대 1위 기록이며, 1994년에는 한 시즌 최다인 29개의 병살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는 주자가 있을 때 1, 2루간으로 안타를 만들어 주자를 진루시키려는 타격 스타일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있다.
6.1. 수상
* 베스트 나인: 1회 (1루수 부문: 1998년)
* 골든 글러브상: 10회 (1루수 부문: 1989년 ~ 1991년, 1993년 ~ 1999년) ※수상 횟수 역대 4위, 1루수 부문 역대 최다, 1루수 부문을 7년 연속은 오 사다하루에 이어 역대 2위 (그 외 나카하타 기요시)
* 일본 시리즈 MVP: 1회 (1989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 (1998년)
* 올스타전 MVP: 1회 (1992년 제3차전)
* 월간 MVP: 1회 (야수 부문: 1990년 4월)
* 최우수 JCB・MEP상: 1회 (1992년)
* 우수 JCB・MEP상: 2회 (1995년, 1997년)
* JA 전국 농업 Go・Go상: 1회 (최다 2·3루타상, 1994년 8월)
* 야나세·자이언츠 MVP상: 1회 (1992년)
6.2. 기록
| 연도 | 소속 구단(팀) | 등번호 | 타율 | 출장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도루 실패 | 볼넷 | 사구 | 삼진 | 병살타 | 장타율 | 출루율 |
|---|---|---|---|---|---|---|---|---|---|---|---|---|---|---|---|---|---|
| 1983 | 요미우리 자이언츠 | 50 | .286 | 86 | 52 | 7 | 1 | 12 | 47 | 1 | 1 | 13 | 0 | 31 | 5 | .337 | .369 |
| 1984 | 요미우리 자이언츠 | 50 | .238 | 79 | 20 | 3 | 1 | 2 | 11 | 1 | 0 | 7 | 0 | 21 | 3 | .297 | .369 |
| 1985 | 요미우리 자이언츠 | 50 | .252 | 92 | 27 | 6 | 0 | 3 | 20 | 1 | 1 | 15 | 2 | 24 | 4 | .324 | .371 |
| 1986 | 요미우리 자이언츠 | 50 | .257 | 64 | 13 | 1 | 0 | 2 | 18 | 1 | 0 | 8 | 2 | 21 | 2 | .350 | .406 |
| 1987 | 요미우리 자이언츠 | 50 | .287 | 113 | 50 | 7 | 1 | 15 | 40 | 1 | 1 | 29 | 1 | 43 | 11 | .344 | .450 |
| 1988 | 요미우리 자이언츠 | 50 | .307 | 100 | 22 | 2 | 1 | 10 | 40 | 0 | 4 | 32 | 0 | 60 | 10 | .367 | .472 |
| 1989 | 요미우리 자이언츠 | 50 | .303 | 125 | 35 | 8 | 2 | 9 | 56 | 10 | 6 | 40 | 2 | 70 | 10 | .369 | .478 |
| 1990 | 요미우리 자이언츠 | 50 | .289 | 130 | 45 | 11 | 2 | 8 | 66 | 5 | 2 | 45 | 1 | 78 | 18 | .338 | .403 |
| 1991 | 요미우리 자이언츠 | 50 | .281 | 131 | 41 | 10 | 0 | 9 | 53 | 1 | 3 | 47 | 0 | 78 | 14 | .311 | .403 |
| 1992 | 요미우리 자이언츠 | 50 | .291 | 129 | 41 | 10 | 0 | 9 | 56 | 1 | 1 | 37 | 1 | 84 | 14 | .330 | .403 |
| 1993 | 요미우리 자이언츠 | 50 | .258 | 85 | 25 | 4 | 0 | 4 | 34 | 2 | 0 | 18 | 1 | 57 | 11 | .301 | .343 |
| 1994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51 | .284 | 130 | 45 | 11 | 2 | 9 | 68 | 0 | 1 | 31 | 2 | 78 | 20 | .321 | .429 |
| 1995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51 | .289 | 130 | 41 | 10 | 0 | 9 | 53 | 1 | 1 | 47 | 0 | 78 | 14 | .330 | .403 |
| 1996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51 | .299 | 130 | 41 | 10 | 0 | 9 | 63 | 1 | 3 | 45 | 1 | 78 | 18 | .358 | .410 |
| 1997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51 | .308 | 131 | 45 | 11 | 2 | 9 | 71 | 2 | 3 | 31 | 2 | 86 | 21 | .360 | .448 |
| 1998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51 | .290 | 136 | 43 | 11 | 1 | 8 | 71 | 0 | 1 | 35 | 0 | 84 | 14 | .330 | .403 |
| 1999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51 | .302 | 129 | 41 | 10 | 0 | 9 | 71 | 0 | 1 | 31 | 2 | 84 | 14 | .330 | .403 |
| 2000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51 | .258 | 85 | 25 | 4 | 0 | 4 | 34 | 2 | 0 | 18 | 1 | 57 | 11 | .301 | .343 |
| 통산:18년 | 18시즌 | 7598 | 837 | 97 | 1122 | 3002 | 953 | 35 | 35 | 563 | 19 | 1113 | 229 | .289 | .342 | ||
7. 기타
만루 상황에서의 타석에서 뛰어난 승부 근성을 보여 만루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통산 홈런은 195개(한 시즌 최다는 27개)였지만, 만루 홈런 수는 13개로 역대 5위에 해당한다. 만루 홈런을 친 경기는 모두 승리했으며, 홈런 약 15개당 만루 홈런 1개라는 높은 비율을 기록했다. 특히 요코하마 시절에는 8개의 만루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요코하마 시절 통산 홈런(63개) 기준으로 약 8개당 1개가 만루 홈런인 셈이다. 또한 1994년부터 1999년까지 6년 연속 만루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이치로와 함께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 만루 상황 통산 타율은 .332(220타수 73안타), 200타점을 기록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제52대 4번 타자였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통산 34경기에서 4번 타자로 출전하여 타율 .376(133타수 50안타), 7홈런, 14타점을 기록했다. 요코하마 이적 후에도 1998년부터 2000년까지 22경기에서 4번 타자로 나서 타율 .341(85타수 29안타), 3홈런, 19타점을 기록했다.
1군 데뷔 초에는 장거리 타자로 기대를 모았으나, 극심한 타격 부진 후 폼을 수정하면서 장타력을 포기하는 대신 정확성에 중점을 둔 타격 스타일을 확립하여 주전 자리를 확보했다. 단타라도 안타를 쳐서 다음 타자에게 연결하는 스타일은 요코하마 이적 후 더욱 두드러졌다. 이 때문에 요코하마 시절 7년간 한 시즌 최다 홈런은 13개였고,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것은 세 번뿐이었다. 요미우리 시절에는 팀 내에서도 뛰어난 근력을 가졌다고 평가받았으며, 연습 때는 장거리 타자들보다 더 멀리 공을 날려 보내 후지타 모토시 감독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은퇴 후에도 장타력은 여전하여 코치 시절 프리 배팅에서 담장을 넘기는 타구를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좌타자로서 일본 프로 야구 역대 1위인 통산 229개의 병살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1994년에는 시즌 29개의 병살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고마다 자신은 주자가 1루에 있을 때 1, 2루 간을 빠져나가는 안타로 주자를 1, 3루로 보내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했지만, 이 때문에 빗맞은 2루 땅볼이 많아졌다고 한다. 특히 요코하마 이적 후에는 확실성을 추구하며 배트를 짧게 잡고 맞히는 데 집중하는 타격이 늘어 결과적으로 빗맞은 내야 땅볼이 많아졌다. 고마다 본인은 몸집이 큰 선수가 나이가 들어 하체 힘이 약해지면 상체가 앞으로 쏠리는 타격을 하게 되어 내야 땅볼이 늘어난다고 분석했다.
주요 수상
* 베스트 나인: 1회 (1루수 부문: 1998년)
* 골든 글러브상: 10회 (1루수 부문: 1989년 ~ 1991년, 1993년 ~ 1999년) ※수상 횟수 역대 4위, 1루수 부문 역대 최다, 1루수 부문 7년 연속 수상은 왕정치에 이어 역대 2위
* 일본 시리즈 MVP: 1회(1989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1998년)
* 올스타전 MVP: 1회(1992년 제3차전)
* 월간 MVP: 1회(1990년 4월)
* 최우수 JCB·MEP상: 1회(1992년)
* 우수 JCB·MEP상: 2회(1995년, 1997년)
주요 기록
* 통산 100홈런: 1992년 4월 14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차전(도쿄 돔) ※역대 168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1992년 7월 1일, 대 한신 타이거스 17차전(도쿄 돔) ※역대 303번째(사토 겐이치와 동일 달성).
* 통산 1000안타: 1993년 8월 29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8차전(도쿄 돔) ※역대 170번째.
* 통산 150홈런: 1995년 9월 7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4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역대 102번째.
* 통산 1500경기 출장: 1996년 6월 8일, 대 한신 타이거스 10차전(삿포로 마루야마 구장) ※역대 116번째.
* 통산 1500안타: 1997년 5월 6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4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역대 71번째.
* 통산 1000삼진: 1999년 5월 27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9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역대 24번째.
* 통산 2000경기 출장: 2000년 4월 30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6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역대 31번째.
* 통산 2000안타: 2000년 9월 6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22차전(나고야 돔) ※역대 29번째.
* 통산 229개 병살타 (역대 7위)
* 올스타전 출장: 6회(1990년 ~ 1992년, 1995년, 1997년, 1998년)
* 프로 야구 통산 55000호 홈런: 1987년 9월 7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24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5회초 가케하타 미쓰노리로부터 2점 홈런
* 프로 야구 통산 70000호 홈런: 1997년 9월 9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3차전(도쿄 돔), 4회초 발비노 갈베스로부터 우중간 솔로 홈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