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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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순제는 후한 안제의 아들로, 115년에 태어나 144년에 사망했다. 125년에 즉위하여 30세의 나이로 붕어할 때까지 재위했다. 순제는 환관 세력이 강화되는 시기를 겪었으며, 선비족, 흉노족 등의 침략과 자연재해로 어려움을 겪었다. 순제의 치세 동안 여러 연호가 사용되었으며, 묘호는 경종이었으나 헌제 때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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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순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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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휘 | 유보(劉保) |
자 | (정보 없음) |
시호 | 효순황제(孝順皇帝) |
묘호 | 경종(敬宗)190년 폐지 |
생년 | 115년 |
몰년 | 144년 9월 20일 |
부친 | 후한 안제 |
모친 | 이궁인(李宮人) |
배우자 | 양황후 |
자녀 | 후한 충제 무양장공주 관군장공주 여양장공주 |
능묘 | 헌릉(憲陵) |
통치 | |
재위 기간 | 125년 12월 16일 - 144년 9월 20일 |
연호 | 영건(永建): 126년 - 132년 양가(陽嘉): 132년 - 135년 영화(永和): 136년 - 141년 한안(漢安): 142년 - 144년 건강(建康): 144년 |
이전 및 이후 | |
이전 | 북향후 |
이후 | 후한 충제 |
2. 생애
125년 환관 손정 등이 염현을 죽이고 폐태자 유보를 황제로 즉위시키니 이가 후한 순제이다. 순제는 상제와 소제의 5촌 종조카이다.[3] 순제는 환관에게 보답하기 위해 19명을 후에 봉하고 양자를 통한 세습제를 허용하여 환관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순제는 양황후(양납)를 황후로 봉하고 그 오빠인 양기를 등용한다. 양태후가 황후가 되자 양기는 대장군이 되어 전권을 휘두르며 양씨 일족으로 조정을 장악하였다.[4] 순제는 즉위 직후 맹상을 합포현(合浦縣)의 태수(太守)로 임명하였다.
2. 1. 즉위 과정 (115년 ~ 125년)
115년 안제와 그의 후궁 이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120년 5월 25일,[3] 안제는 유보를 황태자로 책봉했는데, 이는 그가 안제의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124년, 안제의 측근이었던 환관 강경(江京)과 범풍(樊豐), 그리고 그의 유모 왕성(王聖)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유보의 유모 왕남(王男)과 요리사 병길(邴吉, 한나라 선제와 동명이인)을 범죄 혐의로 허위 고발했다. 안제는 왕남과 병길을 처형하고 그 가족을 유배 보냈다. 아홉 살의 유보는 매우 슬퍼했다. 강경과 범풍은 훗날 보복을 두려워하여 안씨 황후와 음모를 꾸며 유보와 그의 시종들을 범죄 혐의로 허위 고발했다. 안제는 그들의 말을 믿고 유보를 제음왕으로 강등시켰다.
125년 4월, 안제는 완성(宛城, 현대의 허난성 남양시) 여행 중 갑자기 사망했다. 안씨 황후는 북향후 유의(劉懿)를 황제로 옹립했다. 열 살의 유보는 황위 계승에서 배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공식적인 애도에서도 제외되었다.
그해 말, 어린 황제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 유보에게 충성스러운 환관 손정은 유보를 복위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어린 황제가 죽은 후, 손정과 그의 동료 환관 18명은 궁궐을 기습하여 강경을 살해하고 강경의 동료 이윤(李閏)을 강제로 합류시켰다. 그들은 유보를 궁궐로 맞이하여 황제로 선포했다. 며칠 동안 환관의 군대는 안태후의 군대와 싸웠고, 마침내 안태후와 그녀의 형제들을 물리쳤다. 안씨 일족은 학살되었고, 안태후는 126년 2월 사망할 때까지 궁궐에 유폐되었다.[3]
2. 2. 영건(永建) 연간 (126년 ~ 131년)
126년 봄 정월, 염태후(閻太后)가 사망하고, 2월에 매장했다. 같은 해 1월, 태부 풍석, 태위 유희, 사도 이합을 면직시키고, 2월에 환언을 태부, 주총을 태위·녹상서사, 주창을 사도로 임명했다. 농서의 종강이 반란을 일으키자, 호강교위 마현이 이를 격파했다. 7월에 래력을 차기장군으로 임명했다. 8월에는 선비가 대군을 침공했고, 대군 태수 이초가 전사했다. 10월에 사공 도돈이 면직되고, 장호가 그 후임이 되었다. 선비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주변의 주와 군의 병력 증강이 명해졌다.127년 2월, 선비가 요동군과 현토군을 침략했다. 호오환교위 경엽이 흉노의 남선우를 이끌고 선비를 격파했다. 6월, 어머니 이씨에게 황후를 추증했다. 서역장사 반용과 돈황군 태수 장랑이 연기, 울려, 위수의 세 나라를 쳐서 격파했다. 7월에 일식이 있었고, 태위 주총, 사도 주창을 면직시키고, 유광을 태위·록상서사로, 허경을 사도로 임명했다.
128년, 잇따른 천재지변을 겪고 순찰과 구빈 정책이 채택되었다. 9월, 선비가 어양을 침공했다. 12월, 태부 환언이 면직되었다. 이 해에 차기장군 래력이 파면되었다.
129년 정월, 순제가 원복했다. 이 해에 장마의 피해가 다섯 주에서 발생했다. 8월, 태위 유광과 사공 장호가 면직되었다. 9월에 방참이 태위·록상서사가 되었고, 왕공이 사공이 되었다. 11월, 사도 허경이 면직되었다. 선비가 삭방을 침공했다. 12월, 유기를 사도로 임명했다. 이 해에 회계군에서 오군을 분할했다. 또한 구미국이 사자를 보내왔다.
130년 정월, 소륵국, 대원국, 사차국이 사자를 보내왔다. 국내에서는 한재와 황충의 해가 계속되었다. 10월에는 정원후 반시(반초의 손자)가 음성공주를 살해한 죄로 요참형에 처해졌다.
131년 2월, 하간왕 유개가 사망했다. 9월, 호오환교위 경엽이 선비를 추토하여 이를 격파했고, 우전국의 왕이 사자를 보내왔다. 12월, 일남군의 섭조국과 선국이 사자를 보내왔다.
2. 3. 양가(陽嘉) 연간 (132년 ~ 135년)
132년 정월, 양씨를 황후로 삼았다.[4] 2월, 해적이 회계군을 습격하여 구장, 은, 무의 현령이 살해되고, 회계 동부 도위가 공격을 받자, 주변 현에 병사를 모으게 했다.[4] 3월, 양주의 6개 군에서 요적 장하 등이 49개 현을 습격하여 장리를 살상했다.[4] 7월, 지동동의가 제작되었다.[4] 선비가 요동을 침략했다.[4]133년 2월, 오군과 회계군에서 기근이 발생하여 종자와 식량을 빌려주었다.[4] 3월, 흉노중랑장 왕추에게 명하여 좌골도후 등을 이끌고 선비를 공격하게 하여 이를 격파했다.[4] 4월, 다시 롱서 남부 도위를 설치했다.[4] 경사에서 지진이 발생했고, 5월에는 조칙이 내려졌다.[4] 사공 왕공이 면직되고, 6월에 공부가 사공으로 임명되었다.[4] 악천후가 그치지 않아, 7월에 태위 방찬이 면직되고, 8월에 시연이 태위로 임명되었다.[4] 선비가 대군을 침공했다.[4]
134년 3월, 익주에서 도적이 영장을 인질로 삼고, 열후를 살해했다.[4] 4월, 차사후부 사마가 후부왕 가특노 등을 이끌고 흉노를 토벌하여 크게 격파하고 계모를 포로로 잡았다.[4] 7월, 종강이 농서, 한양을 침공했고, 10월에 호강교위 마속이 이를 격파했다.[4] 11월, 사도 유기와 사공 공부가 면직되고, 황상이 사도, 왕탁이 사공이 되었다.[4] 무도에서 새의 안팎의 강족이 둔관을 공격하고 약탈했다.[4]
135년 2월, 환관이 양자를 들이고 봉작을 세습하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했다.[4] 알자의 마현이 종강을 토벌하여 크게 격파했다.[4] 4월, 태위 시연을 면직시켰다.[4] 외척 양상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전 태위 방찬을 태위로 복직시켰다.[4] 10월, 오환이 운중을 침공했다.[4] 11월, 도료장군 경엽을 란지로 파견하여 여러 군의 병사로 하여금 지원하게 하여 오환을 패주시켰다.[4]
2. 4. 영화(永和) 연간 (136년 ~ 141년)
영화 원년(136년) 정월, 부여 왕이 내조했다.[4] 10월에는 승복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순제는 어운대에 피신했다.[4] 11월, 태위 방참이 파면되었다.[4] 12월, 상림의 만이가 반란을 일으켰고, 원래 사공이었던 왕공이 태위가 되었다.[4]영화 2년(137년) 정월, 무릉 만이 반란을 일으켜 충현과 이도를 침략했다.[4] 2월, 광한 속국 도위가 백마 강을 격파했고, 무릉 태수 이진이 무릉 만을 격파했다.[4] 3월, 사공 왕탁이 사망하고 곽건이 사공이 되었다.[4] 5월, 일남의 만이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공격했고, 7월에는 구진, 교지 2군에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4] 8월, 강하의 도적이 주의 장을 살해했다.[4] 10월, 순제는 장안으로 행차하여 백성들에게 시혜를 베풀고, 미앙궁에서 삼보의 군수, 도위 및 관속과 면회하여 노고를 치하했다.[4] 12월에는 장안으로 돌아왔다.[4]
영화 3년(138년) 2월, 경사 및 금성, 농서에서 지진이 일어났다.[4] 4월, 구강의 도적 채백류가 군계를 범하고 광릉군에 이르러, 강도의 장을 살해했다.[4] 광록대부가 금성, 농서에 위문하여 피해자를 위로하고, 세금 면제를 고했다.[4] 윤달에는 채백류 등이 무리를 이끌고 서주 자사 응지에게 항복했다.[4] 5월, 오군의 승인 양진이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공격하고 태수 왕형을 격파하고 참수했다.[4] 6월, 구진 태수 축량, 교지 자사 장교가 일남의 만을 유인하여 살해하고, 반란을 평정했다.[4] 8월, 사도 황상이 면직되었고, 9월, 유수가 사도가 되었다.[4] 10월, 소당 강이 금성을 침공했고, 호강교위 마현이 이를 격파했으나, 강족의 반란은 잇따랐다.[4]
영화 4년(139년) 정월, 중상시 장규, 거정, 양정 등이 죄를 얻어 주살되었고, 홍농 태수 장봉, 안평상 양호도 이에 연좌되어 옥사했다.[4] 4월, 호강교위 마현은 소당 강을 토벌하여 이를 크게 격파했다.[4] 8월, 태원군에서 가뭄이 일어나 백성들이 흩어져 광록대부가 파견되어 시혜와 세금 면제가 공포되었다.[4] 10월, 상림원에서 수렵이 행해졌고, 함곡관까지 왕래했다.[4] 11월, 광성원에 행차했다.[4]
영화 5년(140년) 4월, 남흉노 좌부 구룡 대인 오사와 차뉴 등이 반란을 일으켜 미적을 포위했다.[4] 5월, 도요장군 마속이 오사와 차뉴를 토벌하여 이를 토벌했다.[4] 흉노 중랑장 진구가 남흉노의 선우를 살해했다.[4] 차동강이 삼보를 침략하여 현의 령장을 살해했다.[4] 9월, 부풍과 한양에 발령하여 농도오를 300곳에 축조하고, 둔병을 배치했다.[4] 태위 왕공이 파면되고 환언이 태위가 되었으나, 그 사이에도 차동 강은 무도를 침략하고 농관을 불태웠다.[4] 서하군의 거처를 이석으로, 상군의 거처를 하양으로, 삭방의 거처를 오원으로 했다.[4] 구룡의 오사 등은 동쪽의 오환, 서쪽의 강호를 이끌고 상군을 침략하여, 차뉴를 선우로 삼았다.[4] 11월, 사흉노중랑장 장탐이 파견되어 이를 격파하고, 차뉴 등을 항복시켰다.[4]
영화 6년(141년) 정월, 정서장군 마현은 차동강과 사고산에서 싸웠으나, 패사했다.[4] 안정 태수 곽황이 옥사했다.[4] 윤달에는 공당 강이 농서를 침공하여 삼보에까지 이르렀다.[4] 3월, 무위 태수 조충은 공당 강을 토벌하여 이를 격파했다.[4] 사공 곽건이 면직되고 조계가 사공이 되었다.[4] 5월, 흉노 중랑장 장탐이 파견되어 오환, 강호를 천산에서 크게 격파했다.[4] 공당 강이 북지를 침공했다.[4] 8월, 대장군 양상이 사망하고, 하남윤 양기가 대장군이 되었다.[4] 9월, 여러 종족 강이 무위를 침공했다.[4] 10월, 안정의 거처를 부풍으로, 북지의 거처를 풍익으로 했다.[4] 11월, 집금오 장교를 차기장군 대행으로 삼고, 장병을 삼보에 주둔시켰다.[4]
2. 5. 한안(漢安)·건강(建康) 연간 (142년 ~ 144년)
142년 정월, 대사령을 반포했다. 8월, 남흉노 좌부 대인 구룡오사는 욱건대기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4] 시중두교, 광록대부주거, 수광록대부곽준, 풍선, 낙파, 장강, 주후, 유반 등 8명이 주군에 파견되었다. 9월, 광릉의 도적장영 등이 군현을 침공했다. 10월, 태위 환언과 사도 유수가 면직되었고, 차기장군 대행 장교도 파면되었다. 11월, 조준이 태위, 호광이 사도가 되었다. 광릉의 도적 장영 등은 연내에 태수 장강에게 항복했다.143년 2월, 선선국이 사신을 보내왔다. 4월, 호강교위 조충과 한양태수장공은 소당강과 참락에서 싸워 이를 격파했다. 6월, 남흉노에서 수의왕두루저가 선우가 되었다. 윤 10월, 조충이 소당강과 아양에서 싸워 이를 격파했다. 11월, 사흉노중랑장마식은 자객을 보내 구룡오사를 살해했다. 12월, 양주와 서주의 도적이 소성사를 공격하여 관리와 백성을 살상했다.[4]
144년 정월, 전년에 양주에서 180번이나 지진이 발생한 것을 받아 조칙이 내려졌고, 진무를 위해 광록대부 파견이 결정되었다. 3월, 영호강교위위거는 반강을 추토하여 이를 격파했다. 남군과 강하의 도적이 성읍을 약탈했지만, 주군이 이를 추토하여 평정했다. 4월, 사흉노중랑장 마식이 남흉노 좌부를 공격하여 이를 격파했으므로, 호강과 오환은 모두 항복했다. 황자 유병(충제)을 황태자로 삼고, 건강으로 개원하여 천하에 대사령을 반포했다. 8월, 양주와 서주의 도적범용, 주생 등이 성읍을 약탈했지만, 어사중승풍사가 파견되어 주군의 병사를 독려하여 이를 토벌했다.[4]
순제는 옥당전전에서 붕어했다. 향년 30세였다.[4]
3. 외교
순제는 반초의 아들 반용을 등용하여 서역 경영에 힘썼다. 영건 2년(127년)에는 반용과 돈황군 태수 장랑이 연기, 울려, 위수의 세 나라를 쳐서 격파했다.[1] 영건 5년(130년)에는 소륵국, 대원국, 사차국이 사자를 보내왔고,[2] 영건 6년(131년) 우전국의 왕이 사자를 보내왔으며,[3] 영화 원년(136년) 정월에는 부여 왕이 내조했다.[4] 영건 6년(131년) 12월에는 일남군의 섭조국과 선국이 사자를 보내왔고,[5] 영건 4년(129년)에는 구미국이 사자를 보내왔다.[6]
그러나 선비는 영건 원년(126년) 8월에 대군을 침공하여 대군 태수 이초가 전사하게 하는 등[7] 지속적으로 후한을 공격했다. 영건 2년(127년) 2월에는 요동군과 현토군을 침략했고, 호오환교위 경엽이 흉노의 남선우를 이끌고 선비를 격파해야 했다.[8] 영건 3년(128년) 9월에는 어양을 침공했고, 영건 4년(129년) 11월에는 삭방을 침공했다. 영건 6년(131년) 9월, 호오환교위 경엽이 선비를 추토하여 이를 격파했다.
영화 2년(137년)에는 무릉 만이 반란을 일으켜 충현과 이도를 침략했고, 5월에는 일남의 만이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공격했으며, 7월에는 구진, 교지 2군에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영화 3년(138년) 6월, 구진 태수 축량, 교지 자사 장교가 일남의 만을 유인하여 살해하고, 반란을 평정했다.
영화 5년(140년) 4월, 남흉노 좌부 구룡 대인 오사와 차뉴 등이 반란을 일으켜 미적을 포위했다. 5월, 도요장군 마속이 오사와 차뉴를 토벌했고, 흉노 중랑장 진구가 남흉노의 선우를 살해했다. 구룡의 오사 등은 동쪽의 오환, 서쪽의 강호를 이끌고 상군을 침략하여, 차뉴를 선우로 삼았다. 11월, 사흉노중랑장 장탐이 파견되어 이를 격파하고, 차뉴 등을 항복시켰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황후 | 순열황후 양씨(順烈皇后 梁氏) | |
후궁 | 헌릉귀인 우씨(憲陵貴人 虞氏) | |
자녀 | 한 충제 유병(沖帝 劉炳) | 헌릉귀인 우씨 소생, 장남 |
무양장공주 유생(舞陽長公主 劉生) | 헌릉귀인 우씨 소생, 장녀 | |
후궁 | 귀인 양씨(貴人 梁氏) | 양황후의 고모 |
후궁 | 귀인 복씨(貴人 伏氏) | |
자녀 | 관군장공주 유성남(冠軍長公主 劉成男) | 생모 불명, 차녀 |
여양장공주 유광(汝陽長公主 劉廣) | 생모 불명, 3녀 | |
후궁 | 귀인 두씨(貴人 竇氏) |
5. 평가
순제는 유약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나,[4] 정치적 역량은 부족하여 환관 세력과 외척 양씨의 발호를 막지 못해 후한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양기에게 대장군 직을 세습하게 한 것은 이후 양기 전횡의 원인이 되었다.[5] 순제의 묘호는 한 헌제 때 폐지되었다.[6]
순제는 옹립 공로자인 손정 등 환관들을 후(지방 영주)에 봉하고, 환관의 양자 인정 및 재산 상속을 허락했다. 이 때문에 후세에는 후한의 환관의 재앙이 순제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양씨를 황후로 세우고, 그 아버지인 양상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조정에 참여하게 했다. 양상은 전횡을 부리지 않고 환관과 융화하여 조정 운영을 했다. 그러나 양상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양기에게 대장군을 세습하도록 허락하자 양기는 조정을 전단하며 권세를 휘둘렀다. 순제는 현신을 기용하여 양기의 전횡을 억제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6. 연호
참조
[1]
기타
dingsi day of the 11th month of the 3rd year of the Yan'guang era
Book of the Later Han
[2]
기타
gengwu day of the 8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Jian'kang era
Book of the Later Han
[3]
기타
bingyin day of the 4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Yong'ning era
Book of the Later Han
[4]
기타
bingwu day of the 9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Jian'kang era
Book of the Later Han
[5]
서적
永建二年]夏六月乙酉,追尊谥皇妣李氏为恭愍皇后,葬于恭北陵。
Book of the Later Han
[6]
서적
[初平元年]是岁,有司奏,和、安、顺、桓四帝无功德,不宜称宗,又恭怀、敬隐、恭愍三皇后并非正嫡,不合称后,皆请除尊号。制曰:‘可。’)
Book of the Later Han
[7]
서적
後漢書』巻6、孝順孝沖孝質帝 紀第六
[8]
서적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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