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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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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톨릭 운동은 가톨릭 신앙을 기반으로 사회,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단체 및 운동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19세기 반성직자주의 정권 등장에 대응하여 유럽에서 시작되었으며,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기독교 민주주의 정당과의 연합, 언론, 교육, 노동 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탈리아, 프랑스, 한국 등 각 국가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독자적인 양상으로 발전해왔으며, 현재도 전 세계 여러 국가에서 다양한 조직과 활동을 통해 가톨릭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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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운동
개요
유형사도직
목적평신도 사도직 활동 증진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전파
특징교황의 지시와 교회 계층 제도의 감독 아래 수행됨
역사
기원19세기 후반
발전교황 비오 10세 시기 (20세기 초)에 공식적인 구조화 시작
교황 비오 11세 시기에 "가톨릭 운동"이라는 용어 보편화
주요 사건1951년: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제1차 세계 의회 개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 재확인
1987년: 평신도에 관한 교회법 개정 (교회법 225조)
조직 및 활동
구성원평신도
활동 분야교육
사회 복지
의료
미디어
정치
운영 방식지역 및 국가 수준에서 조직 운영
교구 및 본당과 협력
다양한 사도직 단체와 연계
신학적 기반
핵심 가치복음 선포
성사 생활
사회 정의 실현
사랑 실천
주요 문서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Apostolicam Actuositatem,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 (Christifideles Laici,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영향 및 평가
긍정적 영향평신도의 역할 증대
사회 참여 확대
가톨릭 신앙 전파 기여
비판적 시각지나친 교권주의
사회 변화에 대한 소극적 대응

2. 역사

가톨릭 운동은 19세기 유럽, 특히 스페인, 이탈리아, 바이에른, 프랑스, 벨기에 등 전통적으로 가톨릭 영향력이 강했던 국가들에서 반성직자주의 성향의 정권이 등장함에 따라 이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으로 본격화되었다.[3] 가톨릭 운동은 특정 정치 이념을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정치적 색채를 띠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서독 등지에서는 공산주의 정당의 부상에 맞서 기독교 민주주의 성향의 정당들과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가톨릭 액션이라는 개념 아래 다양한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대표적으로 청년 노동자 기독교 운동(JOC, 조키즘), 청년 기독교 학생회, 쿠르실로 운동, 마리아 군단, 기독교 가정 운동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지역 사회 조직 형태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었다.[3] 특히 조셉 카르딘(Joseph Cardijn) 신부는 1912년경 벨기에 라켄에서 젊은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조직을 만들었고, 이는 1924년 청년 노동자 기독교 운동(Jeunesse Ouvrière Chrétienne, JOC)으로 발전했다.[4] JOC는 국제적인 운동으로 성장하여 1938년에는 유럽 전역에 50만 명,[5] 1967년에는 69개국 200만 명의 회원을 둘 정도로 확장되었다.[5]

그러나 가톨릭 운동은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34년 나치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으로 가톨릭 액션 단체의 지도자였던 에리히 클라우제너(Erich Klausener)가 장검의 밤 사건 당시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4년 발표한 첫 회칙 《교회를 위하여》에서 가톨릭 액션을 포함한 여러 사도직 단체들의 활동을 칭찬하며, 이들의 노력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한 교회 안팎의 대화 정신과 연결된다고 평가했다.[6]

현대에 들어 가톨릭 액션은 미디어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 벨기에에서 국제 가톨릭 언론 연합(UCIP)이 창설되었고, 이듬해 네덜란드에서는 영화 관련 국제 가톨릭 기구(OCIC), 독일에서는 국제 가톨릭 라디오 방송국(BCIR, 1946년 운다(Unda)로 변경)이 설립되었다. 이들 단체는 사회의 세속화 경향에 대응하고, 뉴미디어를 복음화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노력했다. 2001년에는 OCIC와 Unda가 통합되어 SIGNIS라는 새로운 국제 조직이 로마에서 출범했다.[7] 2014년, 교황청은 SIGNIS가 전 국제 가톨릭 언론 연합(UCIP)의 회원도 통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멕시코 오솔로테펙의 파브리카-마리아 마을 사원 제단 벽에 전시된 멕시코 가톨릭 액션의 문장. 20세기에는 지역 섬유 산업 노동자들이 이 운동을 열렬히 지지했다.

2. 1. 이탈리아의 가톨릭 액션

가톨릭 액션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현지에서는 movimento cattolico|모비멘토 카톨리코ita라고 부른다. 이탈리아에서 가톨릭 액션이 본격화된 배경에는 1848년 교황 비오 9세가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하며 이탈리아 민족주의 운동에서 이탈한 사건과 이후 교황청의 보수화 경향이 자리 잡고 있다. 같은 해 이탈리아 왕국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여 교황의 세속적 통치권이 소멸하자, 교황청의 보수적 입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톨릭 액션은 교황과 교회의 권리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종교적 활동뿐만 아니라 정치적 활동에도 참여하는 평신도 중심의 조직적 운동으로 나타났다. 운동 초기에는 북부 이탈리아 농민들을 대상으로 농촌 금고, 협동조합 등을 통해 조직화하며 대중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활동은 1891년 교황 레오 13세가 발표한 회칙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을 통해 사회적 가톨릭주의라는 이름으로 교황청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 1915년, 시칠리아 출신 사제인 루이지 스트루초(Luigi Sturzo)가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전국 신자 조직인 '가톨릭 액션'의 서기장으로 임명되었다. 1919년에는 스트루초 주도로 이탈리아 최초의 가톨릭 정당인 이탈리아 인민당이 창설되었고, 스트루초가 초대 서기장을 맡았다. 이 정당은 1926년까지 존속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인민당은 이후 무솔리니의 집권에 유리한 선거법인 아체르보 법(Legge Acerbo) 통과에 협조하였고, 결과적으로 파시스트 정권 수립에 영향을 미친 뒤 해체되었다.[21]

가톨릭 액션은 특히 이탈리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데, 1870년부터 1910년대까지 이어진 이탈리아 왕국(사보이 왕가)의 반교권주의 정책과 이후 들어선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가톨릭 정당의 정치 활동이 제약받았기 때문에, 가톨릭 액션이 신자들의 사회 참여 통로 역할을 했다. 현재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주요 가톨릭 액션 단체인 '가톨릭 행동'(Azione Cattolica)의 기원은 1867년 마리오 파니(Mario Fani)와 조반니 아쿠아데르니(Giovanni Acquaderni)가 설립한 '이탈리아 가톨릭 청년회'(Società della Gioventù Cattolica Italianaita)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단체는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4개 부문으로 재편되며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2. 2. 프랑스의 악시옹 프랑세즈

오랜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는 대혁명을 겪으며 공화주의자들에게 공격과 수모를 당했다. 제3공화국 때에는 예수회가 추방당하고 종교와 교육이 분리되었다. 대혁명 이후 프랑스를 휩쓴 전국적인 반가톨릭 움직임에 저항하여 가톨릭교회 측은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신속히 정치 조직화를 추진했다. 라 투르 뒤 펭(La Tour du Pinfra) 후작은 1871년부터 가톨릭 서클을 조직했고, 교황의 지침에 따라 사회기독교당 창당을 지지하며 노동자와 고용주를 가부장적인 공동 단체로 결속시키려 했다. 동시에 사회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는 기독교민주당이 구상되었고, 이는 민주주의 성향의 신부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1894년 마르크 상니에르(Marc Sangnier)는 〈밭고랑(Le Sillonfra)〉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한편, 보수주의자들은 신문 〈라 크루아(La Croixfra)〉와 〈성모마리아승천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또 다른 결집을 모색했다.

이들은 우파 가톨릭 정당 구성을 목표로 삼았으며, 사회주의에 대한 저항과 사회적 방어에 집착하며 기회주의자들까지 끌어들여 보수적인 대규모 정당을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드레퓌스 사건에 연루되었던 자크 피우(Jacques Piou) 등이 하원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들 가톨릭 집단은 마치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처럼 여겨졌고, 이 때문에 공화국 정부는 가톨릭 교회 세력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부 가톨릭 세력은 민족주의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상황 속에서 우파와 연대하여 공화국 체제를 변혁하거나 심지어 파괴하려는 여론 운동을 조직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한 단체가 바로 악시옹 프랑세즈( l'Action françaisefra )이다.[22]

2. 3. 한국의 가톨릭 액션

한국의 가톨릭 액션은 1931년 말 반공을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로 삼으며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23] 이미 1920년대 초부터 한국 가톨릭교회는 교황의 반공적 교서들을 소개하며 가톨릭 교리와 반공주의를 결합시키기 시작했다.[23] 일제강점기 당시 가톨릭 액션은 일제의 관제조직에 편입되어 준국가기구적 성격을 띠기도 했으며, "가톨릭 운동이야말로 공산주의를 격파할 수 있는 유일한 역량"이라고 주장하며 처음부터 반공 조직으로서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20]

가톨릭 계열 잡지인 《가톨릭 청년》은 "조선 가톨릭의 묵상과 반성의 시기는 이미 지났고 행동의 시기에 직면하였다"고 말하며 '가톨릭 액션' 참여를 촉구했다. 이는 1947년 교황 비오 12세가 이탈리아 가톨릭 행동대회에서 한 연설 내용을 반영한 것으로, 한국에서는 이미 1930년대부터 가톨릭 액션이 도입되어 실천되고 있었다. 일제 시대의 가톨릭 액션은 주로 남녀 청년회 조직을 기반으로 활동했으며, 언론 출판(잡지 창간), 의료(성모병원 설립 등), 교육(동성학교 인수, 야학 개설 등) 분야에 집중했다.

해방 이후에는 교회 지도자들의 정치적 활동이 두드러졌다. 평신도 지도자들은 정당에 가입하고, 교회 차원에서 선거에 참여했으며, 기존 정치인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연대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미군정 시기 여당이자 보수 세력을 대표하던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지지했으며, 일부에서는 가톨릭 정당을 만들자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가톨릭교회는 민주의원과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에 장면을 천주교 대표로 참여시켰다. 1948년 제헌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이 직접 나서 신자들의 출마를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특히 장면은 사실상 '서울교구의 공천'을 받아 출마했으며, 가톨릭교회는 장면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 후보자들의 당선을 위해 모든 교회 조직과 언론을 동원하여 선거 운동을 펼쳤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상징인 명동성당은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 회의 장소로 제공되는 등 우파 정치 세력의 집회 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다. 성당에서 정치 집회가 열렸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정치인들을 자주 초청하여 1945년 연말까지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이승만이 명동성당을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노동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당시 성신대학교 학장이던 윤을수 신부가 1949년 12월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 결성식에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언론 분야에서는 1946년 전국 일간지인 경향신문을 창간하여 대중적 영향력을 확보했으며, 한국 전쟁 중에는 대구매일신문을 인수하여 두 개의 일간지를 운영했다. 이 시기 가톨릭 액션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기존의 '선교' 활동에서 벗어나 반공 투쟁과 교회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확장하는 것으로 변화했다.[24]

2. 4. 기타 국가

가톨릭 운동은 아래와 같은 여러 국가에서도 조직되었다.

  • 아르헨티나: 현재도 활동 중이다.[14]
  • 브라질: 알세우 아모로소 리마와 관련이 있다.[15]
  • 캐나다: 캐서린 도허티와 관련이 있다.
  •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 가톨릭 운동이 활동했다.[16]
  • 프랑스: 라 크루아 신문과 관련이 있다.
  • 과테말라: 호세피나 알론조 마르티네스와 관련이 있다.
  • 아일랜드: 마리아 군단과 관련이 있다.
  • 이탈리아: 이탈리아 가톨릭 운동이 대표적이다.
  • 리투아니아: 가톨릭 액션 센터가 활동했다.
  • 몰타: Azzjoni Kattolika Maltija|아초니 카톨리카 말티야mlt가 활동한다.
  • 멕시코: Acción Católica Mexicana|악시온 카톨리카 메히카나spa가 활동했다.[17]
  • 뉴질랜드
  • 폴란드: 알렉산데르 추기경 카코프스키와 관련이 있다.
  • 포르투갈
  • 필리핀: 마닐라 대교구와 관련이 있다.
  • 슬로베니아: Katoliška akcija|카톨리슈카 악치야slv가 활동했다.
  • 대한민국: 일제 강점기에는 관제 조직에 편입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반공주의적 성격을 띠기도 했다.[20]
  • 스페인: 현재도 활동 중이며,[18] 쿠르실로 운동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19]
  • 영국
  • 미국: 프렌드십 하우스, 가톨릭 공동선, 가톨릭 노동자 운동 등과 관련이 있다.

3. 주요 조직 및 활동

가톨릭 운동은 19세기 후반, 특히 스페인, 이탈리아, 바이에른, 프랑스, 벨기에 등 가톨릭 전통이 강한 국가들에서 반성직자주의 정서와 정권에 대응하며 시작되었다.[3] 가톨릭 운동이 특정 정치 성향을 띤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정치 세력과 구분이 모호해지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와 서독 등지에서는 공산주의 정당에 대항하기 위해 기독교 민주주의 성향 정당들과 연합하기도 했다.[20]

이탈리아에서는 '가톨릭 액션'(movimento cattolico|모비멘토 카톨리코ita)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는 1848년 교황 비오 9세가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서 이탈하고 교황령이 소멸하면서 교황청이 위기감을 느낀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평신도(비성직자) 중심의 이 운동은 교황과 교회의 권리 회복을 목표로 종교적, 정치적 활동을 전개했다. 북이탈리아 농민들을 농촌금고, 협동조합 등으로 조직화하며 대중 기반을 다졌고, 이는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1891)를 통해 사회 가톨릭주의라는 이름으로 공인받았다. 1915년 시칠리아의 사제 L. 스트루초(Luigi Sturzo)가 전국 조직 〈가톨릭 액션〉의 서기장이 되었고, 1919년에는 이탈리아 최초의 가톨릭 정당인 이탈리아 인민당을 창설하여 서기장을 맡았다. 그러나 이탈리아 인민당은 이후 아체르보 법 통과에 협력하며 무솔리니의 집권을 간접적으로 도왔고, 1926년 해체되었다.[21] 현재 이탈리아의 주요 가톨릭 운동 단체인 '가톨릭 행동'(Azione Cattolica)은 1867년 마리오 파니와 조반니 아쿠아데르니에 의해 '이탈리아 가톨릭 청년회'(Società della Gioventù Cattolica Italiana)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며,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4개의 부문으로 개편되어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조직은 오늘날까지 활동하는 가장 활발한 가톨릭 운동 단체 중 하나로 꼽힌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 이후 제3공화국 시기 예수회 추방, 정교분리 등 반가톨릭 움직임에 저항하며 가톨릭 운동이 조직화되었다.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의 영향을 받아, 라 투르 뒤 펭(La Tour du Pin) 후작은 1871년부터 가톨릭 서클을 조직하고 노동자와 고용주를 가부장주의적인 공동 단체로 결속시키려 했다. 사회기독교당, 기독교민주당 창당 움직임도 있었다. 1894년 마르크 상니에르(Marc Sangnier)는 〈밭고랑(Le Sillon)〉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라 크로와〉 신문과 〈성모마리아승천회〉를 중심으로 보수주의자들이 결집하여 우파 가톨릭 정당 구성을 목표로 했다. 이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저항과 사회적 방어를 내세우며 기회주의자들을 포섭하려 했고, 드레퓌스 사건에 연루된 자크 피우(Jacques Piou)와 더불어 정치 세력화를 시도했다. 이러한 가톨릭 집단은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처럼 여겨질 정도로 성장했으며, 결국 민족주의, 반유대주의와 결합하며 공화국 체제를 바꾸거나 파괴하려는 우파 단체 〈악시옹 프랑세즈〉(L'Action française)의 형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22]

한국의 가톨릭 액션은 1931년 말 반공을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로 삼으며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이미 1920년대 초부터 교황의 반공적 교서들을 소개하며 가톨릭 교리와 반공주의를 결합하려는 시도를 보였다.[23] 일제 강점기의 가톨릭 액션은 남녀 청년회 조직을 주 기반으로 삼아 언론·출판(잡지 창간), 의료(성모병원 설립 등), 교육(동성학교 인수, 야학 개설 등) 분야에서 활동했다. 특히 이 시기 가톨릭 액션은 일제의 관제 조직에 편입되어 준국가기구적 성격을 띠기도 했으며, "가톨릭 운동이야말로 공산주의를 격파할 수 있는 유일한 역량"이라며 초기부터 반공 조직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20]

해방 후 한국 가톨릭교회는 더욱 적극적으로 정치·사회 활동에 나섰다. 교회 지도자들은 평신도들의 정당 가입과 출마를 독려했으며, 교회 차원에서 선거운동을 지원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미군정 시기 여당 격이었던 보수 정당 한국민주당(한민당)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교회 일각에서는 가톨릭 정당을 결성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장면은 민주의원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천주교 대표로 참여했으며,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서는 사실상 '서울교구의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는데, 이때 장면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 후보들을 당선시키기 위해 모든 가톨릭교회 조직과 언론이 총동원되어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상징인 명동성당은 1946년 2월 초 비상국민회의 회의 장소로 제공되는 등 우파 정치세력의 집회 장소로 빈번히 사용되었고, 1945년 연말까지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이승만이 명동성당을 방문하기도 했다. 노동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당시 성신대학교 학장이던 윤을수 신부가 1949년 12월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 결성식에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언론 분야에서는 1946년 전국 일간지인 경향신문을 창간하였고, 전쟁 중에는 대구매일신문을 인수하여 두 개의 일간지를 운영하며 광대한 대중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이 시기 가톨릭 액션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종전의 '선교'에서 반공 투쟁, 그리고 교회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의 직접적 확장으로 변화하였다.[24]

가톨릭 액션의 개념 아래 다양한 단체들이 형성되었다. 벨기에 라켄 교구의 부목사였던 조셉 카르딘 신부는 노동 계급 지원에 헌신하며 1919년 청년 노동 조합원을 창설했고, 1924년 이 조직은 청년 노동자 기독교 운동(Jeunesse Ouvrière Chrétienne, JOC)으로 명칭을 변경했다.[4] JOC는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여 회원들은 '조키스트'(Jocist)로 알려졌으며, 이 운동은 '조키즘'(Jocism)으로 불렸다. 1938년 유럽 전역에 50만 명의 회원이 있었고,[5] 1967년에는 69개국에서 200만 명으로 증가했다.[5] 이 외에도 청년 기독교 학생회, 쿠르실로 운동, RENEW International, 마리아 군단, 소달리티, 기독교 가정 운동, 미국 샌안토니오의 COPS(공공 서비스 조직), 토마스 머튼에게 영향을 준 할렘의 우정의 집 등 다양한 단체들이 가톨릭 액션의 일환으로 활동했다.[3]

나치 독일에서는 1934년 장검의 밤 사건 당시 가톨릭 액션 단체들의 수장이었던 에리히 클라우제너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으로 살해되는 등 탄압을 받기도 했다.

가톨릭 미디어 분야에서도 전문 조직들이 결성되었다. 사회의 세속화에 대응하고 언론, 라디오, 영화 등 새로운 미디어를 복음화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1927년 벨기에에서 국제 가톨릭 언론 연합(UCIP)이, 1928년 네덜란드에서 국제 가톨릭 영화 기구(OCIC)가, 그리고 독일에서 국제 가톨릭 라디오 방송국(BCIR, 1946년 운다(Unda)로 개칭)이 설립되었다. OCIC와 운다는 2001년 로마에서 SIGNIS라는 새로운 조직으로 통합되었다.[7]

교황 바오로 6세는 그의 첫 번째 회칙인 《교회를 위하여》(Ecclesiam Suam)에서 "가톨릭 액션과 다른 사도직 단체 및 활동의 대열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칭찬하며, 그들의 행동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강조한 교회 안팎의 대화와 연결시켰다.[6]

4. 현대의 가톨릭 운동

가톨릭 운동은 특히 19세기 스페인, 이탈리아, 바이에른, 프랑스, 벨기에 등 역사적으로 가톨릭 전통이 깊은 나라에서 반성직자주의 성향의 정권에 대응하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비록 특정 정치 성향을 띠지는 않지만, 때로는 정치적 구분과 모호해지는 시기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서독 등지에서는 공산주의 정당에 맞서기 위해 기독교 민주주의 성향 정당과 연합하기도 했다. 한국의 가톨릭액션은 일제 강점기부터 일제의 관제 조직에 편입되어 준국가기구적 성격을 띠었으며, "가톨릭 운동이야말로 공산주의를 격파할 수 있는 유일한 역량"이라며 반공 조직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20]

현재 아르헨티나, 브라질, 영국, 미국, 크로아티아, 프랑스, 멕시코, 아일랜드, 폴란드, 스페인, 캐나다 등 여러 나라에서 가톨릭 운동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33년 3월 조선 주교단의 교서에 따라 '가톨릭 진행'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것이 가톨릭 운동의 시초이다. 오늘날에는 가톨릭농민회, 노동청년회, 학생회, 의사회 등 다양한 가톨릭 운동 성향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 액션 운동은 19세기 후반 유럽을 중심으로 고조되던 반성직자주의 정서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으로 시작되었다.[3] 가톨릭 액션의 개념 아래 다양한 단체들이 형성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청년 노동자 기독교 운동(JOC), 청년 기독교 학생회(YCS), 쿠르실로 운동, RENEW International, 마리아 군단, 소달리티, 기독교 가정 운동, 샌안토니오의 COPS(공공 서비스 조직), 그리고 토마스 머튼에게 초기 영향을 준 할렘의 우정의 집 등이 있다.[3]

1912년경, 브뤼셀 외곽 라켄 교구의 부목사였던 조셉 카르딘은 노동 계급 지원에 헌신하며 젊은 재봉사들을 위한 바늘 노동자 무역 연맹 지부를 설립했다.[4] 1919년 그는 청년 노동 조합원을 창설했고, 1924년 이 조직은 청년 노동자 기독교 운동(Jeunesse Ouvrière Chrétiennefra, JOC)으로 이름을 바꾸었다.[4] JOC는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여 회원들은 '조키스트'(Jocist)로 불렸으며, 운동 자체는 '조키즘'(Jocism)으로 불리기도 했다. 1938년까지 유럽 전역에 50만 명의 회원이 있었고,[5] 1967년에는 69개국에서 200만 명으로 증가했다.[5]

한편, 1934년 아돌프 히틀러장검의 밤 사건 당시 나치 독일의 가톨릭 액션 단체장이었던 에리히 클라우제너의 살해를 명령하기도 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첫 회칙인 ''교회를 위하여''에서 "가톨릭 액션과 다른 사도직 단체 및 활동의 대열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는" 이들을 칭찬하며, 그들의 활동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인 교회 안팎의 대화와 연결지었다.[6]

현대 가톨릭 액션 운동은 미디어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 벨기에에서 국제 가톨릭 언론 연합(UCIP)이 설립되었고, 이듬해 네덜란드에서는 영화 관련 국제 가톨릭 기구(OCIC), 독일에서는 국제 가톨릭 라디오 방송국(BCIR)이 세워졌다. BCIR은 1946년 운다(Unda)가 되었다. 이 전문 가톨릭 평신도 협회들은 사회의 세속화에 맞서기 위해 노력했으며, 당시 뉴미디어로 여겨지던 언론, 라디오, 영화를 복음화의 새로운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들은 세속 미디어에 참여하여 복음의 가치를 전파하려는 교회의 부름에 응답했다. 2001년에는 OCIC와 운다(Unda)가 통합되어 로마에서 SIGNIS라는 새로운 조직이 설립되었다.[7] 2014년 교황청은 SIGNIS가 이전 UCIP 회원들도 통합할 것을 제안했다.

가톨릭 행동(Azione Cattolica)은 오늘날까지 활동하는 가장 활발한 가톨릭 행동 단체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단체는 특히 이탈리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1870년부터 약 1910년까지 반성직자주의적인 사보이 왕가 정권 하에서, 그리고 이후 독립 정당을 금지한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가톨릭 정당의 정치 활동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현재의 ''가톨릭 행동''은 1867년 마리오 파니와 조반니 아쿠아데르니가 ''이탈리아 가톨릭 청년회''(Società della Gioventù Cattolica Italianaita)라는 이름으로 설립했으며, 이후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4개 부문으로 개편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Catholic Action and Politics The Merlin Press 1960
[2] 웹사이트 A ZENIT DAILY DISPATCH: World Movement of Christian Workers https://www.ewtn.com[...] ZENIT International News Agency 2022-08-19
[3] 웹사이트 A return to Catholic Action https://uscatholic.o[...] 2022-08-19
[4] 웹사이트 Canon Joseph Cardijn - CatholicAuthors.com http://www.catholica[...] 2022-08-19
[5] 간행물 Religion: Jocism https://web.archive.[...] 2013-03-02
[6] 간행물 Ecclesiam Suam https://www.vatican.[...] 2024-10-04
[7] 서적 The Emergence of SIGNIS Brussels 2009
[8] 논문 Catholic Thought and Catholic Action: Dr Paddy Ryan Msc. http://web.maths.uns[...] 1996
[9] 논문 From Catholic Action to Liberation Theology: The Historical Process of the Laity in Latin America in the Twentieth Century 1985
[10] 서적 The Church and politics in Chile: challenges to modern Catholicism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
[11] 간행물 Custodi di quella fede http://www.ewtn.com/[...]
[12] 서적 Catholic Action in Italy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7
[13] 논문 Italian Youth in Conflict: Catholic Action and Fascist Italy, 1929-1931. https://www.jstor.or[...] 1982
[14] 웹사이트 Home http://www.accioncat[...]
[15] 서적 The Catholic church and politics in Brazil, 1916-1985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6
[16] 논문 Radical Catholicism and Fascism in Croatia, 1918–1945 1. 2007
[17] 웹사이트 Home http://www.accioncat[...]
[18] 웹사이트 Home http://www.accioncat[...]
[19] 서적 Women in Contemporary Spain https://archive.org/[...]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7
[20] 서적 한국전쟁과 한국사회변동 풀빛
[21] 서적 종교학대사전
[22] 논문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세력-우파와 가톨릭교회
[23] 서적 한국천주교의 역사사회학 한신대학교 출판부
[24] 서적 한국천주교의역사사회학 한신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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