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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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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시마 사건은 1970년 11월 25일,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와 그의 사병 조직 '방패회' 회원들이 일본 자위대 동부방면총감부를 점거하고 총감을 인질로 잡은 사건이다. 미시마는 자위대원들에게 헌법 개정을 통한 국군화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으나 실패하자 할복 자결했다. 이 사건은 전후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미시마의 사상과 행동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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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사건
사건 개요
명칭미시마 사건
발생 장소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이치가야혼무라초 1번지 육상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
위도35도 41분 34초
경도139도 43분 43초
발생 날짜1970년 11월 25일 (수요일)
시작 시간오전 10시 58분경
종료 시간오후 0시 20분경
시간대JST (UTC+9)
개요미시마 유키오, 모리타 마사카쓰 외 민병 조직 "방패회" 멤버 5명이 이치가야 주둔지 내 동부방면총감부를 방문하여 마스다 가네토시 총감을 구속. 막료들을 베고, 미시마가 발코니에서 자위관들에게 결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낭독한 후, 총감실에서 미시마와 모리타가 할복 자결한 쿠데타 미수 사건.
사용 무기일본도, 단도, 특수경봉
사망자2명 (미시마 유키오, 모리타 마사카쓰)
부상자8명 (막료, 자위관)
피해자동부방면총감, 막료, 자위관
범인방패회 멤버 5명 (미시마 유키오, 모리타 마사카쓰, 오가 마사요시, 오가와 마사히로, 고가 히로야스)
처벌징역 4년의 실형 판결 (감금치상,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 상해, 직무강요, 촉탁살인)
지도 정보
사건 관련 사진
발코니에서 연설하는 미시마 유키오
발코니에서 연설하는 미시마 유키오

2. 사건의 배경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는 사병 조직 '방패회' 조직원 4명과 함께 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에 방문했다. 총장과의 면담을 명분으로 방문한 미시마는 일본도를 보이며 칼을 칼집에 넣는 것을 신호로 행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총감실 문을 잠그고 총감을 묶은 뒤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참모들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했다.[27]

미시마는 11시 30분부터 13시 10분까지 약 두 시간 동안 대원들에게 연설할 것과, 이 시간 동안 방해가 있으면 총감을 죽이고 자결하겠다고 요구했다. 참모들은 요구를 수용했고, 경시청은 미시마 일행 전원 구속을 명령했다. 미시마가 연단에 섰을 때는 사이렌, 기자, 자위대원, 헬리콥터 소리로 혼란스러웠다.[27]

미시마는 '칠생보국(七生報國)' 머리띠를 두르고 발코니에 서서 연설했다. 그는 평화헌법 하에서 자위대가 미국 군대밖에 되지 못한다며, 자위대가 궐기하여 헌법을 뒤엎고 국군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자위대원들은 야유와 조롱을 보냈고, 미시마는 "천황폐하만세"를 삼창한 뒤 총감실로 돌아갔다.[27]

총감실로 돌아온 미시마는 총감에게 개인적 원망은 없고 천황께 보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 뒤 할복 자결했다. 모리타 역시 그를 따라 자결했다.[27]

2. 1. 미시마 유키오의 사상과 활동

미시마 유키오는 일본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미학을 옹호하며, 전후 민주주의와 서구화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27] 그는 문학 작품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는 동시에, '방패회'라는 사병 조직을 결성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실천적인 활동도 병행했다.[14] 1960년대 후반부터 자위대 체험 입대를 통해 자위대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자위대의 궐기를 통한 헌법 개정을 목표로 삼았다.[23]

2. 2. 전후 일본 사회의 상황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후, 일본은 미국의 점령 하에 평화 헌법을 채택하고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하였다. 1960년대에는 경제 성장과 함께 사회적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전통적인 가치관과 현대 사회 사이의 갈등이 깊어졌다.

이 시기에는 안보 투쟁, 학생 운동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운동들은 정치적, 이념적 대립을 격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2. 3. 자위대의 위상과 역할

自衛隊일본어일본국 헌법 제9조에 따라 군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국방의 주체로서의 역할도 제한되었다.[10] 이러한 상황은 자위대 내부의 불만과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으며, 일부는 미시마의 사상에 공감하기도 했다.[10] K하사(원전에서도 익명)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3. 사건의 경과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는 사병 조직 '방패회' 조직원 4명과 함께 총장 면담을 명분으로 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를 방문, 총감실에서 소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자위대원들에게 약 2시간 동안 연설을 요구하며, 불응 시 총감을 살해하고 자결하겠다고 위협했다. 참모들은 요구를 수용했고, 경시청은 미시마 일행 체포를 명령했다. 미시마가 연단에 섰을 때는 경찰차 사이렌, 언론사 헬리콥터 등 소음으로 혼란스러웠다.

이마에 '칠생보국(七生報國)' 머리띠를 두른 미시마는 발코니에서 연설했다. 그는 평화헌법 때문에 자위대가 미국 군대일 뿐이며, 자위대가 궐기하여 헌법을 뒤엎고 국군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위대원들은 야유와 조롱을 보냈고, 미시마는 "천황폐하만세"를 삼창한 뒤 총감실로 돌아갔다.

총감실로 돌아간 미시마는 할복 자살했다. 부하 모리타 히사카쓰도 따라 자결했다. 현장에서는 사세구로 추정되는 단책이 발견되었다.

미시마의 할복은 일본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노벨 문학상 후보였던 유명 작가의 쿠데타 시도와 할복은 TV와 라디오로 속보가 전해졌고, 거리에는 호외가 배포되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방위청 장관은 미시마 행동을 비판했고, 사토 에이사쿠 수상은 "미친 짓"이라 말했다.

히라오카 아즈사(미시마 아버지)는 TV 뉴스 속보로 아들 사망 소식을 접하고 충격받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시하라 신타로 등 친분 있던 인사들도 현장을 방문했다.

경찰은 수사본부를 설치, 미시마와 모리타 시신을 부검했다. 사인은 경부 절단에 의한 사망이었다. 미시마 할복은 소장이 나올 정도로 웅장했고, 대구치가 부서지고 를 깨물 정도였다고 한다. 介錯(카이샤쿠)에 사용된 일본도는 충격으로 휘었다.

미시마 집에서는 가족과 지인에게 보낸 유서, "이루지 못한 약속―나의 속의 25년" 등 기사가 발견되었다. "한정된 생명이라면 영원히 살고 싶다. 미시마 유키오"라는 유서 같은 메모도 발견되었다.

3. 1. 총감실 점거 및 인질극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는 사병 조직 '방패회' 조직원 4명과 함께 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를 방문했다. 이들은 총장과의 면담을 명분으로 방문, 미시마와 총장이 일본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사건을 일으켰다.[7] 미시마가 칼을 칼집에 넣는 것을 신호로 조직원들은 총감실 문을 잠그고 총감을 묶었다.[8] 총감은 처음에는 장난으로 생각했으나, 미시마의 진지한 모습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12]

이들은 총감실 출입구를 막고 바리케이드를 설치, 자위대원들에게 연설 시간을 요구했다. 요구사항은 11시 30분부터 13시 10분까지 약 2시간 동안 연설을 허용하고, 그동안 방해하면 총감을 죽이고 자결하겠다는 것이었다.[8] 참모들은 요구를 수용했고, 경시청은 사건을 보고받고 미시마 일행 체포를 명령했다. 미시마가 연설할 당시, 경찰차 사이렌, 언론사 헬리콥터 소리 등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18]

3. 2. 연설과 자위대의 반응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는 이치가야 주둔지 발코니에서 자위대원 약 1,000명을 모아놓고 궐기를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에서 자위대가 평화 헌법에 의해 미국군대로 전락했으며, 헌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영원히 구제받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시마는 자위대가 궐기하여 헌법을 뒤엎고 국군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호소했다.[12]

그러나 미시마의 연설은 자위대원들에게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 경찰차의 사이렌과 언론사 헬리콥터의 소음 속에서, 자위대원들은 야유와 조롱을 퍼부었다. 이에 미시마는 "이제 제군들이 헌법개정을 위해 들고 일어나지 않겠다는 것을 충분히 알겠다"며 연설을 중단하고, "천황폐하만세"를 삼창한 뒤 총감실로 돌아갔다.[12]

총감실로 돌아온 미시마는 "20분 정도 밖에 이야기 하지 못했구나. 저것은 들리지도 않았다"고 중얼거렸다. 그는 총감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으며, 천황께 보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12]

3. 3. 할복 자결

총감실로 돌아온 미시마는 "20분 정도밖에 이야기하지 못했구나. 저것은 들리지도 않았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총감에게 "총감에 대한 개인적인 원망은 없습니다. 천황께 보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라고 말한 뒤 제복 단추를 풀어내리기 시작했다.[18]

총감으로부터 약 3미터 떨어진 곳의 레드 카펫 위에서 자세를 취한 미시마는 단도를 들고 자신의 배를 갈랐다. 이윽고 부하인 모리타 히사카쓰가 그를 따라 자결했다.[18]

현장에서 압수한 물품에는 사세구로 보이는 단책 6매가 있었다. 미시마는 다음과 같은 2구를 썼다.[18]

4. 사건의 영향과 평가

미시마 유키오할복 자살은 일본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던 저명한 작가의 쿠데타 선동과 할복 자결이라는 소식은 즉시 TV와 라디오를 통해 속보로 전해졌고, 거리에는 호외가 배포되었다.[11][18][22][41] 방송은 긴급 특별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었고, 문화인 등 전문가들이 전화 토론을 벌였다.[42]

나카소네 야스히로 방위청 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 사건을 "매우 유감스러운 사태"라고 언급하며, 미시마의 행동을 "민주적 질서를 파괴하는 듯한 사태"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사토 에이사쿠 수상 역시 "완전히 미친 짓"이라고 언급하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43][13][42][44] 그러나 한 영국 기자는 "미시마를 변호한 정치인이 왜 한 명도 없었는가. 이제야 미시마가 위대하게 보이고, 일본 정치인들이 보잘것없어 보인다"라고 비판했다.[46]

도쿄 대학 전공투는 고마바 캠퍼스에 "미시마 유키오 추도" 현수막을 내걸었고, 교토 대학 등에서도 추모 현수막이 걸렸다.[18][58] 타키다 슈는 "우리 좌익의 사상적 패배"라고 언급하며, 신좌익 측에도 미시마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18][58] 신좌익 간부는 미시마와 자신들의 차이점을 강조하며 "삶의 철학"을 내세웠지만,[18] 미시마 사건을 계기로 신우익으로 전향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71]

사고야 루유는 미시마와 방패회의 행동을 "의거"로 평가하며, "일본 국민의 눈이 뜨이고 일본 혁신 운동의 돌파구가 열린 것 같다"고 논평했다.[72] 대일본생산당은 미시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책임이 정부와 자민당에 있다고 비판했다.[74]

주요 신문들은 대체로 미시마의 행동을 광기 어린 폭주로 규정하고, 반민주적인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는 논조를 보였다.[18][41][42] 아사히 신문은 미시마의 행동이 "정치적 사고보다는 강렬하고 특이한 미의식"에 지배된 것이라며, 그의 철학을 이해하더라도 행동은 용납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67] 마이니치 신문은 "광기의 소행"이라며, 사상의 순수성과 관계없이 반민주적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68]

해외 언론의 반응은 다양했다. 미국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미시마의 자결을 일본 군국주의 부활의 조짐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 의미는 중대하다고 논평했다.[69]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미시마의 모범이 일본 젊은이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측했다.[69] 독일의 디 벨트는 "시인 정신의 순수성에 순응하여 할복했다"고 보도했고,[69] 프랑스의 르 몽드는 미시마의 자결이 위선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라고 논했다.[69]

4. 1. 일본 사회에 미친 충격

1970년 11월 25일에 일어난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사건은 전후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의 극단적인 행동은 사회적으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11][18][22][41]

미시마는 자위대원들에게 일본국 헌법 개정을 촉구하며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선동했지만, 자위대원들은 야유를 보내며 그의 연설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7][10][23]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드러냈다.

주요 신문들은 미시마의 행동을 광기 어린 폭주로 규정하고, 반민주적인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는 논조를 보였다.[18][41][42] 외신들은 일본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지만, 미시마의 행동을 단순한 광기로 치부하지 않고 그 의미를 숙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69]

미시마 사건은 자위대의 존재와 역할, 그리고 평화 헌법에 대한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사건 이후 자위대원의 복무 선서문에 "일본국 헌법 및 법령을 준수하고"라는 문구가 추가되기도 했다.[37]

일부 신좌익 활동가들은 미시마의 행동에 충격을 받고 그의 죽음에 대해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18][58] 이 사건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일본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와 평화 헌법에 대한 논쟁을 재점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4. 2. 정치적, 사상적 논쟁

미시마 유키오의 행동은 극우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비판받기도 했지만, 그의 사상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사건은 일본의 헌법개정 논의와 자위대의 역할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18][41][42]

주요 신문들은 대체로 미시마의 행동을 광기 어린 폭주로 규정하고, 반민주적인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는 논조를 보였다.[18][41][42] 아사히 신문은 미시마의 행동이 "정치적 사고보다는 강렬하고 특이한 미의식"에 지배된 것이라며, 그의 철학을 이해하더라도 행동은 용납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67] 마이니치 신문은 "광기의 소행"이라며, 사상의 순수성과 관계없이 반민주적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68]

해외 언론의 반응은 다양했다. 미국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미시마의 자결을 일본 군국주의 부활의 조짐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 의미는 중대하다고 논평했다.[69]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미시마의 모범이 일본 젊은이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측했다.[69] 독일의 디 벨트는 "시인 정신의 순수성에 순응하여 할복했다"고 보도했고,[69] 프랑스의 르 몽드는 미시마의 자결이 위선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라고 논했다.[69]

당시 미국에서는 미시마의 행동을 "광기"로 조롱하거나 심리적 이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70] 이는 자살을 죄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와 심리 분석을 중시하는 학계의 영향으로 보인다.

한편, 동경대학 전공투와 교토대학 등 일부 학생들은 미시마를 추모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18][58] 교토대학 팔치잔 지휘자 타키다 슈는 미시마의 행동을 "좌익의 사상적 패배"라고 인정하며, 신좌익 진영에도 미시마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18][58]

신좌익 내부에서는 미시마와의 차이점을 강조하며, "삶의 철학"을 내세우는 입장이 있었다.[18] 그러나 미시마 사건을 계기로 신우익으로 전향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71]

우익 진영에서는 미시마의 행동을 "의거"로 칭송하며, 일본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72] 대일본생산당은 미시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책임이 정부와 자민당에 있다고 비판했다.[74]

4. 3. 문학적 평가

미시마 유키오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될 만큼 다방면에서 문학적 재능을 보였으나,[11][18][22][41] 그의 정치적 행동과는 별개로 문학적 업적을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45] 그의 작품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으며,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도 계속되고 있다.[45]

5. 미시마 사건과 관련된 인물

미시마 유키오방패회라는 사병 조직을 이끌었는데, 주요 조직원으로 모리타 히사카쓰(학생장), 오가 마사요시(小賀正義), 오가와 마사히로(小川正義), 고가 히로야스(古賀浩靖) 등이 있었다. 이들은 미시마와 함께 자위대 총감부를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였다.[36]

마스다 가네토시 육장은 당시 동부방면총감으로, 미시마 일당에게 인질로 잡혔다. 원래 구속 대상은 32연대장 미야타 도모유키였으나, 사건 당시 부재중이었다.[8]

사건 당시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방위청 장관이었고, 사토 에이사쿠수상이었다. 두 사람 모두 미시마의 행동을 강하게 비판했다.[43][13][42][44]

가와바타 야스나리미시마 유키오와 친분이 있던 소설가로, 사건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왔으나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다.[50]

5. 1. 미시마 유키오

三島 由紀夫|미시마 유키오일본어는 일본의 소설가, 극작가, 정치 운동가였다.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는 사병 조직 '방패회' 조직원 4명과 함께 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에 방문했다. 이들은 총감을 묶고 바리케이트를 설치한 뒤, 자위대원들에게 헌법 개정을 위한 궐기를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12]

그러나 자위대원들의 반응은 싸늘한 야유와 조롱뿐이었고, 미시마는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한 뒤 총감실로 돌아가 일본도로 할복 자결했다. 그의 부하인 모리타 히쓰카쓰도 그를 따라 자결했다.[12]

현장에서는 사세구로 보이는 단책 6매가 발견되었는데, 미시마는 다음과 같은 2구를 남겼다.[12]

5. 2. 모리타 히사카쓰

森田 必勝|모리타 히사카쓰일본어는 '방패회'의 학생장으로, 미시마 유키오와 함께 자위대 궐기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결 후, 그의 介錯(할복하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목을 베는 행위)를 실행하고 자신도 자결했다.[4][8]

미시마는 할복 직전 총감에게 "총감에 대한 개인적인 원망은 없습니다. 천황께 보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8]

부검 결과, 모리타의 사인은 "경부 절단에 의한 사망"으로 밝혀졌다. 제3경추와 제4경추 사이를 한 번에 베였으며, 복부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으로 난 상처가 있었다. 오른쪽 어깨에는 0.5센티미터의 작은 상처가 있었다. 키는 167센티미터였고, 젊고 아름다운 몸이었다고 기록되었다.[13][36][58]

5. 3. 방패회 회원들

오가 마사요시(小賀正義), 오가와 마사히로(小川正義), 고가 히로야스(古賀浩靖)는 미시마 사건 당일 미시마 유키오와 함께 행동했다.[36] 미시마는 이들에게 각각 '명령서'와 변호사 비용으로 현금 3만 엔, 특수 경찰봉 1개, 등산용 나이프를 지참시켰다.[36] 오가에게 보낸 명령서에는 미시마 유키오 자신의 자결은 물론, 모리타 히스카츠의 자결은 청년의 기개를 보여주는, 귀신도 울릴 엄격한 행위이므로 그의 정신을 후세에 널리 알리라고 쓰여 있었다.[62]

이들 3명은 교사 살인, 불법 감금, 상해, 폭행, 건조물 침입, 총포도검화약류등안전관리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송치되었고,[4][55] 이후 교사 살인, 상해, 감금치상, 폭행, 직무강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55]

5. 4. 자위대 관계자

마스다 가네토시 육장은 당시 동부방면총감으로, 미시마 일당에게 인질로 잡혔다.[8] 미시마는 마스다 총감에게 일본도 ‘관손록’을 보여주며 자세히 살펴볼 것을 권유했고, 총감이 칼을 살펴보는 사이 미시마 일당은 총감실을 점거하고 총감을 묶었다.[8] 총감은 처음에는 장난으로 여겼으나, 미시마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12] 인질극 이후, 마스다 총감은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55]

미시마의 원래 구속 대상은 32연대장 미야타 도모유키였으나, 사건 당시 부재중이었다.

5. 5. 기타 인물


  • 나카소네 야스히로 : 당시 방위청 장관이었다. 미시마 사건을 "매우 유감스러운 사태"라고 말하며, 미시마의 행동을 "매우 괘씸하다", "민주적 질서를 파괴하는 듯한 사태에 대해서는 철저히 규탄해야 한다"고 비판했다.[43][13][42][44] 이후 『나의 이력서』에서 "나는 이것은 미학적인 사건도 예술적인 순교도 아니고, 시대에 대한 분노의 죽음이며, 사상적인 간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채근담에 있는 바와 같이 '조수는 엄명할지라도 격렬하지 말라'이며, 개인적인 감회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라고 적고 있다.[48]
  • 사토 에이사쿠 : 당시 수상이었다. 미시마의 행동을 "완전히 미친 것밖에 생각할 수 없다. 상식을 벗어났다"고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43][13][42][44] 사건 당일 일기에 "(사건을 일으킨) 이 무리는 타테노카이 미시마 유키오 등이라고 들어 놀랄 뿐이다. 미친 것밖에 생각할 수 없다. 자세한 보고를 받고서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일투성이다. (중략) 훌륭한 죽음이지만, 장소와 방법은 용서할 수 없다. 아까운 사람이지만, 폭력은 무엇보다 용서할 수 없다"라며 당황하고 있는 뜻을 적어 놓았다.[47]
  • 가와바타 야스나리 : 미시마 유키오와 친분이 있던 소설가였다. 사건 직후, 총감부로 달려왔지만, 경찰의 현장 조사 중이라 총감실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50] 멍하니 초췌한 모습으로 보도진에게 "그저 놀랄 따름입니다. 이런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아까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51]

6. 한국의 관점과 미시마 사건

한국에서는 미시마 유키오의 극우적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적 성향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강하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경험했기 때문에 일본의 군국주의가 다시 부활하는 것에 대해 매우 경계하고 있다. 미시마의 문학적 업적은 인정하지만, 그의 정치적 행동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입장이다.[18][41][42][67][68]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미시마의 극우적 사상은 비판의 대상이며, 그의 행동은 일본 사회의 극단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진다.

7. 미시마 사건 관련 자료 및 연구

미시마 유키오 사건과 관련된 서적으로는 『미시마 유키오 전집』(신초샤), 『미시마 유키오 사전』(지큐샤), 『미시마 유키오 연구』(후유샤), 야마구치 이즈미의 『미시마 사건과 일본 사회』 등이 있다. 미시마 유키오의 저작으로는 문화방위론, 행동학 입문, 젊은 사무라이를 위하여, 반혁명 선언, 나 속의 25년 등이 있다.

7. 1. 미시마 유키오의 저작

미시마 유키오는 다양한 장르의 문학 작품을 남겼다.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 '''문화방위론'''
  • '''행동학 입문'''
  • '''젊은 사무라이를 위하여'''
  • '''반혁명 선언'''
  • '''나 속의 25년'''

7. 2. 미시마 사건 관련 서적

미시마 유키오 사건을 소재로 한 서적으로는 『미시마 유키오 전집』(신초샤), 『미시마 유키오 사전』(지큐샤), 『미시마 유키오 연구』(후유샤), 야마구치 이즈미의 『미시마 사건과 일본 사회』 등이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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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二十一世紀の三島――序に代え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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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간행물 文体と肉体
[271] 간행물 三島由紀夫の百年・断章
[272] 간행물 死後二十年・私的回想――いよいよその『不在』が輝く
[273] 간행물 エピローグ“増殖”する三島由紀夫
[274] 간행물 終章 欲動の完結――三 終らない三島由紀夫【事件後】
[275] 간행물 三島由紀夫不在の三十年
[276] 서적 新潮社 1976-04
[277] 간행물 三島事件
[278] 간행물 かなたへの疾走
[279] 뉴스 三島由紀夫 自決9カ月前の肉声…TBSに録音テープ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7-01-12
[280] 뉴스 三島由紀夫「平和憲法は偽善。憲法は、日本人に死ねと言っている」TBSが未公開テープの一部を公開・放送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2017-01-12
[281] 간행물 新発見 自決九ヵ月前の未公開インタビュー――三島由紀夫 素顔の告白
[282] 간행물 三島由紀夫未公開インタビュー
[283] 간행물 三島由紀夫未公開インタビュー――マスコミと三島
[284] 간행물 解題――楯の会会員
[285] 간행물 第三章 昭和45年11月25日
[286] 간행물 楯の会会員たりし諸君へ
[287] 간행물 三島由紀夫 最後の言葉 筑摩書房 1970-12-12, 1971-01-01
[288] 간행물 私は『死』を打ち明けられていた 1970-12-11
[289] 간행물 第四章 その時、そしてこれから――一期 伊藤邦典
[290] 간행물 第五章 辞世――三島由紀夫は何を遺したか【美学を通した切腹と介錯の作法】
[291] 간행물 第四章 真犯人の告白【三島由紀夫の割腹】【滝谷の告白】【再審へ】」「第五章 逆転する運命【完全勝利】
[292] 간행물 消された歴史の舞台――『戦後』に殉じた『最後の文士』【三島は凄い、死んじゃうんだもんな】
[293] 간행물 終章 吉田松陰と三島由紀夫 『戦いはただ一回であるべき』
[294] 간행물 追悼・高倉健 幻となった三島由紀夫映画
[295] 간행물 ロシアの作家ミシンカ
[296] 간행물 三島由紀夫 関連年表
[297] 간행물 三島由紀夫と楯の会 年譜
[298] 간행물 三島由紀夫年譜
[299] 간행물 日誌一
[300] 간행물 戦後右翼史年表――1958年 – 1975年
[301] 간행물 第六章 小説に描かれた三島由紀夫――蠱惑する文学と生涯
[302] 간행물 解説――加賀乙彦の大きな『反証言』
[303] 간행물 虹の門
[304] 간행물
[305] 간행물
[306] 간행물 厳喜の誹諧・徘徊(八十五)
[307] 간행물
[308] 웹사이트 森村泰昌 「美の教室-静聴せよ」展 https://www.tokyoart[...] 2007-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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