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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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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율령국은 일본의 전통적인 지방 구분으로, 아스카 시대에 율령제와 중앙 정부가 수립되면서 각 지방을 구니(国)로 구분한 것이다. 구니는 기나이와 7도로 이루어진 오기칠도를 구성하는 단위였으며, 각 구니에는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고쿠시가 파견되어 통치했다. 율령국은 헤이안 시대에는 국력에 따라 다이고쿠, 조코쿠, 주고쿠, 게코쿠로, 수도와의 거리에 따라 기나이, 긴고쿠, 주고쿠, 온고쿠로 구분되었다. 가마쿠라 막부 이후 율령국은 점차 쇠퇴하여 에도 시대에는 번으로 대체되었으나, 주소 표기 등에서 기본적인 단위로 사용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폐번치현으로 해체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일본의 지명, 문화, 브랜드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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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령국
지도
정보
명칭일본의 옛 행정 구역
로마자 표기Ryōseikoku
일본어 표기令制国
기타 표기율령국(律令國)
개요
설명일본의 이전 1단계 행정 구역
시대7세기 후반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행정 구역
성립 배경7세기 후반 율령제 시행과 함께 설치
역할지방 행정 및 조세 징수 단위
하위 행정 구역
변화메이지 유신 이후 부현제 실시로 폐지
현재현재의 일본의 현의 전신
역사
성립7세기 후반, 다이카 개신 이후 율령제 시행과 함께 설치
변천초기에는 수도 주변을 중심으로 설정
점차 일본 전역으로 확대
시대에 따라 일부 구니의 분할 및 합병 발생
폐지1869년 판적봉환 이후 행정 구역 개편
1871년 폐번치현으로 완전히 폐지
구성
구니의 수시대에 따라 변동, 60여 개 정도
구니의 등급대국(大國), 상국(上國), 중국(中國), 하국(下國) 등으로 나뉨
주요 구니야마시로 국
무쓰 국
가와치 국
셋쓰 국
미노 국
히젠 국 등
율령제
관련 법률율령 (7~10세기 일본의 법체계)
지방 제도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국사(国司)가 통치
각 구니에 고쿠분지 설치
세금 제도조(租), 용(庸), 조(調) 등의 세금 징수
영향
현재지명, 문화, 역사 연구에 중요한 역할
지리적 개념현재의 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음
역사적 유산역사 연구, 문화 유산 연구에 중요한 자료
문화적 의미향토사 연구의 중요한 대상
추가 정보
같이 보기일본의 현
일본의 행정 구역
고키시치도
향토사
참고 자료평범사: 구 국명으로 보는 일본 지도첩

2. 용어

일본의 전통적 광역 지방 구분은 오기칠도기나이와 일곱 도(道)를 구분하였다. 구니는 오기칠도를 구성하는 단위였다. 보통은 가와치노쿠니(河内国)와 같이 구니로 불렀고 중국의 제도에 빗대어 부르기도 하였는데 가와치국의 경우 가슈(河州)로 불렀다.[31] 고대 말기에서 중세 이후 구니가 기본적인 지방의 구분으로 자리잡으면서 헤이케모노가타리와 같은 문학 작품에서 전국 66개국과 같은 표현으로 일본 전체를 나타내기도 하였다.[32]

율령국이나 영제국이라는 명칭은 현대의 역사학계에서 붙인 이름으로, 1970년대에 이르러 일본의 역사학계는 고대 일본의 율령 반포와 중앙정부의 성립 과정을 강조하면서 "영제국"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33] 영제국이 행정 구역 및 지리 구분의 기본 단위로 사용되던 시대에는, 정식으로나 관용적으로나 「」이라고만 불렀다. 후대의 20세기 이후에는 「구국」, 구국명이라고도 불린다. 율령 가운데 영(令)에 의해 규정되는 제도를 영제(令制)라고 하므로, 영제의 국(国)을 '''영제국'''이라고 부른다. 「영제국」이라는 단어는 20세기 말에 사용되기 시작한 역사학 용어이며, 1970년대부터 사용례가 나타나지만[4], 1984년 2월吉川弘文館에서 발행된 『국사대사전 제4권』에서는 영제국을 「국」 항목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문장 중에도 「영제국」이라고 부른다는 설명은 없다.

영어로는 province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3. 역사

율령국 일람


일본에 중앙정부가 세워진 것은 아스카 시대였다. 이전까지 일본에는 스스로를 "국"(國)이라 부르는 여러 나라들이 각지에 분포해 있었다. 중국의 사서인 한서에는 기원 전후 시기 일본에 약 1백여 개의 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4] 7세기 무렵 천황을 자처하고 율령제를 실시하여 중앙정부를 수립하면서 각각의 구니는 명목상 천황이 지배하는 지방 정권이 되었다.[35] 아스카 시대의 일본의 율령제는 여러 차례 개정을 거듭하여 일본을 아스카를 중심으로 한 기나이도카이도, 산인도와 같은 7도로 구분하는 오기칠도를 마련하였고, 각 도 아래에 크고 작은 구니를 배치하여 지방 행정 구역은 구니, 군, 리의 세 단계로 정비되었다.[35]

그러나 당시 일본의 중앙정부는 혼슈 서쪽만을 지배하고 있었고, 간토 지방, 도호쿠 지방 등 동부 지역은 에미시(아이누인 계열), 규슈에는 하야토라 불리는 남방 계열 사람들이 독자적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35] 일본 중앙정부는 헤이안 시대까지 이들과 전쟁을 계속하며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쇼군"의 정식 명칭인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은 혼슈 동쪽의 에미시를 정벌하기 위한 장군이라는 의미이다.[36]

가마쿠라 막부가 수립되면서 천황은 상징적인 군주가 되었고, 실제 권력은 쇼군에게 집중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구니의 행정 역시 막부가 파견한 슈고가 담당하게 하여 기존의 고쿠시는 명목상 관직이 되었다.[40] 무로마치 막부 시기에는 슈고가 독자적인 권력을 지닌 슈고 다이묘로 변화하여 하나의 구니 또는 여러 구니로 이루어진 슈고 영제국을 지배하는 지역의 실권자가 되었다.[40] 센고쿠 시대에는 센고쿠 다이묘가 성장하면서 슈고를 축출하였는데, 일부 슈고 다이묘는 자신의 영지를 유지했으나 많은 슈고가 몰락하였다.[41]

에도 시대에는 실질적인 지방 행정 구역이 자치권을 지닌 다이묘가 지배하는 으로 재편되었고, 구니는 명목상 명칭에 불과했지만 주소 표기와 행정 처분 등에서 기본적인 단위로 사용되었다. 다이묘의 영지는 1만 석에서 백만 석까지 다양했고, 이 가운데 하나의 구니 이상을 지배하는 다이묘를 고쿠슈(国主)로 불렀다.[42]

메이지 시대폐번치현으로 각 구니가 해체되고, 일본의 지방은 도도부현 체제로 개편되었다.[43] 이후 옛 구니의 이름은 지역에 대한 관습적 표현으로 사용될 뿐 지방 행정 체계에서는 완전히 폐지되었으나, 오늘날에도 각지의 문화적 특색을 언급할 때 옛 구니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44]

3. 1. 고대

아스카 시대에 일본에 중앙정부가 세워지기 전에는, 스스로를 "국"(國)이라 부르는 여러 나라들이 각지에 있었다. 한서에는 기원 전후 시기 일본에 약 1백여 개의 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4] 7세기 무렵 천황을 자처하고 율령제를 실시하며 중앙정부를 수립하면서, 이들 구니는 명목상 천황의 지배를 받는 지방 정권이 되었다.[35]

일본의 율령제는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일본을 아스카를 중심으로 한 기나이도카이도, 산인도와 같은 7도로 구분하는 오기칠도를 마련하고, 각 도 아래에 크고 작은 구니를 배치하였다. 이로써 일본의 지방 행정 구역은 구니, 군, 리의 세 단계로 정비되었다.[35]

그러나 당시 일본 중앙정부는 혼슈 서쪽만을 지배하고 있었고, 간토 지방, 도호쿠 지방 등 동부 지역은 에미시(아이누인 계열)가, 규슈에는 하야토라 불리는 남방 계열 사람들이 독자적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35] 일본 중앙정부는 헤이안 시대까지 이들과 전쟁을 계속하며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훗날 막부를 세운 "쇼군"의 정식 명칭인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은 혼슈 동쪽의 에미시를 정벌하기 위한 장군이라는 의미이다.[36]

아스카 시대에서 헤이안 시대에 이르는 고대 일본의 율령제에서 중앙정부는 각 구니에 고쿠시(国司)를 파견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고쿠시에는 구니를 관장하는 수장인 가미(守)와 구니의 크기에 따라 스케(介), 죠(掾), 사칸(目) 등의 관리가 있었다.[37] 가미의 위계는 종5위였고 스케는 정6위 또는 종6위, 죠는 정7위에서 정8위 사이, 사칸의 경우 정8위에서 대초위까지의 위계를 지니고 있었다.[38] 각 구니의 중심지는 고쿠가(國衙)로 고쿠시의 청사인 고쿠쵸(國庁)를 두었다.[39]

고대 일본의 율령국은 중앙정부의 명령을 이행하는 지방 정부였지만, 세금 책정 및 수취, 군사력 확보, 외국 사절 접대 및 사신 파견 등 일부 외교도 담당하였다.[37]

일본 고대에는 령제국 성립 이전에 호족이 세습하여 다스리는 국조(国造)의 국과 현주(県主)가 다스리는 현(県)이 병립했다. 령제국은 중앙에서 파견된 국사(, , , 목의 사관)가 다스리는 국이다.

일본서기에는 645년 난파궁에서 행해진 대화개신 당시 동국에 국사를 파견했다는 기사가 있고, 아스카쿄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 조각에 "이세국", "근담□(해)" 등이 쓰여 있어, 대화개신 직후, 적어도 후지와라쿄 천도 이전에는 어느 정도 령제국이 성립되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1967년 후지와라쿄 북면 외호에서 "기해년 10월 상총국 아파평 송리□" (699년)라고 쓰여진 목간이 발굴되어 논쟁에 결착이 지어지고, 일본서기에 있는 대화개신의 여러 정책은 후세의 윤색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많은 령제국이 확실히 성립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701년 제정된 대보율령부터이다. 령제국의 성립 시기는 빠르면 645년, 늦으면 701년이 된다.

율령국 성립 이전 국조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오사카, 탄바, 쓰쿠시, 히, 분고는 그 영역이 분할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율령제가 확립된 직후인 704년에 전국의 국인(國印)이 일제히 주조되었다. 이를 계기로 국명에 사용하는 글자가 개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표기가 되었다.

나라 시대 초기인 713년에 원명천황은 율령국마다 풍토기(風土記) 편찬을 명령했고, 풍토기 편찬 과정에서 국·군·향 등의 이름은 중국의 2자 지명을 본받아 좋은 의미의 한자 2자로 표기하도록 지시했다. 이것은 “제국군향명저호자령(諸國郡鄕名著好字令)” 또는 “호자이자령(好字二字令)”, “호자령(好字令)”이라고도 불린다.[9][10]

738년에는 제국의 국군도(國郡圖)를 진상하게 하였다. 739년 말경부터 740년 초에 향리제(鄕里制)를 향제(郷制)로 개정하였다. 덴표 시대(天平時代)에 성무천황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는 평성경(平城京)에서 역병(疫病)이 만연하고 사회 불안이 확산되었다. 이를 불식시키고자 741년에 율령국에는 국분사(國分寺)(국분승사(國分僧寺))·국분니사(國分尼寺) 건립을 명했다.

헤이안 시대의 연희식(延喜式)에는 각 율령국의 군의 개수가 기록되었다. 또한, 국력에 따른 분류(대국(大國)·상국(上國)·중국(中國)·하국(下國))와 도(都)로부터의 거리에 따른 분류(기내(畿內)·근국(近國)·중국(中國)·원국(遠國))가 이루어졌다.

기내(畿內)근국(近國)중국(中國)원국(遠國)
대국(大國)야마토국(大和國), 가와치국(河內國)이세국(伊勢國), 오미국(近江國), 하리마국(播磨國)에치젠국(越前國)무사시국(武蔵國), 가즈사국(上總國), 시모우사국(下總國), 히타치국(常陸國), 고즈케국(上野國), 무쓰국(陸奧國), 히고국(肥後國)
상국(上國)야마시로국(山城國), 셋쓰국(摂津國)오와리국(尾張國), 미카와국(三河國), 미노국(美濃國), 비젠국(備前國), 미사키국(美作國), 다지마국(但馬國), 이나바국(因幡國), 단바국(丹波國), 기이국(紀伊國)도토미국(遠江國), 스루가국(駿河國), 가이국(甲斐國), 시나노국(信濃國), 가가국(加賀國), 에치고국(越中國), 호키국(伯耆國), 이즈모국(出雲國), 비추국(備中國), 비고국(備後國), 아와국(阿波國), 사누키국(讃岐國)사가미국(相模國), 시모쓰케국(下野國), 데와국(出羽國), 에치고국(越後國), 아키국(安藝國), 스오국(周防國), 이요국(伊予國), 지쿠젠국(筑前國), 지쿠고국(筑後國), 분젠국(豊前國), 분고국(豊後國), 히젠국(肥前國)
중국(中國)와카사국(若狹國), 단고국(丹後國)노토국(能登國)아와국(安房國), 사도국(佐渡國), 나가토국(長門國), 이와미국(石見國), 도사국(土佐國), 히무카국(日向國), 오스미국(大隅國), 사쓰마국(薩摩國)
하국(下國)이즈미국(和泉國)이가국(伊賀國), 시마국(志摩國), 아와지국(淡路國)이즈국(伊豆國), 히다국(飛騨國)이키국(壱岐國), 쓰시마국(對馬國), 오키국(隠岐國)



대체로 국력 분류에서 상위에 있는 국가일수록 농업 생산력이 컸다. 하지만 상국의 오와리국·미노국·시나노국 등은 실제로는 대국과 비슷한 농업 생산력을 가지고 있었다.

3. 2. 중근세

가마쿠라 막부가 수립되면서 천황은 상징적인 의미만 지닌 명목상의 군주가 되었고, 실제 권력은 쇼군에게 집중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구니의 행정 역시 막부가 파견한 슈고가 담당하게 하여 기존의 고쿠시 역시 명목상 관직에 불과하게 되었다.[40] 무로마치 막부 시기에 이르러 슈고는 독자적인 권력을 지닌 슈고 다이묘로 변화하였고, 적게는 하나의 구니에서 많게는 여러 구니로 이루어진 슈고 영제국을 지배하는 지역의 실권자가 되었다.[40] 센고쿠 시대에는 각지의 센고쿠 다이묘가 성장하면서 슈고를 축출하였다. 일부 슈고 다이묘는 센고쿠 시대에도 자신의 영지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많은 슈고가 몰락하였다.[41]

에도 시대에 이르러 실질적인 지방 행정 구역은 자치권을 지닌 다이묘가 지배하는 으로 재편되었고, 구니는 그저 명목상 명칭에 불과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주소의 표기와 행정 처분 등에서 기본적인 단위로 사용되었다. 다이묘의 영지는 적게는 1만 석을 간신히 넘는 석고에서 많게는 백만 석이 넘는 것까지 다양하였고, 이 가운데 하나의 구니 이상을 지배하는 다이묘를 고쿠슈(国主)로 불렀다.[42]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율령국은 점차 전국 시대 다이묘의 영지로 대체되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 통치하에 율령국은 주요 지방 행정 구역으로 보완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영지가 ''한(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궁정의 속주와 쇼군의 영지는 상호 보완적인 체제를 이루었다. 예를 들어 쇼군이 다이묘에게 인구 조사나 지도 제작을 명령했을 때, 그 작업은 속주 ''쿠니(国)''의 경계를 기준으로 조직되었다.[2]

메이지 유신 시행 당시, 한(藩)은 부현삼치제(府縣三治制)로 알려진 개혁을 통해 행정 구역으로 정당화되었으나, 1868년부터 1871년 사이에 점차 현(県)으로 대체되었다(도시 현은 부(府), 농촌 현은 현(県)이라 불렸다). 주소 체계의 일부였던 구(國)는 폐지되지 않았고, 오히려 증가하였다. 1871년 기준으로 현의 수는 304개였고, 구의 수는 홋카이도(北海道)와 류큐 제도(琉球諸島)를 제외하고 68개였다. 많은 현들의 경계는 매우 복잡했을 뿐만 아니라 구의 경계와 일치하지도 않았다. 현들은 점차 통합되어 1881년에는 37개로 줄었고, 그 후 일부는 다시 나뉘어 1885년에는 총 45개가 되었다. 홋카이도(北海道)(홋카이도 현(北海道))와 오키나와(沖縄)(오키나와 현(沖縄県))를 추가하여 현재의 47개 현이 되었다.

남북조 시대에 전란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수호의 힘이 증대하여 국衙의 기구를 흡수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무로마치 시대에는 수호에 의한 령국 지배가 진행되었다. 이렇게 군사 경찰권은 물론 국가의 행정권까지 손에 넣은 수호를 수호대명, 그들의 국가 지배 체제를 수호령국제라고 부른다.

센고쿠 시대가 되면서, 율령 시대부터의 행정 단위로서의 국은 이를 구성했던 쇼엔과 공령의 실태가 희박해짐에 따라 소멸하였다. 국사는 완전히 명목상의 관직이 되었고, 총촌이나 국인 일기와 같은 지방의 자치적 결합을 권력 기반으로 하여 수호 대명이나 수호대, 유력한 국인 등으로부터 성장한 센고쿠 다이묘가 령국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욕심내게 된다. 안토쿠 시대와 에도 시대에는 지방 통치가 크고 작은 다양한 다이묘와 다이묘에 준하는 영주, 에도 막부의 직할령으로 분할되었다. 령유가 세분화된 지방에 특별한 기관을 두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을 단위로 하는 행정체는 없었다. 다만 국사를 임명했던 것으로 보아 명목상의 행정 구역으로서의 령제국은 존재하였다. 또한 령제국 전토 또는 그에 필적하는 크기의 영지를 가진 다이묘를 나타내는 국주라는 가격이 존재하였다. 주소 표시에는 령제국이 사용되었고, 없어서는 안 될 지리 구분이었다.

중세에 미노국(美濃国) 에나군(恵那郡)에 속했던 “기소”(木曽)가 시나노국(信濃国) 치쿠마군(筑摩郡)으로 이관된 사실이 알려져 있으나, 국경 변경 시기에 대해서는 헤이안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까지 여러 설이 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도 시대 초기에 하천의 수로 변경(瀬替え·개수 포함)에 맞춰 국경 변경이 이루어졌다.

  • 오와리국(尾張国) 하구리군(葉栗郡)의 북부가 미노국(美濃国)에 편입되어 하구리군(羽栗郡)이 발족했다(키소가와(木曽川)의 수로 변경에 맞춰).
  • 시모사국(下総国) 카츠시카군(葛飾郡) 중 다이니치가와(太日川)(와타라세가와(渡良瀬川)의 하류에서 거의 남북 중심선을 남쪽으로 흘러 도쿄만(東京湾)에 흘러들어 갔다)보다 서쪽 지역(카사이(葛西))을 무사시국(武蔵国)에 편입했다(이것으로 무사시국 카츠시카군(武蔵国葛飾郡)이 발족).
  • 코즈케국(上野国)(니타군(新田郡)·우라쿠군(邑楽郡) 등)·시모쓰케국(下野国)(아시카가군(足利郡) 등)의 경계를 동쪽으로 흐르는 야바가와(矢場川)(고대의 와타라세가와(渡良瀬川) 본류가 흘렀다)를 다테바야시시(館林市) 타타라(多々良)에서 북동쪽으로 개척하여 근세 이후의 와타라세가와(渡良瀬川) 본류에 합류시켜 이 새로운 하천 부분에 맞춰 코즈케국(上野国)·시모쓰케국(下野国)의 국경도 변경되었다.


1871년(메이지 4년)에는 세쓰국(摂津国)과 이즈미국(和泉国)의 국경사카이(堺)의 오오지로(大小路)에서 야마토가와(大和川)로 변경되었다.

3. 3. 해체

메이지 시대폐번치현의 일환으로 각 구니가 해체되고, 일본의 지방은 도도부현 체제로 개편되었다.[43] 옛 구니의 이름은 지역에 대한 관습적 표현으로 사용될 뿐 지방 행정 체계에서는 완전히 폐지되었으나, 오늘날에도 각지의 문화적 특색을 언급할 때 옛 구니의 이름을 나타내고 있다.[44]

에도 시대까지와의 큰 차이는 국사(國司)를 폐지한 것이며, 이에 따라 행정적인 지리 구분이 아니게 되었다.

1869년 1월 19일(明治 원년 12월 7일), 보신 전쟁(동북 전쟁)에 패전한 오슈에치고 연합의 여러 에 대한 처분이 이루어지고, 메이지 정부는 무쓰(陸奥) 국을 이와키 국, 이와시로 국, 리쿠젠 국, 리쿠추 국, 무쓰(陸奥) 국의 5국으로, 우슈 국을 우젠 국, 우고 국의 2국으로 분할하였다.

보신 전쟁(하코다테 전쟁) 종결 직후인 1869년 9월 20일(메이지 2년 8월 15일), 화인지 및 에조지(북주)에 홋카이도 11국을 새롭게 설치하여, 고키시치도에서 고키하치도로 하였다.[11]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 후, 청나라의 책봉을 받으면서도 실제로는 사쓰마 번의 통제하에 있던 류큐 왕국은, 이른바 류큐 처분 과정에서 1872년(메이지 5년)에 류큐 번으로 되고, 1879년(메이지 12년)에는 오키나와 현으로 되었지만, 그 후에도 지명으로는 계속해서 류큐 국이라고 불렸다. 다만, 이 「류큐 국」은 편의상의 용법이며, '''영제국의 하나가 아니고''', '''고키하치도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1902년(메이지 35년)까지 영제국의 범위 개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12] 적어도 이 해까지는 제도상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타이완, 조선 등의 외지에는 영제국이 설정되지 않았다. 러일 전쟁 후 남쪽 절반이 일본 영토로 귀속된 카라후토는 다이쇼 시대 제정의 공통법 1조 2항에서는 내지로 규정되었고, 1943년(쇼와 18년) 법령상의 특례가 폐지되어 명실공히 완전한 내지가 되었지만, 마찬가지로 새로운 영제국은 설정되지 않았다.

법령에 의한 폐지는 되지 않았지만, 특히 호적이나 우편 등의 지명 표기에서 제외된 것에 따라 급속히 쇠퇴하고, 반대로 부현은 급속히 정착되었다. 현대에는 같은 지명을 구분할 때( 세쓰 본산 역 ↔ 나가토 본산 역 등. 철도에서는 여러 현을 잇는 노선명에 「고쿠라(부젠)와 미야자키(히무카)를 잇는 『닛포 본선』」처럼 영제국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음), 아이덴티티나 애착에서 적극적으로 자칭하는 경우(나가노 현 ↔ 신슈 등), 지역명(이즈미, 치쿠호 등), 지역 브랜드명 등(사누키 우동, 타지마 소, 사쓰마야키 등)에 구국명이 이용되고 있다. 또, 국가의 법령에서도 홋카이도에 존재하는 동일한 명칭의 군을 구별하기 위해, 「하급 재판소의 설립 및 관할 구역에 관한 법률」(쇼와 22년 법률 제63호)이나 「법무국 및 지방 법무국의 지국 및 출장소 설치 규칙」(헤이세이 13년 법무성 명령 제12호)은 영제국을 사용하고 있다.[13] 대相撲에서는 번付의 출신지 표기를 쇼와 22년(1947년) 11월 장소까지 영제국 명칭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검정 교과서인 사회 과목의 지도는 검정을 받으려면 영제국을 기재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영제국이 기재되어 있지만, 치시마 국을 기재하지 않은 것이 있다. 또, 지도에서의 영제국 표시는 실질적으로는 역사 교재로서의 의미밖에 없다.

1902년 이후 영제국의 범위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도도부현은 경계선의 변경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범위의 차이가 넓어지고 있다. 이후에도 제도로서 공식적인 폐지는 되지 않았다.

중세에 미노국(美濃国) 에나군(恵那郡)에 속했던 “기소”(木曽)가 시나노국(信濃国) 치쿠마군(筑摩郡)으로 이관된 사실이 알려져 있으나, 국경 변경 시기에 대해서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부터 센고쿠 시대(戦国時代)까지 여러 설이 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에도 초기(江戸初期)에 하천의 수로 변경에 맞춰 국경 변경이 이루어졌다.

  • 오와리국(尾張国) 하구리군(葉栗郡)의 북부가 미노국(美濃国)에 편입되어 하구리군(羽栗郡)이 발족했다(키소가와(木曽川)의 수로 변경).
  • 시모사국(下総国) 카츠시카군(葛飾郡) 중 다이니치가와(太日川) 서쪽 지역(카사이(葛西))을 무사시국(武蔵国)에 편입했다(무사시국 카츠시카군(武蔵国葛飾郡) 발족).
  • 코즈케국(上野国)·시모쓰케국(下野国)의 경계를 동쪽으로 흐르는 야바가와(矢場川)를 다테바야시시(館林市) 타타라(多々良)에서 북동쪽으로 개척하여 근세 이후의 와타라세가와(渡良瀬川) 본류에 합류시켜 이 새로운 하천 부분에 맞춰 양 국의 국경도 변경되었다.


1871년(메이지 4년)에는 세쓰국(摂津国)과 이즈미국(和泉国)의 국경사카이(堺)의 오오지로(大小路)에서 야마토가와(大和川)로 변경되었다.

4. 구분

일본의 전통적 광역 지방 구분은 오기칠도기나이와 일곱 도(道)를 구분하였다. 구니는 오기칠도를 구성하는 단위였다. 보통 가와치노쿠니(河内国)와 같이 구니로 불렀고, 중국의 제도에 빗대어 가슈(河州)와 같이 부르기도 하였다.[31] 고대 말기에서 중세 이후 구니가 기본적인 지방 구분으로 자리잡으면서 헤이케모노가타리와 같은 문학 작품에서 전국 66개국과 같은 표현으로 일본 전체를 나타내기도 하였다.[32]

율령국이나 영제국이라는 명칭은 현대 역사학계에서 붙인 이름으로, 1970년대 일본 역사학계는 고대 일본의 율령 반포와 중앙정부 성립 과정을 강조하면서 "영제국"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33]

제정 초기 율령국의 승격은 시간에 따라 조정되었고 몇몇은 분할되기도 하였다.[38]

1999년부터 2010년까지 대규모로 진행된 시정촌 합병(헤이세이 대합병)에서, 옛 국명을 딴 신설 자치체가 많이 탄생했다. 하지만 그 내역을 보면, 옛 령제국의 범위 전체 또는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거나, 령제국 시대에 국부가 설치되었던 자치체, 국명의 발상지를 포함하는 자치체만이 아니었다. (엄밀히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한 섬 한 자치체가 된 사도시·이키시·쓰시마시뿐이다.) 위의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명명에 있어서 대립을 피하기 위해 "차용"한 자치체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2004년 시즈오카현 타가타군 4개 읍·면의 합병으로 탄생한 이즈시는 옛 이즈국 북부 일부에 불과하며, 국부가 설치되어 있던 곳도 아니다(이즈국부는 현재의 미시마시에 있었다고 한다). 소위 광역 지명이다. 원래 이즈반도 남부에는 히가시이즈정·니시이즈정·미나미이즈정이 있었고, 2005년에는 이즈노쿠니시가 탄생했기 때문에 "이즈"를 딴 자치체가 5개나 되었다.

야마나시현에서는 카이국에 따른 카이시와 코후시가 탄생하여, 카이국부에서 그 이름이 붙은 고후시(헤이세이 대합병 이전부터 존재)와 함께 비슷한 지명이 난립하고 있다.

나라 시대 초기인 화동(和銅) 6년(713년), 원명천황은 율령국마다 지지(地誌)인 『풍토기(風土記)』 편찬을 명령했고, 풍토기 편찬 과정에서 국·군·향 등의 이름은 중국의 2자 지명을 본받아 좋은 의미의 한자 2자로 표기하도록 지시했다. 이를 “제국군향명저호자령(諸國郡鄕名著好字令)”, “호자이자령(好字二字令)”, “호자령(好字令)”이라고도 부르며,[9][10] 기내와 칠도제국의 군·향 이름에 호자(好字)를 붙이도록 명령받아, 상모야국(上野國)(상모야국(上毛野國))·하모야국(下野國)(하모야국(下毛野國))·기이국(紀伊國)(기국(木國))·아와국(阿波國)(속국(粟國))의 국명이 한자 2자로 통일되었다.

덴표(天平) 10년(738년)에는 제국의 국군도(國郡圖)를 진상하게 하였다. 덴표 11년(739년) 말경부터 덴표 12년(740년) 초에 향리제를 향제로 개정하였다. 덴표 시대에 성무천황이 정권을 잡았을 때, 평성경에서 역병이 만연하고 사회 불안이 확산되었다. 이를 불식시키고자, 광명황후의 의견도 있어, 덴표 13년(741년)에 율령국에 국분사(국분승사)·국분니사의 건립을 명하였다.

율령제가 확립된 직후인 대보(大宝) 4년(704년)에 전국의 국인(國印)이 일제히 주조되었다. 이를 계기로 국명에 사용하는 글자가 개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표기가 되었다.

일본의 옛 국(Provinces)은 공식적으로 폐지된 적은 없지만, 현재는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연 지형, 회사 이름, 브랜드 이름 등에 여전히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국의 이름은 주로 역사적 관심 대상으로 여겨진다. 성씨를 포함한 여러 품목의 이름에도 사용되는데, 대부분 에도 시대 이후에 유행하게 된 것이다. 사누키 우동, 이요칸, 토사견, 지쿠젠니, 아와오도리 등이 그 예이다. JR 및 기타 철도역에서도 다른 현의 비슷한 이름의 역과 구분하기 위해 역 이름에 사용한다. 무사시고스기 역 등이 그 예이다. 도시 이름에도 마찬가지로, 나라현 야마토고리야마시와 후쿠시마현 고리야마시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다. 신슈 메밀국수와 기슈견처럼 국의 간략한 이름(-슈)도 사용된다.

일부 국의 이름은 현재 현의 특정 지역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며, 그 지역의 문화적, 지리적 특징을 나타낸다. 많은 경우 방위 표시와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북쪽 셋쓰 지역을 뜻하는 표현 등이 있다.

구는 여전히 현의 하위 행정 구역으로 간주되지만, 국의 통폐합 이후 여러 현에 걸쳐 있을 수 있다 (예: 무사시의 원래 아다치 구는 현재 아다치구와 기타아다치군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러한 옛 국의 구 중 많은 수는 주요 마을이 더 큰 도시나 마을과 합병됨에 따라 해체되었다. 구의 통폐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각 현 페이지를 참조한다.

4. 1. 규모에 따른 구분

구니는 규모에 따라 다이고쿠(大国), 조고쿠(上国), 주고쿠(中国), 게코쿠(下国)로 구분되었으며, 각 등급에 따라 고쿠시(国司)가 임명되었다.[38] 고쿠시의 배치는 다음과 같다.

구분가미(守)스케(介)조(掾)사칸(目)
다이고쿠11다이죠 1
쇼죠 1
다이사칸 1
쇼사칸 1
조고쿠1111
주고쿠1-11
게코쿠1--1


4. 2. 오기칠도

엔기시키(延喜式)에서는 수도인 기나이(畿内)를 중심으로 가까운 곳은 긴고쿠(近国), 조금 떨어진 곳은 주고쿠(中国), 멀리 떨어진 곳은 온고쿠(遠国)로 구분하였다.[45][46] 그러나 이 방식은 각 구니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보통 오기칠도에 따라 구분한다. 오기칠도는 다음과 같다.



각 지역을 포함한 고키시치도 구역 지도. 1869년 홋카이도가 포함되면서 고키하치도로 불렸다.




홋카이도는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69년에 편입되었다.

5. 영향

옛 율령국의 구분은 오늘날에도 일본의 지리와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 열도의 섬들 가운데 규슈(九州)는 오늘날 7개 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과거 9개의 구니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고[47] 시고쿠(四国) 역시 4개의 구니로 이루어진 섬이란 뜻이다.[48] 지방의 명산과 같은 문화에 있어서도 옛 구니의 이름이 붙는다. 예를 들어 사누키 우동사누키국에서 시작된 우동이란 뜻이다.[49]

일본의 옛 국(Provinces)을 공식적으로 폐지한 명령은 없지만, 현재는 공식적으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지형의 이름, 회사 이름, 브랜드 이름 등에 여전히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국의 이름은 주로 역사적 관심 대상으로 여겨진다. 또한, 성씨를 포함한 여러 품목의 이름에도 사용되는데, 대부분은 에도 시대 이후에 유행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사누키 우동, 이요칸, 토사견, 지쿠젠니, 아와오도리 등이 있다. JR 및 기타 철도역에서도 다른 현의 비슷한 이름의 역과 구분하기 위해 역 이름에 사용한다. 예를 들어 무사시고스기 역 등이 있다. 도시 이름에도 마찬가지로, 예를 들어 나라현 야마토고리야마시와 후쿠시마현 고리야마시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다. 신슈 메밀국수와 기슈견처럼 국의 간략한 이름(-슈)도 사용된다.

일부 국의 이름은 현재의 현의 특정 지역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며, 그 지역의 문화적, 지리적 특징을 나타낸다. 많은 경우 이러한 이름은 방위 표시와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북쪽 셋쓰 지역을 뜻하는 Hoku-Setsu|北摂일본어 등이 있다.

구는 여전히 현의 하위 행정 구역으로 간주되지만, 국의 통폐합 이후 여러 현에 걸쳐 있을 수 있다 (예: 무사시의 원래 아다치 구는 현재 아다치구와 기타아다치군으로 나뉘어져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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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문서 その他菟田県主、春日県主、猛田県主、曾布県主、山辺県主、十市県主、高市県主、磯城県主、葛木県主の領域を含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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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문서 阿波国のほか、長狭国、須恵国、馬来田国、菊麻国、伊甚国、上海上国、武社国、下海上国、千葉国、印波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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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뉴스 일본맛기행 - 일본 최고의 우동, 카가와서 찾았네 http://www.enewsjapa[...] 일본관광신문 2023-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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